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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로드 .[THE SILK ROAD ]
    역사이해 < 감상문 >[ THE SILK ROAD ]교재부분 : 1부 중국문명의 형성과 발전- 제4장 진한통일제국의 출현과 발전북경. 천진. 위해. 석도. 청도. 상해. 항주. 소주 .무석. 남경. 홍콩. 해남도.나의 짧은 중국어로 그동안 여행해본 곳들이다. 2000년 역사를 가진 古都서안과, 역사속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 우루무치 여행, 칭장열차타고 여행은 내가 중국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중국어를 배우게 된 2002년부터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 이번 수업을 통해 2000년간 신비를 간직한 진시황릉, 병마용발굴현장 서안(西安)을 시작으로 한무제 때 시작된 실크로드 탐방을 실행하리라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그래서 교재 제 4장 에서 특히 부분을 초점을 맞춰 읽게 되었다.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한다. 실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요컨대, 실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 가는 이음길로 본다.과연, 황량한 사막에 동서로 난 이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문명교류의 통로로 이렇게 큰 역사적 큰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싶어 졌다. 당시 실크로드를 개척한 사회적 배경과, 실크로드의 구체적 모습, 실크로드의 역사적 의의를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1, 장건. 무엇 때문에 서역으로 길을 떠났을까- 흉노견제를 목적으로 시작된 비단길.한나라가 서역을 개척한 것은 흉노와의 대립 때문이었다. 서역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철저히 무찌르기 위한 것으로, 한나라 무제때 장건은 두번 서역으로 나갔다. 첫번째는 한나라와 대월씨(大月氏, 현재 아무르강 유역, 아프가니스탄 북쪽)와 연합하여 흉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오손(烏孫, 현재 신강 이리하와 이색극호일대)과 연맹하여 흉노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출사의 목적이 모두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려는” 것 이었다.2. 장건의 파란만장한 서역개척기 - 비단길을 열다.그의 서역개척기를 보면, 장건은 중국의 콜럼버스같다.건원 2년(기원전139년) 장 아내를 맞아 자식을 낳고 완전히 흉노가 된 것처럼 하여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탈출하였다.원수元狩4년에(119년)는 장건이 무제에게 서역 각국과 공식관계수립을 건의하였고,무제의 명을 받들어 오손으로 두번째 탐험을 나갔다. 그의 일행 300여명은 서역 각국에 줄 예물로 소,양,황금 비단 들을 가지고 갔다. 장건은 오손, 대완大宛(현재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강거康居 대하大夏(현재 아무다리야 강) 등과 외교관계를 성공적으로 체결하였고, 서역을 개척하는 대역사를 완성하였다.기원전126년 장건은 무려 13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왔고, 무제에게 올린 보고에 자세히 각국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 당시 중앙아시아를 이해하는데 진귀한 자료가 된 것이다. 장건의 역할은 흉노토벌에만 그치지 않고 그의 서역 여행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문물이 전해졌고 이후 한나라와 서역의 교류가 빈번해저 실크로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현재 우리는 을 통해서 당시의 성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3. 왜 SILK ROAD인가? - 오아시스를 잇는 세갈래 길 이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877년 출간한 에서 처음 등장하였고 영어로는 ‘THE SILK ROAD’라고 하였다. 1910년 독일의 역사학자 헤르만은 이라는 책에서 비단길을 지중해 서쪽 해안까지 연장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외국 탐험가들은 중국의 서북 지역에서 비단길과 관련된 대량의 유물, 유적들을 발견하였고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학문영역이 되었다.당시 한나라의 길쌈하는 농가에서는 가내수공업으로 베,건면을 생산하는 방직업이 발전하였다. 중국은 ‘비단의 나라’로 많은 비단제품이 생산된 것이다. 국내에서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흉노, 서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가는 상업로는 비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서역전’을 보면 서역 남북도는 둔황 서쪽의 옥문관, 양관을 지나 갈라졌다.선선鄯善 으는 길을 남도南道라고 불렀다. 남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로마에 이르렀다.다른 하나는 北山(현재의 천산)남쪽 기슭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대완,강서,엄채 등에 이르는 것으로 北道라고 불렀다. 북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로마에 이르렀다.이 남쪽과 북쪽의 두 무역로는 당시 중국과 중아아시아,서남아시아 사이의 경제 교류 대동맥이었고, 서쪽으로 운반된 화물이 주로 비단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로 불리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 사람들은 한나라의 비단을 진귀한 물품으로 여겼고 “동방의 비단의 나라”에 대해 동경과 꿈을 품었다.< 중국 내륙과 변방을 잇는 3대 관문 양관陽關, 옥문관(玉門關), 가욕관嘉輍關은 모두 둔황 부근에 있다. 한대에 둔황의 외곽 거점으로 옥문관과 양관이 설치된 이래 두 관은 국경과 이별의 상징이 되어 이별곡을 양관곡陽關曲이라 부르기도 했다.(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톈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쪽 관문이고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도쪽 관문이다. 서역에서 나는 아름다운 옥이 이곳을 지나 중원으로 들어와 玉門關이란 이름을 얻었다.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만 해도 옥문관은 ‘군영이 즐비하고 거마가 폭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당대에 이르러 원정 나간 님에게 전하는 ‘따뜻한 봄바람마저도 넘지 못하는 황막한 관문’(春風不度玉門關)으로 변해버렸다.더욱이 옥문관을 지나면 ‘악마의 늪’이라는 죽음의 사막 ‘백룡퇴(白龍堆)’가 펼쳐진다. 400년 인도를 향해 떠난 동진의 고승 법현은 이곳을 지나면서 느낀 바를 〈불국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양관(陽關) 황량한 사막에서 옥문관까지 이어지는 경계선이 진정한 한나라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의 서쪽 영역을 흔히 '서역'이라 이른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마저 살아서 건넌가 떠오른다.渭城朝雨浥輕塵 위성 아침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우니客舍靑靑柳色新 객사에 푸릇푸릇 버드나무빛 싱그럽다勸君更盡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술 한잔 다 마시게西出陽關無故人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가 없으리니5. 실크로드의 역사적 의의 -–동서 문화 교류의 길을 연 지리상의 대발견!서양학자 허드슨은 제 3장(비단무역)에서 비단교역은 고대 큰 영향을 주는 대규모 상업이었고 로마 상류사회에서 비단을 소유하는 것은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고 말한다. 한나라의 비단수출은 대회무역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거쳐 로마제국으로 운반되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의 의원과 귀족의 부인들은 비단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고, 로마의 철제품,유리,금은,석류,포도 등은 서쪽에서 동쪽의 한나라로 들어왔다 당시 비단무역은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구대륙 전체를 뛰어넘어 하나의 공동 경제연합을 형성한 것이다.비단길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비단이 처음 그 길을 따라 지중해의 서양세계로 운반되어 붙여진 것이지만 더 중요한 공헌은 바로 동서문화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동서문화교류의 가장 뚜렷한 사례는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이 비단길을 따라 근동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전례된 것이다. 그 뒤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도 비단길을 따라 전파되었고 불교, 이스람교, 기독교 가 중국으로 들어왔다. 서양에서 들어온 회화와 조각 악기와 춤 특히 인도불교는 중국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비단길은 세계역사와 문명을 바꾼 중요한 교통로로 지리상의 대발견인 것이다.중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외교는 바로 이 한 무제 때 시작으로 본다. 비단길에서 비단은 상징일뿐, 이 길을 따라 유통된 것은 최초의 交流였던 것이다. 적어도 근동.중동.원동을 포함한 대동방의 문화말이다.삼장법사를 수행한 손오공,저팔계. 사오정 등의 모험담이 담긴는 허구가 아니라 당나라 시대 실재 인도에 불경을 구하러 갔던 삼장법사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그가 거쳐갔던 길이 바로 실크로드 였다. 인도에서 였다. 동방견문록책에는 몽공제국시대 이란, 중앙아시아 각지의 풍속,관습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중국 각지의 정치.문화,풍속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6. 실크로드의 끝은 한반도 였다!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실크로드를 유럽으로부터 중국까지의 길로 한정시켜 왔다. 즉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 및 해로는 각기 유럽에서 시발해 중국의 화북(초원로)과 장안(현재의 서안, 육로), 동남해안(해로)에서 멎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수일교수의 글에서는 해로와 육로의 유물발굴을 통해 실크로드가 한반도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서구문명 중심주의적 발상대로라면 우리는 실크로드와 무관하다는 것인데, 정수일교수는 화폐 명도전 유물출토지를 연결한 “명도전路” 를 증거로 육로실크로드는 연장되어야 한다며 기존입장을 반박하고 있다.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선상에서 다음으로 제기되는 것은 중국 동남해안과의 해로 이음이다. 고대 한·중 해로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 상호관계의 변화에 따라 실크로드 해로의 동단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려 떠난 도사 서복(徐福) 선단도 이 연해로를 따라 제주도까지 왔으며, 한무제는 7천명 수군을 이 해로에 투입시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한 바 있다. 수·당대 몇 차례의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수군의 도항로도 바로 이 연해로였다.韓·中간에 개척된 연해로와 횡단로를 따라 두 나라간에 사신과 승려들이 오가고, 물품이 교역되었으며,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서역과 남방의 문물이 이 두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며, 이웃인 일본은 이 길을 거쳐서야 중국과 통교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이 바닷길이야말로 한·중 두 나라간의 교류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실크로드 해로 동단으로서의 기능과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실증해준다.이처럼 세계로 가는 이음길이자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장하는 것은 단순히 묻혀버렸던 옛길을 파헤치는 작업이 아니라,
    인문/어학| 2008.10.15| 4페이지| 1,000원| 조회(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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