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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백년전쟁 평가B괜찮아요
    백년전쟁 전의 유럽(영국과 프랑스)14세기에 매우 급작스럽게 유럽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 어떠한 사람들은 1300년 이후 시작된 간헐적인 국지적 기근 때문에 사망했다. 그러나 크게 사람을 죽인 것은 1348년 처음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Black Death)이었다. 이 전염병이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간격으로 되풀이되고 노인과 아울러 청년들을 멸절시켰기 때문에, 이 병은 결혼과 가정생활을 파괴하고 수년간 유럽이 이전의 인구수준을 회복할 수 없게 하였다. 경작지들은 그것을 경작하려는 강건한 남녀가 부족하여 내버려졌다. 도시인들은 취약했다. 왜냐하면 이 전염병의 세균은 쥐에 의하여 옮겨졌기 때문이다. 무역과 거래는 차단되었다. 물가·임금과 수입은 불규칙하게 변동했으며, 기근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더욱 질병에 걸리게 하였고 이 전명병에서 오는 사망이 또한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 생활은 사망자의 매장과 그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념이 없었다.왕권 강화와 근대적 성격의 국민 국가의 형성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프랑스였다. 987년 카롤링 왕조 왕통이 끊어지고 위그 까페(Hugues Capet)가 왕위에 올라 까페 왕조(987-1328)를 열었을 때 파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영지는 다른 제후들의 영지보다도 작았다. 그리고 왕권은 그들의 가신들로부터 군역이나 공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였으며, 왕권이 미친 곳은 겨우 파리 부근에 불과하였다. 당시 국왕은 제후들 중의 제1인자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왕국은 국왕과 제후들간의 인적인 결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었을 뿐 실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세습제에 의한 왕위의 계승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후일의 왕권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그 이후 까페 왕조의 왕들은 작은 영토들을 합병함으로써 귀족들에 대항하여 왕권을 꾸준히 확장해 나갔다. 특히 12세기 말, 13세기 초부터 까페 왕조는 봉건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영역적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이 후기 까페 왕조의 왕확대와 복잡화에 따라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국왕의 재정은 통상 왕령지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전쟁과 같은 비정상적 지출의 경우에는 다른 수단에 의한 자금 조달이 요망되었다. 전국적인 징세 기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필립 4세는 전국적인 징세 수취 기구로서 1302년 삼부회를 창설하였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시민의 세 신분이 각기 신분별로 국왕에 의해 소집되었는데, 그것의 주 기능은 국왕의 과세 요구를 승인하는 일이었다. 국왕의 삼부회에 그의 의지를 표현하고 의회의 출석자들은 그것을 출신지에 전하여 과세가 이루어졌다.필립 4세가 삼부회를 창설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와 생사를 건 투쟁에서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한 데 있었다. 1296년 그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자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그것을 비난하는 교서를 내렸으며, 필립 4세는 프랑스로부터 교황청으로의 금전 유출을 금지시켰다. 14세기초에는 프랑스 왕권에 적대 행위를 취한 주교의 제거 문제로 다시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교황이 왕권에 대한 교황의 우월을 강조하는 교서를 발표하자, 필립 4세는 프랑스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1303년 교황을 습격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주위의 압력으로 교황을 석방하였으나, 연로한 교황은 충격과 굴욕감으로 사망하였다.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원하던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새로이 선출된 교황 클레멘트 5세는 거처를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겼다. 아비뇽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그 세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교황은 프랑스 왕권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전후 70년간(1307-1376)에 걸쳐서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면서 프랑스 왕의 지배 하에 그 독립성을 상실했던 시대를 교황의 아비뇽 유수 라고 한다. 이처럼 필립 4세는 교황권에 eanne de Navarre)의 남편이며 루이 10세의 사위가 되는 필립 데브루(Philippe d'Evreux), 필립 3세의 손자인 필립 드 발로아(Philippe de Valois)의 세 사람이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선왕의 사촌에 불과한 필립 드 발로아가 프랑스 왕국에서 출생했다는 조건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삼부회는 나바르 필립과 영국인을 기피했던 것이다. 후일에 이 선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법률가들은 여자는 왕위를 계승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는 프랑크족의 고법인 살리크 법전을 원용했다. 사실은 이 살리크 법전은 구실에 불과하였고, 모두가 프랑스인 국왕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까페 직계 왕조는 끝나고 발로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에게 이 왕조의 교체는 별 소득이 없었다. 오랫동안 계승된 정치 경험을 가진 유능하고 신중한 까페 왕조는 왕권을 수립하고 꾸준히 발전시켰다. 하지만 초대 발로아 왕조의 왕인 필립 6세(Philippe Ⅵ)을 봉건적인 위신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젊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현명하게도 발로아의 왕위계승을 승인한다는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귀엔느 영지를 위하여 臣徒의 선서까지도 이행했다. 그러나 이 승인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고 이 시기가 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는 근대적 장비와 병력의 증강이었다. 프랑스의 봉건 귀족의 기마대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3세는 石弓과 射手에 의존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그는 노인과 불구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장궁 사술을 유일한 스포츠로 권장하고 40실링 이상의 수입이 있는 토지 소유자에게 활과 화살을 상비할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용병의 모집은 용이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3세는 전 유럽에서 제일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전쟁의 초기전쟁의 근본원인은 영국왕 에드워드의 욕심 때문이었다. 직접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로부터의 망명자의 반역적인 선동, 국토를 약탈할 수 있겠다는 전쟁의 매력 그리 그러나 세느강의 다리가 끊어져 포아시(Poissy)까지 되돌아 올라오게 되어 프랑스의 필립은 군대를 집결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이 들은 크리시(Crecy)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여기서 영국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의 중대한 의미는 프랑스의 가장 우수한 봉건 기사로 이루어진 기마부대가 웨일즈의 사수로 편성된 보병대에 의하여 완패했다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필립은 이 패전의 심각한 의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해에 에드워드 3세가 꺄레를 포위했을 때 프랑스 왕은 영국군에게 사자를 보내어 양군이 동등한 조건으로 싸울 장소를 정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간단히 무시하고 꺄레를 점령했다. 영국은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시대까지 꺄레를 점유하고 도버 해협의 지배를 확보하자 전 시민을 축출하고 그 대신에 영국인을 거주하게 했다.교황이 휴전 협상에 성공한 후 다시 전투가 재발했을 때 프랑스는 장 2세(Jean Ⅱ)를 맞이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는 보르도와 노르망디를 연결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랑그독을 점령하고 포아티에 방면으로 진격하여 4배의 병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기사계급은 아직도 신식 전술의 필요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다. 프랑스의 왕 자신이 포로가 되어 왕태자 샤를이 섭정되었다. 패전은 언제나 국내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원의 개발과 전비의 조달을 위하여 정부는 피치자에게 양보를 하게 되었다. 물가가 상승하여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어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리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군대에 붙어 다니는 열병, 페스트 등 전염병이 농촌을 휩쓸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폐단이 영국군에게 패한 프랑스 전국을 뒤덮게 되었다. 패전이 군주제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말았다. 1356년에 소집된 삼부회에서 왕태자는 3신분으로 구성되는 3개의 평의회의 보좌를 받아야하며 3부회가 기피하는 관리는 해직하도록 결정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개혁이었다. 이 후 3년간 전례 없이 왕의 소집 명령 없이 빈오게 마련이다. 당시 국왕의 숙부들 부르고뉴 공과 오를레앙 공이 권력을 다투게 되었다. 1404년에 필립이 사망한 후 장이 부르고뉴 공이 되었고 1407년에 그의 종형인 오를레앙 공을 암살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를 여러 차례 분열시키게 된 치열하고 무익한 색다른 내란의 막이 열리어 오를레앙당과 부르고뉴당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 내란은 국내 문제의 선을 넘게 되었다. 이렇게 대립하는 분열된 국가는 외적에게 유린된다. 1415년에 영국왕 헨리 5세(Henry Ⅴ)는 프랑스가 오를레앙당과 부르고뉴당으로 분열되어 있고 발광한 국왕의 이름으로 지지자도 없는 왕태자가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했다. 그는 플랑타주네 가의 먼 친척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왕위 청구에 해당되지 않았으나 샤를 6세의 공주 카트리느 드 프랑스와의 결혼과 婚資로서 프랑스의 풍요한 지방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가 아무리 무력했었다 해도 이러한 요구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부당한 것이었다. 또다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선대들처럼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는 견고한 방위선을 무리치고 서부의 군사 요지인 아르플루르(Harfleur)를 점령한 후 왕태자에게 도전장을 보내고 크티시의 도하점 블랑쉬 타쉬레서 솜므강을 건너 꺄레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이것은 너무나 대담한 작전이었으나 프랑스의 귀족들이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영국군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이들은 아장쿠르에서 프랑스의 귀족부대와 조우했다. 프랑스의 귀족부대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전쟁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기는 했으나 뒤 게클랭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무시하여 군대를 개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군의 사수와 화살과 무사의 장검으로 살육되었다. 1415년에 있었던 이 전투는 1만 명의 프랑스인이 전사한 중세에 있어서의 가장 처참한 전투중 하나였다. 1417년에 영국군이 노르망디로 침공하자 주민들이 프랑스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다르마니야크 원수는 부르고뉴당과 전쟁중이었으므로 이러한 여유가 없다고 거절하였다.였다.
    인문/어학| 2001.12.13| 7페이지| 1,000원| 조회(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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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역사)] [서양사 (역사)] 동구의 집시
    동구의 집시··· Gypsy1. 개 요최근 동유럽에서는 집시족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대두하고 있다. 그들은 발칸 제민족 등 민족, 종교 문제로 분리되고 독립되고 있는 나라 사이에서 소수민족으로 취급되어 보호받을 수 있는 모국의 부재로 인해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사회로부터 배척 당하고 있다. 동유럽 각 국가들의 집시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고 사회·경제적 차별이 심화되면서 집시족들이 서구국가로 대거 이주, 망명을 요청하고 있어 국제문제화 되고 있다. 과연 언제 집시들은 발칸으로 흘러 들어왔으며, 어떠한 연유에서 발칸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현재 동구제국 내에서 그들의 거주실태는 어떠한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2. 집시(Gypsy)족 기원 및 동구제국내 거주 실태먼저 집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대체로 5세기경 인도에서 기원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14세기말 회교도 침입을 피해 동구지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현재 루마니아·슬로바키아·유고 등에 약 600만명이 산재해 있다.집시라는 명칭은 이들의 뿌리가 이집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데서 온 것으로 집시보다 롬(Rom, Roma)이라는 호칭을 더 선호한다. 유럽의 제민족과 구분되는 특색은 검은 피부색과 유랑생활, 미신 중시 등 기독교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그들은 노예·천민으로 취급되어 왔고 동구 민주화 이후에도 일반국민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의 문제점은 일정한 국가형태를 이루지 않아서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아무런 국제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국 정부가 공식적인 집시 차별정책은 취하지 않으나 공공장소 출입과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우며 교육혜택도 거의 받지 못하는 등 사회의 배척으로 대부분 유랑생활이나 생계보조비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구에서 견디지 못하고 동구 각국에서 차별을 받고 있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는 등 그들의 인권에 대해서 아무런 보호조치를 못 받고 있다. 이들은 보스니아 사건 등 발칸의 소수민족 문제가 전면으로 대두되면서 사회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집시들의 폭력문제와 그로인한 그들의 해외이주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겠다.3. 발칸 집시 (Balkan Gypsies)발칸 집시들은 "롬(Rom)"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몰도바, 터키, 이란, 우크라이나 등의 동부 유럽과 서남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 살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도 있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이 나라들을 통해 퍼져 나갔고, "롬어(Romany)"라고 불리는 집시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인도의 북인도-아리안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집시들은 스스로를 롬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어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롬은 인도말 돔(Dom)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노래와 춤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따라서 롬어는 집시들이 자기들을 부르는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집시들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14세기에는 대규모의 집시 집단이 불가리아의 발칸 산맥에서 형성되었다. 일부는 계속 방랑 생활을 했고, 다른 일부는 영구적인 정착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장소에 관계없이 집시가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 집시들은 매우 신비롭고 특이한 존재였으며, 결국에는 그 호기심이 미움과 차별대우로 나타났다. 20세기에는 많은 집시들이 나찌에 의해 학살당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은 차별 받고 있다.● 통계종족명국가언어1995 인구그리스계 롬집시그리스그리스계 롬어35,500발칸집시그리스아를리자어11,900발칸집시몰도바롬어102,220발칸집시우크라이나롬어699,000롬 집시유고슬라비아신테 롬어1,000발칸집시유고슬라비아롬어120,000발칸 롬 집시이란롬어26,900발칸 롬 집시터키아를리자어55,800● 삶의 모습사람들은 보통 모든 집시들이 검은 머리와 검은 얼굴빛,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발칸 집시들 중에 밝은 피부와 금발 머리, 푸른 눈을 가진 집시들도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유럽인들과의 혼혈족이라고 여겨진다. 인도에 남아 있는 집시들과는 달리, 많은 발칸 집시들은 정착하여 생활하며, 도시 근처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포장마차, 트럭, 트레일러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집시들도 있다. 과거에 집시들에게는 개인 소유지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그들만의 직업을 나름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것에는 점술, 말의 거래, 접대, 곡예 그리고 금속이나 나무 제작업이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으며, 많은 집시들이 결혼식이나 세례식, 축제 그리고 다른 여러 모임에서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한다. 불행한 것은, 또 거지와 도둑들로도 알려져 있어서 어린 시절의 좀도둑질, 구걸, 암거래는 때때로 가족들에게 수입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평판 때문에 그들은 많은 차별을 받았으며, 한 예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그들이 직업을 구할 때 알바니아인이나 터키인의 뒤로 밀렸다. 또 여자들 중에서 일부는 가정부로 일했는데, 매우 낮은 임금을 받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오늘날, 발칸 집시와 인도 집시 사이의 주된 차이점 중의 하나는 임금 노동자이다. 많은 인도 집시들은 공장이나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거리나 철도 청소부를 하거나 상점 관리자가 되기도 하고, 정원사로 일하기도 한다. 그들이 두서너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매우 빈번히 직업을 바꾸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남자가 공장이나 기술 노동을 하는 반면, 여자들은 장사를 하거나 점장이로서 일한다. 또한 남자는 대부분 장 보는 일을 맡아서 하는 반면,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손보는 일을 한다. 시골에서 떠돌아다니는 집시들 사이에서는 남자가 가축을 돌보기도 한다.사회 통제는 집시들 사이에 매우 중요하다. 집시의 윤리규범에는 정의, 충실, 도덕성의 가치기준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엄격한 사회규범은 그들의 선조로부터 지켜져 왔던 오랜 힌두 카스트 제도와 관련이 있다. 집시의 최고 충성심은 그들의 가정에 두고 있다. 대가족 구성원들은 주로 함께 살며, 떨어져 사는 가족들은 자주 전화를 하고 서로 매일 방문한다.결혼은 때때로 부모님이 결정하는데, 젊은 연인은 보통 10대 중반이나 후반에 결혼을 한다. 종종은, 결혼 예식을 하지 않고 애인과 눈이 맞아 도망가기도 한다. 그러나 일정한 예식과 상관없이 혼전 순결은 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집시가 아닌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비록 그들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차를 타며 같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활양식의 독특성은 집시가 아닌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별이 된다. 이를테면, 집시들이 옷을 입을 때의 독특한 방식, 집이나 가게, 묘지에서 차를 사용할 때의 유별난 방법, 그리고 일을 할 때 정교한 솜씨나 별난 스타일을 가지고 하는 특별한 방법이 그들을 집시가 아닌 사람들과 구별시켜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집시들을 흥미롭고 신비로운 존재로, 또 때로는 오해받도록 만들기도 한다.● 신앙이란과 터키에 있는 발칸 집시들은 무슬림이며,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 정교이다. 그 밖의 나라에 사는 집시들의 종교는 밝혀진 것은 없지만 대부분 러시아 정교를 믿고 있다.많은 집시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과 신앙을 잘 지키고 있다. 그들은 유령, 도마뱀과 뱀이 사람을 해칠 수 있으며, 그들은 어떤 사람이 "악마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 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믿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도 믿고 있다.4. 집시 폭력 및 해외이주동구의 집시들은 동구권 각국들이 민족주의를 선언하고 독립되기 이전부터 계속되는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구권 각국들이 공산체제 안에서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고, 이데올로기로 그것이 문제화되는 것을 애초에 막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구의 각국들은 민주화 물결로 인해서 통제된 공산체제에서 민주화된 체제로 변화하였다. 동구 민주화 이후 집시에 대한 차별은 사회의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이 차별은 적대감으로 발전하여 단순한 사회·경제적 차별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차별은 단순한 폭행에서 마을 전체에 대한 방화, 살인 등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반집시 범죄는 신고 접수조차 꺼리는 등 사법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인권은 철저하게 억압받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폭력이 심해지고 있는 이유는 각국이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민족문제나 종교문제, 그리고 영토문제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각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 또는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이와같이 집시에 대한 차별·폭력이 심화되면서 집시들이 사회·복지제도가 발달한 캐나다·서구 등으로 대거 이주, 망명을 요청함에 따라 서방 각국은 동구제국과의 비자면제를 중단하고 해당국의 인권·복지정책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서구의 나라와 동구의 각국 사이에서 아무도 그들의 인권 문제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집시 문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01.11.23| 5페이지| 1,000원| 조회(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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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나치즘 (히틀러의 등장을 중심으로)
    들어가며...민족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국가 이기주나찌의 민족주의의로 흘러가기 쉽다. 역사학이 민족주의의 밑거름이 되는 반면에 지나치게 자국의 역사학을 강조하다보면 역사의 시대에서 다시는 그르칠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제의 제국주의에 의해 민족적인 수난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는 민감해져 있다. 그리고 최근 일본의 교과서 문제까지 이어져 과연 국제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애국주의의 한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찌의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럽의 다른 나라의 역사와는 아주 다른 특별한 점이 많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합하기 전까지 아니면 히틀러 시대까지 독일이라고 하는 통일성을 가진 국가를 구성한 적이 없었고 민족·언어·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였다. 민족적으로 구심점을 찾지도 못하였고 정치적으로 국가를 구성하기에는 미미한 상황에서 독일은 강력한 독일이라고 하는 국가를 구성하여야 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나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누가 그들을 지지하였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나찌의 민족주의에 대한 조사를 하다보면 그들의 반유태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의 분석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선 나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히틀러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다음으로 독일의 민족주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에서 나찌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익 세력인 나찌의 정치사적인 위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인 요인을 분석함으로써 독일 민족주의가 자라난 사회의 특수성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분류되는 나찌즘은 과연 독일 민족주의의 역사에서 사회적인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히틀러 자신의 광적인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입각한 것인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의 접근을 시도하였고 반유태주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공동연구는 시작되었다.1. 히틀러 - 태사상의 뿌리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과거에도 수많은 유태인이 박해를 받아왔다. 그것이 히틀러에 의해 극대화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반유태주의를 독일의 일반 민중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던, 문화적으로 우월한 유태인에 대한 열등감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이용하였다. 나치스의 반유태주의는 현실에 대한 대중의 막연한 불만에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발산의 상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긍지가 대중을 민족으로 결속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히틀러는 대중에게 그들의 증오심이나 불만의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목표물=적을 마련해 주고, 유태인과 같이 대중을 미워하고 있는 자들의 증오에는 증오로 보답하라고 소리쳤다. 이와 같이 반유태주의가 강력하게 등장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농민과 상업인들의 경제적 불만, 귀족들의 배타성, 중세 때부터의 뿌리깊은 종교적 편견 등이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치즘이 최고의 사상적 무기로 삼았던 민족 또는 민족 공동체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던 독일인에게 '민족'처럼 내력있는 말은 없었다. 히틀러는 '민족'과 '유태인'이라는 두 개의 단어를 교묘하게 연결시켜가며 대중의 감정을 휘어잡았다.2. 독일의 민족주의의 역사초기 독일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시기에서부터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국민 운동의 절정기에 급진적인 국민적 행동 양식으로서 조직화되지 않은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프랑스의 지배 시기를 겪게 되면서부터는 독일민족의 전통적인 정치적 틀인 신성로마제국이 사라지고 이민족의 지배 하로 들어가게 된 까닭에 독일사회내부 문제 해결을 민족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데에서 찾는 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개별적인 연방국가를 넘어서서 일종의 전 독일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 실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많은 것들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세기 초의 독일민족주의는 결코 하나로 통합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두 조류로 분류할 수 있다정치의 과제가 등장하였다. 즉 베르사유의 구속과 부담으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다시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민적 사고는 민족 국민적 혹은 민족 독일적인 민족주의적 사고였다. 이는 국민이 우선 인종적으로 통합되어 있거나 인종적으로 귀속성을 정치적 공동체 형성의 근본으로 간주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공통된 국가기구가 아니라 공통된 민족성(인종)을 국가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독일 국민은 제국건설로 마침내 민족의 정치적 경계를 확실히 하였고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인종적, 영토적으로 제한시켰는데 바이마르 국민국가가 성립하자 독일 국민은 처음으로 민족개념의 공고화가 가능한 정치적 경계, 말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 국민이 독일민족 일원이라는 의미를 띠게 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이후로 민족 독일적 의미는 더욱더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독일제국 밖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급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이후 이미 적대국에서는 독일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고 결국 이는 독일제국에 대한 전쟁이 독일민족에 대한 전쟁으로 확대된 결과였다. 독일인들은 이러한 차별로 인해 연대의식을 형성하였고 새롭게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 독일적인 민족주의의 집단화는 그 시작이 독일민족의 우월성에 있었고 순수민족적 인종주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그 당시 독일의 모든 정치이념에서 민족주의란 개념을 바로 자신들의 대명사로 이용할 정도로 크게 유포되었고 다양한 계층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흐름의 하나로 보수적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이 보수적 민족주의의 내용은 독일제국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며 따라서 대개는 군주적 방향에 맞춘 것이었다. 이것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제국시대의 주역들이었던 관료, 장교, 보수적 엘리트들이었으며 강대국으로서 독일의 위치를 다시 찾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 다지도자 국가로 이행해갔다.3. 나찌의 등장의 정치적 상황1871년 최초로 국민국가를 형성한 독일은 민족·언어·문화적으로 공통점이 없어 연방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나폴레옹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국민의식의 각성으로 인해 각 지역의 군주를 중심으로 지역주의에 근거한 허술한 연방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을 한 근대적 국민국가로 엮어주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독일 민족적인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국가의 민주화라는 사고였다. 비스마르크가 부르주아 다수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국민정치적 대안을 관철시킴으로써 부르주아 다수에게는 더 이상 국민적 저항의 동기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파라고 할 수 있는 큰 줄기가 형성되는데 보수파 독일 국민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 내의 국민적 저항층을 형성하였던 노동계급과 농촌의 중산계급들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국가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를 꿈꾸는 반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로써 좌파 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우파와 좌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국민국가를 형성하게 될 당시 군주를 중심으로 연방국가의 형태를 띠었으므로 부르주아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우파 세력이 국가를 이끌어간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전쟁의 패배로 그들은 기반을 잃게 되고 좌파 세력에 국가를 넘겨주게 되었다.독일의 좌파 세력인 사회민주당(SPD)에 의해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성립 초부터 극우와 극좌세력의 대립으로 매우 불안정한 공화국이었다. 무엇보다 내부 혁명이 아닌 군부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권력을 이양하는 형태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1918년 당시에는 우익의 정치엘리트가 무력했고 혁명적인 저항운동을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SPD는 우익의 공격에 대해 공화국을 지켜야 했고 극좌 노선인 다수파 사회민주당(MSPD)의 급격한 사회주의로 단행하지 않는다는 비난 역시 감수하여야 했다. 이러한 어면서 사회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로 몰락한 중산층과 기존의 우익정당에 환멸감을 느끼고 있는 부르주아의 지지를 등에 입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독일을 한 국가로 만드는 사상의 기반이 민족주의적인 개념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의미하는 사건일 것이다. 정치사의 측면에서 보면 나찌는 우익의 세력에 기댄 극우정당 중의 하나로 독일 민족 우월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문제 및 사회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등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히틀러에게 민족적 단결과 통합은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또한, 자기 민족의 단결과 번영, 즉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민족의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자 세력을 위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부르주아의 독점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치체제 아래서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장치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노동자들과 민족 간의 관계는 약화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일반대중에게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가 아닌 또 다른 사고가 필요했었던 것이다4.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배경1) 1918년 독일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제1차세계대전이 거의 종결되어 가던 1918년 11월 독일 북부의 군항 Keil에서 수병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된 항명과 반란사건은 곧 독일 전역의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확대되기에 이르렀으나, 이들은 좌파적 이데올로기에 경도 되지도 않았고 체계적 조직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막스 공은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의 당수인 에베르트에게 정권을 넘겨 혁명을 수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당시 사민당은 대중에 의한 과격한 혁명이 초래할 혼란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이었다.) 현존 질서를 교란하는 모든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동질성과는 상관없이 사회민주당의 '적'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혁명을 지속시키던 대중들의 움직임에 '혁명.
    사회과학| 2001.11.14| 10페이지| 1,000원| 조회(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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