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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회 불평등의 형성과 그 방안
    ? 서 론*GNP 2만 달러의 시대의 그와 나-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GNP 2만 달러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300만의 신용 불량자가 있다. 소득에 있어서도 국민의 10%는 연봉이 5억이상이고 30%는 1000만원이하라고 한다.외환 위기 이후 국민들의 소득 격차가 더욱 커졌다고 한다. 특히 중산층과 하층의 타격이 커서 김영삼 정권이전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불렀던 반면,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으로 자신을 분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은 우리나라의 사회적 불평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로 경쟁을 추구하는 우리의 사회 구조에서 결코옳은 것 같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우울증과 암담함은 우리사회의 곪아 가는 한 부분으로 반드시 그 치료를 요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우리사회의 불평등의 문제를 계급, 계층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경제와 교육에 있어서의 구체적 실례를 통해 불평등의 문제를 살펴 볼 것이며, 또 불평등의 문제를 심화시킨 우리 나라의 상황들을 살펴봄으로 우리나라의 사회불평등의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본 론*계급과 엘리트를 비벼먹은 거인의 탄생-한국 사회구조형성의 특수성(계급이론과 엘리트 이론을 중심으로)우리나라의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할때는 두 가지의 이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중 하나는 막스의 계급론적 관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엘리트 이론이다.막스의 계급론적 관점이 바라보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따른 자본-임금노동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런 생산수단의 불평등은 경제적 영역에서 이념적,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총체적으로 나타나며, 이런 총체적불평등은 혁명을 통한 근본적 구조변화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런 막스의 계급론적 관점은 불평등의 확산까지는 아주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과 양상을 잘 설명해 준다고 할 수있을 것 같다.자본주의 사회 구조인 우리나라의 경우 6.25전쟁이후 초기 원조를 통한 경제, 정치 지배 질서가 확립되었고, 이후 60-70년대에는 정부 주도형의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을 이루어 왔다. 초기 경제 성장의 명분아래 기업의 결과물은 다시 기업의 기반으로 투자되면서 막스가 주장했던 생산수단 사유화의 비대가 가속화 되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부의 성장 중심 경제정책은 경제의 발전을 이루긴 하였지만, 기업이 여전히 한 개인의 소유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배분의 정의를 무시하고 결과물을 기업주에게만 돌림으로서 경제적 불평등의 기반을 구축하고 하나의 경제 계층인 재벌을 양성하게 되었다.또 경제적 계층의 형성과정에서 정부 주도형으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던 우리나라의 경우 엘리트 이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 지배 계층과 정치적 지배층의 결탁으로 경제성장 과정의 자원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그들의 충분한 정치, 경제적 기술은 그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 할수 있게 해 주었다.즉 경제의 계획과 이행을 국가가 관리함으로 경제를 계획,집행할 관료의 비대화를 이루었고, 이 정치적 지배계급인 관료와 경제계급이 결합하여 성장의 결과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지배계급의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 하나의 완전한 지배계급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배분과정에서의 불평등으로 인한 경제의 불평등은 결국 지속적 사교육의 강화가 이루어진 지금 더욱 뚜렷이 교육의 불평등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계급의 이동을 꿈 꿀 수 있는 엘리트 교육 기관으로의 진학기회는 더욱 축소되었고 지배계층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즉 엘리트 계층에 의한 생산 수단의 사유화와 그들만의 결과물의 분배로 인한 소득의 불평등은 교육의 불평등을 야기 시켰으며, 이것은 결국 정치집단과 같은 권력구조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뛰는 나와 비행기탄 그.-한국 사회 불평등의 심화.이런 사회적 불평등 중 우리가 함께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교육과 주택 문제에 있어서의 불평등이다. 교육은 다음 지위의 획득 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주택의 규모는 우리사회에서 삶의 척도가 되기이기 때문이다.얼마전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의 과정이 무상 의무 교육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교육비가 1인당 270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공교육의 강화가 무색하게 사교육의 지출은 더욱 늘어나고, 기관들도 늘어나고 있다. 또 최근 일부 부촌의 과외텔 형성은 공교육의 강화가 교육의 매개로한 계급의 강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일게한다.서울대 신입생의 아버지 직업, 출신지역, 과외 경험등을 조사한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입생 60%에 가까운 학생이, 고급 공무원등 관리직과 전문직이 자녀로, 또 40%이상이 서울의 부촌으로 확인되었고,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등 일류대의 진학률이 높은 구청의 과외비 지출은 타 지역의 5배에 가깝다고 한다. 단편적이긴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조사결과로 볼때 사교육비의 투자로 한국사회에서는 지속적인 계급의 재생산이이루어진다고 할수 있다.또 주택에 있어서의 불평등문제의 심화는 더욱 확연하다고 할 수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장만은 모든 서민의 바람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서민들은 결혼과 함께 전세를 거쳐 융자를 통해 집을 장만해 가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결혼이후 생의 3분의1이상을 집장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어느정도 여력이 되는 계층에서는 결혼과 함께 집을 장만해 주는 데, 이들과 집장만을 위해 힘을 쏟을 이들의 10여년은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보이겠는가!결국 이런 물질적 기반은 그 여유를 여가활동뿐 아니라, 자녀들의 과외활동, 다른 부의 축적 가능성에서 확실한 삶의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결국 각 계층내에서 이루어지는 부의 상속은 상속된 부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격차의 상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정한 달리기를 외치지만 달리며 자전거를 구입하고, 또 자동차를 사는 사람과, 비행기를 선물받은 사람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의아한..그렇지만 이해(?)되는 박수부대 -불평등 지속의 원인그렇다면,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사회에 이런 불평등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이 이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 되어가는 이유는 뭘까? 그 첫 번째로는 물질중심의 사고관에 있다고 할수 있을 것 같다. 경제 성장을 위한 정부주도의 경제 발전은 일부 계층에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전반적인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해 상당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물질적으로 이전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분명한 예가 바로 정치, 사회적인 면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라고 볼수 있을 것 같다.
    사회과학| 2003.11.20| 4페이지| 1,000원| 조회(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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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보도 연맹원 사건을 통해 돌아본 한국전 전후의 양민 학살 사건 평가A좋아요
    ■ 들어가며■ 본 론Ⅰ.양민 학살 사건의 역사적 배경1. 해방 이후의 역사적 상황2. 6. 25 전후의 국내의 상황들Ⅱ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을 통해 돌아본 양민 학살의 양상1. 보도연맹의 형성과 그 배경2. 보도연맹의 결성과 사건의 전개 과정3.증언을 통해 돌아본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Ⅲ.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대한 고찰Ⅳ. 보도연맹 사건을 통해 돌아본 양민 학살 사건Ⅴ.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해결과제들■ 글을 마치며■ 참고서적 및 참고 사이트.들어가며우리의 역사가 어둡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다....그치만 이땅의 역사를 다시금 알게 될 때면 언제나 가슴 한 켠이 시려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누군가를 그렇게 무참히 죽어가도록 했으며, 또 너무나 잔인한 학살이 그토록 엄청난 규모로 일어나게 했는지 두려운 마음조차 든다.그치만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 낸다 고 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의 흐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건들을 다시한번 품고 그 두려움들을 올바르게 이겨나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된다.얼마전 밝혀진 노근리 학살사건은 온 나라를 한 번 가볍게 흔들고 일부 그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그때의 아픔을 기억케 하고는 이제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이미 오래전 지나버린 위안부문제나, 전쟁의 비극을 지금에 다시 들춰내 다시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히려 우리가 너무 소국적인 자세로 늘 과거 지향적인 역사관에서 헤매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치만 몇몇 참고 문헌들과 관련 이해 단체들의 사이트들을 확인하면서 우리민족의 역사속에서 반드시 짚어보아할 부분임을 알게 되었고, 역사의 왜곡된 근간을 바로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되었다.이제 우리는 양민 학살 사건을 해방이후의 역사적 배경과 6.25 전후로 나뉘어서 살펴보고 양민학살의 여러 사건들 가운데 그동안 거창 양민학살하게 되고, 미군정의 부정으로 인해 임정의 지도력은 전혀 발휘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채 해방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어갔다.이런 가운데 신탁통치에 대한 논의가 나라를 휘몰아갔다. 최초 신탁통치안에 논의될 당시 국내에서는 좌우의 구별없이 거센 반발이 일었다. 그러나 1월 2일 공산당이 돌연 태도를 달리하여 찬탁을 지지하면서 명분없는 찬탁으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좌우의 대립으로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그 과정에서의 미소 공동위원회도 미데올로기의 대결구조속에 결렬되었고, 결국 이러한 혼란이 계속되는 과정속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의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될 수밖에 없었고, 좌우의 대립은 여전히 정부가 수립된 남한 가운데 남아있었고, 친미 반공의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러한 일련과정을 통해 볼때 해방이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좌우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미군정의 태도또한 이러한 대립을 더욱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좌, 우의 하나되는 민족적 결집을 이루어내지 못한 점이라고 할 수있다. 이데올로기에 가리워서 민족을 생각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분열될 수 밖에 없엇던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안의 과정에서 공산당의 결정에 무의식적으로 따라갔던 좌파의 행적도 그 분열됨에 큰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서로의 다름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는 흑백논리는 정치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2. 6.25 전 후의 국내의 상황들한국전쟁의 원인은 이미 일제 때부터 비롯된 해방의 과정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며, 국제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대립하게 된 미소의 대립과 그 속에서 전개된 동아시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세력과 미국 또는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 사이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한 분단체제와 동북아 냉전체제를 고착시켰던 한국전쟁은 그 이전 시기 국내외 갈등의 최종적 귀결이었고 그 이후 남북한 분단사회의 출발이었다. 곧 세계적인 차원에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3국면은 11월말 이후로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1951년 6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후퇴가 이루어졌고 이어 전쟁이 제한되면서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4국면은 6월 하순 이후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점인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면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전쟁을 끝내고자 시작되었던 휴전교섭은 전쟁을 2년여나 더 지연시켰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협상과 군사적 압력이 교대로 이어지면서 전쟁의 피해를 증대시켰다.결국, 처음 내전적인 성격으로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는 한국전은 미국의 개입가운데 민족해방 전쟁으로 진행되었고, 또 이후 중공과 소련의 지원하에서 이념의 대립구조로 개편되었다고 볼수 있으며, 전쟁의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으로 인한 다른 이념을 지닌 점령지의 반복으로 전쟁의 수행을 주도적으로 하게된 중공, 미국에 의한 양민에 대한 불신과 서로에게 반하는 체제에 대한 협조자라는 명분은 점령지에 있던 대부분의 양민들에게는 피할수 없는 죄목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이념과 체제에 대한 강한 부정은 이들을 양민 학살이라는 결과로 몰아 가게 된 것이다.Ⅱ.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통해 돌아본 양민 학살의 양상1.보도 연맹의 형성과 그 배경보도연맹은 해방이후 제주 4.3항쟁등을 통해 드러난 남로당등 좌파들의 해방운동을 토벌하고 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주도하에 설립된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1949년 6월에 설립되었으며, 반공 교화 단체라 할 수 있으며, 반공운동 및 국가 보안법 운용 대책 마련등을 주요 활동으로 꼽을 수 있으며, 1949년 약 30 만명이 가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결성은 일제 시대의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성격과 유사한 것으로 좌파들의 활동을 감시 분석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신분을 보장해준다고 꼬드겼고 이 과정에서 좌익전력자만 가입한 게 아니라 군인이나 경찰에게 주어졌던 할당량에 따라 전혀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가입을 강요한 사례도 다반사였던 것이다. 평소 경찰이나 우익단체의 눈에 거슬린 사람들은 물론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억지로 가입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는 6·25전쟁 발발 4개월전에 열린 국회 속기록에서도 증명된다.당시 답변에 나선 내무부차관과 법무부차관조차 이를 인정했던 것이다.“여러 지방에서 과대히 보도연맹에 가입시킨다든지 해방직후에 인민위원회라든지 농민조합이라든지 이러한 데에 그것이 좌익인지 우익인지 모르고 들어갔다는 사람까지도 강제가입시키고 돈을 받고 이러한 폐단이 많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 거기에 폐단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보도연맹 운영에 있어서도 말단에 있어서 전연히 그런일이 없으리라고는 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장경근 내무부차관의 국회답변)“노동자나 농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멋모르고 농민조합 등에 가담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선량한 사람이라도 1차 보도연맹에 가입을 시켜서 거기에서 일정한 절차를 거친 후에 다시 보도연맹을 탈퇴시킬 생각으로 있습니다.”(김갑수 법무부차관의 국회답변)이처럼 전향한 좌익과 양민이 대다수였던 보도연맹원들을 전쟁이 발발하자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모두 학살해버렸던 것이다.3. 증언을 통해 돌아본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3-1. 마산을 중심으로한 보도연맹원 학살마산에서는 약 1,500여명의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으로 소집돼 구산면 원전 앞바다에서 집단 총살·수장당했다. 4·19혁명 직후인 60년 6월초 대구일보 보도는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마산지사】인접 거창·함양·산청 등 경남일대의 양민학살사건이 보도됨과 아울러 이곳 마산에서도 6·25 당시 1,500여명을 수장 내지 총살한 사실이 을 밀고해 죽게 했다는 이유로 내무서에 체포·감금됐으며, 민보단장 강황수도 15일간 감금됐다. 이현남동 구장 강별남은 인민군 후퇴시 함양군 지곡면 대황산록에서 총살됐다. 전 진주치안관 심판소 서기와 전직 경찰관도 감금됐고, 진주형무소 간수장도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인민군 후퇴시에도 학살이 만연했다. 50년 9월 20일쯤 ‘유엔군 상륙시 지주(支柱)가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는 지시에 따라 진주에서도 수감자 및 우익인사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전개됐던 것이다. 9월 25일 유엔군에 의해 진주가 수복되자 또다시 인민군 부역자에 대한 색출작업이 이뤄졌다.마산이 주로 아군에 의해 일방적 희생을 당한 경우라면 진주는 아군과 적군이 서로 빼앗고 뺏기는 동안 수많은 보복학살을 낳은 또다른 비극의 현장이었던 셈이다.3-3. 곳곳에 남겨진 학살의 흔적50년 7월 하순 2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을 찾아가려면 마산-진주간 국도에서 양촌리 대정마을로 우회전해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골짜기를 타고 4km를 직진해 올라가면 둔덕골이 나온다. 그런데 국도변에 있는 대정마을 앞산에서도 7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여긴 아직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이었어. 군인들이 둔덕에서 200여명을 총살한 것보다도 먼저였지. 어느날 경찰관들이 흰옷을 입은 민간인 7명을 묶어서 새터 동살미 골짜기로 끌고 올라가더라구.”이 마을 문모씨(71·농업)는 당시 스물 두 살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나무로 땔감을 하던 시절이어서 숲이 지금처럼 무성하지 않아서 경찰이 민간인들을 끌고 올라가는 모습이 마을에서도 훤히 보였다고 한다.“저기 산너머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거기서 총살을 했지. 그때만 해도 총소리가 귀했는데 동네가 꽝꽝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컷어. 죽은 사람은 이 근방 사람이 아니어서 누군지도 몰라.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도 알 수가 없지.”대정마을에서 국도를 따라 발산고개 쪽으로 500m정도만 더 올라가다 보면 봉암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만난 할머니들도 세명의 .
    사회과학| 2003.05.06| 19페이지| 1,000원| 조회(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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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관련] 북한의 통일방안 평가A좋아요
    < 목 차 >1. 서 론-북한의 통일 방안 고려 연방제2. 본 론-연방제의 변천과 고려 연방제Ⅰ.국가 연합 방식의 연방제(1906-1976)Ⅱ.연방정부 방식의 연방제 ( 1980-1990)Ⅲ.국가 연합방식의 연방제 ( 1991-이후)3. 결 론그리고.....수업을 마치며1. 서 론-북한의 통일방안..고려연방제.'고려연방제'는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다. 북한의 통일방안은 1960년 8월 '남북연방제'를 최초 제안한 후 1980.10 제6차 당대회에서 최종 형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제의했다. 북한의 통일 정책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연방제란 말인데 우리가 고려 연방제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고려 연방제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그 동안의 통일 방안들을 돌아보면서 연방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우선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휴전 이후 통일정책들을 살펴 보고, 또 고려연방제를 살펴 봄으로써 북한의 통일 정책 및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인 고려 연방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그리고 끝으로 우리의 남북 연합론과 비교해 보면서 함께 통일을 꿈꾸어 보고자한다.2. 본 론 - 북한의 연방제의 변천과정과'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Ⅰ. 국가 연합 방식의 연방제(1906-1976)'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이전휴전 직후 남북의 통일 문제는 남북한의 피해복구 및 경제부흥, 경제 성장정책에 대한 관심에 밀려 상당기간 공백기를 거쳐야했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전후복구의 부담에서 먼저 벗어난 북한은 본격적인 대남 정책을 세우기 시작했다.1960년 8월 14일 8.15해방 기념식에서 김일성은 최초로 남북연방제를 제시했다. 당시 한국내의 상황은 4.19 학생혁명으로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으며 통일 정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지 못한 상황이었다.남북연방제에서 북한은 ①남북한총선거 실시를 통한 외국의 간섭이 없는 통일 정부 구성을 제의 했고, 그에 따른 과도 대책으로 ②남북의 연방제를 제의 했다. 이 남북 연방제의 특기 할 만한 점은, 첫째, 남북한의 자유총선거를 가장 최선의 방안으로 채택했다는 점이며 둘째,남북연방을 과도 체제로 당분간의 두체제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북 정부의 대표의 최고민족위원회를 구성하고자 하며, 과도 정부인 최고 민족위원회에서는 내정권, 외교권, 군사권의 영역을 침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북한의 이러한 주장은 남한내에서 일부 호응을 받아 조국평화 통일 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한동안 중지되고 말았다.이후 북한은 우리정부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제안한 '평화 통일 외교정책 특별선언'에 따른 즉각적 반응으로 '조국통일 5대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주요 내용은- 남북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외국군대의 철거, 남북한 평화협정의 체결-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문화등 다방면에 걸친 합작교류-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의 남북 연방제 실시 제안- 유엔 분리 가입 반대, '고려 연방 공화국'의 단일국호로 하나의 국가로 가입등이다.이 방안에서 북한은 잠정적 연방제가 아닌 다방면에 걸친 연방을 제의함으로 이전의 남북연방제와는 매우 상이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엔의 남북한 동시 가입을 통해 한국을 '두개의 조선'을 만드려고 한다고 주장함으로 북한은 통일을 지향하고 남한은 분열을 지향하는 것처럼 선전하였다.Ⅱ. 연방정부 방식의 연방제 ( 1980-1990)'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 노동당 6차 대회에서 제시된 것이다. 노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기조연설을 통해서 해방이후 계속된 남북의 서로다른 제도와 사상을 절대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기초위에 남과 북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통일 정부의 형태와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결국 제안의 요지는 남북한의 현존하는 상이한 현재의 제도를 유지하고 남과 북이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 연방국가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니라 완성된 통일 국가로서의 연방제를 주장한 것으로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이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의 내용은 크게 첫째, 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의 제시, 둘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의 제시, 셋째, 연방제 실현된 후 공화국의 10대 시정방침등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려연방제가 주장하는 연방제의 구성원칙과 운영원칙을 살펴보면, 우선 '연방통일정부'수립 후 그 밑에 남북이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국가를 창립하여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형태로 통일을 하게 되고, 연방통일정부는 최고의결기구로 '최고민족연방회의', 상설집행기구로 '연방상설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역정부를 지도·감독하고 지역정부는 동등한 권한과 임무아래 독자적인 정책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연방공화국은 남북 교류·민족연합군 조직 등 '10대 시정방침'에 의해 정책을 집행하게 된다1.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전제조건 제시.①남한정권의 청산 및 사회의 민주화 실현.-반공정책과 국가보안법등을 폐지하고 남한 사회의 민주화(?)가 실현되어야 한다.-'통일혁명당'을 합법화하고, 남한내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연공활동을 합법화해야한다.-현 남한 정권을 퇴진 시키고, 민주주의적 정권(인민정권)으로 교체해야 한다.-남한이 제외된 가운ㄷ 미국과 북한간 휴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체결 되고, 이에 따라 주한 미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미국의 '분열주의적 두 개 조선 조작책동을 저지시키며 남한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을 주지해야한다.②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한 통일실현2.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의 10대 시정방침.①국가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성견해와 자주정책실시②전 지역과 사회 모든분야에서의 민주주의 실시 및 민족적 대단결 도모.③경제적 합작과 교류실시 및 민족 경제의 자립적 발전 보장.④과학, 문화, 교육분야에서 교류,협조실현과 과학기술, 민족 문화예술, 민족교육의 통일적 발전⑤교통, 체신 연결과 전국적 범위에서 교통,체신 수단의 자유로운 이용 보장.⑥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 대중과 전체 인민들의 생활 안전 도모 및 복지의 계통적 증진⑦군사적 대치상태 해소와 민족 연합군 조직 및 외래침략으로 부터의 민족 보위⑧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의 옹호 및 보호.⑨통일이전의 대외관계에의 처리 및 두 지역 정부의 대외 활동의 통일적 조절.⑩통일국가로서 모든 나라들과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애호적 대외정책의 실시.3.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통일방안'의 특징과 문제점..< 특 징 >- 연방제 통일방안의 명칭, 방안구성의 형식과 내용체계 등에 있어서 '민주'라는 용어 삽입, -연방형성원칙, 연방기구의 임무,기능등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과도적, 일시적 통일의 중간 단계가 아닌 완성형 통일 국가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제시< 문 제 점 >-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용납한다고 하나, 전반적 국사를 관할 하는 연방상설위원회를 둠으로 독립적 성격을 무의미 하게 만들고 있다.-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정권퇴진, 주한미군철수 등 노골적 선결조건을 제시함으로 남한이 따를 수 없도록 결정적인 장애물 설치.-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7.4남북 공동성명이 통일 3원칙에 의거해야한다고 강조.
    사회과학| 2002.06.12| 5페이지| 1,000원| 조회(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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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 탈냉전이후 한반도의 질서 평가A좋아요
    탈냉전 이후 한반도 국제질서- 세력균형이론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국제정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이론이 세력균형이다.) 이상우, 「국제관계이론」(3정판), 서울: 박영사, 1999. p.489.흄(David Hume)이 지적한 바로는 세력균형이라는 용어는 현시적일지는 몰라도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라는 격언은 상식과 自明論理에 매우 단단히 뿌리박고 있어서, 그 고대성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따라서 이는 고대에서 18세기까지 줄곧 실행되어 온 것이다.) David Hume, 「Essays and Treatises on Several Subjects」, Edinburgh: Bell and Bradfute, and W.Blackwood, 1825. pp.331-39.이와 같이 오래된 이론으로서 세력균형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며, 이해의 척도에 따라 그 의미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력균형의 의미에 대해 하아스(Ernst B. Haas)는 ①모든 형태의 세력분포, ②평형 또는 균형화 과정, ③주도권 또는 주도권의 추구, ④세력의 조화에서 오는 안정과 평화, ⑤불안정과 전쟁, ⑥일반적인 세력정치, ⑦역사의 보편률, ⑧정책대립에 대한 체제와 지표 등의 여덟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J. E. 도거티·R. L. 팔츠그라프 공저, 최창윤 역, 『국제정치론: 이론과 접근법』, 박영사, 1999. p.52.이러한 세력균형이론은 국가중심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 나온 이론인데 국가중심사회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므로 세력균형이론은 지금도 현실국제관계 설명에 가장 적실성 높은 이론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우, 위의 책, p.490.여기서는 이러한 세력균형이론을 2차세계대전이후 한반도 국제질서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이론의 적실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바이다.Ⅱ. 냉전기의 한반도 국제질서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형성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과 중국의 북방 3각관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과 한국의 남방 3각관계는 냉전체제하에서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힘의 균형, 즉 세력균형을 유지하여 왔다.이러한 동북아에서의 세력균형은 유럽과는 달리 양극체제를 지탱하는 남북방 3각체제라는 또 다른 형태의 힘의 균형, 즉 지정학적 현상과 전략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 동맹 대 대항동맹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백종천외, 「북방 3각관계의 변화와 한국의 정책방향」, 경희대 국제문화연구소, 1988.1. 북방 3각관계2차대전후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 하에 신속하게 공산화 과정을 거쳐 1948년 9월 9일 김일성 정권이 등장했으며 또한 중국에도 치열한 내전 끝에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처럼 북한과 중국의 공산화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3각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북방 3각관계는 성립 초기인 50년대 중반까지는 표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며 이념적 결속 을 주장하였지만 50년대 중반부터는 실질적인 명분이나 이념보다는 자국의 실리적 차원(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였다.50년대 중반에 들어와 중·소 이념분쟁이 시작되면서 3국간의 갈등은 표면화되었고, 1950년대 후반 핵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군사문제와 1956년 소련의 제 20차 당대회에서 대서방 강경책의 완화초치로서 후르시초프가 평화공존론) 후르시초프는 사회주의 건설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평화공존론을 통해 사회주의건설에서 자본주의와의 전쟁의 필연성을 배제하였다.을 선언하자 중·소 분쟁이 가시화 되었다.중·소 분쟁은 62년 쿠바 미사일위기, 66년 중국의 문화혁명, 68년 소련의 체코침공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1969년 3월 국경문제로 우수리강의 다만스키섬에 중국이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양국의 무력충돌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김용남외, 「중소연구 8권 1,2,3,4호」, 한양대학교 중앙연구소, `984.이와 같은 중·소 분쟁의 가운데 북한은 최대한의 실리추구를 목표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북방 3각관계의 균형자 역할로 존재하는 세력균형의 특이한 형태를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 세력균형체제에 있어 균형자란 A, B, C 삼국중 우월하거나 나머지 두 국가와 비슷한 힘을 가진 A국이 B·C국 사이에서 관계 개선의 정도나 영향력의 범위설정 등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The Struggle for Power and Peace」, 5th. ed, New York: Alfred a. Knopf, 1973(1948). ch 11.으로, 냉전기의 중국이 미국과 소련에 취했던 정책이 그 좋은 예일 것이나. 이 시기에서는 북한이 북방 3각관계의 균형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1968년 중·소 분쟁이 있은 후 70년대에는 데탕트시기를 맞아 북방 3각관계가 이완되었고, 중·소 대립도 차츰 완화되었다. 하지만, 78년 소련의 지지아래 일어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79년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중·소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으며, 미·중 군사협력이라는 중국의 대소련 견제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1969년 미국의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의 후퇴로 공백이 생긴 동남아에서 이를 메우려는 중·소간의 치열한 세력경합이 발생하였고,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직접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소련과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줄 상대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을 선택하게 되었고, 미·중간의 관계 개선은 미·중·소간의 새로운 전략적 삼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북방 3각관계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85년에 등장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내세워 과다군비의 억제와 세계평화를 통한 인류공존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그의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심각한 경제문제의 해결에 있었다.이와 같은 68년부터 89년까지 북방 3각관계의 변화를 세력균형체제의 틀 속에서 살펴보면, 중국이 힘의 균형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8년이전에는 중·소 양국이 힘의 균형유지를 위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을 이용하였지만, 68년이후 중국은 대소련 견제책으로 북한보다 미국을 중요시하게 되었다는 변화와 북한 또한 중·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비동맹 국가와의 접촉을 강화하고, 경제난 타결을 위해 미·일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다.이처럼 북방 3각관계에 있어서, 자유진영과 사회진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분립을 떠나 중·소 분쟁이라는 양국의 세력팽창문제와 북한의 실리추구 외교는 서로의 관계를 세력균형체제 속으로 편입시켰던 것이다.2. 남방 3각관계북방 3각관계의 경우 전후부터 강력한 이념을 바탕으로 그 결속력을 강화하였지만, 남방 3각관계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내재된 한·일간의 문제로 인해 그 결속력이 강화될 수 없었다. 따라서 남방 3각관계는 북방 3각관계에 비해 비탄력적이고 비대칭적이라고 할 수 있다.40년대 후반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국이 전통적으로 중요시해 왔던 유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의 에치슨선언으로 표출되어 한반도 내에서 전쟁을 유발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다.) 백종천, 「국제방위론」, 박영사, 1985. p.481.6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은 월남전 개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한국전쟁을 통해 동북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나라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하에 동북아의 힘의 공백을 메워 줄 수 있는 나라로 미국은 일본을 지목하게 되었다.) 한승조외, 「동북아 정세와 한일관계」, 집문당, 1995.이를 위해 미국은 한·미·일 삼각관계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한·일 협정의 체결을 주선하였다. 이러한 한·일 협정의 체결배경은 한·미·일 모두의 입장에서 이익의 요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1953년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960년에 체결한 미일안보조약으로 기초가 마련된 한·미·일 삼각관계가 한일협정의 조인으로 구체적 남방 3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남방 3각관계는 각국간의 경제적 마찰로 인한 문제가 있었을 뿐, 북방 3각관계와 같이 심각한 대립의 양상은 보이지 않았다.이러한 남방 3각관계의 세력균형적 시각은 미국이 세력균형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는 것이다.Ⅲ. 탈냉전과 한반도 국제질서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금세기 초 볼세비키혁명으로 생겨난 사회주의 체제의 대대적 수정을 가져왔으며 결국에는 89년 몰타회담을 통해 냉전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89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국제질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북아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북방 3각관계와 남방 3각관계에 있어서도 변화를 불러오게 되었다.1. 북방 3각관계의 변화탈냉전이후 소련은 북한에 대해 지원해 오던 군사적·경제적 원조의 중단과 무역결제에 있어서도 중국과 함께 경화결제를 요구함으로 해서 북한으로 하여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하였다.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포기와 중국의 경제개발추진 그리고 북한의 경제난 타파를 위한 대미·대일 접근은 북방 3각관계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북방 3각관계 형해화의 가장 큰 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각국의 실리추구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실리추구의 형해화된 북방 3각관계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변화가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의 마지막 동반국인 북한을 쉽게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북한에게 지원할 수 있는 경제적 원조의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체제유지라는 측면과 한반도 내의 영향력 보존의 측면에서 보면 결코 북한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2. 남방 3각관계의 변화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남방 3각관계가 눈에 보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과학| 2001.10.30| 5페이지| 1,000원| 조회(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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