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는 길이 멀어서 자주 안 나가던 나는 3월 마지막 주말에 집에 가서 부모님도 보고,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해미읍성도 답사를 할 겸해서 우리 집인 태안으로 갔다.태안 반도는 충청남도 서해안에 있는 곳인데, 해미읍성이 있는 곳과 가까운 편이다.해미읍성이 있는 곳은 서산인데, 태안에서 서산은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그리고 해미읍성을 가려면 서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29호 국도를 따라 15분 쯤 평탄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조선시대의 해미현 자리인 해미읍에 이르게 된다. 서울을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서울의 남부터미널에서 3시간정도 걸려서 서산에 와서 서산에서 해미로 가면 된다. 요즘엔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좀 시간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본다.나는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일요일날 4월 1일에 아침 일찍 엄마, 언니와 함께 서둘러서 나왔다. 코스는 태안(우리집)에서 해미읍성을 답사한 후 덕산에서 온천을 하고 나를 예산에서 내려주면 거기서부터는 버스를 타고 학교인 조치원으로 오는 것이다.해미읍성은 사실 우리 가족들이 덕산으로 온천을 다니면서 자주 지나가던 곳이다.다 크고 나서는 나의 학교가 조치원이고, 오빠의 학교가 대전에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오빠와 나를 학교로 데려다 주실 때에 해미읍성을 지나게 된다.거의가 그냥 지나가지만, 시간이 나고 날씨가 좋을 때면 가족들이 그곳에 잠시 내려서 둘러보고 가곤했다. 그러니까 이번의 방문이 한 적게 잡아 3-4번째라고 할 수 있다.어렸을 적 초등학교 때에 지나가다가 해미읍성을 보고 그때는 그냥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다라고 생각했다. 돌로 빙둘래 싸여있어서 내가 저 건물이 뭐냐고 물어보자 부모님께서는 해미읍성인데 옛날에 지은 성벽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나서 한 얘기가 바로 저곳은 천주교인들이 한때 박해를 받던 곳이라고 덧붙여서 설명해 주셨다.어렸던 나는 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아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었다.이렇게 내가 답사 유적을 해미읍성으로 정하게 된 것은 비교적 우리 집에서 가까울 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해미읍성은 도로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사진-1』돌로 차곡차곡 쌈아서 만들어진 것이 참 고풍스런 옛멋을 느끼게 해주는 읍성이다. 성벽을 따라가면서 산책을 하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도 좋은 편이고, 뒤편에 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멋들어진 성의 모습과는 다른 게 도로 바로 건너편은 다른 모습이다. 건너편에는 시장과 상점들이 있다. 조사한 것에 나와있듯이 읍성이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와 해미초등학교의 입지, 그리고 민가 터를 비롯한 경작지로 이용됐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해미읍성의 정문 앞에는 읍성을 찾는 사람들은 위한 표지판이 있다. 『사진-2』해미읍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놓은 것인데, 이러한 설명은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내가 갔을 때에도 한 가족이 읍성 앞의 이 표지판을 보면서 두 명의 자녀에게 이 곳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해미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꽤 넓은 뜰 같은 곳이 펼쳐지는데 조금 걸어 들어가면 천주교 순교기념비와 사형대 그리고 호야 나무가 있다. 학명은 회화나무이나, 사투리로 호야나무라고 읽는다. 나도 어렸을 적에 호야나무 라고 들었기 때문에 계속 호야나무라고 하겠다.해미읍성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이 이 호야나무 인데, 이 호야나무는 감옥 입구의 앞에 있었던 300년이 된 나무로써 이 나무의 가지에 신자들이 머리채를 묶여 매달려서 고문당하였다. 그 흔적으로 철사 줄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이 호야나무는 현재 이 읍성에서 천주교 박해의 상징물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3』호야나무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이 호야나무에서 행해졌던 박해의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있는데, 이러한 글을 읽고 보면 왠지 호야나무가 그냥 나무 같지 않게 느껴진다.어떤 의미가 부여된 이 나무는 그냥 식물로서의 나무가 아닌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그 나무에 함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님 그 속에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 나무를 보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해주기 때문에..아무래도 원이 많이 풀리지 않았을까 싶다.다른 사람들도 이 나무가 그냥 예사 나무 같지가 안은지 다들 나무를 계속 뚜러져라 얼마간 쳐다본 후에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다.그리고 그 호야나무의 옆쪽으로 가면 감옥 터가 있다. 『사진-4』이 감옥 터는 일제시대에 철거되었고, 이 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 감옥에서 질병과 고문과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사실 이 감옥 터는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넓은 털 되어있기 때문에 이 표지판이 없으면 그곳이 감옥 터였다는 것도 모를 정도다.이렇게 읍성 안을 엄마와 언니와 함께 그곳에서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하다가 나왔다.여기서 잠시 이 읍성이 이런 천주교인이 박해를 받았던 종교적 의미로써가 아닌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 중에서 가장 잘 된 5백년 풍파를 이겨온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조선 태종 7년(1407)애 해미가 현이 되었으며 태종 14년(1414)에 덕산에서 충청병마사영이 이곳에 이전되었으며 효종 2년(1651)에 청추로 옮길 때 까지 200여년 동안 서해안 군사 요충지로서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1578년 (선조 12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근무한 기록이 남아있다. 해미 읍성은 또한 동학혁명운동 당시 일본군과 관군들이 주둔하고 있던 홍주읍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도 이용되었고 특히 천주교 박해성지로 유명하다. 해미읍성의 박해는 1866년 병인년 즉 병인박해 때 절정을 이루었다.또한 대원군은 덕산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父인 남연군의 무덤을 독일인 옵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하였을 때에는 이의 보복으로 해미에서 수 많은 천주교인을 읍성 내의 회화나무에 묶어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현재 정문을 들어 하지만 이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해미읍성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와 해미초등학교의 입지, 그리고 민가 터를 비롯한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많은 교란과 훼손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3년에 국가 사적 제 116호로 지정 받아 관리를 받고 있다.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축성된 약 6만평의 석성으로 북쪽의 야산을 감싸안으며 쌓은 평산성으로서 둘레가 1.5㎞,높이가 4∼5m로서 밖은 석축으로 쌓고 흙으로 내탁을 하였다.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은 홍예로된 석문에 팔작지붕의 단층으로 되어있으며 원형그대로 현재 남아있다.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1975∼1981년 사이에 성안에 있던 민가와 학교를 철거시키고 무너진 성벽에 복원하였다. 해미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었으며, 그 기록이 현재도 정문인 진남문 아래 성벽에 공주 청주 동문으로 가는 성벽에 충주 임천 사람이 쌓았다는 표시가 남아있다.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밖에 깊이 판 해자의 흔적도 확인되는데 현재 북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해자는 성벽에서 약 8m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상부폭10-11m, 하부폭5m, 깊이 1.4-2.4m의 크기로 남아 있다. 이 해자와 성벽사이의 공간에는 부분적으로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 탱자나무에 대한 기록은 《輿地圖書》에 잘 남아 있다. 성안에는 동현 9칸을 비롯해 아사, 객사, 동서현, 장관청, 내창 등 33칸이 있었으나 1930년대 동, 서문의 누각은 없어지고 아사는 면사무소가 되었으며 객사는 학교로 바뀌었고 얼마 전 까지 성 안에서는 장이 섰으나 지금은 모두 밖으로 이전하였다.해미읍성내에 존재하고 있었던 시설물을 여러 사서 및 지리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1《朝鮮王朝實錄》 文宗元年九月"海美縣內廂城周回三千三百五十二尺女墻高三尺敵臺十八內十六未築門四無擁城女墻六白六十八垓字周回三千六白二十六尺城內泉三"(해미현 내상성은 둘레가 3352척으로 여장 높이는 3척이다. 적대 18곳 중에서 16626척이고, 성내에는 샘이 3개 있다. )2《新增東國與地勝覽》 海美縣 關防條"兵馬節度使營在縣東三里有石城周三千七百十二尺高十五尺內有三井又有軍倉"(병마절도사영이 현의 동쪽 3리에 있는데 석성으로 둘레가 3172척이고 성 높이가 15척이다. 성내에는 우물이 3개 있으며 또 군창이 있다.)3《忠淸道邑誌》 海美縣 城池縣城條"周圍六千六百三十尺高十三尺治城三百八十堞瓮城二處 樓暑樓無南門虹霓三間二層樓東門三間西門三間北門西門三間北門無枳木繞城城內有泉井六庫濠池無"(성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치성은 380첩, 옹성은 2곳에 있으나, 초루와 포루는 없다. 남문은 3칸으로 홍예로 된 2층 누각이며 동문 3칸, 서문은 3칸인데 비해 북문은 없다. 성둘레가 탱자나무가 빙 둘러싸고 있고 성내에는 샘과 우물 6개가 있으나 창고와 호지는 없다.)4《東國與地志》 海美縣 城郭縣城條"石築周三千一百七十二尺東南有門三井本兵馬節度使營城"(석축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동남에는 문이 있고 성내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본래는 병마절도사영성이다.)현재 해미읍성의 주변으로 같은 목적하에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읍성으로는 서산읍성, 태안읍성, 당진읍성, 홍주읍성등을 들 수 있다.이렇게 역사적으로 많은 일이 이었던 이곳에 왜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국 황폐기'라 할 정도의 시기를 맞는다.이때 17세기 초 천주교를 종교로서가 아닌 서학(西學)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이수광(1563-1628)의 마테오 리치의『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생겨났다.실학자들 사이에서 비판, 옹호 되어오던 천주교 사상은 18세기 후반부터 남인학파에 의해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되어 갔다. 주자학의 덕치주의를 재검토하면서 당쟁을 배경을 배경으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학파의 성격인 관념적 공리론을 비판하고 정치, 경제, 사회개혁의 뒷받침이 될만한 실학과 서학을 받아들이고 사실에 입각한 진리 탐구를 지향하는 고증학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