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문명의 하나인 마야 문명은, 그 특이성과 함께 신비성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있다. 오늘의 멕시코, 콰테말라, 온두라스, 베리제, 엘살바도르에 걸친 50만 제곱 킬로미터나 되는 지역에서 서기 500∼600년을 정점으로 1000년 동안 뛰어난 건축술과 미술, 과학, 문자 체계를 자랑한 문명이 그 후 거짓말처럼 열대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마야 문명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낯설지 않게 들린다. 이렇듯 마야 문명은 세계적으로 발달한 고대문명의 하나로서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국내의 학술적 접근은 사실 그렇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마야 문명에 대한 소개와 마야 문자, 즉 무궁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승뿐만 아니라 이해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마야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 500여년 간 계속된 학자들의 노력의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은 문자로서 학자들의 부단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그렇다면 마야문자 해독은 어떠한 식의 시도와 극복의 과정을 거쳤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어떠한 문제들에서 난항을 거듭하고 있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지 간단히 살펴보자.Ⅰ. 마야 문명의 소개마야라고 하는 말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무성하다. 어떤 이들은 스페인 정복 당시의 온두라스 앞 바다에 있는 한 섬의 이름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은 역시 마야빤이라고 하는 정복 이전 도시의 이름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이다. 멕시코 유까딴 주의 주도 메리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적지 마야빤은 스페인에 의한 마야지역 정복이 있기 얼마 전까지도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던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 경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까딴 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이러한 개연성으로 하여 이곳의 문명을 마야라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마야문명은 대략 10세기를 전후하여 고전기 곳곳에 신전이나 궁전, 피라미드, 석비 등을 세웠는데 건물의 돌기둥에 남겨진 상형문자와 숫자는 당시의 생활상과 날짜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들이다.고전기 이후의 마야문명은 톨테카족이 마야족을 정복하고 유카탄 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서기 900년경부터 성립되었다. 톨테카족은 치첸 잇싸를 중심으로 뚤룸, 마야판, 우슈말 등에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마야인들은 잉카와는 달리 통일된 제국을 형성하지 않고 개별적인 다수의 도시국가 형태로 존재했다. 열대우림에 기반을 두고 화전에 의한 옥수수 경작을 위주로 생활했던 마야인들은 농경신으로 비의 신을 섬겼다. 비의 신 착과 함께 바람의 신이며 천둥 번개의 신인 꾸꿀칸은 가장 숭배되던 신 중의 하나였다.마야인들은 안데스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매우 발달한 천문학과 역법을 가지고 있었다. 20진법을 사용하며 0이라는 숫자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의 달력은 태앙력과 태음력은 물론 다양한 신들의 영향을 받는 종교력까지 포함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길흉을 점치고 미래의 운세를 예언하기도 하였다.이처럼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이루었던 고전기 마야가 왜 갑자기 붕괴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고전기보다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문명을 남겼던 고전기 이후 마야문명은 스페인 정복대에 의해 완전히 몰락하였다.Ⅱ. 고대 마야 도시의 초기 발굴19세기 말경, 하버드의 피바디 박물관 탐사대가 코판에서 고대 마야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을 했다. 새로운 도시를 확인하고 유적을 지도, 도면, 사진과 함께 기록하고, 때때로 발굴을 하는 계획이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워싱턴의 카네기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된 대규모 마야 도시 발굴이 1960년대까지 마야 고고학의 기조를 결정했다. 이들은 자료 수집을 목표로 하고 기념물적 미술품과 건축물을 만들어 낸 마야 사회와 그 역사의 특성을 더욱 자세히 규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코판, 와사툰, 카미날 주유, 치첸이차, 마야판에서 벌어가 되지 않았다. 고대 마야 문명의 비엘리트 측면, 즉 도시와 주변 부락에 있는 보통 농부와 장인들의 집 같은 것은 대체로 간과되었다. 강력한 수도 주변의 마을이나 소도시조차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마야 문명의 생성이나 발전 경로 같은 설명을 하는 문제는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었고,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때에만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마야 고고학자들은 복잡한 사회의 성격에 관한 인류학적인 사상 측면에서 마야를 이해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야 학자들은 고대 마야의 미적 및 지적 성취를 찬양하고 마야 문명의 특이한 점을 강조하기만 할 뿐 마야 사회를 다른 초기 국가와 자세히 비교하지 않았다.Ⅲ. 마야의 기호와 문자에 관한 초기 연구마야문자는 고대마야의 전고전기(기원전1500∼기원후150)에 형성되어 기원후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많은 기록들을 남겼으며 이후 계속적인 사용이 이루어지다가 에스빠냐 사람들의 침입과 함께 원주민들의 우상숭배의 방편이라는 이유로 금지됨으로서 실질적으로 그 맥이 끊어졌다. 따라서 오늘날 마야문자를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마야 원주민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자는 역사사료, 고고학적 발굴, 언어학적 접근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한 현대 마야학자들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마야의 많은 유적지에 꼼꼼히 쓰여진 질서정연한 수천 개의 문자들을 대하며 이전의 학자들은 문자의 방대함과 우리들의 속수무책에 허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마야 문자는 모두 약 3백 50개의 주요한 문자 기호와 3백 70개의 접사, 약 1백 개의 추상적 그림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그림 문자의 요소는 서로 결합되어 상당히 많은 복잡어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충하면 마야인은 표의 문자, 상형 문자, 동의어, 그리고 특히 수수께끼 그림식의 표기를 교묘히 활용하였다.마야 그림 문자를또한 그는 16세기에 최초로 마야문자를 라틴어의 27 알파벳과 비교 기록하였고, 또한 달력의 20일과 18월의 문자도 표시해 놓았다. 비록 그가 기록해놓은 알파벳 소리 값으로 인하여 오히려 후세의 학자들에게 많은 혼란이 야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되었거나 그의 기록이 최초의 마야문자해독의 실마리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마야 문자를 완전히 해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상형 문자로 기록된 언어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어스트 푀르슈테만은 초기의 뛰어난 연구로 마야 문자서의 달력과 수학은 많이 해독되었다. 마야 문명의 대체적인 실제 연대표도 작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20세기 중반 이후까지도 마야 문자의 숫자와 달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지만 그 이외의 해독은 부진했다.20세기 초 언어학적 해독 작업은 인기를 잃었지만 비언어학적 상형문자 해독법은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후 50년간 음운학 연구는 거의 금기처럼 되어 버렸고, 금석학자들은 특히 달력과 천문학에 사용된 상형 문자의 비언어학적 해석법에 다시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런 상형 문자는 현재 상당히 해독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마야 문서에서 음운학은 중요하지 않다는 학설과 함께 1950년대까지 대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이후, 크노로조프의 뒤를 이은 마야 금석학 연구가들은 다시 언어학적 방법과 음운학의 가설로 돌아갔다. 크노로조프는 알파벳의 음운 원리보다는 음절 문자를 주장했다. 마야의 일부 상형 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것을 표시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마야 문자 표기법은 전적으로 음절 문자 방식만은 아니다. 단순한 음절을 표시하기에는 상형 문자가 너무 많다. 대부분의 기호는 개념이나 단어를 표시한다. 현재의 해독 기술로는 이 두 가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비음운 상형 문자는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음운 기호와 조합해서 사용한다. 이런 종류의 복합 상형 문자 그룹 은 마야 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기호의 형식은 구분이 모호하다.마야 문자의 두 가지 주요년에 들어 하인리히 베를린은 베를린이 발표한 각 도시의 이름에 해당하는 문자는 지금까지도 약간의 수정과 보완만을 한 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빨렝께 유적의 석관 뚜껑에 쓰여진 마야문자들이 실제의 역사상의 인물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것을 같은 유적지의 건물들에 쓰여진 문자와 대조함으로써 밝혀내 당시의 학계를 새로운 기대로 들끓게 하였다. 결국 그의 연구 공로로 인하여 모든 조각물들과 그림 그리고 책 등에 표현된 사람의 모습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하였던 이전의 생각들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띠깔(Tikal) 나랑호(Naranjo) 약시란(Yaxchilan) 삐에드라스 네그라스(P. N.)빨렝케(Palenque) 쎄이발(Seibal) 꼬빤(Cop n) 끼리과(Quirigua)따찌아나 쁘로스꼬우리아꼬바는 베를린과 함께 여러 고대 도시들의 인명과 그 연대기를 밝혀 내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마야문자해석학은 본격적으로 문장을 해독해 나가는 시도에 들어가게 된다. 쁘로스꼬우리아꼬바는 삐에드라스 네그라스 와 약실란 유적에서 탄생, 왕위승계, 전쟁, 포로획득, 인신공양, 도시간의 동맹, 결혼, 사망 등 문장의 가장 중요한 틀이 되는 단어들을 해독함으로써 구문을 이해하는데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녀의 연구 업적은 후세의 학자들에게 중요한 지침으로 쓰이고 있다.오늘날에 이르러 크노로조프 이후 이 방면의 학문적 토의는 실로 유행처럼 학계와 일반의 지대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메르리 그린, 린다 쉴리, 피터 매튜스, 데이빗 스튜어트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현재 마야인의 후세들의 위치가 멕시코 공화국와 중앙 아메리카의 국민으로서 그들의 지위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마야의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책임이 무거워지고있다.Ⅳ. 달력달력 부분은 천문학적 지식에 힘입은 과학의 발전에 따른 태양력과 음력(陰曆), 260달력 등을 중심으로 일정한 시점을 여러 가지 형.
< 목차 >Ⅰ. 들어가면서Ⅱ. 네덜란드의 선거제도1. 네덜란드 선거제도 발전과정2. 네덜란드 비례대표선거제도3. 네덜란드 정치의 특징4. 의석배분 방식5. 후보선출Ⅲ. 현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Ⅳ. 우리나라의 선거제도1. 선거제도의 변화2. 후보자 등록3. 선거구 획정4. 의석 배분Ⅴ. 현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Ⅵ. 두 나라 선거제도의 평가1. 네덜란드2. 우리나라Ⅶ. 끝내면서Ⅰ. 들어가면서선거제도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가진다. 선거제도란 그것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 혹은 국가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기능 할 것인지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선거제도는 유권자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강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만들며, 자질 있는 국가대표의 선출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역할도 한다. 그렇기에 각 나라의 모습이 다른 것이며 거기에 따른 선거제도 역시 다양하다.우리나라는 집권자의 권력연장의 욕망에 의해서 선거제도를 이용한 적이 많았고 이것이 독재정권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선거제도는 불안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네덜란드의 선거제도는 분화된 사회구조에도 불구하고 안정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정권은 항상 연립정권의 형태로 유지가 되었으나, 기민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공동정권의 다수당으로 등장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선거제도를 비교해보겠다.Ⅱ. 네덜란드의 선거제도1. 네덜란드 선거제도 발전과정현제 네덜란드 선거제도의 기본은 1917년 이래 시행중인 일반투표에 의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이다. 이 제도는 현대적 의미의 네덜란드 의회민주주의가 시작된 1848년부터 채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네덜란드가 부르봉가 지배 하에 있던 1420년대에 매 3년 주기로 브뤼셀에서 개최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의회는 각 주의 귀족, 성직자, 도시 자본가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1795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1814년 네덜란드 왕국 헌법에서 의 의회진출을 가져왔는데, 소당의 의회진출은 의회운영상의 비효율을 가져왔고 정부는 이의 방지를 위해 의석 획득 가능 최소득표율을 규정하고 공탁금을 예치하게 하는 규정을 마련하는 등의 선거법 개정이 있었으나, 1917년 헌법개정의 대 원칙은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2. 네덜란드 비례대표선거제도네덜란드 의회선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당 명부식 전국 비례대표제로 실시된다. 4년 임기를 가진 150명의 제 2원 의원들은 네덜란드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해 치러지는 비례대표선거를 통해 각 당이 획득한 총 득표수를 가지고 총 의석을 배분한 결과에 의해 선출되어진다. 즉 네덜란드의 유권자들은 수십 명에 달하는 각 당 후보가 등재되어 있는 투표용지 위에 특정 당을 선택, 표기함으로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를 통해 수상과 의원들이 선출되어 있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3. 네덜란드 정치의 특징네덜란드 선거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네덜란드 정치의 특징적인 양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네덜란드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분화된 사회구조에도 불구하고 안정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례대표제는 수많은 정당들의 원내진출을 가져왔으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 정치가 큰 4개의 정당들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기민당. 노동당. 자민당, 민주 66당 등이 네덜란드 정치를 주도한 4개 정당들이며, 이중 1980년 카톨릭국민당, 반혁명당, 기독역사연합당이 통합해 공식적으로 출범한 기민당은 1946년까지 세당 의석 합계가 한번도 과반수 의석보다 적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네덜란드 정국은 다당 구조로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불안정 없이 연속성을 유지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네덜란드의 정치적 안정의 배경으로는 레이파트는 네덜란드 정치지도자들이 정치를 경영마인드로 이해하려는 자세, 실용주의적 관용주의, 정치현안의 해결을 위한 잦은 총수회담, 밀실회담을 통해서라도 30명, 혹은 현재 원내 확보 의석의 두배에 달하는 명단을 제시할 수 있으나, 최대 80명 이하여야 한다.후보는 지역구 선거체제가 아닌 관계로 유권자들이 아닌 정당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데, 각 당들은 이를 해소 내지는 최소화하기 위해 후보의 결정에 있어 가능한 한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 폭넓은 당 내외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네덜란드 각 정당의 후보선출과정에 있어서는 중앙당 지도부에게 거의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다. 이는 선호투표에 대한 제 정당들의 입장에서도 확인된다. 네덜란드의 선거는 선호정당의 명부 1순위 후보에 표를 던지는 것으로 진행되나, 유권자가 특히 선호하는 지지정당의 후보가 있을 경우, 그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으며, 이 후보가 30,000표 이상의 지지를 얻은 경우 명부상의 순위가 관계없이 당선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제도는 각 정당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자당 후보들에게 이 선호투표를 통해 당선될 경우 의원직을 포기하겠다는 사전 약속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특정 지역 출신의 편중을 미연에 방지함을 통해 균형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려의 결과로 보인다.Ⅲ. 현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비례대표제에 대한 비판은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재건을 위해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보다는 단결을 선택했던 네덜란드 내의 진보성향 국민들과 전후 세대들은 경제가 호전된 1960년 대 중반부터 선거제도와 정치구조의 개편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비판세력의 중심이던 민주 66당은 사회분화현상의 결과로 나타난 다당제의 폐해를 지적하며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양당제로의 정계개편을 주장하는 동시에 수상의 직선제를 주장하였는데 이들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유권자들은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된 의회와 당의 결정에 따라 선임되는 수상 및 각료들의 정치를 함에 있어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이에 따라 정치가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양상 간접 선거하였다. 제5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을 대통령선거인단에서 간접 선거하였다. 제6공화국에서는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였다. 현행제도는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에 의하여 선거하며 대통령후보자가 1인일 때에는 그 득표수가 선거권자총수의 3분의 1이상이 아니면 당선될 수 없으며, 최고투표자가 2인 이상일 때에는 국회의 재적의원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 대통령선거에 관하여 상세한 것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규정하고 있는데, 상대적 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지방자치단체선거제도는 제1공화국에서는 직선제로 하였으나, 제3공화국 후에는 선거제를 폐지하였다. 제 6공화국에 와서 지방선거제도가 부활되었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을 두는데, 주민의 직선에 의해 선출된다. 지방선거에 관한 법률로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있어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광역시의회의원은 지역구선거와 비례대표제선거로 선출된다. 비례대표제에서는 1인 2표제를 도입했고 여성할당제를 규정하고 있다.2. 후보자 등록후보자 추천제도가 있는데 후보자 추천제도는 성실한 후보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제도로서, 추천제도·선서제도·기탁금제도 등이 있다. 처음에는 후보자 난립이나 특정인 또는 특정 계층의 의회 진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련된 장치였으나, 사회가 복잡 다원화하고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그 필요성이 일반화되었다. 후보자 추천제도는 추천자에 따라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후보자등록신청을 하는 본인추천제와 타인추천제로 구분되며, 타인추천제는 선거권자추천제와 정당추천제로 구분된다.선거권자추천제는 후보자등록요건으로서 일정수의 선거권자의 추천을 요구하는 제도로서 선거권자추천제는 적어도 공직후보자로 등록하려는 자는 당해 선거구내의 일정수의 선거권자로 하여금 추천하게 한다면 후보자로서의 성실성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마련된 제도이다. 정당추천제를 보완하는 방법으로서 무소속후보자의 추천방법으로 사용된다자 정수비율의 균등(투표가치의 평등), 특정 정파에 부당하게 이익을 주지 않도록 하는 등 공평성이 요구된다.국회의원 선거구는 국회의원지역선거구의 공정한 획정을 위하여 국회에 선거구획정위원회를 두고, 선거구획정위원회는 당해 국회의원의 임기만료에 의한 총선거의 선거일전 1년까지 선거구획정안을 마련하여 국회의장에게 제출하여야 하며, 국회는 이 획정안을 존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의원지역선거구는 시·도의 관할 구역 안에서 인구·행정구역·교통 등의 조건을 고려하여 구·시·군을 단위로 획정함. 이 경우 하나의 구·시·군의 일부를 분할하여 다른 국회의원지역구에 속하게 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10월 25일 선거구별 평균인구수 기준 상하 50%의 편차를 기준으로 위헌여부를 판단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선거구별 인구편차 상하 33.3%를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바 있다.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의 경우 전국을 단위로 선거하므로 선거구별 인구편차에 관한 문제는 발생할 소지가 없으나, 정당추천 지역구 후보자의 득표를 정당에 대한 지지의사로 의제하여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고 직접선거와 평등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2001년 7월 19일 구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관련조문을 위헌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004년 4월 15일에 실시한 제17대 국회의원선거부터 지역구후보자와 정당에 대하여 각각 투표하는 1인 2표제가 실시되었다.시·도의원지역선거구의 획정도 인구·행정구역·교통 등을 고려하여 자치구·시·군을 분할하여 획정하되, 1개의 자치구·시·군이 2이상의 국회의원지역구로 된 경우에는 국회의원 지역구를 분할하여 획정함 다만 시·도의원지역선거구수는 최소 16개 이상으로 정하므로 광주·대전·울산광역시와 제주도는 선거구당 평균 인구수가 비교적 적다. 시·도의원지역선거구의 획정은 별도의 선거구획정기구를 두지 아니하고「공직선거법」에서 직접 정하고 있음. 한편 비례대표 시·도의원선거는 당해 시·도를 단위로 선출하되 정당명부에 의한
Ⅰ. 들어가면서Ⅱ. 러시아 외교정책의 성격의 변화Ⅲ. 남·북·러시아의 주요 정책 과제1)한국의 주요 정책 과제2)북한의 주요 정책 과제3)러시아의 주요 정책 과제Ⅳ. 러시아의 대 한반도 정책 추이Ⅴ. 러시아와 남북한 관계1)러시아-한국 관계2)러시아-북한관계Ⅵ. 러시아와 한반도 평화정착Ⅶ. 나오면서Ⅰ. 들어가면서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정세는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다. 동·서독이 통일되었으며, 소련을 포함한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도미노 방식으로 붕괴되었으며, 기타 사회주의국가들도 개혁과 개방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대립되어왔던 이념간의 갈등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첨예하게 대립되어왔던 냉전체제는 종식을 고하면서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이 질서는 이념간의 경쟁이나 갈등이 아니라 실리를 중심으로 한 무한경쟁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정보·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인해 지구촌·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으며, 인접국가 간의 지역블록화도 병존하고 있다.동북아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세계조류에 역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졌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가속화와 러시아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의 체제이행, 그리고 한국과 소련,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지금까지 소원했던 대륙세력과의 교류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북한의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의 선언, 남북한 UN동시가입,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체결 서명 등으로 인해 한반도에서도 어느 정도 탈냉전의 가능성이 보이면서 남북 통일은 아닐지라도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와 교류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됐다.2000년에 남북한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도 다시금 남북 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 했다. 북한은 일련의 개방조치로써 지금까지 소원했던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은 물론이거니와 EU회원국들과의 국교 정상화, 대미·대일 관계 개선에 박차를 하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남북 간의 협력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의 북한의 있다. 초기에 러시아는 군사적 안보보다는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영향력에 우선순위를 두었으나 현실주의적인 시각에 따라 점차적으로 군사적 안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또한 러시아는 세력균형 정책을 통하여 자국의 군사적 안보를 보장하려고 한다. 러시아는 특정 국가가 역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예방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러시아는 역내 국가들과의 쌍무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 국가를 이용하여 다른 한 국가를 견제한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현재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은 중국 중심적 이다. 이것은 러시아의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남한을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한 잠재적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러시아 외교정책에서 중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옐친 대통령이 1996년 방문할 국가의 첫 번째 국가가 중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한 러시아외무부의 발표에서 잘 드러난다.Ⅲ. 남·북·러시아의 주요 정책 과제1) 한국의 주요 정책 과제한국 정부 최대 과제는 남북한의 화해·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햇볕정책 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책의 목적은 남북한간의 전쟁 방지와 급진적 통일, 즉 흡수통일로 나타날 수 있는 무한대의 통일비용을 줄이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포용정책은 북한 사회의 변화, 즉 개방·개혁을 유도하면서 남북한간 3통(통행, 통상, 통신)단계를 거친 다음의 점진적 통합정책을 의미한다.한국의 대북한 포용정책의 방향은 원론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정책의 방법과 속도, 지원규모와 재원공급과 분담 등에서는 여·야당과 지역·계층·세대 간 의견이 상이하였다. 대북한 지원정책에 대한 의견차이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일관성 있는 대북한 정책의 유지 그리고 남한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통해 줄일 수 있다고 보여진다.남북한 분단으로 섬처럼 살아왔던 한국은 2000년 6·15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철도와 도로연결 가능성은 한반도의 지정·지경학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반도를 유럽의 물류 기지국인 네 불안정이 정점에 도달했지만 1999년 8월 푸틴 총리 등장 이후 정국의 불안정이 해소되기 시작했다.푸틴 대통령은 법에 의한 강한 러시아 의 정책을 선언하면서 국토의 균형적 발전, 즉 중앙과 지방간의 문제 개선을 위한 행정 및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있다.러시아 연방 전체면적의 3/4을 차지하고 잇는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은 여전히 변경지역이며 낙후된 지역으로서 경제상황이 러시아 유럽지역보다 양호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 지표로써 극동과 시베리아지역의 인구자연증가율의 감소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러시아 유럽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급증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푸틴은 향후 이 지역의 발전이 없는 한 이 지역이 중국, 일본, 한국에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러시아는 대북한 경사정책으로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Ⅳ. 러시아의 대 한반도 정책 추이러시아는 1858년∼60년에 중국과의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아무르 강과 그 지류인 우수리 강 연안의 극동 연해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의 국경을 확정했다. 그후 러시아와 조선은 1884년 조·러육상통상조약, 1888년 국교를 수립하였다. 그후 구한말 조선정부는 청·일의 과도한 내정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친 러시아 정책을 펼쳤다. 1896년 아관파천과 마산포항의 조차 문제로 러시아와 일본간의 첨예한 갈등 사태는 결국 1904∼5년 러일전쟁으로 귀결됐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결과 한·러 관계는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 종료까지 45년 동안 단절 상태에 직면했다.남북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소련 말기, 즉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일방적인 북한경사 정책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국가 태동도 소련의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졌으며 또 한국전쟁의 직접적 원인 제공자였다. 그 후 소련과 북한은 군사동맹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산업의 건설도 소련의 유·무상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지 소원했던 대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했다. 특히 러시아의 대북 관계의 단절로 인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상실은 러시아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이 확대되어 나갔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정책의 변화 조짐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6년 후반기까지 대러 관계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기는 1999년 8월 푸틴이 총리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한 경시정책은 2001년 2월 푸틴 대통령의 서울 방문을 통해 다소 완화되었다.러시아의 대남한 경사정책에서 남북한 등거리 정책 혹은 북한 경사 정책으로서의 노선 전환은 러시아가 남한에 대해 북한카드, 그리고 북한에 대해 남한카드를 이용하면서 실리 목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Ⅴ. 러시아와 남북한 관계러시아가 소련의 계승국으로써 구소련의 국제적 권리와 의무를 떠맡게 됨에 따라, 남북한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생겼다. 옐친 정부 초기의 친서방 외교 정책은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에도 잘 반영되어서 1992년 전반기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친남한 정책으로 일관되었다. 초기에 옐친은 고르바쵸프의 대한반도 정책에 약간의 조정만을 가했을 뿐 거의 그대로 추종하였다. 1992년 초반에 러시아는 한국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의 김일성을 완전히 무시하였으며 북한과의 어떠한 관계도 유지하기를 원치 않을 만큼 북한을 불편한 정권으로 간주하여 양국 관계에 거리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1993년 초에 채택된 모스크바의 외교정책개념 에 의거하여 전반적으로 재조정되었다. 러시아는 연방 초기에 보여주었던 북한고립과 남한과의 경제·군사협력 강조라는 종전의 정책을 변경하여 남한과의 유대강화를 도모함에 동시에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1) 러시아-한국 관계 : 협력적 동반자 관계의 수립러시아는 대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3가지의 시아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외교정책이 1992년 중순부터 이상주의적, 친서방주의적인 외교를 포기하고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인 외교를 표방함으로써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목표 하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친서방정책에서 자주·중립적인 외교로 전환을 모색하여 과거 소련시대에 보여졌던 이데올로기적 동질성과 당 대 당의 긴밀한 유대관계로 맺어진 동맹관계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보다는 남북한과 균형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안정을 유지하고 한반도를 위요한 동북아에서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남북한과 균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러시아지도층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친한국 일변도의 정책을 계속 추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상반된 대내 및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북한과 러시아 양국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다지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으며 심각한 경제침체에 빠져있는 러시아가 과거와 같이 북한에 대해 유리한 조건과 가격으로 경제·기술·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국가이익 차원에서 북한과 정상적인 국가 대 국가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북한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여러 차례 표명하였다.러시아는 남북한간의 중재자 역할도 자청하였으나 북한의 김정일은 러시아 대표단과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북한은 러시아의 중재자 역할을 거부하였고 러시아의 한반도 문제에 관한 국제회의 개최 제안에 대하여도 거부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영구평화체제는 북한과 미국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하였다.북한과 러시아는 아직도 냉랭하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있으며 양국 간의 관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어떠한 명백한 증거도 없다. 이는 러시아의 관계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에서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러시아의 외교정책이 계속해서 남한에 치우각한다.
차 례1. 서론고엽제란2. 본론-고엽제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고엽제의 사용-고엽제가 문제화되기 시작한 이유-고엽제로 인한 피해-고엽제의 피해에 대한 대책 및 보상3. 결론고엽제란고엽제란 월남전 당시 적군의 은신처나 우군의 시계청소를 위해 정글과 강우림과 늪지대의 나무숲 등을 제거할 목적으로 미군이 사용했던 제초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제초제라 하면 우리의 농촌에서 농약으로 사용하는 제초제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뒤늦게나마 [따이한 신문]이 “나무를 죽이는 고엽제가 파월용사를 죽인다."라고 고엽제의 설상을 폭로함으로써 이때부터 고엽제의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바, 즉. “나뭇잎을 말려 죽인다”는 뜻에서 일명 고엽제란 용어도 전래된 것이다.고엽제는 Picoloram, Cacodylic, acid 2,4-d-D, 2,4,5-T 등 대체로 4가지의 화합물이다. 고엽제는 식물의 성장을 조절하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어떤 유기 화합물은 성장 조절인자로 여겨지며 소량으로도 성장을 자극하거나 방해한다.2,4-D 등은 극소량으로 식물의 성장을 자극하지만 고농도에서는 성장을 억제하거나 중지시킬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고엽제는 일부 식물을 죽일 수 있으나 다른 식물에는 거의 피해가 없고, 어떤 고엽제는 대다수 식물에 대해 광범위한 고엽효과를 나타낸다.고엽제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고엽제의 주성분은 Picoloram,Cacodylic,acid 2,4-d-D, 2,4,5-T 등이 암 발생과 관계되는가를 알기 위하여 동물실험을 하였는데, 결과는 부정적으로 나타났으나 TCDD에 노출된 동물의 여러 기관에서는 암 발생이 증가하였다.2,4-D는 암컷이나 수컷의 생식능력에 영행을 미치지 않고 태아의 기형을 유발하지도 않으나 임신 중에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태아의 성장속도를 감소시키고 사망률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2,4,5-T, Cacodylic acid , Picloram 등이 생식기에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는 실험결과가 없이 확실하지가 않다.TDCC는 동물의 여러 기관에서 암 발생을 증가제 대량 사용으로 생태계파괴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고 반전론자들이 이를 문제 삼으며 고엽제가 인체에 해롭다는 연구결과가 나오자 1971년까지 10년 동안 월남 전역에 약2,000만 갤런(G/A)이 살포되었고 이중 한국군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 동안에 전체의 2.5%에 해당하는 약 50만 갤런(G/A)을 살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미군은 1960년대 초에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할 식량을 고갈시키며 적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정부군 진지의 경계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밀림지역에서 적의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중에서의 관측을 방해하고 있는 삼림의 나뭇잎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고, 식량을 고갈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통제지역 내에 있는 농작물이 성장 또는 수확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하였으며, 정부군 진지의 경계강화를 위해서는 진지 주변의 나뭇잎이나 풀잎을 제거함으로써 시계청소를 하여야 했다. 이리하여 이러한 3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약품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나뭇잎을 말라죽게 하는 고엽제[일명 제초제]는 삼림고엽화의 시험 및 시도는 미군의 지상전투병력이 투입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1961년 12월, 미 케네디 대통령은 고엽제 사용권을 국방부에 주었으며 1962년 1월 12일에 고엽제살포작전이 공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엽제는 주로 C-123 고정익 항공기에 의해 공중 살포되고 일부는 회전익 항공기에 의해 살포되었으며, 소량이 인력에 의해 지상 살포되었는데, 1962년 1월부터 1971년 9월까지 10년 동안에 약 200,000,000 갤런(G/A)이 월남 전역에 살포되었다.월남전에서 공산군은 울창한 삼림 속에 숨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하고 있다가 때때로 정부 통제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와 정부군을 기습공격하고 주민을 선동하였다. 이에 미군은 공중정찰을 통하여 이들의 활동을 포착 또는 확인하려 하였으나 울창한 삼림으로 인하여 공중정찰이 어려웠다. 이리하여 공중에서의 정찰을 방해함으로써 이들을 보호하고소송을 제기하였으며, 호주 및 뉴질랜드의 월남전 참전자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고엽제 제조회사들은 기업의 체면과 소송비용 등을 감안하여 1984년 5월에 보상할 것을 합의하고 1억 8.000만 달러를 고엽제 기금으로 내놓았다. 한편 이 의회도 고엽제에 노출된 군인들의 건강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갖고 1970년 4월부터 많은 공청회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엽제에 관한 몇 개의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r, 내용은 고엽제에 고나한 연구결과를 검토하고, 고엽제 환자는 치료하며, 고엽제로 인하여 발생한 특정 질병에 관해서는 보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월남에서 고엽제를 장기간 사용함에 따라 삼림과 농작물 파괴로 인한 주민의 반발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문제점은 60년대 말의 반전 여론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엽제의 원료인 2,4,5-T가 쥐에서 변형과 사산을 유발할 수 있다는 국민보건협회의 실험 보고가 있게 되자, 미 국방부는 1969년 10월에 2,4,5-T의 합성물인 오렌지색용제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2,4,5-T가 TCDD에 오염되었을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동년 12월에는 2,4,5-T가 동물실험에서 기형을 유발시킨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하면서 이의 사용중지를 국방부에 요구하였고, 1970년 4월에는 농업, 교육,보건,후생장관 등이 “모든 2,4,5-T의 사용을 중지한다.”라고 발표하게 되자 국방부는 2,4,5-T의 합성물인 오렌지색용제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고엽작전은 2,4,5-T가 함유되지 않은 백색용제나 청색용제로 제한하게 되었다.고엽작전은 반전여론의 한 가지 이유가 될 뿐만 아니라 2,4,5-T가 함유된 고엽제의 사용이 중지되자 공군이 수행하고 있던 RanchHand 작전이 1970년 5월 중지되었고, 2,3,5-T가 함유되지 않은 백색용제와 청색용제가 헬기 등에 의해 기지 주변 등에 소량으로 살포되었으나 1971년 10월 31일에는 이마저 완전히 사용 중지되었다.미 공군은 월남에 있혈, 뇌경색증, 악성종양, 간질환, 갑 상선기능저하증, 동맥경화증, 고혈압, 고지혈증, 무혈성괴사증, 허혈성심혈질환 등 21개 질병이 있다.고엽제후유증 2세환자 질병은 역학조사결과 고엽제로 인하여 2세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병으로 밝혀진 척추이분증(은폐성 제외)에 대하여는 수당 등을 지원 한다. 고엽제법 개정(98.12.29)고엽제감염에는 직접적인 감염과 간접적인 감염계통이 있다.직접적인 감염계통은 주로 항공기 살포에 의한 감염과 부대를 위한 자체 살포에 의한 감염이었으며, 간접적인 감염계통은 주로 강물, 식수, 음식물, 자연의 광. 식물, 비바람 등으로 피부접촉과 구강계통 및 호흡기계통 등으로 감염된다.고엽제 후유증은 역학조사를 통하여 밝혀진다. 미국의 경우는 아직 100%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개연성이 인정되면 사회 정책적 측면에서 후유증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고엽제에 관한 연구실적 이 전혀 없으므로 미국 보훈부의 기준을 그래도 인정하고 있다. 이 질병은 ‘93년 입법 당시 4종이었으나’94년에 6종이 추가되어 10종이 되었다.(1)최초 및 추가된 질병(10종)1. 비호지킨 임파선 암2. 연 조직 육종암3. 염소성 여드름4. 말초신경병5. 폐암(추가)6. 후두암(추가)7. 기관암(추가)8. 다발성 골수종(추가)9. 호지킨병(추가)10. 만발성 피부 포르피린증(추가)(2)기타고엽제 정책자문위원회에서 고엽제로 인하여 발생된 질병이라고 심의, 의결한 질병 중에서 국가보훈처장이 인정하는 질병미국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제조회사와의 소송 당시 후유증이라고 주장한 질병을 후유증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 질병은 ‘93년 입법 당시 16종이었으나 ’94년에 3종이 추가되어 19종이 되었다.(1) 피부계 질환(4종)1. 일광 과민성 피부염2. 지루성 피부염(추가)3. 심상선 건선(추가)4. 만성담마진(추가)(2) 신경계 징환(5종)1. 중추신경장애2. 다발성 신경마비3. 다발성 경화증4. 근위축성 신경측색 경화증5. 근질환(3)상금 차원에서 보면고엽제후유의증환자수당(고엽제후유증2세환자수당)이 있는데 지급대상자로는 고엽제후유의증환자, 고엽제 2세환자로 나뉜다.고엽제후유의증환자는 월남전에서 참전하고 전역된 자등 또는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복무하고 전역된 자등으로서 고엽제후유의증에 해당하는 질병을 얻어 국가보훈처장이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장애등급 판정을 받은 자를 말하고, 고엽제2세환자는 고엽제후유증환자로 결정·등록된 자 및 이미 사망한 고엽제후유증환자로 인정된 자의 자녀 중 고엽제2세환자에 해당하는 질병을 얻은 자로서 국가보훈처장이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장애등급 판정을 받은 자이다.지급액은 고엽제후유의증 환자 수당에서는 고도 장애자 486천원, 중등도 장애자 365천원, 경도 장애자 244천원이다.고엽제후유증 2세환자 수당으로는 고도 장애자 887천원, 중등도 장애자 698천원, 경도 장애자 571천원이 지급된다.또 다른 차원으로 교육보호가 있는데 공납금 면제, 학자금 지급, 취학관리, 장학금 지급이 있다.의료차원에서의 고엽제피해자 보상·지원에는 월남전 참전자로서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자는 관할보훈관서에 등록신청을 하면 국방부의 확인을 거쳐 보훈병원에서 검진을 실시, 고엽제후유증 또는 후유의증, 2세환자로 분류한 후 신체검사에서 일정한 등급을 받을 경우 후유증환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 상이군경과 동일하게 국가보상 실시하게 된다.또 후유의증환자는 수당(월 20∼40만원) 지급, 본인과 자녀에 대하여 교육보호와 취업보호, 해당 질병 외 모든 질병 국비진료 실시(경도이상 등급자)한다.후유증 2세환자에게는 수당(월 20∼40만원) 지급과 해당 질병 무료진료 실시한다.또 다른 차원에서의 지원으로는 가점취업이라 하여 채용시험시 시험만점의 10%를 가산 받아 하는 취업을 말한다.그리고 우선채용 취업이라고 하여 기업체가 채용시험을 실시하지 아니하고 취업보호대상자증명서를 제출받아 면접 등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우선 채용하는 취업을 말한다.이 외에 수송시설 이용보호, 보철용 차량지원 , 병역 등에서의.
현재 우리 시대는 현실주의적 상황에서 보자면 단극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즉, 1개의 패권국가 국제 관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이다. 현 체제에서는 미국이 그 패권국가라고 말 할 수 있고 미국은 현재 가장 강력한 국가이다.그런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다.9월11일 이후 세계는 변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이 말은 화씨 9/11 영화에서 나온 부시의 말이다.부시는 9월 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 을 선포했고 그것을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전면전쟁을 시작했다.2001년 9월 11일. 미국의 금융과 군사의 중심인 세계무역센터(WTC)가 테러 당했다. 그 사건으로 3천명 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부시는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고 2달이 지난 후에 군대를 보내 테러 주도자를 잡으려했다. 부시 정권은 사담 후세인은 알 카에다를 포함해 테러리스트들을 원조하고 보호하고 있다고 했고 빈 라덴 등 그들을 잡으려했지만 2달간의 빈 시간은 그들이 도피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대통령은 새로운 작전으로 미국인을 대상으로 했다. 우리는 세계가 다 알고있는 가장 위험한 안보 환경에 직면했다면서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테러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모든 나라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라고 할 것이라고 하였다.여기서 미국이 패권국가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패권국가는 한 국가가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가지고 국제 정치, 경제 관계를 규제하는 규칙과 절차를 통제 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미국은 자신들의 당한 테러를 국제적인 문제로 '테러와의 전쟁 으로 선포하였고 모든 국가들이 그게 따르게 하였다.그러나 부시 정권 초기에는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였고 인접국가에 대항해 재래식 화력도 개발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지만 9월 11일 테러 이후에는 사담 후세인은 장기집권체제로 가면서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대량살상무기 즉, 핵무기, 활동중인 화학군수벙커, 이동 가능한 생산설비 등을 만들어 유지하고있다고 발표했다.이러한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해 미군을 파견했지만 그들은 찾을 수 없었고 부시는 우리는 문명을 수호를 위해 전쟁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내진 못했습니다만, 우리는 싸울 것이고 승리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였다.결과적으로 보면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블 에 성조기가 걸렸다. 외형상으로 미국의 대 테러전쟁은 일단 승리로 마무리 지은 것처럼 보인다. 대영제국과 소련이 끝내 패퇴하고만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미국은 초강대국의 저력과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였다. 비대칭 전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전장에서도 미국은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며 승전보를 알렸다.이런 9월 11일 테러로 인한 전쟁의 형태는 후세인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즉, 정부 장악을 위한 목적의 형태를 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직접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에 반하는 정권은 미국에게 해가 되기에 그들 역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났다. 또 다른 한 가지 형태는 경제적 거래와 관련된 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가 정권을 잡은 당시에 미국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안 좋았기에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군사물자가 활성화를 띄어서 그들의 경제 활성화에 또한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현실주의는 무정부 상태이다. 국제 규범을 존중하며 이런 규범을 파괴시 힘이나 동맹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부시 역시 힘과 연합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금 더 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다소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유가 무엇이고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부시의 전쟁은 자신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많은 민간들을 희생시켰다. 화씨 9/11 내용에도 나왔는데 미군들이 총을 쏠 때 노래를 들으면서 쏜다고 했다. 사람을 살인하는 일에 노래를 들으면서 그것을 즐긴다는 소리이다. 이라크의 민간인들은 아무 죄 없이 몇 사람들이 저지른 테러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