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은 시대적으로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다. 국풍(國風), 소아(小雅), 대아(大雅), 송(頌)의 4부로 구성되며, 국풍은 여러나라의민요, 아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이다. 각부를 통하여 상고인(上古人)의 유유한 생활을 구가하는 시,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은데,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평가도 높으며, 상고의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서경]은 상서(尙書)라고도 하며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등 당우(唐虞) 3대에 걸친 중국고대의기록이다. 상서는 상고(上古)의 책으로 숭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대의 사적(史的)사실이나 사상을 아는데 중요한 책이다.꾸룩꾸룩 징경이는 모래톱에서 우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짝일러니 로 시작되는 『시경』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의 심성을 도야시켜온 교화의 원천이었다.내용은 주왕조의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대에 걸맞는 밝은 서정시로부터 혼란기를 반영하는 어두운 서사시까지 다채로우나,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연애시다. 따라서 『시경』은 유교 이전의 고대가요의 황금시대에 꽃핀 중국 문학사상 희귀한 연애문학 또는 여류문학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구두로 전승된 작품이 어느 시기에 문자언어로 옮겨서 편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시경』은 한나라 모공이 전하는 (毛)이며 음악의 성질에 따라 「풍」·「아」·「송」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풍」은 국풍이라고도 하는데, 15개국에서 수집해온 民歌로 이른바 지방의 俗樂이다. 「풍」은 모두 160편으로 시가의 내용은 다양하다. 가장 많은 것이 남녀간의 연가와 社會詩로, 전란의 고통을 노래한 것, 사회에 대한 불만, 전장에 나간 남편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과 걱정, 두고 온 가정을 걱정하는 남편의 노래, 이별의 괴로움을 노래한 것 등이다.「아」는 소아와 대아로 분류되며 모두 111편이나, 그중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는 6편을 제외하면 105편이 된다. 소아(74편)는 주로 연회음악이고 대아(31편)는 군중음악으로, 그 작자들은 대개 지배계급인 사대부로 알려져 있다. 「아」는 夏 자와 음이 비슷하여 고대에는 통용되었다고 한다. 夏는 우왕이 세웠던 나라 이름으로 황하지역에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불리던 악곡에 맞추어 지은 시가를 (아)라고 하며, (국풍)의 속악과 구별하여 정악으로 삼았다고 한다.「송」은 제사지낼 때 쓰는 40편의 의식용 음악으로 셋으로 분류되는데, 「周頌」(31편), 「魯頌」(4편), 「商頌」(5편)으로 나누어지며, 상송은 은나라 후예가 있던 宋에서 불렸던 시가였다.중국은 시의 나라이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시가 문학이 발달하였고, 대부분의 황제들은 문학의 애호자임과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무제·조조·수양제·당현종이 그러한 예이며, 당대의 이백·두보·백거이·한유, 송대의 구양수·왕안석·소동파로부터 최근의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정치적 지위는 높았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는 시적 능력을 정치적 능력과 상관시키는 경향이 농후했다.이러한 시학과 정치학의 결합, 즉 중국식의 정치시학적 입장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공자이며 『시경』은 그러한 이념에 의해 편집된 최초의 시가집이다.『시경』은 대개 採詩·陣詩·獻詩의 방법으로 수집된 것을 당시의 樂官들이 선정하여 편집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는 제왕들이 채시관을 두어 매년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각 지방에 파견, 시를 모으도록 하여 각국의 민심동향과 정치의 반응을 살펴 이를 시정의 참고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수집된 시들은 악관의 손에 의하여 음률에 맞게 정리되고 편집되었을 것이며, 그후 공자가 다시 이것을 정리한 것이 오늘날의 『시경』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자가 『논어』에서 시삼백 이라는 말로 『시경』의 총편수가 3백여 편이었다고 한 것으로 유추된다.공자는 6경, 즉 詩, 書, 禮, 樂, 易, 春秋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본으로 삼았다. 그는 특히 시를 매우 중요시했으니, 그것은 시가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전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논어』「위정」편에 시삼백은 한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 고 했으며, 또 「양화」편에서는 사람이면서 『시경』의 주남 소남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담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로 했다. 이렇듯 공자는 『시경』을 유가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어 전국시대에도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나 순자가 『시경』을 중시했다.현대학자들은 『시경』은 경학이 아닌 학문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래의 경학자들은 『시경』을 정치의 도구로, 또 禮敎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각기 자기들 시대에 적용되게 왜곡시켜 주해했으나, 이제 『시경』은 『시경』의 본래적인 면모, 즉 과거 2천 년간 경학으로 연구되었던 『시경』은 오늘날 고대 문학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비록 근대에 와서 많은 학자들의 반론에 의해 『시경』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지양되고 민요로서 순수문학적 의의가 회복되었지만 세계를 인식하고 장악하는 훌륭한 機制로서의 시적 능력을 함양시키고,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제국의 문학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 책의 가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서경』은 고대 중국에서 군왕의 포고, 명령과 군신 간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것을 정리한 것을 엮어 놓은책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단지 서(書)라고만 불렸으며, 서한 초기부터는 상서(尙書)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서경』이라고 불린 것은 송(宋)나라때부터이다. 중국 고대 각 왕조의 사관(史官)중 군왕의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가 기록하고 편집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서한의 사마천이 사기에서 공자가 편집했다는 설이 있다.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尙書), 주서(周書)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우서는 우나라의 글 로 요임금과 순임금의 치적을 기록하였다. 우서의 우는 순임금의 씨족명인 유우씨에서 유래한다. 내용은 요임금과 순임금의 치적을 주로하여, 당시에 크게 공을 세웠던 신하들의 말과 업적이 수록되었는데, 요전, 순전, 대유모, 고요모, 익직의 다섯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글들은 순임금의 사관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아니하고, 춘추시대 사가인 공자의 추기라고도 한다. 당시의 중국은 씨족사회의 발전 단계에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가장 고심거리는 황하의 범람이었다. 이 글을 통해 요임금, 순임금을 비롯한 당시의 치자들이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으며 백성들을 아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