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서론2. 본론⑴-1. 아테네의 민주정치① 개혁 배경② 솔론의 경제·사회개혁③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프레이스테네스의 개혁⑴-2. 민주주의의 결과①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② 아테네 민주정의 특성③ 아테네 민주정치의 한계④ 현대 민주주의와의 차이⑵-1 스파르타의 정치① 군국주의 체제 성립② 리쿠르고스 체제③ 원로회의와 민회④ 에포르⑵-2 군국체제의 결과① 문화적 정체성② 군국주의 체제의 발전과 현대 공산주의와의 상이점3. 결론【참고 문헌】1. 서론아테네(Athenae)는 그리스의 고도이자 수고,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아테네는 BC 6세기를 전후하여 긴박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직면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하였다.이리하여 귀족과두제는 모든 시민에게 폴리스 정치에 참여하는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는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 BC 8세기 중반부터 왕권이 제한되고 소수 귀족들이 지배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귀족과두제가 아테네에 수립되어 약 2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왕정이 폐지된 셈이였고, 행정·사법·군사에 관한 최고권은 해마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아르콘이 행사하게 되었다. 임기를 마친 아르콘은 자동적으로 귀족회의의 구성원이 되었고, 시민총회라 할 수 있는 민회는 군 복무자격이 있는 모든 남자 시민들의 회합이었다.아테네의 민주정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이다.오늘날에는 에브로타스 강 오른쪽 연안에 있는 라코니아 주의 주도, 도시 주변에 고대 유족이 산재해 있는 모습은 BC 6∼2세기에 스파르타 도시 국가를 다스린 군사 과두정부 지배자들의 엄격함을 보여준다.헬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남부에 있는 스파르타는 크기, 자원 및 역사적 과정에서 다른 폴리스들과 달랐다. 스파르타는 동북쪽과 서쪽이 산악으로 막혀 있고 천연적으로 좋은 항구가 없었으므로 외부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스파르타가 문화적으로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스파르타인들은 일치 단결해 군국주의다. 이에 따라 사회적 긴장은 고조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다.개혁을 촉진시킨 또다른 요인으로 BC 7세기경 리디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화폐의 영향을 받아 상공업은 더욱 번성해져 뚜렷한 사회계급으로 상공업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술상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전투에서 보병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중무장보병의 밀집대형이 더 효과적인 전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무장 보병으로 충원된 사회계층은 중농 이상의 농민과 부유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귀족들과 더불어 새로이 많은 평민이 보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힘없는 사회 세력이었던 평민이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② 솔론의 경제·사회개혁귀족세력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드라콘(Dracon) 입법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BC 621) 이 법은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내용면에서 가혹한 점이 있으나 귀족 출신 재판관의 권한을 제한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하지만 실제에선 농민 생활 상태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도시 중산층은 좀 더 가시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BC 594년경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Solon)이 개혁을 단행하였다.솔론은 가난한 농민의 채무를 탕감하고 채무노예를 금하며 토지소유의 상한을 결정하는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정치개혁은 귀족의 권한 남용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첫째 4백인회를 창설하여 중산층의 정치참여를 허용했고, 둘째 하층계급에게 민회 참여권을 주었고, 셋째 전체 남자시민의 선거에 의한 최고법정을 설치하는 한편 배심원 제도를 수립하였다.정치개혁이 귀족정치를 근본적으로 청산한 것은 아니었으나, 귀족계급이 독점한 정치적 지배권을 축소하고 국가적 정책결정에서 시민 발언권을 상대적으로 확대하였다.사회적으로는 시민계층을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네계급으로 나누어 정치적 위상을 규정하였다. 이 사회구분은 가족적 유대관계를 완화하고 씨족집단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재산소유에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금권정치라람은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BC 546-527)였다. 그는 BC 546년 귀족과두제를 무너뜨리고 참주제를 수립하였다. 아테네의 국가 기본구조는 변하지 않았으나 정책수행을 위한 권력은 참주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치는 이른바 계몽군주정치였다. 그는 귀족계급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고, 소농과 상공계층의 복리를 증진하고 시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였다. 공공토목공사를 시행하여 취업기회를 확대했으며 공정한 사법행정을 실시하고 종교와 문화를 촉진하였다.그후 보수세력이 솔론의 자유화노선을 백지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자유와 보수 양파가 대립하여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Cleithenes)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과감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BC 508년 참정권 확대를 바라는 평민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하였다. 10부족 개편, 5백인회 구성, 민회 개편, 도편추방제 창설 등을 통해 아테네 정치제도를 기본적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주요 행정기관, 10부족 개편을 바탕으로 법령심의권 및 최고행정권을 행사하는 주요 정치기관인 5백인회가 만들어졌다. 5백인회는 50명씩 10개의 분과로 나뉘어 각각 1개월간 국가행정을 관장하였다. 5백인회 의원은 누구나 일생동안 두 번 이상 연임할 수 없게 하여 시민 각자에게 참정 기회를 고루 부여하였다.최고기관인 민회의 조직이 바뀌고 그 권한도 확대되었다. 민회는 5백인회에서 제출한 법령의 토의 및 표결, 선전포고, 예산 편성, 아르콘의 재임기간 중의 재무감사등을 다루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⑴-2 민주주의의 결과①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다수에 의한 지배. 법 앞의 평등 및 자유로운 개성의 발휘였는데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가 완성된 것은 BC 5세기 후반 즉, 페리클레스시(Pericles)대에 이르러서였다. 아테네 정치의 핵심은 시민 전체가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데 있었다. 시민 의의 특성은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사법 민주화에 있었다. 법정은 본질적으로 민회의 경우와 같이 민주주위 원칙에 따라 조직되었다. 판결에 대해 상소하는 항소법원은 폐지되었으나 그 대신 모든 소송사건을 다루는 권한을 가진 일반법정이 있었다.그리스의 독특한 제도는 배심원이 유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하는 배심법정이었다. 법정이 어떤 행정관리에 대해 할 수 있는 감사는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 취임하기 전 관리후보자의 자격 심사 둘째, 임기 만료시 임기중의 행적에 대한 감사 셋째, 임기중의 재무관계나 공금 취급을 감사하는 것이다. 입법분야에 대해서도 법정은 5백인회나 시민총회의 결의가 위헌인지 아닌지 여부를 따지고 탄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민이 불복 제소하는 경우 법 집행이 정지되고 법정은 법의 무효까지도 결정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위는 사법 중심의 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③ 아테네 민주정치의 한계아테네 민주주의가 근대적 민주주위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테네 민주주위는 시민권을 가진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제도였다. 플레이스테네스 시대에는 거류 외국인을 포함하여 주민의 대다수가 시민권을 가졌으나,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시민권을 가진 주민은 소수였다. 정치참여는 데메스에 등록된 남자 시민의 후손에게만 해당되었고, 부녀자들는 폴리스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소수 지배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특히, 페리클레스 시대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이며, 무력에 의새허라도 동뱅세력을 복속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었으므로,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④ 현대 민주주의와의 차이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아테네 민주주위가 현대 민주주위보다 더 철저하였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행정관의 선출, 군사위원을 제외한 모든 관리의 임기 및 연임 제한, 다수결 원칙의 철저한 준수등은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보통 사람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한 제도였다.둘째로 아테네 민 담당케 한다는 것이다. 추첨제와 윤번제는 인구수가 적은 소규모 정치 공동체 또는 사회구조가 단순한 사회에만 적용될 수 있는 특별한 제도였다.⑵-1 스파르타의 정치① 군국주의 체제 성립스파르타(Sparta)체제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휘를 억압하는 경향을 띠고 중산계층의 대두를 어렵게 하였다. 독특한 군국주의 체제는 문화 침체에 대한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적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른바 '서정시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BC 9세기경 스파르타는 주변의 작은 농촌들은 결집하여 폴리스로 발전했으며, 점차 라코니아에서의 지배범위를 확대해갔다. BC 750년까지 스파르타는 소수자 독재 체제를 취하였다. 과잉인구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식민활동보다는 무력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게되었다.풍요하고 비옥한 메세니아(Messenia) 스파르타의 정복 대상으로, BC 8세시 전반 제 1차 메세니아 전쟁을 시작하였고, 20년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노동력으로 부렸다. 그 후 BC 650년경 스파르타의 착취와 압제에 저항한 메세니아인이 펠로폰네소스의 반(反) 스파르타 세력 후원 아래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은 제 2차 메세니아 전쟁이었다. 메세니아인의 항쟁은 끈질기고 맹렬하게 약 30년간 계속되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이 전쟁을 계기로 스파르타의 정치와 사회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스파르타는 체제 전환을 시도하게 되었고,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비귀족계층은 귀족과 맞먹는 권리를 요구했고, 이 움직임이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자 귀족들은 사회체제 개편에 동의하였다.이러한 메세니아 전쟁을 겪으면서 군국주의는 더 확고하게 제도화되었다.스파르타의 역사를 통해 내내 존속한 왕정은 특이한 이원왕정(二元王政)이었다. 즉, 두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씩 왕을 선출하고 두 왕이 공동통치하는 제도였다.스파르타는 보수성과 폐쇄성을 고수하면서도 정치·사회적 동요로 사회체제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 개편은 전설적인 입법었다.
목 차Ⅰ. 서론Ⅱ. 프랑스 혁명의 발단과 사회정세⑴ 프랑스의 계급과 구제도의 모순① 앙시앵 레짐과 특권계급② 제3신분인 시민계급과 농민⑵ 재정 위기Ⅲ. 프랑스 혁명의 전개⑴ 삼부회 소집⑵ 혁명의 시작① 국민의회와 바스티유 함락② 바스티유 함락 이후의 파리⑶ 국민의회의 개혁①국민의회와 국왕② 새헌법과 개혁③ 대외전쟁Ⅴ④ 국민공회와 당통⑷ 프랑스의 제1공화정① 혁명시대 정파들의 등장② 루이 16세의 처형과 대동맹③ 공포정치와 혁명의 과격화④ 국내의 변화와 공포정치의 결말⑤ 총재 정부Ⅳ. 프랑스 혁명의 결과⑴ 프랑스 혁명의 영향⑵ 프랑스 혁명의 의의⑶ 프랑스 혁명의 한계Ⅴ. 결론【참고 문헌】Ⅰ. 서론혁명은 본질적으로 낡은 군주정체제의 타도와 새로운 정치체계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치적 체제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회적 구조가 있는 법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 구조가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변화되기란 확실히 훨씬 더 어렵다.18세기 프랑스 사회의 실제적 유형 및 혁명이 그것에 미친 충격에 관해 우리가 실제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적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역사 연구에서 사회적 범주로 생각되었던 것들은 사실 모두 정치적인 범주들이다. 3/4세기에 걸친 혁명사 연구는, 사회적 집단의 움직임에 관한 많은 논평들도 포함해서, 정치학에서 빌어온 관념들의 영향 하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정치학의 범주들이 사회사의 맥락 속에 옮겨졌던 것이다.서양사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 연대 중 가장 상징적인 해는 1789년이다. 그 해 이후에 비로소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혁명이 압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점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프랑스 혁명 지도층은 기존 사회제도를 청산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치 ·사회·문화적 구조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다른 나라들의 역사적 변화도 일으키게 된 원인을 제공하는 사건이었다. 혁명은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동요시켰다. 그것은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선포하고, 처음으로 입헌통치를 실 온갖 향락을 누리고 , 벌써부터 창의적인 기백과 능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마치 중세의 장원제도 아래 봉건 영주와 비슷한 것이 이때의 프랑스 귀족의 특권이었다.당시 프랑스에는 오직 신을 찾고 신앙에 정진하려는 유덕한 성직자는 고위층에는 별로 없었다. 이 점에서 귀족과 고급 성직자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성직자는 그 수가 약 14만으로, 그 상하의 차이는 이때 와서 더욱 심해갔다.프랑스의 궁중 귀족과 고위 성직자가 오며드는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3,4천명의 관리 외에, 2천필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이 궁정의 중심은 물론 왕으로서, 왕은 왕족·고관·귀족들과 더불어 하루 종일 환락에 젖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궁중의 최고의 낭비자는 왕비 마리 앙뜨아네(Marie Antoinette)였다. 그녀의 사치성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었다.강인한 심신을 가졌던 루이 14세는 귀족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잘 다루어 이의 균형 위에 훌륭하게 절대 왕정을 육성시켜 나갈 수가 있었지만 그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루이 15세는 그가 일으킨 여러 대외 전쟁에 실패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차츰 떨어지게 하였고, 루이 16세도 범용한 인물로서 계급적 모순이 점점 심하여지고 또 궁정 자체가 낭비와 음모와 부패의 소굴로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② 제3신분인 시민계급과 농민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특권층인 제3신분에 포함된 사람들은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변화의 폭이 넓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은행가, 유명한 문인에서부터 아주 가난한 농민이나 노상의 거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동질적 집단이었다.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여전히 봉건적 부담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직접세와 염세등의 간접세로 수입의 절반을 내 놓아야했다. 염세는 프랑스 혁명 전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세금이었다.정부는 7세이상의 사람들에게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하였다. 소금의 부정매매는 심하게 단속되고 엄벌의 대상이었다. 염세 때문채는 배로 늘어났고, 국가 수입의 반 가량이 정부의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는 데 지출되었다.루이 16세는 이러한 국가 재정의 위기를 깨닫고 일찍이 1774년 튀르고를 임용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시도하였다. 튀르고는 상공업의 제한을 철폐하여 자유방임 원칙을 따르는 한편 재정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세율을 낮추고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과세하려고 했으나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 파면 당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여러 재무장관들이 있었으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1787년 루이 16세는 절망적인 가운데 명사회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진 못했다. 국가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1세기 반이나 소집한 일이 없는 삼부회를 소집해야하는 결론을 내렸다. 1788년 5월 다음해에 있을 삼부회 소집이 공고되었다. 삼부회의 소집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Ⅲ. 프랑스 혁명의 전개⑴ 삼부회 소집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루이 16세와 네케르의 참석하에 개회했다. 삼부회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벽촌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 제3신분에 속한 프랑스 국민의 절대 다수는 삼부회의 소집을 계기로 사회개혁을 요구하였다. 구체제 프랑스가 당면한 어려움과 장래의 해결 방향을 적은 '카이에(Cahiers)'를 제시하였다.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성문화한 헌법은 정부의 무책임한 권리남용과 자의적 체포를 막고 정당한 재판 및 생명과 재산 보호를 보장할 것이었다. 5월 5일 개회된 삼부회는 관례에 따라 별실에서 따로 신분별 회의를 하고 신분별 투표를 요구하였다. 각 신분의 대표수가 동수였던 중세 이래의 관례대로는 제3신분에게 불리하므로 제3신분은 그들이 국민 대다수의 대표자이므로 대표수를 배로 증가할 것과 신분별이 아닌 머리수 표결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제3신분 대표수를 600명으로 증가시킬 것에는 동의하였으나, 표결방식에 관해서는 미결정 상태였다.⑵ 혁명의 시작① 국민의회와 바스티유 함락제3신분 대표 절반 가량은 법률가들이며 나머지가 상인, 은행가, 정부언」이었다.이 선언은 입헌정치 정신을 요약하였으며 민주주의 혁명의 배경이 된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 권리 선언은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의회는 계속해서 헌법제정에 착수하였으나 국왕 루이 16세와 귀족 세력들은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사회는 혼란하고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올랐으며 실업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초, 서민 여인들이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사유 행진은 바스티유 함락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 초기의 극적 사건으로서의 의회를 왕으로부터 독립시켜 민중에게 예속시킨 사건이었다.② 새헌법과 개혁1791년 9월까지 국민제헌 의회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선거를 통한 2년 임기의 입법의회를 두었다. 입법의회는 법률을 제안하고 통과시키는 유일한 기관이었다.새헌법에 따라 왕은 중요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나 동시에 의회의 견제를 받았다. 왕의 거부권이 프랑스 혁명의 진행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왕은 국가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으며 왕가는 연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권리선언에 보장된 권리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제한선거 제도를 채택하였다. 모든 프랑스 남자 시민은 능동시민과 피동시민으로 양분되었고, 3일간의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는 시민은 능동시민이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에서 제한된 시민은 피동시민이었다. 이와 같이 일반시민의 발언권은 제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간접선거제로 인해 일반 여론이 반영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는 모든 시민의 입법 참여권이 인정되었음에도 1791년의 프랑스 헌법에서는 주로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이 크게 반영되었을 뿐이었다.제헌의회는 헌법 제정 이외에도 만든 개혁을 시도하였다. 봉건제와 농노제이 일어나고 파리 자치시 정부 창사가 점령되고 말았다.이에 좌익 의원들은 왕권 정지를 가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국민공회 선거를 규정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당통은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독재하였다. 동시에 파리 자치시 정부는 도시 하층민을 대변하면서 상당한 세력을 장악하였다.루이 16세의 반역과 9월 2-3일의 시민학살 계획이 발각되었다고 선동되어, 투옥중인 반혁명 혐의자들과 비선서 성직자들은 재판없이 사형되었다. 9월 2일부터 7일까지 약 2천 명의 왕당파가 무차별 학살되었다. 이것이 '9월 학살'이다.왕정이 정지 된 수 입법의회는 능동시민과 피동시민 구분없이 21세 이상의 남자 시민의 투표권을 인정하였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 첫 회합을 가졌고, 다음 날 국민공회는 프랑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22일로 공화정의 첫날이 시작됨을 공고하였다.비교적 온건한 프랑스 혁명의 제 1단계는 끝났다.⑷ 프랑스의 제1공화정① 혁명시대 정파들의 등장프랑스 혁명은 도시의 노동자·소시민층이 혁명의 민중화를 위해 매진하는 제 2단계로 들어섰다. 1792년 8월 10일 입헌군주제라는 온건한 체제는 급진 공화제로 바뀌었다. 국민공회는 3년간의 회기를 통해서 미해결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다.국민공회가 회합 첫날인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 승리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군은 브라운슈바이크가 지휘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이 승리는 혁명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국민의회 주도세력인 당통파에게 용기를 주었다.프랑스 혁명이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정당이나 정파가 형성되었다. 국민공회가 소집된 기간 중에는 좀 더 과격한 브리소파(Brissotins)정파가 정계를 좌우하였다. 이 파의 약 195명의 의원은 국민공회 의장석 우측에 자리잡고 있었다.반대편 좌측에는 산악파가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자코뱅당 소속의원이었다. 이 두파의 중간 의석을 차지한 국민공회 대다수 의원들은 평원파 또는 습지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소시민과 민중을 세력기반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