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의 아버지 용춘신라의 왕위 계승 세력은 성골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골이 신라 말까지 왕위를 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골이 끝난 뒤 다음 세력, 진골의 새로운 인물에 의해 신라는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진골의 첫 왕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武烈王(재위: 654~61), 바로 김춘추이다. 그는 眞智王의 아들인 龍春과 眞平王의 딸인 天明夫人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 용춘(龍春)이란 인물은 비록 왕은 아니었지만 김춘추가 왕이 되는데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를 하고 있다. 용춘은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아주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골왕이 지배하던 중고기 후반에 살면서 인망을 쌓아 아들인 김춘추의 앞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다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국가를 크게 발전시킨 무열왕계의 싹이 된, 참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용춘(龍春), 일명 용수(龍樹)는 그가 진지왕(眞智王)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지만 실제로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분석하여 실각한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 성골 왕실을 대신하여 새로운 진골 왕실을 여는 싹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形郞) 설화설화를 한글로 번역하여 옮겨 보면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인데, 성은 김씨고,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다.대건 8년 병신에 즉위했다.나라를 4년 동안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운데다 음란한짓에만 빠졌다.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내어쫓았다.그전에 사량부에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도화랑이라고 불렀다.왕이 그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사랑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말했다."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에게 가게 하는 것은 비록 만승천자의 위엄으로도 끝내할 수가 없습니다."왕이 말했다."죽이겠다면 어쩌겠는냐?"여자가 말했다."차라리 저자에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다른 남자를 따르고 싶지는 않습니다."왕이 장난삼아 말했다."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네, 괜찮습니다."왕이 그를 놓아 보냈다.그 해에 왕이 쫓겨나 죽었다.2년 뒤에 그의 남편도 역시 죽었다.열흘 뒤 별안간 밤중에 왕이 생시와 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의 방에 와서 말했다."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어졌으니 괜찮겠지?"그 여자가 가볍게 하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알렸더니, 부모가 말했다."임금의 명령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그 딸을 방으로 들여보내 이레 동안 모시게 했는데, 늘 오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이레 뒤에 왕이 별안간 사라졌다.그여자는 곧 임신했는데, 달이 차서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한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이라고 했다.진평대왕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비형랑이 열다섯 살 되자 집사 벼슬을 주었다.그런데 밤마다 먼곳으로 달아나 놀기 때문에, 왕이 요사 50명을 시켜서 지키게 했다.그는 언제나 월성을 날아 넘어서 서쪽에 있는 황천 언덕 위까지 가서, 여러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용사가 숲속에 숨어 엿보았더니, 여러귀신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벽종 소리를 듣고는 각기 흩어져버리고, 비형랑도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군사가 사실대로 아뢰자, 왕이 비형을 불러 물었다."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니 참말이냐?"비형랑이 말했다."그렇습니다."왕이 말했다."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부려서 신광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보아라."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게 해서 하룻밤에 큰 다리를 이루었으므로 그 다리 이름을 귀교라고 했다.왕이 또 물었다."귀신들 가운데 인간 세상에 몸을 나타내어 조정의 정치를 도울 만한자가 있느냐?""길달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 정치를 도울 만합니다."왕이 말했다."데리고 오라."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와서 알현하자 집사 벼슬을 내렸는데, 과연 충직하기 짝이 없었다.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칙명을 내려 길달을 양자로 삼게 했다.임종이 길달에게 명하여 홍륜사 남쪽에 누문을 세우고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자게 했으므로, 그 이름을 길달문이라고 했다.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달아났다.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으므로, 그 무리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며 달아났다.당시 사람들이 비형을 두고 사를 지었다.........성스런 임금 영혼이 아들을 낳았으니비형랑이 여기에 집을 지었네.날고 뛰는 온갖 귀신들아이곳에 함부로 머물지 말아라...........민간에서는 이 시를 써 붙여 귀신을 물리쳤다.초반의 내용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진지대왕의 생전에 못다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비형랑이다. 그는 신비한 탄생과정과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럼 그 비형랑은 과연 누구일까?■비형랑의 아버지 진지왕위의 설화는 진지왕과 관련된 사건도 설명하고 있다. 진지왕에 대해 먼저 살펴본다면,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형인 동륜 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조카가 나이가 어린 관계로 왕위에 오른 이이다. 그의 불교식 이름 사륜(舍輪)은 그의 형이 동륜(銅輪)이므로 전륜성왕의 이름 순서로 보아서 銅輪의 다음 서열이 되는 철륜(鐵輪) 즉 쇠륜의 변형된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설화로 돌아가 보면 진평왕은 정란환음(政亂荒 ) 즉,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기 때문에 폐위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 보면 진지왕을 후원했다고 여겨지는 상대등 거칠부(居柒夫)가 죽은 뒤 별다른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적 세력 다툼이 생겼을 것이다. 정통 태자였던 그의 형인 동륜이 죽었지만 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는 동륜계의 음모가 있어 동륜계와 사륜계의 사이에 풍랑이 일어나고, 결국은 진지왕이 물러나고 그의 조카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복사꽃처럼 예쁜 도화녀설화에 보면 도화녀를 사량부의 서녀(沙梁部之庶女) 라고 한 점을 주목해보자. 흔히 사량부는 사탁부(沙啄部)라고도 하는데 신라 6부의 중추세력으로 왕실에 가까운 세력 집단이었다. 서녀(庶女) 는 언뜻 보면 첩의 딸이란 의미지만 여기서는 평범한 신분의 여인, 즉 평민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평민이었을까?신라 골품제의 실상을 전해주는 중국의 사서 의 신라전에 의하면 왕은 고모나 이모 종자매등 제1골, 즉 성골내의 혈족과 결혼하며 그 다음골인 진골과는 결혼하지 않고 다만 첨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사량부의 서녀 인 도화녀도 왕과 결합해 아들을 낳았던 만큼 그 신분이 제2골인 진골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와 그 부모의 의연한 태도를 보더라도 이들은 사량부 출신의 진골귀족이었을 것이다.비형이 진지왕의 사후에 태어났다는 설화의 내용과 왕의 재위기간이 3년에 불과했던 사실, 그리고 왕이 도화녀를 처음 만난 것이 왕의 재위 마지막 해였다는 것까지 고려해 보면 비형은 유복자였다고 보인다.■이상한 이름 鼻荊비형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비형이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는 진평왕 즉위년을 전후한 무렵은 한자의 음을 빌려 이름을 표기하던 시기였으므로 한 사람의 이름이 음은 같되 뜻에서 차이가 있는 여러 글자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비(鼻)는 물론 코이며 형(荊)은 가시 혹은 가시나무를 뜻한다. 이것들은 좀 더 쉬운 글자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비형이란 이름은 음만 빌려 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용모나 특징, 처지 혹은 신분을 비유적으로 말해주는 이름이 아닐까??■용의 형상비형은 귀신을 부리며 제압할 수 있는 존재이고 더구나 왕의 아들이기도 한만큼 용(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용은 왕을 상징하거나 왕을 돕는 존재이며 적어도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호족 등을 나타낸다. 아울러 비형이 살던 진평왕 당시에도 용은 신통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어 기우제에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제사의 대상으로 삼아 비를 내려줄 것을 바라기도 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생각하던 용의 형상은 귀면이나 용두보당 등을 보고 짐작할수 있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 얼굴 한 가운데 코가 솟아 있고 강렬한 수염과 뿔이 나 있으며 촉각이나 송곳니가 뻗어 있어서 매우 괴이하고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이 같은 용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서 진지왕의 아들을 비형(鼻荊)이라 이름했던 것이 아닐까?■용이란 사실을 감춘 이유그 당시에는 비형을 용으로 직접 묘사하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많았다. 비형은 폐위된 왕의 아들이고 그의 모친인 도화녀의 신분도 성골이 아닌 진골이라서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서는 역시 격이 떨어지는 면이 있으므로 곧바로 용으로 그려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왕이 돈 후손들이 성골이 아닌 왕자였던 비형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부담감을 가져 꺼렸을 것이다.■왕궁에서 자란 비형랑비형은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신분이 성골이 아니므로 왕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불쌍한 어린 사촌 동생을 진평왕이 거둔 것이다.■화랑이 된 15세의 소년설화를 보면 비형은 15세에 궁중의 집사가 되었다. 그리고 왕이 보낸 용사 50인에게 멀리 달아나 논다는 이유로 매일 감시를 당했다고 하는데 무슨 뜻일까? 이것은 비록 왕권을 장악했지만 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진평왕은 사륜계를 제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귀신을 불러다 놓고 논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가 화랑으로서 은밀하게 자신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모임을 갖고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진평왕이 비형에게 거느리고 있는 자 중에서 국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없는가 하고 묻고 이에 비형이 길달(吉達)이란 자를 추천한 것은 신라 정부가 화랑도를 조직화하고 적극 후원하게 된 목적과 바로 부합한다.■귀신을 부리고 쫓는 비형경주시 탑동 남천에 귀교라는 돌다리가 있었으니, 이 다리는 신라 진평왕때 비형이 귀신들을 시켜 만든 것이다. 귀신을 물리치는 용의 아들로 사람들은 인식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