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1조직 행동 이론리 더 십..PAGE:2리더십의 개념저 자정 의Hemphill & Coons(1957)집단의 활동을 공유된 하나의 모표로 집중시키려는 개인의 행동Katz & Kahn(1978)기계적으로 조직의 일상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영향력Schriesheim, Tolliver &Behling(1978)사회적 영향력 행사 과정으로 리더가 조직목표 달성을 위해서 하급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추구할 때 발생Peter & Austin(1985)리더십은 비전이요 우렁찬 응원가요... 열정(passion) 이다.[SK] Academy (1999)특정상황에서 집단이나 조직이 실현시킬 비전을 설정하고 비전을 실현하도록 구성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구성원이 기꺼이 스스로 실행하도록 개인과 조직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Jago1. 과정으로서 리더십은 강제성을 띠지 않는 영향력의 행사과정으로서 집단목표의 달성을 위해서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2. 개인특성으로서 리더십은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리라 믿어지는 사람들이 갖는 일단의 자질또는 성품리더십의 정의들목표 지향성사람들간의 영향력상호 교류힘영향력 행사과정리더십 정의의공통점강제, 강압, 지배 등의 영향력 행사방법과는 거리가 멀다.리더와 추종자들은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는 모종의 공유된목적을 중심으로 느슨하게나마 조직화 되어야 한다.리더와 관리자는 구분된다...PAGE:3리더와 관리자의 특성 구분관리자 특성리더 특성책임수행모방유지시스템과 구조에 초점통제위주단기적언제, 어떻게 관심수직적 관점현상태 수용전통적인 충복일을 옳게 함 (‘How’ 중심)혁신주도창조개발인간에 초점신뢰에 기초장기적무엇을, 왜에 관심수평적 관점현상태에 도전독자적 인간올은 일을 함 (‘What’ 중심)* 자료 : Warren Bennis, & J. Golldsmith, 1994, Learning to Lead..PAGE:4리더십 이론의 분류(1)제 1 유형 : 리더십은 리어진 상황에 적합하면 유효성이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낮아진다.리더의 행위 또는 특성리더십의 유효성제 5 유형 : 리더십은 변화 주도 행위다. [리더가 조직과 추종자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따라 리더십의 유효성이 달라진다.리더의 변화 주도 행위리더십의 유효성제 6 유형 : 리더십의 효과는 다른 요인들로 대체될 수 있다. [다른 요인들도 리더십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리더십 대체요인들리더십의 유효성상황의 적합성..PAGE:6리더십 특성이론과 귀인이론신체적 골격적 특성능력 또는 기술특성성격적 특성사회적[대인관계적]특성리더십 특성리더십 특성과 리더십 유효성간의상관관계가 약하고 일관성이 없다.어떤 경웅는 리더십 특성과 유효성의 관계가상황변수들의 존재여부에 따라 달라진다초기의 리더십 특성연구들은 연구방법상의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리더의 행동혹은 행동결과추종자들의끊임없는원인분석“리더십 때문”이라고 귀인리더의 행동과 결과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 때..PAGE:7리더십 행위이론구조주도 행위배려 행위집단 구성원들간의 관계 (직위, 역할)를 규정하든가 조직화하고 공식적 의사소통 채널을 설정하며 집단의 과업을달성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등과 관련되는 리더의 행의리더가 추종자들에게 보여주는 쌍방의사소통, 의견수렴,상호신뢰, 존중, 따뜻함 등의 범주에 속하는 리더의 행위가장 바람직한리더십 스타일구조주도고저저고배려구조주도와 배려의 유효성이 상황에 따라 달라짐.행위중심 이론에서는 리더십을 교육, 훈련을 통해 개발할수 있게 됨으로써 수많은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들이 등장관리격자 프로그램OSU 연구 결과인간에 대한 관심생산에 대한 관심951159컨트리클럽형무관심형중간형팀형과업형유지지향MP성과지향PM 리더십 이론..PAGE:8관계중심의 리더십 이론수직쌍관계이론 (VDL: Vertical Dynamic Linkage theory)- 리더는 구성원들 각자와 각기 다른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전제하에 그 관계의 특성을 결정하는원인과 결과 등을 규명내집단과 외집단내집단리더와 하급자는동업E:9리더십 상황적합성 이론Fiedler의 리더십 상황모델- 집단의 성과는 과업동기 또는 관계동기라고불리는 리더의 성격적 특성과 리더십 상황의호의성 간의 적합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LPC 설문에 의해 리더의 성격특성이 측정- 높은 LPC 점수는 관계지향적 리더십- 낮은 LPC 점수는 과업지향적 리더십(1)고(0)중(-1)저과업 중심 리더십관계 중심 리더십과업 중심리더십LPC와성과의상관관계좋음좋음좋음좋음나쁨나쁨나쁨나쁨고고저저고고저저강약강약강약강약바람직한리더십스타일상황호의성고중저Ⅰ Ⅱ Ⅲ Ⅳ Ⅴ Ⅵ Ⅶ Ⅷ리더-성원 관계과업구조리더의 직위권력상황변수들LPC 설문의 심각한 문제- LPC의 정의가 여러가지로 바뀌고 있음- LPC 설문의 타당성 결여- 조절변인의 선택과 적용의 문제- 메타분석 연구에 의해 타당성의 문제가 입증Fiedler의 기여- 리더십의 상황이론을 처음 제시- 리더십의 과정이 복잡한 과정임을일깨워 줌..PAGE:10House의 경로 목표 이론추종자 특성- 직무능력- 통제위치- 욕구상태대개변수추종자의 기대감환경적 요인- 과업 특성- 권한 체계- 작업 집단리더십 스타일- 지시적- 후원적- 참여적- 성취지향적결 과- 추종자의직무만족- 리더수용- 동기유발- 성과지시적리더십도구적 리더십이라고도 표현되며 하급자의 통제, 조직화, 감독 등과 관련되는 리더의 행위이다. 규정을 마련하여 준수토록 하고 부과된 작업일정을 수립하든가 직무를 명확히 해주는 등의 리더행위를 포함한다.후원적리더십추종자들의 욕구와 복지에 관심을 보이고 언제든지 친구처럼 대해주며, 동지적 관게를 중시하는 리더의 행위를 말한다.참여적리더십의사결정을 할 때 하급자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려해 주는 리더십 행위를 뜻한다.성취 지향적 리더십도전적 목표를 수립하고 최우수를 지향하며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도록 함으로써 추종자들이 최고의 성과를 달성 할 수 있도록 하는 리더십 스타일House의 리더십 스타일..PAGE:11Hersey와 Blanchard의 상황적 리더십 이론(고..PAGE:12Vroom/Yetton, Vroom/Jago의 리더십 의사결정이론서술적 부분규범적 부분어떤 개인적 특성을 갖는리더가 어떤 상황에서 하급자들을 얼마나 참여시키는가에관련된 부분주어진 속성을 갖는 상황에서어느 정도로 참여 시켜야효과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가에 관련된 부분상황 속성개 인 차참여도의 정도의사결정 유효성상황 속성(서술적 부분)(Descriptive)(규범적 부분)(Normativve)..PAGE:13리더가 선택할 수 있는 의사결정과정 (방법)AI(순수독단형) 리더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를 이용하여 리더가 스스로 문제를 풀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AII(참고적 독단형) 리더가 하급자들로부터 단순 정보를 얻되, 더 이상의 하급자 참여 없이 리더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CI(개별 참여형) 리더는 관련된 하급자들과 각각 개별적으로 문제를 공유하며 그들로부터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나 제안을 얻되,하급자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그룹으로 접촉하지는 않으며, 최종의사결정은 리더가 내림.CII(집단 참여형) 리더가 직면한 문제를 하급자들과 ‘그룹미팅’을 통하여 공유. 하급자들의 아이디어나 제안들을 얻지만 최종결정은 리더가 내림.CII(위임형) 하급자 그룹에게 결정권한을 위임하는 경우. 리더는 직면한 문제를 하급자들과 그룹으로 공유하며 그들 스스로 대안들을 생각해 내고, 평가하여 모종의 해결책에 의견일치를 보도록 함.의사결정과정들의 유사점과 차이점구 분AIAIICICIIGII결정과정참여자리더 혼자리더와 하급자들개별적으로리더와 하급자들개별적으로리더와 하급자들개별적으로리더와 하급자들집단으로참여의 방식혼자 결정하급자들이 리더의 구체적 질문에 응답하급자들이 리더와 1대1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대안을 추천함하급자 집단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분석함하급자 집단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분석하여 의견일치를 이룸결정권자리더리더리더리더하급자 집단* 자료 : A. Weise, 1976, “Leadership styles: Which are best when?” Supervisory 하급자들이 수용할 가능성이있는가?Yes or No속성F: 하급자들의 조직목표 공유여부하급자들이 조직의 목표를 공유하는가?Yes or No속성G: 하급자들간에 갈등 존재여부제시된 대안들에 대하여 하급자들간에 갈등이나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하는가?Yes or No속성A : 리더가 처리해야 하는 사안 자체가 대안을 잘못 선택했을 때 조직이나 집단에 큰 손실이나 불이익을 가져오게 되는 사안속성B : 리더가 특정 사안을 처리하는 데 있어 관련된 정보나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는가를 묻는 것속성C : 리더가 현 상태와 바람직한 상태, 그리고 현 상태를 바람직한 상태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때속성D : 결정사항의 성공적 실행이 실행담당자들의 성취집념에 달려있는 문제에 대하여 ‘하급자 수용이 중요한 문제’ 라고 정의속성E : 리더가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 하급자들에게 결정사항을 통보하여 실행하도록 했을 때 하급자들이 그 지시된 결정사항을수행할 가능성속성F : 하급자들이 자신이나 리더 또는 조직내 특정인의 목표달성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공동목표 달성을 우선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속성G : 바람직한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급자들간에 의견불일치 또는 갈등이 존재하는가..PAGE:15Vroom / Yetton이론의 비판들첫째, 처방영역 내에서의 차별화에 실패둘째, 처방영역 외에서도 차별화에 실패셋째, 상황속성들을 예/아니오 로 이분함으로써 많은 유의한 정보를 포착하지 못함넷째, 중요한 상황변수 들이 포함되지 않았다.Vroom / Jago의 수정된 이론첫째, 상황 변수들을 보강 12개의 상황변수들로 구성둘째, 상황속성이 많아지고 응답형식이 다양화됨에 따라, 전체적인 상황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더 이상 Vroom/Yetton 모델에서와같은 방법으로 상황들을 줄여서 그 각 상황에 대하여 처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셋째, 분석된 상황 각각에 대하여 하나의 의사결정과정만을 처방한다.넷째, 모델을 이용한 교육/훈련이 가능하도록 PC 프로그램과 사례과정이 개발되
일본의 종교(宗敎)◈ 일본에서의 종교 형성일본종교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은 6세기에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와 국민들 사이에서 민속종 교로 발전해 온 신도(神道)를 들 수 있다. 대략적인 종교 구성비는 신도 51.2%, 불교 48.2%, 기독교 0.6% 정도이다. 일본인들의 종교에 대한 관념은 매우 유연성이 있고 여러 종교나 종파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조금씩 원용하고 있다. 따라서 신생아에게 신도사원의 축복을 받게 하고 불교 승려에게서 결혼의 택일을 받으며 결혼식은 교회나 호텔에서 기독교식으로 거행하는 게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도(神道)일본은 예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온화한 기후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나 라를 신의 나라로 믿게 하였다. 수많은 카미(神, 성스럽고 초인간적인 존재)들이 사방에 가득 차 있다는 믿음이었다. 또한 씨족은 사회, 경제, 정치적인 단위였으며 우지 카미(氏神)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연대성의 단위기도 하였다. 이런 기본믿음을 바탕으로 일본 고유종교로서 신도(神道)가 나타났다.신도는 자연에 대한 숭배심이 종교로 발전한 것으로, 애니미즘(동물, 식물, 자연 현상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인 사고 방식)의 일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宮騎俊) 감독의 {원령공주}라든가 {이웃의 토토로} 혹은 다카하다 이사오(高畑勳) 감독의 {헤이세이 너구리전쟁 폼포코} 등의 애니메이션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일본인은 옛부터 자연 속에서 영적인 카미(神)의 세계를 보았다. 신도는 현재에도 일본인이 지닌 애니미즘적 신성 감각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이런 감각이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현대문명의 의의를 되묻게 하는 자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일본 신도(神道)라 하면 먼저 식민지 시대의 신사 참배나 야스쿠니 신사 등을 떠올리고 거부감을 느끼는 기성 세대가 많을 것이다. 일본 근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신도를 곧 근대 일본의 국가 신도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신도는 근대 일본의 국가 신도만을 의미나 신사 근처에 사찰 또는 불탑을 건축하는 관행이 발전했으며 신사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또한 신도의 가미[神]는 불교의 부처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 초반에는 신도와 불교의 융합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불교이론인 혼지스이자쿠세쓰[本地垂迹說]가 등장했다. 형이상학적인 부처는 본래의 근본실체(혼지)이며 역사 속의 부처는 그 실체의 화신(스이자쿠)이라는 이론이다. 신도와 불교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처와 신도의 신은 궁극적으로 통일체이지만 부처는 혼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그 화신인 스이자쿠인 것이다. 불교의 여러 종파와 신도의 융합(때로는 중국의 도교도 받아들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때 신사의 신관은 불교 승려들보다 지위가 낮았으며 신도의식에서조차 보조적인 존재로 격하되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정신적 각성기 동안 신도는 불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는데 이세 신도[伊勢神道] 운동은 신도의 신이 부처의 현시가 아니며 오히려 부처와 보살이 신도의 가미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2) 신기 제도의 완성-중국의 영향으로 천신지기(天神地祇)의 구별이 인식되어 신기제도(神祇制度)가 정비되었다. 701년 제정된 다이호령[大寶令]에서 볼 수 있는 신기제도의 기초는 이미 아스카키요미하라 령[飛鳥淨御原令]에서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율령체제의 정비와 함께 신기제도가 정비되어 신사제사도 정례화?국가화하여 신사가 국가와 결부되었다.3. 근세 전기 신도(에도 시대 중엽)-근세 전기 신도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에서 중기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 시기는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유교와의 습합이 이루어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문교정치 정신으로 진흥된 당시 유교 운동은 일반 문화 사상 주목할 만한 두 가지 경향을 수반했다.첫째는 배불 정신으로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유교의 현세적 인륜주의의 본질을 발휘할 것을 주장한 데에 따른 결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오랫동안 불교가 지녀 왔던 사회적 세력의 타자신이 사는 세계에 입각하여 카미를 인정한 것이며 그 우주의 삼라만상을 모두 신령의 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다신교로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커다란 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일본의 기독교1. 일본의 도입된 기독교현재 일본에서 기독교는 신자수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여 전국민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 종교이지만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독특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최초의 일본 선교사는 1549년 8월15일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던 스페인 예수회소속의 프란시스 사비에르였다. 그 후 가톨릭의 선교사역은 1579년까지 약 13만명이 개종하는 놀라운 부흥의 시기를 맞았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뒤를 이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1612-1868년)를 통해 300여년간 철저하게 탄압을 받은 결과 기독교인은 일본 땅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종교의 자유를 받아 기독교가 다시 자유를 얻으면서 신도가 생기게 되었지만 1994년말 아직 일본 내에 불교나 타종교에 비해 미미한 수준으로 현재는 약 1-1.5% 정도라고 한다.2. 메이지시대 초기의 기독교 수용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구미 개신교의 해외 선교는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계몽사조나 합리주의에 도전이었고, 기독교의 이른바 기성종교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던 신앙부흥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서구 세계가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우월성과 지배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생긴 종교적 문화적 활동에서 생겨났다.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도 역시 이들의 선교권에 있었다. 한편 일본에 도입되었던 개신교는 넓게는 18?19세기에 들어와 해외 선교에 나섰던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다.19세기 중반쯤에 선교사에 의해서 기독교가 일본에 도입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았다. 당시 일본은 구미 열강에 의해서 개국을 맞고 있었다. 1858(安政 5)년에 미국, 네델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불평등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에서 일본은8년 3월 태정관(太政官) 포고로 ?기리시단 종문의 의는 절대적으로 금지됨...? 이라는 포고문을 전국 방방곡곡 게시판에 게시되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는 사교인가? 라는 외국공사들의 항의를 받았다. 이에 정부는 기독교 금교령과 사종문 금지를 별도로 한 포고문을 붙였지만 사태는 여전하였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재차 일본에 도착하면서 교회당을 건설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을 표명한 나가사키의 가톨릭 신도 3천여 명이 1868년 6월 체포되어 여러 관청에 감금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국 공사들의 항의로 2년 후에는 모두 석방되었다.메이지 전부가 기독교 금교 정책을 고수한 것은 기독교 신자가 ?일본 신을 모독하고 풍속을 문란시켜 부모형제간의 불화를 야기시키는 것? 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천황을 정점으로 통치기구를 확립하기위해 황실 신도를 중심으로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정책을 추진해 가고 있었으며, 기독교는 이러한 점에서 사탄의 무리가 되었다. 불교 역시 막번 체제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신사로부터 불교를 일소해서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 1868.4)을 내렸다. 이것이 불교 배척운동이 되었다.1877년 이때부터 신도국교화 정책은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정부는 신사(神社)를 종교로부터 분리하고 이것을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게 되었다. 신도는 그 소박한 종교성을 상실해 버리고 국가 종교로서 개혁되기에 이르렀다.기독교에 관해서는 1873년 2월에 정부가 기독교 금지령의 포고문을 철폐한다고 발표했다. 2년전에 이와쿠라가 전권 대사로 여러 나라와 조약 개정을 교섭한바 있지만 그 나라들은 일본의 기독교 금지 정책을 구실로 삼아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정부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이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1872년 여름에 기독교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관계자들에게 표시했고 그 다음해 2월에 앞서의 금교령을 폐지 공포했다. 그들은 외교정책상 기독교를 묵인했을 뿐이고 기본적 인권으로서의 신교의 자유을 만들었다.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로는 작가 엔도 슈샤크, 소노아야코, 평론가인 이누가이 미치코, 오히라 마사요시 전 수상 등 저명인사도 적지 않다.참고문헌 : 도히 아키오.김수진 옮김 『일본기독교사』기독교문사문화이론연구소 『日本人과 日本文化의 理解』 보고사불교불교는 고대 이후 일본인의 주된 종교로 사상과 문학, 건축, 생활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쳐온 불교는 기원전 5세기에 인도에서 시작되어 6세기 중엽(공식적으로 서기 538년)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다. 백제의 불교를 접하게 되는 일본은 고도로 발달된 중국의 불교도 접하는 계기가 생기는데 이 시대를 가리켜 아스카 시대라고 부르며, 여기서 말하는 아스카란 바로 나라의 옛 이름이다. 그리고 7세기초 당시의 황태자이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쇼오토쿠 태자(574~622년)가 불교문화를 전파하는데 있어 주동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왕실의 섭정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이 새로운 종교와 불교에 관련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또한 불교가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9세기 초엽에는 불교가 주로 궁정의 귀족들을 만족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불교는 12세기경까지는 귀족을 위한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번성함과 동시에 무사계층에게는 선이 보급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일본인의 종교의 중심이 되어 있다.그리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일대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이 있은 시기였는데 이때는 뛰어난 고승들과 함께, 무사와 농부들에게 구제의 희망을 안겨주는 수많은 신흥불교 종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선불교의 기운은 전 계층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종 새로운 종파가 창설되어 호넨, 신란, 도겐, 니치렌 등의 승려들이 민중에게 알아듣기 쉽게 불도를 설파하였다. 또 이 때 무사들을 중심으로 선종이 보급되었는데,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의 하나가 된 다도
Ⅰ. 서론 : 연구 목적Ⅱ. 본론1. 터닝포인트 교육이란?2. 학문적 분석3. 사례분석Ⅲ. 결론1. 문제점2. 권고안첨부 1>첨부 2>Ⅰ. 서론 : 연구 목적목표를 성취해나가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 코스에 비유한다. 사람에 따라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밟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작은 성공의 축적을 통해도 비약하듯 성공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수세에 몰리던 사람이 역전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개인의 성격과 가치관은 개인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학습을 통하여 형성되고, 이는 지각과정을 통해 개인의 태도와 행동형성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학습은 가치관과 성격, 지각과 더불어 개인의 행동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개개인의 행동의 결실들은 조직체에서 조직의 성과로 나타나게 된다.최근 LG전자, 현대자동차, 롯데백화점 등 유수 기업 임직원에서부터 중소기업 임직원, 프로야구 선수단, 씨름단 등의 츠포츠 선수와 학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조직체에서 일명 “터닝포인트(Turning Point)” 라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서 터닝 포인트 교육이란 자신의 능력을 제약하고 있는 관점들이나 환경들을 극복하고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함으로써 근본적인 자기혁신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이다.앞으로 우리는 현재 다양한 조직체에서 행해지고 있는 터닝포인트 교육이 개인과 조직의 성과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이론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즉 터닝포인트 교육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 조직구성원간의 상호관계, 성과를 이루기까지의 과정, 조직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을 지각과 학습, 동기, 집단행동 측면에서 해석해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터닝포인트 교육의 문제점 및 한계점 등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경영자의 조직관리에 필요한 몇 가지 피드백을 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터닝포인트 교육이란?1) 교육의 목적① 사고패턴의 변화② 일에 대한 열정 개발③ 실천력 제고④ 긍정적 신념 개발⑤ 목표?비젼의 구체화2)태도변화, 행동변화를 이끌어내는 심리학 이론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행동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신경체계(Neuro)와 신경체계에 영향을 주는 언어(Linguistic)상호작용을 통하여 개인의 탁월성 개발 및 목표성취와 태도/행동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론 및 기법체계이다.3) 교육 효과① 깊은 수준에서의 의식개혁·관점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제까지의 의식을 형성해온 자신의 경험, 가치, 신념, 사고패턴 중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 들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② 자신의 신념체계가 현실적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 신념을 긍정적 신념 으로 전환 하는데 중점을 둔다. 나아가 원래 한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한계 를 설정한 것이므로 자신의 능력발휘를 제약하는 Map Of The World를 변화 시킨다.③ 교육이 재미있으면서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탁월함을 깨달아 깊은 의식 변화가 가능하도록 전개한다.④ 감자 뚫기, 비전여행, 송판격파, 숯불걷기 등 생동감 있는 시청각 교육 으로 진행하고토 의, 실습, 진단과 피드백, 사례연구, 게임, 음악과 에어로빅, Role Playing 등 다양한 체험 학습식 교수전략 으로 학습자 스스로 자신을 발견해 갈 수 있게 한다.2. 학문적 분석1) 지각과 학습① 우리는 항상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각하고 해석하며 과거 경험과 학습에 의해 이에 반응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형성해 나간다.- 지각이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써 교육을 통해 그동안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 용한 것들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 학습이란 반복적 연습/경험에 의해 행동잠재력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영구적 (지속적)이며 되풀이시키는 강화작용을 필요로 한다.② 터닝포인트 교육이 다양한 경험이 되어 구성원개개인의 행동이 변화될 수 있으며, 자신 안에 내재되어있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고, 이 변화가 어느 기간 동안 유지될 것이며 다시 한번 강화시키기 위해 주기적으로 새로운 형다, 가르칠 수 있다, 교육된 다는 이론이다.- 이 교육을 통하여 조직 구성원들이 보다 높은 성취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 르치는 것이 가능하다.3) 집단행동① 조직몰입- 조직몰입이란 조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으로,조직목표 = 나의목표,조직가치관 = 나의 가치관이다.- 교육으로 인하여 조직에 대하여 일체감을 심어주고 운명공동체를 느끼게 해줌 으로써 조직에 대한 헌신, 애정, 애착, 관심을 부여할 수 있다.② 응집력-구성원들이 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호감(구성원들이 집단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생각하 는지),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 응집력의 결정요인ⅰ. 구성원들 간의 호감ⅱ. 경쟁(집단 내 경쟁)ⅲ. 규모ⅳ. 참여정도ⅴ. 집단의 과거 성과- 응집력의 결과ⅰ. 성과ⅱ. 집단의 존속 유지- 팀웍을 다지는 Bop pike교육기법 을 통하여 구성원들 간에 일체감을 심어주 고, 그로인해 구성원들 간에 호감이 생기도록 할 수 있다. 또한, 교육에 참여하면서 발 생하는 경쟁 등으로 하여 구성원들 간에 응집력을 강화시킬 수 있으며, 그 응집력이 조직의 성과와 집단의 존속 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③ 팀의 활력화- 현대조직에서 팀의 효율성은 팀의 활력화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고 다음 네 가 지 요소가 팀의 활력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ⅰ. 팀의 능력-팀 구성원들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의 보유와 이 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ⅱ. 일의 중요성과 가치- 팀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일에서 느끼는 일의 중요성 과 가치ⅲ. 자율성-팀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자율성ⅳ. 성과에 대한 자부심-팀 구성원들의 성과가 목적 달성과 조직체에 중요한 공헌을 한다는 느낌과 이에 대한 자부심- 현대조직에서 팀의 활력화는 조직체 성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조직에서 팀의 높은 성과를 위해서는 팀구성원들이 잘 선정 되어야하고 달성할 목표가 의미 있고 고무적이어야 하며 팀에게 자율적인 권한이 주어 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을 위임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18일 수원 경기장에서 LG는 이변을 연출했다. 막강 현대를 11-6이란 스코어로 이긴 것이다. lg는 비록 선발진의 부상으로 인해 고른 투수 로케이션 운용이 힘들었으나 특유의 끈끈한 야구를 보였다. 특히 매회 실점 후에는 더더욱 집중력을 발휘한 타선이 제몫을 하였다.비록 마운드진의 불안은 여전하였지만 소나기 타점으로 상대팀인 현대를 두들긴 것이다.이 날 경기는 예전 한국시리즈 우승팀이였던 LG의 끈끈한 경기를 다시 느끼게 할 모습이었다. 점수를 내 주고도 다음 회에 바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저력의 팀으로 부활한 모습인 것이다. 특히 이날 LG의 중심타선의 홈런포도 컸지만 이들에게 좋은 공격 기회를 살리게 해준 후보급 선수들이 대거 골고른 활약을 펼쳤다. 수비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5회 대거 실점의 빌미가 될 뻔한 2사 2,3루에서 현대 전준호의 안타성 타구를 몸을 사리지 않고 다이빙 캐취한 외야수 박동성의 플레이는 빛이 났다. 외야수 박동성은 이 날 공격에서도 5타수 2안타 1타점으로 활약을 했다. 특히 2회 1-1로 팽팽할 당시 이승용의 평범한 타구를 실책으로 놓쳐 점수를 잃었지만 그 다음 5회 때 결정적인 타구를 잡아냄으로서 실책을 만회했다.? 박동성 인터뷰내용 :"앞선 2회에 나의 실책으로 인해 점수차가 벌어져서 속으로 다짐했었다. 꼭 만회 할 플레이를 선보이겠다고, 공격을 할 때도 점수차를 좁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웃음).이처럼 비록 후보 선수들이지만 경기중 실책이 있어도 그들에게는 '난 할 수 있다'란 자신감이 서려 있다. 그들만의 터닝 포인트로 스스로의 플레이에 전환점을 가져와 다른 모든 선수들과의 융합됨은 결국 좋은 결과를 이루어지게 끔 하지 않았나 한다.Ⅲ. 결론1. 문제점1) 교육방법의 한계먼저 터닝포인트 교육(이하, 교육)은 교육방법 자체에서 그 한계를 보일 수 있다.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은 조직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업무와 무관해 보이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교육들은 자칫 일회성의 흥미로운 이벤트에 그칠 염려가 ① 목표관리의 필요성- 인간이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 행동 하게 될 때가 아니라 자기의 주체성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행동케 될 때이다.- 즉, 스스로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가질 때이다.조직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조직이 가지는 목표와 그 조직을 구성 하는 각자가 바라는 목표와의 일치성과 연관성이 강할수록 조직 효율은 높아진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우선 조직전체의 목표를 수립하고 그것을 달성하 기 위하여 각자가 목표를 설정하여 이의 달성을 목적으로 중점적, 효율적인 조 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업적의 향상을 꾀할 수 있다.② 목표관리 프로세스- 조직의 수뇌나 중심 간부가 시스템과 그 운용방법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한다.- 수뇌와 그 부하들이 조직 업적의 평가기준을 마련한다.- 목표 설정의 방법에 대해 각 부문의 책임자와 그 상사 사이에서 논의를 거듭 하면서 제1선 감독자의 레벨로까지 넓혀간다.- 평가제도나 임금, 보너스의 계산, 또는 직책의 위임과 같은 분야에서 변경이 필요하다 면 그것을 실행한다. 그 밖에도 시스템의 효과적인 운용을 방해하는 절차규정이 있으 면 개정한다.③ 목표설정 방법- 「잘 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준비가 완료되면 이제 목표 설정을 해야 하 는 데 잘 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을」, 「얼마 나」,「언제까지」이다. 이것만 명확하게 된다면 목표관리는 순조롭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노력이나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고, 부하 본인이 확실 하게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ex. 목표 설정표 이용)- 방법ⅰ. 목표설정을 위한 자료를 정리하여 도전할 과제를 뚜렷이 정한다.ⅱ. 도전과제에 우선순위를 두어 중점목표를 정한다.ⅲ.「언제까지」할 것인가를 정한다.ⅳ. 구체적인 목표로 전환한다.ⅴ.「어느 정도」할 것인지를 정한다.ⅵ. 목표의 난이도를 정한다.ⅶ. 목표 설정표에 기입한다.④ 목표달성- 부하의 목표설정으로부터 성과에다.
Ⅰ.서론북한 정권 수립 이후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때로는 불편해지기도 했지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순치(脣齒) 혹은 혈맹적 관계로 표현될 만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된 이후 이념적으로 몇 되지 않은 동일한 이념을 가진 국가라는 점 또한 이점을 설명해주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 동안 북한이 중국의 정치, 경제, 사상 등을 따른 적이 많다. 현재 북한의 위기관리 방식 중에서 합영법실시, 경제특구 설치의 개혁과 개방 면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정치관계, 경제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더불어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북핵문제와 탈북자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유지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북한과 중국의 정치 관계 변화1. 김일성 시대① 1945년 8월 ~ 50년 10월이 시기는 소련의 독점적 지배가 이루어진 때로써, 북한에 대한 해외경제원조의 100%가 소련에 의해 제공되었으며, 소련의 군사, 경제적인 원조는 남침준비의 근원이 되었다. 반면에 이 기간 중에 중국은 2차대전 이후의 전후복구와 동시에 국공내전에 열중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 역시 소련의 한 위성국으로서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북한은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김일성 중심의 공산정권 수립과 남한 해방을 위해서 선진 소련에 의한 소비에트화가 강력히 요구되었다.따라서 한국전에 중공군의 직접 개입 이전까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전무했으며 북한의 소련일변도 추종으로 인해 소련의 통제만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②관계가 가장 긴밀했던 시기 - 1951년~61년 초반중국의 한국전 개입과 소련의 권력이동) 등의 요인으로 인해 이전의 시기에 비해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대해 비교적 균형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어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가장 긴밀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한국전 당시 중계가 적대에서 협상단계로 이행하자, 중국은 여기에 대응해 북한과의 관계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따라서 한-중수교이후 양국관계는 일시적으로 냉각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곧 회복국면으로 전환되었다.2. 김정일 시대① 1995년~1999년 김영남 방중 이전중국은 자국이 지향하는 정치체제와 모순 되는 부자세습체제를 사회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고, 김정일이 제2인자로 부각되기 이전에는 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제2인자로 부상하면서 북한 내부사정에 보다 민감한 중국은 대소 견제를 목적으로 재빨리 김정일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중국은 1983년「9?9절」을 맞아 북한 권력구조에 있어서의 김정일의 현실적 위치를 공식 확인함으로써 북한의 정치적 승계에 대한 과거와 같은 묵시적 지지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공식적인 지지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표방되었고, 1994년 7월 11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조문을 하고 「조선 인민이 반드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 노동당의 둘레에 굳게 뭉쳐 김일성 생전의 뜻을 계승하여 혁명위업을 계속 이루어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여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전적인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1994년 10월 5일 중국과의 국교수립 45주년을 맞아 강택민 주석에게 축전을 보내 중국이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공산당의 영도 밑에 단결해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등의 성과를 거둘 것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1994년 김일성 사후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한동안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99년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을 계기로 연이어지는 북·중정상회담은 중국지도부에 의한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핵문제 타결이 이루어지면서다. 중국 또한 북한에 우호가격)에 따른 수출, 무상지원, 변경무역장려 등의 형태로 교역상의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무역 통계를 보면 북한은 대 중국 무역에서 적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0년~2000년 까지 북한의 대 중국 무역수지 적자누계는 38억51백만 달러 (대중수입 총액 51억4백만달러, 대중수출 12억52백만 달러)에 달했다. 이처럼 북한의 대 중국 적자 규모가 큰 것은 북한이 전략물자 뿐 아니라 기계, 화학, 섬유, 생필품 등 주요 품목을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의 대 중국 수출은 수입에 비해 매우 저조했다. 몇몇 1차 산품 외에는 북한산 제품이 중국에서 경쟁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고 당분간의 무역수지적자는 당분간 개선되지 않을 듯하다.1990년대를 거치며 이들의 관계는 다양한 굴곡을 경험하였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성과에 힘입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정착을 가속화 시켰고, 남한과 수교를 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실리적이고 중립적인 정치·외교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중간 무역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은 90년대 중반 들어 이전까지의 북한에 대한 무상지원 및 우호가격제 등을 점차 축소하고 경화결제를 확대하는 등 실리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일성의 사망, 북한 핵문제 발발, 북한 내부 경제의 붕괴 등 내외적 악재가 겹치면서 북중 교역도 감소를 거듭했다. )한편, 2001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전후하여 북중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북중간 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대북 지원성 교역은 크게 증가하였고, 북한의 대중 수출도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2년 말에 이르러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KEDO의 대북 중유 지원이 중단되었고, 북일 관계가 경색되면서 북한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3년에는 북중 교역이 최초로 1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고, 대중 무역 의존도 역시 40%를 상회하게 되었다.2005년 현재도 대중 무역 의존도는 변화가 없다20만톤, 디젤유 4.5만톤, 2002년 디젤유2만톤, 2003년에는 디젤유 1만톤이 있다. 디젤유 무상지원 결정은 북핵문제로 인해 국제사회가 대북지원 분위기가 냉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농업용 디젤유 부족을 다소나마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2004년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를 만났을 때, 중국에 2억 위엔 상당의 무상 원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 당시 적극적으로 원조를 해주었다. 원조 총 지원 금액은 120만 달러이며, 식품, 약품, 의료설비 등 긴급물자를 지원했다. ) 아직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른 국가의 지원은 최소한에 그치고 있어 중국의 대북지원이 증액될 가능성이 있다.중국은 예전처럼 아무 조건 없이 주는 선린적 입장에서 벗어나 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한에 지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궁극적으로 북한체제가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지만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와 연계하는 방향으로 대북한 경제원조를 추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투자 부문1. 북한의 대중국 투자93년 이후 북한의 대중국 직접투자(실행액 기준)는 누계 6천 7백만 달러로 나타났으며, 협의기준(중국정부 비준)으로는 총 260건 1억7천만 달러였다. 협의기준으로 북한의 대중투자규모는 건당 65만 달러 수준이나, 실 투자 규모는 이보다 훨씬 작을 것으로 보인다.< 표7 > 북한의 대중국 투자 현황( 단위 : 만 달러 )연도투자 협의액 (건수)실질 투자액19935,192(73)1,16819942,864(68)92519953,734(44)1,34819963,818(34)1,1821997518(17)1,1851998422(12)5101999209(12)368합계16,757(260)6.686*누계액 및 투자분야는 집계되지 않고 있음.자료원:중국대외경제무역연감)2. 중국의 대북한 투자중국의 대북한 투자는 자세한 현황이 공개되고 있지는 않으나 나선지대를 위주로 이루어 지고 있고, 그 외에 평상품전시회에 총 14개국, 90여개사가 참가하여 최근 몇 년 사이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회에 참가한 78개 외국업체 중 67개(90개 부스)는 중국업체이며, 대형 가전회사인 TCL(가전), 長虹,(TV), 新?(냉장고),??(필름) 등도 참가하였다. 또한, 이전까지 평양국제상품전에 참가한 중국업체는 주로 단동 및 동북3성에 소재한 업체로 한정되었으나, 2004년에는 하남, 산동, 하북, 산서, 강소, 그리고 신강 등 10여개 성, 시 자치구로 확대되었다. 전시회에 참가한 중국 절강성 소재 무역업체의 왕경리는 북한주민의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생필품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특히 중국산 제품은 북한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밝혔다.)②광업북한의 거대한 광산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이 중국기업의 북한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 첫 번째 투자붐이 절강 상인의 일용잡화무역에 집중되었다면, 이번 에 불고 있는 두 번째 투자 열기는 중공업에 집중되고 있고 투자기업 또한 대형국유기업 위주인 것이 특징이다.2005년 1월 19일 북경조화우련(朝華友聯)문화교류공사의 기획부 경리인 田海瑞에 따르면 우한강철(武鋼)이 북한 무산(茂山)철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민영기업의 북한 광산개발에 대한 열기도 높은데, 광서성의 한 민영광산기업은 3년 이내에 6천만 위앤을 투자하여 북한 석탄광산을 개발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체결하였으며, 이를 위해 북한 측에서는 석탄운송을 보장하기 위해 전용철로는 수리할 계획이라고 한다.현재 우쾅(五?)집단과 길림성의 여러 강철기업도 북한의 무산철광 개발에 대해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길림성의 퉁화(通化)강철은 철광 채굴에 필요한 전력 및 기계설비 등을, 북한측에서는 철광석을 제공하는 내용의 30년에서 50년 기한 광산개발항목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한다. 또한 길림성의 민영 철강기업인 졘룽(建龍)도 무산철광 항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함경북도 무산철광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노천철광으로 이미 확인된 철광 매장량은 70
<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양반 관료 체제의 성립1) 양반의 개념과 성립2) 양반의 특성3) 양반의 지위2. 양반 관료 체제의 강화1) 양반과 학문2) 서원과 향약3. 조선후기의 양반1) 신분제의 동요2) 양반의 향촌지배 약화Ⅲ. 결론Ⅰ. 서론조선은 고려 말의 여러 모순을 시정하면서 국가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개인의 능력이 존중되고 사회 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등 이전 시대와는 다른 면을 보여 주었다. 조선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로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여 양반 중심의 사회 체제를 확립해 갔다. 여기서는 500여 년간 조선의 지배층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양반(兩班)이란 무엇이며 이의 성립과 몰락의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사료를 예로 들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Ⅱ. 본론1. 양반 관료 체제의 성립1) 양반의 개념과 성립조선 왕조는 새로운 유학인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한 양반관료에 의하여 통치되는 집권적 관료국가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왕조에 의한 지배체제의 재편성은 수취제도를 개편하는 것에서 그 경제적 기반을 구하고 이와 함께 신분질서의 재구성이 따르고 있었다. 집권 사대부 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구성이 요구되었으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모색되었다. 우선 지배층을 개편하는 작업이었다. 상급 지배신분층으로서의 양반과 하급지배신분층으로서의 중인(中人)을 엄격히 구분하여 전자는 정책 입안자(立案者)요, 후자는 행정 실무자로서의 지위를 설정한 것이다. 이미 고려시대에서 비롯된 문반(文班)?무반(武班)을 의미했던 양반이라는 말은 어느덧 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지배적인 사회계층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쓰여 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品階)가 있는 관리 전체를 가리키는 사대부(士大夫)라는 말도 역시 양반층을 가리키는 뜻이 되었다.2) 양반의 특성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들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현직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 관청의 서리나 기술관, 군교, 역리들은 하급 지배 신준인 중인으로 격하시켰다. 사족과 이서층(서리층)이 분화하여 양반과 중인 신분으로 고정된 것이다. 또한 양반들은 첩에서 난 소생들을 서얼이라 하여 차별하였고 정부에서는 이들의 관직진출을 제한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리를 독점하였다. 양반은 선비(士)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농?공?상(農工商)이나 특수한 기술학(技術學)과 같은 다른 생업에 일체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종사하여 관리로서 입신출세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게 된 신분층이었다. 양반관료제를 유지하는 최상부의 지배층인 것이다. 양반이 하나의 사회 신분으로 고정되어 가면서 양인은 점차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었다.※ 사료 1성종 13년 4월 신해 사헌부 대사헌 채수가 아뢰었다. “어제 전지를 보니 통역과, 의관을 권장하고 장려하고자 능통하고 재주가 있는 자는 동시 양반에 발탁하여 쓰라고 특별히 명령하셨다니 듣고 놀랐습니다. 무릇 벼슬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직책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무당, 의관, 약사, 통역관은 사대부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의관, 역관 무리는 모두 미천한 계급출신으로서 사족이 아닙니다. 3) 양반의 지위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이고 정치적으로는 관료 또는 관료 예비군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지방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 재생산할 수 있는 모든 제도를 갖추어 나갔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조선 사회의 기본적 생산 관계인 토지 소유 관계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양반의 토지는 보통 지주·전호의 관계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지주 전호제의 강화를 위해 국가 권력이 이용되었다.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각종 국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 양반도 국가의 공민인 이상 국가에 전세를 낼 의무가 있었으나 양천 농민의 부담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었는데도 합법·불법적으로 면제되는 수가 많았다. 군역 역시 합법으로 면제받거나 관직으로 연결되는 특수한 병종에 소속될 수 있어서 군역 복무와 관료로의 진출이 동시에 해결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또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군역을 이탈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과 과거에서도 양반은 특권을 보장받았다. 조선의 법제에는 양반을 포함한 양인은 교육과 과거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양인 농민들은 우선 과거 시험을 준비할 경제력이 없었고, 또 양반이더라도 과거 응시 자격에서 내용적으로 가문을 따졌으며, 과거에 합격해도 문벌에 따라 승진이 좌우되었다.2. 양반 관료 체제의 강화1) 양반과 학문성리학은 신분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명분을 강조하였다. 예학은 양반들이 성리학적 도덕 윤리를 강조하면서 신분 질서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성립한 학문이며 삼강오륜을 기본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삼강오륜은 현실적으로 가부장적 종법 질서로 구현되어 성리학 중심의 사회질서 유지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사림은 향약을 시행하고 도덕과 예학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며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가묘와 사당을 건립하며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사림간의 경쟁의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예학과 예론은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이용되었으며, 양반 사림들은 이와 함께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가족의 내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보학이 발전하였다. 예학이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보학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므로 족보를 통해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짐하였고, 박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하급 신분에 대하여 우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족보는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족보의 편찬과 보학의 발달은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해짐으로써 양반 문벌제도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사료 2“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서자의 자손이 구별 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은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 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다.” 2) 서원과 향약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 지낸다는 설립 목적 이외에도 지방 사족들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서원은 사화로 인하여 향촌으로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람들의 활동 기구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급속히 발전하였다. 선현의 제사와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서원은 유교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시키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서원은 교육기관이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적게 받는 다는 이점과 자기 문중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번창하게 되었다. 서원과 함께 사림의 세력 기반을 이루고 상민층에까지 유교의 예속을 침투시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바로 향약이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단결하여 서로 도와주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식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더욱 알맞도록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횡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사람들이 향약을 통하여 지방 자치를 구현하고자 한 데에는 농민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사림의 지위를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다.3. 조선후기 양반1) 신분제의 동요양반층 중심의 사회신분제는 17세기 이후 동요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 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분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권력을 장악한 일부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 계층의 자기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는 속에서도 그 변동의 추세는 양반호가 크게 증대하며 이와 반대로 상민?노비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나났다. 이후 양반호가 급증하는 것은 양반층 자체 내의 팽창에서도 원인을 찾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상민?노비 층이 양반층으로 상층하려는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양반층의 수적인 증가는 그 내부의 경제적 관계에도 큰 변동을 초래하였다. 즉, 농공상업에서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된 양반층이 나타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양반층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신분적인 우월은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것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