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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조선후기 근기학파의 역사인식
    REPORT제목 : 조선후기(朝鮮後期)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있어서의 역사인식(歷史認識)실학(實學)이 형성되게 된 조선(朝鮮)조 후기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된 변방 민족의 침입과 이로 인한 전국토의 황폐화는 정치 사회 경제 등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이었다. 신유학(新儒學)(Neo-Confucianism)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실학(實學)은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하나로서 조선후기(17∼18C)에 발흥하여 유행한 후기실학을 의미한다.{) 조성대, 「실학사상의 재조명」, 한국행정사학지9, 한국행정사학회, 2000. p.39.실학사상은 조선사회의 이념을 주도하던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의 체제가 지닌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성리학의 정통주의적(正統主義的) 이념(理念)의 폐쇄성과 독단에서 오는 사유(思惟)의 타율적(他律的)이고 고식적(姑息的)인 현실이며, 다른 하나는 통치체제의 모순(矛盾)과 부패(腐敗)로 인한 민생(民生)의 곤궁현상이라 할 수 있다.학계에 따라서 실학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성호(星湖) 이익(李瀷)으로부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는 독특(獨特)한 학풍(學風)만이 실학이 아니라, 조선 초기의 실학·조선 후기의 실학·한말의 실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초시대적(超時代的) 개념(槪念)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Ibid, p.41.그러나 또 다른 학계의 일부에서는 이것과 달리 실학(實學)을 조선후기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당시의 사회경제적(社會經濟的) 현실(現實)과 대결한 독특한 개혁유학(改革儒學)의 체계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물론 현세도피사상이나 현세초월사상을 극복하고 현세긍정의 논리로 주자학(朱子學)을 세우고, 실사(實事)와 실학(實學)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을 중세적(中世的) 내지 봉건적(封建的) 이념(理念)을 체계화(體系化)한 논리로써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실학파(實學派)가 세운 학적(學的) 체계(體系)의 극복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개혁農地)를 확장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도(各道)를 개발하자는 것이며, 용서(用徐)란 사치(奢侈)를 금하고 검소(儉素)한 생활을 장려하자는 것으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여 쓰는 것을 서서히 하자는 것이었다.이것은 백성(百姓)으로 하여금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오직 본업(本業)인 농업(農業)에 전념케 함으로써 농가소득을 올려 가난을 몰아내고 잘 살게 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조성대, Op. cit, p.44.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은 정조(正朝)의 농정(農政)에 관한 요청을 받고 토지소유(土地所有)의 제한(制限)과 농정개혁(農政改革)을 강조하였다. 그는 「사(士)」란 원래 실학(實學)을 가지고 농공상(農工商)에 공헌해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 농공상(農工商)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士)」가 실학(實學)을 갖지 못한데 있다고 보았다. 비록 손으로 노동에 종사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혜과 식견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사(士)」의 의무이며 실학(實學)의 가치라고 하였다.연암(燕岩)은 당시 홍대용과 함께 자연과학(自然科學)에 열중,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고, 청조(淸朝)의 문물(文物)을 배워온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領袖)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實學)을 강조하였다. 유학(儒學)은 대체로 물질가치(物質價値)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양(量)이 적은 것이 걱정이 아니고 고르게 나누어 먹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농업생산력(農業生産力)의 침체와 아울러 경제생활(經濟生活)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우리나라는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 비해 생산력(生産力)이 뒤져있는 데다가 위정자(爲政者)들의 보수적(保守的) 이념(理念)은 항상 형식적(形式的)으로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운운하고 상업(商業)을 유식(遊食), 공업(工業)을 말작(末作)이라고 하면서 상인(商人)과 수공업(手工業)자를 사회적(社會的)으로 천시하였다. 이리하여 상업(商業)과 수공업(手工業)의 위축과 생산의욕의 감퇴는 손바)이라 할 만하다.역사의식과 관련하여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분야는 서양의 지라학과 천문학이었다. 그는 『직방외기(職方外紀)』등의 인문지리서와 「만국전도(萬國全圖)」같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지리적 세계관(世界觀)을 확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世界觀)과 문화의식(文化意識)을 탈피(脫皮)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역사의식(歷史意識)도 심화하여 중국(中國)과 구별되는 한국(韓國)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독자성(獨自性)을 자각(自覺)하게 되었다.{) 하우봉, ,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 비평사, 1994, p.236.이익(李瀷)의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크게는 동(東)아시아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여 정통(正統)체계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신화·전설 속에 파묻혀 있는 3조선, 3한(韓)의 정치사와 그 강역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명하느냐의 문제, 그리고 고려(高麗)·조선(朝鮮)시대의 역사적(歷史的) 사건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익(李瀷)의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역사해석과 사실 고증(考證)의 양면에 걸쳐 있다 할 수 있는데, 전인미발의 독창적(獨創的)인 견해(見解)들이 많다. 특히 그는 국사(國史)의 시발점인 단기(檀箕)시대와 3한(韓)에 대한 여러 측면을 독창적(獨創的)으로 해석하여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적지 않이 공헌(貢獻)했다.{) 한영우. 「이익의 사론과 한국사이해」, 한국학보13, 일지사(한국학보), 1987, p.74.한국사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중국인의 전통적(傳統的)인 세계관(世界觀)이자 유교적(儒敎的) 역사해석의 한 기준이 되어 온 화이관(華夷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중화(中華)를 높이고 주변민족을 이적(夷狄)으로 천시·배척하는 이른바 존화양이(尊華壤夷)의 논리는 《춘추(春秋)》이래로 움직일 수 없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되어 왔기 때문에, 이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 한국사는 불가피하게 이적(夷狄)의 한 국가로조선이 중화(中華)의 계승자라고 하는 소중화(小中華)의식의 산물이었다. 이익(李瀷)도 『성호사설』 경사문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비롯하여 몇몇 글에서 정통론(正統論) 문제를 논하였다. 그는 이미 중화(中華)와 화이(華夷)의 문화적 우열을 부인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존화양이(尊華壤夷)」를 대의(大義)로 하는 종전의 정통론(正統論)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국력(國力)의 강약(强弱)을 기준으로 하는 정통론(正統論)을 그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영우. 「이익의 사론과 한국사이해」, 한국학보13, 일지사(한국학보), 1987, p.78.「강약(强弱)은 노(勞)요 대의(大義)는 천(天)이다」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이익(李瀷)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강약(强弱)에서 찾지 않고 대의(大義)에서 찾았다.{) 이장희, 「특집 2 : 역사와 사회현상의 새로운 인식과 연구방법 ; 조선후기 실학자의 역사인 식과 문화이해의 근대적 성향」, 인문과학28,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8, p.15.그는 조선전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위의 두 사서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정통에서 제외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한국사 정통의 시발로 설정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대 흥망(興亡)은 대략 중국과 서로 시대를 같이한다. 단군(檀君)은 요임금과 동시대에 일어났으며, 무왕이 천명을 받아 주(周)를 건국(建國)하였을 때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 {) Ibid, p.14.라고 하면서 한국사가 중국사와 대등함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출발 때부터 중국과 대등한 문화를 건설한 화국(華國)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마한(馬韓) →통일신라(統一新羅)→고려(高麗)→조선(朝鮮)으로 이어지는 정통론(正統論)을 주장하였다. 이익(李瀷)의 이 정통론(正統論)은 삼한(三韓)에 정통을 준다는 점에서 스스로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이라고 명명하였지만, 그 핵심은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다. 그는 정통 여부를 변별하는 기준으로 국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혈연성을 중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서술에 반영하여, 단군(檀君)→기자(箕子)→마한(馬韓)→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 9년 이후)→고려(高麗, 태조 19년 이후)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삼국시대(三國時代)를 무통(無統)의 시대로 간주함으로써 한국사의 체계를 재구성(再構成) 하였다. 그는 우선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함께 조선이라 하여 외기(外記)로 처리한 것을 통계(統系)의 측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우리 역사의 정통(正統)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본문에서 단군(檀君)의 치적을 서술하였으며, 단군에 대한 고기(古記)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Ibid, p.158.기자조선(箕子朝鮮)이 우리 역사의 정통으로 언급되는 것도 기자가 8조법금을 실시하고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문화국가가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Ibid, p.159.그는 또 마한(馬韓)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정통을 이었다고 보았는데, 이는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이 마한의 왕이 되어 기자(箕子)에 대한 제사를 계속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Loc. cit.삼국을 무통(無統)으로 취급한 것은 주자(朱子)가 병립한 국가들을 무통으로 처리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즉 삼국은 서로 대등한 나라로서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통일신라가 정통이 되는 것은 발해(渤海)를 우리역사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표리관계에 있으며, 통일 후의 고려가 정통이 되는 것은 대립되는 왕조가 없기 때문이었다.{) Loc. cit..한편,『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정통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상고사의 여러국가·인물·족속 등으로 위만조선(衛滿朝鮮)·궁예(弓裔)·견훤(甄萱)·진한(辰韓)·변한(弁韓)·옥저(沃沮)·가야(伽倻)·부여(扶餘)·사군(四郡)·이부(二府)·동이(東夷)가 있다. 이들은였다.
    인문/어학| 2003.06.02| 19페이지| 1,000원| 조회(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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