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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문학]헝가리 구비문학속의 민족성
    헝가리 구비문학에 나타난 헝가리인의 민족성*******Ⅰ. 헝가리 구비문학Ⅱ.헝가리 민담과 전설1.민담2.신화전설3.그 외 장르Ⅲ.구비 문학 속에 나타난 민족성(부록)-중부유럽 다른 나라와 관련된 전설헝가리 구비문학에 나타난 헝가리인의 민족성Ⅰ.헝가리 구비문학구비 문학의 각종 장르 양식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어 왔으며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구비 문학은 점점 더 내용적으로는 오락적 특성이 증대되고, 형식적으로는 긴 이야기 텍스트보다는 핵심을 찌르는 짧고 간결한 형태로 변모하는 추세이어 각각의 장르 경계 자체가 모호해져 장르 분류의 의의가 상당 부분 퇴색하게 되었다.구비문학은 말 그대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문학이다. 특정한 격식이 있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문학으로 그 나라의 문화와 민족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 수가 있다.Ⅱ.헝가리 민담과 전설헝가리 구비 문학이 11세기부터 존재해 왔음을 당시의 여러 문서나 역사 기술들에 나타난 지명이나 인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구전 민담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은 1075년에 쓰여진 문서를 비롯하여 이후의 여러 기록들로부터 알 수 있으며, 라틴어로 된 이들 기록에 “Ordog”(악마), “Sarkany"(용), "B?baj"(마술), "kigyo"(뱀) 등의 헝가리 단어가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기원 전설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는 1390년에 쓰여진 문서에 나타나고 있는 ”Medvek?“(곰바위)가 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이 건립되어 봉건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왕권이 강화된 중세의 공식 역사 기록서와 사기(史記)에도 헝가리 민중들의 구전 전통에 의해 전해온 구전 민담과 전설 등의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다.1.민담민담의 내용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기적과 신비적 요소는 민담에 진정으로 몰입하는 청자에게는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며, 구전 민담에서 기적은 그 이야기 내용상의 자연스러운 당연히 필요한 한 요소인 것이며, 이 점은 헝가리 민담타나고 있는 기적과 마법의 표현이 헝가리 민담에서는 아주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취하고, 농민 세계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헝가리 민담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즉 민담의 무대는 헝가리 농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고 또 그 생활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민담 속의 주인공 역시 헝가리 농민의 기질을 상당 부분 닮았으며, 민담 속의 모험 무대 역시 실질적으로는 헝가리 농민들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고귀한 왕궁 역시 헝가리의 작은 마을이나 소도시와 연계되어 부유한 농가를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모험, 초자연적인 기적과 마법 등은 모두 농민 세계의 세세한 일상 현실상과 함께 조밀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또한 역으로 바로 이러한 헝가리 민담의 특징으로 인해 헝가리 민담이 농민들에게 오랫동안 애호되고 지속 계승되어 온 원동력이 된 것이기도 하다.헝가리 민담에는 요정담, 동물담, 익살담, 마을 조롱담, 성담등이 있다.그중 요정담에 속하는 ‘황금튤립‘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옛날옛적에 한 왕자가 살았다 그는 자신의 신부를 자신이 고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중 고인 얕은 물에서 허덕거리는 물고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물고기는 눈물을 흘리며 왕자에게 구해달라고 하고 왕자는 그물고기를 강가에 놓아준다. 그리고 물고기는 구해준 답례로 비늘하나를 준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비늘을 강가에 놓고 저으라고 한다. 물고기와는 그렇게 해어지고 여행을 하다가 새가 나무에 끼어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그리곤 왕자는 그새를 구해주고 그 새는 답례로 깃털하나를 준다 그리곤 계속 여행을 한다. 그러다가 한 늙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은 너무 힘이 없는 나머지 허리가 굽어지지 않아 우물에서 물을 먹지 못한고 있는데 지나가던 왕자는 그 노인에게 자신의 모자를 벗어 그것으로 물을 퍼서 노인에게 준다 그리고 그 노인은 감사의 답례로 머리카락 두개를 준다. 그리곤 왕자는 한 마을에 들리게 된다. 그 마을에는 예쁜 공주가 살3번해서 한번이라도 찾아낼 수 없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3번다 찾아내면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동안 많은 남자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자는 예쁜 공주에게 반해 공주에게 숨바꼭질을 하자고 한다. 그리고 1번째로 숨을 곳을 정한다. 어디에 숨어도 공주가 자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한 왕자는 강가로 가서 물고기의 비늘을 흔들며 물고기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자 물고기가 나타나 무엇을 도와 주냐고 묻자 왕자는 자신의 처지를 얘기한다. 그리고 그 물고기는 아주 큰물고기를 데려와 그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라고 한다. 그래서 왕자는 뱃속에 들어간다. 뱃속에서 2일이 지나고 3일째에 공주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다가 강가로 간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가다가 아주 큰 물고기를 발견하고 그 물고기의 배를 째서 왕자를 찾아낸다. 그래서 두 번째로 왕자는 숨을 곳을 생각하다가 하늘에 깃털을 날리며 새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자 새는 깊은 산 속으로 데려간다. 그 후 2일이 지나고 3일째 되는 날 공주는 산 속에 신하들을 풀어 왕자를 찾아낸다. 마지막으로 숨을 곳을 찾는 왕자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려서 노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그 노인이 나타나 그에 말을 듣고 그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그 노인은 뺑그르르 3바퀴 돌더니 왕자를 황금 튤립으로 만들었다. 노인은 그 튤립을 머리에 꽂고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공주를 만나게 된다. 공주는 노인에게 튤립이 너무 예쁘니 달라고 한다. 그러자 노인은 그것을 거절하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3일이 지나고 공주는 왕자에게 나타나라고 한다. 그리고 노인은 공주를 찾아가 튤립을 내려놓고 왕자로 바꿔놓는다. 그러고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헝가리 요정담에는 여러 사건과 이야기들이 함께 나타나고는 있지만 개개의 사건과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구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위 내용에서 도 알 수 있듯이 헝가리구비문학에서는 숫자3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늘, 땅, 물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생물이 나 갖는다. 헝가리인은 노인들을 무시하거나 퇴물취급을 하지 않고 지혜 있는 자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연꽃이 있다면 헝가리에는 튤립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2.신화 전설헝가리어로 전설에 대한 용어는 현재는 “monda"로 통일되어 쓰여지고 있으나, 이 ”monda"는 19세기 중반 “언어개혁 시기”에서부터 잡담, 한담이라는 첩어에서 유래하여 그 역사가 오래 되지는 않는다.전설에는 기원전설, 역사전설, 민간신앙전설 등이 있다 그중 헝가리의 기원전설에는 흰 말 설화와 사슴설화가 있다. 흰 말 설화는 페체네그의 침입에 의하여 895년 알모시의 아들 아르파드가 7부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머저르족을 한 부족으로 통합한 뒤 대표지도자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토인 카르파티아 분지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얽힌 설화는 처절한 전투가 아니라 왕의 지혜로 분지를 획득한 과정이 그려져 있다.두 번째로 신비한 사슴설화가 있다. 머저르족과 훈족이 형제관계라는 주장이 들어있는데 훈 족과의 연관성이 단지 신비한 사슴설화에만 나타나지 않고 고대설화 대부분은 훈 족의 위대한 어띨러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다음으로는 트룰이라는 독수리과의 새가 나오는 알모시 설화가 있다. 헝가리 인들이 8c말 이후 드네프강과 드네스테르강 사이에 있는 에텔쾨즈라는 곳에 정착했을 때 전해진 설화로 알보시란 헝가리어로‘졸립다’ 혹은‘잠이 온다’를 의미한다. 알모시 설화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몸 속에 투룰이 들어온 태몽을 꾸어서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역사나 문화에서 이 알보시라는 족장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바로 이 알모시의 후예가 헝가리를 국가로 만들고 성장시킨 아르파드 왕가이기 때문이다.3.그 외 장르헝가리 구비문학의 장르 속에는 민담, 전설 장르와 같은 상대적으로 긴 형식의 것들 뿐 아니라 일화, 관용어구(szolas), 속담(kozmondas), 수수께끼(talalos kerdes) 등의 형식적으로는 매우 짧지만 문화와 역사 발전 과정상의 많은 흔적을 간결하있다.그 예로 헝가리 수수께끼를 몇 가지 알아보면 새 한 마리가 반은 까맣고 반은 하얀 것은?그 답은 낮과 밤이다. 또 한 예를 들어보면 산 사이로 금빛단추를 내던지는 것은? 답은 햇빛이다. 헝가리 속담에서 또한 헝가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다.속담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식탁은 넓고, 식탁보는 좁고, 저녁은 얇다’(먹을 것이 많이 없다는 뜻),‘돌멩이만 있어도 가죽을 벗기라 한다’(무엇이든지 일거리를 만든다-지주들을 빚 데어 한말이다.),‘먼지가 들어간 듯 눈을 깜빡인다’(우리나라의 눈의 가시 같다라는 말과 동일하다.),‘비 온 뒤에 가운을 입는다,’(우리나라 속담중 고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동일한다.) 등 그 시대의 시대적 배경과 교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지주들을 헐뜯는 내용이 많다.이러한 구전 관용어구, 속담, 수수께끼는 내용적 측면에서 헝가리 전통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Ⅲ. 구비 문학 속에 나타난 민족성헝가리 구비문학은 유럽 어느 민족의 구비문학 전통에 못지 않게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형성되고 발전 계승되어 왔다. 장르 분류나 모티브의 흐름 역시 유럽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헝가리 고유의, 특유의 구비문학 특징 즉 유일하게 헝가리 구비문학의 산문 장르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특징을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헝가리 민족의 고대사 과정을 통해 얻어진 비유럽적 -아시아적- 요소들이 구비문학의 산문 장르에 반영되어 지속되어온 것은 분명하며, 이는 헝가리의 지정학적 특성에 연유하여 전개된 헝가리 구전 민담, 전설을 비롯한 헝가리 구비문학 전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헝가리 문화, 역사, 사회 전반에 걸쳐 내포되어 있는 특징적 성격을 보여준다. 헝가리 설화에서의 모티브는 헝가리인은 카톨릭교이며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는 착하고 뛰어나다는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역사적으로 헝가리는 다른 나라를 친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속담과 수수께끼 분야에서는 바보 있다.
    인문/어학| 2006.06.29| 6페이지| 1,000원| 조회(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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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문화]헝가리와 한국의 가옥구조비교 평가D별로예요
    헝가리와 한국 전통가옥 비교-목차-서론본론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헝가리 전통가옥우리나라 전통가옥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의 유사점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의 차이점결론*참고문헌헝가리와 한국 전통가옥 비교서론인간에게 있어서 집은 생명과 생활을 지킬 수 있는 장치이고 가족 생활의 근거지로서 생활 영역의 중심 무대이며, 자신과 가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며,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하여 집을 지어 왔으며, 그러한 집이 될 수 있도록 주거 공간을 형성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세계의 여러 민족과 사회 집단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집을 지어 왔고, 이러한 방식들은 그들의 자연 환경과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 역시 고유한 자연 환경과 생활양식,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만의 주거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우리 민족을 특징짓는 문화의 영역으로 고유한 모습을 지켜 왔다. 이러한 주거 문화의 특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대로 전수되기도 하고, 주변 환경, 가치관에 따라 달리 전개되기도 한다. 단지 생존만을 위한 삶이 가치추구에 그 목적을 두게 됨으로써 주거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아파트의 증가와 주상복합공간의 탄생 등 급격하게 생활공간의 변화를 겪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주생활 공간의 변천과 헝가리의 주 생활양식을 알아보고, 문화적 차이에 따른 주 생활양식의 변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주거형태의 차이와 공통점을 알아보겠다.본론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헝가리의 전통가옥헝가리의 주거형태의 최초의 시작은 Jurta로부터 시작을 하는데 이 Jurta는 유목민생활에 적합한 건축이며 낮고 둥근 건축물로 옆면에 격자모양의 나무구조가 있다. 지붕은우산처럼 폈다 접었다 해서 이동에 편리하게 되었다 가운데는 막대가 가운데 받쳐있다.겉은 단순한 구조이지만 안에는 잘되어있고 입구는 첫번째가 부엌이고 가장 안쪽이 연벽은 나무 두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널고 나무를 빼내어 벽을 만들고 다 만든 후에 창을 내는 것은 같은 방법으로 한다. 흙의 내벽은 점토를 사용하고 점토는 벽돌과 비슷하여 굳혀서 벽돌로도 사용하였다. 이 점토는 흙에 겨,왕겨,짚을 넣어 섞어 놓는다. 그 다음 방법은 틀을 만들어 진흙을 부어 만들었다. 이것은 햇빛에 만들기도 했다. 점토를 만들어 벽을 만들고 벽 사이에 뜨는 공간은 다시 점토를 만들어 덧바르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회를 발라서 하얗게 만들기도 하였다.부유층에서는 구운 벽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 구운 벽돌은 구하기가 어려워 값이 비쌌다. 구운 벽돌로 집을 짓는 경우는 구운 벽돌을 중간에 깔아 보온 벽 역할을 했고 기초에 쓰여 졌다. 헝가리의 지붕모양은 2가지가 있는데 그 중 szelemenes는 강목을 밑에 두고 힘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지붕 모양이다. 지붕은 불에 잘 붙어 불이 날 염려가 있기에 흙과 짚을 번갈아 놓고 발랐다. 후에는 석판으로 지붕을 만들어 화재를 막을 수 있었다. 헝가리 초기의 집 구조는 부엌을 중심으로 한 칸짜리였지만 대게는 큰방하나나 부엌과 창고가 있다. 그리고 부엌이 집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우리나라의 전통가옥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에 중심을 둔 주거 공간이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단 등은 돌을 사용하고 기둥과 서까래, 문, 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벽은 짚과 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었으며 창에는 역시 천연 나무로 만든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한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 있게 하였고 방수의 역할도 했다.전통가옥은 전통사회의 생산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집은 개인의 휴식 을 위한 공간이자 농사일을 위한 보조 공간이었고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내는 생활공간이자 혼례, 상례, 잔치 등을 치루는 사회 공간이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방은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대청은 모두를이고, 맞배집이니, 팔작집이니, 우진각집이니, 까치구멍집이니 하는 것은 지붕의 형태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또 벽체에 따라 귀틀집, 담집, 돌담집으로 나누고 평면형에 의해서 일자집, 기역자집, 디귿자집, 미음자집, 전자(田字),집 등으로 구분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평면형을 어떤 물질에 비겨서 부르기도 한다.미음자집을 경상도에서는 예전의 '모말'을 닮았다 하여 '말집'이라고 하나 황해도에서는 '또아리집'이라는 다른 이름을 쓴다. 또 같은 유형의 집 중에서 규모가 작은 것을 경북 안동군 일대에서는 '도투마리집'이라고 따로 부른다. 집안의 평면 배치가 베틀의 도투마리와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리의 단면이 둥근 집을 굴도리집, 모난 것을 납도리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이름이야 어떻든지 '집'은 눈이나 비 또는 햇볕을 막을 지붕과, 바람이나 추위를 가릴 벽, 그리고 냉기나 습기를 막아 줄 바닥의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 바, 이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지붕이다. 환경이나 기후적 조건에 따라 벽이나 바닥의 구조는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고 어떤 데에서는 이 두 가지의 기능이 거의 생략되기도 하나 태양열이 뜨거운 곳의 주거에는 바닥이나 벽의 시설이 보잘 것이 없으나 지붕만은 든든하게 만드는 것이다.벽채를 만든 재료에 따라 귀틀집·돌담집·벽돌집·흙집·우데기집 등으로 분류한다. 귀틀집은 나무가 흔한 산간벽지에 더러 있는 집으로, 자른 통나무를 귀가 어긋나게 네 벽을 井형으로 엎을장 받을장 치쌓되 통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진 데는 바위옷 같은 것으로 채우고 안쪽은 흙을 빚어 틈을 채운 벽으로 된 집이고, 우데기집은 풀이나 짚을 엮어 만든 벽으로 된 집으로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방에 더러 있다. 우데기 벽을 세우면 눈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돌담집은 바람이 거세게 많이 부는 지방에 더러 있는 집으로 여러 채의 집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 마치 한 채의 집처럼 만든 집이다.한편, 지붕을 덮은 재료에 따라 너와집·굴피집·억새집·식대(시누대)집·겨이 없이 높낮이로 부엌과 구별되는 공간이 있다.정주간은 부엌과의 사이에 벽이 없이 연결되어 부엌의 열기를 최대한 수용하여, 가장 따뜻한 공간으로 추운 겨울의 식당과 거실 역할을 한다. 남한계는 대체로 태백 산맥을 따라 고성, 양양에 이르며 주로 낭림 산맥의 동쪽에 분포한다(2)관서형-자, 1자, A자형 등 가옥 구조가 다양하나 마루가 좁아지고 부엌이 가옥의 중심에 위치하는 1자형 홑집이 탁월하다. 모서리에 부엌이 있고 벽의 양면에 아궁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한계는 멸악 산맥으로 주로 낭림산맥 서쪽에 분포한다.대청은 마루방이라 해서 방과 방 사이에 있지 않고 한쪽 귀퉁이에 있다. 또 부엌과 방 두개가 연속으로 구성되어 "삼간형(三間形)"이라고도 하며, 남부지방의 가난한 서민 주택들이 이 형을 많이 채택하기 때문에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므로 "일반형"으로 분류한 학자들도 있다.(3)중부형대청 마루가 있으며 1자형을 기본으로 7자, A자, -자형이 혼합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1자형 홑집이 많다. 관북의 폐쇄적 구조와 남부의 개방적 구조의 점이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난방도 고려하면서 통풍의 기능도 어느 정도 갖춘 것이다.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청마루라고 하는 대청이 있고 부엌은 안방에 이어져 있거나 한쪽 귀퉁이에 있다. 우리 나라 가옥의 가장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멸악산맥의 이남에서 차령산맥의 북쪽에 주로 분포되며 한강 유역이 그 중심이 된다. 큰 대청 마루가 있는 것이 현저한 특징이다.(4)남부형전형적인 홑집의 -자형으로 중부형에 비해 개방적이다. 개방적 구조로 대청 마루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앞뒤로 벽체가 없는 대청마루는 가장 개방적인 구조로 영남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충남북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속한다.부엌, 방, 마루와 툇마루가 기본 구조를 이루며 문지방의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서민주택 중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일자형 몸체 이외에 광, 헛관, 오양관, 측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채가 별도로 세워진다.(5)제주형중앙에 마루가 있고 좌도 비슷하다. 헝가리와 우리나라 모두다 여러 층으로 집을 짓지 않으며 집을 짓는 순서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부유층과 서민층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같다.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의 차이점헝가리와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의 차이점은 우선 우리나라는 지역에 따라 재료가 틀리 다는 것이다. 헝가리는 주로 나무 흙,돌,나무를 사용하였고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음식의 조립법이 매우 복잡하여 부엌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조립법이 간단하여 부엌이 따로 있지않고 불가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가족들의 독립성을 위해 방이 많이 있으나 헝가리는 공동의 생활을 해서 그다지 많은 방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헝가리와 우리나라는 창을 내는 방법도 다르다. 우리나라는 창을 내면서 집을 지으나 헝가리는 집을 다 지은 후에 창을 내는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점을 보였다. 그리고 헝가리는 유목민족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정착 민족이어서 가옥의 분위기도 매우 달랐다. 우리나라는 집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지으며 집을 짓기 전에 제사 등을 지내는 유교적 풍습이 있다. 그와 반면 헝가리는 카톨릭이어서 별다른 집을 지을 때 절차는 없었다.결론가옥의 재료와 형태는 그 지역의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반영하며, 가옥 간의 상호 관계 및 위치는 지역 경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가옥의 재료와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현대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가옥 재료는 점차 인공적 재료로 보편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역적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가옥 형태는 그 변화 속도가 비교적 느리다. 특히 가옥의 내부 구조(평면 구조)는 쉽게 변화하지 않으므로 가옥의 지역적 특색을 살피는데 좋은 지표가 된다. 헝가리와 우리나라의 가옥구조를 통해서 지역적 특성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그 외에 종교 문화 등을 알 수 있었다. 서로 많은 차이점은 있지만 주생활의 목적은 모두 한가지가 아닌가 1
    인문/어학| 2006.06.29| 9페이지| 1,000원| 조회(2,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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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연구,지역학] 지역연구 역사와 이론 (책 요약)
    지역연구의 역사와 이론김 경 일 편저제1부 지역연구의 개념과 의의1. 지역연구의 정의와 쟁점들/ 김경일2. 지역연구란 무엇인가/ 야노 도오루제2부 지역연구의 방법과 대상3. 지역연구의 대상과 방법/ 김경일4. 지식의 재구조화와 분석단위의 전이:국가로부터 초국가(trans-state)로/ 이매뉴얼 월러스틴5. "동남아시아":이름의 유래와 역사/ 도널스 에머슨6. 동아시아와 세계체제 이론/ 김경일제3부 지역연구의 역사와 현황7. 전후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성립과 발전/ 김경일8. 냉전기 지역연구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매뉴얼 월러스틴제4부 지역연구와 사회과학10. 연구영역의 전이: 냉전기와 탈 냉전기의 지역연구와 국제연구/ 브루스 커밍스11. 지역연구와 발전이론: 피난민들인가 개척자들인가?/ 브루스 코펠제5부 지역연구의 미래와 전망12. 국제연구를 다시 생각한다: 탈냉전 시대의 도전/ 스탠리 헤긴보덤13. 편파화된 전망" 미국헤게모니 이후 지역연구의 미래/ 라비 팔랫지역연구의 역사와 이론김 경 일 편저문화과학사제1부 지역연구의 개념과 의의1. 지역연구의 정의와 쟁점들/ 김경일2. 지역연구란 무엇인가/ 야노 도오루제2부 지역연구의 방법과 대상3. 지역연구의 대상과 방법/ 김경일4. 지식의 재구조화와 분석단위의 전이:국가로부터 초국가(trans-state)로/ 이매뉴얼 월러스틴5. "동남아시아":이름의 유래와 역사/ 도널스 에머슨6. 동아시아와 세계체제 이론/ 김경일제3부 지역연구의 역사와 현황7. 전후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성립과 발전/ 김경일8. 냉전기 지역연구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매뉴얼 월러스틴제4부 지역연구와 사회과학10. 연구영역의 전이: 냉전기와 탈 냉전기의 지역연구와 국제연구/ 브루스 커밍스11. 지역연구와 발전이론: 피난민들인가 개척자들인가?/ 브루스 코펠제5부 지역연구의 미래와 전망12. 국제연구를 다시 생각한다: 탈냉전 시대의 도전/ 스탠리 헤긴보덤13. 편파화된 전망" 미국헤게모니 이후 지역연구의 미래/ 라비 팔랫머리말지구화와 세계화의 현란한 과 비교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보았다. 비교란 단지 일반적이고 보편화될 수 있는 틀 안에서 가능하므로 비교 방법은 이론적 지향을 가진 사회과학만의 정당한 영역에서 추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분과 보편주의자들은 지역연구가 학문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비교 분석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결국 주류적 사회과학의 비교 분석에 의거하여 지역연구의 연구 성과들이 통합된 결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교적 접근의 발전은 아직도 가야 할 많은 길을 남겨 두고 있는 것이다.4. 자민족 중심주의와 보편주의지역연구의 영향과 성과들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들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분과 학문들이 내포하고 있었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지역연구를 통해서 기존 분과 체제의 '보편주의'적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제기되었으며, 그 결과 학문 분과들의 정체성과 자의식에 대한 의식은 현저하게 고양되었다.분과 학문들의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한 회의와 학문의 자기 정체성의 모색은 초기 지역연구 문헌들에서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형태로나마 빈번하게 언급되어 왔다. 사회과학협의회가 발간한 지역연구의 첫 번째 보고서에서 홀은 전쟁의 경험은 지금까지 보편적인 것으로 옹호되어 왔던 것들이 정말로 그러한가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고 하면서 미국 학계의 최대의 취약점은 그것의 편협성에 있다고 보았다. 뒤이어 지역연구에 관한 사회과학협의회의 또 다른 보고서에서 스튜워드는 서구 산업사회에 대한 연구로부터 발전된 전통적 방법들을 기반으로 한 과도한 분과 체제들의 지식은 이제 더 이상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지역연구를 통한 총체적 지식을 구축할 것을 촉구하였다학문과 지식 일반이 그러하듯이 토착적인 요소의 상대적 결여와 미국의 상대적 우세로 지역연구를 특징질 수 있는 것은 전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실이다. 지역연구는 여전히 미국적 사업에 머물러 있으며 제3세계 국가들은 소수의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흔히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방법과 이론들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하였다.비슷한 시기에 세계 지역연구에 관한 전국 대회의 보고서도 마찬가지로 학제적 접근을 강조하였다. 대회의 보고서는 지역연구가 당면한 몇몇 문제들 중의 첫 번째로 지역연구의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역연구는 문화에 의거하여 고려할 때 가장 잘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용하였다. "문화는 역사를 가지며, 그것은 지리적 환경과 관련하여 존속하고 문학들을 산출하며,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된다"는 것이다. 비록 지리적, 정치적, 또는 언어적 경계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명확한 공간적 속성들을 지닌다.지역연구가 독자적인 하나의 학문 분과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인류학에서 사용되는 방식과는 구분되는 의미에서 문화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지역연구에서 문화의 개념은 인류학적 개념을 빌려온 것이지, 그 자체가 나름대로의 의미정립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지역연구에서 문화는 하나의 개념으로 수용되었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지향이나 이론발전으로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오늘날의 지역연구에서 문화적 접근은 실제적으로 가장 흔히 동원되는 방식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리고 이 점에서도 그것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지역연구자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것은 공유된 이론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언어와 문학, 역사, 경제 또는 정치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데 대한 공동의 관심이자 주장이라는 것이다. 지역연구와 유사한 국제학이 하나의 독립된 분야라기보다는 '시각과 관심, 기법 및 분과들의 집합'이자 '초민족적 현상에 대한 공동의 관심'이라고 보았던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 기반을 둔 것이다.4. 지식의 재구조화와 분석단위의 전이:국가로부터 초국가(trans-state)로 (이매뉴얼 월러스틴)사회과학은, 그것에 의해 분석되는 과정들이 발생하는 자명한 틀을 국가가 구성한다는 인식을적 경계를 넘어서는, 심지어 무시하는 연구에 대한 욕구도 고양될 것이다.중립적 이름: 필연성의 미덕"동남아시아"가 드러내는 의미는 이제 더 이상 진정한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하다. 이 명칭에 어떤 영토가 해당되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는 무심코 혹은 고의적으로 지속되겠지만, 그러한 불일치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장기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1세기의 어느 시점에서는 동남아시아가 재분할되어"소비에트 극동"과 "미국 극동"으로 분할 통치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연합이나 합병의 형태로 따로따로 분리되어 인도·중국·일본·호주권으로 편입될 수도 있다. "동남아시아"는 그것으로 지칭되는 지역보다 오히려 안정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다.중립적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동남아시아"는 편의상 자여 범주로 남아 있다. 원칙적으로 중국의 남쪽과 인도의 동쪽에 해당되는 어떠한 지역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이러한 신축성이 장점이 된다. 잔여적이라는 것은 또한 재충원을 간편하게 해주기도 한다. 왜 대만이 "동남아시아"에 포함될 수 없는지에 대한 언어학적 이유는 없다. 주지한 바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는 민속학적 연구들이 이미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적이다. "중국"을 정의하지 않고는 중국의 남쪽이 무엇인지를 알아 낼 수가 없다, 대만과 중국 본토는 먼저 각기 상대방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포기해야만 한다.지역 만들기: 몇 가지 장애들인위성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감정적 호소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도상의 공간을 메우는 잔여 범주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공간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보다 심층적인 지시물들간의 경쟁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 수 있다. 다소 회의적인 이 주제는 독립된 민족국가들은 지역의 정체성에 대한 교량과 동시에 장애물이 역할을 행해 왔다. 민족국가들이 이들 시민들로부터 배타적인 충성심을 요구하는한, 민족국가들이 '어떻게 동남아시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하는 서 언급하고 있는 석유회사의 고위 간부가 찾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인류학자든 동양학자든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지역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비역사적으로 연구해왔던 것이다.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미군은 두 종류의 ""지역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사병들을 대상으로 육군 특수훈련 프로그램의 외국 및 외국어 커리큘럼을 운영하였고, 또한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13개의 점령지 민정훈련학교를 운영하였다. 펜튼은 "지리학은 탁월한 지역학이다. 이것은 반드시 지역연구에서 중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과정에서 지리학이 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육군의 경험은 민족지학을 제쳐두었다는 점과 언어 훈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전조가 외었다. 육군은 대학 밖의 후원자들이 갖고 있던 실용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43년에는 전세계적인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거나 곧 발생할 것임이 매우 명확해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서구화의 접촉 이전의 문화적 패턴이나 또는 정체된 문명의 고전들에 관해 안다는 것은 미합중국의 외교관이나 육군 장교들, 사업가들 또는 이들 지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관여하던 다른 사람들에게 그다지 도움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지리에 과해 안다는 것도 단지 주변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서구 세계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의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이는 지역들이 현대에 들어와서 보이고 있는 역학 관계들이었다.냉전의 관심들이러한 요구에 대한 필요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느껴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른바 냉전이라 불리는 요인에 의해 지정학적 의미에서의 세계체제가 급격하게 수립된 1945년 이후에 그것은 한층 더 시급한 것이 되었다. 미합중국은 비서구 지역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흐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1950년대를 경과하면서 지역연구는 미국대학에서 완전히 제도적으로 정착하였다. 지원은 주요 재단다.
    사회과학| 2003.12.24| 28페이지| 1,000원| 조회(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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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 주자청의 작품세계 평가B괜찮아요
    주자청(朱自淸)의 작품세계--------------목차----------------1.서론2. 대표작 및 감상1)시가.광명(光明)나.부족지감(不足之感)2) 산문가. 배영(背影)나. 그 외 작품3. 결론---------------------------------주자청(朱自淸)의 작품세계1. 서론중국 명주의 하나인 소흥주(紹興酒). 소흥주의 본산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이 본적인 주자청은 1898년 음력 10월 9일 강소성(江蘇省) 동해현(東海縣)에서 태어났다. 1920년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항주(杭州)와 양주(揚州) 그리고 온주(溫州)와 영파(寧波) 등지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를 역임하다가 1925년 8월부터 1948년 작고하기까지 근 20여년 북경의 명문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중국문학과 주임교수를 지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주(揚州)에서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양주 사람'이라고 했다.朱自淸은 중국 현대문학의 발전에 대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산문 창작 방면에서 이룬 업적은 남다른 바 있다. 진실 되고 자연스러우며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언어로 짜여진 그의 산문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기쁨을 준다. 이처럼 모든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산문이 진지하고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솔직 담백한 예술적 풍격을 갖추고 있어 무한한 생명력과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 사조나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사상적 기복을 그의 산문 속에 그려 놓았다. 그의 산문 내용은 대단히 풍부하다. 수려한 자연 풍경을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이나 친구에 대한 우정을 묘사했고, 조국의 전도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였으며, 국내외 문화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표현 형식으로는 산수를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그린 서정산문(抒情散文)이있는가 하면, 인물이나 사건을 기술한 서사산문(敍事散文)이 있고, 명승고적지나 명산대첩을 그린 유현기(遊賢記)가 있다. 또한 세태를 평하여 시폐를 질타하고 시대적 자각을5·4 운동'의 격변기에 문단에 등단하고 1923년 발표한 (毁滅)은 당시 시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4년 시 및 산문이 실린 ≪종적≫(踪迹)을 비롯하여 1928년 첫번째 산문집 ≪배영≫(背影), ≪구유잡기≫(歐遊雜記), ≪니아≫(ni我) 등 산문집이 여럿 있고 말년에는 학문 연구에도 힘써 ≪시언지변≫(詩言志辨), ≪경전상담≫(經典常談) 등 아직도 널리 읽히는 논문을 저술했다. 그의 소품 산문들이 서정적인 섬세함과 함께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학식 때문이었다. 문예 창작 뿐 아니라 학술적인 연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주자청은 그 당시 문단에서 영향력있는 작가이자 그때까지 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소품문 수필의 지위를 문학의 전당에 당당히 올려놓았다. 그의 일부 작품들이 현대 중국어의 경전으로 추앙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중국현대 수필가,시인,학자.이고 원명 자화(自貨),호 추실(秋實). 자 패현(佩弦). 필명 여첩(余捷),백향(柏香),지백(知白)등. 그는 강소성 동해에서 출생하고 양주(揚州)에서 자란 주자청은 1916년에는 북경대학 예과에 입학,이듬해 철학과에 들어갔다. 1919년「5.4」운동후 소년중앙학회,신조사에 가입했고 따라서 이 시기부터 신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920년에 대학졸업후 절강항주 제1사범 강소양주 제6사범,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절강상우춘휘중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2년 유평백(兪平伯)등과 함께 중국신문학사상 첫 시문학간행물인〈시(詩)〉월간을 꾸렸다. 이듬해 유명한 장시「훼멸」을 발표하였으며 그 동안 문학연구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에 청화대학교수로 부임. 그때로부터 주로 수필창작과 고전문학연구에 정진하였는바 그의 수필 명편들인「노젓는 소리,등불 그림속의 진회하」,「록」,「봄(春)」,「뒷모습」,「하당월색」등은 이 시기에 쓴 것들이다. 그의 수필은 평이한 서술방식으로 실감있고 현장감 나게 표달하며 필치가 간결하고도 소박하며 친절하게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한때 문단에서는 주자청의 수필을 두고「미荒郊走盡荒郊便是人間底道呼! 里暗里岐路 千,叫我 走好?“上帝! 快 我 光明 ,我好向前 !”上帝慌着況,“光明?我 我!要光明,自己去造!”(번역문)광 명주자청 지음림 연 옮김비바람 사나운 밤앞은 광망한 황야황야를 두루 헤매여도인간의 갈길 막막하도다아! 어둠속에 갈림길도 천만갈래저더러 어이 가란말입니까?“하느님이시여! 어서 저에게 광명을 줍시사앞으로 잘 달려가게 해줍시사!”하나님은 불안하여 말씀하신다“광명? 짐도 찾아주기 어렵도다!정녕 광명을 바란다면자네 스스로 만들지어다!”―1919년 11월 22일1919년에 쓴 주자청의 시「광명」을 오늘의 안목으로 보면 유치한 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가 중국신시발전사에서 초창기에 씌여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시에 대한 평가가 좀 달라진다. 지난날 남겨놓은 문화유산은 사안(史眼)으로 헤아려보아야만 지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동방문화에 얼마간 상식이 있는 사람은『시경(詩經)』쯤은 알 것이다. 나아가서「관수(관수)」가 바로『시경』의 첫번째 시라는 것을 아는 정도이면 머나먼 고대에 벌써 이 같은 수준의 애정시를 썼다는데 탄복하고 아연해질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첫수의 시는 명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이처럼 사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주자청의 시「광명」을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보아야만 중국신시초창기에 있어서 이 시가 다른 시들보다도 빼어난 굴지의 시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920년 3월에 출판한 호적(胡适)의『상시집(常詩集)』은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첫부의 신시집이지만 고시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자청의 시「광명」은 고시작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통적인 대구나 음률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문언문(文言文)을 버리고 백화문(白話文)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시의 절주와 착상의 갱신에 못을 박고 있다. 그 동시대의 시인 주작인의 시「시내물(小河)」를 두고 사람들은 중국신시 초창기에 있어서 최초의 성공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주자청의 시「광명」은 비록「시내물」보다 10개월후에 창작하였지만 산문적인 시에역문)부족지감주자청 지음림 연 옮김그대는 태양인데나는 마치 한자루 촛불같고그대는 바다여서 호호탕탕한데나는 마치 잔잔한 시냇물같습니다.그대는 잠가놓은 마운탑인데나는 그 탑아래 배회자같습니다.그대는 새와 같아 어여쁜 노래 부르며하늘에서 맘껏 날아예고그대는 꽃과 같아 눈부신 색깔 뽐내며낙원에서 활짝 피어납니다.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없어그저 남몰래 뭔가 기대하고 있습니다.―1920년 10월 30일 항주에서이 시는 대칭식비유의 대구법을 사용했다. 이런 시의 구조는 의미가 관련성있는 비유체가 두 가지 이상 병치되고 매개 비유본체 역시 두 가지 이상의 비유물로 부동한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게 된다. 이런 시의 구조는 서구의 시양식에서 배워온 것으로서 20세기 20년대,즉 중국의 1919년「5.4」신문화운동시기부터 신시창작에서 애용하던 시작법의 하나이다. 이런 시작법을 배우게 되면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시구들을 만들 수 있다. 예①〈나는 줄기찬 격류/그대는 어여쁜 연어/나의 물줄기따라 맘껏 노닐어다오.〉,예②〈나는 한그루 나무/그대는 마치 한마리 까치/내 나무가지에 어서 둥지를 틀어다오.〉등.이런 시양식은 일반적으로 사랑이나 조국애를 표달할 때 많이 사용했다. 시인 주자청의「부족지감」은 그러류한 시와는 달리 시의 구상에 있어서 우정이나 사랑을 표달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광명과 위대함과 숭고함의 화신인‘그대(他)’에 대한 애모와 흠앙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기의 부족으로‘그대’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며 자신의 외소함을 성찰하고 있다.시의 구조상에 있어서도 그런 시양식의 기성작법이나 틀에 매이지 않고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제1연은 비유체들의 대비가 뚜렷하고 층차도 분명하나 제2연에 와서는 시의 구조가 1연처럼 엄격히 지켜지지 않고 비유체 역시 서로 대응되는 비유체(‘태양’은‘촛불’로,‘바다’는‘시냇물’로)가 아니라‘새’와‘꽃’의 속성으로 전개된다. 결말구 두 줄은 비유법에서 해탈되고 있을뿐 아니라“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배영은 한때 국내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단편소설 배영(背影)은 자식 사랑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야마는 부정(父情)을 묘사한 미문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 글에서 청년으로 자란 아들을 배웅 나온 아버지는 기어코 귤을 사주겠다며 철길을 가로질러 간다. 아들은 이때 본 아버지의 뒷모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배영이란 뜻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란 뜻인데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작품이다.「내가 아버님을 뵙지 못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버님의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아버님 마저 실직되어 정말이지 불행이 겹쳐서 온 날들이었다. 내가 북경에서 서주에 온 것은 아버님을 도와 서둘러 장례를 치를 생각에서였다. 서주에 도착하여 아버님을 뵈며 마당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니 할머니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버님은 애써 태연한 듯이 말씀하셨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느냐.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느냐?"집에 돌아와서 급한 대로 저당을 잡혀 돈을 변통하고 아버님은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돈을 빌려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의 집안 형편은 매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빌린 돈의 반은 장례를 치렀고, 또 반은 아버님의 실직으로 그럭저럭 써 버렸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님은 남경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셔야 했고, 나도 북경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님과 나는 동행하게 되었다.남경에 도착해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거기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포구로 가서 강을 건너 오후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야 했다. 아버님은 바쁘셔서 나를 전송하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대신 아버지는 여관의 잘 아는 심부름꾼에게 같이 가도록 부탁을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심부름꾼에게 자질구레한 하나 하나까지 자상하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자못 한참 동안 망설이시는 것이었다. 그 해 나는 이미 스무 살이 넘
    인문/어학| 2003.11.27| 9페이지| 1,000원| 조회(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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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 헝가리 정당
    목 차제 1 장 서 론 ‥‥‥‥‥‥‥‥‥‥‥‥‥‥‥‥‥‥‥‥‥‥‥‥ 1제 1 절 발표의 목적 ‥‥‥‥‥‥‥‥‥‥‥‥‥‥‥‥‥‥‥‥ 1제 2 장 민주화 이전의 헝가리 정당 ‥‥‥‥‥‥‥‥‥‥‥‥‥‥ 2제 1 절 민주화 이전의 헝가리 정당체제 ‥‥‥‥‥‥‥‥‥‥‥ 2제 2 절 다당제 도입의 배경‥‥‥‥‥‥‥‥‥‥‥‥‥‥‥‥‥ 3제 3 장 민주화 이후의 선거결과와 주요 정당‥‥‥‥‥‥‥‥‥‥ 4제 1 절 헝가리 선거 법‥‥‥‥‥‥‥‥‥‥‥‥‥‥‥‥‥‥‥ 4제 2 절 1990년 선거결과와 주요 정당 ‥‥‥‥‥‥‥‥‥‥‥‥ 6제 3 절 1994년 선거결과와 주요 정당 ‥‥‥‥‥‥‥‥‥‥‥‥ 9제 4 절 1998년 선거결과와 주요 정당 ‥‥‥‥‥‥‥‥‥‥‥‥14제 5 절 2002년 선거결과와 주요 정당 ‥‥‥‥‥‥‥‥‥‥‥‥15제 4 장 결 론 : 헝가리 정당의 향후 전망‥‥‥‥‥‥‥‥‥‥‥‥18참고 자료표 및 그림 목차(표3-1) 1990년 총선거 결과 ‥‥‥‥‥‥‥‥‥‥‥‥‥‥‥‥‥‥‥ 6(표3-2) 1990년 정당별 의석 분포‥‥‥‥‥‥‥‥‥‥‥‥‥‥‥‥‥ 6(표3-3) MSzP 투표자의 연령, 교육별 분포‥‥‥‥‥‥‥‥‥‥‥‥‥ 8(표3-4) 각 당 득표의 지역별 분포‥‥‥‥‥‥‥‥‥‥‥‥‥‥‥‥‥ 8(표3-5) 새로운 체제(민주주의)문제 해결능력에 관한 여론변화(%)‥‥‥8(표3-6) 1994년 총선거 결과 ‥‥‥‥‥‥‥‥‥‥‥‥‥‥‥‥‥‥‥ 9(표3-7) 1994년 정당별 의석 분포‥‥‥‥‥‥‥‥‥‥‥‥‥‥‥‥‥ 9(표3-8) 1998년 총선거 결과 ‥‥‥‥‥‥‥‥‥‥‥‥‥‥‥‥‥‥‥14(표3-9) 1998년 정당별 의석 분포‥‥‥‥‥‥‥‥‥‥‥‥‥‥‥‥‥14(표3-10) 2002년 총선거 결과 ‥‥‥‥‥‥‥‥‥‥‥‥‥‥‥‥‥‥‥15(표3-11) 교육 수준에 따른 정당별 투표 비율 ‥‥‥‥‥‥‥‥‥‥‥‥15(표3-12) 지역에 따른 정당별 투표비율 ‥‥‥‥‥‥‥‥‥‥‥‥‥‥‥16(표3-13) 2002년 정당별 의석 분포‥‥‥‥‥‥‥‥‥‥‥‥‥‥‥‥‥16(표4-희생되어 차례로 해체되어 나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다시 말해 헝가리 공산당이 점진적 공산화를 위해 소위 '살라미 전술'을 활용하였고, 이것이 공산당 중심의 인민정권으로 수립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이리하여 1948년 6월, 헝가리의 공산당과 사회 민주당이 합당한 '헝가리 근로자당(Magyar Dolgozok Partja)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 당은 헝가리의 유일한 정당으로 존재하며 모든 주도권을 공산주의자들이 독점함으로써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헝가리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권으로의 편입과 동시에 과거 복수정당의 체제가 경쟁과 협력이 불가능한 비경쟁적 정당체제인 공산당 일당체제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음을 말해준다. 후에 56년 혁명이후 근로자당은 헝가리사회주의노동당(Magyar Szocialista Munkkaspart: MSZMP)으로 개명했으며, 이 일당독재체제는 1989년 10월 당대회에서 헝가리사회주의노동당이 헝가리사회당(Magyar Szocialista Part: MSZP)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당제가 도입되기까지 지속되었다.제 2 절 다당제 도입의 배경1. 헝가리 민중혁명(1) 헝가리 민중혁명의 발발동유럽 제국이 사회주의 권으로 편입된 가운데 최초로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나라는 다름 아닌 헝가리였다. 그것은 바로 '정치체제개혁' 혹은 '정당체제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1956년의 헝가리 민중혁명이었다.헝가리 민중혁명의 주동적인 단체는 1956년 4월에 결성된 청년중심의 페토피 클럽(Petofi Club)으로, 이 단체는 헝가리 작가동맹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식인 집단으로 성장되었다. 페토피 클럽은 언론 및 출판사 자유, 라코시 노선의 반대, 사회주의로의 헝가리의 길, 소련지배로부터의 이탈 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결국 1956년 10월 23일, 페토피 클럽의 호소에 따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 가정 주부들이 결집된 가운데, 작가동맹 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ⅰ) 사회주인제로 선출되며 210명은 정당명부에서 선출된다. 의석 배분 방식과 선거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a. 1구 1인제에서 후보자는 1차 투표(First Round)에서 유표 득표의 과반수(50%+1표)를 얻으면 당선이 확정되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은 드믈다. 2차 투표(Second Round)는 1차투효에서 15%이상을 득표한 후보자만 출마할 수 있으며 15%가 넘는 후보가 없으면 상위 3명의 후보가 참가한다. 2차 투표에서는 단순다수제로 당선자를 확정한다.b. 정당명부는 15개 주(County)와 전국단위를 기준으로 작성되는데, 모든 정당이 다 정당명부를 작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선행 조건이 따른다. 우선 전술했듯이 1구 1인제에서 개인 후보는 75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각 정당은 한 개 주(County)에서 표 1과 같이 정해진 수 이상의 1구 1인제 후보를 냈을 경우에만 주에서 정당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이어서 20개 주(County)중에서 7개 지역단위 이상에서 명부를 작성할 수 있는 정당만이 전국단위의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또 이들 정당 중에서 1차투표시 정당명부에 대한 투표의 득표율이 전국 유효 투표의 4%를 넘어야만(봉쇄조항) 의석배분에 참여할 수 있다.(1994년에는 5%로 상향조정)c. 전국명부는 58명 혹은 계산 방식에 따라 그 이상이 될수도 있다. 전국명부 역시 당 지도부의 원내 진출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이 범주에서의 결과는 '사표(Fragment Vote)' 개념에 기반하여 결정된다. 즉 (하위 단위의)사표가 전국단위에서 고려되는 것인데 사표는 개인지역구에서 당선되지 못한 후보가 얻은 득표와 지역명부에서 당선에 필요한 수학적 최소치를 초과한 득표와 미달한 득표를 말한다. 역시 전국 득표율이 4%(1994년에는 5%)가 넘지 못하면 전국명부의 의석 배분에 참여할 수 없다.d. 선거 과정은 이를 책임지는 조직에 의해서 주관되는데 전국 선관위는 의회 혹은 정당들에 의해서 지명되며, 개인지역구와 지역였던 포즈가이, 그리고 외무장관이던 줄라 호른(Gyula Horn) 등이다.세 번째 야당인 Fidesz는 1988년 급진적 자유주의 학생반체제 그룹에 그 기반을 두고 성립되었다. 창당 주역들은 주로 부다페스트 대학 법과대학 학생들이었다. 지도자는 오반(Viktor Orb n)이며 어느 당보다 지속적으로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당은 급진적 자유주의 정치 강령과 급진적 행동주의, 그리고 생태(환경)적 문제에 주력하고 있다. 당원은 1991년 현재 약 1만 명 정도이다.연령18-33세34-49세50-65세66세 이상(%)10373023학력8년 이하8년기술교육학교고등학교고교 이상(%)2122152022(표3-3) MSzP 투표자의 연령, 교육별 분포정당부다페스트다른 도시비도시지방MDF264034SzDSz324325FKgP123157MSzP314029Fidesz224434KDNP133651합계224038(표3-4) 각당 득표의 지역별 분포안탈 정부 시기 헝가리 경제 상황의 악화는 일부, 체제 전환의 과정으로서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경제 상황의 악화는 국민들의 생활 수준의 저하로 나타나며 이는 곧 정치적 지지의 변화 혹은 체제에의 불신으로 연결되곤 한다. 헝가리의 경우 기대 이하의 경제성과에 대해 국민들의 실망감은 커서 정치적 개혁 추진에도 지장을 주고 있었다. 1979년이래 거의 매년 생활 수준의 정체 혹은 저하를 경험해 왔으며, 소득 및 재산분배는 더욱 불평등하게 되었다. 이행 이후 헝가리의 경제성과는 여타 동구국가들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너무 완만한 개혁정책 수행, 급속한 경제회복을 위한 성장 정책의 결여 등으로 커다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이행 이후 헝가리 경제의 거시 경제적인 악화는 질적, 구조적 변화에 대한 비용이라 할 수 있으며, 경제개혁의 전체적인 성과에 비해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 수준은 하락했고, 정부는 이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1989199019비판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Fidesz가 이끄는 정부가 어떻게 이런 목표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사항을 밝히지 못했다. 결국 Fidesz는 당 내분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 비현실적인 공약 등으로 1990년 선거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석 수는 감소했다.KDNP(Kereszt ny Demokrata N pp rt)는 KDNP는 1990년 연립정부내에서 가장 약한 파트너였다. 그러나 안탈 정부 하에서 KDNP는 지지기반을 넓히고 당의 통일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연정 성립 시 당 소속 의원은 21명이었으나 23명으로 늘어났으며, 당원수도 3,000명까지 증가하였다. 또 내각 참여도 초기에는 1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3명으로 늘어났다. 지지율도 높아져서 1994년 4월에는 9%에 이르렀는데, 이는 연정 내 다른 정당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KDNP는 대부분의 정당으로부터 연정 파트너로 지목되었으며, 대중적으로 가장 덜 싫어하는 정당이었다. KDNP는 자신을 중도 우파 정당으로 정의했으며 종교인들의 이익 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 사회복지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안탈 정부 내에서 종교 정책의 전반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교회가 정치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서도 안되며, 교회가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해서도 안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교회에 어떤 지원도 요청하지 않았다. 연립정부의 정책이 사회정책을 강조한 반면, KDNP는 사적소유를 기본으로 하였다. 당의 농업정책은 소규모 자영농으로 하되 집단농장으로부터의 이행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당에 대한 지지는 대체로 비 도시 지역 특히 트란스다뉴비아(Transdanubia)에 집중된 것이었다. KDNP는 FKgP의 탈퇴이후에도 연립정부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KDNP는 정부의 사유화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연립정부내의 야당'으로서 역할을 했다. 전체적으로 KDNP는 차분하고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했으며, 다른 연정 파트너와는
    인문/어학| 2003.06.26| 21페이지| 1,000원| 조회(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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