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보증으로 가정이 파탄의 지경까지 이르는 모습은 TV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 아니다. 요즘에 들어선 우리가 주위에서 어렵지 안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해오면 인정상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한 보증자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조차 없이 서명날인해 주는 경우가 많다. 보증은 하나의 계약으로서 그것은 계약성립과 동시에 그에 대한 의무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이를 간과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보증을 접하게 될 것이다. 진정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직장 생활의 시작만 보더라도 신원보증이라는 것이 따라 붙게 된다. 이렇듯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증에 대해서 앞서 이해하는 것이 장차 우리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Ⅱ. 본 론1. 보증, 보증인, 보증채무, 보증계약의 의의민법상 보증(保證)이라 함은 채권자에 대하여 자신의 채무를 부담하는 주된 채무자 이외에 동일한 내용의 채무를 부담하는 종(從)된 채무자를 두어서 주채무자의 채무에 대한 채권을 담보하는 제도를 말한다. 원래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는 근대법의 대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로서는 그 계약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마련이고, 그 유용한 수단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주채무자 이외에 제3자로 하여금 채무의 이행을 담보하도록 하는 보증이라는 제도이다. 이 경우 주채무의 이행을 담보하는 종된 채무자를 보증인(保證人)이라 하고 그가 부담하는 채무를 보증채무(保證債務)라 하며 보증채무를 발생시키는 계약을 보증계약(保證契約)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보증인은 주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이행하지 아니하는 채무를 이행할 채무, 즉 보증채무를 보증계약에 의하여 부담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광신, 담보와 보증의 법률지식, 2732. 담보(보증)의 종류담보(보증)을 나누어 보면, 인적담보와 물적담보가 있다. 인적담보란 거래의 상대방 이외의 제3자를 보증인으로 세워놓아 만일 채무자가 점이 있다.1 연대채무연대채무란 여러 사람의 채무자가 각자 맡은 내용의 채무를 이행할 의무를 부담 하고, 채무자 중 1인이 변제하여 채권자가 만족을 얻으면 다른 채무자의 채무도 함께 소멸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채권자는 어느 연대채무자에 대하여 또는 모든 연대채무자에 대하여 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의 이행을 청구 할 수 있다.연대채무자간의 부담부분은 당사자간의 특약이 없는 경우에는 균등한 것으로 추 정되며 어느 연대 채무자가 변제 기타 자기의 재산출현으로 공동면책이 된 경우 에는 다른 연대채무자의 부담부분에 대하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2 보증채무보증채무한 보증인이 채권자에 대하여 주채무자가 이행하지 않는 채무를 이행 할 의무를 부담함으로써 주채무를 담보하는 채무를 말한다.보증채무는 주채무와 그 내용은 같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독립된 채무이며 옹기 주채무의 담보를 목적으로 하므로 주채무와 주종관계가 있다. 또 주채무에 대한 채권이 이전하면 원칙적으로 보증인에 대한 채권도 이전하며, 또한 주채무가 이 행되지 않을 때, 비로소 이행하게 되는 제2차적인 채무이다. 따라서 보증채무는 채권자로부터 이행청구를 받았을 때 최고의 항변권과 검색의 항변권(채무이행 의 청구를 받은 보증인이 먼저 주채무자의 재산에 대하여 집행할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이순태, 채권·채무의 생활법률, 70~713 특수한 인적담보제도현실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인적담보제도는 이러한 단순한 보증채무나 연대채무 가 아니라 연대보증, 공동보증, 근보증 등의 특수보증제도이다.a 연대보증연대보증은 보증인이 주채무자와 연대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보증채무이다. 따라서 보증채무와 같은 최고, 검색의 항변권이 인정되지 않고 보증인이 채무자보다 먼저 채무를 이행하는 경우도 인정되므로 채권의 담보력이 훨씬 강하다.b 공동보증공동보증은 수인의 보증인이 각자 주채무자와 연대하여 채무를 부담하는 연대보 증인인 경우이거나 수인의 보증인이 보통의 보증인이지만 보증연대의 특약이 있 는 경우 등 법률,133~134(2) 물적담보제도물적담보제도는 채무자 또는 제3자(물상보증인) 소유의 물건에 대하여 교환가 치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물권의 설정을 통하여 권리 순위에 따라 배타적으로 채권의 만족을 얻도록 하는 제도이다. 인적담보는 실제적으로 보증인 등의 재산 상태에 의존하여 채권의 실현이 확보되는가의 여부가 불확실한 반면에, 물적담 보제도는 피담보목적물의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지 않는 한 가장 확실한 채권담 보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물적담보는 담보물권의 설정에 의하여 성립되므로 그 절차가 계약의 체결로써 성립되는 인적담보에 비하여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다.민법은 채무자에게 물건의 소유권을 유보하는 제한물권으로서 담보물권을 인정 하고 있는데, 이 담보물권은 법정담보물권과 약정담보물권으로 나누어진다.1 약정담보물권일반적인 담보물권으로서 당사자 사이의 약정에 의하여 성립하는 담보물권이다.a 질권질권은 채권자가 그 채권의 담보로 채무자 또는 제3자가 제공한 동산 또는 재산 권을 점유하고, 그 동산 또는 재산권에 대하여 다른 채권자보다 자기 채권의 우 선변제를 받을 권리가 있는 담보물권이다,b 저당권저당권은 채무자 또는 제3자가 점유를 이전하지 아니하고 채무의 담보로 제공한 부동산에 대하여 다른 채권보다 우선변제를 받는 담보물권이다.c 전세권전세권은 전세금을 지급하고 타인의 부동산을 점유하여 그 부동산의 용도를 좇 아 사용, 수익하며 그 부동산 전부에 대하여 후순위권리자 기타 채권자보다 전 세금에 관한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물권으로서 목적물을 사용, 수익한다는 점 에서 용익물권적 특질과 전세금에 대하여는 다른 후순위권리자를 우선하여 변제 받는다는 담보물권적 특질을 함께 가지고 있는 물권이다.2 법정담보물권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당연히 성립하는 담보물권이다.a 유치권유치권은 타인의 물건 또는 유가증권을 점유한 자가 그 물건이나 유가증권에 관 하여 생긴 채권을 가지는 경우에 그 채권의 변제를 받을 때 까지 그 물건이나 유가증권을 유치할 수 있는 권리이다.b 법정질권토지임 등이 이에 속한다.{) 사례중심 생활과 법률, 135~1413.보증채무의 성립요건보증채무는 채권자와 보증인 사이에 맺어지는 보증계약에 의하여 성립한다. 따라서 주채무자는 보증계약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실제의 거래관행상으로는 주채무자가 보증인의 대리인 또는 사자(死者)의 자격으로 보증을 승낙한 보증인으로부터 인감도장을 교부받아 채권자와 보증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법률적으로 주채무자는 직접 보증계약의 당사자는 아니고 보증일을 대리하거나 보조하는 지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보증인이 보증을 함에 있어 주채무자가 보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보증계약의 효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또한 실제에 있어서 드물기는 하겠지만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관여없이 독자적으로 채권자와 보증계약을 체결하여도 무방하다. 그 결과 보증인이 채권자와 보증계약을 체결한 후 주채무자에 대하여 보증의 의사를 철회한다든지, 주채무에 대한 착오(錯誤) 등의 이유로 보증의사를 취소하였다 하더라도 그 철회나 취소의 의사표시가 당연히 보증계약의 효력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한편 채권자는 반드시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야 하므로 단지 채무자와 제3자 사이의 계약으로 제3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대신 이행할 것을 약정하였을 뿐이라면 이는 이행인수계약(履行引受契約)이나 제3자를 위한 변제계약은 될 수 있어도 채권자가 개입하지 아니한 이상 민법상의 보증채무는 성립하지 않는다.우리 민법상, 보증계약은 소위 낙성(諾成), 불요식(不要式)의 계약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보증계약을 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방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서면에 의할 필요는 없고 채권자와 보증인 사이의 구두의 합의만으로 보증이 성립하게 된다. 보증서(保證書)는 하나의 증거자료에 불과할 뿐 그것이 없다고 하여 보증계약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당사자 사이의 합의의 존재는 보증계약의 성립에 있어서 반드시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그러므로 예컨대, 어떤 여자가 채권자로부터 돈을 빌렸 있다.재판의 실무상 많이 문제로 되는 것은 어음상에 보증 또는 배서(背書)를 한 경우 어음상의 채무 이외에 민법상의 보증채무까지 부담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본래 어음상의 채무와 민법상의 채무는 별개의 것이므로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발행 ·교부하여 준 약속어음에 배서한 제3자는 약속어음상의 채무를 부담할 뿐이고, 그 원인 되는 민법상의 채무에 관하여서까지 보증인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소위 어음관계와 원인관계의 분리). 그러나 만일, 어음이 사실상의 차용증서와 같이 원인채무의 발생원인 되는 증서의 대신으로 발행된 것이고 배서인도 그와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원인 되는 채무를 담보하는 의미로 이에 배서하였다면, 이는 민법상의 채무에 관하여도 보증책임을 부담한 것이라고 봄이 당사자의 의사표시의 해석으로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어음의 소지인이자 대여금채권자는 배서인에 대하여 보증금청구를 할 수 있게 된다.보증채무는 주채무의 이행을 담보하는 채무이므로 보증채무가 성립하려면 주채무의 존재를 그 전제로 한다(이른바 성립에 있어서의 부종성). 그러므로 앞서 본 바와 같이 주채무가 성립하지 않거나 이미 소멸하고 있으면, 보증채무도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 다만, 주채무는 존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현재의 채무이든, 장래의 채무이든, 특정의 채무이든, 불특정의 채무이든 모두 보증채무의 성립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민법 제 428조 제2항에서도 보증은 장래의 채무에 대하여도 이를 할 수 있다 고 규정하고 있고, 거래의 실제를 보아도 특히 은행과의 계약에 있어서는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현재 및 장래의 채무에 관하여 보증계약이 체결되는 수가 많다.보증인이 개인이 아니고 회사와 같은 법인인 경우에는 실제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고 법인의 기관(機關)이므로 주의할 점이 있다. 즉, 회사의 대표이사가 회사 명의로 보증계약을 체결하는 경우에는 그 보증행위가 회사의 정관(定款)에 정하여진 목적범위내에 속하는 사항인지의 여부를 잘 검토하여야 한다다.
REPORT . .외세에 항거했던 나라만이바른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본다(-아편전쟁을 보고 나서)과목명: 문화사의 이해학 과: 사회과학부학 번: 200110450이 름: 윤여옥제출일: 2003.11.26서 론세계의 여러 나라의 촉각을 곤두세웠던 홍콩의 반환이 올해로 6주년을 넘어섰다.반환 전부터 홍콩반환의 의미와 반환으로 인해 일어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기대와 우려에 대한 말이 많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희망보다는 실망스러운 결과들이 대부분이다.홍콩은 ‘1국2체제’의 아슬아슬한 실험에서는 벗어났지만, ‘경제난이란 병목앞에서 고심하고 있다. 일자리 줄고 개인파산 급증하고 있다. 서민들 경제난에 깊은 시름을 하고 대졸자도 중국 행이 봇물을 이룬다고 한다. 실업률이 홍콩 탄생 이래 최고치라고 하니 홍콩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만 하다.또한 외국의 평가 기관들이 홍콩에 대해 매긴 ‘성적표’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고 한다. 홍콩이 아시아 국가들 중 보기 드물게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리가 흔들리는 기미가 뚜렷하다. 특히 ‘숙적’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상하이에 마저 빛이 가려, ‘아시아의 국제도시’ 홍콩의 자존심은 구겨지는 듯하다.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과거 5년의 기업경영 환경’을 점수화해 발표하는 국가 순위에서 홍콩은 1997년 회귀 이후 줄곧 1위를 지켜오다가 2002년에는 3위로 밀렸다. 언제 1위를 회복할지 기약하기 어렵다. 미래는 더 불투명하다. ‘미래 5년의 경영환경’을 예측한 순위에서 홍콩은 세계 11위로 작년보다 한단계 떨어졌다.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홍콩은 97년 3위에서 올해 9위로 6계단이나 떨어졌다. 미국 전통기금회의 ‘경제 자유 지수’만 유독 8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지금의 이와 같은 홍콩의 혼란은 영국이 빠져나간 빈자리라고 할 수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영국으로 인함이다. 중상주의 경제정책에 치중하여 돈벌이에만 급급했던 서방나라의 이기심이 한 나라의 영토를 예속하기에 이르렀고 150여년 동안 주권을 빼앗았던 것이다.오늘날 이슈가 되고있는 홍콩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앞서 홍콩이 영국에 주권하에 놓이기까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이 되었던 아편전쟁에 대해 알아보고자 사진 감독의 ‘아편전쟁’이란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2. 본 론“외세에 항거했던 나라만이 바른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본다”이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구절이자 ‘아편전쟁’이란 영화는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청나라의 도광황제 때 해마다 영국 상인들은 중국으로 은 3천만 냥 어치의 아편을 1800톤이나 수출했다. 연간 국고 수입이 4천만 냥이라 황제는 아편금지령을 내렸고 이때부터 중국 전역은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영화는 1838년 조정의 중신 임칙서라는 인물이 아편의 근절을 위해 소신을 적은 서신을 황상에게 전함으로써 시작된다. 임칙서의 서신을 받은 황상은 임칙서를 불러들여 109년 동안 선 황상의 금연령에도 불구하고 중독자가 점점 더 늘고 있는 난국을 해결할 수 있을지 반문한다.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임칙서 앞에서 황상은 아편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버린 임칙서의 스승이자 자신의 연로한 스승의 관직을 박탈하고 엄히 다스리게 함으로써 금연의 결심을 천하에 알리고 임칙서에서 힘을 주려 한다.한편 이때 동인도 회사의 영국상인 댄튼을 비롯한 양인들은 아편을 가득 실은 튜나호를 타고 중국에 들어온다. 이미 부패할 만큼 부패한 중국 관리들은 그들의 입항을 보증해주고 아편이 밀거래 되도록 눈감아 준다.아편의 근절을 위한 정책을 맡은 임칙서는 아편관을 덮쳐 아편과 관련된 죄인들을 참수 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사형집행관 역시 튜나호에서 영국 상인들과 아편을 거래했던 관리로, 이 때문에 튜나호에 같이 타고있던 중국을 아편의 혼란에 빠뜨리게 한 주범적인 인물인 하경용의 아들 하선지는 가까스로 살아 남는다.사형대상자의 대열에서 제외된 하선지는 임칙서에제 불려가고 양인들이 돈을 버는 법과 대포를 만드는 법을 아냐는 질문을 받는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서양의 장점으로 중국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겠다는 임칙서의 신념에 따라 하선지는 ‘통사’ 임무를 맡고 아편경로를 알아오도록 하는 명을 받는다.또한 임칙서는 양인들에게 중국의 백성과 나라를 뒤흔드는 아편을 내놓도록 하나 그들은 그들의 원칙을 내세워 거절한다. 이는 전쟁의 선포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양인들이 아편의 반납을 거절하자 임칙서는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포위한다.1839년 3월 24일, 영국의 통상장관 앨리엇이 광동에 도착한다. 앨리엇은 상인들로 하여금 배를 준비해 줄 테니 아편을 내놓고 열흘 안에 광주를 떠나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상인들은 아편을 전부 내놓고 떠나고, 백년 동안의 화가 깨끗이 사라졌다는 서신이 황상에게 전해진다. 이에 황상은 임칙서에게 모든 아편을 소멸하여 백성들을 구하고 양인들을 굴복시키라 명하고 엄청난 양의 아편들이 산산조각으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 1839년 6월 3일부터 20일간 임칙서는 2376254개 상자의 아편을 소멸한다.하지만 이로써 중국의 아편으로 인한 혼란이 끝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상인들에게 중국을 떠나도록 권유한 앨리엇에게는 엄청난 음모가 있다. 그는 철수하지 않고 바다에서 기다리며 상인 댄튼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수상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한다. 영국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고 있어 영국의 존엄성을 묵과해선 안되므로 각 계에선 이 사실을 알고 중국에 군대를 보내라는 정부에 압력을 넣는 편지이다.이 사실을 안 영국의 여왕이 한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임칙서 였어도 아편을 없앴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편이 아니다. 또한 상인들의 생명과 재산, 영국의 존엄성 문제도 아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도 자유무역을 거절한다면 1년도 못 가 대영제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보내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점을 깨우치려 함이다. 우리는 동방의 마지막 땅을 개발시킬 책임이 있다. 나는 다른 나라에게 중국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중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바로 19세기를 소유한다는 뜻이다.”결국 군대파견 문제가 의회에 상정되고 의원들의 발언이 시작된다. 5천년동안 군주국가 체제를 유지해오고 4억 인구가 넘는 중국의 위력에 의회의 반대세력은 강하다. 하지만 이때 상인 댄튼이 의회에 들어와 자신들은 중국에 복종을 요구당하며 굶고 화물가지 빼앗겼다며 의원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 또한 2천년 전 중국의 청동기 유물과 옥으로 만든 당나라 화병을 들고 들어와 유물에서 보이는 것과 중국은 도도하고 세상을 무시하고 있는 강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숟가락으로 조금만 건들 여도 산산조각 난다고 한다.1840년 4월 10일, 원정 군을 중국으로 보내는 안건은 투표결과 271대 262로 의회에서 의결된다. 영국의 전함은 광주에 다다르고 이미 전쟁에 대비한 임칙서를 본 영국은 북상하여 북경으로 향하기로 한다. 광주에서만 결전을 준비해오던 임칙서는 당황하고 황상과 각 연해에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한다.한편 정해에 도착한 영국의 군함은 돈을 불 테니 군함의 물품조달을 하도록 요구하고 저항 시에는 섬멸하겠다는 엄포를 한다. 그러나 정해 대신은 죽어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할 것이라 한다. 영국의 공격으로 정해는 1840년 7월 6일에 점령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아편전쟁 때 결코 항복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백 명이 자결했고 첫 순교자는 정해의 행정대신 유교강 이다.황상은 임칙서가 아편을 근절시키기도 전에 전쟁이 일어났으니 나라는 더욱 혼란해졌고 임칙서는 나라와 황상과 천하를 우롱했다 하며 격분한다. 이 때 황상은 천진 대고구에서 양인들의 위력을 목격하여 적을 두려워하여 과장되게 말하는 기선대신을 조정의 기둥이라 하여 양인을 설득 토록하는 명을 내린다. 양인들은 무지몽매하여 먼저 예로써 다스리겠다는 명목하에 임칙서는 파직하고 양인들은 너그러이 용서한다고 한다.임칙서는 현재의 상황으로선 죽음을 불사한 항쟁 외 에는 다른 길이 없고,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라 하지만 기선은 이미 영국인들의 비유를 맞추러 간다. 영국은 중국의 음식은 맛있지만 대포는 쓰레기와 같다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지만 기선은 웃어넘기고 귀국비용으로 3백만 냥을 대주겠다 한다. 하지만 영국은 돌아갈 생각이 없으므로 6백만 냥의 보상금과 5개 항구의 개항, 특히 홍콩을 요구하며 그들의 조건을 충족시켜주면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한달 안에 모든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시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고 한다. 잠정적으로 합의한 기선에 의해 홍콩 땅에는 영국의 깃발이 휘날린다.궁으로 돌아온 기선은 홍콩은 황무지에 불과하므로 영국에게 주자고 하지만 대신들은 이제까지 한번도 영토를 빼앗긴 적이 없는 중국으로선 그럴 순 없다고 반발하고, 황상 역시 협약을 맺든 전쟁을 하든 나라는 해를 입을 것이고 따라서 병력을 동원해 양인들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한다.드디어 전쟁은 시작되고 영국의 강력한 무기 앞에 중국의 무기는 너무 초라하다. 하지만 중국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쟁에 임한다.황상은 나라를 배신한 기선은 관직을 박탈하고 경성으로 유배를 보내고 , 임칙서는 나라에 누를 끼쳤다 하여 신강으로 유배를 보낸다.그리고 역대 황상이었던 순치(1644-1662), 강희(1622-1723), 옹정(1723-1736), 건륭(1736-1796), 가경(1796-1821)의 그림이 순서대로 비취고 그 앞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지금의 황상이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그 뒤 일렬로 앉아 절을 하는 자의 나이는 점점 어려져 끝에는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157년 만인 1997년7월 1일에 홍콩의 주권을 되찾는다는 자막과 함께 말이다.3. 결 론아편전쟁은1840∼1842년 아편 문제를 둘러싼 청나라와 영국간의 전쟁이다.
2003학년도 제2학기 체육사 과제물사회과학부 200110450윤여옥≪ 차 례 ≫Ⅰ.한국체육사 연구의 필요성Ⅱ.각 시대별 체육사고대국가시대의 체육고려시대의 체육(3) 조선시대의 체육(4) 민족수난기의 체육(5) 현대 우리나라의 체육Ⅲ. 한국체육의 과제와 전망Ⅰ. 한국체육사 연구의 필요성체육사는 인간체육의 역사이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각자의 생존을 위하여 타 종족이나 맹수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처럼 외적 방어와 필수품을 얻기 위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여러 가지의 체육활동이 발전하였다.그러므로 우리 선조 들의 체육활동도 생활과 더불어 토착화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의 외적 침략으로 인하여 침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가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양반들의 소극적인 신체활동으로 체육은 밀려나게 되었다. 그후 일제 36년간의 긴 세월동안 우리의 체육활동은 많은 탄압을 받았으며 1945년 8월15일 광복 후에는 서구에서 들어온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기종목에 치우쳐 그 발전이 침체되어지게 되었다.그러던 중에 다행히 우리 조상의 "얼"을 재현하고자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로 체육분야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도 조상의 숨결이 담겨있는 한국체육사를 구명함으로써 우리 나라 체육의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역사에서 체육이 왕성한 시대는 문화창조가 이루어졌고 체육을 멸시한 시대는 멸망이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뜻에서 우리의 민족전통을 체계화하는 한편,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체육의 실태를 명확히 인식하고 앞날을 현명하게 통찰하기 위해서도 한국체육사의 연구는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Ⅱ. 각 시대별 체육사1. 고대국가시대의 체육고대국가의 경우 어느 나라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체육이 실시되지 않았다. 다만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유희활동으로 여가를 즐겼을 뿐이다.우리나라는 배달민족으로서 외국을 침략 한 경우도, 이웃나라를 탐낼 줄도 모르는 예절이 바르고 정취를 존중하며 평화를 사랑쟁터에 나가면 쫓길 줄을 모르고, 신의가 두렵고, 물욕에 마음을 굽히지 말라고 교훈 하였으니 영국에서 스포츠를 장려 보급하여 신사도 정신을 길러 국민성을 개선한 것이나 현대 미국에서의 유희나 스포츠를 장려하여 자연성의 개발과 도의적 성격육성에 힘쓰고 있는 점 등과 다름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의 이념은 스포츠의 정신과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을 뿐 아니라 현대의 스포츠를 통하여 사회성을 함양하는 스포츠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2. 고려시대의 체육고려조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문무의 균형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차차 화평해 짐에 따라 문인 세력이 득세하자 무인은 문인의 뒤를 따르게 되었으므로 무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거란이 침공하여 이를 막을 도리가 없어 서경 이북을 떼어주고 강화를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끝까지 적과 대전한 것은 화랑정신을 이어받은 무인들 이였다고 한다.이러한 문존무비의 사상은 신체가 튼튼하고 행동이 쾌활 용맹한 사람을 천히 여기는 관념의 흐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민족고유의 전통적인 유희활동은 아동들이나 일부 천민 등에 의하여 후세에 전달될 정도였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에 수박회가 있었고 특히 격구가 성행해서, 대궐에는 격구구장까지 있었다. 수박은 당시 무인들에게 가장 성행되었던 무술로서 왕과 귀족들의 관람경기로 널리 행해 졌으며, 개인 호신술로 또한 수박을 통한 무인의 선발이 이루어 지기도 하였다.우리나라의 국기라고 할 궁도, 씨름 같은 운동도 씨름군이라고 불리 워지는 문인 아닌 층의 장정들이 경기하는 것을 구경함으로써 이른바 문인들의 유흥적인 흥미추구의 대상으로 되어 있었다.마치 고대 로마의 스포츠 풍조와 흡사한 감이 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이 세력을 팽창하여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자 로마사회는 투우사, 검투사 등의 직업 선수들로 하여금 유혈경쟁을 시켜 관람적 흥미 추구의 대상으로 하였던 일이 있었다.3. 조선시대의 체육조선시대는 유럽에 있어서 중세기적 암흑을 깨뜨리고 정치, 문화, 교육면에 있어서 일대 혁명이 일 강장하고 병 없는 낙을 누려 받으라"라는 내용이었으니 이는 유럽의 체육사조와 동일한 사상이었다고 본다.서산대사는 국운이 어지러워짐에 유사시에 대비하여 소중승방에서 승려무사훈련을 시켰다가 임진왜란에 튼 역할을 담당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 도이취의 근대적 체육가인 얀이 하젠하이데의 산중에다 체조장을 건설하고 청년을 훈련하여 나폴레옹 전쟁에 대비한 것과 같다.문약사상에 젖은 조선조는 끝내 무력에 힘 쓰지 않고 있다가 일본제국주의의 간악한 침략의 마수가 뻗쳤을 때도 이에 대항하여 막아낼 도리가 없어 한일합병이란 굴욕적인 명목하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4. 민족수난기의 체육일본제국주의자 들의 식민지 노예교육정책은 우리나라 청소년의 체육 육성에 힘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학교에만 체조과목을 교과로 정하고 체육적 가치와 효과가 더욱 인정되는 초등학교에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학교에 체조를 실시한 것도 체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교사도 체조를 지도하기 위한 무단정책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체조교사는 체육을 지도하기 위한 교사라기보다는 일종의 훈련관 이었다.초등학교에서는 이러한 훈련이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체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말기 태평양전쟁이 일어날 무렵 일제의 체육 정책은 전체주의적 국방체제로 일변하면서 전투능력을 높일 목적으로 교수요목을 개편 실시하였다.그런데 구기계통의 운동을 삭제하였고 체육에 대한 학생들의 응원을 금지한 사실은 구기운동은 단체심을 길러주는 운동이며 응원심리는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러한 심리가 조국애의 심리로 연장될 것을 우려하여 행해진 처사라고 볼 수 있다.이렇듯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이 체육다운 체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다가 1920년에 조선체육회가 조직되면서 체육의 장려보급과 운동경기 대회 등을 개최하여 현대체육 장려와 보급에 힘썼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조선체육협회라는 단체를 병행시켜 우리 나라의 체육마저 자기네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체육회의 사업은 좌절되지 체육은 일제말엽의 전체주의적 국방체육체제를 배격하고 민주적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현대 체육은 개인적 가능성 신장의 원리에서 체육에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자주성을 존중하는 원리에서 민간단체의 자립을 촉구하였다.그리하여 각종 스포츠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각 부문에 걸쳐서 우수한 선수들이 배출되어 국제올림픽 경기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국제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1920년에 역사적으로 발족한 조선체육회는 일제에 항쟁하여 우리 나라 체육 문화의 명맥을 연장해 오다가 미군정과도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대한체육회로 개칭하고 산하의 여러 가맹 단체들을 통솔하며 스포츠에 대한 국제적 연락 밀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우리 나라의 체육을 대표하여 사회체육단체를 협력하는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체육회 내에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두고 국제올림픽경기대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참가에 관한 사업을 처리하고 있다.1)국제 올림픽 참가의 역사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한체육회는 국제올림픽 경기대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참가에 관한 사업을 처리하고 있다.우리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48년 제 14회 런던 대회였다.당시 68명으로 구성된 한국선수단은 7개 종목에 출전하여 복싱에서 한수안 선수, 역도에서 김성집 선수가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여 메달 획득 순위 24위를 차지하였다.이에 앞서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1936년 베를린대회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으나, 불행하게도 일제치하에서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므로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런던대회 이후 우리 나라는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제외하고 모두 참가했으며,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건국 후 처음으로 영예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특히 1984년 7월 28일까지 16일 동안 벌어진 제23회 로스엔젤레스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전세계 140개국 7800여명의 선수들과 당당히 겨루어 금메달 6개, 은메달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1986년 10회 대회 개최에 이어 2002년 14회 개최를 하며 아시아에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역대 아시안 게임 개최지와 우리나라의 성적>회수 개최지 개최년월일 성 적 14 한국, 부산 2002-09-29 ~ 2002-10-14 금 96, 은80, 동84, 전체260 13 태국 , 방콕 1998-12-06 ~ 1998-12-20 금 65, 은46, 동53, 전체164 12 일본 , 히로시마 1994-10-02 ~ 1994-10-16 금 63, 은56, 동64, 전체183 11 중국 , 북경 1990-09-22 ~ 1990-10-07 금 54, 은54, 동73, 전체181 10 한국 , 서울 1986-09-20 ~ 1986-10-05 금 93, 은55, 동76, 전체224 9 인도 , 뉴델리 1982-11-19 ~ 1982-12-04 금 28, 은28, 동37, 전체93 8 태국 , 방콕 1978-12-09 ~ 1978-12-20 금 18, 은20, 동31, 전체69 7 이란 , 테헤란 1974-09-01 ~ 1974-09-16 금 16, 은26, 동15, 전체57 6 태국 , 방콕 1970-12-09 ~ 1970-12-20 금 18, 은13, 동23, 전체54 5 태국 , 방콕 1966-12-09 ~ 1966-12-20 금 12, 은18, 동21, 전체51 4 인도네시아 , 자카르타 1962-08-24 ~ 1962-09-04 금 4, 은9, 동10, 전체23 3 일본 , 동경 1958-05-24 ~ 1958-06-01 금 8, 은7, 동12, 전체27 2 필리핀 , 마닐라 1954-05-01 ~ 1954-05-09 금 8, 은6, 동5, 전체19 1 인도 , 뉴델리 1951-03-04 ~ 1951-03-113) 월드컵의 개최국제축구연맹(FIFA) 주최로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의 제1회 대회는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당시 연맹회장인 J.줄리메가 제공한 줄리메컵이 이 대회에서 3번 우승한 브라질문이다.
Ⅰ. 서 론중국의 성문화는 여느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전족' 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족이란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하여 헝겊으로 묶던 풍습이다. 전족을 하면 발은 자라지 못하고 고통도 심하여 바로서기 · 걷기 등이 모두 불안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행동이 불편해진 여성들은 집안에서 고분고분 남자의 시중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낮에는 감상하고 밤에는 어루만지기’ 좋은 성적 도구의 역할까지 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부위가 아니라 숨어 있는 부위라 한다. 중국에서는 신발 속에 숨어 있는 두 발까지도 작은 발에 흥분을 느끼던 남성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관습이었던 것이다. 특히 여성의 발에서 나던 냄새에 극한 흥분을 느끼던 남성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전족을 씻을 물을 차처럼 마시며 흥분했던 당시 중국인들의 성관념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이런 독특한 성문화를 지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유가와 같은 전통 사상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와 같은 고루한 이미지를 고수해 왔다.오늘날 이러한 중국에 경제개방과 함께 마오쩌둥시대의 청교도식 사회분위기에서 벗어나 젊은 세대 사이에 "성(性)의 혁명"이 불고 있다고 한다.중국이 4반세기 전 공산주의 교조를 버리고 난 뒤 변화의 물결이 인 것은 경제뿐이 아니었다. 서구풍조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도시화는 성에 대한 일반적 풍조까지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손을 붙잡는 것조차도 결혼 전에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알고 있던 대단히 보수적이던 부모 세대의 모습과 달리 이제는 도심에서 젊은 세대들이 손을 잡고 껴안고 심지어 입을 맞추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혼전 성관계가 긍정적으로 인식되어 가고 실제로 그 비율 역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이렇듯 현재 변화의 과정에 서있는 중국의 성문화에 대한 궁금증과 방대한 대륙에 오랜 세월에 거쳐 생성되고 소멸되었을 여러 가지 성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Ⅱ. 본 론제1장 고대의 성원시사회에서 생식숭배가 보편적으로 존재했듯이 중국민족도 예외는 아니다. 처음 모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생식 능력을 숭배해 여자의 엉덩이와 배, 유방 등이 과장되게 표현된 출토물이 발견된다. 하지만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천해감에 따라 생식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양성이 한 몸에 존재하는 나체상이 발견된다. 그리고 사회가 점차 부계사회로 나아 가면서는 남성숭배물이 보편적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이러한 남근형상은 오랜 기간 숭배되었다.또한 중국 고대전설에 등장하는 '고매(皐 )'라는 혼인을 담당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매의 제사는 단지 성, 곧 생식숭배가 의례의 측면에서 반영된 것이다. 의례의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숭배가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전통철학 관념 속에 뿌리 깊이 내리면 그 영향은 크고 오래가게 된다. 유가철학의 경우 바로 이에 해당된다. 즉 오랜 생식숭배의 성관념이 침투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두 가지 방면으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는 많은 자식을 선호하는 것과 조상숭배이다.두 번째 것은 음과 양, 천과 인은 서로 감응한다는 음양천인감응관이다.옛날 사람들이 성을 중시한 것은 고대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미 혼인을 담당하는 '매씨(妹氏)'라는 관직이 있었다. 또한 관청의 소집에 의해 봄의 두 번째 달에 남녀를 만나게 하는데 이때만큼은 절차를 밟지 않고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자유연애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고대에 제도상으로 성을 중시했다는 또 다른 예는 귀족자제의 성교육이다. 이미 2천 년 전에 성교육이 귀족자제의 필수과목 이었다..제2장 성규범의 확립과 사회발전과의 관계은(殷)의 시조인 설, 주(周)의 시조인 직(稷), 진(秦)의 시조인 대업(大業)은 그 탄생과 성장과정이 모두 신화적 색채가 농후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신비한 교섭의 결과라는 법칙이 있다. 또한 이들의 탄생신화에는 명목상의 부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직·대업의 탄생신화는 바로 중국인의 선조가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르던 아주 오래된 옛 시대로부터 부계사회로 변화되어 온 흔적을 보여준다.그리고 고대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아내가 낳은 첫째 아이는 다른 성씨의 '사생아'일 수 있으므로 죽여버린다는 '맏 자식을 죽이는' 풍습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전 성관계가 매우 자유롭고 처녀의 정조관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으며, 출산예정일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부계가 이미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중국은 "군혼제상태 → 대우혼제 →일부일처제 → 부권의 확립 →국가기구의 완성"이라는 역사진로 과정 속에서 혼인제도가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가가 극단적으로 혼례를 중시하게 된 역사적 원인이다.일부일처제가 확립된 뒤에는 '간음'과 '음란'의 관념이 비로소 나타나 부부 외의 성관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제3장 방중술의 원류와 그 목표중국고대에서는 성과학을 일반적으로 방중술이라고 불렀다. 현대 성과학의 개념으로부터 볼 때, 방중술은 주로 성기교 · 성기는·장애치료·임신 등의 방면을 포함한다.초기의 방중술은 그 시기 사료의 부족으로 주로 성기교로 유추되지만 후기에 나온 문헌들을 보면 성기교를 연구하는 것이 방중술의 주된 취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방중술의 목적이 음란한 쾌락을 추구하거나 방탕하게 욕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수명의 연장과 질병의 제거를 위해서, 즉 양생과 장수를 위한 가름침으로 보았다.제4장 중국고대 성과학의 주요내용과 업적고대 방중술가들은 일반적으로 남자는 성교를 많이 하되 사정을 적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방중술가들이 추구한 장생의 노력은 비록 그들이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적지 않은 방면에서 그들이 얻어낸 결론은 현대의 성과학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성욕은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성생활은 남녀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생활과 건강', '성기능의 장애와 그 치료'에 대한 것이 그 내용이다.방중술은 잉태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상황 하에서 임신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월경주기 중 어느 날에 잉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와 태교와 양육에 관한 연구도 했다. 또한 저서에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약과, 정력을 강하게 하는 강정약 및 성기능의 장애를 치료하는 약의 약방문이 들어있다. 이 뿐만 아니라 낙태약의 존재가 방중술의 저서 가운데에는 일반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고대문헌 가운데는 낙태약에 관한 단서까지 찾아 볼 수 있다.
- 목 차 -Ⅰ. 서 론 ....(p.2)Ⅱ. 본 론1. 공 자....(p.2~3)2. 노 자....(p.3~4)3. 묵 자....(p.4~5)4. 장 자....(p.5~6)5. 맹 자....(p.6~7)6. 순 자....(p.7~8)7. 법 가....(p.8~10)8. 명 가....(p.10)9. 주 역....(p.10~11)Ⅲ. 결 론....(p.11~12)Ⅰ. 서 론"동양철학에세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무작정 책에 대한 거부감부터 생겼었다. 아마 철학이란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을 이번 기회에 읽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이 책을 지루한 철학서로 취급했을 런 지도 모른다. 그 생각 때문인지 막상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동양 철학은 심오하고 수행을 쌓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무엇이라는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내가 가진 편견이외에도 '동양 철학은 옛 유물과 같아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동양 철학은 점이다. 운명학이다' 등이 동양 철학에 대해 흔히 갖는 오해들이다.철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현실을 인식하고 그 토대위에서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문제 삼는 것은 동양 철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 공부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다.Ⅱ. 본 론1. 공자(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불행한 삶에서 피어난 위대함동양에 살면서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공자는 세계4대 성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출생, 그의 어머니와 자식, 부인까지 어느 하나 행복할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사람다운 삶공자의 중심사상은 인이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그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의 뜻을 다 담을 수 없다.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문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을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이다.2. 노자(인생의 보배를 간직하라)-고전중의 고전지금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과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할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노자라는 책을 초기의 도가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을 뿐이다. 도교, 불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노자, 장자, 주역을 '삼현', 즉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세 책으로 높였다. 그 때문에 도가사상들 분 아니라 유가와 불교쪽에서도 를 연구하고 주석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를 일관되게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의 cir이 이처럼 여러입장의 사람에게 주목받았다는 건 그 책의 무게를 알려주는 것이다.-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노자의 도는 만물을 그대로 두는 것이 큰 도를 찾는 방법이라 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며 유가의 도덕규범은 그들이 지어낸 도일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도는 인간에 대하여 어떤 자애의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정하다. 또한 도는 공평무사하여 성인이니 악인이니 아름다움이니 추하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유가에서는 '지성이면 감천' 또는 '인자무적'이라 하여 하늘이 착한 사람을 편드는 것처럼 말하지만, 노자의 도는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노자의 도는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도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다고 믿어 온 상제를 부정하는 개념이다. 그러면서 만물의 근원이다. 감각에 들어오는 만물은 총괄하여 '있는 것'에서 나온다.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고 인간이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한 성격을 '무'라고 하였다. 도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통제되었는데 규율을 어겼을 때는 조직으로부터 엄격한 벌을 받아야 했다. 사실 묵가 집단의 결속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었던 셈이다.-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묵가 집단을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묵자의 이런 점을 가리켜 공리주의라고 한다.-유가 비판묵가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묵가는 지배계층의 특권과도 같은 유가의 예제와 악을 비난했다. 또한 운명론에 대하여도 반대하고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반전 평화론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랑 때문에 생긴 침략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했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으며 묵가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에 선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또한 그의 사사은 유가의 사상과 맹렬히 대립되었고,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많은 유사점이 있는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가 조직력에 틈이 생겼을 때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와 몰락의 길을 걷는 것과 같이 묵자 사상이 소멸되었다. 결국 2500여 년전의 중국의 획기전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이다.4. 장자(광할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우리가 잃어버린 것 : 도(道)장자는 공자가 말하는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라고 했다. 진정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상대주의의 한계장자의 말대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봐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대상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특별히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애쓸 필요도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인데 우리는 왜 샐까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그대로 좋다', '모든 것이 좋다'일 뿐이다. 여기서 나름대로의 기준은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을 따르라'는 것이다.-장자가 남긴 것들현대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편리함과 자유로움 가운데 사치스러운 것은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제기했던 주체의 해체방법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가 한바탕 꿈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이다.5. 맹자(유가의 파수꾼)-공자의 뒤를 이어맹자는 스스로 공자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후세 사람들 또한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고 불렀다. 맹자 역시 공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도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를 부르짖었지만 민본사상이나 혁명사상과 같이 임금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무엇이 인간의 참 모습인가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하며 이 증거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를 들었다. 이 예에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겼던 순수한 마음을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 人之心)'이라고 부르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은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므로 그 행위 자체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에 있다고 보았다.-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이다. 인의예지는 감각이나 생리적 욕구가 아닌 마음속의 도덕 의지에서 나온다. 맹자는 감각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음순자는 공자나 맹자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살아있을 당시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벼슬에 오르는 등 상당한 영광을 누렸으나 사람들의 시기로 참소를 당해 여러 나라를 전전하게 된다. 순자는 사후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어 몹시 불행해 졌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순자가 인간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했디 때문이다. 그 뒤 현대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순자는 사상사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성악설순자는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한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작용을 성(性), 정(情), 려(廬), 위(僞)의 4가지로 나누어 성은 악이고, 위는 선이라 했다.-인간의 홀로서기순자는 인간과 하늘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하였다.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다만 통치자가 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 현상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 행위는 인간 행위일 뿐이다. 이러하 순자의 이해는 하늘을 도덕 근원으로 이해한 맹자와 전혀 다르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다.-공동체를 위한 규범: 예순자는 질서 잡힌 사회는 좋은 것이고 혼란스러운 사회는 나쁜 것인데, 인간이 타고난 본성대로 가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이다. 그는 예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면서 예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사회가 바뀜에 따라 예도 바뀌어야 한다고 하였다.-순자의 논리학순자는 고대 논리 체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순자의 논리학은 공자의 정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의 논리가 도덕적인 목적을 그 안에 담고 있다면, 순자는 순수하게 논리적 관점으로 발젼시켰다. 순자의 '명실론'은 현대 논리학과 여러 가지로 비슷하다.-순자 철학의 가치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