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고 서주제 : 탁구 규정목 차1. 탁구대2. 네트 어셈블리3. 탁구공4. 라켓5. 용어의 정의6. 서비스7. 경기방식8. 복장1. 탁구대1. 시합표면이 되는 탁구대의 상판 표면은 길이 1.525m, 폭 2.74m의 직사각형으로 바닥에서 76cm위에 수평상태로 설치한다.2. 탁구대 상판의 옆부분은 시합표면에 해당되지 않는다.3. 시합표면은 어떤 재료를 써도 무방하나, 표준 규격의 볼을 30cm에서 떨어뜨렸을 때 약 23cm로 일정하게 튀어야 한다.4. 시합표면은 무광택의 균일한 어두운 색으로 하며, 2.74m의 가장 자리를 따라 긋는 2cm폭의 사이드라인과 1,525m의 가장자리를 따라 긋는 2cm 폭의 엔드라인은 흰색으로 한다.5. 시합표면은 엔드라인과 평행으로 설치하는 수직네트에 의해 똑같은 코트로 나누어지며, 양코트 표면 모두를 포함한다. 『이훈의 탁구자료 - http://myhome.netsgo.com/leehun42/』2. 네트 어셈블리1. 네트 어셈블리는 네트, 지주대, 지주봉으로 구성되며, 탁구대에 부착하는 조임쇠도 포함한다.2. 네트는 양쪽 끝에 부착하는 높이 15.25cm의 수직봉에 연결한 코트를 이용하여 설치하며 수직봉의 외부 한계는 사이드라인으로부터 15.25m로 한다.3. 네트의 높이는 전체적으로 시합표면으로부터 15.25cm로 한다.4. 네트의 밑바닥은 전체적으로 시합 표면에 될 수록 가깝도록 하며, 네트의 양쪽 끝은 지주봉에 될 수록 가깝도록 한다. 『강동탁구동호회 - http://user.chollian.net/~s8404n』3. 탁구공1. 공의 지름은 40mm의 둥근 것으로 한다.2. 공의 무게는 2.7g으로 한다.3. 공은 셀룰로이드 혹은 이와 비슷한 플라스틱을 재질로 하며, 색상은 흰색, 노란색, 오렌지색 등으로 하고 무광택이어야 한다. 『관악사탁구회 - http://dorm.snu.ac.kr/pingpong』4. 라켓1. 라켓의 크기, 모양, 무게에는 제한이 없으며 판은 평평하고 단단해야 한다.2. 판의 최소 85% 두께는 원목으로 해야 하며, 판 내부의 접착층은 카본 섬유, 유리섬유와 같은 섬유 소재 혹은 압축용지 등으로 강화할 수 있으나 전체두께의 7.5%또는 0.35mm를 초과해서는 안된다.3. 공을 치는 면은 접착제를 포함하여 2mm이하로서 돌기가 밖으로 향해 있는 고무를 씌우거나 아니면 돌기가 안으로 향한 것이든 밖으로 향한 것이든 접착제를 포함 4mm아하의 샌드위치식 고무를 씌운다.5. 용어의 정의1. 랠리 : 공이 계속 시합상태에 있는 동안을 말한다.2. 렛 :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은 랠리를 말한다.3. 포인트 : 득점으로 연결된 랠리를 말한다.4. 라켓 핸드 : 라켓을 쥐고 있는 손을 말한다.5. 프리핸드 : 라켓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말한다.6. 서버 : 랠리에서 먼저 공을 치게 되어 있는 선수를 말한다.7. 리시버 : 랠리에서 두 번째로 공을 치게 되어 있는 선수를 말한다.8. 엄파이어 : 시합을 운영하기 위해 임명되어진 사람을 말한다.6. 서비스1. 서비스의 시작시. 볼은 서버의 프리핸드의 펼친 손바닥에 정지상태로 놓여있어야 하며 위치는 엔드라인 뒤 시합표면의 위여야 한다.
모용연에 대하여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는 전연, 후연, 서연, 남연 그리고 북연까지 다섯이다. 이 나라들이 중국에 형성되었을 당시의 상황은 오호십육국에 해당하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각 나라들의 존속주기 또한 아주 짧았다.삼국지이후의 중원과 동진의 혼란스러운 상황유명한 삼국지에 나오는 위촉오의 시대가 끝나고, 오가 진에 멸망당한 후 오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토착귀족들은 이전의 토호로 환원되었다. 그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 예컨대 오에서 손꼽히는 명가인 육씨의 육기, 육운 형제와 같은 자는 연줄을 구해 새로운 중원의 패자인 진의 수도 양으로 들어와 관직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대우는 결코 후한 것이 아니었다. 조정의 인사가운데는 그들을 시골출신으로 취급해 멸시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어가 오에서 사용하는 방언으로 중원의 발음과 달랐던 탓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재기넘치는 언동으로 인해 곧 팔왕의 난에 휩쓸리게 되고, 형제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나라 사람들의 관계진출위욕을 꺾는 것이었다.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위기 소침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진의 일족인 사마예가 이끄는 한 무리의 중원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왔던 것이다.사마예는 시호를 선재라고 한 사마의의 증손에 해당하므로 당시의 황실과는 이미 상당히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그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업을 떠나 자신의 봉지인 산동의 낭야로 도망갔다. 당시, 업에 있었던 성도왕이 살해되고 동해왕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회제 초기에, 사마예는 안동장군에 임명되었고, 과거 오의 수도인 선업에 도독부를 열었다. 이 준비는 친구인 왕도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왕도는 사마예에게 이 지방 토착호족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쓸 것을 권했다. 때마침 중원에서는 낙양이 흉노에게 함락되어 왕실과 귀족중에 살해된 자가 많았고, 죽음을 모면한 자는 다투어 남방으로 도망해 사마예의 휘하로 위탁했다.장안에서 즉위한 민제가 사마예를 승상으로 임명했지의 남방어는 오어라고 하여 경멸하였다. 두 언어의 구별은 일본에 전해진 한음과 오음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동진정권과의 유사성을 유럽역사에서 찾는다면, 꼭 동로마제국에 해당한다. 다같이 이민족에게 종래의 본거지를 점령당하고, 동남의 반쪽만 남은 땅에 할거했음에도 정통왕조를 자칭한 것이다. 동로마제국이 다아다넬즈 해협을 장악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유지한 것처럼 동진정권은 양자강 수로를 장악하여 그 영토의 통일을 유지하고 북방 이민족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사마씨의 서진이후의 중원의 상황- 흉노유씨의 집권서진이 멸망한 후의 중원은 혼란에 빠졌다. 중원의 주요부분은 흉노유씨의 한에게 점거당했다. 그러나 그 정권은 결코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력에는 강했지만 일찍이 중국식의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을 지배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방민족의 관례대로 상속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강력한 통솔력을 지닌자가 무리에서 추천되어 군장의 자리에 오르는 관습이 남아있어, 그것이 한층 더 혼란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다른 민족이 섞여 있어 이합집산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뜻밖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초기에 한의 유연이 죽은 뒤에는 그의 큰 아들 유화가 즉위했지만, 동생 유총이 호걸이어서 형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 그런데 유총이 죽고 아들 유찬이 즉위하자 대이변이 일어났다. 유총은 후사를 일족인 유요와 갈족의 호걸 석륵에게 부탁했는데, 유찬은 측근인 중국인 근준을 신임해서 정치를 전부 맡기고, 자신은 오락에 빠져 술만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유씨일족은 전부 술버릇이 나빠서 실패했는데, 풍습이 야만적이고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것 이외에 고상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런데 근준은 한인이었기 때문에, 유씨가 중국천자를 잡아서 죽이거나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이에 전권을 위임받은 것을 계기로, 기회를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 유찬을 비롯한 일족을 잡아죽이고, 유연.유총의 묘까지 파헤치고 사당을 불살라 버렸다. 않았다. 방심함을 확인한 석륵이 정예기병을 이끌고 유요의 중군을 돌파하자, 유요는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말에서 떨어져 생포되고 전군이 붕괴되었다. 유요의 전조영토는 차례로 석륵에게 평정되고, 중원의 대부분을 통일한 석륵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북방민족의 한계로 드러내는 이민족 국가들의 이합집산북방민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무력을 너무 믿는 것으로,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결벽성은 타협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소신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 개인의 행동에 대해 욕망을 제어하는 극기심이 결여되어 뜻한 바를 얻으면 주색에 빠져 과거의 공업을 하루아침에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결함이 있었다. 요컨대 교양이 없기 때문이다. 석륵은 이 점을 크게 반성하였다. 그는 중원을 평정하자, 완연히 진왕조의 후계자로써 자임하고 학교를 세우거나 관리등용제도를 제정해 진의 문화적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남겨진 자손, 일족은 야만인의 본성을 드러내었다.석륵이 죽은 후 태자 석홍이 즉위했지만, 몸이 약해 사촌동생 석호가 권력을 휘둘렀다. 석호는 백부 석륵에게 양육되었는데, 아이때부터 매우 흉폭하여 석륵도 주체하지 못하고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석호는 석홍의 자리를 빼앗고 죽였다. 석호는 스스로를 조천왕이라 칭하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거기에서 대토목사업을 일으키고 화려한 궁전을 세웠다. 이 야만인 군주에게 인민의 피폐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수만명의 인민이 피로하고 지쳐 무리로 죽어갔다.군주가 궁전을 장식하고 사치에 빠지자, 무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때마침 동북방면에 선비의 모용씨가 일어나 모용외때 연국을 세워 융성해졌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연왕이라 자칭했다. 석호는 몸소 연을 토벌했지만 실패하고 사졸 3만명을 잃고 후퇴하였다.중국인 염민의 위 등장무력쇠퇴의 불똥은 내란으로 이어졌다. 석호가 주색에 빠져 화를 잘 내게 되고, 자식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되자, 석수는 참을 수가 없어서 하고, 나아가 압록강 유역의 환도성에 웅거하던 고구려를 정벌하여 수도를 함락시켰다.연의 모용씨는 중국본토를 향하여 남하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하려면, 배후를 안전하게 해두기 위하여 고구려에 큰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또, 연의 군대는 동시에 만주 오지의 토착 농업국가인 부여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모용황의 아들 무용준때, 그 때까지 연의 남하를 막던 후조에 내란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좋은 기회였다. 연왕은 동생 모용각을 대장으로 삼아 후조를 찬탈한 염민의 위를 토벌하였다.위의 근거지인 업이 점령되고, 염민 또한 죽임을 당했다. 모용준은 그 곳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업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이를 전연이라고 하여, 뒤에 일어난 여러 개의 연국과 구별한다. 그러나 전연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낙양 부근까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섬서 지방에 새로이 티베트계의 저족인 부씨 정권이 흥기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다른 이유는 전연 자신의 국내사정 때문이다.연황제 모용준에게는 형제가 여러명이 있었는데, 모용수가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모용준은 모용수를 등용하지 않았다. 모용준이 죽어 아들인 모용위가 즉위하자 숙부인 모용각이 후견인이 되어 모용위에게 모용수가 중용할 만하다고 권하였는데, 멀지 않아 모용각도 죽자 두 사람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거기에서 일어난 것이 남쪽의 동진과 서쪽의 부씨정권의 진과의 삼각외교관계였다.동진에서의 환온의 등장 - 동진, 전연, 부씨정권간의 삼각외교 형성동진에서는 목제때 환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 환온은 양자강 상류에 독립하고 있던 성한의 토벌을 감행했다. 그런데 환온은 너무도 쉽게 촉을 평정하였고, 그의 공적은 여태까지 외부에 대항하여 자랑할 만한 무공이 없던 동진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환온은 곧 중원회복에 착수하였다. 당시 중원에서는 후조의 석씨 정권이 붕괴하고 대신에 동쪽에서 전연의 모용씨 세력이 확대해 가는 때였는데, 이것과 병행하여 서쪽에서는 진의 부씨가 융성하고 있었다. 그 중간지대에 있는 옛 수도인 립한 전연은 단독적인 항전에 불안을 느껴, 섬서에서 발흥하고 있던 전진의 부씨와 우호관계를 맺고 원조를 구하였다. 이 무렵 전진은 이미 그 정도의 대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부씨는 티베트계인 저족의 추장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섬서지방에는 중국과 더불어 서쪽으로부터 저. 강 등의 민족이 들어와 살았는데, 때때로 반란을 일으켜 서진정부을 괴롭혔다. 당시 흉노인 한의 유씨가 중원을 지배했을 때와 같은 무렵에, 포홍이란 자가 위수 상류에 웅거하여 독립세력을 건설하였다. 오래지 않아 후조의 석륵이 유요를 멸망시키자 포홍은 여기에 항복해 부장이 되어 저. 강 등의 여러민족을 이끌고 중원에서 사역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런데 석호가 죽은 뒤 후조가 혼란스러워지자 여러 민족들은 포홍을 옹립하여 군주로 삼고, 서쪽을 항하여 이동을 시작하였다. 포홍은 스스로 대선우, 삼진왕이라 칭하고 포씨를 부씨로 고쳐 부흥이라고 이름을 바뀝다. 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부건이 무리를 이끌고 섬서에 들어와 장안에 웅거하면서 진천왕이라 칭하여 뒤이어 황제의 자리에 즉위했다. 역사상에서는 이것을 전진이라 칭하여 강족의 후진과 구별한다.부건의 동생 부웅의 아들 부견은 본래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부생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에 비례하여 세간에서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때마침 강족의 추장인 요양과 싸워 그를 죽이고 그의 동샹 요장을 항복시키고 장안으로 돌아와 위엄과 명성이 더욱 높아져 당시 황제 부생은 그를 매우 증오했다. 이에 부견은 선수를 쳐서 거사하여 궁중에 들어가 부생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진천왕이라 칭하였다.부견은 후조의 수도인 업에 인질로 있으면서 성장한 사람으로 중국적 교양이 있었으며, 장안출신인 왕맹을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국정을 위임했다.이렇게 부견의 전진국이 섬서에서 기반을 잡고 있을 때, 전연의 모용위가 환온의 북벌에 대한 원조를 구하였던 것이다. 부견은 즉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연에 가세하였다. 이 원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부견은 대국인 전연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