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가 외설인가Ⅰ. 들어가며지난시간 논의 하였던 중학교 교사의 부부 누드사진 촬영과 인터넷 게시 건에 대해 좀 더 예기해보도록 한다. 중학교 미술교사의 부부 누드사진 인터넷 게시로 붉어져 나온 문제는 비단 교사의 자질문제, 예술과 외설의 차이에 대한 시각차 뿐만은 아니라고 본다.지난시간 시간관계상 충분히 토로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이 자리를 빌려 말해보도록 하겠다.Ⅱ.본론지난 시간의 토론에서 특히 쟁점이 되었던 것은 첫째, 일개인이 아닌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에게 누드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교사 자율성 전문성의 문제. 둘째,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 셋째, 예술이 아닌 외설로 인정된 작품에 대한 규제 문제라고 생각된다.첫 번째 항에 대해서는 우선 게시된 부부누드 사진을 음란물로 볼 수 없으며 일련의 메시지-성의 상품화에 반대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전달하려는-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나 토론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기에 아쉬움을 접기로 하자.두 번째와 세 번째 항의 문제는 결국 하나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예술과 외설을 갈라놓아야만 외설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예술은 무엇이고 외설은 무엇인가? 이 둘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나는 이 둘의 차이가 우리사회의 성에 대한 폐쇄성 때문에 나누어진 것이라 본다. 또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이 둘의 차이를 없다! 라고 말하고 싶다. 애당초 이런 구분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나 전시회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작품들만이 예술인가? 예술이란 고상하고 어렵기만 한, 상류층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인가? 음란물이든 예술작품이든 그것은 각기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이 비록 팔아줘! 라는 상업적 메시지이든 사회에 던지는 따끔한 일침이든 작가는 작품 안에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특히 요즘처럼 “팔리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기존 예술부류에 까지 상업주의적 속성이 퍼져있는 시점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예술이든 외설이든 하나의 작품이며 그것은 보는 사람의 가치관, 사상, 이념 등 지독히 주관적인 관점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예술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 까지 예술이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역시 독선과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19C에는 포르노물의 대용으로 쓰였던 누드화가 지금은 버젓이 예술작품으로 취급받고 있지 않은가. 이 역시 예술과 외설을 가르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설사 예술과 외설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손 치더라도 외설의 형식을 빈 예술과 예술의 껍데기를 쓴 외설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같은 작품이라도 박물관에 걸려 있으면 예술품이지만 밖으로 나오면 음란물’이라는 법의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예술과 외설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50년간이나 통용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호한 잣대는 한 외국 작가의 전시회에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판정을 내리는 우스운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사회에서 예술은 결국 남녀노소가 똑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령에 따라 예술일수도 외설일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다.예술 외설문제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청소년 보호에 관한 예기만 해도 그렇다.도대체 누가 무엇에게서 누구를 보호한다는 말인가. 보호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빠른 인터넷의 확산과 더불어 자의적이기 짝이 없는 규제의 벽을 넘어 성의 매매와 포르노물의 제작 유통의 주체로까지 나서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청소년 보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직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있어야 하는 것인가.결국 이 모든 일들은 지나치게 억압된 우리 사회의 성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영화 람보는 개봉당시 미국에서는 그 지나친 폭력성으로 부모동반관람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떠했는지 돌이켜 보자. 폭력에는 관대하고 SEX란 코드에는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회, 나에게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이제껏 음란물로 규정되어온 SEX코드가 삽입된 작품들에 대해 청소년에게 무제한적인 개방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영상물등급제 같은 경우 그 심의 기준이 우습기 짝이 없긴 하지만 제도 자체로는 나쁜 제도는 아니다. 재대로만 활용하면 충분히 청소년에 대한 필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차피 이런 제도를 시행해도 인터넷 등을 통한 접근까지 차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라도 성을 이 음침한 다락방구석에서 끄집어내자는 것이다. 정보에 바다-쓰레기정보의 바다라고도 회자되지만-에서 스스로 양질의 정보를 골라낼 수 있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자. 성도 교육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면서 어떻게 어디까지 즐겨야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청소년의 성은 빠른 속도로 열려가고 있다. 이는 여러 통계를 통해서 또 눈앞에서도 경험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성인들의 문화를 더 옥죄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성인문화로부터 청소년들을 지키고자 한다면 섹스산업을 양성화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음란물 등이 청소년에게 유통될 가능성도 대폭 줄어들 수 있다. 국가는 그들에게 세수도 거둬들일 수도 있다. 또한 섹스산업에서도 진짜 옥석을 가려 비인간적이거나 변태적인 음란물들로부터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이는 비단 청소년에 대한 예기만은 아니다.다 큰 어른들이 포르노 좀 본다고 세상이 뒤집어 지기라도 하는가? 일부에선 음란물들에 대한 규제가 없으면 온 세상이 강간 등의 성범죄로 뒤덮일 것처럼 예기하는데 하드코어포르노까지도 합법적인 일본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들의 경우를 봐도 강간 등 성범죄의 발생률은 성에대해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는 동방예의지국보다 수십배나 낮다. 과연 그런 나라들은 성인군자들만이 사는 나라라서 TV에서 포르노를 틀어놓아도 강간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들은 전부 짐승이어서 그렇게 규제를 하여도 이토록 높은 강간범죄발생률을 자랑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외교의 특징과 과제Ⅰ.서론외교정책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위하여 타국의 행위를 자국에 유리하도록 유도하여 자국의 위신과 영향력을 재고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다양한 외교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반도가 처한 분단적 상황에서 분단외교를 추진해 왔으며 한편 대외적, 대내적 환경의 변화를 맞이하여 민족의 숙원을 이룩하기 위한 통일외교를 추진하고 있다. 이념?체계적으로 경쟁?대립하는 북한의 공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적대외교를 추진하였고, 전쟁을 경험한 후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고 전쟁이 재발하더라도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하여 미국과의 동맹외교도 추진하였다. 한편 대내외적 정세가 전방위외교를 필요로 할 때 북방외교?교차승인외교?다자안보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외교도 전개하고 있다. 분단 상태에서 적대외교와 동맹외교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전향적인 외교정책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한국외교의 특징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Ⅱ.한국외교의 특징한국은 외교?안보적으로 분단, 전쟁, 적대적 대치, 의존적 동맹을 체결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다. 한국외교정책의 특수성에 대한 심대한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인들을 세 개의 큰 변수로 분류하면, 주변국들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요인, 침략과 개입으로 점철된 역사적 요인, 극한 대립의 이념적 요인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요인들을 상호 연관지어 한국외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앞의 두 요인(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은 하나의 틀을 구성하며 한국외교를 운명지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대외관계에 있어서 국가자율성이 떨어지고 외세의 영향권 내에서 의존적인 외교정책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이 두 요인은 한국외교정책에 있어서 이념적 요인이 자리 잡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분단에 의하여 적대적인 두 정부가 수립되면서 양 체제 간에 극한적인 이념적 대결이 시작됨으로써 외교이념이 한국외교정책의 수립과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남북한의 대립적 외교이념은 한반도 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측면도 있지만 분단의 주역인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결구도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한반도에 설립된 두 개의 정부의 대외관계도 같은 틀 속에서 변화되어 왔다.한반도에 설립된 두 정부의 이념적 차이는 자율성을 잃고 의존적인 외교를 추진하게 했으며, 부족한 외교역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미국이라는 후견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성 외교를 추진해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갖게 되었다.이상 말한 세 변수들, 지정학적?역사적?이념적 요인들은 한국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 요인이 되었으며 주변상황 또는 시대적 변화에 한국외교정책이 적응하여 변화해 가는데 있어서도 기본원칙으로 작용하였다. 보편적으로 일국의 외교는 외부적 환경이 변화할 때 이에 적응하기 위하여 변화를 추구하지만 한국외교는 외부적 변화가 있더라도 분단에 의한 대립이라는 기본원칙은 유지한 채 제한적인 변화만이 이루어졌을 뿐이다.1.각 정권의 외교적 특성제1공화국 - 경제적으로 최빈국의 위치에서 민족적 계급적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남한지역에서의 주권을 UN에 의해 인정받았다. 북한을 미수복지구로 정의함으로써 외교적 소모전을 시작하였다. 반공과 반일을 주창하였으며 심각한 대미의존도로 인해 정치, 경제, 안보에 걸쳐 전반적인 주권침해를 받았으며 대통령의 외교적 역량에 의존하는 개인적 외교 성향을 보였다.제2공화국 - 중립국외교, 민주외교 등 외교적 다변화를 시도 하였으나 5.18 군사 구테타로 인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하였다.제3공화국 - 반공을 국시로 하여 권위주의적, 청와대 중심주의 성향을 띄었으며 관료조직을 재조합, 제도화 하였다. 자주국방 경제자립을 강조하였으며 칼스타인원칙을 수정 비적대국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현실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군현실주의의 결과 민주적 절차, 국민적 합의는 배제되었다.제5공화국 - 평화통일방안을 공표하고 순방외교를 통해 국가이미지를 쇄신하려 하였다. 올림픽 개최 등 일정 성과는 있었으나 군사정권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였다.제6공화국 - 북방외교를 추구하였으며 사회세력의 신장으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학관계가 형성되었다.그 후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IMF로 대변되는 김영삼 정부를 지나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대북정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한완상씨가 통일원장관에 재직한 초기를 제외한다면) 한마디로 북한이 경제적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 목조르기'를 계속하고 북한을 군비경쟁으로 몰아넣어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강압주의적-현실주의적 흡수병합 정책'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김영삼 정권이 이렇게 대북 강경노선을 고수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김영삼 정권의 보수성에 기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사회주의권이 몰락한데다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이 심대한 경제위기에 내몰리게 된 것을 보면서 북한체제의 조기 붕괴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사태 전개는 북한체제의 조기붕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게다가 미국은 제네바협정을 통해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건설 지원 등을 조건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는 데에 성공한 이후부터 대체로 유화정책의 일종인 '대북 연착륙정책'을 추구해 왔다. 이로 인해 한국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김영삼 정권 때부터 이미 불가능해 졌는데, 이전부터 '햇볕정책'을 지지해 온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은 최종적으로 '대북 강경정책'으로부터 '햇볕정책'으로 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은 비록 김대중 정부가 애초 국민이 바라던 민주화에의 열망과 경제의 회생에 있어서는 다소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개국이래 경직되어 있던 북에 대한 시각을 이제야 초기화시킨 일이라 평가할 수 있다.한국외교는 전통적으로 약소국현실주의, 안전주의 외교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생존외교, 소극주의, 고립주의 외교의 대가로 한국은 심각한 대미의존 대미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곧 국가 자주성의 훼손으로 나타났다. 또한 국민적 합의 구조가 결여된 소극적 내교로 인해 정부의 외교정책과 대외 협상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불렀으며 결국 국제사회에서의 신뢰성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이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뿐만 아니라 수출80% 에너지 의존도907% 식량의존도 70% 외국인자본35~38%라는 경제적 대외의존의 결과이기도 하다.Ⅲ.한국외교의 과제한국외교가 직면한 현실은 그 수용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 최우선시 되는 기본적 외교목표가 국가와 민족의 생존에 대한 것이기에 일정수준의 대미의존과 이에 따른 자주성의 훼손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외교정책의 목표가 이론적 측면에서 기본목적, 중범위목적, 장기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때 한국의 경우 ①기본목적은 생존권, ②중범위목적은 국제평화와 경제번영, 국가적 영향력의 증대와 위신의 증대, ③장기목적은 제3모델의 개발이 필요하긴 하나 우선 통일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역사(경제,관계문화)1.지형적특색네델란드는 남한의 3분의 1에 불과한 면적과 겨우 150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년간 일인당 국민소득이 25,000불을 상회하는 작지만 당차고 알뜰한 선진복지국가의 하나이다. 해면이 육지보다 높아 수많은 인공 저수지와 각종 댐을 건설, 수백년간 '물'과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미 듣기에 진부할 정도이지만,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네델란드는 네델란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과 같이 이들이 가혹한 자연환경과 싸워온 그간의 역사적 과정은 하나의 서사시에 비유될 정도로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네델란드의 근대사 역시 강대국에 둘러쌓인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아 주변국가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해 온 점을 볼 때,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네덜란드를 네덜란드라 부르지 않고 홀란드라 부르는 경우도 자주 있는데, 엄격히 말해 이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서쪽 해안 2개 주, 즉 북 홀랜드와 남 홀랜드를 지칭하는 것이다.네덜란드란 이름에는 지대가 낮다는 네덜란드 국토의 특성이 함축되어 있다. 가장 높은 지역이 네덜란드와 독일,벨기에 국경이 접해 있는 동남부의 발스버그 산인데, 해발이 321m에 불과하다. 전국토의 25%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서북쪽 여러지역은 해면 보다 낮은 지대이다. 로텔담 부근에 있는 가장 낮은 지대는 해면 보다 6.7m낮다.네덜란드가 해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유럽 3대 강인 라인강과 마아스강, 스헬트강의 어귀에 있다는 사실이 항상 경제발전의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네덜란드 경제는 항상 대외지향적이었다. 바다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서유럽과 중유럽 뿐만 아니라 더 멀리 여러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 요충지가 되어 왔다. 그 결과, 농산물과 제조 상품의 대외교역이 활발하였다.2.역사네덜란드와 벨기에 플란더스는 언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네덜란드라스페인의 왕이기도 했던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는 1543년 네덜란드의 군주임을 선언하며 이 지역을 통일하였다. 1548년 열일곱 개 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지역을 부르군디 지역이라 하여 신성 로마 제국 안의 독립적 자치 구역으로 인정했다. 1549년 카를 5세는 국사 칙서에서 왕위 계승권자에게 이 지역을 승계할 것임을 선언하였고, 그의 아들 펠리페 2세(1527~1598)는 1555년 네덜란드를, 1556년 스페인을 통치하게 되었다.16세기 말에 가서는 네덜란드 지역이 둘로 확실히 나뉘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과 과다한 세금 징수, 종교 탄압은 북부 네덜란드로 하여금 펠리페 2세에게 반기를 들게 하는 계기가 되어 스페인에 대항한 80년 전쟁(1568~1648)을 일으켰다. 전쟁에 참여한 북부와 그렇지 않은 지역은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 국경과 흡사한 경계를 이루었다. 모든 독립 운동과 전쟁은 빌렘 반 오란여(Willem van Oranje)의 지도로 시작되었다.전쟁의 결과 북부에는 7개의 자치 주로 이루어진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Republiek der Verenigde Nederlanden)이 생겨났고, 1648년 뮌스터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도 아닌 독립국으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네덜란드의 기초가 되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무역상들이 세계를 누비며 활동했다. 연방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를 설립한 이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미대륙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여러 나라를 식민지화하기도 하였다. 부의 축적은 과학과 문화를 꽃피우기도 하여 렘브란트(Rembrandt), 베르메르(Vermeer), 프란스 할스(Frans Hals)와 같은 거장을 배출한 네덜란드는 이른바 `황금의 세기'를 이루게 된다.해상권을 놓고 영국과 우위를 다투기도 하였지만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네덜란드 상인을 능가하는 이들은 없었다. 동양의 후추, 설탕 등을 독점하던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국은 자국으로1세로 헌법에 기초하여 군주로서 통치하게 되나 1831년 남부 네덜란드가 벨기에로 완전히 분리됨에 따라 1839년에는 헌법의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848년 신헌법에서는 왕의 권리를 축소하고 입헌 군주제를 확립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각 장관은 국민의 대표자로 구성된 회의에서 선출되었다.1차 세계 대전 당시 빌헬미나 여왕(Koningin Wilhelmina:1890~1948)의 영도 아래 네덜란드는 중립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2차 세계 대전은 피해갈 수 없었다. 여왕은 영국으로 피신해 임시 정부를 이끌었고 국토는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2차 세계 대전을 고비로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시작하였다. 1954년까지 인도네시아(옛 동인도 제국)는 연방 형식으로 네덜란드의 속국이었고, 1975년 남아메리카 대륙의 수리남이 독립하였다.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군도는 1954년 이후 같은 여왕을 모시는 연방 국가로 인정되고 있다. 수리남과 안틸레스 군도는 옛 서인도 제국을 형성했던 나라들이다3.한국과의관계네델란드와 한국과의 관계는 1653년 선원 핸드릭 하멜이 당시 조선에 표류한 후, 1666년 하멜표류기를 발표하여 우리나라의 존재를 서양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실에까지 소급된다. 이후 네델란드와는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아무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참전한 것을 계기로 오랜 우방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 61년 양국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네델란드는 해외투자부문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라이며, 특히 지난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에 막대한 금액의 투자를 실현, 현재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국 제 3위에 랭크되어 있기도 하다.또한 우리나라와 네델란드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얼마전부터 다양한 쟝르의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특히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해외여행을 즐기는 네델란드인들의 관광수요의 증가에 부응한 관광홍보업무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소비자의 기호와 세계 시장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네덜란드의 유리 온실은 전 세계의 표본이며 국제 화훼 거래의 80% 이상이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경매를 위해 미국에서 재배된 꽃이 암스테르담으로 공수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팔려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네덜란드 화훼 협력 기구가 생기고, 해마다 많은 농가에서 견학단을 파견하는 등 영향을 주고 있다.전통적으로 북해를 끼고 발달해 온 수산업은 청어가 그 주종을 이룬다. 네덜란드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바로 절인 청어인데, 손으로 집어 통째로 먹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굴, 홍합 등의 양식업이 유명하다.운하가 발달하여 지형적으로 유리한 조건과, 인구 밀집에 의한 필요성으로 발달한 것이 바로 운송업이다. 유럽의 중심 물류 센터를 자처하며 현재 7400개의 운송 회사와 2만 8500대의 운송 차량이 EU(유럽 연합) 국가의 27%, 유럽 전 지역의 30%를 담당하고 있다. 엔지니어링 사업은 화학 산업에 필수적인 기계 및 장비의 주요 공급원이 되며 해외 화학품 정제 산업 역시 크게 발달되어 있다.항공사 KLM(Koninklijke Luchtvaart-Maatschappij)을 비롯 필립스, 다국적 식품 회사 유니레버(Univeler), 돌(Dole), GB, 유통 업체 V&D, 에소(Esso), 에이홀드(Ahold), 다프 트럭(Daf Truck) 등이 수위의 기업들이며 세계 13대 화학 업체 안에 드는 쉘(Shell), DSM, 악조(AKZO) 등의 본사가 네덜란드에 위치해 있다.5.문화와생활상1)국민성·의식 구조네덜란드인은 진지하고 내향적이며 관념주의가 강한 게르만족과 낭만적, 외향적이며 종합적 조화를 중요시하는 알핀족 사이에 속해 있고, 남부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 플란더스 지방)에는 게르만족, 라틴족을 위주로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네덜란드벨기에 간의 유형 차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옛날부터 주 개념(Het Arbeidsethos)이 대두하여 노동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다.전형적인 홀란드인은 절제를 잘 하며, 침착, 검소, 강직하다고 알려져 있다. 습관이나 경제 생활에서 예를 들자면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성취를 우선시한다. 환상이나 감상은 지성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이윤 추구에 적극적이며 규칙과 신용, 의무를 중시한다. 영웅주의를 기피하고 개인주의가 강하여 내 것, 네 것이 명확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칼뱅주의 발전과 상인 전통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칼뱅주의는 바른 정신, 절약, 겸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노동을 인간의 신성한 의무로 간주했다.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인의 가장 큰 장점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권위에 대한 기독교적인 추종은 그들의 특징이다. 1966년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성에 대한 구속과 권력, 권위의 타파를 주장하고, 칼뱅주의적 생활 방식에 강한 반대를 내세우며 수년 동안 대규모 시위와 집회를 벌였다. 암스테르담은 1960년대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진부함에 대해서 매우 비평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의 자유를 추구한다. 일부는 낙태, 피임, 동성 연애 등에 대해서 아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 전반적 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가정 생활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이어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이들이 가정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 문제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의 하나가 바로 기둥화 현상(Verzuiling)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 분화 현상을 일컫는 말로서 같은 종교적·이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블록을 만든 것으로 옛 신전의 기둥처럼 수직으로만 뻗어 있는 형태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상호 독립적, 조직적이고 다른 쪽의 사람과는 접촉조차 기피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정당, 교회, 협회, 학교, 언론 기관 등을 포함하여 동네 축구 클럽에까지 번져서 생활 한가운데 `클럽'생겨났다
위치 : 유럽남동부, 지중해 연안면적 : 131,940평방 Km국경 : 1,210 Km해안선 : 13,676 Km영해 : 6해리인구 : 10,623,835명 (2001년)수도 : 아테네공용어 : 그리스어문맹률 : 5%종족구성 : 그리스인 98.5% , 터키인 0.9%종교 : 그리스정교(국교)97% , 회교 1.2%독립 : 1829.3.25헌법 : 75.6 제정 , 86.3 개정정체 : 공화제정부형태 : 대통령 중심제를 가미한 내각 책임제국가원수 : 스테파노플로스(Kostis Stepanopoulos)대통령 (2000.3 취임 , 임기 5년)수상 : 시미티스(Costas Simitis) (2000.4 재취임)실권자 : 시미티스 수상대의기구 : 단원제(정원:300명 , 임기 4년)정당 : 사회당(PASOK) , 신민주당 , 정치의 봄 , 공산당(KKE)정부성향 : 중도좌파UN가입 : 1945.10.25GDP : 1,819억불(2000년) , 1인당 GDP : 17,200불화폐단위 : Euro무역 : 1999년도 기준-수출 : 981,500만불 (농산물 , 담배 , 섬유류)-수입 : 2,543,300만불 (원유 , 기계류 , 화학제품)국방비 : 330,000만불 (2001년)군사력 : 육군 110,000명 , 해군 19,000명 , 공군 30,170명 (2001년)군사동맹관계 : NATO(52.2) , 미 그리스 군사기지협정(83.7)I. 자연 환경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는 본토와 전체 영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2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토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중부 그리스, 에피루스(Epirus), 테살리아(Thessaly), 마케도니아(Macedonia), 트라키아(Thrace)로 구분되며, 섬 그룹은 스포라데스(Sporades), 북동부 에게 해, 사론(Saronic) 만(灣), 키클라데스(Cyclades), 도데카네소스(Dodecanese) 그리고 에게 해에는 없지만 이오니안(Ionian)으로 구분된다. 한편 에비아(Ev. 또한 산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북부 지방은 검은 소나무 삼림이 대부분이고 중부와 남부 지방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삼림인 관목 밀생 지대이다. 북쪽 지역에서 갈색곰과 노루를 볼 수 있고, 남쪽 지역에서는 재규어, 야생 염소, 호저 등이 발견된다. 저지는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못 미치며 그 대부분이 에게 해에 면해 있는 해안 평야이다.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대개 6월의 연평균 기온은 23~33 이며 1월에는 6~13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남부 그리스는 북쪽보다 4 정도 더 따뜻하다.Ⅱ.정치사4세기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독립전쟁으로부터 그리스근대사는 출발한다.열강의 이해가 얽힌 가운데 그리스왕국은 중,남부와 인근도서를 포함한 영토를 기반으로 바바리안 황태자인 오토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862년 폐위됨으로써 덴마크왕의 아들 조지가 왕위를 이어 50년간 통치하는 불운도 겪었다.그리스는 사실 1864년의 헌법이 의회주의정부의 시작이다. 그러나 초기 정당들은 몇 사람의 권력자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주당적인 성격에 불과했다. 그 후 몇몇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각 정당이 이익집단화 되어갔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러한 정당이 보수파와 자유파로 나뉘엥지만 이념면에서나 계층 조직면에서 구분하기는 어렵다.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는 국경선을 확장하는데 주력한 나머지, 1864년에 이오니안 군도를, 1881년에는 데살리 지역을, 1913년 발칸전쟁으로 크레타, 이푸루스, 마케도니아 등을 장악해갔다. 1차대전당시 국왕은 친독노선을 취하였으니 영국 또는 프랑스의 지지와 승인을 받고 있는 자유파는 데살로니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국왕은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리스는 1918년 전쟁에서 승전국의 입장이 되어 영토를 두 배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소아시아의 여러지역을 장악하는데는 실패하고, 1992년 스미나에서 처참한패배로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1923년 로산느평화조약에 의해리스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1924년 선포된 공화정은 1차대전 이후 자유주의자 들에 의해 정부가 구성되었지만, 그 후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에 복귀하고부터 그들에 의해 1935년에는 군주제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1936년에 이오니온 메타삭스장군 휘하의 독제정권에 의한 왕위회복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원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고, 공화파역시 공적생활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제2차 세계대전 후, 왕제가 부활한 이래 입헌세습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발족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가 정권탈환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1973년 6월 군사정권은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할 것을 발표하여 공화제 이행의 헌법 개정안이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대통령 중심 의원내각제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대통령은 의원 2/3의 신임으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1974년 7월 전 총리 K.카라만리스가 귀국해 총리에 취임하여 민정으로 되돌아갔다. K.카라만리스는 ND(신민주당)를 결성하여 11월의 총선거에서 300의석 중 220의석을 획득했다. 또한 12월의 국민투표 결과, 공화제를 채택할 것이 확인되었다. 그 후 K.카라만리스는 민주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1977년 11월 20일 조기총선을 실시하고 승리를 거두어 재집권했다. K.카라마리스는 1980년 5월 15일 대통령으로 승격, 라리스를 총리로 하는 신내각을 조직하여 출범시켰다. K.카라마리스의 자제와 결단, 연속성과 변화를 조심스럽게 조화시킨 과도기 관리능력은 비록 경제적인 면에서는 실패했다 할수 있으니 정치적인 부분에서나마 그리스에 민주화를 정착시키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그러나 계속되는 경제정책의 실정으로 1981년 10월 G.파판드레우가 이끄는 PASOK(범그리스사회당)가 득표율 48%, 174의석을 획득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다. 의회는 단원제로 정원 300명, 임기 4년이며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19초타키스가 집권했다. 1993년 10월 총선에서 PASOK이 승리하고 G.파판드레우가 재집권했다. 1995년 3월 콘스탄티노스 스테파노푸로스(Constantinos Stephanopoulos)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 2월 재선되었다.북부 농촌에는 투르크 지배시대에 기원하는 대토지 소유제가 남아 있으며, 외국자본과 결합한 산업자본가와 선주(船主) 등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어 반실업 또는 잠재실업자의 수가 많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여 정국도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6년 1월 G.파판드레우가 건강으로 인하여 총리직을 사임하고 전 공업장관 콘스탄틴 시미티스(Konstantin Simitis)가 사회당 국회의원들의 비밀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콘스탄틴 시미티스는 그리스의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와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위한 과감한 정책과 조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96년 9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PASOK가 41.6%의 지지율을 얻어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콘스탄틴 시미티스는 1997년 9월 신내각을 구성하였다. 2000년 4월 조기총선에서 집권 PASOK가 43.8%의 지지율로 3회 연속 재집권에 성공하였다.군사정권의 초기에는 서유럽 제국이 그리스를 비난하여 경제원조도 중지하였으나, 국내의 안정과 함께 각국의 태도는 완화되었으며, 특히 소련과의 친근관계를 고려해서 서방 각국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를 원조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1978년 3월 10일 그리스-터키 정상회담에서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로 합의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복귀했다. 또한 기지협정에 의하여 미국의 통신기지도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가입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81년 1월부터 EC 정회원국이 되었다. 2001년 1월 EMU(유럽단일통화)에 가입하였다.Ⅲ.정치제도헌법과 정데 임기5년이며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대통령은 수상임명권, 군 총사령관으로서 군 통수권, 전쟁 선포권, 수상의 요청시 의회 해산권, 대법원판사 임명권 등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입법권은 의회의 전속사항이며, 행정권은 대통령과 의회 과반수 의석을 가지고 있는 다수당에 의해 선출되는 수상에게 있다.개정헌법1986년 3월 6일 헌법개정은 사실상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으로, 종전보다 정부형태에 의원내각제 요소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종전에는 대통령이 의회가 공공의 의견과 명백히 상반된 행동을 한다고 판단하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수 있었으니, 85년 이 조항을 삭제하여 사실상 대통령보다 수상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시켰다.주요 개정 내용은 대통령 선출방식이 의회에서의 비밀투표에서 공개투표방식으로 바뀐것,대통령의 수상지명권에 의회의 추천 요건을 명기,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 발동시 어떤경우에도 수상의 건의 및 부서가 필요하게 된 점, 대통령이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려면 반드시 수상의 동의를 거쳐야 할 것을 필수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행정행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일반정책의 수립 및 집행을 담당한다.수상은 다수당의 당수로서 대통령이 의회의 추천에 따라 지명하고 각료는 수상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내각은 의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신임이 있을 때만 존립이 가능하다의회 및 선거제도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30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하겐바우비숍방식)이다. 주요 권한은 입법권, 대통령 선출권, 수상후보자 추천권, 대통령 및 각료 탄핵권, 내각불신임권, 국민투표실시 요청권 등이다. 선거연령은 18세이고, 선거구는 56개에서 288명을 선출한다. 그 중 51개 선거구는 중선거구 이고 나머지 11개 선거구는 주 대표로서 각 정당의 전국적인 득표비율에 따라 배분된다.사법사법부는 3심제도로서 대법원, 고등법원, 하급법원(민사, 형사 및 행정법원으로 구분)으로 구성되며, 위헌심판을 위한 최고특별법원 및 행정기관 령에 대한 위법심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