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교황권의 위축과 함께 면죄부 발행으로 카톨릭의 권위가 떨어지자 독일에서 개신교가 등장하고 각 지역의 종교는 통치자의 종교를 따른다는 칙령이 발해졌다. 이에 따라 교황은 교황권의 약화를 막고 도덕적 생활의 중요성을 만민에게 알리기 위해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종교화를 그려 성경의 중요성과 믿음과 선행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시각예술의 원리를 정하였는데 첫째 도덕적 주제를 다루어여 하며 둘째 원리와 규범을 다라야 하고 셋째 구성이 명확해야 되었다. 이를 위해 질서/ 통일성/ 조화/ 균형/ 대칭/ 명료성 등의 원리를 중시하는 종교화가 널리 보급되고 종교 심판이 부활했으며 예수회의 전도 활동도 두드러진 시대였다.레오나르도 ‘최후의 만찬’전성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만능인으로 조각가이자 화가이자 과학자로 폭넓은 관심으로 인해 해부에까지 손을 미쳤다. 그의 그림에는 원근법의 수학적 흔적이 사라지고 완전하며 자연스러운 원근법을 보여준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다빈치에 의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는 고전고대, 기독교 가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자연 현상에 대해 주로 고심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에서는 오일재료의 도입과 입체감 있는 피라미드 구조로 자연스러운 표현과 세밀한 묘사를 가능케 하였으며 최후의 만찬은 15세기에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기 위한 벽화로서 유성 템페라화로 접착력이 떨어져 지금은 형상을 알아보기 쉽지 않지만, 그 독특한 양식으로 인해 여전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선원근법으로 식탁의 공간을 뒤의 벽면보다 큰 공간으로 그리고 이곳이 현세가 아니라 보다 초월적인 공간임을 상징하고자 했다. 그리고 원근법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그 소실점은 그리스도의 머리위에 존재하고 있다. 성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인물배치가 3명씩 묶여 있으며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세 개 그려져 있다. 15세기부터 후광이 사라지고 대신 주변의 다른 장식을 통해 성인을 표현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당시 병의 치료과정이다. 16세기 초 북유럽 전성기 르네상스 작품으로 고통을 강조하고 있는 당시의 유행과 환자에게 호소력과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렸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는 심리적 효과를 준다. 얼굴 표정과 탈골된 어깨와 반점이 난 피부의 상흔과 가시관으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병원과의 관련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는 허리에 병원에서 이용하는 듯한 타월을 두르고 있다.각각의 기념일에 펼 수 있게 제작된 제단화에는 아기예수의 탄생과 수태고지와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운데 위치한 그림의 아기예수를 감싼 천은 붕대처럼 보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부활의 장면을 그린 것은 승리의 자세로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데 은유적으로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환자들이 완치할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제단화는 화려한 색체의 유화로 이탈리아전통의 수용으로 인체비례도 이전의 북유럽 양식보다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그 특징이다.브뤼겔 농부의 결혼네덜란드 작가인 브뤼겔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상당히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교회와 귀족과 일반재력가의 주문으로 작품제작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억압적 지배로 네덜란드 북부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자 일반인에게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해 고유전통문화를 강조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이 때 브뤼겔은 이전까지는 누구에 의해 제작됐는지도 모르고, 주제화되지 않았던 평민의 생활을 그렸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농부의 결혼이며 소작농의 결혼피로연을 그린 것이다. 음식과 옷차림도 서민적이며 그림 전체에 흐르는 갈색의 바탕은 농촌의 소박함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16세기 후반 이탈리아 미술틴토레토 최후의 만찬전성기 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심판은 평행의 탁자를 통해 안정과 조화를 나타내고 유다의 위치를 이야하였다. 프랑스는 바로크 문화의 중심지로 변화하고 스페인의 세력은 약화되고 30년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도 몰락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상인계층의 활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이전의 종교적 주제의 그림은 쇠락하고 부르주아 취향의 작품 주문이 많아져 가정실내에 맞는 크기가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 초상화가 주로 제작되고 화가가 제작하고 시장에 파는 자유경쟁체제가 미술계에도 도입되어 특정분야 전문화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와 사실주의 양식이 공존하고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강렬한 색채와 풍부한 붓터치가 유행을 했다. 스페인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특징인 루벤스의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반 다익은 영국 황실의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졌고 네덜란드에서는 초상화 풍속화 정물화 풍경화가 크게 유행했다. 프랑스에서는 왕실이 고전적 바로크 양식을 후원하여 신화나 역사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 주로 제작되었다.카라바지오- 성 마테의 소명기존의 권위에 저항적인 인물로 그의 작품이 판화로 제작되어 전 유럽에 영향을 줬다. 17세기 로마에서 활동했으며 기존의 전통 권위를 싫어해 괴팍하고 폭력적 인물이었다. 더욱이 살인을 저질러 해외로 피신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이 그림은 세리였던 마태를 그린 작품으로 그는 동전을 세고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탁자 위에는 동전 세는 세리들이 앉아있고 우측에는 노인이 마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마테는 그 손끝을 따라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또한 빛으로 대변되고 있는 그리스도는 노인의 몸에 가리어진 체 서있다. 후광을 가진 그리스도 역시도 성마테를 가리키고 있다. 이 자세는 카라바지오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모방한 것으로서 유사하게 손가락으로 영혼을 불어넣는 장면을 그려 그리스도가 마테에게 기독교의 교리에 의해 새로운 사람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그림 전체에 바로크적인 특성이 나타나는데 강한 빛이 공간을 비추어 강렬한 명암의 대조를 보여주고게 드러나는데 이는 카라바지오의 영향이며 공주보다는 그림 한쪽에 캠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묘사함으로서 벨라스케스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이후에 기사작위를 받고 가슴의 훈장을 덧붙여 그리며, 당시의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왕실의 일원이자 만능인으로서의 자신의 자부심을 나타내고자 했다.로코코18세기 미술은 크게는 이탈리아의 역할이 줄어들고 건축에 비대칭적이고 곡선적인 양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대칭적이고 곡선적인 양식은 조개껍질의 불규칙한 줄무늬를 뜻하는 로코코라고 칭해졌다. 이전 바로크와는 다른 보다 가볍고 경쾌한 양식을 선보이게 되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회화는 공적인 주제와 왕실 및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대각선의 구도로 명암을 극렬하게 대비시키던 바로크적 양식이 사양길에 들어가고 사적이며 인간의 사랑과 환상 및 꿈의 세계를 다루는 현실도피적 작품들이 주를 이뤄 이전까지 무시되어온 인간의 감정이 미술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다. 미술가는 길드보다는 엄격한 학제를 가진 근대적 교육의 아카데이아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fetes galantes가 바토에 의해 대중화되고, 샤르댕은 실내 장면과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와토 시테라 섬에로의 순례아카데미아에서 교육을 받은 루벤스 파의 대표작가로 fetes galantes양식의 창시자이다. 당시의 아카데미아는 푸생파와 루벤스파로 양분되어있었는데 선 형태위주의 드로잉을 강조하고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상류계층을 겨냥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는 푸생파와 달리, 루벤스파는 붓터치를 섬세하고 작게하면서, 색채를 강조하고,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대중적 화풍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와토도 색채를 강조한 그림을 그렸다.이 작품은 시테라 섬 앞바다에서 탄생한 비너스를 기리기 위한 비너스 상을 경배하러 프랑스 남녀 귀족들이 시테라 섬을 방문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랑과 관능이라는 로코코적 주제를 그렸다. 우측에는 비너스 동상이 있고 남녀들용 및 붓터치의 흔적이 드러나고 자유롭고 빠른 붓터치로 시각적 흥분을 자아낸다는 특징정도만 드러난다.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당대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제작한 저널리즘적 회화로 프랑스의 식민지인 세네갈에 도착하기 전에 침몰한 메두사호의 사건을 그리고 있다. 메두사호에는 군인과 정착민이 타고 있었는데 배가 침몰하자 구명정에는 상류층 인사와 장교들만이 타고 하층민은 뗏목을 구명정에 연결해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구명정이 위태롭자 뗏목을 연결한 밧줄을 잘라버리고 더위 탈수에 이기지 못하자 인육을 먹는 등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제리코는 생존자의 증언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였다.구성적 특징으로는 두 개의 삼각형에 의해 형성되는 대각선 구도이다. 또한 색채보다는 선과 윤곽을 강조하고 있으며 매끄러운 표면이 눈에 띤다. 작업실에서 모델을 두고 그린듯 인물들의 자세와 모양새가 깔끔하고 조각같다.이는 신고전주의 적인 작품양식이지만, 그림이 풍랑이라는 극적인 주제와 이국적 인종에 대한 관심으로 화면의 중심에 흑인이 위치하고 있으며, 구조가 될지 안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그리고 있으므로 낭만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들라클루와 키오스섬의 학살당대의 정치적 사건을 다룬 저널리즘적 작품으로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는 그리스가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리스 원주민들의 독립운동이 잔인하게 탄압당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 서구 지식인 문인은 실제 사건을 듣고 서구 문명의 뿌리가 폐허가 됨과 동시에 동양의 야만인에 의해 탄압된다는 것에 분개해했다. 들라크루와 역시도 서구의 시선으로 작품을 그렸다.전경은 창과 칼을 든 터키인과 진압된 그리스인을 그리고 화려한 보석장식과 포로로 잡힌 인물의 관능성을 강조하여 이국적 장식물로 낭만주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중경에는 여전히 진압되고 있는 그리스인을 그렸지만 그 크기가 너무 작아져 비례가 어색하다. 또한 보색인 빨강과 녹색을 사용하여 시각을 자극하고 부각시키고 있지만 ‘건초마차’를 보고 영향을있다.
2000012057 철학전공 권수경칸트의 세계와 나의 세계 그리고 현실서론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인간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보편타당하게 결론지어진 것이 없다. 지식의 상대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각자는 개인의 우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 인식의 틀에 의해서 각자가 파악한 세계에 의해서 보이는 대로 아는 정도만큼만 세계를 파악하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보편타당한 지식의 존재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천편일률적인 답을 줄 수 있는 정답이라는 것은 찾지 못했다. 몇몇은 순수한 세계인 이데아 세계를 찾는 것이 이성으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목적이라고 여겼으며 또한 몇몇은 절대의지인 세계의지에 따라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고 생각했다.인간이 안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위와 같이 창조와 피조의 관계로서 절대적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기에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분명 멋지고 아름답다. 인간에게는 저기 초원을 달리는 동물과는 달리 이성을 창조한 존재가 있고 실현할 이상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있고 무엇의 존재를 바라기에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의 본질을 찾게 됨으로서 인간의 마음에는 고민의 씨앗이 자라게 된 것 같다.칸트는 같은 고민에서 시작하여 그의 저작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제공하고, 인간의 철학적 의문점들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을 제시하려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천박한 사고방식에 대한 탄식과 함께 형이상학적 논조에 지친 철학을 재정비하고 인간의 커다란 근본적 질문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답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위해 막연한 질문에 대한 답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인식 방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모든 경험의 한계를 초월한 이성을 분석한 후 칸트가 임의식의 전환은 인간을 특별한 주체로 간주하고 오로지 인식하고 행위 하는 자아를 가리키게 되었다.위의 맥락에서 철학을 시작한 칸트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이성을 통해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칸트가 말했듯이 형이상학은 ‘이성이 자기 스스로 산출한 것은 그 공통의 원리를 다만 우리가 발견하기만 하면 감추어질 수가 없으며 저절로 이성에 의하여 밝혀지는 것’으로 여겼다. 칸트는 칸트의 이성으로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나누었고 인간도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이원론으로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런 후, 육체로서의 인간의 이성은 오성과의 합동 작업으로 인식을 만들어내며, 인간은 이러한 이끌림에 의해서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파악하는 그 어떤 대상도 ‘신, 자유의지와 영혼불멸(Gott, Freiheit 와 Unsterhlichkeit der seele)’와 ‘물자체’의 시공을 초월한 본질의 통찰을 할 수는 없다고 한계 짓고 있다. 그는 인간은 오로지 물자체에 대한 가정인 ‘대상’을 ‘감성’으로서 대상이 제공하는 ‘표상’만을 ‘직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비판철학은 교조적 신적 형이상학에 회의를 품고 그것을 인간적 형이상학에 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춰, 손에 닿을 수 없는 하늘의 철학에서 지상의 철학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에 대해 논의한 순수이성비판과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인간의 도덕의 실천의 이유로서 신을 가정하여 전통적 형이상학에 불가결한 요청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판단력비판에서는 구상력으로서 인간이 미에 대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말하고 구상력으로서 신에 의해 부여된 인식의 합목적성에 대한 증명으로서 칸트의 글을 마치고 있다.다음에 전개될 글에서는 칸트의 세 가지 질문으로 만들어진 책에 필자의 생활을 접하여 그동안 느꼈던 것들과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1) 순수이성비판의 질문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칸트의 첫 비판에서는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인식론의 정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간의 오성역시도 정확한 측정치가 아니기에 절대적 인식방법을 결정할 수 없으며 문화적 배경과 그가 자란 사회의 가치 및 가정환경에 의해 각자의 가치 및 세계의 인식의 방법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있듯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이 그런 마음을 이해할 이유도 이해할 감수성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뿐이다. 타인을 위한 여유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내게는 동성애자 친구가 하나있다. 그는 그가 성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인류의 종족 번식에 맞지 않는 성적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직장과 친구와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고 양지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서 취급받으며 집단에게 멸시 당해왔다. 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거부할 수 없는 수레바퀴에 깔리고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 갈등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도 인간인지라 타인에게 우정으로서 사귐을 받고자 하는 욕구, 타인에게 떳떳하게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별 것 아닌 것을 그는 모두 거세당하고 단지 껍데기로서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누가 이런 것을 정한 것일까. 왜 한 인간이 집단의 잣대에 의해 차별당하고 타고난 행복할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 걸까. 이런 구분이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여긴다면, 상당히 원시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그를 둘러 싼 환경에 의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평등하게 자신의 욕구를 밝히며 살기는 힘들다.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의 개별적인 인성을 파악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귀어보지 않은 체,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하지만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진 이 이상하고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스스로 답하기를 정언명령을 나의 마음의 준칙으로 삼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불가결한 요청을 하고 있고 신과 영계를 가정하고 있다.칸트가 말하고자 한 도덕법으로서 행한 선행은 분명히 아름답고 고결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내적 충동에 의해서 선행을 한다고 했을 때, 도덕법은 분명 아름답다. 그리고 이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원할 만한 행위의 준칙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은 타인에게도 권하지 않는 행동의 원칙이 구현된 사회라면 분명히 이 사회는 이해심 많은 사회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의 보편적 기준과 나의 기준이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회를 택하면 나의 마음이 울고 나의 준칙을 택하면 사회가 운다. 더 나아가 나의 준칙을 택하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도 갈려버릴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정적인 길로서 사회의 준칙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내 마음의 심지를 위해 더 짙은 방황을 위해서 살 것이냐 라는 질문에 부딪히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올 것이다.이럴 때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인 안티고네를 생각하곤 한다. 안티고네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난 행위의 준칙을 지켜 폴리클레이스를 매장한다면 왕인 크레온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녀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체로 움직이는 인형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결국 목을 매버리는 안티고네를 마지막으로 극은 끝나버린다. 이렇게 마른 장작이 자신을 불태움으로서 타인에게 온기를 주듯이 비극적으로 살아갈 계기는 아직까지는 없고, 자신도 없을뿐더러 마음도 흔들리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칙으로서는 항상 그녀를 생각한다.고등학교 시절, 나는 1회당 4만원 하는 논술 첨삭 지도를 받지 않으면 학생부 평가를 나쁘게 하겠다는 담임선생님의 ‘은근한’ 권고를 받았다. 그 당시 아름다움’과 ‘숭고’를 제시하고, 그것을 느끼지만 왜 느끼는 가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감수성의 원인으로서 목적론적 인식구조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수를 보편에 포섭시키는 능력으로서 판단력을 제시하고, 숭고와 아름다움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서(특수한 개별자) 신의 섭리에 의한 design theory에서 발현된 인간의 목적론적 인식 구조의(보편자) 증명을 마친다. 이로서 칸트가 던진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신의 보상에 의해 살아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내세 혹은 피안에 맡긴다는 생각이 든다.내게 있어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에서 시작된 sublime의 개념은 신기하기만하다. 인간은 왜 사물에 대해 숭고함을 느끼고 breathtaking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게 되는 것일까. 동양적인 시각으로서는 이를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되는 순간에 느끼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서구의 ‘숭고’는 신에게 버려졌다는 서양 근대의 절망적인 생각(decay theory)에서부터 탈피시켜준 neo-platonian의 design theory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인간과 자연 등 지구의 모든 존재는 목적론적인 design theory에서 발생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로써 이전에는 공포의 대상으로만 있던 태풍이나, 거대하고 기괴하게 생겨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어 필요이상으로는 접근하지 않고 외면했던 알프스의 산도 두려움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오묘한 감정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칸트도 같은 맥락에서 신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로서 숭고함을 이용했다.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정말 내가 대상과 호연지기 하고 있기에 나오는 것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누구에게나 나오는 것이지만, '자연은 인간의 감각가운데 절대로 주어질 수 없는 정신의 이념이다.' 라는 헤겔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인식하도록 길들여있기 때문에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자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오로지 감각만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가.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I, CYBORG)와 공각기동대의 비교.2000012057 철학과 권수경‘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에서 케빈 워릭은 신체기능과 지적 능력에서 완벽한 로봇에 대한 위협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보통 인간들이 사이보그화 되는 것이 로봇의 지구정복이나 절대권력을 갖는 것을 막는 수단이 될 수도 있으며 인간의 새로운 진화의 장을 여는 것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지적으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미흡한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며 미래의 로봇과의 적대적인 관계에서의 겨룸에 있어서 절대적인 승리나 아니면 동등한 관계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줄까. 그리고 사이보그화 한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나 사이보그 형 인간의 수단화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그 때가 되어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갖고 주제를 I, Cyborg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에 맞춰보려 했다. 첫 장은 사이보그의 정의를 통한 사회가 사이보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생각해 보았으며 둘 째 장에서는 사이보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사이보그가 과연 로봇의 대안물인지 아니면 케빈 워릭의 의도처럼 진화된 인간으로서 인간과 인간과의 보다 나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서론 . 사이보그의 정의와 사회가 사이보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사이보그1>란, 사이버네틱스2> 기술로서 사이버공간3>에서 활동한다.1> 사이보그(cyborg) ; 종종 인조인간으로 번역되는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스와 오거니즘(organism)의 합성어로서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따라 제작된 기계-유기체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인조인간은 가장 발달된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겠다.2>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 사이버네틱스라는 낯선 단어는 배의 키를 잡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뜻에서 조종한다는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더 뒤에는 통치하다라는 의미로 까지 확장되었다. 원래 그리스어인 소통을 통한 조종과 통제의 학문, 이것이 사이버네틱스의 현대적 의미이다. 정보의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과 동물과 기계가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즉 정보를 받고 그에 대해 반응하며 정보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기계가 유기체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즉 기계도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사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정보의 소통에 관한 포괄적인 메시지이론이라는 원래의 정의를 넘어서 인공두뇌학이라는 영역의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다.3> 사이버공간 ; 물리적으로 보자면 최첨단 컴퓨터기술인 가상현실기술과 통신망의 결합을 뜻하며, 인간의 외계에 존재하는 실체적 공간이 아니라 두뇌작용으로 감지되는 인지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사이버공간이란 특별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작동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인지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공간이란 컴퓨터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공간감을 공간으로 은유한 것일 뿐이다.사이보그는 사이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간접체험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무한대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이 경험은 정보로서 개방된 사이버공간에 또다시 축적되고 사이버네틱스 기술인 인공두뇌와 네트워크화 된 정보공유를 통해 사이보그는 질과 양에서 엄청난 정보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터넷은 점점 ‘정보의 바다’임과 동시에 ‘유료화’ 라는 양면을 갖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넓어지는 데 반해 지적재산권의 주장으로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도입되어가고 있으므로 사이보그가 상용화된다면, 사이버공간의 넓이가 넓은, 즉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집단이나 국가는 황금알을 낳는 정보산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인간의 신경계와 눈, 귀, 근육, 손, 두뇌를 대체할 기술이 개발된다면 장애인은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며 인간으로서 빼앗긴 천부적인 감각을 되찾아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체의 인공물로의 끊임없는 대체는 재료가 떨어지지 않는 한 가능하게 될 것이므로 인간은 시유한한 존재의 영원성의 부여는 신만이 가능했던 지적직관을 가능케 할 것이다. 경험론은 이로써 빛을 얻게 될 것이며, 인간은 자유의지, 신의존재, 물자체에 대한 완전지를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본론. 사이보그의 정체성1>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부품이 결코 적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이 필요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한 얼굴과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렸을 때의 기억, 미래의 예감, 그것만이 아니야. 내 전뇌가 액세스 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란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 내. 나 같이 완전히 사이버보디화 한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전자두뇌와 사이버보디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닐까. 아니 무릇 처음부터 나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만약 전자두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한다면 그 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2>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 나 자신의 자유의사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도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체라는 것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태어난 결집점과 같은 것이다. 종 의로서의 생명체는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을 개개인으로 구분 짓는 것은 단지 실체 없는 기억일 뿐이다. 기억이란 환상과도 같은 것이지만, 인간은 기억에 의해 정의된다. 컴퓨터의 보급과 그에 따른 정보의 축적은 새로운 형태의 기억과 사고를 탄생시켰다. 당신들은 그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내가 생명체가 아니라면, 당신이 생명체라는 증거는 뭔가? 현재의 과학은 아직 생명체를 정의할 수 없다. 나는 AI가 아니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다.”1>은 인간에서 정부기관에 의해 몸의 일부가 기계로 대체되고 뇌의 일부 또한 특수임무를 하기 위해 전뇌화 한 사이보그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여준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과 경험을 통해 수많은 기억과 정보를 조직화하여 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세계와 역동적인 관계에서 나에 대한 상(像)을 만드는 것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될 수 없는 연속적인 인간은 이렇게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전뇌와 사이보그바디 때문에 그녀는 인간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기계도 될 수 없다. 그녀는 인간과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의 중간 단계로서 등장한다. 즉, 보통 인간보다 신체 기능의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지적 능력으로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보다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지만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 공간에서 실존하는 존재로 지각될 수 있다.2>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이다. 그는 신체가 없는 에테르적 존재로서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보’일 뿐이다. 그는 신체가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만 그 반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없기에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해 침투 당하면 단 한번에 그 개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는 사이버공간에서는 지적으로 실존하는 완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터넷이나 네트워크되지 않은 곳에서는 갓난아기와 같은 무력한 존재이며 동시에 무(無)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육체를 갖기 전에는 자신의 종족을 보존 할 수 없으며 사이버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시험관 속의 뇌’에 지나지 않는 경험과는 분리된 존재이다. 그의 정보는 물질을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인지는 체험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역시도 불완전한 존재이다.사이보그는 지적 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감각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되어 그 동안 인지 할 수 없었던 곳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경계와 눈, 귀, 근육, 손 등의 신체 기능의 증가는 인공두뇌를 통해 저장기관의 확대와 결합됨으로써 사이보그바디 안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다. 사이보그의 정체성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이버공간에만 치중된 경험과 사이버공간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통한 경험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결론. 사이보그는 진화된 인간으로서 인간과 인간과의 보다 나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현실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가.In the near future – corporate networks reach out to the stars, electrons andlight flow throughout the universe. The advance of computerization, however, has not yet wiped out nations and ethnic groups.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이와 같은 일이 실현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이보그화 된 인간이 인간과 인간과의 보다 나은 의사소통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도구를 주던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정보의 개방과 인간에게 향상된 신체능력과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해도 그 정보를 조합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화 된 정보는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사고 체계에 의해서 재해석 될 것이며 인간에게는 사물의 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무한한 정보의 단순한 집적만으로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으리라고 여겨지며 아무리 아날로그 적이라고 해도 경험의 직접적인 축적이 사이버공간에 의한 경험 축적보다는 날 것이다. 아무리 바다의 이미지를 내 머리 속에 흘려 넣어도, 내가 그곳에 속해 바다의 소리와 바다의 내음과 바다의 물결을 신체로서 느끼지 않는다면 모두 허상에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