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말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중에서 제일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나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졸본에 나라를 세우고 700여 년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한반도 북부와 만주 대륙을 지배한 광대한 국가였다. 특히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정복 전쟁과 중계무역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명을 꽃피운 나라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서 본 고구려는 분명 강성한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는 동북아의 맹주로 중국의 어느 민족도 넘보지 못한 나라였다. 그리고 여려 차례의 이 민족의 침입에 대해서 우리 민족의 방패 구실을 했던 나라이기도 하였다. 그런 고구려를 당할 국가는 수(隋)와 당(唐)이였다. 하지만 경쟁자였던 수는 고구려(高句麗) 전쟁을 통해 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의 건국과 함께 고구려는 앞으로의 시련이 시작된다.그런 고구려는 대당 전쟁과 내부의 갈등 속에서 패망하고 만다. 그럼 왜 당은 고구려와 연개소문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을까? 우리는 여기에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한다. 그럼 먼저 7C전후의 국내?외 정세에 관해서 살펴보자.1. 7C전후의 국내?외 정세1) 국외 정세614년에 수(隋)가 고구려에 대한 제 4차 침공을 단행하던 무렵부터 중국의 내전상황이 심화되어 수의 정국은 극도의 혼란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상황에 북방변경의 방어를 담당하던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야심을 품고 617년 진양(晉陽)에서 기병 하였다.기병 직후에는 가장 먼저 동돌궐(東突厥)에 사자를 보내어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동맹을 체결하여 배후로부터의 위협소지를 해소한 다음 617년 7월에 장자 이건성(李建成)과 차자 이세민(李世民)을 대동하고 3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관중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수의 군사적 중심지인 관중지역을 장악한 이연군은 세력 확장을 거듭하여 그해 10월에 수도 대흥(大興)에 이르렀을 때는 군대의 규모가 20만에 달하였다. 617년 11월, 이연은 20만 대군으로 대흥을 공격하여 쉽사리 이 조치가 아닐까하며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신라는 이에 응해 군사 3만 명을 동원하고 이와 달리 백제는 도리어 신라의 군사동원에 따른 빈틈을 타서 신라의 국서칠성(國西七城)을 습취(襲取)함으로서 고구려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이런 여제관계에 신라는 대당관계를 적극화하게 되는데 이는 삼국 사이의 세력균형 위에서 자국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라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과업을 맡고 당에 사신을 보냄으로서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견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당과의 밀약 중 여제를 멸한 후 대동강 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한다고 하는 전후처리문제가 포함되어 있어 후에 문무왕이 후일 대당전쟁을 벌이게 된다.이리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7세기의 동아시아의 정세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남북진영(南北陣營)과 신라와 당으로 연결된 동서진영(東西陣營)이 대립 항쟁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2. 연개소문은 어떤 사람인가?1) 연개소문의 출신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기록한 사초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맞아 대접했다는 단 한 줄만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역사서에서 채록하여 전재한 것이다. 중국 측 기록은 모두 연개소문의 적이었던 당태종 군신들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믿을 만한 가치가 매우 적다.연개소문은 서부 소속의 귀족이다.(연개소문이 서부 또는 동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성씨인 '연(淵)'을 서부인 연나부와 연결하여 그가 서부출신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북한의 손영종 교수가 쓴 '고구려사'에서도 역시 서부출신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으로 구당서 고려전에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영주도독 장검의 표문을 인용하여 그를 동부대인으로 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출신이며 집권 전에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하였고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귀족세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그는 수군사령관으로 양제의 침입 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626년 또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다시없는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돌궐, 설연타, 아사나 등은 다시 중원을 공격했다.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 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착한 방효태 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통상 종대로 도하하는 병법을 어기고 횡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방효태 군의 대부분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연개소문은 공격명령을 내렸다.고구려 군은 양쪽에서 발석거로 큰 돌을 강을 향해 쏘아댔다. 바위가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방효태 군은 강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요행히 강변으로 달아난 당군은 매복하던 고구려 군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한나절 뒤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10만 대군 모두 전멸당하는 참담한 패전을 당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연개소문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대해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방효태가 전사한 후 평양성에 도착한 신라군으로부터 소정방은 군량을 조달받아 황급히 퇴각했고 신라군은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8) 당태종과 유학자들의 헛소리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중국인들 그리고 유학에 물든 집단들에게 오랫동안 폄하되어 왔다. 이세민은 연개소문을 일러 "국왕을 시해한 불충무도한 역신"으로 깎아 내렸고, 자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유가집단에 의해 1,300년간 매도당했다.고구려의 멸망은 그의 책임이었고 죽은 뒤에 벌어진 3형제의 싸움을 말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최근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 통치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로부터 "쿠데타의 원조"라는 욕까지 들어야 했다.그러나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이는 어리석은 영류왕이었고 연개소문은 어려운 조건에서 고구려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신라와 백제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미 그가 집권하지 전에 신라와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오랜 동맹국인 백제가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불찰이 있다.그러나 연개소문에 대한 이미지 대부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만승천자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연개소문을 발기발기 찢어 놓은 중국인들과 이에 동조한 어리석은 유학자들이 만든 것이다.9 승리에 도취되어서인지 이세적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구원병들은 패하여 물러가고 당군의 주력부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요동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공격은 포격 포격은 수비군을 성벽에서 밀어내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수비군을 밀어낸 틈을 타서 공성군이 성벽 아래로 공성구를 이동시켜 성벽을 기어오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고구려군의 저항이 약화되자 당군은 공성구를 성벽에 근접시켜 성벽 위의 방어시설을 부수었다. 고구려군은 물러서지 않고 방패를 일렬로 세우고 창으로 방아를 찧듯 적을 내려찍고, 돌을 굴리면서 끝까지 저항을 하였지만 점점 방어시설과 장애물이 파괴되고 화재로 인한 혼란으로 병력의 투입과 장비의 보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요동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포로 1만 민간인 포로 4만 곡식은 50만석이었다. 요동성을 함락한 당군은 백암성으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배반으로 쉽게 성을 함락시켰다. 연승으로 사기가 오른 당군은 안시성으로 향하였는데 안시성은 요동반도에 있는 고구려의 일선방어방의 중심적인 요충지였다. 고구려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15만의 고구려 지원병이 안시성 남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병 중에 최소 5천 명 정도의 말갈병이 있었는데 이는 당군에게도 경계대상이었다. 이유는 고구려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이민족부대는 특별 선발된 부대이거나 특수부대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쪽 8리쯤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고 당군은 북쪽 내지 서북쪽에서 진군해 왔을 것이다. 태종의 우측 인 서쪽 고개에는 이세적군이 진을 쳤는데 병력은 1만5천 명 정도이다. 그리고 야음을 타서 장손무기와 우진달에게 1만1천의 병사를 고구려군의 눈에 뛰지 않는 북쪽, 협곡에 매복을 시켜 놓았다. 2선 부대는 주대라고 불렀는데, 11대를 횡대로 세워 사실상 5열의 긴 횡대대형 비슷하게 되었다. 이 회대의 양쪽에 각각 경비병 20대씩을 배치해 두고 전방이 아닌 2선 양날개에 기병을 몰아두었는데 이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기동전을 펼치기 위한 포진이었기 때.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정복활동1. 들어가며중국이 2002년부터 200억 위안(약 3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추진 중인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현재의 중국 국경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어 현재 중국의 영토와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지난 20년 동안 1000편이 넘는 고구려?발해 관련 논문을 꾸준히 연구?발표하고 고구려가 중국 변방의 역사였음을 강변하기 위해 노력했다.이는 무엇보다 중국이 남북한이 통일되면 간도(間島) 등 만주지역 내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이 분쟁지역화 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09년 청?일간의 불법적인 간도협약에 따라 현재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그 주변의 광활한 지역이 중국에 귀속됐고, 백두산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 대가로 일부가 중국에 넘겨진 것으로 알려졌다.이처럼 현재 중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되어지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법뿐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한족과 주변 이민족들에 대항한 고구려의 대외정복의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고구려의 대외정복활동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가장 활발했고 성과도 가장 컸다. 이 시기의 두 왕이 바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영토확장 과정에 관해서 주로 알아보고 그 의미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2. 고구려의 발전방향론고구려의 성립과 성장과정은 외적인 측면으로는 영역의 확대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영역의 확대과정은 대체적으로 太祖王代까지의 小國統合과정,美川王代까지의 중국군현 축출과정, 그리고 廣開土王,長壽王代의 征服的 팽창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발전의 기본방향을 어디로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주변 제국과의 관계면에도 깊은 관련성을 갖게 마련이다.대외관계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인식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니 하나는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이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해서 발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민이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의 주도세력도 역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출신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가 당시 동방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것에서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주몽)을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들로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편 고구려가 건국되던 때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부여가 상대적인 강국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이끌만한 강력한 국가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나라도 무제가 죽은 후에는 외부의 확대정책을 포기하고 있던 터라, 만주 일대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이와 같은 동방사회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의 군소 국가들을 통합하였다. 졸본부여를 시작으로 행인국?북옥저 등을 통합했고 3대 대무신왕 시기엔 벌써 동방지역 최강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는 부여의 혈통을 계승하고 고조선을 세웠던 역사적 경험을 이어 받아 강력한 국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단군신화의 내용과 밀접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고조선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2) 부족연맹체의 형성어떤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의 부족집단들을 영도하는 완만한 연맹체로써 더 이상의 수준으로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漢)나라의 동방침략으로 인하여 그 지배하에 귀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서기 전 107년에성장에서 말미암은 정세의 변화를 基軸으로 하여 추구되어져 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최초의 대충돌인 평양성 전투와 고국원왕의 전사에 대해서는 前燕에 의해 서진이 좌절된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신흥백제의 북진정책이 충돌의 결과로 일고 있다.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3국관계는 廣開土王碑文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논급되었는데 武田辛男은 비문에 보이는 朝貢,屬民,歸王,奴客 등의 표현을 정리하여 당시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관계를 朝貢-屬民 관계와 歸王-奴客관계로 파악하였다.5C후반에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中原高句麗碑의 발견으로 한층 진일보하게 되었는데 李基白은 東夷, 衣服賜與, 如兄如弟 등의 표현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는 신라에 종주국적 행세를 하고 신라를 屬民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李昊榮은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전통적인 우위성을 재확인하려는 의도에서 이 碑가 서 있는 장소에서 麗羅間에 화맹과 화친을 도모한 것으로 추측하였다.4~5세기에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광개토왕이 신라를 침범한 백제, 왜군을 격퇴한 이후 고구려군이 신라영토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中原高句麗碑에 나타난 [新羅土內幢主]를 보고 중원비를 종합검토한 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장수왕 37년 5세기 중엽의 평양천도는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적극화의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濟羅동맹의 결렬을 가져온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 대해서는 종래 백제 성왕의 주도하에 백제, 신라, 가야연합군의 북진과 그 기회를 탄 진흥왕의 영토적 야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盧泰敦은 고구려 자체의 내분과 新興突厥의 남하 압력을 중시하면서 고구려가 돌궐의 압력을 저지하기 위해 남부전선의 안정을 도모하게 되고 그 방법의 하나로서 신라의 한강하류 지역점령을 內諾하는 일종의 麗羅종맹의 밀약이 체결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溫達傳이나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해러城을 구축하여 16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때 淵蓋蘇文이 정권을 잡은 뒤 강력한 무단정치를 단행하였다. 따라서 당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쓰게 되었다. 신라에 대하여 漢江流域의 반환을 요구하고, 따라서 신라에 대하여 침공을 중지하라는 당의 요청도 거절하여 麗唐의 戰爭이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이미 수가 밟았던 전철이 있어 대고구려전의 반대론도 있었지만 당태종은 수륙의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수가 그렇듯 당제국도 고구려에 패배하였고 태종은 임종시에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대외관계에서 고구려가 수, 당과 대항하여 싸운 민족적 정신은 후세사에 의해 자랑스런 역사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일찍부터 대중국, 북방민족과 투쟁하며 성장한 것이 고구려의 역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廣開土王의 영토확장을 留念하면 역사의 저변에 흐르는 고구려사의 정신을 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뒤에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반도를 통일한 것과 對照的이지만 역사적 평가는 각각 긍정적 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다음으로 고구려와 변방민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3국 중 고구려는 지정학적인 위치로 말미암아 변방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하였고, 이러한 빈번한 변방민족과의 관계는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보다 탄력성 있게 했다. 고구려가 고대국가를 성립시키고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접촉한 변방민족으로는 "계단족, 말갈족, 선비족, 돌궐족"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와 이들 변방민족과의 접촉에 대한 연구는 사료의 부족으로 대체로 이들 민족의 위치정배와 성쇠의 대략을 살피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영토와 그 세력이 미치게 된 지역들을 파악하는 데 중점이 주어졌다. 고구려와 선비족과의 관계는 요동의 점령을 둘러싸고 慕容氏와의 각축전의 전개가 중심이 되었다.盧泰敦은 고구려가 모용씨를 상대로 宇文氏, 段氏및 晋의 平州刺史崔瑟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後超와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燕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켜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되었다고 보았 사상적 통일에 기여하였고, 태학의 성립은 유학의 보급과 문화 향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율령 반포는 국가 통치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소수림왕 때의 이러한 문물 제도 정비는 고구려가 고대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음에 오는 대외 팽창의 바탕이 되었다.그는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여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요동 진출을 이룩하였다. 이어 동북으로 숙신을 복속시켜 요하 동쪽의 만주 땅을 차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하였다. 또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의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비롯한 만주 지방의 주인공이 되었고, 남쪽으로는 그 판도가 강원도 남부의 한강 상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7.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지금도 輯安에 서 있는 광개토왕릉비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광개토왕의 구체적인 정복활동을 이 능비의 비문에 기초하여 살펴보기로 한다.광개토왕은 영역을 넓히는 데 있어 고구려왕 중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정식의 王號는 國罔土廣開土境平安好太王,약하여 광개토왕이라고도 하고, 그의 연호에 따라 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에 보이는 광개토왕 최초의 활동은 영락 5년(395)의 "비려"에 대한 것이었다. 왕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영수에까지 이르러 "牛馬群羊"이 수도 없는 부락 6,7백 營을 쳐부수고 "北豊"등지를 거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비려"란 그 전후에 고구려와 和戰 어느 경우에도 상당한 교섭을 가지고 있던 시라무엔강 방면의 유목민인 "契丹"이라는 것이 千寬宇의 소견이다.다음으로 광개토왕은 영락 6년(396)에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백제의 阿 王의 항복을 받고 그 王弟와 大臣 10인을 포함한 포로 1천을 이끌고 개선하였다. 이 때의 작전 지역은 대체로 臨津江,漢江의 하류 일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영락 8년(398)의 일이다. 이 해 광개토왕은 훨씬 전부터 복속시켜왔던 술신에 偏師(小兵力)를 보내 그 복속관계를 재확인하였다. 다.
연 개 소 문Ⅰ. 序論연개소문. 그는 누구인가?우리는 중?고등학교 때 국사책에서 연개소문 장군이라는 인물을 배워 알고 있다. 중국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역사 고구려를 지켜낸 장군으로 말이다.연개소문(?~666)은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는데 642년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들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당시 고구려 27대왕인 영류왕을 시해(弑害)한 뒤, 영류왕의 동생의 아들인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 장악 후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644년(보장왕 3)에는 연개소문이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대당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에서 당군에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으며,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긴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앞 선 내용은 연개소문에 관한 고등학교 국사책과 학습백과사전에서 연개소문을 찾으면 나오는 내용이다.위와 같은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면 연개소문은 당시 천손사상(天孫思想)으로 하늘의 자손이 왕이라는 사상에 젖어있던 고구려 사회에서 누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영류왕 시해사건을 일으켰으며 그렇지만 정작 본인은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영류왕의 아우인 장(臧)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왕의 아래 대인의 자리에 만족하였다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대로 영류왕과 온건파 세력들의 대외정책에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 그 때문에 연개소문은 대신들에게 여전히 흉악잔인하며 무도한 짓을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은 640년 태자 환권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는 문제와, 64년 당나라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방치한 사실을 두고 강한 비판을 하였고 이러한 연개소문의 대당 비판적인 자세는 대신들로 하여금 연개소문을 당나라와의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을 부르는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그러나 연개소문이 이를 먼저 입수하고 , 천리장성 축조를 위한 감독관에 임명받아 요동으로 가기 위한 출정식장에서 거사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소위 정변이라 말하는 영류왕시해사건이 일어나는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인 후 여러 토막을 내어 시궁창에 던져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천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당시 상황에서 백성들의 신임을 크게 잃을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고 잔인하게 영류왕을 죽였다.2. 연개소문 정권의 시작영류왕 시해사건으로 시작된 연개소문 정권은 연개소문 본인 스스로는 혁명이라 불리기를 바랐겠지만 정변으로 인한 정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집권 후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냈다. 우선 그는 당과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장책에 있어서 강경책을 내걸고 있는 젊은 청년장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정권을 구성해갔다.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그가 죽은 뒤에 26년간이나 연씨(淵氏) 정권이 유지된 것으로 볼 때, 연개소문 그는 분명한 혁명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정권 구성원 간에 강항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인 뒤 정권을 잡은 후에도 스스로가 왕위에 올라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왕의 자리에 오르지도 않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연개소문의 독재 권력은 661년 그의 장남인 남생이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 직위에 오르면서 세습적 권력으로 모습을 바꾼다. 당시 28살에 불과했던 남생은 아버지인 연개소문을 배경으로 2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아마도 이때에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나 태대대로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당시 더 이상 연개소문 정권 즉, 淵氏정권에 대항할 그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두 아들인 남건(南建)과 남산(南産)도 이 무렵 높은 관직을 가지고 형인 남생과 서로 경쟁할 위치에 까지 올랐다. 또한 구체적인 지위는 알 수 없으나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도 666년 경 고구려 남부 12개 성을 다스릴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연개소문의 이러한 세습정권은 특정부서인 중리부(中裏府))의 강화에 따른 권력 집중, 전쟁의 상황을 이용한 반대세력의 득세 방지, 첩자들을 이용한 정보장치, 도교의 장려에 따른 불교세력의 견제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와 같은 그의 조치들이 성공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폭넓은 지지세력의 확보라는 점에서는 실패했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집권 형태는 장기적으로 볼 때 소수의 능력에만 의지해 권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권력층 내부에 분란이 있을 경우 급속히 와해되거나 부패한 권력으로 전환되기 쉽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 대내외 정책연개소문이 집권한 뒤 첫째로 부딪힌 대외적인 문제는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정변이 있을 직후인 642년 말 신라의 김춘추가 평양성을 방문하였다. 그는 신라와 고구려가 상쟁(相爭)을 중단하고 화평한 관계를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평화의 조건으로 신라에게 소백산맥 이북의 영토를 고구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이러한 요구는 김춘추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모처럼 가진 양국 실력자간의 담판은 무위로 끝나버렸다. 평양성 담판이 결렬된 후,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가중하여, 6세 않자 이들은 우회하여 이번에는 남생에게 접근하여 두 아우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이간질 시켰다. 이에 남생은 먼저 사람을 평양에 보내 사정을 염탐하게 했으나, 남건이 이를 눈치채 붙잡고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남생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공격하였다. 이에 남생은 국내성으로 도망쳐 그곳에 머물면서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이는 단순히 형제들끼리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잠재되어온 고구려 귀족들간의 내부분열로 보이는데 평양예의 연개소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국내성 귀족들이 그의 아들을 이용하여 평양계 귀족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 남생과 또 그의 아들 헌성의 고구려 배반과 그에 따른 내부분열은 사수대첩)에서 패배당한 후 고구려 공격을 중지하고 있던 당에게는 다시없는 호기였다. 이에 당은 계필하력 등을 보내 남생을 돕도록 했고 결국, 666년 9월에는 남생이 당으로 넘어가 당에서 벼슬을 받고 당의 고구려 공격 향도(嚮導)가 된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인 667년 9월, 당은 이적을 필두로 여러 장수들을 모아 고구려 공격을 재기하게 된다,여러 면에서 불리한 상황이 된 고구려군은 마지막 일전을 평양지역에서 치르게 되는데 당은 점차 포위망을 압축하여 결국엔 계필하력의 군대가 먼저 평양성을 포위했고, 안시성을 비록 당에게 항복하지 않은 성들이 곳곳 있었지만 상황은 고구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갔다.9월 하순에는 보장왕이 남산으로 하여금 백기를 가지고 당의 이적에게 항복하게 하지만. 남건은 성문을 굳게 닫고 계속 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남건으로부터 군사지휘권을 부여받았던 신성이 오사, 오묘 등과 함께 당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고, 결국 보장왕과 남건 등이 당군에게 포위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Ⅲ. 연개소문에 대한 그 간의 평가연개소문은 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고구려란 나라를 드높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지킨 자일까 아니면 엣 기록에서 보표적인 인물은 박은식과 신채호이다. 그 중 단재 신채호는 그의 저서인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을 이렇게 쓰고 있다.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 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아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연개소문이야 말로 조선 역사상 4000년 이래 가장 위대한 사람이며 혁명가였다고 칭송한다. 이러한 단재 신채호의 발언은 그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일제강점기라는 잔혹한 시절을 겪으면서 다른 대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은 단재 신채호에게 그야말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시점에도 연개소문을 비롯한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점점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각도 넓어지고 그 깊이도 깊어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을 다시금 재평가 또 재평가 하고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지 1500년가량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어떠한 완벽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결론이란 없을 것이다.Ⅳ. 사극 ‘연개소문’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하나의 드라마로써 어느 역사적 시대상황 혹은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여 다시금 역사를 재창조해낸다. 또한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내팽개치고 그 빈 공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기도 한다. 요즈음에 들어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많은 사극이 방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연개소문’, ‘대조영’, ‘주몽’과 방영 예정작인 ‘태왕사신기’등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극 중에서도 현재 방영되고 있는‘연개소문’을 조 있다.
迦智山 寶林寺 雙塔목 차1. 寶 林 寺2. 寶林寺의 伽藍配置3. 寶林寺 雙塔1)北3층석탑2)南3층석탑3)塔誌 및 舍利具4. 塔의 보존상태5. 보존 및 관리방안6. 맺음말1. 寶林寺보림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 새로운 불교사상으로 지방 호족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迦智山門의 중심 度量이다. 인도의 보림사,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 3보림의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寶林寺事蹟記, 寶林寺重?記, 普照禪師影塔碑 등에 역사속의 보림사에 대한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1457~1464)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원표대덕이 인도에 있을 때 迦智山 寶林寺를 창건하였는데 돌아오면서 중국에 오니 인도에서와 같은 지세의 산을 보고 절을 세워 역시 가지산 보림사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날 神異한 기운이 三韓의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비쳐오니 스님은 그 기운만을 바라보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오묘한 곳을 찾아내 住錫을 하시니 그 산세가 여전히 인도와 같고 중국과 같아 여기 북쪽 계곡에 한 절을 만들어 ‘迦智山 寶林寺’라 하였다.이 기록에는 이러한 창건 내력과 아울러 성모천왕, 아홉 용 연못 등의 연기설화가 나타나고 있다.(1715년)에서는 “此寺初創隋仁壽時也”라고 하여 보림사 초창을 隋나라 仁壽 때라고 하였는데, 이 때는 백제 武王 2~5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보림사에 남아있는 유물이나 시굴 조사의 최하층에서 통일신라 이전의 유구나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록은 조선 후기 한 때에 보림사 창건을 백제 무왕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이렇듯 보림사의 창건은 확실하지 않으나 중창과 여러 가지 내용은 普照禪師 體澄의 碑文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남종선의 心印을 받고 돌아와 일문을 개창한 분이 가지산문의 初祖인 道儀선사이다. 도의선사의 법통은 염거화상에게 이어지고 염거화상의 문하에서 보조선사 체징이 출현하여 장흥 가지산으로 터를 옮실은 보림사가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말해준다. 탑에서는 1934년 塔誌가 발견되어 조성시기와 배경, 중수사실 등이 음각되어 있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고려 초기부터 중기까지 보림사에 관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지산문의 중심 도량으로써의 위치를 상실하고 가지산문 소속의 한 사찰일 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말에 이르러 공민왕의 왕사인 太古 普愚가 보림사의 주지로 나아가고 있어 자못 활기를 되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굴조사와 지표채집 유물 가운데 고려 시대 것으로 청자와 기와가 다수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편년되고 있어 유물을 통해서 보더라도 보림사는 고려시대에도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조선 초기에는 가 1457~1464년에 간행되었다. 이 사적기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燕京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67년 국내에 알려진 자료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보림사 창건연기설화, 후반부는 보조선사영탑비문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이 외에도 석탑에서 나온 탑지에와 청동함에 탑의 중수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에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과 인왕상을 조성하고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사천왕상에서는 복장물로 많은 佛書가 나왔다.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에는 조선 후기 보림사 佛事내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일제시의 보림사는 『朝鮮建築史論』에 간단한 실측도면이 남아 있어 사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까지는 많은 건물들이 보이다가 1920년대에는 일주문, 천왕문, 대적광전, 대향각, 대웅전, 승실, 명부전, 응진당 등 겨우 8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이러한 보림사는 1950년 6ㆍ25전쟁 당시 공비들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되버리고 만다. 그 후 대웅전을 중층으로 복원하고 건물을 신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조계종 21교구 송광사의 말사이다.2. 寶林寺의 伽藍配置보림사는 가지산 아래의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여 산중에 있나불을 봉안한 건물인 듯 하다. 다음으로 확인되는 가람 규모는 에 나오는 건물명 46채인데 이 역시 배치 상태는 알 수 없지만, 법당은 新법당(大雄寶殿), 古법당(大寂光殿)으로 구분되어 있다.한국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다행히 쌍탑과 건물 몇 동이 남아있고, 1928년 후지시마가 그린 실측도가 소개되어 옛 가람 배치를 짐작케 해준다. 이 때는 일주문인 해탈문, 천왕문, 대적광전, 대향각, 대웅전, 승실, 명부전, 응진당 등 8채가 있었는데 대웅전과 대적광전이 두 중심축이 된다.건물의 전체 배치는 입구의 一柱門(外護門)에서 일축선상에 四天門과 大寂光殿이 놓여 있고, 대적광전 앞에는 석탑 2기가 나란히 배치하고 두 탑 사이 중앙선상에 석등을 놓았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통일 신라 시대 들어와 유행한 쌍탑1금당식으로 볼 수 있다.)여기에 조선 초기에 건립된 대웅보전이 가지산을 배경 삼아 서쪽을 향했는데, 사천왕문에서 대적광전에 이르는 정축선과는 직각으로 교차되는 선상에 있다. 이러한 유형은 한국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예로 화엄사에서 각황전이 대웅전과 일주문이 이루는 정축과 직교되게 배치되어 있는 것에서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보림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중요 법당이 확대되어 이루어진 새로운 가람 배치 형식인 것으로 보인다. 3. 寶林寺 雙塔동남향한 대적광전 앞에 일직선상으로 석탑 2기가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는 이들 모두 국보 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석조물로 곱힌다. 일출과 일몰 방향이 두 탑이 이루는 일직선상과 거의 일치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동서 탑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실제 측량으로는 남북 방향에 더 가까운 편이어서 남북 탑으로 부르고 있다. 1933년 겨울 도굴범들이 사리장치를 훔치기 위해 파손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1934년 가을에 두 탑을 다시 원형대로 복원했다. 이 때 1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구한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석, 갑석을 붙여서 네 덩어리로 하층기단을 만들었는데 하대석 윗면에 얕은 괴임이 있다. 중대석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있고, 갑석 윗면의 괴임은 약하다. 상층 기단은 각 면이 한 덩어리인데 탱주가 1개이며, 갑석은 평평하나 약간 경사를 이루고 상단에 弧形과 角形의 2단 괴임이 있다. 이는 前 시대의 2단 角形 받침에서 시대가 내려오면서 변화한 양식으로 파악된다.탑신부는 3층인데 층마다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덩어리 씩이고 각 층의 탑신에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1층 탑신석의 상부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사리장치와 塔誌가 나왔다.옥개석은 넓으나 얇은 편으로 추녀 밑은 수평이고 낙수면은 네 모퉁이 轉角의 반전이 뚜렷하다. 층급 받침은 각 층 5단이며, 상단에는 角形 2단 괴임이 있다. 옥개의 5단 층급 받침은 신라 전형적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지만, 굴곡이 심하게 나타난 낙수면이라든가 얇아진 추녀의 형식은 시대의 하강을 보여준다.상륜부는 노반?복발ㆍ앙화ㆍ보륜ㆍ보개ㆍ보주 등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있는데 상면에 균열이 심하다. 배례석에는 전면 3구, 측면 1구의 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상단 중앙에는 원형으로 얕은 연화문을 시문하였는데 마모가 심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2) 南 삼층석탑 (540cm)전체적인 양식은 북탑과 거의 같다. 그러나 1층 탑신은 남북탑의 크기가 거의 같지만 2층 탑신은 북탑이 72.5×25.5cm인 반면 남탑은 77×27cm로 북탑보다 높고 폭 또한 넓다. 4층 탑신 역시 남탑이 약간 더 크다. 그러나 탑 전신의 크기는 북탑이 더 높아서 북탑이 보다 날렵한 느낌을 주는 반면 남탑은 조금은 중후한 느낌을 준다.옥개석은 역시 얇고 반전이 북탑보다 더 심하다. 상륜부는 노반ㆍ복발ㆍ앙화ㆍ보륜ㆍ보개ㆍ보주의 차례로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보륜이 3개이다. 상륜부는 한국전쟁 당시 무너졌는데 주민들이 북탑과 같은 식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193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前代의 월성 장항리 5층 석탑, 불국사 석가탑, 금릉 갈항사지 동서 석탑 등이 기단부의 탱주가 상하 모두 2주씩이던 것에 비해 상층 기단이 1주로 줄어든 것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다음 代에 남원 실상사 3층석탑에서 상하 모두 1주씩으로 줄어든다.3) 塔誌 및 舍利具탑지와 사리구는 1934년 보수할 때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탑지의 재질은 蠟石이며, 비로자나불상명과 같은 글씨체로 쓰여 있다. 탑의 조성연대와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북탑지의 상면과 하면은 1478년 탑 중수 사실과 인근 쌍봉사ㆍ무위사의 대회 및 무위사 주존불 조성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남탑지의 뒷면과 옆면에는 1478년과 1684년의 탑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사리구로는 3점의 靑銅含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대ㆍ중ㆍ소형으로 나눌 수 있다. 대형청동함(너비 11.7cm, 높이 5.2cm, 두께 1.5mm)은 남탑에서 출토되었고 뚜껑 일부에 파손이 있을 뿐 대부분 완형이며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중형청동함(너비 10.2cm, 높이 4.1cm, 두께 1.5mm)은 북탑에서 출토되었고 파손 없이 완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소형청동함(너비 5.8cm, 높이 2.7cm, 두께 1mm)은 어느 탑에서 출토되었는지 확실하지 않고, 香函과 같은 느낌을 주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납석제 舍利壺는 뚜껑까지 남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12cm이다. 호의 하면에 墨記가 TM여 있다. 이 외에도 백자 접시와 木片 袈裟片 등이 출토되었다.4. 塔의 보존 상태남북탑 모두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다. 오랜 시간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오다 보니 자연적인 풍화와 기타 요인으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옥개석이 얇아서인지 특히 옥개석의 처마 끝이 깨어진게 심하였다. 탑신석의 가장자리도 군데군데 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남탑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상륜부가 않았다.
조선전기의 토지제도? 목 차1. 들어가는 말2. 小農經營3. 地主佃戶制4. 田主佃客制5. 田柴科6. 科田法7.職田法8. 토지 소유관계변화1) 전시과2) 과전법3) 직전법9. 나가는 말1. 들어가는 말중세시대(中世時代)의 사회구조(社會構造)를 설명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토지제도(土地制度)이다. 사회의 경제기반이나 재정기초, 그리고 농민지배 등은 모두 토지를 중심으로 구축(構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여부는 사회계급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指標)가 되며, 토지소유를 둘러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사회의 기본 모순관계를 표현한다. 따라서 그 시대의 토지제도를 연구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구성의 기초를 해명하는 것이 된다. 아래에서는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토지제도에 대하여 고려(高麗) 말부터 조선(朝鮮) 전기에 이르기까지 변화 ? 발전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朝鮮)전기 토지 운영체제를 바탕으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와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사회의 토지제도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한다.2. 소농경영(小農經營)중세시대(中世時代)에는 농업이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사업이었으므로 토지가 기본적 생산 수단이었으며, 사회적 부(富)의 포괄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토지의 소유여부는 사회계급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었다. 토지소유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직접생산자인 농민이 생산과정에서 갖는 특징, 곧 경영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중세사회의 농업경영 형태를 살펴보면 그 형태는 다 양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농경영(小農經營)이 기본적인 형태이다.소농경영(小農經營)이란 농민이 자기 가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산과정을 수행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경영형태이다. 중세 사회에서는 소농경영(小農經營)을 바탕으로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였으며, 대토지 소유자들은 토지소유를 매개로 하여 농민의 소농경영(小農經營)을 지배하고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을 지대(地代)의 형태로 수취하였다. 이러한 대토지 소유자와 생산과소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했는데, 이런 대토지 소유자와 경작 농민 사이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라 하며 소유권을 매개로 한다. 지주는 전호 농민의 농업생산물의 일부를 지대(地代)로서 징수하는데, 지대(地代)는 보통 생산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 초기의 지주제는 신분제를 비롯한 경제외적 강제를 강하게 받았으나, 신분제 사회의 동요(動搖)로 인하여 후기로 갈수록 경제외적 강제는 약화되고 경제적 강제를 강하게 받았으나, 신분제 사회의 동요(動搖)로 후기로 갈수록 경제외적 강제는 약화되고,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었다. 지주제는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본질이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소경영 농민의 지배라는 점에서 모두 봉건적(封建的) 토지 소유였다.4. 전주 전객제(田主佃客制)지주제에 포섭되지 않은 광범위한 소토지 소유 농민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소토지 소유는 국가에 의해 강한 제약을 받는 형태로 존재하였고, 국가는 봉건적(封建的) 신분, 수취관계를 통하여 작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을 봉건적(封建的) 예속민으로써 지배하였다. 그런데 국가는 봉건(封建)지배층에게 일반 토지에서 전조(田租)를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지급함으로써 지배층은 이에 기초하여서 소토지 농민을 지배하였다.이처럼 국가·지배층과 소토지 소유 농민사이에 수조권(收租權)을 기초로 형성되는 관계를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라고 하며, 수조권(收租權)을 매개로 한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자는 전주로 수조권(收租權)을 매개로 지배를 받는 자는 전객으로 인식되었다.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 또한 소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신분적으로 지배하고 생산물을 일부를 무상으로 취하는 토지점유라는 점에서 봉건적(封建的) 토지소유의 형태였다.5. 전시과(田柴科)고려(高麗) 전기의 토지제도로, 문무백관으로부터 부병(府兵)·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직역을 부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소점의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분급하는 제도이다. 전지는 수조지로, 전定田柴科)라고 한다. 그뒤 정치적·경제적인 여건 변화에 따라 998년·1014년·1034년에 개정되고, 1076년에 최종적으로 정비되엇다. 정비된 전시과의 주된 내용은 전시과 수급자(受給者)의 과등(科等)을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계층으로 나누어 각기 차등을 두게 한 것인데, 를 보면 각 과등에 대해서 소정의 전시수급액을 규정하고, 다시 그 밑에 수급할 자의 해당 관직명을 세주(細註)하고 있다. 시정전시과와 998년의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를 비교하면 첫째, 전시의 급여에 있어서 인품(人品)이라는 막연한 기준대신 관직과 위계(位階)의 고하를 기준으로 하였다. 이는 계층제가 확립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원칙은 고려(高麗)·조선(朝鮮) 왕조를 통해 일관되었다. 둘째, 시정전시과에서는 마군(馬軍)· 보군(步軍)아 분급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개정전시과에서는 이를 포함하였다. 그리고 실직(實直)을 중심으로 토지를 분급함으로써 산관(散官)은 현직관리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문·무의 관직 사이에 비중의 차가 있어 무관에 대한 문관의 우위가 현저히 드러났다. 1076년 개정전시과를 전면적으로 재편성한 것을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高麗) 전기의 토지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때에는 철저한 현직주의 원칙에 따라 산관이 분급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고, 무관에 대한 차별대우가 사라지고 아울러 군인에 대한 대우도 이전보다 나아졌으며, 개정전시과에서 규정되지 않았던, 향직(鄕職)이 분급대상에 포함되었다. 종전까지 병설되어 왔던 한외과(限外科)를 경전전시과에서 폐지하였는데, 이는 모든 수급대상이 과내(科內)에 편입되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제도 자체의 완비와 일원화를 의미한다. 전시과의 최고 분급면적은 점점 감소하였는데, 특히 시지의 현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런데 전시과에서 분급대상은 토지가 아니라 그 토지에서 나오는 조의 지급을 의미하며 조의 액수도 나라가 정하였다.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의 각 기관에 수조권(收租權)이 부여된 토지에는 경작자습적 상속은 인정되지 않았다.6. 과전법(科田法)1391년 전시과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토지국유의 원칙 아래 제정된 토지분급제도이다. 위화도회군 이해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운동은 권문세가의 대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에 대하여 신진관료의 불편과 농민의 원성을 반영한 것으로, 전제개혁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진관료의 녹봉을 비롯한 국가재정과 휘하군병의 군량의 확보라는 정책적인 면에 있었다. 전제개혁운동은 조준(趙浚)의 사전개혁(私田改革) 상소에서 시작하여 1391년 5월에 과전법이 공포되었다. 새로운 토지제도의 목적은 토지국유화에 의한 토지의 재분배, 수조율(收祖率)의 인하, 국고와 경작자 사이에 개재하는 중간 착취자의 제거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입각하여 토지지급을 위한 재정(財政)에 관하여 대강(大綱)을 규정했다. 이것에 입각하여 1390년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태우고 1391년 5월 경작권의 변동 없이 수조권(收租權)만의 개혁을 단행, 경기도의 실전(實田) 13만 1755결, 황원전(荒遠田) 8387결을 과전·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능침전(陵寢田) 및 경기내 관아의 공해전으로 삼고, 지방의 실전 49만 1342결, 황원전 16만 6613결을 공전으로 하여 군전(軍田)을 삼았다. 과전은 재직 관리 및 퇴직 관리를 18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제 1과 150결부터 제 18과 10결까지 나누어 지급하였고, 공신전은 공신에게 분급하여 세습하게 하였다. 군전은 국방비로, 지방관리와 한량(閑良)에게 5결 내지 10결의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제도의 개혁은 경작자와 균등 분배가 없이 수조권(收租權)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고려(高麗) 시대의 토지겸병적인 토지 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되는 모순을 극복치 못한 채 조선(朝鮮)시대에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 겸병의 추세와 신임관료의 증가는 결과적으로 과전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과전의 부족은 녹과라는 명칭으로 토지분급의 병행이라는 변질된 급한 토지는 국가로 환수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계속되는 공신 설정으로 세습을 공인하는 공신전이 양적으로 늘어, 신임 관리에게 지급하여야 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직전법이 제정되어 현직 관리의 관직에 따라 수조지로서의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그 지급량과 지급대상은 과전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으며, 수신전·휼양전의 명목이 폐지되고 그 토지는 모두 몰수괴어 직전으로 전환되었다. 직전은 처음에는 토지를 소유한 관리가 직접 경작자에게 조세를 받았으나, 지급받은 토지가 과전보다 감소했고, 관리의 퇴직·사망 후에는 가족의 생계보장이 없는 만큼 재직중에 전조(田租) 이외의 착취가 심하여 1470년 직전세라 하여 경작자가 국가에 직접 조세를 내면 국가는 해당관리에게 정해진 양의 미곡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1475년 이미 직전이 부족하여 사패(賜牌)가 없는 관원의 땅을 직전으로 충당하기도 하였으나, 1557년 직전의 지급이 불가능하게 되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8. 토지 소유관계변화1) 전시과고려(高麗) 전기의 사회체제를 경제적으로 지탱해 준 것은 전시과 제도였다. 지배기구와 지배 신분에 대해 수조지를 광범위하게 분급하고, 그 토지를 매개로 하여 지배신분을 직역에 동워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지배와 수취를 실현하는 것이 고려(高麗) 전시과 체제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12세기에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파탄하기 시작하였다.전시과 체제에서 관료들이 받는 수조지는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기의 정쟁과 농민항쟁의 폭발, 몽고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거치면서 지배층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마비됨에따라 국가의 수조지에 대한 관리가 어려워졌고, 수조권(收租權)자들은 수조권(收租權)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고, 세전 할 수 있었다. 수조지가 국가 권력의 규제를 벗어나면서 전시과 체제하의 토지제도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수조권(收租權)은 납조자인 전객 농민에 대한 전주의 지배라는 측면에서도 강화되었다. 전주의 수조권(收租權)이 국가 권력의 간여를 막고, 소유자에 대한 지배력을 사적으로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