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저자마태복음은 212시도중 한사람인 세리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로 알려져 왔다. 이런 전통적 이해는 유세비우스(Euse-bius, 주후 약 370-340년경)가 인용한 파피아스(Papias, 주후 130년경)의 다음과 같은 전승에 근거되어 있다: “마태가 (예수의)말씀들을 히브리 언어로 기록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자기의 능력대로 그것을 번역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저작설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첫 번째 문제점은 파피아스가 언급했던 바 있던 (예수의) 말씀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또다른 문제점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과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세리 마태“ 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저자는 누구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기말경에 살았던 ”익명의 크리스챤“ 그리고 아마도 유대인 크리스찬의 손에 의해 기록 되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유대적인 특징과 이방적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고있는 것으로 보아 한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한 학파 즉 마태 학파에서 나온 작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시기마태 복음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밝혀 내기란 그리 쉽지가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확인함으로써 기록 시기를 대충 해아려 볼 수는 있다.첫째로,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자료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마가복음 기록된 주후 70년경보다는 후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며,둘째로, 마태복음의 일부본문(22:6-7,23:38)을 통해 우리는 마태복음 기자가 예루살렘 및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는데 그 사건은 주후 70년에 있었다.셋째로, 범죄 한 형제들(18:15-17), 거짓 선지자들(7:15이하)에 대한 언급 등은 일세기 말경에 교회 안에 나타났던 위험들을 암시해 주고있다.(cf, 요한 일서4:1이하, 요한 이서 10절), 그 외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28:19)도 마태복음은 그들을 배격한다.3.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역 14,1-20,34: 반대에 직면하면서 예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역 을 계속하지만 그는 점점 제자들을 향해 주목하고 이 세상에서 제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준 비하게 한다.4. 예루살렘의 예수 21,1-25,46: 이제 드라마는 절정에 접어들어 예수는 우다 지도자들과 대 결하고 제자들에게는 최후 심판에 대해 가르친다.5. 고난, 부활, 최후명령 26,1-28,20: 드라마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의 위임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여기저기서 예견되는 이 선교는 모든 민족을 향한 것이다.새로운 신약성서 개론 [박 익수 옮김]◎ 특징1.모세 유형론(Moses Typology):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를 “새 모세” 혹은 “제2의 모세”로 전하려 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도 때문에 마태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의 생애가 모세의 모형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고 말한다.2.유대의 특징마태복음에 모세 유형론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든가 또는 마태복음이 오경 (五經)적 구조로 되어 있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의 독자들을 염두에 둔 유대적 특징 일 수 있다.첫째는 빈번한 구약 성서의 인용이다. 둘째로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유대적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셋째는 마태복음에서만 예수의 공생애 활동이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 같은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3.이방 지향적 경향마태복음의 이방 지향적 보편주의 관심은 복음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 있다.4.윤리적 행동에 대한 강조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저자 마태가 독자들에게 윤리적 행동, 곧 선한 행동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대한 심판과 보상을 말하고 있는 점이다.5.교회적인 관심앞에서 마태복음을 가리켜 교인들을 위한 신앙 훈련 독본이라고 말했거니와, 복음서 들중 마태복음만큼 “교회”를 의식한, 교회 중심적인 복음서는 없을 것이다.[신약성서개론 김 득중 저서]♠마가복음♠◎저자마가 단락: 수난의 이전의 예루살렘에서의 날들13장1절~5a 묵시적 담론에 대한 서론13장5절b~37절 묵시적 담론14장1절~12절 삽입절(3-9)을 포함하는 수난 설화에 대한 서론14장13절,16장18절 수난설화◎특징최초로 기록된 복음서1.마가복음의 내용의 거의 전부가 마태복음이나 혹은 누가복음 혹은 그 두 복음서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마가복음 내용의 95% 정도가 마태복음에, 그리고 마가복음의 65% 정도가 누가복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모두 662절이 있는데 609절이 마태복음에 평행본문으로 나오고 있고, 357절이 누가복음에 나오고 있다. 두 복음서 중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마가 본문은 30절 뿐이다.2.마가복음에 사용된 희랍어 단어들 중 절반 이상이 다른 두 복음서의 평행 본문들 가운데 그대로 되풀이 사용되고 있다.3.복음서 전반에 걸친 사건의 일반적인 순서가 마가복음의 순서이다.4.마가복음이 가장 짧은 복음서이다.♠누가복음♠◎저자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일한 인물이며,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언어, 문체 ,신학 사상 등에 이어서 비슷하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어느 곳에서도 저자가 누구인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밝혀주는 구절은 없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의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요 의사였던 누가라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첫째로, 고대 전승들과 증언들이 모두 누가복음의 저자를 바울의 동역 자였던 누가라고 일 컫고 있다. 누가가 초대 교인 중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점을 고려 할 때,그가 확실한 저자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분명히 저자로 알려 지기는 어려운 일이다.둘째로, 사도행전에 보면 소위 “우리항목”(we-sections)이라고 알려진 본문들이 있는데 (16:10-17, 20:6-21:18, 28:1-16) 여기서 저자는 삼인칭 단수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로 말하 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저자가 이런 사건들(곧 바울의 전도여행)에 참여하여있는 것은 그의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에 근거된 것이고, 다른 한편 누가가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의 보편적인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요한복음♠◎저자요한복음의 저자문제는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세배대의 아들이며 사도였던 요한이 저자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주장의 대표자가 웨스트코트(Westcott)인데 그는 이른바 “집중적 증명 방법”(the concentric proof)에 의해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이며, 그 중에서도 팔레스틴 유대인이며 그중에서도 목격자이며 사도이고 사도 가운데 요한이라”고 주장 했었다. 이런 주장은 한편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해 뒷받침 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최근에와서 저자에 대한 논의는 거의 확실한 결론에 이를 수 없는 것으로 보안다. 그러나 비교적 의견의 일치를 보아가는 점은 요한의 저자가 일세기 말경에 살았던 익명의 크리스찬 이라는 점과 또는 요한복음이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어떤 그룹이나 어떤 학파의 작품으로 볼 수 도있고, 또 여러 발전 과정을 겪은 마지막 단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시기요한보음의 기록 시기는 요한복음에 영지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한때는 영지주의 가 한창 영향력을 떨치던 2세 기 중엽으로 추산되기도 했었다. mfj나 요한복음 18:33-35, 37-38이 기록되어 있는 파피루스 단편(일명 Roberts Fragment)이 이집트에서 발견 되면서부터 비교적 확실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 파피루스의 기록연대가 주후 115-125년경으로 추산되고 있어, 요한복음은 그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대다가 9:22, 12:42, 16:2 등에 암시되어 있는 유대인에 의한 기독교인의 축출이 공식적으로 90년경에 있었던 랍비 가말리엘 2세의 기독교인에 대한 정죄 조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결국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는 일반적으로 90년경에서 일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이란 단어의 사용 빈도수가 다른 복음서의 경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요한복음에선 많이 나타나고 있다.신약 성서 기자들 중 오직 요한만이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4:8) 고 정의한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요한복음에는 마태복음의 산상 설교와 같은 윤리적 교훈이 나타나고 있진 않지만 요한에게서는 사랑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사도행전♠◎저자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일한 인물이며,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언어, 문체 ,신학 사상 등에 이어서 비슷하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어느 곳에서도 저자가 누구인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밝혀주는 구절은 없다.◎시기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 옥에 갖혀 있는 동안에 그리고 그가 순교 당한 때로 알려진 주후 64년 이번에 기록 되었으며, 그 경우 누가복음은 사도행전보다 먼저 기록된 책이기에 그 이전, 곧 적어도 주후 60년경이 되는 셈이다.◎구조사도행전의 구조를 살피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첫째로는 사도행전의 구조를 지리적으로 나누는 방법이다.(가)예루살렘의 활동(1:6-8:1)(나)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활동(8:2-11:18)(다)땅끝(=로마)까지의 활동(11:19-28:31)제1부는 예루살렘 안에서의 전도 활동을 다루고 있으며, 제2부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 곧 팔레스틴 땅에서의 복음 전도 활동을 기록하고 있고, 제3부는 팔레스틴 이외의 이방 지역에 대한 복음 전도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둘째로는 인물 중심으로 사도행전을 양분하는 방법이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다. 물론 스데반과 빌립의 활동도 있지만 사도행전 전체는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구성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주로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주로 바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베드로 행전”(2-12장)과 “바울 행전”(13-2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학자들있다.
폴 틸리히신학과 3학년 김 병도1. 생애1886년 8월20일 독일 브란덴베르그 지방에 있는 슈타르체델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보수적이며 경건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베를린, 튀빙겐, 할레 대학에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쉘링등을 공부했는데 특히 쉘링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군목으로 입대, 그는 일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수많은 전상자들을 돌보며 수백 건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체험했으며,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틸리히의 생애에 두 번째 전환점은 1933년 가을 47세에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를 비롯한 미국 친구들의 주선으로 뉴욕 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55년 69세의 나이로 22년간 철학적 신학을 강의했던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직을 은퇴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의 ‘대학교 교수’로 어느 분야든지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는 영예로운 직책을 맡았다. 1966년 80회 생일 이전에 시카고 대학 교수직을 떠나 뉴욕의 ‘뉴 스쿨’의 철학 교수직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1965년 10월 22일 사망하였다.그는 라인홀드 니버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평가받았다.2. 주요저서◎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 1955) : 병든 인간의 실존과 파탄에 이른 문명을 치유하는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명한 책.◎ 영원한 존재(The Eternal Now, 1963) : 인간의 종교적 상황을 분석하여 시간적인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이 임재 한다는 사실을 제시한 책.◎ 프로테스탄트 시대(The Protestant Era) : 프로테스탄트 정신에서 종교와 문화의 관계문제를 다룬 것으로 현대 서구 문명을 프로테스탄트주의가 문화의 영향을 주고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에 대한 대 답을 제시한 책.◎ 조직신학 : 5부로 구성, 각부는 성서와 기독교의 주요한 개념을 현대 문되었고, 나아가 원죄는 신학상의 주제가 최고의 철학적 원리로까지 격상 시켰다.비합리주의적이고 신학적인 특징을 지니는 쉘링의 후기 철학은 제국주의 철학에서 새로운 효력을 발휘, 실존주의는 신비화된 존재로, 재신화화와 결합된 역사적 허무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쉘링을 철학적 관서로 삼고 있다.4. 신학적 특징① 경계선상의 신학자신을 독일과 미국, 철학과 신학,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다양한 영역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사람으로 간주 이들을 중재하여 종합하는 것을 평생 과제로 삼았다.② 철학적 신학신학과 철학, 종교와 문화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 건설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질문과 대답의 관계로 이해했다. 철학은 질문을 하고, 신학은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신학자는 철학적 질문에 관계되도록 기독교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그의 입장은 변증법적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이다. 즉, 신과 세계의 분리를 주장하고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 변증법적 신학과 신과 세계의 주장을 종합하고 신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 자유주의의 중간 상태이다. 틸리히는 양자의 충돌을 극복하는 중재와 화해 그리고 종합이라는 제 3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철학적 신학이다.③ 문화의 신학종교의 형식이 문화요, 문화의 내용이 종교다.5. 주요 개념① 신관틸리히는 종교 또는 신앙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혹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로 정의했다. 궁극적 관심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심각하게 다루는 것, 만사를 제쳐놓고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 관심의 내용은 어떤 특정 대상, 심지어 하나님이어서도 안 되고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궁극적인 관심의 내용으로 간주했다. 궁극적인 모든 관심은 무조건적이기때문에 어떤 성격, 욕망, 환경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 틸리히는 종교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다.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서 상징적인 것이 아닌 유일한 예외가 ‘하나님은 존재 자체’라는 진술뿐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성경의 비문자화를 주장했다.③ 인간론인간의 실존 상황을 본질적인 성격으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 상태요 불안의 상태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의 입장에 근거, 실존의 상태를 소외 상태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 다른 존재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그의 본질적인 상태, 즉 참된 존재로부터 이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④ 죄론인간의 소외의 관점에서 죄를 해석했다. 소외가 죄이기는 하지만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소외가 비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죄는 소외가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틸리히는 불신앙, 교만 및 육욕을 소외의 세 가지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불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행동이나 상태이며, 교만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육욕은 무제한적인 욕망을 의미한다.⑤ 기독론실존적 소외는 인간에게 죽음의 두려움, 죄책감, 무의미와 절망을 가져다준다.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은 율법, 금욕, 신비, 경건 등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종교적 또는 철학적 노력은 소외 상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인간의 실존적 소외를 극복 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존재에 의해 새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그의 기독론이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는 한편,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존재의 지참자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틸리히는 바울 서신에 근거, 새로운 존재는 단순히 옛 존재와 대치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화해, 재결합, 부활을 의미한다. 화해, 재결합, 부활이 새로운 창조요 새로운 존재이다. 새로운 존재는 ‘실 극복되는 구원사건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틸리히는 새로운 존재에로의 참여를 중생(regeneration), 새로운 존재의 수용이 의인(justification)이며,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를 성화(sanctification)로 보고 구원사건을 세 측면으로 생각했다.*평화신학*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기독교적 기초1.기독교적 원칙과 정치 현실세계대전의 특수한 성격은 진짜 문제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 전쟁은 통상적인 민족전쟁이 아니라 국가들 간의 전쟁 형태로 이루어진 세계혁명의 전쟁이다.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한다.”는 식의 모든 구호에 대항하여 평화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평화를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실질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 대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이다.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의 창출이 문제가 아니고, 그들의 정부가 평화를 추구하도록 촉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내면적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이번 발제의 특별한 과제는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결정에 대한 기독교적 기초가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교회는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교회는 어떤 수준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누가 이 영향력에 대변해야 하는가? 미국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중요한 이유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단절 없는 직접적 관계가 존재 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참되 신학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신학적 시유에 전념해야 한다. 이 일은 언제나 사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업들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라는 두 가지 주된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문제는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문제이다. 첫 번째 문제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일반적 분석에 기초하며, 두 번째 문제는 보편적인 교회를 포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성육 신의 개념에서 잘 보여 진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내제의 실재이다.(2) 이 원리의 부정적 의미는 하늘과 땅의 이원론적인 분리의 거부이며, 역사 안에서 신 의 무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다.(3) 그것의 비판적 의미는 모든 역사적 현실의 임시적이고 애매모호한 성격에 있다. 초월 의 원칙은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며, 내재의 원칙은 그것을 역설적으로 긍정한다.3)신에 대한 보편적 참조의 원리(1) 이 원리의 긍정적 의미는 모든 현실이 무제한적으로 초월하시며 역설적으로 내재하시 는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원리의 우주적 성격이다.(2) 부정적 의미는 세속적인 영역의 배제, 성스러운 영역의 배제, 그리고 저차원적 현실 의 배제로 인한 모든 신의 제한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3) 비판적 의미는 삼중적이다. 첫째, 그것은 교회의 또는 세상의 교만의 또는 세상의 교 만에 도전한다. 둘째, 내면적, 정신적 영역을 더 신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물질세계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거부이다. 셋째, 이 원리는 정신적인 또는 민족적인 형 태의 매개적인 계급구조에 대항하며, 평등주의를 빌미로 선거와 독특성을 거부하는 것에 대항한다.정치적 결정들이 기초해야 할 내용적인 기독교적 원칙1) 현실의지지 근거로서의 사랑의 원리(1) 이 원칙의 성격은 초월의 원칙처럼 상호 의존되어 있는 주요한 특징들을 가진다는 것 이다. 절대적 사랑은 동시적으로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며, 보편적일 수 있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로서 가지는 내적 성질이다. 그것은 자애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상이다. 그것은 개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요소를 가지나 그것 이상이다. 그 것은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다.(2) 사랑이 만일 일반적인 권력과 정의의 구조에 더하여진 개인적인 감정에 그친다면 그 것은 정치적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은 근본적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 들이 의존해있는 기본 구조이다. 사랑은 존재의 구조이지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다.2) 존재의 역동제한다.
새로 만난 하느님여는 글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새로 만난 하느님이란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해보고 책을 통해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달아 서술해 보려 함에 있다.이 책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는 것,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것이다. 각 장마다 있는 단락을 모두 요약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감동이 되었던 것들로만 서술해 보려한다.하느님에 관해 생각하는 것내가 처음 만났던 하느님이 장에서 나는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근본개념들을 소게하고자 한다. 이두 개념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모두 발견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르다. 첫 번째는 세계와 무관하게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인 존재로써, 오래 전에 세계를 창조 하시고 때때로 세계에 간섭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개념화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하느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그래서 알려지거나 경험 될 수 없고 단지 믿어지기만(이러한 개념의 논리상, 이것이 소위 ”신앙“ 이라는 것이다) 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는 이러한 방식을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이라 부를 것이다. 기독교에 만연해 있는 이러한 개념은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이 (신앙인과 비 신앙인 모두가)하느님에 관해 생각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거부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고 있는 것은 ” 저 바깥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 개념이다.기독교 전통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에 관한 두 번째 근본 개념은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the spirit)이다. 우리는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있다. 이러한 개념에 있어서 하느님은 우주와 분리되어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ㅜ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신성, 영) 은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실재의비물질적인 층(laye 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는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실재(實在)를 의심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을 멀리계신 분처럼 만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전통 안에 하느님에 관한 또 다른 근본개념--즉 범재신론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저 바깥에 계신” 하느님어린아이로서의 내게ㅡ하느님은 “저 바깥에 계신” 남성적인 존재--보다 친숙한 표현으로는 “하늘에 계신 노인” 이었다.손가락을 흔드시는 하느님손가락을 흔들고 계시는 하느님은 지켜야 할 법을 제시하고 심판 하시는 하느님이었다.즉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으로서 법을 제시하고 심판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어린시절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종합적 이해의 종결나이 12살쯤 되었을 때 내 마음에 형성된 종합적인 이해는 일곱 가지 요소, 즉 하느님, 성서, 우리, 예수, 구원의 길, 신앙, 사후의 삶이 중심적 이었다.1.하느님: 하느님은 물론 종합적 이해의 기초에 속했다. 하느님에 대한 나의 모델은 자연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자연에 간섭하는 분이었다.2.성서: 성서는 하느님의 산물 이었다.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어느 책과도 달리 하느님으로부터 왔다.3.우리: 우리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불복종 때문에 죄인들이 되었다. 죄를 지은 우리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4.예수: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는 구원의 수단 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는 순결하며 죄가 없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고,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희생양 이었다.5.구원의 길: 예수를 믿는 신앙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고, 이것은 또한 기독교의 유일한 길이 되게 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바깥에 놓이게 했고,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를 보내어 수많은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천당에 가는 것, 바로 그 것이었다.그러나 나는 다른 교파의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종합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중심적 요소는 어린시절 나의 종교적 사유를 지배했던 것과 동일하다. 즉 초자연적 유신론의 하느님(“저 바깥에 계신” 하느님)과 요구하시는 하느님(“손가락을 흔드시는: 하느님)이었다.하느님의 이미지 그리기이미지들은 하느님을 이해하고 말하는 보다 가시적이고, 은유저인 방식들이다. 우리의 초점은 성서와기독교 전통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미지들에 맞춰질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이미지들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개념화 하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적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니치는 것과 마찬 가지로,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이미지도 그러하다. 즉 그것들은 상호관련성을 갖고 있다. 즉 다수성은 은유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에 관한 언어는 은유적이어만 한다. 은유가 사물을 밝히는 특징적 방법은 비교이다. 이 은유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목석같은 문자주의일 것이다.은유는 일깨우는 능력이 있다. 하느님에 관한 성서의 은유들은 일깨우는 힘이 있고, 풍부한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은유들 중 다수는 관계적 성격을 띠므로, 하느님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상상하게 한다는 것이다.하느님과 함께하는 삶하느님에 대한 개방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은 우리주의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다른 어떤 곳”에 계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비 군주적 이미지들과(하느님의 드러난 모습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들) 암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알려 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모르고 있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왜 하느님은 잘 드러나지 않을까?만약 하느님이 우리 주의 어디에서서나 만날 수 있는 분이라면, 관련 되어 있었다. 첫째로,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사항들이 있었다. 천당을 가야 하기 위해서는 해야 하거나 믿어야 할 것이 있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전통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으로서 “신앙”을 강조했다. 다른 전통들에서는, 선한 행위를 강조하거나 혹은 신앙과 선한 행위의 결합을 강요해 온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죽어서 천당 가는 것으로서의 구원은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지 않다면 왜 기독교인이 되라고 괴롭히겠는가?나는 성서 전통에서 말하는 구원은 주로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구원은 주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관심한다는 것은 내게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맺음 말-우선적으로 마커스 보그는 기독교 속에서의 전통적인 ‘하느님’의 의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이란 존재의 의미를 도출 하고자 하였다. 기독교에서의 전통적인 하느님의 의미는 “초자연적 유신론”이라고 불린다. 즉,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은 세계와 무관하게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단지 믿어지기만 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통적인 하느님은 바로 요구의 하느님, “손가락을 흔드시는 하느님” 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지켜야 할 법들을 제시해주고, 우리는 그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또다시 그러한 우리의 삶을 심판하시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마커스 보그는 자신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과정을 소개하면서{초자연적 유신론(전통적인 의미의 하느님)▶의심, 불신앙(전통적인 하느님의 개념에 대한)▶범재신론(새로운 대안적 의미의 하느님 개념)} 이런 전통적인 하느님의 의미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마커스 보그는 자신이 계몽주의 속에서 성장하면서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초자연적 유신론(전통적인 하느님의 개념)사이의 갈등을 경험하고, 이런 자신의 경험이 일반인들에게도 나타난다는주이상이지만, 동시에 우주안의 모든 곳에 현존하는 개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그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개념(초월성을 강조)을 수용함과 더불어 내재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하느님이란 존재에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그가 강조하는 것은 내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보그는 현재까지 기독교의 전통적인 하느님은 초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현대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기독교의 발전에 장애물적인 개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그는 내재성, 즉, 하느님은 “바로 여기에”계신 것 이상임에도-초월적이면서도-동시에 “바로 여기에”계시다.-내재적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마커스 보그는 하느님에 대한 범재신론 적인 이해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적 삶에 생명력을 제공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이해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실재성,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들(인간들)과의 관계성, 그리고 이것을 통한 삶의 변화 등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이미지화 하는데 있어서도 전통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영 모델(The spirit model)이라는 대안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이미지인 군주로서의 하느님, 즉 멀리 있는 힘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이미지 보다는 마커스 보그는 영 모델로의 하느님의 이미지, 즉 하느님이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초월하고 계신 것을 이미지화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커스 보그의 대안적인 하느님은 “우리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비물질적인 실재”이고, “하느님은 우리안과 동시에 바깥에 계시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이시다.” 라고 이미지화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커스보그가 강조를 하고자 하는 부분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결코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우리와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고, 우리의 삶에 실재하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마커스 보그는 었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창 1:26)을 근거로 해서 인간의 여러 삶을 예기하고 있는 이책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내가 궁금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배울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살면서 부딪이게 될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미리 생각할수 있게 해준 좋은 책이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수 있었다.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땅을 아름다움과 약속이 가득한 땅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열명의 정탐꾼들이 보았던 것처럼 공포와 속박을 동반하는 땅, 불길한 땅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명과 자유, 회복과 복구의 삶임을 인식해야 한다.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둔하고 메마르며 억압과 엄격함이 가득찬 삶으로 오해되어 왔던 것이다.나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간적인 무언가를 포기하는 고차원적인 어떤 영적인 것을 항상 갈망하면 자신을 얽어메는 것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거 같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생각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부터 생겼다는게 참으로 반갑게 들렸고. 나에게는 이러한 문제앞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사실 -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과 같은 생명과 자유, 회복과 복구의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 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위로로 다가오게 되었다.또한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나 자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위하는 길인것이다. -을 배움으로써 율법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질수 있었다. 성경은 율법을 말하지만 그 율법은 우리를 결코 억압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줌으로써 우리를 혼란속에서 자유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이책을 통해서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볼수 있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율법이 우리에게 큰 거부감으로 다가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의 존재를 통해서 이해할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고, 그 율법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나간다는 것이 아름답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것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또한 금욕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에 대해서 고찰할수 있었다. 예전부터 들어온 금욕주의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들어와서 알았지만 나조차도 어느정도 그러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배웠기 때문에 깊은 금욕주의에 대해서 알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때라 정말 많은 것을 배울수 있게 되어서 참 감사했다.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래의 그것과 다른 어떤 것, 즉 죽음의 가능성에 매이지 않는 인간의 체험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라는 사실은 나에게 또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단지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당신의 나라로 대려가는데 목적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그 죽음이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을 회복시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걸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 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에 주신 그 인간적인 모습, 즉 창조성과 사랑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삶인 것이다. 그것을 억압하는 금욕주의는 올바를 삶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배격하시는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곳에도 그러한 금욕적인 삶을 고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삶을 경계하고 조시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삶을 얽어메고 있었던 이러한 금욕적인 가치관이 나를 많이 고민하게 하였고 혼란스럽게 했었는데,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것은 어떤 금욕적인 모범이 아니요, 어떤 기괴한 모범도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떤 기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파괴하려 하거나 초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창조자 그리스도를 닮으며 타락이전의 아담을 닮도록 해야한다. 정의한 것은 나에게 앞으로의 삶을 말씀 가운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수 있게해주는 하나의 큰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지금의 세상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있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읽었던거 같다. 우리는 유물론이 지배하는 문화, 곧 신 존재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문화안에 살고 있다. 이 문화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라고 서두에서 유물론에 대해 정의 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마치 지금의 세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관점에서 신은 없다고 정의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삶에서 추구해야 할 긍극적인 의미를 결코 찾을수 없고 결국은 더욱 감각적이고 감적적것을 추구하거나 재산을 축적하는등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을 극대화시키면서 당장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이러한 삶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포기해야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을을 선택하느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을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유물론적 세계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외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할수 있었다. 또한 흥미로왔던 내용은 이러한 유물론적 사고가 그리스도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방법론적인 것으로 영적인 부분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번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나 또한 어떤 방법론을 기계적으로 반복시킴으로 한 영혼을 영적으로 변화시킬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오직 영혼을 변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우리가 그러한 방법론적인 것에 더 크게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마치 그 방법들이 영혼을 변화시킨다는 듯이 그 방법에만 치우치는 사역을 한다면 그것은 위험한것이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형교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와같은 유물론적인 사고들이 더욱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더큰 건물, 더좋은 프로그램, 더 그럴듯한 어떠한 행동적인 부분들을 만들어 나아가는것,, 물론 그런것도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것들을 앞세운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일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아실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들에 더욱 의지하여 사역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사역에 있어서 열매로 나타날 것이다.플라톤의 세계관또한 점점 지금의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참신기하다 예전부터 있었던 이 잘못된 가치관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면서 약간 씁쓸하기도 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육체를 더럽고 추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고귀한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게 플라톤의 사상이다. 언뜻보면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 삶의 목적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육체의 고통이나 명상을 통한 자아의 소멸이다.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안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마치 유물론적 사상이 기독교인들에게 방법론적인 것을 통한 사역을 좇도록 만들었다면 플라톤적인 사상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 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플라톤의 사고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부분은 가장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반면에 육적인 부분, 즉 자아의 부분을 멸시하고 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생각은 성경적인 것처럼 들리나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영적인 영적인 영역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고 하는 말과 다를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한 죄성을 아시고 그것을 인정하셨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대속물로 보내신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인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는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하는것이며 자신의 죄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할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것이다. 성령님은 영적인 부분을 통해서도 육적인 부분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육적인 부분의 삶, 즉 문화를 누리는 삶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선 신약의 시대에 영적인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을 구별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더 이상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룰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부분과 육적인 부분 그대로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타락하기 전의 온전한 인간의 모습그대로의 삶을 살기에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는글이글을 쓰게된 동기는 사회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 한 사람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독교 윤리적인 측면에서 해석해 보고 직접 경험해 본 것을 토대로 기록하며 정리 해 보려 한다.명지 대학교 진입로에 가보면 흔희 볼수 있는 풍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셔틀 버스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승용차를 얻어 타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이 있다. 명지대학교를 오기 위해서는 강남에서 5001과 분당에서 820번 노선이 있다. 학생들은 이 버스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버스들은 다같이 용인 시내를 경유해서 터미널에서 한번 쉬어 가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맞춰 가기란 쉽지않다. 그래서 학생들은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명지대입구에서 내려서 셔들이나 승용차를 이용하게 되는것이다.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셔들 버스를 기다리려면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래서 승용차를 세워 보기도 하지만, 분명히 학교로 올라가는 빈차 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어 세우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냥 냉정하게 올라가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학교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걸어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진입로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다. 수업이 없을 경우엔 여유있게 사색할수 있는 거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골고다 언덕이 따로 없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윤리적인 실천 방안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승용차를 활용하여 학생들을 태워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고 학교버스 처럼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운행할 순 없었지만 나름데로에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내가 세운 원칙은 골라 태우지 않는다 이다.예전에 승용차를 열심히 세울때 느낀 점 이었지만, 남자들은 손을 흔들고 나름데로 세워 보려 애써도 한대 설까 말까하는데, 여자들은 애써 손흔들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그냥 세워 주는 것이다. 덕분에 끼어서 타 보긴 했지만 그때 난 왠 차별을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실천 하기에 앞서 원칙을 세우는 첫 번째로 골라 태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시작 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세운 원칙은 세우기전에 내가 먼저 다가간다. 이다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땐 그래두 괜찮은데 혼자서 차를 세울땐 조금은 부담이 되도 하고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편이다.그리고 여자들의 경우엔 더더욱 그럴 것이다.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중에 한가지가 바로 먼저 다가서는 것이다.어차피 봉사 할꺼라면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아서 이런 원칙을 세웠다. 세 번째로 세운 원칙은 밝은 얼굴로 인사하기 이다.비록 내가 영업을 위해 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 스럽게 차에 오르는 학생들에게 조금은 부담감을 덜어 주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다.인사의 순서는 이렇다. "안녕하세요!! 학교로 가시죠? 날씨가 더울 경우 날씨가 좀 덥죠? 시험 기간일 경우에는 시험은 잘 보셨어요? 라는 질문들을 던지며 짧은 거리 이긴 하지만 많은 말을 주고 받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하게 되고 학생들은 부담감을 갖기도 전에 내리게 되는 것이다. 내릴때 또한 어김없이 안녕히 가세요!! 또는, 아침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라고 인사를한다. 네 번째 원칙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크리스챤임을 간접적으로 알리고,복음을 전한다 이다. 그러기 위해서 난 항상 CCM음악을 틀어 놓고 운전을 한다. 학생들이 차에 타는 순간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게 되고 내가 크리스챤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약간의 인사를 마치고 바로 예수님 믿으세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얘기가 잘 진행되면 연락처도 얻을수 있게 된다.다섯 번째 원칙은 목적지 까지 데려다 준다. 이다 물론 내가 바쁠때는 예외도 있겠지만 거의 목적지를 물어보고 최대한 가까운 거리까지 데려다 준다. 처음엔 조금은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들이 조금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가는 학생들이 대다수 이다.거의 명진당 앞에서 하차를 시키지만 필요에 따라 기숙사, 조형센타 까지도 운행해본 경험이 있다. 이렇게 다섯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나는 개강을 하고 난 후인 지난 4월달부터 학생들을 운행하기로 마음먹고 실천하기 시작했다.물론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수업에 보고서를 위함은 아니였다.작년 6월부터 운전을 하게된 나는 빈차로 혼자서 다닌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내차를 내가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쉽지만 어릴때부터 차를타고 다니기 보다는 걸어다니는걸 좋아해서 인지, 그리고 내것 이라는 마음보다는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그러던중 작년 10월 소형차에서 중형차로 바꾸게 되면서 아버지의 기도와 말씀을 듣고 나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이 일을 준비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게서 말씀 하시기를 이 차를 운행할 땐 언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신 말과 더불어 이 세상엔 내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말하시 면서 베풀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 이라는 말씀 이었다,하지만 이런 일들이 베푼다라는 표현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 또한 경험을 통해서 시간에 쫓겨 절실할 때 승용차를 얻어타는 고마움을 알기에 시작할 수 았었다. 처음엔 일부러 진입로와 학교사이를 왕복하며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나가게 되는 때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지 언제 부턴가 차를 가지고 밖에 나가게 되는 날이면 자꾸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버릇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주위를 둘러보다 내려 가야 할 사람이있음 언제든지 태워 가려는 마음에서 이다. 여러사람을 태워 봤지만 특별히 기억이 남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안다고 얘기 하던 사람들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일단 차에 타면 먼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안녕하세요!! 채플시간에 많이 봤어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더욱더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를 알아 보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 진다는 점이다..그러면 그럴수록 난 이들 에게 다가서기가 쉬워지고, 하나님믓 말씀을 전할수 있는 기회도 쉽게 만들어 진다. 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다. 인사를 해도 받는둥 마는둥 이상한 눈으로 쳐다만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택시도 아닌데 전화로 크게 얘기하고 당연 하다는 듯이 그냥 내려 버리는 시림. 솔직히 이런 사람은 딱 질색이다. 하지만 내가 세운 원칙이라도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에 아무일 없이 계속적으로 진행 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세차를 하게 되었다. 물론 평소에도 세차는 자주 하지만 그날은 특별히 차 내부를 청소 하기로 맘먹었다. 그래서 발판도 빨고, 시트도 깨끗하게 닦고, 창문도 닦기 시작했다. 군데 새 차임에도 불구 하고 먼지가 너무 많이 나오는게 아닌가? 난 순간 내가 사람들을 매번 태원서 이렇게 더러운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땀을 흘리며 차 청소 한다고 바쁜데, 그 사람들은 이런 나의 맘을 알기나 할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하나뿐인 후배가 형은 차를 너무 막 다루는 것 같다며 애들 아무나 다 태원주고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세차장을 나와 다시 학교로 향하는 나는 진입로를 막 지나 가려는 찰라 언제나 먼저 가서 차를 세우는데 오늘은 나도 모르게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두 내가 조금은 신경이 쓰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조금에 갈등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차를 세웠고, 언제나 그랬듯이 학생들을 태웠다. 세차를한지 별로 되지않아, 학생들이 내린 자리에는 흙 먼지가 그대로 묻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일을 통해 조금은 보람을 느끼는 듯 했다. 4월이 지나고 아름다운 달인 5월이 왔다. 그런데 5월이 들어서면서부터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침 일찍 서울로 아르바이트를 하러간다.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서울가는 사람 있으면 태워 줄 수 있는데,..... 없나? 라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가는 그 시간에는 버스가 배차 시간 보다 조금은 늦게 오는 편이라, 서울을 가게 되는 사람이 라면 조금은 편하게 갈 수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