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생의 여가형태대학생의 여가형태는 스키■낚시■농구■당구■등산 등의 신체적 여가 활동과 동아리 모임■동문회 모임■동호회 모임■사회봉사 활동 등의 사회적 여가 활동, 독서■외국어 공부 등의 지적 여가 활동, 음악■미술■무용 등의 예술적 여가 활동, 인터넷과 게임■TV 시청■영화관람 등의 오락적 여가 활동 등이 있다.신체적 여가 활동의 경우, 대학생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농구, 당구 등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여가 활동을 즐기는 것은 대부분 남학생으로 여학생들이 학교 내 시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체적 여가 활동은 적다고 볼 수 있다.사회적 여가 활동의 경우, 친목 도모, 자기만족, 사회봉사 등이라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러한 사회적 여가 활동의 경우 결과적으로 대부분이 술자리가 주목적인 듯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지적 여가 활동의 경우, 요즘 대학생에게 있어 현실적으로는 여가 활동이라고 하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기 계발을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여가 생활을 즐긴다는 목적으로 행하는 학생들이 적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대다수의 학생들이 가장 즐기는 여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TV 시청, 영화관람, 인터넷과 게임 등의 오락적 여가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여가 활동의 특징은 정적이라는 것으로 요즘 대학생들의 여가 생활은 활동적이라기보다는 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2. 대학생의 여가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인여가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써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학부제와 취업대란이라고 할 수 있다. 학부제가 실시되면서 대부분의 학부가 1,2학년 말에 자신의 전공을 선택하도록 되었고, 각 학부의 소위 인기 학과에는 학생들이 몰리게 되어, 모집 인원 초과 시에는 성적순으로 학생을 받아들이도록 되었다. 그로 인해 1,2학년인 대학생들은 여가 생활을 즐기기보다는 좋은 성적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전공이 정해진 3,4학년은 치열한 취업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 공부와 전공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또한 비인기 학과의 학생인 경우에는 복수 전공, 부전공 등을 선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가를 즐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며, 기껏 여가 생활이라고 한다 해도, 인터넷 게임, TV 시청 등의 정적인 여가 생활밖에는 누릴 수 없게 된다.또 하나의 장애 요인으로써 여가 시설 부족을 꼽을 수 있겠다. 대학생이 가장 많은 시간 상주하는 학교 주변에는 술집과 당구장, PC방, 만화방 등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고, 그 정도의 장소만이 학생들이 수업이 끝난 후에 즐길 수 있는 여가 시설이다. 또한 학교 내에서 언제나 학생들이 사용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곳은 운동장 정도인데, 이러한 곳에서 남학생의 경우는 농구나 족구 등을 하면서 여가를 즐길 수는 있으나, 여학생들을 위한 공간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3. 대학생의 여가생활의 개선할 점학교 차원에서 여가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학생의 여가생활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적인 활동이 대부분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지 않은 점과, 학업에의 부담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학교 차원에서 학생들이 활동적인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수업을 많이 개설해 그것을 학생들에게 홍보하거나 필수 과목으로 두어, 학생들이 수업에 참가하면서 그로 인해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여가 생활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은 어디서든 쉽게 일본을 다루는 것들을 접할 수 있다. TV에서는 자주 일본에 관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서점에는 일본에 대해 다룬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일본에 대한 관심이 월드컵 공동 개최와 함께 더욱 더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일본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기로서니, 국립 민속 박물관에서 전시되는 특별 전시회의 이름이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으로 '먼 나라'라는 말이 빠져 있다는 것은 실로 의아한 일이었다.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특별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였다. 일본의 기모노에 コト, 하오리 등의 외투가 있다는 사실과, 기모노를 차려 입기 위한 다양한 속옷들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과 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모노는 이불 같이 생긴 하나의 옷감을 걸치고, 허리띠만 매면 끝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을 얕잡아보는 가치관이 내 속에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할머니의 의복에서 기모노를 현대적으로 개량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만의 전통의복인 和服와 洋服를 조화롭게 합쳐 실생활에서의 편리함과 함께 전통 고수를 지켜나가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의 미덕을 느낄 수 있었다.明治시대 서양화의 바람이 불어닥치던 때에도 洋服에 뒤쳐져 사라질 수도 있었던 기모노는 모방과 재창조를 통하여 개량화 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인들의 전통 고수에 의해 기모노는 七五三, 성인식, 졸업식 등 각종 행사에서 크게 환영받게 될 수 있었다. 일본은 각 시와 구가 주최하는 성인식이라는 행사를 통해서 거리를 기모노로 물들여 전통의 맛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날로 만들었다. 우리 나라도 일본처럼 성인의 날이 지정되어 있지만, 그런 날 각 시나 구에서 주최하는 행사라는 것은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단 하루만이라도 아름다운 한복의 자태로 온 거리가 수놓아지는 날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또한 졸업식의 경우, 졸업 가운으로 기고 싶어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할머 니의 방 너머 창 밖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할머니의부엌에는 현대 용품인 전자 렌지, 냉장고 등도 볼 수 있었다. 답답할 정도의 전통 고수가 아닌, 현대의 편리함은 수용할 줄 아는 할머니의 실리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또한 부엌에는 여러 장의 부적이 있었는데, 방에는 불단이, 부엌에는 부적이 있다 는 것에서 일본인의 특이한 신앙 형태를 볼 수 있었다.불단은 원래 절에서 불상을 안치하는 단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반 가정에서 불상이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할머니의 방에도 역시 불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나라라면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불단을 집안에다 가져다 놓은 것은, 자신의 집안에 자연을 두고 싶어 축소된 자연을 만드는 정원을 만드는 것과 함께, 축소 지향의 일본인의 특색을 내보이고 있다고 본다.할머니의 집 곳곳에서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진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전통은 가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사랑한다. 가부키 같은 전통극은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고,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의 하나인 스모도 오랜 기간동안 국기로서 사랑 받고 있다.20여 년 전에 일본의 한 유능한 야구 선수가 실력이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한 일이 있다. 그가 야구 선수를 은퇴한 것은 가업인 우동집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이런 예와 같이 일본인들은 그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에 적극적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융통성 있고, 개인에게 있어서는 큰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돈, 명예, 권력보다는 집안의 전통을 중시 여기는 일본인들, 우리가 본 받을 만한 점이라고 본다. 이런 그들의 정신이 일본을 강대국으로 이끄는 힘은 아니었을까.일본 젊은이의 방세대가 변하면서 할머니의 방에서 보였던 불단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방과 마찬가지로씬 더 많은 하객이 찾아와 예식은 보지도 않고 식사만 하고 가는 하객이 없이 모두 모여 예식을 축하해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는 것은 참 부러운 점이다.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결혼식을 일생일대의 화려한 무대라고 생각해서 결혼에 관련된 산업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이런 결혼 관련 산업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결혼식은 더욱더 화려하고, 그로 인한 소비는 더욱 더 증가하여 결국 결혼식은 점점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서양의 경제적이고, 가정적인 결혼식을 우리나 일본이나 본받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일년 내내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마쯔리우리 나라는 가족을 중심으로 보내는 명절 외에는 한국인 전체가 함께 모여 즐기는 행사가 없는데 반해, 일본은 조그만 마을에서부터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마쯔리라는 연중 축제 행사가 있다. 마쯔리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가두 행진에 이르기까지 마을 사람들은 이 행사를 통해 단결심과 협동심, 그리고 연대감과 귀속 의식을 느끼게 해 준다. 이웃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각박하고 메마른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와 사회를 생각하기보다 무조건 내 자신, 내 가정만을 챙기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의 마쯔리는 일본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좋은 접착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각자 자신의 할 일로 바빠서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마음의 여유를 내서 참여하지 않는 한 무척 어려울 것 같은 이런 행사가 일본에서는 연중 내내 이루어지고 있으니 무척이나 놀라웠는데, 이런 단결력이 부강하고 통일된 저력 있는 일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일본의 마쯔리는 원래 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고, 신을 즐겁게 하는 신앙활동이 표면으로 나타난 의식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신앙, 제례라는 종교적 성격이 쇠퇴하고, 상업적, 집단의 단결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관광물로써 자리잡아가고 있다.일본인은 마쯔리를 행하면서 자신이 집단 속의 일원으무 큰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하나의 종교 의식처럼 보이는 일본의 스포츠 스모스모는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보다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 의식을 행하는 시간이 더 많다. 일본인들이 차를 마시는 차도, 生け花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보다는 그 행위를 준비하는 과정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스모의 규칙은 굉장히 단순하다. 상대방을 원 밖으로 밀어내던가 발바닥 이외의 신체 부분을 땅에 닿게 하면 이긴다. 이러한 스모의 규칙에서 일본의 특성을 볼 수 있는 듯 하다. 우리 나라의 씨름이나 유도, 레슬링 등의 경기는 경기장 밖으로 밀려 나가게 되면 잠시 시합을 중단하고 다시 안으로 불러들여 다시 시합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일본의 스모는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 시합의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섬나라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사방이 바다인 섬나라 일본은 땅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이런 것이 바탕에 깔린 일본인의 사고가 스모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또 하나, 스모의 승부는 단 한 판으로 결정되고, 만회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고 순간의 패배를 그대로 인정하게 한다. 이는 단 한 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렸던 사무라이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규칙은 단순하지만, 경기 시작 전에 행하는 종교적인 의식과 엄격한 예의 범절을 지키는 모습 등은 충분히 볼거리로서의 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묘미가 있기 때문에 스모는 인기 스포츠이자 국기로서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일본은 스모, 가부키, 生け花 등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남다르다. 우리 나라의 씨름, 판소리, 농악 등이 점점 쇠퇴해 가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스모의 원류는 한반도의 씨름이라고 하는데, 스모가 일본의 국기로서 사랑 받으면서 해외에서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 우리의 씨름은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워만 보여 안타까움을 느낀다.일본의 야구일본 야구는 프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일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패션과 유행우리 나라에는 1년 정도를 사이에 두고 일본의 유행이 바다를 건너 들어온다. 일본의 유행을대부분 따라가는 우리 나라인데도 일본의 독특한 패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일본의 경우, 하나의 유행에서 모방에서의 창조로 인해 번져 나오는 여러 가지 패션이 있음에 반해 우리 나라는 짧은 수명의 일률적인 유행이라는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일본인들은 유행은 따르되 무조건 적인 추앙이 아닌 자신에게 걸 맞는 패션으로 변형시키곤 한다. 모방을 통해 일본만의 창조품을 만들 듯이 유행을 창조의 발판으로 삼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특한 패션 양식이 창출되는 것이고 그 패션의 수명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또 일본에서는 어떤 아이템이 유행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그 아이템은 "定番(ていばん)"이라고 불리며 기본적인 것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에서는 한 가지의 유행이 시작되면, 단기적으로 모든 이들의 사이에서 유행이 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전에 인기 있던 패션 경향은 촌스러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지곤 한다.고등학생들의 패션을 예를 들어보면, 일본 고교생들은 교복으로 인해 단조로워질 수 있는 복장에 루즈 싹스를 신고, 치마를 수선하고, 가방엔 커다란 인형을 달기도 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이런 일본 고교생들의 유행이 들어와 우리 나라 학생들의 치마 길이는 점점 짧아져 가게 되었는데, 교복과 가방, 헤어스타일에 변형을 주면서 각자의 개성을 살려 나가는 일본학생들에 비해, 우리 고등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다 같은 유행을 따라가게 되어 머리 스타일도, 가방의 모양도, 치마 길이도 비슷비슷하기만 하다.일본의 입시일본에는 종합 선택제 고등학교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대학의 학부처럼 입학은 같이 하고, 2학년이 되어서 인문계, 이과계, 외국어계, 예술계, 체육계 중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선택제.
1. Von der Aufklarung zum Sturm und Drang1) 계몽주의 문학의 특징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을 지배한 구사상 타파의 정신운동으로 먼저 영국에서 발생하여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 왔다. 계몽이란 인간이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규정짓고 무지와 몽매를 계발시켜 인간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도모하고자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 경향을 말한다.근세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아의식이 눈뜨면서 그리스도 교회와 봉건적 권위에 반발하여 이성적 판단과 인격적 존재를 존중하는 계몽사상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유럽에 번졌다. 이와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17~18세기의 문학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추구하였다.독일에서 제일 으뜸가는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 - 1802)는 계몽주의의 개 념을 철학적으로 정의하였다.계몽주의란, 자기가 모자라기 때문에 야기된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미숙한 상태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기의 오성을 활 용하지 못하는 무능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미숙한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오성를 활용하겠다는 결 심과 용기가 결여된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 미숙한 상태는 자기가 모자라 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된다. 현명해져라! 당신의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표어이다.계몽주의 때의 새로운 양식의 특징은 바로크 시대의 장식적 형식에서 우러나오 는 동적인 풍만함이 아니라 청아함과 고요함이었다. 새로운 정신을 결정짓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이었다. 신앙은 과거에 교리에 얽매인 나머지 수많은 투쟁과 갈등을 자아냈던 것이다. 따라서 계몽주의는 중세적인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절대적인 권위로부터의 해방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인문주의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사상전개에 연장선 위에서 또 하나의 단계를 나타내며 이성의 자율권에 기초한 인간지나치게 강조한 Gottsched의 독단론을 반대하기 시작하는데 그 최초의 포문을 연 사람이 Bodmer와 Breitinger 였다.Gottsched와 Bodmer와 Breitinger 사이에는 여러 가지 상이점들이 있었는데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한 Gottsched가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모범으로 삼았음에 비해 취리히를 무대로 한 이들은 영국, 특히 밀턴의 실낙원을 모범으로 생각했다. 또한 Gottsched가 서구에서 동구로의 교량을 놓았음에 비해 Bodmer와 Breitinger는 남과 북의 정신적 연결을 지향하였고 Gottsched가 작가를 위한 규칙과 지침을 마련한 것이 비해 Bodmer와 Breitinger는 독자의 취미 형성과 교양에 봉사하였다. Gottsched가 계몽적 교육적 효과 때문에 문학을 높이 평가하였다면 Bodmer와 Breitinger는 문학을 그림과 비교하여 순수예술로 취급하였으며 상상력과 놀랍고 신기한 것을 중시했다.4) 독일 Rokoko문학의 완성자인 Wieland의 역할그는 아나크레온파의 시인들의 단순한 모방과는 달리 독자적인 실을 걸어 로코코 문학을 이룩한 사람으로 슈바벤 지방에서 목사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가정에서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학에서는 법률, 언어학, 철학등을 배웠으며 보드머에게 초대되어 스위스에서는 경건주의에 심취해서 종교적인 서사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열광적인 신앙의 작가로서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아나크레온파의 시인들을 맹렬히 비판했고 심지어는 아무리 졸렬한 찬송가라도 그들의 걸작보다는 훌륭하다며 혹평했다. 이러한 Wieland가 귀국 후에는 슈타디온 백작가를 출입하면서 계몽주의적 교양이 높은 백작의 감화와 자유적인 집안의 가풍에 물들어 경건주의적 태도에서 향락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1762년부터 세익스피어의 산문을 번역하였고 영국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유머와 위트를 배워 완숙한 작가로 성장해 나갔다.그 당시 프랑스 문학을 애호하던 상류층의 독자를 독일문학을 애호하게 만든 것도 그의 업적중 하나이다. 그물의 표정이 입언저리에 약간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을 QNs 절규와 같은 추악한 표정은 하나도 없다. 이것을 빙켈만은 희랍인들의 기품있는 태도에서 오는 고귀한 단순과 정숙한 위대라고 하였으며, 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절규와 같은 추악한 표정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레싱은 조형 미술과 문학의 본질이 원래 다르다고 주장한다. 조형 미술은 공간 예술로서 순간을 포착하여 그 형체의 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고통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절정에 이른 추한 표정보다도 그일보 전의 순간을 택하여 상상의 여유를 남기는 것이 좋으나, 문학은 시간 예술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 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모두 서술할수 있으며, 고통의 절규를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희랍의 작가 호머, 소포클래스등의 격렬한 통곡과 절규를 예로 들면서 공간 예술과 시간 예술의 차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논문의 요지 자체는 오늘날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지만, 많은 실례를 들면서 법칙을 유도해 나가는 그 방법은 지금도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당시는 물론 훗날의 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바 있다.Hamburgische Dramaturgie은 레싱이 함부르크 국민의 극장의 고문으로 있을 때, 동극장의 기관지에 발표한 연극론이다. 특히 이것은 비극의 본질을 논하여 독일극에 새로운 토대를 만든 귀중한 문헌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론을 근본적으로 연구하여 프랑스 고전극 작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곡해했다고 지적하면서, 삼일티 법칙에 너무 얽매이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비극에 있어서 줄거리는 본질상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되어야 되며, 줄거리의 통일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 요소에 얽매여 비극 효과를 해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비극에 있어서 관객이 작중 인물로부터 동정과 위구를느끼고, 작중 인물과 함께 체험하고 공감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비극이 사람의 마음을 숭고하게 하는 것은 비극이 정신 생활의 폭을 넓혀 주고, 보다 고귀한 인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인데, 이러한 요서 만나자고 한다. 이 희곡 전부가 마지막 구절을 목표로 정확히 계산되어 진행되고 있다. 용의 주도한 이런 구성 때문에 괴테는 머리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말을 했다.Nathan der Weise은 함부르크의 목사 괴체와의 종교 논쟁이 당국으로부터 금지되자 희곡의 형태를 빌려 작자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한 운문 사상극이다. 이 희곡은 크리스트교,유태교, 회교의 대립이 관용과 이해와 애정에 의해서 서로 융화된다는 이야기로 종교에 있어서는 교리보다도 실천이 중요하며 모든 종파를 초월해야하고 관용과 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한것이다. 이 희곡의 핵심인 반지의 우화는 세 종교의 비유이다 레싱은 이 우화에서 어느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모든 인간의 종교적 편견을 버리고 관용과 인류애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독일 고전극의 선구로 볼 수 있으며 레싱이 계몽주의의 단계를 초월 했다고 말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2. Sturm und Drang1) Sturm und Drang의 개념과 시대적 배경Sturm und Drang은 18세기 후반의 후반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의 짤은 기간동안 젊은 문학가들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추진 되었던 혁명적 문학운동을 말한다. 명칭은 그 시대의 작가였던 클링거의 희곡 제목을 그대로 따서 후대의 사가들이 명명한 것이다.이들은 계몽주의의 이성 만능과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감정해방을 외치면서 개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자연적이며 정열적이며 외국 모방이 아닌 민족적인 것을 표방하였다.그리고 족창적인 인간 , 즉 천재를 찬미하며 스스로 천재라고 자처하며 자유로운 표현을 제약하는 종래의 규칙과 형식을 무시, 감정이 나아가는 대로 글을 썼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구사조에 대해서 폭풍과 노도처럼 반항을 했던 것이다.2) Hamann이 문학에 부여한 과제폭풍 노도적 세계관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헤르더가 먼저 나오고, 다시 헤르던의 스 폭풍노도파와는 관계가 없지만 폭풍노도적 문학과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들은 클롭 슈트크를 스승으로 받들고 빌란트를 풍속 파괴자라고 비난하면서 도덕, 종교 , 우정에 대한 청춘의 감격과 자연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노래하였다. 당시 동인이 6명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포스, 밀러, 휠티,레오폴트 등이다. 포스는 전원시 (루이제) 와 호머의 번역으로 이름이 나있고 휠티는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하여 동인들 중에서 詩才가 가장 뛰어났다.5) Goethe의 Jugendlyrik이 Sturm und Drang 문학에서 지니는 의의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세계문학사의 거인 중 한 사람인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프르트 (Frankfurt)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는 성실한 기질을, 어머니에게서는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괴테는 부유한 상층 가정의 외아들로서 많은 교양을 쌓으면서 행복하게 소년 시절을 보냈다.16세 때 라이프치히(Leipzig) 로 법률(그는 법률보다 문학과 미술에 열중했음)을 공부하기 위해 갔다가 3년 연상인 Kathchen과의 연애를 통해 사람과 사람간의 사랑에 있어서 사회적 계급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괴테는 이 연애에 의한 내면적 폭발로 소년기의 교육으로 덮어져 있던 일종의 외피가 벗겨진 셈이 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서정시와 희곡『사랑의 변덕 (Die Laune des Verliebten)』,『공범 (Die Mitschuldigen)』 등을 썼으나 모두 아나크레온풍을 벗어나지 못한 습작물에 불과하다.Kathchen의 연애 파탄과 지나친 방종 생활이 드디어는 객혈을 초래하게 되었다. 괴테는 이 병으로 인해 스스로 종교 감정을 체득하게 되었고, 경건주의자인 Susanna von Klettenberg과 사귀면서 신비화학(神秘 化學)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1770년 건강을 회복한 21세의 괴테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슈트라스부르크로 떠났다. 전공인 법률은 물론 화학,겼다.
1. 뮌헨속으로 ........뮌헨은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강(江)에 면하여 있으며 면적은 310.59㎢ 이고 인구는 117만 100명(2001)으로 베를린·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로 기후는 서유럽 해양성기후와 동유럽 대륙성기후의 중간형으로 연평균기온 7.9℃, 연강수량 910㎜이다.2. 뮌헨의 역사.......뮌헨’이란 이름은 본래 ‘작은 수도사(修道士)’라는 뜻으로 12세기 중엽 바바로사 황제가 주요 산물인 소금을 거래하고 이웃 도시와의 상업계약을 이곳에 끌어들인 후부터 상업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다.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수도사들에게 잘츠부르크로부터 이자르강에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듬해 이자르강을 건너는 다리가 건설되었고 시장 주위로는 성이 구축되었다.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이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14세기 말~15세기 초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치하에서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1618∼1648) 중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고(1632), 1634년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1825~1848년 재위에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으며, 그가 선임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하여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도시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비텔스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인 맥주 창고는 아직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1938년 9월 에는 독일의 뮌헨에서 나치스 독일의 수데텐란트 병합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국이 개최한 뮌헨 회담이 열리기도 했다.1972년에는 제 20회 올림픽이 뮌헨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는데 올림픽이 종반을 향해 치닫던 9월 5일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가 인질극을 벌여 이후의 경기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3. 뮌헨의 지금......지금의 뮌헨은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양조업을 비롯하여 광학정밀기기 ·전기 ·자동차 ·기계 ·화학 ·직물 ·제지 ·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또 남부 독일의 철도 요지로, 3개의 아우토반(고속도로)이 지나고, 국내는 물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 방면으로 통하는 국제열차가 발착한다.시의 동쪽 10 km 지점에 있는 리임 공항은 거의 모든 국제선과 연결된다.또한 뮌헨은 예술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며, 시내에는 대학 ·연구소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과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클래식 등의 건축물이 많다.독일 최대의 종합대학인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뮌헨대학)을 비롯하여 공과대학, 정치대학, 조형미술대학, 주립음악대학,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등이 있으며,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비롯하여 많은 연구소가 있다. 그 밖에 바이에른국립박물관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있으며,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바이에른 관현악단이 유명하다.4. 뮌헨을 여행하기전에....교통 항공으로 뮌헨에 도착하려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들어가야 하며 프랑크푸르트에서 항공을 갈아타고, 뮌헨 공항에 도착하면 시내까지는 공항 S-Bahn 역에서 S-8번선을 타고 시내 중심에 있는 마리엔 광장(Marienplatz)이나 뮌헨 중앙역(Muichen Hauptbahnhof)으로 올 수 있다. 기차는 매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으며, 트램, S-Bahn(전철), U-Bahn(지하철) 등이 수시로 운행되고 있다.기차역에는 여행안내소, 우체국, 은행 등의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으며, 기차예약, 스케줄 확인 등 모든 면에서 유럽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뮌헨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되어 있어서 여행지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부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좋다.뮌헨을 여행하려면 뮌헨의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거의 대부분의 관광 명소를 갈수 있어 편리하다. 1972년 뮌헨올림픽과 함께 개통된 뮌헨의 지하철 노선망은 뮌헨 여행안내소나 기차안내소에서 무료로 주어지는 지하철노선도만 가지고 있으면 시내든 시외든 원하는 모든 곳으로 아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뮌헨의 지하철 노선도는 우반(U-Bahn;지하철)과 에스반(S-Bahn)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S-Bahn은 독일 철로망의 한 부분이어서 유레일패스 소지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U-Bahn의 경우는 지하철 역에 있는 녹색 자동검표기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뮌헨의 지하철은 검표원이 없지만 종종 검표가 이루어지므로 티켓은 반드시 구입하는 것이 좋다. 유레일패스가 없는 경우는 하루동안 지하철, 트램, 버스 등을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는 1일카드(Tageskarte)를 구입하는 것이 경제적이다.여행안내소 중앙여행안내소(Fremdenverkehsamt: 프렘덴페어케어스암트)는 바이어 거리(Bayerstrasse)로 나가는 남쪽 출구쪽에 있다. 시내지도를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여행안내소는 뮌헨 공항에 있다.쇼핑 뮌헨은 독일 패션의 중심지로 많은 백화점과 부티크 등이 몰려있다. 그 중에서도 구시가의 칼 광장(Karlsplatz)에서 시청까지 이어지는 약 1㎞의 거리는 보행자들의 천국으로, 주로 주변에 매력적인 부티크와 백화점들이 있다. 쇼핑에 가장 적합한 곳은 백화점이다. 그 중 Hertie(기차역 건너편), karstadt(Neuhauser Strasse 44), Kaufhof(Karlsplatz 21~2앙역 주변과 근처의 쉴러 거리(Shillerstrasse)를 따라 모여있다. 이 주변을 거닐다 보면 자신에 맞는 숙소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팬션은 영국의 B&B와 같은 곳으로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해준다. 요금은 호텔보다 저렴하다. 기차역에 있는 여행안내소에서는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숙소를 예약해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호텔들은 4월에서 10월 사이에는 성수기 요금을 받는다.5.뮌헨의 관광지마리엔 광장(Marienplatz) 기차역 남쪽 출구(여행안내소가 있는 쪽)로 나와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어가면 시내로 들어가는 관문인 칼 광장(Karlplatz)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시가의 보행자도로를 따라 뮌헨의 유명한 건축물들과 백화점들, 노상공연 등을 둘러보며 걷다보면 마리엔 광장(Marienplatz)에 도착하게 된다. 광장에 신.구시청사가 있으며 광장의 서쪽에는 쌍탑의 15세기 고딕식 교회인 프라우엔 교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성 피터 교회가 있다. 이곳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엔 광장이나 신시청사의 시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뒤편에는 빅투알렌(Viktualienmarkt) 야외 시장을 둘러볼 수 있다.또한 신시청사 벽면의 인형시계는 뮌헨의 명물로 오전 11시에 음악을 연주한다. 처음에는 서글프고 비장한 음악이 연주된다. 그리고 잠시 끊어진 음악소리는 용솟음치는 음악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잠시 끊었다가 이제는 축제풍의 음악으로 바뀐다. 이때 시계 안에 있는 8개의 인형무용수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소요시간은 5분 정도인데, 짧은 연주지만 마치 독일인들의 목소리를 대변이라도 하듯 청중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호프브로이 하우스(Hofbrauhaus)호프브로이하우스(Hofbrauhaus)마리엔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걸어서 갈 수도 있다. 궁정 맥주 양조장을 의미하는데 현재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위치가 옛날의 양조장 자리였다. 이곳은 또한, 히틀러가 때때로 이 비어홀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군중 집회를 서면,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앉을 자리가 없을 때도 많다. 안주는 미리 사서 가면 절약할 수 있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브라스밴드를 만날 수 있다. 특히, 밤 9시경에 이 술집은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며 연주자중에 한 분이 한국인과 결혼을 해서 우리의 '아리랑'을 들을 수 있기도 하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맥주를 실컷 마실 수 있는 곳이다.독일박물관(Deutsche Museum)독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과학박물관으로 1925년 문을 열었다.이자르 강 한가운데에 있는 이 박물관은4만 5천 평방미터의 넓은 전시장에과학 기술에 관한 흥미있는 전시물들이30개의 방으로 나뉘어 진열되고 있다.1909년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엔진 비행기, 1939년에 만들어진 전투기Me 109 등 항공부문의 전시물 그리고선박, 자동차, 인쇄기 등 갖가지 과학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것을다 보려면 16㎞를 걸어야 하고한달동안 매일 8시간을 방문해야만 한다.이곳에 가려면 마리엔 광장에서 걸어갈수 도 있으나 S-bahn을 타고 가면 한정거장 다음역인 Isartor역에서 내리면 된다.레지던츠(Residenz)마리엔 광장에서 약간 떨어진 막스 요제프 광장을 둘러싼 듯한 모습의 레지덴츠는 문자 그대로 바이에른의 비테르스바흐 가문의 궁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오랫동안 뮌헨의 문화와 예술울 주도해 왔던 궁전의 홀들은 현재 박물관과 보물관, 화폐수집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16세기 때 조성된 르네상스식의 넓은 홀인 안티콰리움(Antiquarium)이 있는데 궁전 내에서 가장 오래된 홀로 알브레히트 5세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고대 그리스, 로마 풍의 흉상들이 진열되어 있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님펜부르크 궁전(Nymphenbrug Palace)독일 최대의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독일제국 시절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별궁이다. 궁전 내부 입장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특히 궁전 뒤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