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마왕퇴 1, 2, 3호 무덤의 구조1971년 12월 문화대혁명기, 주은래와 사인방의 암투 속에 전쟁을 대비, 군인들이 대형 방공호를 파기 시작하였다. 마왕퇴. 정확한 기록도 없이 그저 서한 시대 장사왕 유발, 혹은 그의 어머니 정희와 당희의 이희묘, 또는 오대 초나라 왕 마은의 무덤일 것이라는 속설만 전할 뿐 황량하게 방치된 조그만 구릉 위의 흙무더기 옆이었다. 지하궁전을 발견한 군인들은 혼비백산하였고, 이듬해 발굴 끝에 모든 것이 밝혀졌다.마왕퇴는 호남성 장사에 위치하며 외형은 높이 5장(장: 3.3m)쯤 된는 흙언덕 2개로 되어 있었다.1. 마왕퇴 1호묘무덤입구부터 아래까지 한 층씩 쌓은 흙계단이 있었고, 층마다 계단의 높이와 너비는 1m 전후였다. 한 층씩 내려갈 때마다 무덤 둘레가 사방 1m씩 줄어들었으며, 전체 구덩이는 깔때기 모양으로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무덤 입구에서 밑바닥까지 모두 오화토로 채워져 있고, 40여cm마다 한 번씩 흙을 단단하게 다져 놓았으며, 이렇게 다져진 흙이 모두 30여 층인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지름 6cm의 원형으로 다져진 자국이 빽빽하게 겹쳐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무덤을 만든 이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비나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하려는 장치일 수도 있었다.흙이 차례로 정리 된 뒤, 관곽 바깥층의 백고니가 큼직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고니는 미정고령토라고도 하는데, 푸른 기를 띤 흰색의 흙으로 찹쌀떡처럼 부드럽고 끈적끈적하다. 이 무덤의 백고니 두께는 1.3m에 달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고니 아래에서 검은 숯이 나온 것이다. 숯은 백고니와 마찬가지로 상하 좌우로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관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숯의 두께는 40~50cm였고 그 무게도 1만여 근이나 되었다.백고니의 효능이 마치 계란 껍질처럼 계란 노른자로 비유될 수 있는 관곽을 보호해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빗물의 침습을 막는 것이라면, 주위를 두르고 있는 이 숯은 마치 계란의 희자위처럼다. 이미 발굴된 제왕의 능묘들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벽돌 기초 위에 다른 석재를 첨가하여 벽돌이 혼합된 구조를 이루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이르면 제왕의 묘실은 더욱 웅대해지고 완비된다. 이미 발굴된 명나라 13릉의 정릉과 대외에 개방된 청나라 동릉의 지하 건축이 이러한 웅대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그렇다면 왜 정자형의 묘실을 만들었을까? 어떤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것은 주로 옛날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또한 죽은 뒤에는 또 다른 세계에서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생산도구와 일용품, 그리도 생전에 애호하던 물건을 무덤에 함께 놓도록 만들었다. 죽은 사람이 더 잘 지내게 하려고, 후손은 부장의 방식으로 이 물건들을 그들에게 보낸다. 마왕퇴 지하의 묘실은 배치는 물론이고 그 부장품이 바로 이러한 영혼 불멸의 관념이 인류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중국 고대 귀족의 궁전 및 무덤 주인의 일상 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지하 궁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정자형 곽실을 지하 궁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곽의 전체 배치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중앙에는 무덤 주인의 관이 있으며, 나중에 관을 열었을 때 무덤 주인의 머리는 북쪽을 향해 있고 발은 남쪽을 향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살아 있을 때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지는 형식과 같다. 그 주위의 4개의 변상은 각기 다른 방이다. 즉, 북쪽의 변상은 무덤 쥐인의 응접실과 거실로 보이며, 오랫동안 생활하던 곳으로 역시 정전(正殿: 왕이 조회를 연 궁전) 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무덤 주인이 주로 기거하던 곳이기에 특별히 커서 다른 변상보다 두 배 가량 크다. 배치하는 것도 다른 변상보다 더 신경을 썼고, 호사스럽게 바닥에 대나무 자리를 덤 입구에서 백고니층까지의 깊이는 약 6.5m였다.1호묘와 마찬가지로 3호묘의 곽실 주위도 청색 백고니와 숯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청색 백고니층은 대개 깊이가 60~70cm이고, 어떤 곳은 10cm로 얇았다. 그리고 두께 15~30cm에 이르는 다량의 숯을 파내자 새 것처럼 빛나는 엷은 황색 죽석이 드러났다. 크기는 약 25㎡였다. 그 아래에는 관곽이 드러났으며, 관곽 판자는 모두 세 개인데, 한겹의 천장 판자와 두 겹의 뚜껑 판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장 판자는 매우 얇아 두께가 6cm를 조금 넘었으며, 뚜껑 판자는 두께가 각각 20cm가 넘었다. 이 세 개의 관곽 판자를 뜯어내자 세워져 있는 두께 19cm 정도의 관곽 벽판이 8개 나타났다. 바로 이 8개의 관곽 벽판이 깊이 1.15m의 관실과 4개의 변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배치는 1호묘와 기분적으로 같았으며, 전체적으로 약간 작을 뿐이었다.관실은 길이 2.61m, 너비 1.22m였다. 외관은 그림을 새기거나 천을 붙인 무늬가 없는 소관으로 짙은 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전체 외관은 길이 2.57m, 너비 1.16m, 높이 1.13m로 그 규모가 1호묘의 외관보다 훨씬 작았다. 남쪽 변상은 너비 41cm, 북쪽 변상은 너비 94cm이고 길이는 모두 2.87cm였다. 동서 양쪽의 변상은 너비는 모두 62cm, 길이는 2.63m로 크기가 같았다.3호묘의 관을 측량해 보니 외관은 길이 2.57m, 너비 1.16m, 높이 1.13m로 1호묘보다 확연히 작았다. 두 번째 겹의 관은 길이 2.34m, 너비 92cm, 높이 88cm였다. 외관과 두 번째 관은 모두 전체적으로 무늬 없이 겉에는 짙은 갈색으로 옻칠이 되어 있고 안에는 붉은 옻칠이 되어 있었다. 세 번째 관은 외부가 옻칠이 되어 있었고, 비단끈이 두 줄 감겨 있었으며, 비단실로 주위를 장식한 수예품이 가득 붙어 있었다. 관 전체의 길이는 2.14m, 너비는 0.72m, 높이는 0.67m였으면, 관 뚜껑에는 T'자형 백화가 한 폭 덮여 있었다.3호묘에서는 칠을 한 종(손잡이 없는 작은 술잔), 옻칠을 한 방(고대의 술을 담는 네모난 그릇), 옻칠을 한 호(술병), 주사·붉은 옻칠·검은 옻칠로 군행주 라는 세 글자를 써 넣은 옻칠을 한 이배(좌우에 귀와 같은 손잡이가 달린 타윈형의 잔)들과 옻칠을 한 치배(고대의 바닥이 둥근 술잔)가 놓여 있었다.이 밖에도 칠기 세트 위에는 대부분 붉은 옻칠이나 검은 옻칠로 군행식 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군행주 와 군행식 은 손님들에게 술 마시고 밥 먹으라는 인사말 같다. 따라서 머리쪽의 상자는 무덤 주인이 생전에 기거하고 가무와 연회를 즐기던 생활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동쪽 변상에는 312개의 죽간(대나무로 엮어 만든 서책)이 놓여 있었다. 죽간에는 1000여 개에 달하는 부장품의 명칭·품질·크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견책 이라고 불리는 이것들은 무덤 안에 있는 모든 부장품의 명세서이다.이것 외에도 목용 6개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면옷을 입은 가승 이 있었다. 그것들의 다리 아래에는 관인 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형상과 문자로 추측해 보면 오늘날의 집사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 집사의 주위에는 59개의 서 있는 입용이 있는데, 일반적인 가정의 고용인 같다. 이 인형들 주위에는 정(옛날에 발이 셋 있고 귀가 둘 달린, 음식을 익히는데 쓰인 솥)·합(뚜껑이 있는 둥글넓적한 작은 그릇)·관(항아리)등의 칠기와 도기가 흩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종류가 많고 광채가 뛰어나서 무덤 주인이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 때 사용한 그릇과 도구들 같으며, 참으로 보기 드문 진귀한 유물이었다.남쪽에 있는 상자 안의 물건들은 보통 수준의 것들로 보이며, 가승 하나가 39개의 입용을 거느리고 있었다. 종, 방, 부(가마솥), 중(시루) 등이 함께 있어 무덤 주인의 주방과 노비가 사는 곳으로 보였다.서쪽에 있는 상자는 약간 특수한데, 무덤 주인의 저장실 같기도 하고 지세 창고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안에 커다란 대나무 고리짝인 죽사 33개가 쌓여 있고, 죽사를 새끼줄로 묶고 매듭지은무릎을 꿇은 채 양손은 좌우로 벌리고 있었다. 왼쪽의 인형 역시 꿇어앉은 모양이었으며, 높은 콧대와 둥글게 부릅뜬 눈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이 인형들은 저승 세계의 수문장으로 추측하며, 토백이라고 불렀다. 토백은 풀을 진흙에 섞어 감아서 만들었으며, 이는 남방 초나라의 풍습으로, 한나라 시대 초까지 사용된 초나라의 장례 풍습으로 추정하고 있다.구덩이의 안쪽에는 한나라 기와와 서한 문제때 사용된 동전인 사수반냥전이 나왔으며, 북쪽 벽에서 새 것처럼 완전한 철구목삽(삽의 날 앞부분만 쇠로 된 나무 삽)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중국 고고학상 최초의 발견이였다. 철구목삽이 발겨되고 거의 동시에 손잡이가 양쪽에 달린 둥근 대나무 광주리가 발견되었다.철구목삽은 지금은 철초(쇠가래)라고 부르는데 전체 길이가 139.5cm였다. 무게는 1.5kg정도이며, 철구목삽의 앞부분은 요(凹)자 모양으로 쇠르 부어 만든 것으로 감정되었다. 날의 너비는 13.5cm이고 높이는 11cm였다. 삽의 손잡이와 삽면은 화향수로 만들었다. 날 구명의 왼쪽이 오른쪽보다 약간 넓고, 왼쪽 부분에 삼각형 뿔이 튀어나와 힘을 쓰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또한 날면은 좁고 길어 진흙 덩어리나 연못의 진흙 등 찰진 점토를 파는 데 알맞게 되어 있었다. 날면에는 분명하게 오(五)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공구 번호인 듯했다.이어서 1호묘와 마친가지로 변상에 많은 유물들이 나왔으며 이 유물들을 정리해보면,1.병기 : 무덤 속에서 출토된 병기는 모두 38점이다. 활, 노(쇠뇌), 시(화살)와 시복(화살통)·병기가(병기걸이)·검과 과와 모 등이다. 이러한 병기는 1호묘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옻칠을 한 나무 활이 두 점 있다. 한 점은 전체 길이 1.45m, 중간은 직선이고 양끝이 휘었다. 두 개의 나무 조각을 겹쳐 실을 감아 옻칠을 해서 만들었고, 옻칠을 한 후에는 다시 실을 단단히 감았다. 이 활은 쇠뇌와 짝을 이뤄 출토되었다. 다른 한 점의 나무 활은 전체 길이가 1.42m이고, 활시위가 아직 남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