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북한 환경 변화에 따른 북한의 대남 정책 변화Ⅰ. 서론북한의 대외 정책은 경제난에 따른 대외 의존성 심화로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바로 ‘脫냉전시대의 적응’이다. 대남 정책에서의 탈냉전적 지향은 1 북미(일) 관계 개선의 장기화로 당면 경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고, 2 북한이 준비하고 있는 개방 정책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새정부 들어 보여주고 있는 북한의 ‘조건부 대화 용의’는 북한 국내 정치의 과도기적 상황과 의제 연계 전략을 통해 남북 관계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책 변화에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과 정책 유지로 인한 위기의 심화 가운데서 북한은 대남 정책의 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무역법의 제정과 남포와 원산을 보세 가공 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남북 경협 활성화에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협력적 대남 정책을 유도할 수 있는 한국의 대북 정책이 요구된다. 첫째, 남북한의 ‘적대적 의존’을 추구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고 ‘협력적 공존’의 불가피성을 조기에 정착시켜야 한다. 둘째,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기 보다는 남북 관계의 제도적 발전을 우선하는 장기적이고 인내를 가진 정책이 필요하다.Ⅱ.본론1. 냉전의 환상: 북한의 대남 정책은 고정불변인가?지난 5 년의 남북 관계는 ‘남북한 당사자 관계’(1991년 남북합의서 체결 국면)에서 ‘북미 양자 관계’(1994년 북미제네바합의)로 전환했다. 새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남북한은 다시 ‘당사자 관계’의 회복을 위한 입장 조율을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국면에서 한반도 문제가 상당 부분 국제화되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남북한 관계 개선이 없는 국제화 구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도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 또한 알고 있으며, 한미일남방삼각체제의 대북 공조 역시 새정부 들어 보다 확고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북한이다. 북한이 남한의 전향적 대북 정책에 정책 변화는 정책 결정의 대외 의존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북한 경제가 대외 관계에 의존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식량난은 국제 사회의 지원을 통해, 에너지난은 미국이 핵동결의 대가로 지원하는 중유와 경수로 건설을 통해, 그리고 외화난은 수출 증대와 외자 유치를 통해 돌파구가 모색되고 있다. ‘자립’의 이데올로기가 구호로 주장되고 있지만, 경제적 대외 종속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대외 의존성이 심화되면 될수록, 정책 결정의 대외적 민감성은 높아진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의 전통적 주체 외교에서 상상하기 힘든 정책 양보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한 사과, 지원 식량의 전용에 대한 사과의 경우가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잠수함 침투 사건 사과는 미국의 경제 제재 완화와 준고위급회담 개최를 약속받기 위한 것이고, 지원 식량의 전용에 대해 사과한 것은 그만큼 국제 사회의 식량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그러면 그동안 대미 정책에서 보여준 ‘탈냉전적 적응’은 대남 정책에서도 나타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현재의 국면이 대남 관계에서도 북한의 탈냉전적 지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2. 북한의 대남 정책 결정의 구조북한의 대남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전통적인 연구들은 북한의 의지를 강조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제약 상황의 정책 능력이다. 북한의 대남 정책은 크게 두 가지 구조적 제약에 놓여 있다. 하나는 국제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적 차원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대남 정책은 북한의 양 궤도 접근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북미(일) 관계와 남북 관계의 양 궤도 접근이다. 이른바 쟁점이 되고 있는 남한 배제 전략은 북미(일) 관계의 진전 수준과 반비례한다. 이 문제와 관련, 필자는 현재의 정세가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관계에 보다 우위를 두는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북한 내부적으로 개2월에 시작되었지만, 양국간의 청산협정 체결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북일 수교 협상 역시 납치 문제 해결 등 일본내 보수적 여론으로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으로 북한의 입장에서 북미(일) 관계는 단기적인 경제 위기 해소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의 위기는 당면한 문제이고 시간의 문제다. 개방(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와 원산, 남포 등의 보세가공구역)의 실질적 효과가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 진전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향후 북한은 북미(일) 관계와 남북 관계를 병행할 수밖에 없다. 북미 관계를 통해서는 체제 보장책(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포함한 정치·군사적 현안) 확보와 경제 제재 완화를 통한 국제 금융 기구의 차관 도입 등에 우선 순위를 둘 것이다. 하지만, 당면 현안(식량난 해소와 외자 유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다.4. 국내적 차원: 개혁·개방의 딜레마와 대남 정책대남 정책은 북한의 내부적 정책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그 인과 관계는 ‘내부적 통합을 위한 외부적 긴장의 조성’이라는 개념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북한의 적대적 의존 전략을 대남 정책의 본질로 보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인과 관계를 냉전시대의 국면적 현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북한이 지난 5 년간 보여준 선택적 긴장은 북한이 처한 과도기적 상황의 산물이다. 여기서 과도기란 정치에서 김정일후계체제 이행의 과도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경제에서 정책 선택의 과도기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김일성 사후 당·국가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 전원회의나, 최고인민회의가 열리지 않고 있으며, 국가주석을 비롯한 당·정·군의 많은 직책들이 공석이다경제 정책의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 변화가 가져올 성과와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의 관계를 계산하는 것이다. 현재 북한 내부적으로 개혁·개방의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나, 현존 체제의 특성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선택적 긴장’을 끊임없이 유발한 것도 이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선택적 긴장을 통해 개방의 속도를 조절해왔다. 하지만, 위기의 심화 상황에서 정책적 양보는 보다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정책 변화에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과 정책 유지로 인한 위기의 심화,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정책 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도부의 의지보다 구조적 압력이 더욱 중요한 변수라는 점이다.물론, 이 과정에서 정책 변화를 둘러싼 엘리트간 갈등 양상도 드러날 것이다. 이미 잠수함 사건 사과 국면과 4者회담 수용 과정에서 외교부와 군부의 갈등이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갈등은 대외 관계 개선이 한미 양국의 연계 정책에 따라 군사적 투명성을 양보해야만 하는데, 대외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외교부와 군사적 투명성을 거부하는 군부 사이에 입장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에서도 전통적인 대남 엘리트와 경제 외교 엘리트간의 정책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쟁 관계의 결과는 북한 내부의 정책 조정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외교 상대자가 제공할 수 있는 협상의 대가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대북 정책 방향이 북한내 관료적 경쟁의 결과에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5. 탈냉전시대 북한의 대남 정책북한은 남북 관계에서도 양 궤도 접근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 관계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경제 협력은 보다 전향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당국자간 관계 역시 경제적 지원(비료 및 식량 지원 등)과 관련된 현안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적 현안 문제 논의는 소극적으로 응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정치적 관계는 경제적 관계의 진전 속도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6. 정치 관계: 대화의 모색남북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새정부 출범 이후 남북한은 제안을 통해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김대중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우리는 어떠한 수준의 대화에도 등이다. 이후 북한은 남한측이 자신들의 대남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해왔다.사실, 북한이 내세우는 국가보안법 철폐나 안기부 해체 주장은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내정 간섭적 현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부 대화 용의’를 표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서다. 속도 조절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북한 국내 사정때문이다. 정치적 과도기가 종료되지 않았고, 황장엽 망명 이후 지속된 대남 파트의 정비 역시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만간 예상되는 김정일의 국가주석직 취임을 계기로 북한은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대남 협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는 의제 연계 전략을 통해 남북 관계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남쪽의 대응에 따라 이러한 조건들이 ‘의제’가 될 수도 있고, 조율 과정에서의 임시적 명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 화해 협력을 추구한다면, 이에 대해 화답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7. 경제적 관계: 개방의 확대와 남북 경협의 불가피성1) 북한의 IMF의 영향과 대남 경협의 불가피성북한은 신정권 출범과 이에 따른 경협 확대를 예상해왔다. 1998년 경제 계획 작성에서도 이 점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IMF 상황은 북한의 대외 경제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대외 무역의 침체이고, 둘째는 남북 경협의 축소이다. 먼저 아시아의 외환 위기는 북한의 전체 교역액 가운데 아시아 수출액이 74∼75%임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본격적인 경제 개발을 위한 외자 유치 전략에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의 신용 위기는 유럽 은행들의 대출 심사를 더욱 까다롭게 할 것으로 예상되며, 동남아로부터의 외자 유치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에 진출해 있는 홍콩, 태국 기업들의 추가 투자 역시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높다.둘째, IM보인다.
辛亥革命의화단사건 이후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혁명운동이 확산되었다. 1911년 10월 무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자 청조에 실망하고 있던 입헌파 신사가 혁명에 가담하였다. 청조의 고관 원세개가 혁명군과 타협하여 청조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총통이 되어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으나 원세개의 독재와 제제운동으로 민국초의 정치정세는 불안정하였다.Ⅰ. 혁명운동과 혁명정세의 발전1. 혁명운동의 흥기혁명운동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패색이 짙어가던 중에 망국의 위기의식을 느낀 손문* 등이 청조로는 이러한 위기를 막아낼 수 없으니 그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하와이에서 흥중 회(興中會)라는 비밀결사를 만든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손문은 다음해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민중을 동원하여 광주성을 무장점령하려는 최초의 반청봉기를 계획하였다.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 후 망명길에 오른 손문{) 손문(1866-1925):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손문은 광동성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서 구식 의학교육을 받았다. 흥중회와 동맹회를 조직하고 삼민주의라는 혁명이론을 갖춘 혁 명운 동의 지도자였으나 국내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신해혁명에서 청조를 몰아내기 위해 원 세개 와 타협하여 총통직을 양보하였다. 말년에 연소용공의 방침을 내세우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과 합작하여 남방에 혁명근거지를 마련하였으나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은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는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억류에서 풀려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며 삼민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을 연구를 하였다.1900년 의화단사건을 전후하여 손문은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하여 양광(兩廣)지방을 독립 시키려는 모의를 하다 실패하였다. 이어 광동성 혜주(惠州)에서의 봉기를 조직하여 한때 2 만여 명이나 모을 수 있었으나 외부지원의 두절로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이렇게 손문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제한적인 봉기를 도모하고 있던 중에 일어난 의 화단사건은 청조의 존재 보(民報)}를 창간하여 혁명선전에 몰두하였다. {민보} 의 발간사 등을 통하여 손문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라는 혁명의 지도적인 이론을 내세웠다. 민족주의란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이고 민권주 의는 전제지배의 타도와 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민생주의는 지권의 평균 즉 천하의 땅값을 일정하게 하고 현재의 땅값은 소유자에게 갖게 하되 혁명후 오르게 된 땅값은 국가에게 돌아가게 하여 빈부격차가 없는 사회혁명을 이룩하여 집집마다 풍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에서 반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민권주의도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민생주의에서도 공상적인 성향이 다분하고 농촌의 토지문제에 대 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등 한계를 내포하고는 있었지만 삼민주의는 당시로서는 가장 체계적으로 정비된 수준을 갖춘 혁명이론이었다.손문은 또 혁명을 전개해 나갈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하였다. 첫 단계는 군법의 통치기 로서 혁명군이 군법을 가지고 지방행정을 총람하며 청조 치하의 모든 폐단을 일소하고 건 설사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최대한 3년으로 잡고 그 이전에라도 성과가 달성되면 다음 단계인 약법(초보적인 기본법)의 단계로 들어가 약법에 따라 지방자치를 하기로 하였다. 약법의 시기는 6년을 한도로 하고 그 다음에 헌법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헌법단계에서 비로소 혁명군의 군사, 행정권이 폐기되고 국민이 대총통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비현실적이기는 하였지만 혁명운동의 방향을 세밀하게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이와같은 동맹회의 혁명이론은 무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강유위등 보황회와의 치 열한 논전을 거치면서 정립된 것이었다. {민보}와 보황회의 기관지 {신민총보(新民叢報)} 지상에서 만주족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이 필요한가의 여부, 폭력에 의한 공화정부의 수립이냐 아니면 권고와 요구에 의한 입헌정부 수립이냐의 문제, 손문의 민생주의를 둘러싼 논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조는 의화단 이후 혼미를 거듭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혁명적인 정세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3. 혁명정세의 발전의화단운동의 참혹한 결과에 직면한 청조는 보수적인 배외운동으로는 열강을 중국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1901년 1월 신식 개혁정치 곧 신정(新 政)을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중앙에서는 신식군대의 창설 등을 추진하고 지방에서는 신식 학교의 설립, 산업진흥 등을 추진하였다. 신정의 과정에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국내의 신식교육이 발전하고 일본으로 유학가는 학생수가 크게 늘었다. 이제 관리가 되려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식교육을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식교육이나 유학의 비용은 과거시험 준비보다 훨씬 비쌌으므로 과거를 준비하던 상당수 의 사람들은 새로 편성중인 신식군대로 들어갔다.이러한 신정은 제도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입헌제의 내용이 빠져 있었으므로 청말 이래로 지방분치(分治)와 지방의회에의 참여를 통해 정치참여를 추구해오던 신사층은 입헌론을 활발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마침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입헌운동은 활기를 띄고 고위관리들까지 입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1905년 12월 청조는 다섯 명의 고위관리를 외국에 보내 헌정 실태를 고찰시켰다. 다음해 7월에 귀국한 이들 관리는 속히 입헌을 하겠다는 의지를 포고하고 5년 안 에 입헌정체를 갖추도록 진언하였다. 청조는 헌정준비에 착수하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청조는 입헌을 추진함으로써 혁명세력의 기세를 꺾고 아울러 중앙집권적인 황제 권력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입헌 준비작업의 하나로 추진된 관제개혁의 방향에서 재정, 군사적인 중앙집권화의 방향이 명확히 드러났다. 입헌 준비방침에 따라 개설된 자의 국의 기능도 입헌파 신사들이 생각하던 지방자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방행정의 자문기 구 정도로 격하되었다.1908년에 청조가 9년 뒤의 국회개설을 골자로 하는 미을 필두로 일어난 철도 국유화 반대운동 중에도 가장 격렬했던 것은 사천성의 운동이었다.사천성에서는 철도부설을 위해 모금한 주식총액이 가장 많았던 데다 일반인으로부터 강 제로 징수한 성격의 주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기왕의 모금액 중 일부를 예금해 두었던 구식은행들이 공황으로 파산하였고 이 손실분을 주식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상하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사천에서는 철도국유화에 반대하여 철도를 지키자는 운동이 전 성에 번졌고 이 운동을 청조가 강경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 명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각지에서 무장군중이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는 폭동을 벌이자 청조는 호북성의 군대를 사천으로 보내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고 사천의 상황이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북성 무창에서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다.중국 내의 혁명적 정세는 이와같은 입헌파 신사의 입헌운동과 이권회수운동 등을 통해 조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의 전쟁비용과 배상금을 갚기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의 원리금 상환액으로 인해 이미 재정적 부담이 큰 상황에서 엄청난 액수의 의화단 배상금이 부가되자 청조는 재정적자에 직면하였다. 결국 이러한 재정부담은 세금증가로 이어져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늘렸다. 신정을 선포한 이후로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세액이 부과되었으므로 일반민에게는 신정이 당장의 경제적 고통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결국 여러가지 명목의 잡다한 세금 징수 및 기타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 청조 말기에는 소작료 반대투쟁, 미곡 약탈 폭동, 굶주린 백성들의 폭동, 신정 반대와 학교 파괴 폭동, 반기독교와 청조타도를 내세운 폭동 등 하층민중의 다양한 종류의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와같은 민중폭동은 그 자체가 혁명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혁명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Ⅱ. 신해혁명의 전개1. 무창봉기와 남경임시정부1911년 10월 10일 호북성의 중심도시인 무창(武昌)에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총통에 취임한 손문은 내각을 구성하였지만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나 군사력 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각료들도 강소, 절강지방의 인물들이 우세하였다. 내각 구성후 개원한 임시참의원에서는 임시약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러나 손문의 임시정부는 출발부터가 임시적인 것이었다. 청조의 전권을 위임받은 원세개가 화의의 제안을 해왔고 독립한 각성 대표들은 원세개가 공화제를 찬성하면 그를 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던 터였으므로 대세가 남북의화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던 손문은 적자를 면치 못하는 남경정부의 재정상태로 보아도 남북의화의 대세를 거스르고 계속적인 전쟁을 통한 혁명 완수를 주장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2. 남북의화와 중화민국의 수립무창봉기가 성공하자 청조가 진압군으로 내려보낸 음창 휘하의 제1군이나 대기시킨 풍국 장 휘하의 제2군은 모두 원세개가 오래동안 양성해온 장교들의 지휘하에 있었다. 군사, 정 치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한인관료 원세개는 2년 전 순친왕이 섭정을 맡아 황족 중심 의 집권화를 도모하는 데 걸림돌로 여겨져서 강제로 발병(足疾)을 치유하라는 명목으로 고 향으로 돌아가라는 처분을 받고 북경에서 쫓겨나 있었다. 청조는 혁명진압군의 장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원로 황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열강의 신임도 얻고 있던 원세개를 기용하여 난국에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14일 청조는 원세개를 호광(湖廣)총독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정치, 군사의 대권을 장악 하고자 하고 있던 원세개는 발병이 다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는 동안 음창의 진압군이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반면 호남, 섬서, 강서가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 의 기운이 화북지방으로 옮겨올 기미를 보이자 청조는 원세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의 전권을 장악하게 하였다(10.27). 원세개의 요청에 따라 제1군은 풍국장, 제2군은 단기서(段祺瑞)의 휘하에 들어갔다. 전황은 조금씩 청군에게 유리해져 29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