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오 리얼리즘의 배경네오 리얼리즘을 알기 이전에, 우선 이탈리아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무성영화의 황금시대였던 이 때, 가장 주목을 받았던 영화는 1908년에 제작한 로부터 1913년 피에로 포스코가 감독한 등이다.특히 는 작품의 거대한 규모와 주인공의 연기, 이동촬영과 클로즈업 등의 영화기법으로 영화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이때부터 대중의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아름다운 자태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의 성공을 계기로 사극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현대극이 등장한다. 또 이때부터 소수의 스타에 의존하는 영화에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로 흐름이 구분된다.제 1차 세계대전이후 독일과 미국의 영화가 이탈리아 영화의 영역을 잠식하고 국내 정치적으로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이탈리아 영화는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외국영화의 공세탓도 있지만 파시즘의 독재체제가 무솔리니의 입맛에 맞는 국책영화를 추진하다보니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범죄와 비도덕적인 것이 영화에 담겨서는 안된다는 지침을 내려 놓았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었으며 오직 이탈리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웅대한 대하 사극물과 감상적인 상류 계급 멜로 드라마 -후에 ‘백색 전화 영화 white telephone movie’ 라고 불린- 의 제작에 편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면 좋은 현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설립되고 ‘이탈리아 영화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훨씬 중요한 것으로 몇몇 영화 감독들이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면에서 파시즘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네오 리얼리즘의 존재는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처들에 대해 이들 감독들이 느꼈던 불만에도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그래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1942년작 을 네오 리얼리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스콘티도 1930년대 프랑스배우의 기용과 야외 촬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특징적 스타일-*현장작업(야외촬영,자연조명,즉흥연출) : 전쟁으로인한 제작환경의 부실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거리로 내몰았고 거기서 야외촬영과 자연광 선호의 전통이 싹트게 된다.이것은 뒤에 나오는 다른 특징들과 함께 다큐멘터리식의 사실적인 영상으로 네오리얼리즘을 규정짓게 하는 요인이 된다.*비직업적 배우 : 생생하고 사실적인 이모나 행동을 위하여 비직업 배우들을 다수 기용*후시 녹음 : 이탈리아 영화의 관행이기도 한 후시녹음은 소수의 제작진으로 현장 촬영을 가능하게 했다.*서사형식 : 이전의 전통에 반발하여 느슨한 서사 연결이나 열린 구조를 선호하였다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사물을 보이는 것처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허구보다는 사실을 , 고상한영웅보다는 평범한 사람들, 낭만적인 환상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네오리얼리즘의 가장 핵심적인 의의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주체적인 참여를통해 영화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위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밖에 없다. 비스콘티의 는 문학 작품을 각색했고 는 스타 배우 안나 마냐니를 기용하고 3개의 소형 스튜디오 세트를 사용해 조건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1945년 치네치타는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고 녹음 기재는 귀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촬영은 실제 장소에 의존했고 그들의 영상은 기록 영화처럼 거칠었다. 로셀리니의 역시 성질이 다른 자투리 필름들로 촬영되었다. 또한 거리나 건물 내에서의 촬영은 이탈리아 촬영 기사들로 하여금 헐리우드 삼점 조명 체계와는 다른 가능한 조명 상황으로 촬영하게 했다. 대사를 후시 녹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독들은 소수의 스탭으로 현장 촬영과 카메라 움직임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러한 현장 작업이 허용하는 연기와 배경에 대한 즉흥적인 결정은 미장센과 카메라 움직임에 어느 정도 자부대가 로마에 입성하기 전이며 여전히 독일의 통제하에 있던 때였다. 롯셀리니는 다양한 원천으로 재원을 끌어모아 비밀리에 영화를 만들었는데, 돈은 계속 부족했고 제작 조건은 믿을 수 없이 원시적이었다. 기술적이고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다른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동시대의 현실을 다루는 그 개념들과 방법을 추구하도록 고무시키는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나타났다.1934년부터 영화 작업을 해온 롯셀리니는 무솔리니의 정권 아래에서 백색 전화기 영화류의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시나리오 작가인 세르지오 아미다이와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혼란스런 이탈리아의 실상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것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그 거친 아름다움과 강렬한 정서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 앞서는 것이었다.롯셀리니는 곧이어 네오 리얼리스트의 양식과 의도를 갖고 있는 다른 주요한 영화인 을 선보였다. 이 영화는 여섯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정복자들과 피정복자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합군이 취한 군사적 행동을 추적하고 있다. 지도들과 뉴스릴 필름이 부분들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 극적인 삽화들이 더 큰 역사적인 맥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최초의 불신으로부터 점차 친밀한 관계로 진전되는 복잡하고도 가변적인 미국과 이탈리아 관계의 어떤 국면을 스케치하고 있다. 영화 전체는 자발성을 통한 솔직함과 활력을 실현하고 있는데, 롯셀리니의 양식은 제재와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완전하게 견지해 나가는 것이었다.*비토리오 데 시카비토리오 데 시카는 감독이 되기 전 1930년대의 유명한 영화 배우였다. 감독으로서 그의 최초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자바티니와의 첫 공동 작업인 였는데, 비스콘티의 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어느정도 비교가 될만 하였다.전후 네오 리얼리즘의 선상에서, 그는 군인들의 구두를 닦고 뚜쟁이질을 하고 암시장에서 물품을 팔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가 행사하는 상인들에 의해 가난에 시달리는 한 시실리 어부 일가에 대한 영화로, 공산당의 후원을 받아 전적으로 현지에서 야외 촬영되고 비직업 배우를 기용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극단적인 양식화의 형식에 기대고 있는데, 어부들은 조심스럽게 장식적으로 모여있고 그들의 움직임은 안무에 따라 이루어진다. 조명은 풍부한 대비로 정교하며 마치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처럼 조절되고 배치되어 있다. 다른 네오 리얼리스트들의 영화들보다는 그리스 고대 연극에 더 적합할 것 같은 장면들도 보인다.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그의 후속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바로크식 원근도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더욱 정통하였다.*네오리얼리즘 대표작품- 무방비 도시 (1945년, 로베르토 롯셀리니 감독 제작)무방비 도시(Open City) 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서막을 장식했다. 이 영화가 지닌 가치는 영화의 완성도와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인들이 명작으로 간주하고 인정하는 많은 예술작품들과 유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창조된 작품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는다는 조건이다.기존의 예술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인식의 차원을 한 단계 상승시켰던 예술 작품들과 그 속에 담긴 예술가들의 정신은 후대인들의 삶과 사유체제에 커다란 영향을 안겨준다. 그 모든 과정들이 정리된 시점에서 역사를 되짚어 보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사유와 표현들이지만, 그러한 변화와 발전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예술가가 살아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러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이 오늘날 명작의 반열에 올라있는 것이다.영화 '무방비 도시'가 등장했을 무렵인 1940년대까지의 영화사를 돌이켜볼 때,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 하에 제작된 영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촬영된 작품들은 다큐멘터리미주1)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스토리와 플롯에 기반한 서사구조로 짜여지고 편집되어진 상황에서 비밀리에 2년간(1943∼45년) 영화를 만들었다. 다양한 재원을 끌어 모았지만, 제작비는 계속 부족했고, 제작 조건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따라서 스튜디오를 이용할 수 없었고 거의 모든 장면들은 그들이 영화 속에서 재현한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이러한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 훗날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표방하였던 제작 방식의 기초로 작용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특별한 세트를 세우고 조명을 배열하고 카메라가 피사체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일련의 작업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던 유럽의 형식주의적 영화들이나 미국의 고전주의 영화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는 대목이다.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 산물로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롯셀리니가 추구했던 영화적 이념과 이상을 담아내기에는 네오리얼리즘으로 지칭되는 영화제작 방식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특징들이 이 영화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또 다른 차원의 의미 혹은 가치는 영화의 내용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독일의 히틀러가 자국민에게 심어준 몇 가지 이상 혹은 명분들이 이 영화에서 무참하게 반박 당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독일의 이탈리아 점령에 저항하는 세력을 색출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잔혹한 고문행위들의 연속 속에서 파장이 일어나는 자문들이 제시되었던 것이다.인종 우월주의, 세계제패 등의 미사여구로 전국민을 선전, 선동했던 히틀러 정권은 전세계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대의 파병은 인간적 딜레마가 파생되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지휘관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무엇을 위해서 신의 권위에 도전하며, 같은 인간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것인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박한 지휘관들은 주색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그 어느 국가의 군대보다도 맹렬한 위세를 떨쳤던 독일군대의 실체가 이러하다는 진술은 당시 이탈리아 국민에게 강렬한 저항의식과 자립의 필었다.
저는 《아멜리에》를 무척 재밌게 봤어요. 영화를 보며 저만큼 낄낄댄 사람도 아마 없을 것 같네요. 별스럽다는 핀잔을 하도 들어봐서, 평소 같으면 '타인의 취향'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저지만, 이번만큼은 별스럽게도, 재미없었다는 사람에게 눈꼬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렇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랄까 그런 것이 아주 없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게으름 탓에 이 문제를 잠시 잊고 있었지 뭐예요? 얼마 뒤 아래의 글을 읽게 됐고, 느끼는 바가 많았죠. 지진아들 여러분 역시 무척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여기서 잠깐! 제가 초점을 맞춰 읽은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해볼까 하는데... 음, 이 글에 대한 일종의 '추천 사유'라 할 수 있겠네요.첫째, 이 글을 읽으며 제 찜찜함의 정체를 파악하게 됐어요. 영화는 언뜻 보면 보통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아요. 허나 이런저런 상처를 넘어 기이한 성격 중심으로 고정되어진 채 영화 속 사람들이 취급받는 경우를 볼 때면, 드문드문 이상한 생각이 든다는 거죠. 꼭 제 자신 학대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 걸까?둘째, 정치성을 분명히 깔고 있는 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예요. 아래 글의 주장 하나하나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로서는 갸우뚱~ '깨끗한 파리' 운운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세계관까지 끄집어내는 걸 보면서, "영화는 영화다. 정치 팜플렛과 혼동하지 말라. 정치적으로 각성된 눈이 예술적 심미안을 흐려놨어, 쯧쯧."이라 말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그러나 어느 하나의 비평문을 읽을 때 우리가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글의 출발점이 아니라 글의 도달점과 그 간의 궤적에서 드러나는 작품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요.(그 어느 누구도 '그 시작은 미약'한 법이니까요.) 아래 글은 비록 몇몇 '심하다~'를 뺀다면 아주 좋은 글인 것 같아요. 마치 《아멜리에》의 재미를 선전하기 위해 태어났다!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강박증이 묻어나는, 각종 매체에 실린 엄청난 양의 쓰레기 글들과 비교해보시라구요. 아~ 《물랑 루즈》글과도 비교해보심이...셋째, 《엽기적인 그녀》 vs. 《아멜리에》? 저 역시 《엽녀》의 흥행 돌풍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민했었던 것 같은데요, 아래 글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던가 봐요. '反혁명'의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그 날을 위해.넷째, 브루노 뒤몽을 주목하라! 글 끄트머리에 이 프랑스 감독의 이름이 얼핏 스쳐지나가요. 최근에 발표한 《예수의 삶》과 《위마니떼》로서 큰 주목을 받고 있죠. "지진"(zizine)에서도 앞으로 예의주시할 거구요. 여기선 이 두 작품을 직접 만나보실 수 있는 기회를 알려드리려구요. 바로 문화학교 서울(www.cinephile.co.kr)! 앞 작품은 12월 9일(일), 19일(수)에, 뒷 작품은 17일(월)에 상영되요. 저랑 함께 보러 가실래요?《아멜리에 뿔랭의 기이한 운명》(《아멜리에》는 영어제목)은 프랑스 감독 장 삐에르 쥬네의 최신작이다. 그는 《델리카트슨》(1991),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 《에일리언 4》(1997, 원제 : 《부활》)를 연출했다. 깐느 영화제의 '올해의 감독' 프로그램에 참여하길 거부한 《아멜리에》는 프랑스에서 깜짝 성공을 거뒀다. 5월 개봉 후 무려 800만 명이 관람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열광하는 논평들이 쏟아졌다 - 프랑스의 쟈끄 시라크 대통령과 라이오넬 죠스팽 총리 모두 영화에 감격했다는 내용이 빠진 적은 없었다.소소한 일상사를 영상으로 옮기는 감독의 재능엔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만화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영화 경력이 입증되는 바다. 이미지는 삐까뻔쩍이다.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은 늘 도식적이며 설득력이 없다. 《아멜리에》의 교훈은 진부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본 관람객 수가 엄청 많다는 건, 그가 대중의 근지러운 델 살살 긁어줬기때문이다. 이는 충분히 따져볼 만할 가치가 있다.관련되지 않는 일상사의 장면들이 순차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 마리 파리가 자동차에 치이고, 바람에 너풀거리는 흰 천 위로 술잔들이 춤추듯 너울대고, 한 할아배가 죽은 친구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수첩에서 지운다. 그 뒤, 정자 하나가 난자 안으로 찡겨 들어가는 게 현미경에 포착된다. 여주인공 아멜리에가 임신되는 장면이다.정신없이 편집된 장면들을 좇아가보면, 아멜리에는 얘기에서 꼬마가 되어있다. 그녀의 아빠는 의사인데, 진실한 사랑도 할 줄 모르고 살가운 체감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다. 그가 딸아이의 몸에 손을 대는 건 한 달에 한 번 하는 정기 검사 때뿐이다. 어린 딸은 그 때가 너무 드문 경우인지라 당황케 되고, 그녀의 조막만할 심장은 팔딱팔딱 뛰고 만다. 청진기를 아이의 가슴에 대고 있던 아비는 딸애의 심장이 좋지 않으며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시켜 놔야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후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처녀로 성장한 아멜리에(오드리 또뚜 扮)는 몽마르뜨의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등장인물들 모두는 노동자에 가깝지만, 보통의 노동자 모습은 아니다. 그들은 결함, 약점과 깜찍한 괴벽(怪癖)으로 똘똘 뭉쳐 있다 : 야채 가게에서 일하는 외팔이 소년은 과일과 야채를 끔찍이도 아껴하고, 뼈가 쉽게 부서지는 병으로 고생하는 이웃의 늙은 화가는 매년 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으며, 아멜리에를 비롯한 그녀의 식당 동료며 단골들 또한 매한가지 모습이다.정치나 권력의 세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가 가판대에 들러 신문을 산 1997년 9월 1일의 하루 전날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사를 당했다. 그녀에 대한 얘기로 신문과 광고판은 도배된다. 다른 어떤 뉴스거리는 없다. 단번에 아멜리에의 '터무니없으나' 매우 은자(隱者)적인 세계를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 마련돼버린 것이다. 그 세계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찾도록 운명지어진 짝 찾기 여행을 다니는 그녀만을 있을 뿐이다.쥬네 감독이 바라본 파리는 현실 속 파리가 살균 소독된 버전이다. 도시를 둘러싼 원환 도로 "뻬리페리끄" 안쪽만의 파리 말이다. 깨끗하고 정갈하다. 자동차는 빵빵대지 않는다. 여행객, 엄청 넘실대던 외국 놈들과 말썽꾼들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몽마르뜨의 중심에 위치한 파리의 한 식당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곳은 20세기 초엽 화가들과 작가들이 많이 드나드는 아름다운 명소 아닌가? 중앙 역은 깨끗하고, 벽면의 광고 간판들은 '예~술'이며 매우 프랑스답다. 중앙 기차역이 나오는 야외 장면을 찍을 때, 그 뒤로 헐리우드 영화 포스터가 한 장이라도 보일까봐 감독이 열라 노심초사했다는 인상이 딱 든다. 다른 장면에는 프랑스 투어 싸이클 경주를 담은 흑백 뉴스 영화가 나오는데, 과거의 프랑스에 대한 향수에 젖게 한다.분명, 세계화, 성적 향상용 약물, 맥도널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나타나기 이전의 파리와 프랑스 말이다.거지들조차 그렇게 멋진 파리에 살 수 있다는 걸 행운이라 생각하고 행복해한다. 그리곤 짐짓 점잔을 빼며 자신들의 운명에 순응한다. 아멜리에가 어느 일요일 전철을 타기 위해 뛰어갈 때, 개를 데리고 난간에 기대 누운 구부정한 한 부랑자를 보곤 멈춰서 몇 프랑을 쥐어주려 한다. 그는 그걸 받지 않으려 한다. "아뇨, 됐어요! 일요일엔 휴무거든요."옆집 화가 노인의 주장을 듣고, 그녀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의 환경에 끼여들어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들의 인생에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아버지 정원의 난쟁이 상을 전당(殿堂)으로부터 떼어내어 세계 일주를 보내버린다. 평생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이 없던 아버지는, 난쟁이 상이 보인 모범을 따라 가방을 꾸려 세계 유람을 떠난다. 비슷한 식으로 동료 노처녀의 삶에 사랑의 미광(微光)을 비출 수 있었다. 이제 아멜리에는 가장 큰 난관에 봉착케 된다. 즉, 스스로 만든 억압을 벗어 던지고 꿈에 그리던 남자를 낚아채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