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Hermeneutic)'의 기원에서 살펴본 헤르메스의 의의- 리차드 E. 팔머의 글을 중심으로Ⅰ. 어떠한 행위를 해석이라 칭하는가Ⅱ. Hermenuetic과 HermesⅢ. Hermeneuein의 세가지 의미Ⅰ. 어떠한 행위를 해석이라 칭하는가.우리가 해석학적 담론으로 진입하기에 앞서, 일상생활에서의 해석에 대한 의미에 대하여 넓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解釋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 문학에서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영어문장을 한국말로 옮길 때 '해석'이라는 말을 쓰며, 음악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감상 후 '저것을 어떻게 해석하였는가?'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행위나 연설, 말을 듣고도 그러한 것들의 해석은 항상 이루어지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된다. 꿈을 해석하는 것이나, 점을 친 후 해석하는 것도 그러한 행위로서 간주된다. 즉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해석들과 함께 하는 삶인 것이다.이러한 일상적인 해석의 행동들은 타자의 행위나 외부세계의 사건들을 '나' 라는 주체 안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행위와 주체와 의 관계만이 해석의 전부라면 모든 해석이란 모두 개개인의 주관적인 성향을 띄게 됨으로 이는 학문으로써 논할 가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꿈에도 개인의 꿈을 해석해주는 해몽가가 있으며 점술에도 점쟁이가 있다. 물론 해몽가나 점술가의 행위가 학문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적어도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는 프로이드(G. Freud)의 저작 '꿈의 해석(Die Traumeutung)'만큼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해석자 또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해석학이란 학문은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회의론적 해석이론이 존재한다. 이는 해석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져다 주는 쾌락주의적 회의주의와 모순적인 해석들로 가득 찬 해석적 미궁에 빠지는 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허무주의적 회의주의로 분화된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해석에 가해지는 어떤 규제가 없기 때문에, 해석은 텍스트의 가변적인 다수의 의미들을 지유롭게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활동이다.金文煥, 『美學의 中心』,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p.235)더 이상의 해석학적인 논의의 진행은 본 글의 의미와 부합되지 않는 것 같아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여기까지 해석에 대하여 장황하게 써놓은 것은 해석이라는 말의 'Hermenuetic'을 언급하기 위해서 였다. Hermenuetic, 즉 해석학이란 말의 어원도 위에서 말한 점성술 의 해석처럼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Ⅱ. Hermenuetic과 Hermes그럼 해석(Hermenurtic)이란 단어의 기원은 무엇인가? 해석학이란 단어의 기원에 대하여 리차드 E. 팔머는 "이 단어의 어원은 '해석하다(to interpret)'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동사 'hermeneuein' 그리고 '해석' 이라는 명사(hermeneia)에 있다.") 리차드 E. 팔머, 『해석학 강의』 최성학 역, 도서출판 라브리, 1988, p.25고 한다. 해석학이란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 사상에 담겨있는 셈이다. 그럼 그리스어 Hermeios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단어는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의 제사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앞의 우 단어는 위의 단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위의 단어들은 고대의 문헌들에 있어서도 자주 언급된다. 잘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의 두 번째 장은 'Peri Hermeneias'즉 해석에 관하여 라고 불린다.) Paul Ricoeur, FREUD AND PHILOSOPHY-An Essay on Interpretation, Denis savage, (New He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0또한 플라톤의 『법률』(Gesetzen)의 부록인 '에피노미스'(Epinomis)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술들과 함께 해석학적인 기술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O. 푀겔러, 『해석학의 철학』 박순영 역, 서광사, 2001, p.17또한 이 단어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Oedipus at Colonus)」에서도 명사형으로 나온다.) 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李翰雨 역, 文藝出版社, 1988, P.33이 단어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말씀을 듣는 대사제에게서 나왔다는 점은 신탁의 해석을 의미한다. 대사제만이 신의 음성과 예언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 의미를 일반 대중들에게 '해석'하여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사제의 뜻인 Hermeios는 그리스신 Hermes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들 중 한 명인 헤르메스는 어떠한 신인가? "헤르메스(로/메르쿠리우스, 영/머큐리)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제우스의 사자(使者)로서 날개 달린 모자, 날개 달린 신발을 착용했다. 손에는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있는 케리케이온을 들고 다녔다.") 토마스 펄핀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이윤기 역, 대원사, 1989, p.31즉 한마디로 그는 신의 전언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들과 많은 접촉을 한 것 또한 헤르메스였으며, 그리스인들은 헤르메스의 말을 통하여 신들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보면,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찾고자 할때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어 길을 안내하고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 주도록 하였다. 헤르메스는 마차에 올라서서는 고삐를 잡고 손수 말을 몰아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향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파수병들을 모두 잠재웠기에 마차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의 내용이 언급된다. 신 헤르메스는 인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신이었다.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신의 사자인 헤르메스를 해석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신들이 전달하려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직도 "불분명한"말이어서 주석을 필요로 하는 한 그것을 해석(hermeneia)이라고 했고. 주석 자체도 해석이라고 하였다.) O. 푀겔러, 『해석학의 철학』 박순영 역, 서광사, 2002, p.19그리스인들은 이러한 헤르메스 신의 말씀이나 상징화한 모습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신탁을 해석하는 대사제의 명칭 또한 여기에서 유래 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신탁의 뜻을 절대적이라 여겼고 자신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에 신탁을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다.이러한 신탁 또한 언어였다. 언어를 해석하는 일은 성서의 주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서 또한 유대교의 신인 여호와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세의 1000년 간 이루어진 성서의 주석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 또한 해석학의 한 분야라고 생각되어 질 수 있다.1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해석의 기술(ars interpretation)을 해석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에도 해석학은 고전적 고대 문헌이나 성서에 의거한 규범적인 학문의 보조학이라는 제한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슐레겔과 슐라이어마허에 와서 그 한계를 벗어나게 되었다.) 위의 책, p.18해석학에대한 헤르메스의 언급은 하이데거와 가다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철학자체를 '해석'이라고 보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해석학-으로서의-철학을 명시적으로 헤르메스와 연관지었다.") 리차트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李翰雨 역, 文藝出版社, 1988, P.35가다머는 그의 주저 『진리와 방법』에서, "정신의 세계에 직접 존재하지 않으면서 정신 세계에서, 정신 세계에 대하여 언표하는 모든 것, 즉 예술은 물론 법, 종교, 철학 등과 같은 과거의 다른 모든 정신적 창작물들이 그 원래의 의미 로부터 소외되었으며, 드러내고 매개하는 정신에 의존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사자 '헤르메스'라고 부른다.")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Ⅰ』 이길우·이선관·임호일·한동원 옮김, 문학동네, 2000, p.288이러한 가다머의 존재론적인 해석학에 따르면, 헤르메스라는 말은 그리스의 신이라는 이름을 떠나서 이제는 인간의 정신이 아니지만 인간의 정신이 창조한 창작물들이 드러내는 정신, 즉 정신적 창작물이 뿜어내는 기운이 헤르메스이며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적 학문이라 칭하는 것이다.Ⅲ. Hermeneuein의 세가지 의미해석이라는 뜻을 지닌 Hermeneuein은 리차트 E. 팔머에 의하면 세 가지 의미로 나누어진다. 동사형-Hermeneuein을 사용해서 말해보면 1) 말로 크게 표현하다, 즉 말하다. 2) 하나의 상황을 설명할 때와 같이 '설명하다'. 3) 외국어를 번역할 경우에서처럼 '번역하다' 이다. 이들 세 가지의 의미 각각은 나름대로 해석의 독립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李翰雨 역, 文藝出版社, 1988, P.36우선 처음으로 말하다의 뜻을 살펴보자. 앞서 말한 신전의 대사제는 신탁을 받아 사람들에게 '말한다' 또한 기독교의 성직자는 어떠한가? 그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가교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또한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능은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하다라는 말은 말하다와는 약간의 뜻은 다르다. 이것 또한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해석이라 말할 수 있는 말하다' 인 것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을 표현하며, 성악가는 노래로써 말을 표현한다. 이것 또한 말하는 것의 한 형태이다. 그리스 시대에서 hermeneia는 호머의 서사시를 해석하여 풀어내려 가는 과정이라고 지칭되기도 하였다.
해석학에 나타난 변증법적 의미 고찰- 딜타이의 '삶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 -1. '해석함'은 곧 '철학함'이다.2. 딜타이의 해석학 엿보기.3. '삶의 해석학'이어야 하는 이유 - 체험, 표현, 이해4. '이해됨'에 있어 변증법적 의미.5. 보다 넓은 지평을 향하여.1. '해석함'은 곧 '철학함'이다'해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얼마나 타당하게 여겨질 듯한 언표를 제시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는 쉬워 보일 듯 한 이 물음은 기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해석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수많은 해석은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수행되어져 왔으며, 그들이 흩뿌린 담론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지금도 여전히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일상 생활에서 별다른 탈 없이 사용되었던 '해석'이 이제 이와 같은 잠깐의 살펴봄을 통해 곧바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즉, "그러면 우리는 '해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이러한 물음은 이제 '해석함'은 곧 '사유함'이며, '철학함'이라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것은 쉽지 않은, 그렇지만 풀어내야 할 과제로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논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다행스럽게도 훌륭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담론의 장'을 마련해 놓았고 이제 우리는 그 안에서 혹자의 견해를 선택하여 그것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논의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따라서 필자는 이제 해석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한층 발전시키고, 나아가 리꾀르, 하이데거, 가다머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선사한 딜타이의 해석학을 소개하고 이것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2. 딜타이의 해석학 엿보기.무릇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앞선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을 통한 해석이 더욱 유의미성을 가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딜타이의 해석학을 전개하기에 앞서 약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고찰을 선행해야만 할 것이다.주지하다시피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나타난 과학의 급격한 발전은 환원론적이고 기계론적 중심의 사유를 만연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사유는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곧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함') 여기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함'이란 곧 인간의 삶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의 '틀'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 자체는 무규정적이고 역동적이며, 그것은 역사성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을 배제하였다.이러한 전망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딜타이는 정신과학) 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李翰雨 譯, 文藝出版社, 1998, p. 148.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이란 오늘날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인간의 내면적 삶의 표현들 ―그 표현은 동작일 수도 있고 역사적 행동일 수도 있으며 명문화된 법이나 예술작품 혹은 문학일수도 있다― 을 해석하는 제반 분야를 말하는 것이다.에 적합한 방법론을 세우려 하였다.) 같은 책, p. 150.정신과학은 인간과는 무관한 사실들과 현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과정, 즉 인간의 '내적 체험'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사실들과 현상들을 대상으로 한다.) 같은 책, p. 156.즉 자연과학이 인간적 체험과의 연관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근본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정신과학은 인간의 내적 삶과의 연관을 다룬다.) 같은 책, p. 157.그리고 이것은 자연과학의 환원론적 객관성을 넘어서서 인간적 체험, 즉 '삶'의 충만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같은 책, p. 154. 인간의 내면적 삶의 역동성은 인식, 감정, 의지 등이 서로 뒤얽힌 복합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이러한 역동성은 인과성의 규범 및 기계적이고 양적인 사고의 엄격성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 딜타이의 기본 주장이다.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딜타이에게 있어 해석학의 최종 목적지가 '인간 이해'에 있음을 밝혀준다. 즉 딜타이의 해석학은 텍스트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닌 인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삶의 해석학'이다.3. '삶의 해석학'이어야 하는 이유 - 체험, 표현, 이해그렇다면 필자는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해석학'을 논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해석한다'함은 인간에 의해 사유되고, 발견된 것들에 대한 재해석을 의미하며, 이미 언급했듯이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내적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은 그 자체로서 인간 이해에 대한 활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학에서처럼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 그 자체이며,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로서 자리잡는다.그렇다면 '삶'은 어떻게 이해되어질 수 있는가? 이제 전개될 딜타이의 해석학 공식) 같은 책, p. 160.이라 불리어지는 '체험', '표현', '이해'의 고찰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언뜻 보면 '체험'이란 우리가 접하는 모든 구체적인 경험인 것 같지만, 기실 그렇지는 않다. 체험과 경험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경험이 감각적 수준에 머무르는 반면, 체험은 감각적 수준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단계까지 나아간다. 즉 딜타이에 따르면 '체험'이란 공통된 의미를 갖는 단위로서, 우리가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재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현재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는 삶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공통된 의미를 통하여 서로 결합되는 삶의 부분들의 포괄적인 통일성을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책, p. 161, 재인용. 즉 체험은 '나'와 '타자'의 경험들간에 공통된 의미 속에서 주어지는 그 무엇이다.이러한 '체험'은 삶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뜻하며, 이것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다. 즉, '체험'은 그 의미의 통일성 속에서 과거의 회상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기를 '의미'의 총체적 맥락으로 포괄한다.) 같은 책, p. 164. 우리가 삶을 체험하는 것은 '의미'라고 하는 복합적이고 개별적인 계기에 의해서이며, 우리는 삶을 총체성으로 직접 체험하고,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갖고서 파악한다. 이러한 '의미'의 단위는 과거의 연관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기라고 하는 지평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의미'의 단위는 본질상 시간적이고 유한하므로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체험'은 '표현'과 관계 맺는다. 왜냐하면 삶 자체는 곧 체험이며 이것은 다양한 표현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표현'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체험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우리는 보통 '표현'이라 하면 '나타냄' 혹은 '나타나 있음' 정도의 뜻을 가진 모든 인간적 산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딜타이에게 있어 '표현'은 원칙적으로 감정이나 감정의 유출의 뜻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즉, 그에게 있어서 '표현'은 한 개인의 감정의 구체화라기보다는 '삶의 표현'이다. 그래서 이 때의 '표현'은 사상, 법률, 사회형태, 언어 등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책, p. 167.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딜타이에 따르면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관념', '행위', '체험 표현',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관념'은 시간이나 인격 등과 독립되어 있는 단순한 사고 내용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고 정확하며 아주 손쉽게 의사소통 될 수 있다. 그러나 '행위'는 그 속에 일정한 목적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험 표현'은 삶의 자발적인 표현―탄성이나 동작―으로부터 예술작품 등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의식적으로 통제된 표현들에 이르기까지 제반 표현들을 포함한다.) 같은 책, p. 168.딜타이는 이러한 '관념'과 '행위'를 '삶의 표출'로 보는 반면, 마지막 범주를 '체험 표현(Erlebnisausdr cke)'이라 부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내면적 표현이 가장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책, p. 168.따라서 이제 '체험 표현', 즉 '삶 자체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표현'은 개인적이고 순전히 인격적인 현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드러나는 사회적-역사적 현실, 즉 체험 자체의 사회적-역사적 실현이며,) 같은 책, p. 170. '체험 표현'은 곧 '삶의 표현'이며 표현을 통해서 체험은 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에 대한 이해는 창작과정의 易(바꾸다)인 동시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이러한 맥락에서 표현은 체험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다.이제 마지막으로 딜타이의 '삶의 해석학'의 핵심인 '이해'에 대해 알아보자. 딜타이에게 있어서 '이해'는 한 사람의 정신이 다른 사람의 정신을 파악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해'는 생동적인 인간적 체험을 파악하기 위한 정신적 과정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삶 자체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해이며, 이해를 통해 우리는 개인들의 내면적인 세계와 만나고,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의 본성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된다. 즉'이해'란 바로 타자의 세계에 대한 체험의 전이를 통해 추체험) 같은 책, p. 133.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이해는 저자의 정신적 과정의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으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저자의 창작활동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정신적 내용물을 객관적으로 외화하는 과정임에 반하여 이해활동이란 그 객관화되어 고정된 표현을 통해 그것이 연원한, 저자의 정신적 삶에 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창작자의 사고를 재구성, 재사고하는 것.
科學의 哲學的 反省- 문제 {) 여기서 문제 라는 것은 필자가 과학을 고찰함에 있어 필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왔던 목차 에 제시된 의문들을 말한다.를 중심으로 한 현대적 해설 -{- -199703258 철학과 4학년 최지욱{1. 들어가는 말2. 몸 말(1) 과학은 객관적인가?(2) 과학은 합리적인가, 혹은 상대적인가?3. 나가는 말1. 들어가는 말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흔히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 라고 일컬어진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약간은 거창하게 들릴 법도 한 이 문구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과학에 대한 찬양을 더욱 고양시킬 만한 또 다른 표현을 찾게 될 만큼이나 퇴물이 되어버린 듯 하다. 주지하다시피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더 풍요롭게 가꾸어왔다.{) 여기서 풍요롭다 는 의미는 인간의 삶의 質的측면, 예를 들면 과학의 발달로 인한 생명경시 문제, 인간소외와 같은 內的문제를 배제한 量的측면(便利)만을 고려한 것이다.작게는 인간의 신체를 위한 여러 가지 공학적 利器들로부터 크게는 교통, 통신에 이르기까지 그 편리함에 있어서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이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 과학적 요소를 배제시킬 수 없음은 자명한 듯 하며, 더 나아가 과학 혹은 과학적 이론은 언뜻 보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더욱 많은 정보(자료)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혜택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들{) 대표적 문제들로는 각종 利器들의 사용으로 인한 인간소외를 들 수 있으며, 더불어 생명공학 의 발달은 인간복제라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 훼손이라는 크나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은 우리 삶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문제들 역시 더 나은 과학의 발전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치 과학이 절대진리인양 맹목적으로 그것을 믿기까지 한다.그러면 이쯤에서 근원적인 물음 하나를 던져보도록 하자.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객관적이며 합리적 진리인가, 그렇지 않으면 상대적인 패러다임에 불과한가? 이제, 필자는 먼저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반성을 시작하려 한다.2. 몸 말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접근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선 과학에 대한 첫 번째 논의는 과학의 고정된 모습에서 과학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징이나 문제점을 보는 방식이다.{) 박은진, 『칼포퍼 과학철학의 이해』, 철학과 현실사, 2001, p. 136. 과학철학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과학의 놀랄만한 모습이 가능해진 것을 다른 분야와 확연히 다른, 과학만의 고 유한 방법에서 찾거나 과학 나름대로의 어떤 구조에서 찾기도 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은 그 자체로 여타의 학문들과는 확연히 다르리라고 생각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물리 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이론적 구조나 그 형식적인 틀을 다루게끔 했다.다른 한 가지는 그러한 과학이 과연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또 과학이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한 논의인데, 여기서 관심을 갖는 과학은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어떤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앞의 책, p. 137. 물론 이 흐름은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 있거나, 아니면 무질서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이 두 번째 방식은 과학을 논의하는 데에서 첫 번째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전자의 정적인 논의 는 무엇보다 진리 와 객관성 을 강조하며 과학을 과학적 행위의 결과로 파악한다. 그리고 과학적 결과물인 이론이나 법칙과 같은 산물 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후자의 동적인 논의 는 과학을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나는 과학의 발전이나 진보를 문제삼는다.{) 앞의 책, p. 138.이러한 과학의 두 가지 접근방식은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에 대해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자.(1) 과학은 객관적인가?과학을 이해함에 있어 그것이 앞서 언급한 정적 논의든 동적 논의든 간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의 행위 주체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소박한 귀납주의자에 따르면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하며, 관찰은 과학적 지식이 세워질 수 있는 확실한 토대를 제공하므로, 과학적 지식은 관찰 언명으로부터 귀납에 의해 이끌어내어진다.{) 앞의 책, p. 43.일반적으로 우리가 과학이 객관적{) 앨런 찰머스, 『현대의 과학철학』, 신일철·신중섭 옮김, 서광사, 1985, pp. 185∼189.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객관주의라는 개념은 단순 명제에서 복잡한 이론에 이르는 지식의 항목들이 그 러한 지식을 고안해 내거나 생각해내는 개인들의 신념이나 앎의 상태를 초월하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객관주의자는 개인의 태도나 믿음 혹은 그의 다른 주관적인 상태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지식의 항목이나 체계의 특성에 우선권 을 부여한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지식은 개인의 마음이나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앞의 귀납주의자들처럼 과학적 이론이 관찰 의존적{) 관찰은 인간의 五感에 의해 이루어지고, 일반적으로 감각적 경험은 사실로 생각되어진다.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버틀란트 러셀의 칠면조의 이야기에서처럼{) 앨런 찰머스, 『현대의 과학철학』, 신일철·신중섭 옮김, 서광사, p. 45. 이 칠면조는 아침 9 시에 모이를 준다는 관찰을 아주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하였다. 그는 다양한 조건 - 수요일과 목요일, 따뜻한 날과 추운 날,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에 이러한 관찰을 하였다. 매일 그는 하나 하나의 관찰을 더해갔고 드디어 충분히 많은 자료가 모였다는 판단 아래 나는 항상 아침 9시 에 모이를 받아먹는다 라는 귀납 추리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결론은, 크리스마 스 이브에 먹이를 먹는 대신 목이 잘리므로 말미암아 부정할 수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과학적 이론은 귀납의 원리로 정당화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학이 관찰 의존적이지 않다면, 즉 이론 의존적이라면 과학은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붉음 이라는 단순 개념을 예로 살펴보자. 관찰자는 요소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지각에 포함되어 있는 공통 요소를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게 되며 드디어 이 공통 요소가 붉음 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러한 설명은 관찰자가 얻은 무수히 많은 지각 경험에서 붉은 대상을 봄으로써 생기게 된 일련의 지각 경험을 검출해서 이용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지각 경험이 스스로 선택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곧 붉음 이라는 개념과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의 습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붉음 이라는 개념이나 그 밖의 다른 개념들이 바로 경험에서 유도되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은 것이다.{) 앞의 책, pp. 65∼66.이와 같이 모든 관찰 언명에는 이론이 선행하기 때문에 과학은 관찰 언명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관찰 언명도 잘못일 수 있기 때문에 관찰 언명은 과학적 지식의 확고한 기반이 될 수 없다. 즉 관찰언명은 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책, p. 69.그러나 과학에서 이론이 관찰에 선행한다 할지라도 과학적 지식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있어 관찰 자체를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관찰을 함에 있어서 관찰자의 주어진 선입견 내지는 기대 역시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러한 이유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과학의 객관성이나 과학을 통한 진리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귀결은 별 탈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박은 진, 『칼포퍼 과학철학의 이해』, 철학과 현실사, 2001, p. 156.(2) 과학은 합리적인가, 혹은 상대적인가?그렇다면 과학은, 합리성은 보장받을 수 있는가? 위에서 논의했듯이 과학은 객관적이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나름대로의 합리성은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실제로 과학적 행위에서 인간이 철저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합리적{) 앨런 찰머스, 『현대의 과학철학』, 신일철·신중섭 옮김, 서광사, p. 169. 극단적인 합리주의 자는 경합하는 이론들의 상대적 장점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하고,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 는 보편적 기준이 있다고 주장한다.일 수는 있으리라고 여겨졌고, 그래서 최소한 인간에 의한 과학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과학의 합리성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흔들어 버리려는 쿤의 논의는 이제 조금이라도 과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박은진, 『칼포퍼 과학철학의 이해』, 철학과 현실사, 2001, p. 156.쿤의 논의는 과학의 발전을 다루는데, 그의 결론에 따르면 과학의 변화는 결국 이론, 즉 패러다임의 변화이고 이것은 결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과학의 역사에는 점진적인 진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관이 공약 불가능{) 박은진, 『칼포퍼 과학철학의 이해』, 철학과 현실사, 패러다임에 따라 그 패러다임에만 적용 될 합리성이 있을 뿐이며, 결국 각각의 패러다임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날 때, 각 패 러다임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고 그 우월을 말할 수도 없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