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서 론1. 공자와 맹자본 론1. 공자와 맹자,그리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2.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3. 공자의 시대4. 맹자의 시대결 론1.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공자와 맹자, 그리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서 론 >{그림 /공자상(孔子像)1. 공자와 맹자대개 중국 사상을 거론하는 경우는 공자를 이야기하고 나선 꼭 그 다음엔 맹자를 들먹거린다. 공자와 맹자는 이렇듯 바늘 가는데 바늘 가듯 따라 다닌다. {그림 /논어학이편(學而篇)예를 들어보자면 공자를 일컬어 '대성지성선사'....이러면,.... 곧이어 맹자를 일컬어 '아성' 하는 식이다.* 대성지선선사 (大成至聖先師) : 과거에 공자를지 칭하던 말. 학문을 이루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여 모 든 스승의 스승이란 뜻.* 아성 (亞聖) : 성인보다 한 단계 아래. 공자를 최상 위에 두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성인이란 뜻으로 이 렇게 부름.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 이름이인데 논어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그 다음에 란 책 이름이 나온다. 주로 이런 식이다.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의 주장 중에 한 구절 '인(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이어서 맹자는 '의(義)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결국 공자의 이야기를 꺼내면 맹자의 주장이나 종지(宗旨)가 꼭 나오게 되는데, 이는 맹자가 공자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는 북 치면 장구 치는 식으로 줄곧 장단이 잘 맞아왔다.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보통 고리타분한 소리다.. 이러면 늘상 하는 이야기, 공자왈 맹자왈 이 역시 공자와 맹자를 거의 같이 거론하는 예가 되겠다.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 일반인에게 그저 궁형 당한 사람..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가 쓴 역사책이 《사기(史記)》가 워낙에 재미있게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맹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맹자는 《시(詩)》와 《서(書)》에 근거하여 공자의히 비교해 보면, 이 두 사람의 스타일에는 다른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공자나 맹자나, 지금부터 2천년 전의 사람들인데 우리가 이 두 사람을 아는 것은 오로지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다. 남아있는 기록이 이런 저런 것이 있지만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란 책과 란 책이겠다. 옆에서 수발 들며 호흡을 같이 했던 학생들이 기록한 글이 아무래도 제일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지금부터 논어와 맹자에 보이는 공자와 맹자의 모습을 비교해 보도록 한다.《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은 일종의 뭐랄까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이랄까 하여간에 여유가 있고 한적한 느낌이 든다. 이에 비해 《맹자》란 책에 보이는 맹자의 모습은 매사에 긴장감이 넘치고 심지어는 잔뜩 독이 오른 사람처럼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공자는 「군자(君子)는 무릇 으젓하고 떳떳하나 소인(小人)은 항상 걱정스러워 하고 조바심을 낸다...」 이러며 자신은 항상 으젓하고 떳떳한 유유자적한 스타일을 유지하곤 했다.{그림 /공자가 제자들과한담(閑談)하는 장면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공자는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한담하는 자리에서 각기 소원 하나씩을 말해보라고 했다. 제자들이 각기 의미있는 그런 소원을 이야기했으나 공자는 의외로 증석(曾晳)이 말한 소원을 가장 맘에 들어 했다.증석의 소원은 이러했다 :「날씨 좋은 봄날, 새옷을 지어 입고 어른들 대여섯과 어린이 예닐곱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우(雩) 가락의 춤을 추고는 흥얼거리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대단히 유쾌하고 한적한 그런 이미지다. 이것과는 대조적인 분위기가 바로 맹자이다. 맹자가 했던 유명한 말 :「우환(憂患) 속에 살아나고, 안락(安樂) 속에 죽는다.」매사에 걱정하고 고생 고생하는 과정에서 살길이 열리지만, 그러나 안일하고 준비성 없이 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는 약간은 비장(悲壯)한 어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를 보게 되면 공자의 경우 약간은 철없이 투정부리는 듯한 인상도 드는 것입니다. 왜냐》에는 오히려 「인(仁)」자가 무려 66번이나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인(仁)」자가 출현한 문장에서 그 인(仁)이란 글자의 해석이 거의 대부분 틀리다.그러나 공자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비록 성현(聖賢)이라 하더라도 항상 근신하고 조심하고 노력하여 불인(不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발언을 종종 하고 있다. 이로써 추론컨대,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惡)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같다.공자는 또 「잘못한 다음의 행동을 보면 그가 인(仁)한지 어떤지를 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노력하여 스스로 인(仁)해지려고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비록 주동적인 자아의지의 발로라고는 하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하지만 이런 문제가 맹자 손으로 넘어가면 공자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맹자는 단호하게 주장하는 편이다. 다음과 같이...「인간의 본성이 착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서 착하지 않은 사람 없다.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듯이 말이다.」얼마나 단호한가. 똑 부러지게 못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공자는 스스로 고백하길 나이 70이 되기까지 계속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비로소 마음에 내키는 대로해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런데 맹자는 이보다 훨씬 과격하고 과감하고 저돌적인 말을 했다.「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키운다.... 」호연지기란 일종의 도덕적 용기를 말하는데, 어떠한 권력이나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러한 도덕적 용기를 일컫는다. 이러한 도덕적 용기는 맹자의 해석에 따르면 외적인 시선을 의식하거나 외적인 감시 혹은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주동적인 의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었다.이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맹자는 다음과 같이 호언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그렇게 위대하다는 순(舜) 임금이 별거야? 나도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즉 누구나 인간이면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위자는 평소 양화란 사람의 인간성을 업신여겼음에도 바로 그 예(禮)라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화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그집을 답례로서 방문하였다.이런 공자에 비하면 맹자는 오히려 화끈한편이였다. 제선왕(齊宣王)이 병을 핑계삼아 면담을 기피하자 맹자 역시 병을 핑계삼아 만나자는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양혜왕(梁惠王)을 만나고 나서며 별 임금같지도 않은 사람이라며 콧방구를 뀌었다. 노평공(魯平公)이 맹자를 만나려 하지 않자 맹자도 배짱을 튕기며 노평공을 아는 체도 하지 않았었다.맹자는 당시 각 국 임금의 선물을 마음에 들면 받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예의같은 것을 따지며 의례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비록 공자의 뒤를 이어 유가(儒家)의 학설을 계승 및 발전시켰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행동에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점이 보인다.왜 이리 다른가?두 사람 사이의 개성이란 것도 물론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우리가 공자나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단지 공자나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에 의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말하자면 《논어》란 책과 《맹자》란 책의 소재(素材)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바꿔 말하면 논어란 책과 맹자란 책을 편찬한 제자들이 공자의 경우는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기록한 자료를 채택하고, 맹자의 경우는 저돌적이고 단호한 모습을 기록한 자료를 채택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러나 공자와 맹자는 약 2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그 2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상황이 격변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시대적 변화가 공자와 맹자의 언동(言動)에 지울 수 없는 각인(刻印)을 남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대적 격변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일까?3. 공자의 시대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해당한다. 맹자는? 맹자의 생졸(生卒)년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맹자가 류 계층이 서로 정벌하고 공격할 경우 그래도 명의상으로는 도덕(道德)을 기치로 내걸었다. 실제 내막이야 설령 다른데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격한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하극상을 극치인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는 각국 세력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이와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 시대의 전쟁은 전국민에게 파급될 정도로 처참하고 치열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해 자식이 부모를 잃거나 형제자매가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인간비극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춘추시대의 전쟁 중 자주 등장하는 거전(車戰)이란 것은 일종의 귀족식 전쟁이라고 할만 하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전쟁 당사국 내지는 전쟁 당사자들은 피차간에 모두 서로 체육경기의 방식으로 전쟁을 진행했다. 말하자면 진(陣)을 치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고 서로 맞붙어 백병전이 붙었을 때도 모두가 공인하는 원칙이란 것이 있었다.그러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서도 일종의 예의(禮義)라는 것을 지켰다. 너무 몰인정하게 인정 사정없이 몰아 부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전쟁의 불문율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관계로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않았으며 적군의 장수를 직접 겨누어 화살을 쏘는 예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각종 술수를 사용하여 적을 속게 하여 승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미 적군에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혔다면 더 이상 찌르거나 베려고 하지 않았다. 머리칼이 허연 군사는 설사 붙잡아도 포로로 삼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라고 하기보단 일종의 체육경기같다고 한 것이다. 이런 춘추시대의 전쟁 모습은 유럽 중세기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위에서 열거한 이러한 원칙들이 춘추시대에 반드시 지켜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참전 인원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전쟁을 치루는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단지 당시 사회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음을 표시하는 것일 뿐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