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치와 사회- 북한정권에 의해 임시인민위원회에이루어진 근대적 개혁...- 목차 -1. 서론 - 북한 정권의 형성과정 및 임시인민위원회의 성립.2. 본론 - 근대적 개혁에 의한 성과와 사회주의 경제에 미친영향.(1) 근대적 개혁 -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공유화.중앙계획기구의 성립.(2)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전개.(3) 계획경제의 단계와 그 성과.3. 결론 - 근대적 개혁에 의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전개에따른 이해와 요약.북한 정권에 의한 임시인민위원회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이라는 주제를 처음에 들었을 땐 솔직히 난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는 작업이 어려울 것으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접근해보기로 했었다. 책을 빌려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의욕적으로 노력을 한 결과 다행히 생각보다 쉽게 느껴졌다. 임시인민위원회가 행했던 여러 개혁들에 대해 알게되고, 또 그 개혁들의 성과, 과정 및 결과들에 자세히 접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제에 대한 내 견해도 어느 정도 쌓여갔다. 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근대적 개혁을 시작하기전의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했다. 북한 정권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갔을까? ,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하는 등의 궁금중부터 해결해야했다.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차지하기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파는 1945년 10월 14일 이북5도 공산당 열성자대회를 열고 각지에서 모인 공산주의자들을 일단 규합하여 당과 행정의 조직을 정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김일성은 1945년 11월 15일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2차 확대집행위원회를 열고 소위 ‘인민정부’를 수립하는데 반대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대중을 공산당 주위에 집결시키는 정책을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고 독재권력사회적 모순이었다. 토지문제는 민족 스스로의 근대화를 통하여 극복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더욱 모순이 확대되었다. 특히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확대된 모순은 불과 농가의 4%에 불과한 지주가 전 농지의 55%이상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생산량이 밭보다 3배 이상 높은 논은 72.5%가 소작지였고,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개된 토지의 64%가 소작지였다는 것은 실제 지주가 북한지역에서 경영한 소작지가 갖는 실질 생산규모는 55%를 훨씬 넘는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45.7%의 농가는 순소작농이었으며, 22.1%의 농가들은 자작겸소작으로 겨우 연명하기도 힘든 고통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지주를 지원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을 계속하였고, 50-6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와 수세, 농회비등 수십종의 잡세와 무보수의 노동은 소작농들의 생계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마저 짓밟았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 소작농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의 인하를 사정하기도 하고 소작료 인하투쟁을 하기도 하였지만 일제 치하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었으며, 결국은 민족의 해방과 함께 해결할 수밖에 없는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지주계급을 일소하여 새로운 토지 소유 관계 수립을 위해서와 해방직후 악화된 식량 사정 때문에 토지개혁이 일어난것으로 보인다.또한, 지주 계급을 제거하기 위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적 민주개혁의 일환을 목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토지개혁법령의 내용은 여러 가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핵심 내용으로 압축하면 '모든 소작지의 철폐'라는 규정으로 압축할 수 있다. 5정보 이상 소작지의 경우는 몰수, 5정보 이하라도 소작경영지는 몰수라는 등의 다양한 규정이 '모든 소작지의 철폐'라는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5정보 이상의 농지는 기본적으로 가족노동으로는 경작이 어렵고 소작료가 50-60%이상에 이르는 상황에서 자작경영 못지 않은 수익이 있음으로 인하여 소작경영이 많는 의도도 있었지만, 유상몰수를 실시하기 어려운 경제적 조건도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북한의 정치세력들이 구상하는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다. 국가주도의 급속한 사회재편과 경제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서는 유상몰수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토지개혁 후의 현물세의 부과가 토지를 분배받지 않은 자작농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율의 현물세가 토지개혁과정에서 침묵을 지킨 자작농들에게 상당한 불만과 갈등을 강요했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토지개혁은 토지를 분배받은 빈농들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지는 못했다는 점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높은 현물세가 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북한지역의 농지의 부족으로 인하여 실제 토지개혁으로 받을 수 있었던 농지는 겨우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하였다. 혁명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분배가 불가능한 북한의 경제조건에 북한 정권이 처한 어려움의 주요 원인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북한 정권이 급속한 경제건설을 위하여 농민들에 대하여 수취를 강화한 것도 농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토지개혁은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주어 경제적 조건을 개선시켰지만, 그 외에 많은 정치 사회적 변화도 이끌어 냈다. 그 동안 봉건적인 지배구조가 유지되던 농촌사회에서 토지개혁은 사회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빈농들의 인격적인 해방을 가져왔다. 비록 법률적으로는 갑오개혁때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의 처지는 또 다른 억압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개혁은 이들에 대한 기존 지배세력의 위압을 제거해 낸 것이다. 토지개혁을 직접 수행하고 혜택을 받게 된 빈농들은 조공분국 주위에 집결하였고, 많은 빈농들이 조공분국에 입당하여 조공분국의 당내 성분도 크게 변화하였다. 토지개혁후 토지개혁을 직접 수행한 농촌위원회 위원 9만여 명이 조공분국에 참여하였다. 이들 농촌위원회 위원들은 이후 농민동맹의 개편에도 참여하는 가운데 소상품 생산적인 소규모 개인농업이 지배하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상품 경제의 조건에서는 농촌의 부흥과 농민의 생활개선이 어려웠다. 북한은 소규모로 분산된 개인경영으로 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키고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농업의 집단화를 다음 단계의 혁명과제로 추진하였다. 토지국유화의 경제적인 목적은 전국의 토지를 통합하여 중앙집권적인 경제계획의 수행을 원할히 하고, 농업 부문으로부터 국가의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며, 농촌 노동력의 공업부문 동원과 농업 경영의 대단위화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 등에 있었다. 농업협동조합의 조직은 1953년부터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말부터 1954년 초에 걸쳐 1개군에 1~2개씩의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예비적 단계를 거쳐 1954년부터 집단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은 농업집단화에 착수한지 불과 5년만인 1958년 8월에 전농가를 협동조합에 가입시켜 농업의 집단화를 완료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농업집단화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북한의 농업집단화는 소련의 국영 농장형태인 소프호즈를 채택한 것이나 농업협동조합의 기능과 조직은 중국의 인민공사와 매우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중국의 인민공사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그 다음으로 임시인민위원회가 이룬 근대적인 개혁으로 주요 산업의 국,공유화를 이룬성과이다. 주요산업의 국유화는 당시 산업구성의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및 친일파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민족경제 기반 구축을 위해 필연적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이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게되면, 1946년 8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을 공포하여 일체의 공장, 기업소, 광산, 발전소,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국유화하였다. 그 결과 전체산업의 90% 이상인 1,034개소의 산업시설이 사회적 소유로 전의 계획경제의 핵심이 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도 추진하였다. 동 기구는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동 기구는 북한의 초기 사회주의 설립과정에서 정치적인 중앙 행정기구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 조치 등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구축에 필요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동 위원회는 1946년 3월 토지개혁 법령을 제정하였고 6월에는 노동법령, 8월에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 법령을 결정하였다.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혁명적인 조치를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수행한 통제기구로 평가된다. 이처럼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국유화 조치들은 임시 인민위원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이후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이양되어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기본조치들이 동 기구를 통하여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그 후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필요한 경제계획과 자원배분 등 주요 경제정책은 당과 행정부로 구성되는 중앙통제기구에 의해 결정되는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이와 같은 고도의 중앙 집권체제가 현재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임시인민위원회의 근대적 개혁에 의해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확립하고 나서 그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전개를 시행한것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북한은 남북분단 직후부터 토지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지하자원 산림수역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화 개혁을 단행하여 계획경제 추진의 기조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1958년 8월에는 농업의 협동화와 수공업 및 중소상공업의 협동화를 끝냄으로써 생산관계의 사회주의화를 완료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북한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하면서 채택한 경제성장 전략은 중공업 위주의 불균형 경제성장 정책이었다. 중공업의 발전육성은 북한의 핵심적인 경제개발 전략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사회 있다.
-귀납적/연역적 방법의 비교 설명-*정의: 개개의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이러한 사례들이 포함되는 일반 명제를 확립 시키기 위한 추리*특성: - 귀납법에 쓰이는 전제들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지고 결론을 이끌어 내지만, 그 결론의 참됨을 완벽하게 보증하지는 못한다. (귀납법의 단점)- 귀납법에서의 결론(주장)은 새로운 정보를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연역법만큼 강한 증명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다만 그 개연성 내지나 가능성을 높이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실제로 관찰된 사실로부터 관찰되지않은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과학에서부터 일상생활까지 여러 분야에서의 판단에 쓰여진다.- 귀납법에서 주어지는 자료 (개개의 사례)에는 통계표, 도표, 그림 또는 여론 조사 등이 쓰인다.*종류- 인과관계: 결과를 통해 원인을 찾는 논증방식- 유추(유비추리): 유추(類推)는 개별적인 사례들이 지닌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미지(未知)의 사실을 예측해 내는 것으로 상당히 생산적인 추론의 방식이다.- 귀납적 일반화: 이미 아는 한 무리의 모양, 상태, 행위로부터 그것을 포함하는 모든 집단의 모양, 상태 또는 행위를 추리하는 것*예문: - 1.소크라테스는 죽었다. 2.아리스토텔레스도 죽었다. 3.고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작년 연말 연시의 연휴 동안에 일어난 교통 사고는 무려 250여 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 건수는 재작년의 경우보다 20여 건이 불어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금년의 경우에는 300건 전후의 교통 사고가 발생될 것으로 추정된다. (유추)-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 버릇이 없다. (귀납적 일반화)*단점: - 결론이 전제들이 증명한 부분보다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차마 증명되지 못한 예들로 인해 결론이 바뀔 수도 있다. (ex. 우리는 과거에 백조들의 대부분이 하얗다는 사실에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현재 검정색의 백조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결론은 거짓이 되었다.)- 인과의 오류: A라는 현상이 B라는 현상보다 먼저 관찰되었다는 이유로 A가 B의 원인이라고 논단하는 현상. (ex. '선풍이 판매량이 증가하면 기온이 증가한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기온이 증가하는 이유를 선풍이 판매량의 증가로 볼 수는 없다. / 경제학적인 예시)*정의: 몇 개의 명제가 옳다는 가정 아래 다른 명제도 옳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방법*특성: - 전제가 결론에 결정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논증으로서, 결론이 필연적으로 전제로부터 도출됨.- 보편적 법칙이나 일반적 진리를 전제로 하여 특수한 개체에 대한 명제를 이끌어 내는 논증- 결론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나, 전제가 참임으로 해서, 결론역시 확실히 참임을 보장 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 진리나 보편적 법칙에 기대어 추론하면, 그 전제의 참됨이 그 결론의 참됨을 필연적으로 보증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연역법은 간단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지마는, 결론이 참되기 위해서는 전제들이 참된 명제로 이루어져야 하고, 대전제와 소전제를 잇는 매개개념이 확실해야 하고, 그 논증법이 타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예이다.*종류(명제의 종류에 따라)와 예문- 정언 삼단논법: 전제와 결론이 모두 정언명제(판단)로 이루어진 삼단논법(ex. 모든 포유동물은 척추동물이다. (대전제) 모든 소는 포유동물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모든 소는 척추동물이다. (결론))- 가언 삼단논법: 대전제의 전건이 가언명제(가정적 표현)로 이루어진 삼단 논법(ex. 봄이 오면 뒷산에 진달래가 핀다. (대전제) 봄이 왔다. (소전제) 뒷산에 진달래가 필 것이다. (결론))*후건 긍정의 오류와 전건 부정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 선언 삼단논법: 대전제에 선택명제(-거나, -든지)가 포함된 삼단 논법(ex. 바둑알은 백이거나 흑이다. (대전제) 이 바둑알은 백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이 바둑알은 흑이 아니다. (결론))- 양도논법(딜레마): 가언명제와 선언명제로 구성된 삼단논법(ex. 앞으로 나가면 적의 총알에 죽을 것이고, 뒤로 물로나면 지휘관의 총알에 죽을 것이다.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나 총알을 받게 되어 있다.)
司馬遷의 史記 중 진섭세가(陣涉世家)를 읽고번역본: 사기(史記), 신태양사'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백조의 큰 뜻을 알겠는가?' 이 말은 진섭세가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다. 진섭세가는 사마천 사기의 30세가 중 하나이며, 중국역사상 처음 발생한 농민반란인 진승오광의난(陳勝吳廣-亂)을 이끌었던 진승(陳勝)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진승은 BC 209년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뒤 민심을 주도해 반란을 일으킨다.진승오광의 난의 사건전개를 살펴보면, 진시황의 전제군주제와 강력한 왕권에 의한 통치는 민심을 흉흉하게 했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천하는 어지러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211년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둔장(屯長)으로서 장성(長城) 수비를 위해 허난성 동부에서 징발된 부대를 이끌고 지금의 베이징방면으로 진입해갔는데, 장쑤성 펑셴에 이르렀을 때 폭우를 만나게 된다. 진승은 본래 비천한 신분 출신으로서 남에게 고용되어 농사일에 종사한 사람인데 비 때문에 정해진 기일까지 현장에 도착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문책으로 죽을 것을 두려워해 감독자를 살해, 대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네 된다. 이어 그들은 여러 현을 공략하였으며, 수만의 농민 병력을 모아 진(陳)나라 땅인, 지금의 허난성을 점령, 진승이 왕이 되어 오광으로 가왕(假王)을 삼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게 된다. 이에 자극받아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장군 장감(章邯)에게 대군을 주어 동진(東進)하게 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한다. 진승의 군은 내분으로 인해 세력을 떨치지 못한 채 진승과 오광은 부하장군에게 살해된다. 반란은 6개월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기점으로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에 의해 진은 멸망하였다.위에서 언급했듯이, 진승오광의 난은 진나라의 강력한 왕권과 엄격한 법 앞에 억압 받던 민중들이 반기를 든 반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 당시로써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강력한 법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것도 남의 일이나 해주고 먹고 사는 그 당시로써 하층민에 해당하는 진승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일을 추진하고 일으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위의 사건개요에서 보듯이 폭우를 만나 현장에 도착할 수 없게 되자, 문책으로 죽을 것을 겁내 공모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이는 이러한 점은 첫 부분에 진승과 고용주와의 대화중, '嗟呼. 燕雀安知鴻鵠之志哉?(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백조의 큰 뜻을 알겠는가?)'라는 말을 본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진승이 비록 하층민에 속하는 계층이었지만 그는 항상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반란을 통한 봉기였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꿈이 때를 만나 ‘왕’이라는 칭호를 얻어 결국은 이루어 졌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사마천이 어떠한 연유로 진승의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의 진승의 모습이 지금의 나에게는 상당히 혁명적이었으며 틀을 깨부수는 행위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어쩌면 사마천은 진승의 봉기와 틀을 깨 부시는 모습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추어 봤을지도 모른다. 이 사기라는 글을 쓰는 사마천 자신의 의지를 천민에서 왕이 되기까지의 진승의 의지에 투영해가면서 글을 서술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진섭세가는 현재 꿈과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를 읽고...☞ 목차1.서론2.내용요약- 인구:증가와 이주- 인구변동의 추이-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식량자원의 증가- 이주: 팽창하는 제국- 개척자의 생활3.서평 및 결론중국은 1949년에 공산주의가 승리하고 중국이라는 광대한 영토에 자리잡기 전 한 세기 이상을 중국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과 또 외부 열강의 침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점이 너무나도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인지 내가 들어갔던 중국역사에 관한 거의 모든 수업시간에는 중국의 문화나 사회 변화보다는 정치적인 면을 중심으로 하여서 공부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님이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와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라는 두 권의 책을 레포트 주제로 주셨을 때 내가 이 책을 택하였다는 생각이 든다.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우리 학생들이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학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항을 배울 수 있는 기회란 많지 않았고 그러한 나에게 이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라는 책은 내가 수업시간에 간략히 들어왔었던 각 시기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좀더 깊이 알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나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10가지의 소주제중 '인구: 증가와 이주'라는 주제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내가 이 주제를 택한 이유는 내 나름대로 흥미가 있는 부분이었고 또 생각하기에 중국 사회 경제적인 배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와 이주이 책에서는 중국 인구의 변동의 추이와 그에 따른 식량자원의 증가, 계속해서 팽창하였던 중국의 영토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였던 개척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중국인구의 증가와 이주'라는 소주제에서 다루었다.중국의 인구는 1400년도에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었던 공간에 1850년에는 약 여섯 명이 살게 될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로 인해 한 마을의 인구밀도는 더욱 더 커져 갔고 해 1600년도에서 1650년 사이에 수가 줄어 들기도 하였다.{연도인구(단위: 백만 명)12*************08140065~*************1251779275(오차 25)1850430(오차 25)1*************(오차 15)중국의 인구(전국)이렇게 중국의 인구가 급격스럽게 증가한 원인을 인구학자들은 중국인구의 출생률의 증가가 아닌 사망률의 감소로 보고있다. 이러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몇 가지 제시된 해석을 본다면 몽고와의 전쟁 이후 명대와 청조에 이르는 평화시대로 인해서 그 전에 전쟁 등으로 인해 사망하였던 인구 감소가 줄어들었다는 해석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서 사망률이 떨어졌다는 해석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신대륙에서 들어오게 된 작물로 인해 식량 공급량이 늘어 좀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 세대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하지만 이렇게 인구의 증가와 감소를 중국 내부 사회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려는 것과는 달리 전 세계적인 입장으로 해석하려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이 나오게 된 이유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인구역시 중국의 인구와 같은 속도로 증가와 감소를 같이 하였기 때문인데 학자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인구 증가와 감소의 이유를 지구의 기상변동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630, 40년대 중국의 인구가 갑작스럽게 감소한 시기는 지구의 태양활동이 저하된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또 다른 예로는 이 시기에 중국 내륙의 호수가 다른 시기보다 더 자주 동결되었고 또 일본 역시 이 시기에 '칸에이대기근'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사망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식량 자원의 증가중국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한가지 중요한 문제 역시 야기되었는데 그것은 그 늘어난 인구가 먹어야 할 식량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농업기술은 5세기 이전에 그들의 선조가 사용했었던 것과 거의 같았다. 그들의 농업기술 중 유일하게 진보한 날과는 달리 그들은 실생활 속에서 새로운 품종을 찾아냈다. 농민이 경작지에서 직감적으로 새로운 품종을 찾아서 시험해보고, 그 결과가 성공한다면 그 품종을 다른 농민에게 권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새로운 품종을 찾아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개량품종의 발견은 농민들이 새로운 미개간 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많이 발견되었다.이들에게는 개량품종의 발견 중 조생종(벼의 성숙기간이 기존의 품종보다 빠른 것)의 발견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조생종으로 인해서 1년에 한번 경작하는 것이 아닌 2번 또는 3번까지 경작할 수 있는 일이 가는,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던 방법에는 위에 언급한 것들 뿐만 아니라 신대륙에서 들어온 작물들도 일조하였다. 이러한 작물들로는 땅콩, 옥수수, 고구마, 담배, 감자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신대륙 작물들이 중요하였던 이유는 위의 작물들이 재래작물들이 자랄 수 없는 땅에서도 재배가 가능해 재래작물들과 경쟁할 필요없이 경작면적과 수확량을 늘려 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작물들은 가뭄에도 강하고 수확량도 많았으며 영양가도 뛰어나다는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신대륙에서 들어온 작물들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 예로 땅콩은 사치한 음식에만 같이 쓰일 뿐 20세기 초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는 오르지 못했고 감자나 고구마 그리고 옥수수 역시 그들의 기호에 맞지 않아 그리 환영받는 식량은 되지 못했다. 그 예로 중국에서 감자를 즐겨 먹는 사람은 아직까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들 신대륙에서 건너온 작물들이 중국인의 식탁을 대부분 바꾼 시기는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주: 팽창하는 제국1400년 이후 중국에서 증가한 식량 공급량의 반은 전통 농업기술과 외래작물의 영향이었고 나머지 반은 새로이 땅을 개간한 데 따른 것이었다.1400년부터 1930년까지 중국의 경지면적은 약 네 배가 늘어났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구릉이나 습지를 이용분이 남부에 거주하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이러한 인구의 이주로 인해 중국의 식생활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한 이유는 중국 북부에서는 주로 기장, 밀, 보리를 심었으나 남부에서는 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의 수확량이 기장의 수확량보다 거의 두 배나 많았기 때문에 벼는 곧 한족의 주된 식량이 되었고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한족에게는 새로운 농법과 새로운 사회조직, 그리고 새로운 요리법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구의 이주로 인해서 그들의 경제와 사회, 문화가 변화하였던 것이다.1400년 이후 계속된 인구 증가로 인해 중국의 인문지리는 계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명대 초기에 인구의 대부분은 북쪽의 북경에서 남의 광주에 이르는 초생달형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을 제외한 지역은 아직 인구밀도가 낮았고 경작 가능한 토지 역시 그대로 남아있는 실정이었다.그러나 1400년 이후 계속된 인구 증가로 인해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변경지역으로 이주해갔다. 명조는 때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여러 가지 특혜를 들어 자발적인 이주를 유도했다. 이러한 방법은 청조 역시 사용하였고 그 결과 운남이나 사천 등지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는데 성공하였다.이러한 사람들의 이주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이주민들의 자발적인 이주였다. 이런 자발적 이주는 서쪽으로 향한 강서, 호북, 호남, 사천으로의 이주와 더 나아가 운남, 귀주, 광서 등 남서쪽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북서를 향하여 한수를 따라 호북의 북부에서 섬서의 남부를 거쳐 감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과 동으로 향하여 광동과 복건에서 대만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중국 내의 이주로 인해서 중국 내의 인구 변화의 패턴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19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이부의 흐름이 변화하였는데 개발도상에 있던 서부와 북서부는 너무 많은 인구의 증가로 인해 더 이상 인구를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농민 등은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만주나 해외로 이주하였고 다시 동부 초생고 소각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처음 몇 년간은 풍작을 가져왔으나 후에 종종 자연환경을 심하게 파괴, 토양침식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렇게 파괴된 땅에서는 경작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땅을 옮겨 같은 방법을 사용, 그들의 귀중한 자원이었던 비옥한 땅을 유실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그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작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원자재를 시장에 내다 팔아 미미한 수입을 보충하였다. 변경 지역에는 목재가 풍부했고 동부 초생달 지역은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초기 이주자들은 임업에 종사 구릉의 삼림을 벌목하여 파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역시 무분별한 발목으로 인하여 국토의 삼림자원을 고갈시키고 고지대의 토양유실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이러한 목재 말고도 변경 지역에서는 차, 마, 모시. 옻. 구리, 양모, 피혁, 곡물 등을 개발된 지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변경의 이주민들은 집단적인 자활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척민들이 부딪힌 정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인주의의 발달을 억제하게 되고 '타자에 대한 의존성'이라는 중국인의 기질은 강화했다. 이러한 협동은 새로운 이주자들에 대한 반감을 지닌 비한족 선주민들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그들은 방어를 위해서 '칼, 단검, 화승총'등으로 무장 비한족 선주민들에 대항하여 싸워 나갔다.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폭력성은 선주민들을 제압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주민이 넘치고 땅과 여러 자원들이 부족하게 되자 그들은 출신 성이나 현, 관습 등을 따져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왕조는 관료가구가 가진 권위를 서서히 이란 변경 지역까지 확대, 학교를 세우는 등 여러 가지 고급문화가 이들 지역에 적어도 표면을 덮게 되었다. 그럼에도 변경 지역에는 유력자의 횡포, 집단적 항쟁 등의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있었다.- 서평처음에 교수님이 두 권의 책을 주제로 서평을 써오라고 하셨을 때 나는 원래 '장개석을 왜 패하였는가?'를 택할 생각이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