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브 부르기바 (튀니지, 1903~)======== 목 차 =========1. 서 론1) 튀니지의 역사 1 page2) 하비브 부르기바 1 ~ 3 page(태생 ~ 초대 대통령 당선까지)2. 본 론1) 하비브 부르기바의 업적Ⅰ세속화 정책 3 pageⅡ의식 개혁 운동 3 pageⅢ교육 3 ~ 4 pageⅣ역사의식의 고취 4 pageⅤ여론의 수용 4 page2) 하비브 부르기바의 문제점 ......... 4 ~ 5 page3) 정권말기 - 명예스럽지 못한 퇴임 ... 5 page3. 결론 - 퇴임 이후 ... 5 ~ 6 page4. 참고문헌 .. 6 page1. 서론1) 튀니지의 역사카르타고·페니키아 시대부터 지중해의 농업지대로 알려져온 튀니지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나, 7세기 이후 아랍인의 공격을 받아 끝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베르베르 원주민도 이슬람화하였다. 1336년 하프시드 정권 때 독립하여 수도를 튀니스로 정하고, 일시적으로 리비아와 알제리의 일부에까지 세력을 떨쳤으나, 1535년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고, 1570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16세기 말부터 투르크가 임명한 토후(土侯)의 정부가 세워졌고 1635년부터 대추장이 정권을 장악하여 세습왕조를 세웠다. 서구 여러 나라의 해운(海運)이 발달하고 튀니지의 재정이 궁핍해짐에 따라 지배자는 해적행위로 경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으며, 1881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한 뒤 같은 해 5월 그 보호국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까지 프랑스의 보호국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1975년 3월 개정헌법으로 부르기바는 종신대통령에 취임하였 통치자) 군대의 장교였으나, 프랑스 통치에 반대하다가 면직 당했다.민족주의적 가풍에도 불구하고 부르기바는 성장하여 명문인 튀니스의 사디키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랑스가 운영했던 엘리트 무슬림들이 들어가는 리세 카르노에 진학했다. 1920년에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고, 프랑스 여인인 마틸라 로레인과 결혼하여 1927년에 튀니지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유학하는 동안 부르기바는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과는 달리 자유적이고 진보적이었던 프랑스 자유사상에 심취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한평생을 살면서 그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당시 튀니지에서는 1920년에 창당된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인 구헌법(데스투르)당의 공식적인 대변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아브드 알 아지즈 앗 살리비가 대중적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구헌법당의 전신은 1900년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은 관료 엘리트들과 이슬람 개혁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청년 튀니지 당으로, 이들은 동부 아랍 세계에서 알 아프카니와 무함마드 아브드의 주도로 일어났던 이슬람 개혁운동인 살라피야 운동에 고무되어 튀니지 사회의 현대화와 서구화 그리고 이슬람의 부흥과 개혁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들은 1907년 이라는 저널을 발간함으로써 최초의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구헌법당은 튀니지 인들의 법적 권리, 공정한 과세, 집회·결사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유럽·튀니지 공동 법원을 보장하는 1861년 자유헌법의 부활을 요구했다. 프랑스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저항은 1920년대부터 거세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프랑스로부터 귀국하여 최초의 튀지지 경제협력체와 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1924년의 파업사태는 저항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이들의 파업은 강제적으로 저지되었고, 정부는 소요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구속하고, 신문 발행을 금지시켰으며, 정치적 활동을 탄압했다.1930년대 들어, 새로운 세대의 민족주의자들이 구헌법당에 이어 등장했다. 10년 넘게 구헌법당의 활동은 보수적인 색채를 띠어왔다. 강력한 인 참여를 선언했고, 튀니지의 독립과 프랑스의 이익을 보장하는 우호조약을 제안했다. 1934년 이들이 이끄는 급진주의자들이 구헌법당을 접수하고 마테리를 대표로, 부르기바를 사무총장으로 하는 신헌법(네오데스투르)당을 만들었다. 신헌법당은 즉각적으로 프랑스 제품의 보이콧과 민주적인 의회제도의 확립을 촉구했다. 신헌법당이 비록 세속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해도 지도자들은 무슬림 정체성르 유지하려 했으며, 모스크와 수피의 성소인 자위야에 공식적으로 모이는 등 이슬람 정서에 의지하기도 했다.또한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이슬람을 포기한 튀니지 인들은 무슬림 묘지에 매장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무슬림 정체성을 상징화했다. 그들은 이념적인 면에서 구헌법당과는 달리 세속적이며 진보적인 길을 택했으나, 결코 구헌법당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민족주의 운동의 응집과 연속성을 위한 조치였다.신헌법당이 전개했던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튀니지의 독립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대중적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8년 4월에 있었던 시위가 폭력 사태로 이어지자 프랑스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당국은 시위를 탄압했고, 정당들을 해산시켰으며, 부르기바를 시위 조종 혐의로 체포하여 프랑스로 강제 이송시켰다.1940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르기바는 이탈리아 로마로 가게 되었다. 그가 로마로 가게 된 것은 무솔리니 정권이 튀니지에 대한 권리 행사에서 부르기바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튀니지에는 상당수의 파시스트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기바는 연합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 결과 그는 1942년 튀니지로 이송되어 3년여의 시간을 독일로부터의 연금상태로 보내야 했다. 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부르기바는 연합국을 지지했던 그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부터의 구금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로 피신했다. 그때부터 부르기바는 카이로에 머물면서 튀니지와 알제리의 독립을 위한프랑스와 튀니지간에 교환된 의정서로 1881년이래 지속된 프랑스의 위임통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부르기바는 내각 수상이 되었고, 1957년 헌법제정회의가 베이의 모든 권한을 박탈함으로서 부르기바를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독립 튀니지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2. 본론1)하비브 부르기바의 업적Ⅰ세속화 정책1959년 헌법에 의해 사법·입법·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받은 부르기바 정부는 점차적으로 프랑스 관리들을 내국인으로 교체했으며, 경제 분야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을 토대로 외국인의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과, 공공 부분과 민간 부문을 병행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경제재건과 함께 부르기바는 터키 공화국의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의 영향을 받아 튀니지 사회를 세속화하는 강력한 정책을 시행했다. 자이루나 사원을 교육성 관활로 두었고, 종교학교들을 공립학교 제도에 편입시켰다. 또한 1956년 채택 된 세속적인 민법 조항에 따라 일부다처제가 폐지되었고, 이혼이 합법화되었다. 적어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튀니지아의 여성 지위는 다른 이슬람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중매 결혼의 전통에 한계를 두고 여성 결혼 최저 연령을 17세로 정하면서 정해진 결혼에 대한 거부의 권리를 부여했다. 또 그가 여성의 머리를 감싸던 베일을 보기 싫은 넝마로 여겼기 때문에 베일 역시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다. 1960년에는 이슬람에서의 금식원인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이 산업생산을 저해시킨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튀니지 정치는 오랫동안 서구 지향적 온건주의 성격을 띠었다. 60년대 튀니지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균형 된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독립 영웅으로서의 부르기바는 국민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되었다.Ⅱ의식 개혁 운동튀니지 사회는 프랑스 식민정치에서 독립한 후 프랑스 적인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다. 튀지니가 서구화되어 간 데에는 부르기바의 정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튀니지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된 부르기바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는 국민의 의식과 가치를 변형시키는 일이었지 못했었다. 그러나 계획 착수 년도인 1958년에는 취학률이 38% 였으며, 그 후 1960년, 66년, 68년의 집계에 의하면 취학률은 각각 59%, 71< 72%로 급격히 상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학생 수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서 다른 마그립 사회보다도 훨씬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Ⅳ역사의식의 고취부르기바는 프랑스의 언어 및 문화를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오늘날의 튀니지의 문화적 이중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융화시키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 이전에 경험했던 다른 지중해 문화와 함께 보다 광범한 지중해 문화권에 포함시킴으로써 튀니지의 전통문화와 프랑스 문화와의 융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부르기바는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불행스러웠던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대해 더 이상 원망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그는 과거에 대한 불행을 탓하기 보다는 현재의 기회를 잘 이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운명을 더욱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다. 튀니지의 엘리트 계층들도 부르기바의 이러한 논리를 받아 들어, 다른 마그립 사회와는 달리 튀니지의 문화를 지중해 문화권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 국민들에게도 부르기바의 이러한 설명은 프랑스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는 데 대해 적지 않은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여론의 수용부르기바는 어떤 결정을 취하기 전에 공개 토론회를 통해 상이한 견해들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장려했다. 그는 토론 중 자신의 정책을 비난하는 견해에도, 유익하다고 생각할 때는 귀를 기울여 그것을 참작했다. 부르기바의 이 같은 경직된 흑백론이 아닌 건전한 시민의식은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이런 의식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부르기바는 근대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서 국민들과 부단히 접촉하였다. 그는 지방을 수시로 순회하면서 대중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론을 수용한 지도자였다.2)하비브 부르기바 정권의 문제점하비브 부르기바의 세속적 정치는 튀니지 사회에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선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가 자본주의와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