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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학 ] 농경민의 관점에서 바라본 유목민 -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1. 농경민의 눈에 비친 유목민: 두려움과 함께 탐구의 대상유라시아 대륙의 지형은 남부가 평원, 북부는 초원으로 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천산산맥, 고비사막, 카스피해 등 자연의 장벽이 왕래를 방해하고 있다. 이에 평원에서는 농경, 초원에서는 유목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생활방식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유목이라는 두 생활방식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때 유목이 농경의 단계에 이르기 전의 생활방식이라 하여 유목을 농경보다 미개한 단계로 보는 학설이 주장된 바 있었으나, 농경과 유목은 단지 그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의 적응도에 차이 가 있을 뿐인 같은 단계의 생활방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유목이 농경에 비해 열등 한 생활방식이라는 견해를 비판하며, 이를 지리적 조건의 차이로 보는 견해에 관해서는, Rene Grousset,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p.11..시간이 흐름에 따라 농경민과 유목민간의 접촉이 있게 된 것은 당연하였는데, 농경은 그 특성상 정주를 필요로 하였고, 반면 유목민은 이동이 특성이었으므로 이 접촉은 주로 농경민의 거주지에 대하여 유목민이 다가오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또한 접촉은 단순히 평화적인 사절의 교환이나 인사치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개 파괴적인 침략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유목민이 농경민의 거주지를 침략, 약탈하게 된 배경은 물론 사회경제적 요인에 있었으며 , 이에 관해서는 전게서, p. 12-13 참조..때때로 이러한 침략은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 그리고 왕조의 붕괴 등 기존 질서의 전면적인 해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서방과 동방에서의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씩 언급하자면, 동방에서 이동해 온 훈족의 침략에 의하여 당시 로마제국 외곽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이 압력을 받게 되어 로마제국 내로 대대적으로 침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결국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하게 되었는데, 훈족은 동방의 흉노가 이동한 것이라초기에 이들이 유럽 측에 전설의 존 프레스터 왕국 으로 오인된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유목민의 발흥 초기에도 농경민의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같았다. 특히 서방과 동방에서 초기 유목민의 발흥과, 농경민과의 관계에 관하여 기록한 것으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를 각각 주목할만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과 농경제국인 페르시아 사이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사마천은 사기에서 따로 흉노열전을 두어 유목민인 흉노와 농경제국인 한 제국 사이의 관계를 다루었다{) 흉노열전 외에도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흉노와 한과의 관계를 제하고서는 도저히 논할 수 없 는 부분이 많다. 흉노와 한 사이의 화의를 주선한 유경에 관하여 논한 유경숙손통열전 이나 수차에 걸쳐 흉노 정벌에 나선 위청과 곽거병에 관하여 논한 위장군표기열전 참조..따라서 이하에서는 역사, 사기라는 이 두 사서에서 스키타이인과 흉노에 관하여 다룬 바에 대하여 고찰하여 농경민이 바라본 유목민의 특징에 관하여 살펴보고 이를 비판하기로 한다.2. 역사와 사기에서 언급된 유목민의 특징2.1.1 도시 등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성곽이나 성채 또한 짓지 않는다.(전략)... 그들은 도시도 성채도 짓지 않고, 어느 곳을 가든 끌고 다니는 수레 안에서 거주하며 ...(후략) {) 헤로도토스, 박광순 옮김, 역사, 범우사, 2001, p.396.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후략) {) 사마천, 상게서, p.795.역사와 사기에서 공히 유목민의 특징으로 주목한 것은 이들에게는 성곽도 없고 도시도 없으며, 요새 또한 없어 일정한 주거지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스 도시국가시대의 황금기에 살고 있던 헤로도토스로서는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 무제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대도시 장안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마천으로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1.2 비판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은 이처럼 유목민이 도시나 성곽, 성채를 짓지 않는다는 점을답신에서 재인용하였다."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하였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 사마천, 상게서, p.795.농경민에게 있어서 유목민의 침략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므로, 농경민들은 유목민의 전술에 대하여 자연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교황이 파견한 사절 카르피니가 남긴 책은 적정시찰서 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인 데, 카르피니는 이 책에서 물러간 척 한 후 되돌아와 다시 한번 도시를 궤멸시키는 몽골인의 전술 등에 관하여 언급한 후 이들을 물리칠 방책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들도 스키타이와 흉노의 전술에 관한 기사를 남겼는데, 주목할만한 점은 유목민이 후퇴를 자유자재로 하고 도주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이다.2.2.2 비판이처럼 사가들 본인이 도주 자체가 유목민의 전술 중 하나임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의 도주를 농경민의 이들에 대한 승리나 전공인양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헤로도토스의 경우 제3자인 페르시아와 스키타이 사이의 전투를 다루고 있을 뿐이므로 특히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스키타이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도주를 통하여 상대를 지치고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전술을 펴는 일련의 전개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 있어서는 흉노의 도주를 폄훼하고 이를 한의 승리로 묘사하는 기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는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시기에 한과 흉노 사이의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일년에 수 차례씩 한나라의 변경이 흉노에 의하여 침략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많은 물자가 약탈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북벌에 나선 한나라의 군대는 기동력이 느린데다가 보병 중심 편제의 특성상 대군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그 출정 정보가 사전에 누출되기 쉬워 흉노는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미련없이 사막 북쪽으로 도주하였기 의 노비로 삼았다...(후략) {) 사마천, 상게서, p.806.헤로도토스나 사마천 모두 저서에서 유목민이 전투에 있어서 수급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수급을 다루는 방법을 헤로도토스의 경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사기에서는 비록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흉노의 선우 또한 월지의 왕의 목을 잘라 그 두개골을 술잔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그 묵돌선우에 관한 기록이다. 묵돌선우는 월지의 인질로 보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월지의 왕을 증오하여 그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있음직 한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사마천, 상게서, p.806-807 참조..2.4.2 비판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스키타이가 적의 목을 잘라 이를 수습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이를 손수건으로 만들어 과시하거나, 술잔으로 만든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접한 농경민은 반사적으로 유목민의 난폭함과 야수성, 야만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헤로도토스 본인 또한 이는 심히 야만적인 습성이라는 것에 주목하여 자세히 기술하였을 것이다. 사마천도 흉노가 전투에 있어서 수급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언급하였다.그러나 고대의 전투에 있어서 수급을 중요시한다는 점이 야만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농경사회에서도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적의 수급에 따라 포상을 내건 일은 비일비재하며 특히 난세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하였다{) 초·한 혼전의 시기에 한의 고조 유방은 항우의 머리를 베어 오는 자를 열후에 봉하겠다고 포고하여 한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은 항우의 용맹이 두려웠음에도 불 구하고 다투어 항우를 추격하여 항우의 사후 그의 시신은 다섯 갈래로 갈라질 정도였다.. 오히려 수급을 중요시하고, 수급을 가져온 자만이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헤로도토스의 기술이나, 생포된 사람은 사로잡은 자의 노비로 삼았다는 사마천의 기술에서 철저하게 능력주의에 기반한 경쟁이 유목사회의 특징이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농경사회의 경우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 두 분밖에 없소. 그대에게는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에 울상이나 짓지 말도록 하시오. {) 헤로도토스, 상게서, p.436-437에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와 스키타이의 왕 이단티르소스 의 서신 교환 중에서 인용.(전략)...승상의 장사인 임창은 이렇게 말하였다. 흉노는 새로 패하여 곤란한 처지에 있는만큼, 마땅히 귀순한 속국으로서 변경에서 조회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중략)... 선우는 임창의 주장을 듣자 크게 노하여 그를 감금시킨 다음 돌려보내주지 않았다...(중략)... (전략)... 지금 선우께서는 가능만 하다면 나아가 한나라와 싸워주십시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항복하고 한나라의 신하가 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공연히 멀리 달아나 사막 북쪽의 춥고 고통스러움을 참고 물도 풀도 없는 땅에 숨어서 사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한 일은 해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그(곽길. 인용자 주)의 말이 끝나자 선우는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그를 만나게 한 주객의 목을 베고 곽길을 붙들어 북해 근처에 감금시켰다...(중략)...양신은 선우를 보자 이렇게 권고하여 말하였다. 만일 화친을 원하신다면 선우의 태자를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주시오. 그러자 선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본래의 약속이 아니오. 본래의 약속으로는 한나라가 항상 옹주를 보내주고, 비단, 무명, 먹을 것 등 많은 물건들을 주어 화친을 하면 흉노도 한나라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겠다는 것이었소...(후략) ...(중략)... 그리고 한나라 사신이 흉노로 들어오면 흉노는 그때마다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한나라가 흉노의 사신을 들어오면 흉노는 그때마다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한나라가 흉노의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흉노도 또 한나라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는 등 반드시 대등한 수단을 취하지 않고는 가만 있지 않았다.{) 사마천, 상게서, p.825-828.헤.
    사회과학| 2004.10.06| 9페이지| 1,500원| 조회(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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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사]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개혁론: 정전제와 기자정전론
    I. 서(序): 기자정전 그리고 조선의 평양1) 정전제란 무엇인가정전제는 본래 중국 하·은·주 삼대{) 유학에서는 일종의 이상향이자 지향하여야 할 덕치의 치세로 보고 있다.의 토지에 관한 유제(遺制)였다고 주장되고 있다. 『맹자』, 『주례』{) 주례는 기원 원년을 전후하여 출토되었는데, 출토 직후부터 훈고학자들에 의하여 진위 논쟁에 휘말렸다. 주무왕 시기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에 대한 기사 가 적혀 있으며, 이 글의 핵심 주제인 정전제만 해도, 당대 주나라에서 정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할만한 측량 기술이나 통치 체제를 갖추었을리 없다는 지적이 아직도 많다., 『한서』 등에 그에 관한 내용이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제도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정전제가 붕괴되었으며, 진·한 이후에는 토지겸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전제를 다시 실시할 것을 주장하는 견해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정전론이라 칭하여졌다. 정전론은 토지제도 개혁론의 하나로서, 균전론·한전론 등과 함께 한대 이후 당 ·송대에 걸쳐 계속 제기되었다.2) 조선시대와 정전제공자가 주는 하, 은의 예를 살필 수 있었으니, 주의 문화여, 찬란하도다! 나는 주의 예를 따르겠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고 언급{)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주공 단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는 시종일관 주나라의 재흥을 지향하였는데, 그의 저서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춘추 에서도 엄격하 게 주나라를 정통으로 삼는 이른바 춘추필법을 견지하고 있다. 주왕실의 권위가 쇠락하는데도 태평성대에만 등장하는 기린이 나오고 더군다나 이것이 뭇 사람들 에 의하여 잡혀 죽게 되자, 기린의 처지를 자신에 비유했음인지(진실로 주왕실의 태평성대에 등장했었어야 할 공자가 난세에 등장하여 인정받지 못함) 탄식하면서 춘추의 붓을 놓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들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효종의 적통과 관련된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때에 우암은 당시 영의정 정태화{) 영의정 정태화는 평생을 조정에서 보낸 정통 관료로서, 산림에서 많은 시간을 보 내 산당 이라는 당명까지 만들었던 우암에 비하여 노련한 정치가였다. 영의정 정태화는 예송논쟁이 시작될 때 우암이 사종지설 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를 만류하였으며, 결국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할 것을 예견하고 이후 자신 은 예론이 일 때마다 예론에 밝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고 빠졌음은 물론 아들에 게도 절대 예론에 참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가 위험하다고 경고했음에도 주례{) 효종은 인조의 차자로서 장자인 소현세자가 독살당하자, 세자의 자리를 승계하였 다. 우암은 주례의 사종지설 에 따라 가통을 이었으되 적통은 아니다 라고 주장 하였는데 이를 남인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는 언사라고 공격하여 곤경에 빠졌 다. 현종은 서인이 주례를 포기하고 국조오례의에 따를 것을 기대하였으나 우암 이 주례를 고집하였으므로 현종은 대로하여 남인 허적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를 고집하다가 결국 실각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주례에서 토지제도로 제시하고 있는 정전제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되어 중종 때 사림파에 의하여 실시 주장이 제기된 이후로 계속 그 실시가 주장된다.3) 조선시대와 기자기자는 은나라의 현인으로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자, 기원전 1122년 동쪽으로 도망하여(기자동래) 조선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팔조금법을 가르쳤다고 하는 인물이다. 주나라 무왕이 조선후에 봉하고, 후에 한나라 무제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졌다고 하나,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중국의 사료에도 서로 사실이 모순되고 시대가 맞지 않는다.기자동래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중국측의 유력한 사서의 기사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주로 인용된다."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재수중(在囚中)의 기자(箕子)를 석방하니 기자가 그 석방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선(朝지 않았다. 율곡 이이의 동방도학불행{) 율곡전서 제15권, 동호문답 중에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도학에 행하여지지 않았음을 논하다 라는 글의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손님: 우리나라에서도 왕도로써 세상을 다스린 분이 있었습니까.주인: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고증(考證)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임금이 되었을 때에 시행한 정전제도(井田制度)와 팔조(八條)의 가르침 등이 틀림없이 순수하게 왕도(王道)에서 나왔으리라고 상상됩니다. 그 이후로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였다가 고려(高麗)가 통합을 하였는데 그 사업을 상고(詳考)해 보면 오로지 꾀와 힘으로만 하였으니 어찌 도학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나라의 임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들도 진지(眞知)와 실천으로 선정(先正)의 전통을 계승한 이를 듣지 못했습니다. 불교(佛敎)에 잘못 빠져들고 화복설(禍福說)에 흘려, 도도하게 천년동안 아무도 뛰어난 이가 없었습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鄭夢周)가 약간 유자(儒者)의 기상(氣象)은 있었지만 그 역시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그 행한 일을 살펴보면 충신(忠臣)에 불과할 따름입니다.손님: 그대는 우리나라에 수천년 동안 한 사람의 진유(眞儒)도 없었다고 하니, 어찌 그리 말을 지나치게 높은 척하는 것입니까.주인: 그대가 나에게 물으므로 내가 감히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요, 어찌 지나치게 높은 이론을 즐겨하겠습니까. 이른바 진유(眞儒: 참된 선비)라는 것은 세상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 숨어있으면 반세에 가르침을 전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서는 행할 만한 도술(道術)이 없고 물러난 뒤에는 전할만한 가르침이 없다면, 비록 진유(眞儒)라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습니다. 기자(箕子)가 오랑캐의 풍속을 바꾼 이후에 다시는 본받을 만한 선치(善治)가 없었으니 이는 진출(進出)한 사람 중에 도를 행한 내었다.한백겸의 주장의 파장은 대단한 것이어서, 즉각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궁이 지어지고, 심지어 평양의 별칭조차 기성(箕城)으로 바뀔 정도였다. 또한 선조대에 기전도가 간행된데 이어 정조대에는 기자정전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모아 기전고가 간행되었다. 기자묘 및 기자궁도 정기적으로 중수되었는데 숙종대에 기자묘를 중수한 후 건립한 기자묘중수기적비(箕子墓重脩記蹟碑)는 기자동래설에 관하여 가장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사적 중 하나이다. 기자정전에 관한 한백겸의 주장 이후로 간행된 모든 평양 지도 및 평양 풍경도에는 하나같이 평양성 서남쪽 대동강변의 기자정전 흔적을 또렷하게 묘사하고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평양풍경도를 들 수 있다. 이 병풍에는 평양 성의 크기보다도 평양성 서쪽에 위치한 기자정전의 흔적이 더욱 크게 묘사되어 있다.이니 그 파장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또, 조선 순조대의 암행어사 박내겸이 남긴 기행문 서수록 {) 규장각 소장에서 박내겸은 평양에 출도한 후 평안도 관찰사와 함께 평양 유람에 나서는데, 기자묘, 기자궁, 기자정전을 돌아본 것이 매우 중요한 일정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평양을 방문한 타지 출신의 조선 유학자들이 평양에서 꼭 가보고자 했던 곳은 대동문, 연광정, 을밀대 등 잘 알려진 명소보다도 기자정전에 관련된 유적들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III. 정전제, 이상에서 현실로: 사림파의 공세중종대에 대거 등용되어 도학정치 라는 급진적인 이상주의적 개혁을 주도한 사림파는 토지제도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중종 11년, 정전제 시행을 주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다듬은 후 중종 12년 한전제의 실시를 주장하고 사림파의 기세가 절정에 달한 중종 13년에 궁극적으로 정전제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균전제의 실시를 주장하게 된다.중종 13년, 경연 자리에서 지경연 박수량은 균전론을 주장하면서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비록 지금 정전법을 시행할 수 없어도 균전법 궁중파와 손을 잡고 부중파의 농지 등에 손을 대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것을 베어 빈자에게 주 게 되면, 원망을 하는 자는 소수이며, 새로이 농지를 얻는 자는 다수임을 중종이 왜 모르겠는가. 중요한 것은 원망을 하는 자들이 반정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 려 때문이었을 것이다.빈자는 경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자에게 되팔 것이 분명하니 무익할 것이오.하지만 사림파들이 포진하여 있는 경연장에서는 사림파들의 주장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종은 정치적 부담을 훈구파에 떠넘기기 위하여 대신들에게 명하여 토지제도 개혁을 논의해 보라고 명하였다. 이야말로 요즈음 많이 말하는 개혁대상에서 개혁을 맡기는 꼴 이 아닐 수 없다.영의정 정광필이 대책을 논의한 후 대표로 중종에게 아뢰었다.남의 농토를 겸병하는 부자의 토지는 끝이 없고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것이 백성들이 곤궁한 원인입니다. 앞으로는 50결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도 더 점유하는 자는 소재지 수령으로 하여금 금지토록 할 것이며, 남의 이름으로 몰래 취득하는 것도 금지해야 합니다.백성들이 곤궁한 원인에 대한 파악은 매우 잘 되었다. 외견상 대책도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50결 이상의 농지 소유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한전법은 무용하다는 것, 그리고 50결 자체도 매우 넓은 농지{) 조선 후기에 하곡 정제두가 한전법을 주장하면서 일단 3결 로 할 것을 주장했 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50결 한전법이라는 것이 외견상 한전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것, 또 한전법을 시행하여야 할 소재지 수령과 지방 대지주가 실은 한통속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 식의 대책인 것이다.이 한전법이 아무런 효력이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한전법 제정 이듬해인 중종 14년, 사림파가 다시금 문제제기를 하고 나서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정전법은 시행하기 어렵지만 균전법은 보다 쉽게 실시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50결로 한전법을 정했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몇 달.
    인문/어학| 2004.05.27| 9페이지| 1,000원| 조회(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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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주의론] 제국주의론: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평가B괜찮아요
    1. 들어가며제국주의론에 관한 박지향의 최근 연구는 근대화와 수탈이라는 제국주의 지배의 양면적 속성에 관한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통치에 있어 근대화의 공이 더 큰지, 혹은 수탈의 과가 더 큰지의 문제는 그간 외국에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 왔고, 또 그에 관한 연구서도 많이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제강점의 영향으로 인해 수탈론에서 벗어난 견해는 친일적 주장으로 매도되어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제국주의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가 없는 실정{) 박지향,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 사울대학교출판부, 2000, 머리말이다.또한 박지향의 '협력자'개념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여지가 있다고 본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지만 박지향에 따르면 민족주의자로서 지켜오던 신념과 문명개화론이 일제의 정책과 일치하였다고 하여 그것에 찬동하였다고 매국노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30년대에 친일 활동을 하였다고 그 이전의 행동도 모두 친일활동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박지향의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중 근대화·수탈에 관한 문제와 협력이론에 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특히 근대화·수탈에 관해서는 기존의 견해를 간략히 먼저 살펴본 후, 박지향의 연구와 비교해 보기로 하겠으며, 협력이론에 관해서는 박지향의 연구를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논의하는 방법을 쓰기로 한다.2. 제국주의론에 관한 기존의 견해제국 팽창의 원인을 레닌(V. Lenin)은 경제적 동기에서 찾고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팽창하려는 욕구를 가진 독점 자본주의 단계라고 진단하고, 독점 자본주의는 독점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시장통제와 천연자원의 공급지를 찾게 되고 재분할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 , 돌베개, 1992 와 레닌, 제국 주의: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 , 과학과 사상, 1988을 참조이러한 레닌의 논지를 각지에서 도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각지의 상황에 맞게 변형, 수정하여 신제국주의론 이 성립한 바 있으며, 전후에 이로부터 다시 소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모두 경제적 동기를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오의택, 제국주의론 , 거름, 1993을 참조한편, 라이트(H. Wright)와 몸슨(W. J. Mommsen)은 제국주의론에 관하여 고전적 견해와 마르크스주의적 견해,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론,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론, 생활권 견해와 주변부 이론 등을 폭넓게 고찰하였다.{) 분량 관계상 여기서 그 모든 것을 소개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H. Wright, "제국주의 란 무엇인가 , 까치, 1981 과 W. J. Mommsen, "제국주의의 이론 , 돌베게, 1983을 참조그러나 독점자본의 팽창 욕구라던지 원료 공급지와 시장의 안정적 확보 등 경제적 동기가 제국주의 팽창의 주원인이라고 지적한 점에서는 역시 경제적 동기를 주원인으로 지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제국주의론에 관한 박지향의 견해박지향의 연구는 제국 팽창의 원인을 경제적 동기보다도 - 물론 경제적 동기도 중요하다고 인정은 하고 있으나 - 전략적, 정치적 동기와 문명화의 사명 , 사회진화론 등에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예컨대 경제적인 가치가 전무할 뿐 아니라 산악투성이라 통치·점령하기도, 유지하기도 힘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러시아의 군대가 남진한다면, 인도에 있던 대영제국의 장기말 도 한 칸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물론 이 경우에도 대영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은 궁극적으로 인도에서의 영국의 경제적 이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박지향은 제 3 세계에서의 제국열강의 식민경영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함으로서 답하고 있다.우선 원료공급지로서의 식민지의 가치를 살펴보자. 최대의 제국주의 열강인 대영제국은 후에 제 3 세계 라고 불리게 되는 지역에까지 석탄을 수출했는데, 수출량은 1837년에 100만 톤, 1882년에는 2000만 톤, 그리고 1913년에는 7800만 톤에 이르렀다. 독일도 석탄 수출국이었다.{) 박지향, 앞의 책, p.90금속자원에 있어서는 1914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선진국들이 사용한 금속자원의 90%가 다른 선진국들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선진국들은 철, 구리, 납, 보크사이트, 주석, 망간 등 자신들이 소비하는 광물질의 98%를 생산하여 거의 자급자족 수준에 있었다.{) 위의 책, p.90즉, 식민지가 원료 공급지로서 큰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다음으로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가치를 살펴보자. 박지향은 이렇게 언급하였다.... 선진국 전체를 볼 때 1800∼1938년간 전체 수출의 17%만이 제 3 세계로 향하였줎 고 그 중에서 단지 반 정도가 식민지로 수출되었다. 따라서 유럽 총수출의 9%만이 줎 식민제국으로 향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기간 동안 선진국들의 총 수출은 국민 총줎 생산의 8∼9%를 차지했기 때문에 제 3 세계로의 수출은 이들 국가들의 총생산의 1.3줎 ∼1.7%에 불과했으며 식민지로의 수출은 단지 0.6∼0.9%에 머물렀다는 계산이 나온줎 다 ...{) 위의 책, p.91여기에서 식민지가 원료공급지와 시장으로서의 역할 모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4. 박지향의 제국주의론 연구에서 지적하고 싶은 사항박지향의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에서 가장 큰 한계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논의 내용의 대부분이 대영제국의 경우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박지향의 전문 분야가 영국사이기 때문에, 그리고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그리고 가장 위대하다고 인정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위의 책, 머리말그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그러나 영국은 식민지와의 교역에서도 자유무역 원칙을 고수 {) 위의 책, p.105하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국가로서 19세기 말은 주요 선진 산업국들이 보호무역주의로 전환한 시기{) 자세한 내용은 위의 책, p. 242 참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제국우대관세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는 형편이었다.따라서 박지향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만약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어야만 한다면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제일 나았던 것이며 영국이 가장 덜 나쁜 식민제국이었던 것이다.{) 위의 책, p.293그러므로 관대했던 영국의 식민통치가 아닌, 예를 들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중심으로 제국주의를 고찰한다면 또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5. 박지향의 협력이론에 관하여박지향은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에서 육당, 춘원 등을 협력자로서 새롭게 정의하여 또한 관심을 끌고있다. 박지향에 따르면 민족주의자로서 지켜오던 사상과 신념을 포기하고 내선일체 운동에 적극 참여한 박인덕, 장덕수, 윤치영, 김활란, 주요한 등의 행동은 분명 협력행위였지만 30년대에 협력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 이전의 행동까지도 전부 협력행위로 볼 수는 없는 것 {) 박지향, 협력, 협력자 ,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pp. 141-142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개화파가 친일의 길을 가게 된 데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의 개념과 계몽운동의 논리가 일제가 주장하던 문명개화론과 일치하였다는 사실도 작용하였으며{) 위의 책, p.134당시 사회를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인식하게 된 지식인들은 결국 약자인 조선은 당연히 강자인 열강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으로 판단하여{) 위의 책, p.134근대적 개혁세력은 약소국의 식민지화를 당연한 것 {) 위의 책, p.134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 협력자들은 일본통치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위의 책, p.139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빠른 속도로 법제도가 정비되고, 관리층의 부패가 감소되는 등 사람들이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의 개선이 있어서{) 위의 책, p.139그 결과 「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본의 보호체제에 반대하던 장지연조차 1915년경이 되면 일본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 위의 책, pp.139-140이런 논리에 따르면 육당, 춘원, 박영효, 김윤식 등은 매국노라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일제에 협력 하였던 협력자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매국노는 송병준, 이완용, 유길준, 서정주 등으로 범위가 크게 좁아지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4.05.27| 5페이지| 1,000원| 조회(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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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현대사]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평가A좋아요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결정적 패배, 대륙의 상실, 추락의 역사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청말 이래로 중국혁명에 있어서 수임세력임을 자임하며 청조의 붕괴, 민국정부의 수립, 반군벌 북벌의 단행,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일전에 참전 등 근대 중국사에서의 변혁적 흐름을 주도하였던 국민당정권은 어째서 2차대전의 종전 후 4년만에 대륙을 상실하고 동남변방의 대만으로 밀려나게 되었는가.국민학교(현재에 이르러서는 초등학교로 개칭되었으나)에 입학한 후, 1학년 때에 담임선생님께서 그 넓은 중국의 땅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땅은 오직 조그만 섬 하나라고 열변을 토하시며 공산주의를 늘 경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구 서독이 바로 중국 너머에 있는 줄 알았고, 영국이 중국 남쪽의 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는 줄 알았던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칠판에 한반도에 비하여 한없이 넓은 중국의 땅을 그리신 후 조그만 섬 대만을 연신 분필로 두드리시며 분개하시던 담임선생님의 행동이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 때가 1988년이었으니, 그 후로 국제정세는 급변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땅 자유중국을 옹호하고, 대륙을 집어삼킨 공산중국의 야욕과 음모를 통렬히 비난 하던 담임선생님의 열변이 있은지 불과 4년 후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식 수교하게 되었고, 중화민국의 대사관은 단교와 함께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쓸쓸히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각종의 언론매체에서는 고작 3주전에 중화민국 정부에 대해 단교 예정을 통고한 우리 정부의 사려깊지 못한 외교를 격렬히 성토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청천백일기를 손수 마지막으로 게양하던 단교 전날의 중화민국 대사의 모습을 어느 신문이 1면 사진으로 비중있게 게재하였기에 당시의 기억도 선명하다.내전의 와중에서 대륙을 상실했으며(1949), 국제연합에서 탈퇴(1971), 곧이어 가장 친근한 우방이던 미국-일본과의 연이은 단교가 이어졌으며, 마침내는 대륙의 지배자이자 라이벌인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승계하는 것(198 좋으련만, 장개석은 본래 혁명정당인 국민당에 있어서 방계이고 신분도 군인이었으므로 강권정치만으로는 국민당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기가 어렵다는 것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에 장개석은 훈정약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당내 개조파와 반장파를 달래려 하였으나 이것은 새로운 분열만을 낳았을 뿐이었으니, 입법원장 호한민이 손문의 유지에 반한다 하여 이에 반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호한민의 근거지인 광주에서 새로이 반장의 불길이 타올라 반장적인 광주비상회의에는 수차에 걸친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반장의 중추로 활약하고 있던 왕정위는 물론, 장개석에게 번번히 패하며 홍콩으로 피신하였던 이종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등 그간의 반장전쟁의 총결산의 모습까지도 비추고 있었다.이루지 못한 지방군벌의 타파와 국민당정권의 부담그런데 이러한 사분오열의 상황에서 1931년 9월, 마침내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무력 강점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분열의 양태를 지속할 수 없었던 국민당은 장개석, 왕정위, 호한민 등이 모두 모여 거당일치로 일단 분열상을 봉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단 한심한 사분오열과 합종연횡의 반복은 중단되었으나, 중앙집권적 근대 정부의 양상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으니 염석산 등의 제군벌이 근거지로 복귀하여 다시금 독립적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서 군벌세력은 끝까지 타파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반장전쟁의 기치를 든 광서군벌 이종인만 해도 장계전쟁, 월계전쟁에서 대패하고 홍콩으로 도주하기까지 했으나, 어느새 다시 복귀하여 종전 후에는 염석산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 부총통에 당선되고, 장개석의 사임 후에는 총통대행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종인의 국민당 부총통 당선에 관해서는, 위의 책, p.259.이는 국민당정권으로서는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하여 대일항전과 국공내전 기간 중 중대한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이종인, 풍옥상, 염석산 등의 대군벌뿐 아니라 사천의 유상, 번문화, 유문휘, 등석후 등의 지방군소군벌과 운남의 용운 등도 단지 노골적니 국내적으로는 반장전쟁이 잇따랐고 수차에 걸쳐 수십만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초토작전이 거듭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외에서는 1931년부터 일본의 침략과 잠식이 계속되었다.중일전쟁과 국민당정권, 국부군의 경제적 시련1937년에는 드디어 중일전쟁이 개전됨으로써 장개석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은 그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동남지방을 재빨리 점령하였는데, 특히 상해에서는 제19로군이 영웅적으로 항쟁하였고 장개석도 정예군을 투입하였으나 결국 대패하였으며 수도인 남경도 곧 함락되었다. 강소성이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안휘성의 대부분도 점령당했다. 1941년에는 영국령 홍콩이 점령되었는데 이것은 영국 이상으로 중경정부에게도 타격이었다. 장개석의 중경정부의 행정력은 전시수도 소재성인 사천성과 귀주성, 절강성, 광동성 등에만 제한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장개석이 이들 지역을 새로운 경제적 기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천성 같은 경우 현지의 군소 군벌들이 국민정부의 행정적 노력조차 집요하게 방해{) 위의 책, p.28.하였는데 하물며 경제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간 중 장개석의 경제적 기반은 외국의 원조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장개석은 외국의 원조를 자신의 직할 세력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강화했다.위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일으킨 정치적 반작용에 대해 서술했으나, 경제적으로도 이에 따른 타격은 컸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부대에 대한 보급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각 부대들은 보급품을 현지 조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농민들의 분노를 야기했다. 국부군의 정예라는 호종남 휘하의 부대조차 중경정부로부터 제대로 보급을 받은 것은 1941년 한 해에 불과{) 위의 책, p.78.했다. 설악 휘하의 부대는 호북성과 호남성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1944년의 대륙 타통 작전으로 이 부대가 6주간 항쟁하다 붕괴되기 전까지 이 대군의 존재는 호북에서 43년에 걸친 하남성의 기근{) 이하의 내용은 위의 책, p.88-89에서 인용.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탕은백의 부대를 포함한 근 1백만명의 국부군이 하남성에 주둔하며 군량을 현지조달하고 있었으므로, 1942년 여름의 흉작은 겨울에 바로 기근으로 연결되었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철저히 징세당한 농민들은 수백만명이 하남성을 벗어나 피난하였다. 중경의 국민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전부의 1/4를 경감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실효성은 전혀 없었는데 어차피 전부가 경감되더라도 주둔군이 먹어야 할 군량미를 중앙정부에서 보내 오는 것은 아니라서 각종 잡부금이 전부의 경감분만큼을 메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1943년 초에 밀이 익을 때까지는 아무도 기다릴 수 없었기에 기근의 피해는 더욱 광범위해졌다. 이런 기근의 결과로서, 하남성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탕은백의 부대가 일본군의 대륙 타통 작전에 직면하여 후퇴하자 당장 하남성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1942년 초에는 감숙성에서 6만명의 농민이 봉기{) 이하의 내용은 위의 책, p.89-90에서 인용.하여 징병과 곡물 납세를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는데 이는 위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감숙성의 곡물 납세 구조가 특히 복잡하여 부정부패가 더욱 개입할 여지가 컸기 때문인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이 봉기는 결국 호종남 휘하의 정예부대가 출동하고서야 진압되었다.종전 이후: 전부면제책이 초래한 결과전쟁이 종전된 후에 이와 같은 상황이 해결될 수 있는 조건, 즉 평화와 안정과 행정조직의 정비가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조건은 결코 오지 않았다.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는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으며, 행정조직은 국민당정권이 정권으로서 잔존할지 여부가 불투명하게 되면서 더욱 자신의 잇속챙기기에 부심했다. 더군다나 국민당정권에 이미 모든 이들이 실망했기 때문에 유능한 인물이나 새로운 인물이 더 이상 당이나 정부로 유입되지 않아 국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국부군은 홍콩과 인도로부터의 원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항일전 시기의 국부군의 전력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개전 초의 국부군은 모든 면에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는데, 심지어 근대 정규군의 기준에서 볼 때 국부군은 정규군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스러운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훈련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장비와 무기는 낙후되었는데 그나마 불충분했다. 탄약 보유 또한 사정은 같았다.{) 이스트만 저, 앞의 책, p.156.장개석의 총통 직속으로 되어 있는 정예 사단은 상술한 바와 같이 훈련과 장비면에서 뛰어났으나 그 수는 8만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수준이 대체로 독일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된 이 정예사단과 동등하거나 혹은 약간 열세라 가정하더라도 일본군은 그와 같은 병력을 대륙에 100만명을 투입하였다. 장개석은 개전 시에 정예사단 외에 중앙군으로서 30만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중앙군 외의 여타 100만명에서 120만명으로 추산되는 국부군 잔여 병력은 군벌들의 군대의 후신이거나 또는 아직도 군벌에 의해 독자적으로 통솔되는 군대였다. 그런데 이들 군대는 일본을 장개석에 비해서는 더 적대하는 입장 이면 다행이었고, 일본과 장개석을 둘 다 적으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장개석을 더욱 적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서군벌 염석산의 적대 순위에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논한 바 있다. 운남성의 용운과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장개석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은 없었고 대체로 일본을 적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괴뢰인 왕정위에 대한 용운의 인연으로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었고, 왕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린 다음에도 운남성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자 하는 중경정부의 계속되는 시도 때문에 운남성의 지방군을 전선으로 빼내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였다. 따라서 이들 지방군은 일본과 대항하는 병력으로서는 여러 가지 고려할 점이 많았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최대 150만명의 국부군 병력이 100만명의 일본군 병력과 맞대결하는 하였다.
    인문/어학| 2004.05.27| 23페이지| 1,500원| 조회(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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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아시아사] 실크로드 탐험사의 검토
    1. 서"실크로드의 악마들"은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한 서양 탐험가들의 발굴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서두에서 이른바 탐험 과 탐험가 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가장 첫 문장에서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라는 부제를 인용하면서 탐험 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고, 또 서양 탐험가들의 발굴사 라는 표현을 쓰면서 탐험가 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 - 가장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되는 스타인 경을 비롯하여 르콕, 펠리오 등 - 이 과연 탐험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탐험가라고 지칭해야 마땅할 것인가?이 책의 원제는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로서 굳이 직역하자면 실크로드의 외국인 악마들 정도에 해당한다. 원제의 의미는 중국인들이 현재 스타인 경 등을 악마 와 다름없는 역사적 도적 내지는 악한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실제로 서세동점의 시기에 비서구 지역 각지에서 자행된 서구인에 의한 유적, 유물, 도서의 반출은 세계 각지에서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 나라만 해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략으로 외규장각의 희귀 고문서들을 약탈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리이스와 영국 사이에서의 엘긴 마블스 반환을 둘러싼 분쟁은 그 역사가 수십년에 이르고 있다. 영국의 노동당 정권은 집권할 경우 이 유명한 유물을 반환하겠다고 했다가 집권하자 이를 번복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그리이스에서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이 유물을 반환받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했을 정도이다. 이집트의 박물관에 가면 과거 피라미드 안에 있던 관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미이라는 없다고 한다. 이에 관람객이 가이드에게 미이라는 어디 갔습니까? 라고 물으면 영국에 장기 출장 가 있다고 합니다.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고 한다. 영국이 이집트를 방안 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약탈, 반출 임을 주장하고 있는 측에서는 유물이 훼손될 위험성이 현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님 을 주장하여 반박하고 있다.{) 위의 책, pp. 18-21이 점에 있어서 보충하고 싶은 논거는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정교한 역사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관해서이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불법 병탄{) 국제법상 조, 일 양국간의 합병 조약이 무효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자세한 논의는 이태 진 편저,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 태학사 참조한 이후 전국 다섯 곳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중 오대산 사고의 본을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다. 이 때의 명목은 학술적 연구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보존하기 위함 이었다. 그 후 1926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이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영영 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국내에 남아 있었다면 현존하였을 것이나, 일본으로 반출된 탓에 지진에 노출되어 소실되고 만 것이다. 이는 베를린으로 옮겨진 벽화들이 2차대전의 와중에서 소실되고 만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적 역사적 손실으로 생각된다.따라서 유물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옮긴다 라는 것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논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서든 유물이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대규모 인재로 인해 훼손, 멸실될 위험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되려 유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유물, 유적이 더욱 훼손될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 유물이나 유적을 이동 전시할 때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와 배려를 생각하면 이 시기에 르콕이나 스타인 경, 펠리오 등이 행한 반출 포장 방법은 확실히 위험도가 높은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추가로 지적하면서 탐험인가 약탈인가에 대한 입장을 대신한다.3. 둔황의 고문서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30일 거리의 그 사막을 기행으로 건너면 대카안에게 속한 사초우(Saciou)라는 도시를 만난다. 그 대단히 경건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갖가지 우상들로 가득하다. 라는 구절이 석굴과 불상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구절이 당시 수도원과 사원들을 헤치고 다니며 고문서와 유물들을 수집하였던 탐험가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탐험가들은 이 곳에 가장 먼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 곳의 고문서들을 가장 먼저 입수하기 시작한 스타인 경의 경우에도 둔황을 방문한 것은 천불동에 관해서 조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란에서 오는 도중에 발견한 수수께끼의 고대의 망루가 만리장성의 일부가 아닌지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계획에서 천불동은 잠깐 들러본 후 물과 식량을 보충받는 곳{) 피터 홉커크, 앞의 책, pp.227-228이었다. 이 곳을 방문한 것이 결과적으로 스타인 경의 명성을(동시에 악명도) 한없이 높여주고 그를 놀라운 역사적 학문적 사실의 발견자로 만들어주었다{) 스타인 경이 발굴한 둔황문서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여 출간된 서적도 있다. 수잔 휫필드 저, 실크로드 이야기 참조. 이 책에서 저자는 서두에 오렐 스타인 경의 실크로드 유적지 발굴 ...(중략)...을 기리며, 이 책은 두 사람이 발견한 귀중한 자료들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때 스타인 경에게 고문서를 건네준 것은 왕위엔루(王圓 ){) 타가와 준조, 박도화 역, 돈황석굴 , 개마고원, p.186. 피터 홉커크, 앞의 책, p.228에서의 기록 도 또한 같다. 다만, 수잔 휫필드, 앞의 책, p.18에는 량위안루(梁圓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기인지 인쇄상의 실수인지, 혹은 이 쪽이 맞는 표현인지 알 수 없다.라는 중국의 도사였는데 그는 17호 석굴이라고 현재 명명된 곳에서 많은 고문서를 발견하여 그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4. 스타인 경과 왕위엔루, 그리고 문서의 반출흔히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스타인 경이 둔황에 도착했더니 마침 왕위엔루가 문서를 들고 기다리고고 스타인 경이 직접 중국 사막의 유적들 에서 적었듯이{) 피터 홉커크, 앞의 책, pp.233-234, 왕위엔루가 고문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넘길 적당한 물주를 기다리고 있다가 때마침 스타인 경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그가 그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관계에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비록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진 인물이기는 했지만, 사원에 대한 헌신과 제 손을 복원하겠다는 종교적 사명감은 진실{) 위의 책, p. 234했던 인물이었던 왕위엔루라는 인물을 너무나 천박한 장사치로 격하시키는 듯한 느낌이 든다.스타인 경은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서로간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왕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거듭거듭 노력한 후 비로소 설득을 통해 고문서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스타인 경은 고문서를 살펴보기에는 지극히 불편하였던 왕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비록 나중에 서로간의 신뢰가 깊어진 후에는 보다 자세한 조사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스타인의 텐트로 고문서를 옮기긴 했지만. 왕이 자신의 사원에 상당한 기부를 하는 조건으로 {) 위의 책, p.241. '상당한 기부 라는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후에 스타인 경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든 경비는 영국 납세자가 지출한 단 130 파운드에 불과했다 라고 자랑스럽게 술회했듯이 스타인 경에게 있어서는 별로 큰 돈을 들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둔황문서를 반출해 갔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 은화의 가치를 감안해보 면 왕위엔루에게 있어서는 이는 상당한 기부 였으리라고 생각된다.필사본들을 대영제국에 있는 학문의 전당 으로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한 것도 이 즈음에 이르러서였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스타인 경과 왕위엔루에 관한 언급은 다소간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감이 있다고 하겠다.5. 17호 석굴의 의문점왕위엔루가 고문서를 발견한 곳이며 스타인 경의 문서 반출이 이루어졌던 17호 석굴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에서도 그에 관의미한다. 그렇다면 17호 석굴의 입구 봉쇄에 관한 스타인 경의 견해에 따르면 17호 석굴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봉쇄된 것이 된다.17호 석굴 봉쇄의 이유나 시기보다, 왜 이러한 석굴(17호 석굴은 매우 협소하며 16호 석굴에 부속되어 있는 형태와 같다)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견해{) 위의 책, p.189. 한편 같은 책, pp. 190-193에서는 당시 둔황의 절도사였던 장의조와 그 의 청을 받고 장안에 사자를 보냈던 홍변이 17호 석굴 조성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도 있으며, 실상 17호 석굴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생각하면 석굴 입구가 봉쇄된 이유라던지 그 시기에 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것도 일응 타당하지만, 일단은 17호 석굴 봉쇄의 시기와 이유에 대해서만 알아보자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첫 번째 견해는 서하가 둔황을 공격해 온다고 하여 불전을 지키기 위해 성급히 봉했으며, 시기는 1034∼1035년경이었다고 한다.{) 위의 책, p.194이 설은 스타인 경 이후 왕위엔루와 그의 17호 석굴에 접촉할 수 있었던 펠리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주장되어 온 것으로, 펠리오가 스타인 경과는 달리 중국문헌과 서지학의 대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터 홉커크 저, 앞의 책, p.271. 한편 같은 책, p.256에는 펠리오의 능통한 중국어 구사 에 중국 관리들이 매우 놀랐다는 일화가 나와 있다.신뢰할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되며, 그 근거로는 펠리오가 수집한 17호 석굴의 서화, 경권 가운데 위 연대 이후의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 설이 지지되고 있다고 한다.한편 또 다른 견해는 송 태조 개보연간에 카슈가르에서 흥기한 카라한 왕조 -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 왕조는 서역불교의 중심지였던 호탄을 점령하고 그 도시의 불교유적을 파괴한 바 있다 - 가 둔황을 지배하고 있던 서하 왕조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불교를 신봉하고 있던 서하가 그에 대비하여 둔황의 불교도들에게 경권을 보관다.
    인문/어학| 2004.05.27| 7페이지| 1,000원| 조회(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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