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천’의 삶과 창작방법론Ⅰ. 서론김남천은 다른 작가와는 남다를 삶을 살았다. 물론 그 시대의 지식인이고 문학인이라면 모두 평범한 삶을 살기는 어려웠겠지만, 특히 김남천은 철저한 카프계열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지도자로서 살아가기에는 더욱더 힘이 들고 많은 역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의 평범하지 않은 삶은 월북작가라는 하나의 딱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에 비해 많은 작품과 함께 많은 창작방법론을 제기한다. 그 중에서도 김남천은 리얼리즘 을 문학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창작방법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생에 있어서 하나의 큰 줄기이며 더 나아가서는 전부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써놓고 그것의 창작방법론의 명칭이나 개념을 설정하기도 한 것처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다른 작가에 비해 많은 창작방법론을 제기했다. 그것은 물론 문학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의와 함께 그의 생에 있어서 창작방법론은 어떻게 전개되며 그가 살아가는 과정 중, 문학과 비평활동을 하는 중 왜 그러한 창작방법론이 나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Ⅱ. 본론1. 김남천의 생애김남천의 창작방법론은 그의 생애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그가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어떠한 창작방법론을 계속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창작방법론을 바꾼다거나, 개인적으로 커다란 정신적인 경험이나 성장을 겪은 후 창작방법론이 바뀌는 경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가 그의 창작방법론에는 어떤 영향을 살폈는지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생애를 크게 카프 해체 이전과 카프 해체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1) 카프 해체 이전(1) 카프 활동 이전김남천은 1911년 평남 성천에서 김영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시대 군청공무원이었고, 그의 장인은 일제시대 군수를 지냈다고 하니, 동경유학 이전의 생활은 대체로 유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9년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대 법정대에 입학하였지만 1학로 사물을 보는 당의 문학을 옹호하는 볼세비키적 문학관에 입각함을 알 수 있다.▷ 카프 제 1차 검거사건과 카프해산까지극좌파가 실권을 잡기 시작한 쯤, 카프 제 1차 검거사건(1931.2∼1932.8)이 일어나 김남천은 70여 명의 카프 명원과 함께 연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맹원이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지만 김남천 만은 무산자 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송치되어 실형을 받고 1933년 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이런 옥중체험은 그의 문학에 변화를 주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물」등의 작품을 냈지만 혹평을 받고 고향으로 낙향해 작품을 쓰지만, 1937년 「남매」가 나오기 전까지도 소설 쓰지 못하는 소설가로 두 번째 절필기간을 맞는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방법 논쟁과 임화와의 「물」논쟁의 평론활동을 한다.카프는 이후 탈퇴문인에 의해 내부분열이 생기고, 일제에 의해 제 2차 카프검거사건(1934년 6월부터)이 발생하면서 사상전환의 강요가 가혹하게 진행된다. 1934년 처를 잃고 낙향했다고 경성경찰서로 여러 번 소환 당하고, 카프 해산 계 제출을 강요받은 김남천은 임화와 함께 1935년 임화와 함께 1935년 5월 21일 해산 계를 제출한다.2) 카프 해체 이후카프가 해체된 후 문단의 분위기는 더욱 더 악화되고 이러한 정세 속에서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들어간다. 그러나 김남천은 평론을 쓰느라고 소설 쓸 경황도 없어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이후에서야 다시 소설 쓰기를 시도하나, 그렇다할 작품을 얻지 못한다.카프 해체 이후, 김남천은 이 시기의 문단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가장 철저한 대응양식을 보인 작가로서 개인의 사상적 처신문제이다. 그리고 둘째, 카프문단을 지도하는 비평가로서 현실에 맞는 비평 내용을 모색해야 하는 이중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로 인하여 김남천은 이후 여러 창작방법론을 시도한다.▷ 카프해체 이후의 창작방법론의 양상그러한 창작방법론을 간단히 순서대로 살펴보면랄론이 관념적인 것에 그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실재, 성격, 습성 등의 어의에 비추어 풍속과 연관성을 갖는다고 보아 풍속론 을 주장한다. 그리고 1938년 후반부터는 문단에는 장편소설의 논의가 활발해진다. 리얼리즘이 가장 훌륭하게 구현될 수 있는 형태는 장편소설이라는 것을 자신의 창작경험에서 터득한 김남천은 로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전형적이 장르라고 규정한다. 그는 백철, 임화, 한설야 등의 장편소설론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로만개조가 장편소설을 위한 모색이라고 제시한다. 이것이 이른바 로만개조론 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적용된 작품으로는 대표적으로「대하」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그는 전형문제와 함께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관찰적인 태도를 주장하는 관찰문학론 을 제시한다. 개인적 주관에 의한 현실의 반영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주관을 철저히 객관에 종속시키는 탈이상의 관찰문학론 을 낳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리」, 「장날」, 「俗謠」「노고지리 우지진다」등의 작품이 있다.▷ 40년대 이후40년대 들어서면 문단은 사상적 기반을 잃고 불안과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된다. 이 같은 상황을 세계사의 전환기 로 인식한 김남천은 「소설의 운명」을 통해 우리 소설이 전환기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김남천은 어려운 시기라도 작가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주었으나 실제로는 민족현실의 당면과제를 벗어난 세계사의 보편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실재성이 결여된 문학론이 된다. 그리고 소설이 가야할 방향을 인간성의 창조에서 탐색하는 김남천은 「소설의 장래와 인간성 문제」에서 루카치식의 사회주의적 전망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관념론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전향소설「經營」과 「麥」이 있다.▷ 해방 이후해방이후 그의 삶은 확실히 전해지지 않고 그의 문학을 총체적으로 살피는데 중요한 요건이기는 하지만 해방이전 까지의 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적이기 때문에 간단히 살펴보면 이러한 김남천의 생애에서 문학사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의 창작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창작방법론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위에서 어느 정도 다루어 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창작방법론의 개념과 내용, 나아가서는 한계까지도 간단히 살펴보자.1) 고발문학론 :주체의 자기성찰과 매개되지 않은 세계관, 현실고발문학론의 시기는 혼돈과 모색의 시기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외부적 압력에 의한 조직의 해체다. 합법적 차원에서의 예술 운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정치와 문학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 규정이 흔들리는 상황에 처한 김남천은 문학적인 자기 수습의 방안으로 올바른 세계관의 확립을 추구한다. 문학론에서는 이러한 동요가 자기비판으로서의 자기고발과 리얼리즘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즉, 그러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상적 무기의 확립-올바른 세계관의 체득-과 철저한 자기 비판이다.김남천이 고발문학론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은 프로문학에 있어서의 올바른 경향성의 확립이었다. 올바른 경향성은 당파성 과 객관적 진실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다. 경향문학론에서 당파성의 요청과 객관적 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의 요청은 동시적인 것이지만, 예술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구체적으로 맞닥뜨려진 상황, 타개되어 야 할 상황에 따라 당파성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편향을 보이는 것이다. 즉,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작품과는 불일치를 보일 수도 있으며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와 작품과는 불일치를 보일 수도 있으며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은 나타날 수 있으며 그것이 리얼리즘의 승리 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오로지 현실 그 자체를 추구하는 리얼리즘인가, 그것은 어떻게 전형으로서 현실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소시민으로서의 자기 한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지녔던 사상에 대해 무참하게 패배한 것이라고 인정하) 모랄-풍속론 : 주체의 정립과 세계관, 현실의 연계모색모랄-풍속론은 문예학적 탐구를 통한 형상화의 매개로서의 모랄과 풍속의 발견 , 그리고 그것을 문단타개책으로 끌어올린 로만개조론 으로 특징 지워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실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모랄-풍속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남천은 문학자에게 있어서는 문학적 실천이 곧 생활실천임을 역설한다. 문학가로서 정확한 자기규정, 문학인이기 이전에 사회적 공인이므로 공인으로서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신판정치주의이므로 문학가는 문학으로만 할 뿐이라는 김남천의 자기규정은 그가 실질적으로 생활실천을 포기했음을 선언함에 불과하다. 문학은 이제 삶의 한 방식이 아닌 그의 삶 그 자체로 되면서 존재 자체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인으로써 자기를 규정하고 생활실천의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소시민 지식인의 자기분열에 대한 극복은 현실 그 자체와의 대결이 아닌 순수한 자기문제로 한정되며, 문학 내에서만의 문제로 된다.▷ 모랄의 발견김남천은 문학적 표상의 핵심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갖는 이론적 범주의 합리성과 일정한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한다. 여기에 김남천은 주체의 문제가 개입된다고 본다. 이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주체화 란 과학적인 개념으로부터 문학적 표상에까지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화를 곧 모랄 이라고 하고 그것이 과학적 핵심을 갖는다고 했을 때 그는 고발에는 고발의 정신만이 있고 세계관이 있다고 하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과학적 개념이 형상으로 됨을 말한다고 했을 때, 그가 모랄 이란 말로써 혼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개념의 형상화로써의 문학적 모랄이 사회적 모랄, 도덕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임에 비해 사성을 띠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개념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이는 보편성과 감각적 개별성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김남천 식대로 말하자면 과학적 개념과 6
Ⅰ. 서론 - 문제 제기 및 접근 방법문학과 현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가장 먼저 이러한 단순한 물음에서부터 이 연구를 시작해나가고자 한다. 작가들은 소재를 선택하는 문제에서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 당대의 시대 상황이나 사회현실로부터 일정한 제약이나 구속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작가들은 소재를 선택하는 단계에서 자기 검열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기 검열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소재를 선택하고자 할 때 그것이 국가·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작가 자신이 먼저 검열해보는 작업을 말한다. 작가가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경우는 비단 소재를 선택하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쓰고자 하는 언어나 장르적 관습 그리고 내용 등 광범위하게 소설은 그 당시 시대상황이나 사회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 이후 루카치의 반영론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적 비평관점에서 항상 논의의 핵심으로 떠올랐던 문제가 바로 문학과 현실 의 관계였다. 문학 중에서도 과연 소설과 현실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흔히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며, 소설은 인생이 거울 이라고 말한다. 특히 소설은 사회적 기록 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장르보다 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그 시대상을 반영함을 그 장르적 표지로 삼는다.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거울을 보고 제 얼굴의 미추를 알듯이 소설 또한 그 당대의 시대상황이나 사회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로 문학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과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고 했을 때, 소설에 반영되는 현실은 실제 현실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반영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반영이란 인간의 주관적 의식을 통한 해석이나 평가를 통해 인간의 주관적 의식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본질이나 핵심을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반영개념의 본질인 것아니었고 단지 막연한 찬사나 지도뿐이었던 것 같다. 그것 또한 그의 한두 작품에 대한 것으로서 엄밀한 분석을 통한 비평은 아니었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들이 주요시했던 점은 현진건의 표현기교에 대한 문제가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0년대 말에는 일련의 프로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민족주의 문학가 , 역사적 민족주의자 등으로 지칭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현진건에 대한 올바를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그를 기교파 작가로만 묶어두는 초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김동인 역시 현진건을 동적 인생을 그리려하지 않고 정적 사람을 사진 찍으려 한데서 현진건의 비상한 기교밖에는 발견할 수 없고 주제가 빈궁하다고 평했다.우리는 비상한 기교의 천재로 현진건을 들 수 있다. 몹시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느낌을 우리는 그의 전체에서 느낀다. 조화의 극치, 사실 의 절미, 과연 기교의 절정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은 뒤 머리에 남은 일물도 없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는 인생의 사진사이다. 가령 사진사라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면 그는 정물화가다. 그는 사람 을 보 고 사건 을 보았지만 인생 을 못보고 생활 을 못 보았다.{) 김동인, 「한국근대소설고」, 《사상계》 3권 11호, 1955.11, p.273즉 동인 역시 현진건을 단순한 기교파로 단정지어 말했던 것이다. 현진건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박종화가 문예 사조 면에서 현진건을 사실주의 작가로 평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는 〈대전 이후의 문예운동〉이란 글에서 이 작가는 리얼리즘을 걸어왔다 고 평했던 것이다.그 후 40년대 말에 백철은 현진건의 작품 속에서 문장을 뽑아 열거하고 문장의 치밀성을 찬양하면서 현진건 문학의 특징으로 문학수법의 사실성과 기교의 우이성을 들었으며 현진건 문학의 특색으로는 거기에 심원한 사상성을 구할 것이 아니고 문학수법의 사실에 있다 {) 백석, 《신문학사조사》, 신병문화사, 1972, pp356∼360고 하여 문예사조 면에서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조운현은 그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아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 현진건의 문학활동 및 문학관현진건의 문학활동은 1920년 《개벽》지에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고 1922년에는 《백조》동인으로 활동함으로써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문학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집착하였는가는 「첫기고 회상」, 「처녀작 발표당시의 감상」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빙허가 이같이 문학에 집착했던 까닭은 자기 생활의 긴 방황기를 통하여 정신적 좌절감의 궁극적인 극복수단이 바로 문학이라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인데 〈희생화〉발표 후 문단의 반응으로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에게 떨어진 것은 황석우의 혹평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 더욱 문학수업에 정진하여 1921년 〈빈처〉를 발표하여 문단의 화제가 되었고, 이어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1922년 《백조》 창간에 동인으로 참가한 그는 〈타락자〉, 〈유린〉,〈피아노〉등을 발표하고, 다니던 《조선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조선일보를 그만 둔 그는 1924년에 《동명》의 편집동인이 되고, 같은 해에 〈할머니의 죽음〉과 미완의 장편작품 〈지새는 안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는 〈까막잡기〉, 〈그립은 흘긴 눈〉, 〈운수 좋은 날〉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리고 이 해는 그의 숙형 정건이 상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다가 피검된다. 이 사건으로 그의 작품활동은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이 강령하게 배어든다. 1925년에 〈불〉, 〈B사감과 러브레터〉등을 발표하고, 1926년에는 〈사립정신병원장〉을 발표하고, 단편 11편을 수록한 『조선의 얼굴』(글벗집)을 간행하게 된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 〈고향〉은 이 시기 그의 작가의식을 대변할 만한 작품이다. 이 무렵 일경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던 숙형 정건이 옥사하고 형수마저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비극을 겪게 되는데 그 이후 〈신문지와 철장〉, 〈정조와 약가〉등 약간의 단편을 발표할 뿐 , 창작활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어디까지나 창조라는 작가의 개성에 의하여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은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인간현실의 진상을 밝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문학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뜻으로 오래 전부터 철학적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디포우와 리처드슨의 소설 이래 산문 작품 속에 내재한 삶과 문학과 대응관계에 대하여 큰 전환점을 부여했던 것이다.김중하는 사실주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리얼리즘은 작가가 소속된 사회적 요구와 현실의 진실을 정확히 투사하 고 증언하려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실험과 예리한 직관으로 인 간 생활과 본성을 발가벗고 숨김없는 진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문 학이다. 즉 현실사회의 악덕과 빈곤, 병폐, 그리고 숨겨진 진실을 찾아 내어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자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해서 현 실이 재현될 때 리얼리즘의 참모습이 나타나게 된다.여기에서 논의된 사실주의 정의를 통해서 참된 사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순수한 반영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본질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사실주의 작가는 사회적 역사적 필연성을 잘 투사하여야 하며, 현실에서 부조리 원인과 해결책을 작품 속에 암시하여야 한다.사실 리얼리즘의 개념은 소설의 장르가 지속되는 한 인생의 문제처럼 복잡하고 또한 그것과 더불어 언제나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을 만큼 명확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 확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요긴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19세기 비판적 리얼리즘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리얼리즘의 문제를 둘러싸고 허다한 논란과 시도가 계속되어 왔으며, 아직도 총괄적이고 최종적인 답인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리얼리즘이란 말의 개념이 추상적이며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래 소설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서만이 그 참된 모습이 밝혀지 간 이가 모조 리 차지를 하얏고 황무지는 비록 만타하나 그곳 당도하든 날부터 아츰 꺼리 저녁거리 걱정이라 무슨행세로 적어도 일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 고 입어가며 거친 당을 풀수가 잇스랴. 남의 미천을 어더서 농사를 짓 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어든 것은 빈 주먹 뿐이었다.간도도 망국 한국인들이 살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빚에 쪼들리고 소작료에 시달렸다. 고율의 소작료 때문에 고향에서 살지못하고 낯선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난 그들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소작인 신세에 고율의 소작료를 뜯겨야 했다. 당시 간도 현지 취재를 한 한국의 신문은 전체 간도한인의 3분의 1가량이 중국인의 소작인이 되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농사를 지어 6할의 소작료를 물고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3년 12월 31일그 는 부모를 여읜 다음 서간도를 떠나지만 그를 반겨 맞아 살게 해줄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의 유랑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 는 신의주·안동현 등지에서 품팔이를 하다 일본 구주탄광, 대판 철공소에서도 일했지만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그 의 유랑은 그 개인의 것을 넘어서 정든 조국에서 쫑겨나 이곳 저곳을 떠돌며 극한적인 삶을 산 당시 한국인들의 참담한 생의 한 전형이다. 특히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중노동을 한 것은 일제의 대한(對韓) 노동력 착취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특히 1920년대에는 일본으로 간 한국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본이 그들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노동이민 이란 이름 아래 자행한 노동력 착취였다. 이들은 주로 북해도·구주탄광·대판 철공소 등에서 일본 사회의 인종차별, 저임금, 폭력적 강제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지옥과 같은 중노동을 했다. 〈고향〉의 주인공이 구주에서 일했다는 탄광의 경우 고통과 위험은 끔찍스런 것이었다. 석탄 탄광의 경우 한국 노동자의 50%가 갱내(坑內) 작업을 했으며 갱내(坑內)작업 중에서도 운반부·채탄부 등 위험한 일에 종사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