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들어가는 말-------------------------------------2Ⅱ. 김시習의 文學活動---------------------------31. 김시습의 생애와 작품세계 및 창작2. 김시습의 世界觀과 美學的 견해Ⅲ. 「금오신화」분석------------------------------181. 小說의 發生과 「金鰲神話」2. 「金鰲神話」줄거리())만복사저포기(2)남염부주사Ⅳ. 北韓文學史에서의 매월당 文學의위상과 가치평가---------------------------------20Ⅴ. 나오는 말--------------------------------------------22*參考文獻----------------------------------------------23*그 과제작가들(김유정외11명)-----------------24 ~ 43Ⅰ. 들어가는 말이번 과제에서는 남, 북한문학사가 그의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많은 이질성이 발견된다. 우선 북한문학사에서는 작품의 주제, 즉 사상성을 중시하는데 비해 남한문학사에서는 작품의 문예미학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경우 경제사적, 정치사적 흐름에 따라 문학사가 기술되는데 비해, 남한의 경우 민족사관이나 독일문예미학의 잣대에 따라 작품의 장르적 의미가 설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 1967년 이후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북한의 문학사는 주체사상에 근거하여 수령의 형상창조문에, 공산주의적 인간형 창조, 종자론 에 입각한 자주성의 문학이 강조된다. 하지만 남한의 문학사에서는 민족사관에 따라 향토성, 자주성이 강조되거나 독일문예미학이론에 따라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입각한 대결양상에 대한 분석에 초점이 맞추어지거나 작품의 문예미학적 관점에서의 가치와 시대풍자로서의 우의성의 접목에 관심이 기울여지기도 한다.15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소설이 자기 발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우리 나라 중세산문문학발전에서는 획기적인 전 풍부한 물산과 인정을 보고 겪으면서, 이때 지은 시를『유호남록』으로 묶었다. 관서·관동·호남 지방을 떠돌고 나니 10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김시습의 나이 31세, 20대의 젊음은 방랑의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어딘가 안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정착한 곳이 경주의 금오산이다. 용장사라는 절에 집을 짓고 그 집을 매월당이라 불렀다. 10년의 방랑 끝에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부터 7년 동안이 그에게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여기서『금오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 중 한 편인,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 「이생규장전」은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시로 시작된다.사창에 기대 앉아 수 놓기도 느리구나활짝 핀 꽃떨기에 꾀꼴새는 지저귀는데살랑이는 봄 바람을 부질없이 원망하며가만히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기네저기 가는 저 총각 어느 집 도련님인고푸른 옷깃 넓은 띠가 버들 새로 비쳐오네이 몸이 바뀌어서 대청 위의 제비되면주렴을 사뿐 걷어 담장 위를 넘어가리봉건적 속박을 벗어나려는 젊은 처녀의 심정을 낭만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이생규장전」의 내용은 이렇다.태학에 다니는 이생과 젊고 아리따운 최랑이라는 처녀가 서로 눈이 마주쳐 사랑하게 되고, 밤마다 이생은 담장을 넘어와 밀회를 즐긴다. 나중에 부모에게 발각되어 서로 떨어져 있게 된다. 최랑이 몸져 눕게 되자 사실을 안 부모는 서둘러 혼인시키고 이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도적이 침입하여 최랑은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여인은 혼귀가 되어 이생 앞에 다시 나타나 3년 동안을 같이 산다. 그 뒤 여자는 하늘로 올라가고 이생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병으로 죽는다.15세기에 이미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성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애정방식을 얘기했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이 작품은 산 남자와 죽은 여자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생이 단절된 세계의 저 편에서 이미 죽어 혼령이 된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는 것처럼, 김시습도 세계의 횡포를 저주하면서 슬픈 삶을 이어가야 했다. 자유로운 개성을 미루어 매월당이란 호는 이때 쓴 것이로 보임. 『금오신화』는 이 무렵 창작한 것이다. 이 해 효령대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각사 낙성회에 여한 사실이 있음.*1471년(성종 2년, 37세) 친구의 권유로 상경. 이듬해 서울 동북쪽에 있는 수락산 기슭에 거처를 정하고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세움.*1475년(성종 6년, 41세)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지음.*1480년(성종 11년, 46세) 「계인설(契仁說)」을 비롯한 설(說)을 지음.*1481년(성종 12년, 47세) 환속을 하고 조부와 부친께 제문을 지어 이 사실을 고하였으며 다시 결혼함. (부인은 안씨인데 이내 사별)*1483년(성종 14년, 49세) 환속한 이후로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고 시운이 쇠퇴해감에 비탄한 나머지 더욱 기행과 광태를 일삼다가 이 해에 다시 출가하여 관동으로 떠나다. 춘천의 청평사와 양양의 설악산이 그가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1493년(성종 24년, 59세) 충청도 홍산현(지금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無量寺)에서 이 해 2월에 생애를 마침.몰후 210년이 되는 1703년(숙종 29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국가의 포장을 받으면서 김시습·원호(元昊) 등 6신(세칭 생육신)도 함께 향사하도록 했으며, 다시 1782년(정조 6년)에 이조판서의 추증(追贈)을, 그 2년 후에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받았다.1-5. 무량사 김시습*지정번호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25호*소재지 -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 경내부도는 조선 세조 1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세상을 비관하여 출가한 후 두루 방랑하다가 무량사에서 입적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선생의 사리(舍利)가 안치되었던 것으로 조각기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부도는 무량사의 입구에 못 미쳐 외쪽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 약 50m 쯤 되는 곳에 있다. 여러기의 부도가 있는데 전면의 가장 큰 규모의 것이 매월당의 부도이다. 부도는 이중 기단위에 세원진 8각원당형이다.지 대학관에서 글공부를 하였건만 과거에는 합격된 적이 없었다. 소설에서는 박생이 고 성격이 호방하여 으며 그래서 그를 교만하고 편협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는 것을 강조하였다.박생은 일찍부터 부처니 무당이니 귀신이니 하는 미신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있었지만 똑똑한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다가 , 같은 것을 공부한 후에 그러한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박생은 품성이 순후한 중들과는 서로 사귀였다. 하루는 중에게서 천당,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저히 의문이 풀리지 않고 수긍되지 않아서 한편의 론문을 써서 자기 견해를 다지였다.소설은 박생이 꿈에 남염부주라는 어느 한 섬나라에 가서 그곳의 통치자인 염왕과 유교와 불교, 귀신과 같은 종교문제로부터 현실사회의 왕의 기원과 력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염왕이 박생에게 남염부주의 왕위를 물려줄데 대한 조서를 내린후 황태자의 례로써 전송하는 것이 이야기 줄거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Ⅳ. 북한문학사에서의 매월당 문학의 위상과 가치평가{) 박태상 북한문학의 현상 참고현재까지 알려진 북한문학사는 총 9종류이다. 이중 중요한 문학사는 마르크스레닌 미학에 바탕한 와 주체사상이 확립된 후에 간행된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편찬의 (전 5권, 1977-1981), 정홍교, 박종원이 지은 김춘택이 간행한 등과 최근에 김정일체제가 자리를 굳히면서, 우리식의 문학건설 의 기치아래 간행된 사회과학원 주체 문학연구소 편찬의 (전 11권, 1991-1995)의 3종류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종류의 북한문학사에서 매월당문학이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자료는 김일성대학출판부에서 나온 김춘택의 인데 이것은 사실상 북한에서 나온 최초의 고소설사라고 할 수 있다.한편 문예학자들은 우리 당이 밝혀준 주체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조선문학사 서술을 위한 탐구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이미 1950년대에 (상, 하)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연암집(燕巖集)》,《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호질(虎叱)》,《마장전(馬傳)》,《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민옹전(閔翁傳)》,《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3.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시대의 학자.본관 : 경주(慶州)별칭 :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활동분야 : 문학주요저서 : 《계원필경(桂苑筆耕)》,《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