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대중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 발생 - ㄱ 조선후기 장편 국문 소설의 활성화 기점방각본(坊刻本) 판소리계 소설의 활성 현상↓목판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책을 만들어 냄.ㄴ 신문, 잡지의 창간 : 등의 신문/ 잡지에 기고된 대중문학 작품들이 있다. 17종의 신문과 50여종의 잡지를 통해 문학 활동. 1906년 이후 많은 작품들이 발표. 신문, 잡지의 제도를 통해 20세기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ㄷ 단행본 출판의 활성화 : 20세기 후반3/15a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대중의 시대적(현실적) 욕망을 반영한 문학근대 자본주의(경제체제)가 생겨나면서부터 + 민주주의(정치체제) 정착⇒ 사회제도 수용 ⇒ 대중의 영향력 증가예) 탐정소설, 연애소설(대중문학의 주류, 연애의 관심사는 세계공통), 영웅 투쟁담(소설)환타지 소설, 과학소설 등 다양 ←교집(포괄)의 논리는 역시 '대중의 욕망 충족'에있다. 소설은 욕망을 열어 주는 양식.b 소비자인 대중의 기호를 중시하는 상품으로서의 문학예술로서의 미적 가치보다 상품 가치에 주목(=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를 중시)⇒ 상품미의 구현 (예술미 ↔상품미)c 개인주의적 문학, 혹은 자아 중심주의적 문학의 대립 개념으로서 대중 문학의 성격을규정지을 수 있다.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 1인칭 소설이 주류를 이룬다. 개인의 문제즉 자아의 문제가 극단화되면 난해한 실험 소설.대중(집단)의 실제적 관심을 포섭(수용)한 문학은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긍정한다.그러나 순수문학은 문학의 도학적(교화적) 기능을 좀처럼 수용하지 않는다.d 순문학(본격문학)의 대립 개념 - 통속(대중)문학순문학이 미적 기능에, 통속 문학은 오락적 기능에 충실.♣대중 문학 형성의 외적 조건a 상품이 중심이 된 경제구조와 민주적 통치제도의 정착b 근대적 시민 사회와 대중매체의 다양화♣ 문학과 대중의 '괴리' 이유a 개성적 작품이 오히려 평균화(획일화)되고 있다.b 대중의 욕망 구조에 무조건 타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대중과 문학의 괴리.→최대한 작가적 개성을 확보해야 지속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3/221. '대중문학은 열등한 문학이다.' 의 주장a 독자의 욕망에 쉽게 타협한다. ⇒ '욕망의 환속도'를 실현시킨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문학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대상화(종속화)로부터의 탈출 -주체(자아) 그 자체의 가치를 존중b 통찰과 진리에 대한 탐구의 기능이 약화된다. ⇒ 인간존재/ 현상에 대한 투시능력이 약화. 그 이유는 대중문학이 본질적으로 미적 가치보다는 상품 가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c 문학 내적 특성인 '주관성/ 개성' 이 결여된다.d '허위의식'을 조장시킨다. ⇒ 마술적 장치가 과도하게 차용.↓전기적 요소(합리적 사회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움)상식적 장치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적 장치가 되어있다.2. '대중 문학은 열등한 문학이 아니다.' 의 주장a '대중'의 개념과 '하찮음'의 내포적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 -문학의 양식을 우열의 가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없다.b 문학을 사회적·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실천행위'로 인정한다면, 대중 문학을 열등한 문학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c 모든 문학은 '서술의 자율성' 이 존중되어야 한다.-서술 언어의 존중 : 고급문학의 수사적 언어 = 대중문학의 일상적 언어서술 방법도 존중 : 영웅의 일생구조/ 영웅의 일생구조의 와해가 동시에 인정되어야한다.d 위대한 작가들(고전을 생산한 작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 시대의 대중적 수용력이 큰작품을 생산해냈다.3/291. 대중 문학의 문화 비평적 의의1 문화적 생산의 한 형식으로 '대중 문학' 을 자리매김 시킴.2 대중 문학에 대한 비평적 접근(학문적 접근)은 본격문학이나 영상(영화/TV)과 같은 다른 의사 소통의 '미학적 양식'의 특성을 해명하는데도 유용.3 대중 문학은 '자신(자아)과 타자 그리고 전체 사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하는특정한 방식을 제공해주는 '의미 창조의 한 과정'으로 자리매김 됨.2. 대중 문학의 장르론적 특성1 장르가 본질적으로 '작가와 그의 독자간의 계약' 이라면 대중 문학은 이러한 정의와 가장 잘 부합하는 양식 -F. Jameson 『Magical Narrative : Romance as Genre』대중 문학이야 말로 독자를 배려하는 문학이다.2 장르는 본질적으로 '사회생활의 기관들처럼 암묵의 동의나 계약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기관' 이라는 것이라면 대중문학이야말로 이와 같은 성격에 잘 부합하는 양식 - Clandio Guillen장르의 특성을 '장르를 향유하는 대상의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3 장르는 '하나의 장르를 다른 장르와 구별해주는 특성에 주목해서 이러한 문학적 계약을 지배하는 법칙'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서도 얼마든지 '대중문학' 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 V. Propp/ T. Todorov/ Eco 등의 관점.⇒개별적 장르의 특성에 주목(서사의 구조, 담론의 특성)3. 대중 문학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문제1 본격문학(이데올로기로부터 어떻든 자유로운 자율적 영역)과 대중문학(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반영)의 이분법적 도식이 전제된다면, 대중문학은 결국 '하나의 대안적 공간(유토피아)' 의 기능을 상실 ⇒ 본격문학이 이데올로기에 더 자유롭다. 대중문학은 대중의 요구(욕망)에 따라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유토피아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2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적 종합이 건강한 대중문학을 생산.◎ 대중 문학과 대중 소설의 지형 변화1. 지형 변화의 배경a 발신자(작가)와 수신자(독자)의 거리감 축소 - 독자의 창작(독서) 행위 증가b 매체의 확산 - 신문(문학관련기사 소개), 사이버 공간(사이버 문학)의 형성, 단행본 출판 시장 활성화c 수신자(독자)의 경제적 여건 향상
최인호 作 별들의 고향얼마전 큰 인기를 끌면서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상도 의 원작자로 요즘에도 유명세를 떨치는 작가 최인호, 80년대가 이문열의 시대라면 70년대는 최인호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70년대 그의 소설은 문학적 성공과 대중적 지지를 동시에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 등의 작업을 통해서 문화 전반에 걸친 성과를 거둡니다. 그의 대부분의 소설이 발표되었고 그 배경을 이루는 70년대는 탄압과 저항의 시대, 군부독재, 고도 산업 성장, 그로 인한 소외 현상, 등등 사회 문화적인 과도기였으며 정치적 방황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소설가이며 그 시대 문화를 선동하던 세력의 중추로서, 그가 과연 그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으며 또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의 대표 작품중 하나인 별들의 고향 을 통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별들의 고향 이 소설은 소설도 유명하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영화로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작품입니다. 1972년부터 73년까지 1년여 동안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상하권 통합 100만 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 시대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요즘의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 작품들과 견주어도 될만한 상업적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소설들은 대부분 문학평론가의 악평과 호평 속에 시달리게 마련이지만, 이 소설은 유독 토론의 주가 되었으며, 그 토론은 현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력 일간지에 연재되는 방식과 그 후에도 당시 유명배우들을 기용했던 영화의 성공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 등, 소설 내적인 면은 평하지 않더라도 외적인 면만은 완벽히 대중소설의 전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이 그러하듯 이 작품은 많이 팔려나갔고 그로 인해 많이 읽혔습니다. 하지만 많이 팔렸고, 또 영화화되어 성공을 이루었다는 상품적인 성공만으로 이 작품들을 단순히 저급하고 너무나 대중적이며 또 그런 대중의 욕망에 쉽게 타협했다고 비하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외적인 면을 가지고는 판다할 수 없기에 그 내적인 면면은 어떠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우선, 이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작가 최인호의 작가적인 능력은 다소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과연 그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고 현 시대에도 사랑 받는 이유를 어느 정도 공감이 가게 해주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그 시대의 상업적 맥락만 읽어낸 글을 이용한 장사꾼은 아니었습니다. 간결하지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문체, 치밀하고 실험적인 구성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흡입력을 가지며 무리 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구성 등 서술적인 면은 이 소설이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더없이 매끄럽게 쓰여졌고 그렇게 읽혀진 글이었습니다. 일간지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는 점 때문에 글 속에 긴장감이 곳곳에 녹아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분량에 비해 쉽고 재미있게 읽혀 내려갔습니다.주인공 '나'는 대학 미술과 강사이며 독신이다.간밤에 심하게 술을 마신 탓에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날카로운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경찰서에서 '나'는 3년 전 1년간 동거했던 오경아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체 인수를 위해 병원에 들렀으나 차마 시체를 볼 수가 없어서 그냥 나와 버렸다.오경아는 간이역의 역부인 아버지와 양조장집 셋째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로서, 남동생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작고 예쁜 여자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자 그녀는 학업을 포기한 채 취직을 했다. 알뜰한 직장 생활을 해 오던 그녀는 강영석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파 수술에 뒤이은 강영석의 변심과 어머니의 반대로 인하여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후 새로 만중이라는 사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지만 유달리 결벽증이 심한 만준에게 경아의 과거가 발각되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나'가 그녀를 만난 것은 어느 술집에서였다. 늘상 술독에 파묻혀 지내던 '나'는 그날도 혼자 마시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당번 아가씨를 불렀고, 그때 나온 아가씨가 바로 경아였다. 그 후, 경아가 술집을 옮기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다가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와 살면서 '나'는 그녀를 모델로 창작 의욕을 불태웠고 그녀는 신접살림처럼 집안을 꾸몄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쫓아 다니는 남자를 피해 술집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게 되자, 그녀는 점점 게을러지고 미워져 갔다. 동거한 지 1년이 지난 후 어느 봄날, 대학 친구인 혜정이와 만났을 때 '나'는 평소에 생각해 왔던 경아와의 헤어짐을 결심할 수 있었다.그녀와 헤어진지 1년 후, 어느 술집에서 외모가 많이 변해 버린 경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경아의 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날, 그녀는 한때 그녀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별나라의 별난 일이라면서, 어릴 때 자신을 보고 땅을 밟고 살지 않을 거라던 점장이의 말도 들려 주었다.또다시 그로부터 1년 후 겨울, 경아는 술에 취한 채 심한 기침을 하며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아까 먹은 수면제 약기운이 몸에 퍼지자 잠을 이기지 못하여 흰 눈 속에 파묻히고 만 것이다.경아의 장례식은 정말 쓸쓸하였다. 그녀의 모든 것은 불길 속에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았다. 그녀의 뼛가루를 한강에 뿌리면서 '나'는 그녀의 넋이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기원했다. 그녀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늘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을 부러워하였다.위의 것은 인터넷에서 발췌한 대강의 줄거리입니다. ( http:// songkw.com.ne.kr /sosul /a161.htm ) 착하고 예쁘지만, 경제 여건과 그 외의 외부적인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도 포기하면서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거기서 만난 첫 번째 남자 때문에 빗나가기 시작한 인생이 술집이라는 곳까지 흘러든 경아, 그녀는 작품속에서 직접 그렇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뒷골목이라는 다소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곳에서 탄생되어진 환상의 주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 대비되어서 다소 도피적으로 보이는 미대 강사 문오, 둘은 술집에서 만나 동거를 하고 문오는 그녀를 모델로 삼아 창작의욕을 불태웁니다. 둘의 이런 모습은 어느 정도는 그 당시 사회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경아로 대변되는 인물은 그 시대 더없이 평범한 가정의 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경아처럼 극에 달하는 불행을 모두들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의 일부는 공감하고 경험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산업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지고 그에 따라 파생되는 향락문화라는 것이 낳은 사생아들을 조금은 따듯한 시선으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오로 나오는 인물은 그 시대 문화적 지식인 계층의 방관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화적인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변태적 모습들을 알고는 있지만 별다른 대안과 진실된 고민 없이 조금은 도피적으로 욕망의 배출구로서 경아라는 총체를 포용하긴 하지만, 끝내는 눈밭에 싸늘히 식어간 그녀의 시체를 화장으로 장례 치르고 아무 일 없는 듯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 무언가 문제점은 확실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점을 제시하고서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은 모습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문제점으로 도배되었던 그 시대의 사회 문화를 보여주기에는 좀 역부족이었고, 또 그 모습들이 다소 틀에 박힌 식상한 면도 있었다고 봅니다.그 시대의 아픔을 수사적인 가치가 높은 담론으로 표현해낸 글은 훌륭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인간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진리탐구가 잘 표현된다면 그것 또한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면을 배제하더라도 단지 표현력이 뛰어나다거나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일지라도 그 고민의 진정성이 보인다면 그런 글 또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글들은 세월이 지난다하더라도 더욱 빛을 발하는 일명 대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이 소설은 충분히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세월이 한없이 흐른다해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대작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작품의 성공과 그 평가에 비한다면 깊이 있는 문제 의식이 조금 모자랐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을 평가할 때 그 시대 상황을 집어넣어 해석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시대상황과 관계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자치를 가지는 작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국역사에 있어서 프라하의 봄 같은 시절이고 말하기도 하는 70년대, 과연 그런 시대의 깨어있는 지식인이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소설을 낳아낸다면 그 시대상황과 결부해서 평가한다는 것은 필요불가결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 문학과 그에 걸친 문화 전반의 우두머리라는 평가까지 받는 최인호 그는 그 시대의 가장 깨어있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소설을 만들어냈다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소설은 시대의 아픔을 알고는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파헤치고 다시 감싸주는 용기는 작가에게 조금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나는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고전 예술과 같은 무언가 굳건하고 지속성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세잔느는 말했다. 인상주의에 대한 세잔느의 저항과 반발은 인상주의가 사물의 겉모습과 색채에만 너무 사로잡혀서 이를 위해 형태를 소홀히 한 데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세잔느뿐만 아니라 쇠라, 시냑 등의 신인상주의자들도 이와 같은 거부감 을 느끼고 구성을 중요시함으로써 형태를 체계화하고 기하학적은 도식을 추구하게 된다.세잔느는 인상주의자들처럼 데생과 색채를 분리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데생과 색채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전혀 아니네. 색채를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곧 데생하는 것이야. 색채가 가장 풍부하게 될 때 형태도 역시 완성되지. 색깔 사이의 콘트라스트와 관계 속에 데생과 입체감을 묘사하는 비밀이 깃들여 있는 것일세.마지막 점에 있어서 세잔느는 1884년부터 그 나름으로 콘트라스트의 이론 을 완성시킨 쇠라와 일치한다.이렇게 세잔느와 신인상주의자들은 각각 순간적인 것 또는 불안정한 것만을 기록하려 한 인상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쫓다 보면 때로는 무형태 내지는 무(無) 밖에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상주의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연발행성과 엄격성, 순간적 인상과 지속적인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인상주의 미학의 어떤 면과 고전적 사상과를 종합하려고 했던 것이다.세잔: 화면의 진실성프랑스의 화가.1839년 남프랑스 액상 프로방스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모자 제조업자였으나 후에 은행가가 되었다. 부친의 희망으로 처음에는 액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친구인 에밀 졸라의{권고와 또 스스로의 희망에 따라 도중에 화가로 전향하였다.1874년 비평가들은 폴 세잔을 가르켜 완전히 미친 사람이며 그의 그림도 정신착란에서 오는 환상이다. 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1도는 상당히 많다. 그 가운데서도 1898년부터 죽기 전해까지 그렸다는 이 그림이 가장 대규모적이다. 이 자유로운 자세와 데포르마시옹을 갖는 나녀들의 밀집에 의해 만들어 내는 동세와 리듬들은 자연 속에 새로운 공간 질서를 창조하여 새로운 회화적 성격을 창출하고 있다.국립 미술학교와 관전에서 거부당한 후 그는 인상주의자들과 전시회를 같이 하며 피사로의 야외 풍경화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세잔은 어떤 그룹에 속하기에는 너무 독자적인 화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인 소설가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로 유학오긴 했지만 세잔에게는 도시생활이 맞지 않았다.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괴짜로 통했다. 마네는 그를 광대 라고 불렀고 드가는 그의 시골 사투리와 우스꽝스러운 복장, 독특한 회화 스타일 때문에 그를 시골뜨기 라 불렀다.세잔의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더욱 냉혹한 것이어서 조야하고 퇴화한 그림이라거나 능력부족이라는 평은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했다. 1874년 첫 번째 인상파 전람회에 몰려든 관객들은 세잔의 그림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마약에 취해 그린 기묘한 그림 이라고 조소를 퍼부었다.이러한 조소에 상처받은 세잔은 1886년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에만 전념하게 된다. 1895년 첫 번째 단독 전시회가 개최되면서 세잔은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철인 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채석장과 생트-빅토아르 산1898-1900년, 캔버스 유채발티모어 미술관세잔은 1882년 이후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근처에 혼자 생활하며 그 부근을 탐사하며 지낸다. 그는 한가지 모티브, 즉 생트 빅트와르산의 독특한 모습에 사로 잡힌 듯하다. 이 그림은 강렬한 오렌지색의 채석장에서 빅트와르산을 바라 본 대단히 빼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중앙의 커다란 바위덩어리에는 좌우에서 접근하는 틈사이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산은 실제 보다 더 높게 그려져 있다.사실적인 재현화를 개척했던 조토처럼 세잔도 그와는 반대방향이긴 하지만 미술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세잔은 실사의그대로 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 부분에 적용해서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둘째는 전통적인 명암과 원근법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그는 전통적인 명암법을 포기하고 인위적인 명암을 만들었다. 또한 세잔은 형태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잔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물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세잔의 사과가 마치 플라스틱처럼 맛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세잔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인 명암이나 색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 위에 나타나는 이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자랑한다. 이는 현대 회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세잔을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190-94년, 캔버스 유채시카고 미술관사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따른 색감의 변화가 다양하다.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주홍색 등으로 색채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세잔 조형이론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세잔의 이론은 20세기 현대 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쳐 큐비즘(입체파)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세잔의 조형이론에 따라 피카소와 브라크는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고갱: 색채는 생명이다{반 고흐는 그의 친구 고갱을 멀리서 왔고 멀리 갈 사람 이라 불렀다. 이 말은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고갱은 그의 어린 시절을 남미의 페루에서 보냈고 청년 시절에는 6년 동안이나 선원으로 이국의 항구를 떠림을 그리기 위해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파기해 버렸다.{화가로서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은 서른 다섯 살의 고갱은 프랑스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시골인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벵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원시적인 감정과 상상력이라는 회화의 근본원리를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서 고갱의 얼굴을 한 예수는 완전히 노란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브르타뉴의 풍경을 배경으로 나무들의 주황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는 색채효과를 감소시킨다고 믿어 원근법이나 명암법의 사용을 거부했다.황색 그리스도1889년, 캔버스 유채뉴욕, 알브라이트-녹스 아트갤러리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 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 다벵 마을과 생트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 십자가, 붉은 색 나무들,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주제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그는 자신의 예술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요약하여 설명하며 나를 사로잡는 꿈은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도 훨씬 강하고 절실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꿈을 표현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비자연적인 고생 예술의 진수이다. 그는 또한 강렬한 감정은 즉시 표현되어야 한다. 꿈은 현실을 초월하여 가장 단순한 형태를 추구하게 한다. 고 말했다.고생이 감각적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한 평면적인 형태와 자의적으로 사용한 강렬한 색채, 무엇보다도 사실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표현한 기법은 다른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태평양에서 그린 고갱의 그림은 이 세 가지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년, 캔버스 유채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으로 그려진 나무둥치와 하향식 원근법은 윤곽선과 함께 일본의 목판화를 연상시킨다. 씨름하는 천사와 야곱은 호꾸사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인물을 절단하는 방법은 인상파 수법 그대로 이다.단순화된 인물형과 율동적인 패턴의 강한 윤곽선, 상징적인 요소는 원시미술과 일본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풍부한 색채는 비 유럽적인 생기발랄함을 축구하는 고갱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고갱은 임종 직전에 나는 감히 모든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 했다. 대중들은 이런 나의 생각과 별 연관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화가들은 분명히 나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는 내부의 진실을 과감히 표현하려 했으며 이런 점에서 뭉크 같은 표현주의자, 르동 같은 상징주의자, 마티스 같은 야수주의자, 피카소 같은 입체주의자, 그리고 추상주의 화가들 모두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고갱이 현대회화의 창시자 중 하나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반 고흐: 고통받은 화가의 초상{네델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적 신조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라 였다고 한다. 10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반 고흐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한 풍경화와 생각에 잠긴 듯한 초상화들을 남겼다.초기 걸작 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된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 파리에 정착하면서 활짝 피기 시작했다.{감자먹는 사람1885년, 캔버스 유채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램프 불빛아래서 감자 접시 하나를 두고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강조하고 싶었다. 몸소 일하면서 정직하게 식량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고흐는 처음 스케치할 때부터 오두막 내부의 어둠을 주는 뉘앙스를 강조하고 싶어했다.1886년, 파리에서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발견한 판 고흐의 작품 세계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어두운 색채는 밝은 색상으로, 사회적 사실주의의 테마는 빛으로 가득한 야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