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論】한국, 중국과 일본의 상반된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그 실체가 크게 왜곡되고, 축소되어 버린 백제를 흔히「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우리들에게 백제는 고작 경기도 일부, 충청도, 전라도와 제주도에만 영토를 갖고 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매우 작고 힘없는 나라로 각인되어져 버렸다. 그러나 백제는 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거기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중국·일본 등과 교역함으로써 탄탄한 경제력을 쌓아 번영한 나라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적잖은 부분이 절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의혹으로 남아 있다. 백제의 해외진출 문제도 그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本論】Ⅰ.백제의 요서진출백제의 해외진출에 있어서 요서(遼西)·화북경략문제(華北經略問題)는 백제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이다. 백제가 서해를 건너 산동(山東)반도에서 발해만(渤海 )연안일대까지 진출하였다는 중국측의 기록은 화려한 백제사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문헌에는 그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임나일본부를 기록한 것과는 달리, 중국 문헌 송서(宋書)나 양서(梁書) 등 자기나라에게 불리하게도 백제경략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다. 송서에 기록된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1천여리 지점에 있었는데,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부른다." 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양서에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였다" 고 기록되어있다. 백제의 요서진출설에 대해서는 일부 일본학자들에 의해 부인되었으나 우리 학계는 이를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설 파악에 앞서 백제의 해외진출배경을 살펴보자.1.해외진출의 배경우선 백제는 건국초기부터 서해안과 관계가 깊었다. 건국전설의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과 연결되어 있었고 고이왕은 인천(仁川)의 목지국(目支國)을 지배하였다. 그외 삼국사기에도 서해안과 관계되는 기록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가 서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구려(광개토왕)가 백제의 서해요충인 관미성(關彌城)확보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도 백제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남하정책도 백제의 서해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요동확보에 따른 배후세력을 봉쇄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백제의 요서진출은 백제의 적극적인 해양진출욕과 왕성한 상업활동에 기인한 것이다. 동시에 고구려나 신라의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로개척을 위한 중국 또는 일본세력과의 제휴가 해외진출인 것도 물론이다. 동시에 백제인의 서해에 대한 제해권(制海權)은 결국 높은 항해술과 조선술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므로, 빈번한 대중교섭(對中交涉)이나 왜로의 진출도 가능하였을 것이다.다음으로 백제가 해외진출을 하게 된 두 번째 배경은 근초고왕대를 전후한 정복사업의 결과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근초고왕은 신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나타내면서 영토확장사업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근초고왕은 북으로는 수곡성(水谷城)까지 확장시켜 황해도의 동북지방까지 차지하였다. 한편 남으로 영산강유역까지 진출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니 그것이 남만(南蠻)의 침미다례( 彌多禮)의 평정이다. 침미다례가 제주도라고 한다면 백제의 지배권확대는 해양진출의 결과인 것은 물론이다. 백제는 근초고왕대를 전후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광대한 영토지배는 마한의 경제·문화적 기반을 흡수함으로써 가야제국을 백제의 영향권내로 넣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왕성한 백제세력은 해외진출을 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근초고왕 30년(375)에 빼앗겼던 수곡성을 회복하였으며 근구수왕(近仇首王)3년(377)에는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공하는 등 양국간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백제는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견제할 필요가 있으며 서진(西進)에 대항하는 일이 긴급하였다.세째로 백제의 해외진출의 바탕이 된 또다른 하나는 황해(黃海)를 둘러싼 중국의 동·북부지방과 한반도에 이르는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의 문화적 공통성이다. 동이족의 분포상태로 보더라도 산동·요서지방은 한반도와 비슷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고 발해(渤海)연안의 신석기문화의 분포나 요령(遼寧)지방의 청동기문화의 관련성은 백제인의 대륙진출의 기반이 될 수 있었으며 통일신라와도 연결 될 수 있다.넷째로 지적할 수 있는 백제의 대외발전의 배경은 백제사회의 부족적인 전통성의 흠여(欠如)이다. 족장층(族長層)을 누층(累層)적으로 편제한 백제의 관계(官階)는 한화(漢化)된 명칭이 대부분이어서 유이민으로 구성된 백제의 지배세력이 전통적인 기반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선진문화를 가진 유이민집단은 토착민을 쉽게 동화시켰으나 여러 유이민간의 통제기능이 없어 정치적 구심력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사회적 통제력의 악화로 지방세력의 해상활동을 조장하게 되었고 해외진출이 촉진되었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끝으로 백제의 해외진출을 가능케한 배경은 백제의 서해도항로(西海道船路)개척이다. 백제인이 우수한 항해술이나 조선술은 항해의 안정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기존의 항로가 고구려인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가 없었다. 즉 종래 서해항로는 고구려해안과 요동반도를 거쳐 비사성(卑沙城)에서 등주(登州)로 건너가는 이른바 노철산수도항로(老鐵山水道航路)였다. 그러나 고구려측의 방해가 계속되었으므로 백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직항로의 개척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이왕 이후 적극화된 서해진출은 초도(椒島)나 백령도(白翎島)에서 바로 서진(西進)하는 서해직항로가 열려 4세기말 이후에는 활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백제는 고구려 연안을 항해하는 위험의 제거 뿐 아니라, 항로가 절반이나 단축됨으로써 보다 활발한 요서 진출이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2.백제의 요서진출과정백제는 건국건설부터 서해와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발전은 서해를 통한 성장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우세한 보기(步騎)전략인 군사적 위협과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길은 바다로의 탈출이 요구되었다. 백제는 고이왕 13년(246)에 중국을 공략하였는데 이전에 이미 바다로 중국에 진출한 바 있었다. 후한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2세기 초엽에 마한(백제)이 태조왕과 함께 현토성(玄 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부여(尉仇台)에게 패퇴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후한서나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백제가 아니라 마한이었다. 이때의 마한에 대해서 百濟가 伯濟에서 나왔고, 또 伯濟가 마한의 一國이었으며 이미 百濟가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였으므로 마한은 곧 백제인 것이다. 다만 이때의 백제가 요서지방에 있는 마한, 즉 또 다른 백제라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어 참고는 될 수 있다. 또한 4∼6세기에는 낙랑군이 요서지방에 있었음을 상기할 때 백제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는 주장도 문제는 있다. 다만 백제는 일찍부터 서해를 통해 고구려·낙랑·요동·요서 일대와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백제의 중국진출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대표적인 기록은 태조왕(太祖王)70년에 왕이 마한·예맥(貊濊)과 더불어 요동을 침략하매 부여왕이 원병을 보내 현토(玄 )를 구하고 아군(고구려군)을 파하였다 와 같다.백제의 요해(遼海)진출은 그 후 계속되어 고이왕 13년에 유주자사(幽州刺史)·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등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그 틈을 타서 낙랑변민(樂浪邊民)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다.이러한 백제의 서해경략은 중국의 계속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러므로 백제의 국가적 성장은 곧 서해로의 진출이어서 4세기 본격적인 요서진출의 전단계라 하겠다.3.백제 요서진출의 실상백제의 요서 및 화북지방진출은 중국문헌에만 보여지는 사실로서 그것도 송서, 양서, 남서등 남조(南朝)계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서 이후 중국문헌의 단편적인 기록으로 보아 그 설치시기·지역·존속기간 등에 대해서 뚜렷한 내용을 알 수 가 없고 백제의 요서 영유 사실에 대하여 긍정론과 부정론이 대립하고 수정론이 제기되기에 이른 것은 이러한 자료상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긍정론은 1770년에 간행된 신경준(申景濬)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에서 처음 제시되어, 임수도(林壽圖)·정겸(丁謙) 등의 중국인과 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김상기(金庠基)·김철준(金哲埈) 등 우리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중국측의 기록에 보이는 사실을 부인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북조계 사서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국의 수치를 기록하지 않는 중국인의 수사(修史) 태도에서 기인한 일일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백제의 요서경략은 진출기록 이외에 구체적 설명이 없다. 따라서 일찍부터 그에 대한 부정론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없다. 더구나 1940∼50년대 일본연구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함으로써 백제사의 취약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 견해의 요지는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진말(晉末)에는 모용(慕容)씨가 요서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부정론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기록상의 한계 때문이다.이러한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은 60년대 후반 민족주체성의 추구라는 시대요청에 따라 남북한 양측에서 동시에 제기되었다. 우선 남측에서는 김상기에 의해서 그 시기와 목적 그리고 구체적인 사항이 제시되었으나 내용은 신재호의 주장등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요서침략의 목적이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의 대응조치이며 남하하는 고구려세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진출시기는 근초고왕 말이며 고구려세력에 밀려 남천(南遷)한 때에 이르러 요서지방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