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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안티조선 평가A좋아요
    0.0 들어가는 말일상 속에서 스쳐지나가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수면위로 떠올라 의아해질 때가 있다. 그 순간 나의 호기심은 매우 자극을 받곤 하는데, 조선일보,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매스컴과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나의 호기심에 첫 물꼬를 틀어준 것이 바로 광수생각 만화 한 컷이었다.만화는 전경인 형과 시위대열에 선 동생이 대치한 그림인데 둘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따뜻한(듯한) 이야기였다. 사회문제를 다루더라도 항상 따뜻함과 연결짓는 그의 작법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기서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동생이 운동권이 된 까닭을 설명한 부분이었다. 동생이 운동권이 된 것이 돌팔매질을 참으로 잘 했기 때문이다 라는 어찌 보면 어이없는 상황설정이 있었다. 동생을 운동권으로 만든 사회적 상황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돌팔매질이라는 단순한 놀이와 그 동생을 연결시킴으로써 그 운동의 당위성들에 대한 무시와 운동권에 대한 외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수 만 있고 생각 은 없고, 현실은 휘발되고 모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따뜻함 만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만화가 담긴 그릇이 페이퍼 (그 이전에 광수생각이 연재되던 잡지)가 아닌 조선일보 라는 것이 그 정치적 함의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 읽은 조선일보 기사 한 토막이 떠올랐다. 몇몇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 결과에 대한 자그마한 기사였다. 그때 기사의 논조는 대학생들이 매우 탈정치화, 혹은 탈운동권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것 이었다. 한양대와 고대에서 소위 비권의 총학생회가 선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서울대에서는 비록 운동권의 총학생회가 선출되었지만, 비권의 활약이 두드러졌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총학생회 투표율은 간신히 50%를 넘고 비권으로 활동한 두 선본의 득표수를 합치면 선출된 총학생회의 득표수보다 크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의심없이 기사의 논조를 받아들였을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조사와 그 안에서 파생되는 의미들을 살펴보는 것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겠다.1.1 안티 조선 운동에 대한 개괄적 정리{ 우리는 왜 조선일보를 거부하는가. 김동민. 백의. 2001신동아 2000년 10월호 특별기회 안티조선논쟁 참조대체로 1998년에 있었던 당시 최장집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에 대한 월간조선 과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및 허위왜곡보도를 안티조선운동의 시발점으로 살펴보고 있다. 실제로 이 사건을 기화로 하여 43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조선일보허위왜곡보도 공동대책위원회 가 만들어져 활동한 바 있다. ‘안티조선 연대’의 원조 격인 이 기구는 조선일보 취재거부, 구독거부, 보도자료 안 보내기 등의 목표를 내걸었으나 그 당시는 특정 상황의 발생에 대한 긴급 대응으로서, 또 최장집 교수가 조선일보와 합의하고 소를 취하해버림으로써 더 이상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또한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 시민 운동단체들이 이 운동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특히 다른 시민운동 연대체들은 조선일보에 대해 취재협조를 거부하기로 한 결정을 지키지 않아 그 의의가 퇴색되기도 했다.하지만 강준만 교수와 월간 말 지의 정지환 기자가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에게 고소를 당해 결국 벌금형을 선고받기에 이르자 안티 조선 운동의 국면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들을 돕는다는 취지에서 자연스런 모임이 결성되면서 2000년 1월9일 안티조선 우리모두(www.urimodu.com)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등장하여 대중적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000년 1월. ‘우리모두’는 개설 당시 ‘나를 고소하라’는 공격적 구호를 내걸고 안티조선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를 고소하라’는 구호는 조선일보를 향한 것으로,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홍세화씨가 지난해 11월29일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며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홍씨는 그 글에서 ‘최장집 사건’과 관련, 조선일보와 해당 기자를 맹렬자회견을 통해 밝힌 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 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후에 2차 선언과 시민사회공동대책기구가 발족되어 활동중이다. 시민사회공동대책기구에서는, 시민들을 상대로 조선일보 구독거부 서명 및 모금 운동을 펼쳐 나간다, 지속적인 모니터 활동으로 조선일보 기사를 감시한다, 월 1회 ‘조선일보 거부의 날’을 정해 그 날은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한다, 홈페이지를 제작해 인터넷 홍보활동을 펼친다, 안티조선 시민강좌를 연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조선일보 왜곡보도 사례를 모아 전시회를 갖는다, 조선일보의 친일행위 자료집을 만든다. 그밖에 시민걷기 대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1.2 안티조선 운동에 관한 몇가지 논점들1)안티조선 운동, 언론자유에 대한 또 다른 탄압 아니냐.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 이후 조선일보는 시사저널을 통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일보는 그중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다양한 견해를 가질 자유가 있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 유로 조선일보의 존재를 부인하며 이를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표출하는 것은 반지성적 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 시사저널. 2000년 8월 24일 자 발췌라는 논지를 표명하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논점을 던 져주었다.이에 대해 조선일보의 입장을 옹호하며 기본적으로 언론 탄압이자 언론 자유에 대한 부정이다. 사시에 맞게 신문을 만드는 건 그 신문의 권리이자 의무다. 안티조선운동은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또다른 권위주의를 들이대는 모순을 안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최장집 사건 에서 보듯이 조선일보야 말로 자기와 생각이 다르 다는 이유로 상대를 매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집단적인 행동을 표출 하는 반지성적이 고 전체주의적인 발상 이 체질화되어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안티조선운동이 언론의 자유 를 침해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티조선운동이 조선일보의 존재 를 부인 하는, 조선일보의 퇴출이다.안티조선운동에 부정적 혐의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간에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고 주장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주요 일간지는 모두 보수신문으로 논 조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특정인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일이나 조선일보 를 극우로 몰아붙이는 일이나 다 부당하다는 이야기도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하여 안티조선 측 인사들은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들 은 명백히 다르다 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론 보수신문도 많다 혹은 모든 제도언론 이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보수가 아니라 상업적 극우주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조선일보는 차별성을 갖는다. 최근 조선일보를 살펴보아도, 극우·보수신문의 상징으로 독재정권·권위주의정권 창출에 앞장서 온 조선일보가 최근엔 남 북 화해 분위기를 해치고 그와 관련해 왜곡보도까지 일삼고 있는 것인 이들의 논조를 뒷 받침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하지만 난 아직 거대 언론사의 시각을 분석해낼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또한 우리 언론이라면 모두가 자유롭지 못할 부끄러운 지난날의 행태들에 대하여 지금에 와서 강하 게 비난하는 것이 그닥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내가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의미를 부 여하는 측면은, 상세하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가려져있던 문제를 수면위로 떠올리고 그것이 거대담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구 체적인 목표를 갖고 구체적인 사업을 해나가는 운동으로써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생 각된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함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조선운동은 거대담론의 추 상성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관념성을 극복한 매우 구체적인 시민운동의 모습을 띠고 있음 을 긍정하는 것이다.{ 관념성을 극복한 구체적인 시민운동이 갖는 의미를 넘어서, 점차 많은 사회문제들을 떠 앉고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데 있어서의 우려는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3)조선일보 기고 반대라부 운동과 광고한 제품의 불매운동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활용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물 론 이와 같은 활동들은 조선일보의 독자층을 구성하는 민중의 의식과 일상생활 속에 내면 화된 지배 담론으로서 냉전 수구논리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는 궁극적인 대의명분 속 에서 실천되는 것이다. 아무런 실천 없음을 간과하는 효과를 낳지 않는다는 동어반복이 아 닌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의미 있지만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안티조선운동의 방법론이 의미를 갖는 것은 실천과 실질적인 움직임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무책임 한 양비론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으로 나의 주장이 남아 있을 수 있겠다.1.3 안티조선운동에 내가 걸고 싶은 안티.-특정 신문에 대한 거부 캠페인은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그렇지 않다. 하자가 있는 상품에 대해 벌이는 소비자운동 차원이다.”-언론에 대한 선택권은 독자의 몫 아닌가. 지식인들이 나서서 보라, 말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그렇게 따진다면 소비자단체의 운동도 필요없는 것 아닌가. 소비자단체의 역할이 뭔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전에 불량품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는 정상적인 시장경쟁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출발과정과 성장과정, 성격을 상당수 독자들은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캠페인이 필요하다.”{ 말. 2000년 10월호 중, [인터뷰]‘안티조선 지식인 선언’의 선봉장 김동민 교수안티조선운동가들은 그들의 운동을 일종의 소비자단체의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 하다. 언론 소비자의 입장에서 불량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 표명은 인터뷰 기사에도 공중파 토론 방송{ MBC 유시민의 100분 토론. 2000년 9. 28 방영분.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언론은 언론상품(신문의 기사, 방송의 프로그램)의 판매와 광고의 판매를 통해 사기업의 이윤획득 및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것을 모43쪽.
    인문/어학| 2003.03.16| 9페이지| 1,000원| 조회(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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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 ,철학] 상징.신성.예술 평가B괜찮아요
    1.파편화된 면들과 그것들의 차가운 조합으로서의 여인.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나에게 위협적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와 분리된 단순한 한 폭의 그림이 아니라, 나의 일상, 내가 정상적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전복의 저의로서 위협이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감각들을 부정하고, 내가 믿는 세계관에 분열을 일으키기고 있다.그러나 과연 무엇이 정상인가, 과연 누구의 일상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쉽게 답할 수 없다. 나의 세계관이라는 것도 어쩌면 나의 관성으로 굳어져버린 허구 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서있는 땅이 꼼짝 않고 굳건하게 존재한다는 나의 믿음과는 별개로, 나의 발 밑 저 아득한 곳에서는 조용한 그러나 자기 파괴적인 힘을 동반한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어왔듯이 말이다. 그것처럼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진보에 대한 확신, 그것의 동력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가져 본다. 나의 온전한 존재를, 현대의 종교, 합리적인 사회 체제, 진리의 과학이 담보할 수 있을까? 온전히 보존되는 과거와 나의 의지로 구성되는 현재, 예측 가능한 미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긴 한 것일까?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단 한번의 의구심만으로, 나의 불안 나의 소외 나의 낯설음 같은 실존의 문제들이 순식간에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나의 안일한 일상을 가능하게 했던, 그러한 불안들을 덮고 있던 표피라는 것은 이토록이나 얇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곧 나의 안일한 일상이라는 것도 그만큼이나 쉽게 전복될 수 있는 다는 것이겠지.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나에게 가져다 주는 위협과 내가 의심하는 세계, 그것들을 이어주는 비합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 세계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오로지 이성과 합리성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던 출발점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서구의 과학적 탐구 태도가 세계를 바라보는 사고틀의 중심 축을 차지하던 그 순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과정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교가 세계 정신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결과 자연은 모든 종교적인 가치나 의미를 빼앗긴 채, 특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 이 되기 시작한다.{ M.엘리아데 지음/박규태 옮김. 서광사. 1991. : 157쪽 인용종교적 세계관이 갖는 힘을 좀더 살펴보면, 중세인에게 있어 종교라는 것은 단순한 신학 체계라기 보다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개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으며, 죄를 사하여 주고, 개인의 모든 일상적, 비일상적 일들을 제의 안으로 가두는 굳건한 심리적 기제였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까지의 서양인들의 전체적인 정신적 삶이 안전하게 포함되어 온 상징, 이미지, 교의 그리고 의식 체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의 연결 고리로써, 어떤 관점에서 서구 과학은 유태-기독교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가치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서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의 사용 도구적 가치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절대자의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는 자연이라는 분리를 가져왔고, 그것은 성스러움을 안고 있는 자연에 대한 탈성화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역사적 시간을 거쳐 사람들은 현대에 이르러 종교도 정신적 가치로서의 자연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신앙의 상실과 과학의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비합리성의 대두, 그로 인해 종교와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중심이나 지배자가 아니게 되었다. 더이상 종교와 자연이 인간이란 존재의 최종적이고 의심의 여지없는 집이자 은신처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현대인의 신앙의 상실은 단순한 변화라기 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실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총체적인 정신적 삶의 가장 깊은 층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이다. 신의 죽음 을 선언했던 니체의 발언은 그렇기 때문에 의미심장하다.여기서 신의 죽음 은 신학 담론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그러나 지금의교적으로 설명되어야하는 것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스타워즈 에 등장하는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영웅의 모습에서도, 일요일 아침이면 여의도를 가득 메우는 기독교 신자들의 차량 행렬 속에서도, 성년식이나 결혼식 혹은 장례식과 같은 의례 속에서도, 하물며 청춘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을 그린 드라마에 대한 이해 속에서도. 우리는 성스러움의 신화로 둘러싸인 일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일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성스러움의 상징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일뿐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일상 속에서 성스러움 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망각의 종교를 깨우고 그들의 일상 속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부단한 시도가, 바로 예술이라는 영역이 아닐까. 물론 예술이라는 것이 분명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성스러움에 대한 망각 현상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예술이 서구의 전통적 의미에서의 종교 예술 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 성스러움은 명백하지 않은 형태로 현대 예술 속에 녹아 있다. 그것은 몇몇 예술가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 더 이상 성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쉽게 지각할 수 없게된 시대적 배경이 이러한 현상의 근본 요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나른한 사람들의 감각을 깨우고, 게으른 의식을 공격한다. 현대 예술에 있어서 그 방법은, 자기 부정(전통적 표현 양식의 파괴)를 통한 성스러움의 표현에 의해서이다.현대 예술은 형식, 즉 전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형식의 파괴를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다. 세계가 낡고 시들음으로써, 신선함과 순수성, 그리고 본래의 창조적 힘을 상실했다고 판단되었을 때 이런 세계에 대한 수선 을 포기하고, 재창조를 위한 파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의 긍정적인 측면은 예술의 가능성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것은 우리가 숱한 신화들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생성에 대한 상징 구도 즉, 저마다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통과용.입문식은 모태로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입문식은 시간적 존재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시간적 존재 이전의 모태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우로보로스. 시작과 끝이 없이 계속 연결되어 흐르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이러한 이원적 상징은 좀더 명징해 진다. 우로보로스의 상징처럼 현대 예술의 자기 파괴적 움직임도, 그것이 스스로 혼동을 자처하며 얻어지는 가능성에 대한 긍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세기 기독교적 세계관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뢰로 쌓아 올린 원근법, 명암법, 정지된 움직임의 포착으로부터 탈피하고, 평면화, 색체의 자율성 획득, 움직임에 주목함 등은 좀더 자유로운 예술의 표현 영역을 담보해가는 과정에 있는 현대 예술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복합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이해를 위한 열린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써 혼동을 전제한다.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그림자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빛의 씨앗을 안고 있는 어둠이다. 모든 가능성의 총체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존재의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다. 전통적인 예술 언어를 파괴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와 생명 및 물질의 기본 양식에 대한 강렬한 관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고대적 감수성에 대한 수용은, 우주와 생명에 대한 우주적 종교 에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의 태도이다. 현대의 성스러움은 이렇게 발현된다. 우주적 종교의 신앙은 종교의 쇠퇴의 시대에 예술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현대 예술이 유발하는 숱한 논쟁들과 짜증 그리고 당황스러운 감정들이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예술의 난해함으로 우리가 쏟아내는 불평과 짜증과 불편한 마음들은, 그만큼 현대 예술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잘 건드리고 있는다는 사실 확인이 아닐까? 그것들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신세계, 그것에 대한 공포와 그것에 대한 심낯설지 않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뿌엿던 연기는 다시금 가라앉아 사라지게 마련인 것처럼, 지금 내가 보는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다. 실지로 오달리스크를 닮은 여인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여신 비너스를 상징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머릿속에서 구상된 허구이며, 그와 같은 완전한 형태로서 아름다움이란 이성에 대한 구애에 다름 아니다. 또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공간을 가치경중에 따라 배열하고 그래서 획득한 깊이 있는 화면 구성이라는 것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보고 싶은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라는 데까지 생각에 미친다. 그렇다고 할 때 치밀하게 계산되고 비례 맞추어진 서구 미학(고전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미)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아비뇽의 아가씨들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상상력의 공간은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 면들이, 동일한 가치를 표현하면서 펼쳐져 있다. 즉 다시점으로 관찰되고 재구성된 큐비즘은 소실점을 버림으로써 공간의 동일한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펼쳐진 것들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여인과, 아프리카 조각의 원시성과, 더 많은 가능성을 숨겨놓고 있는 듯한 바스락거리는 면들이다. 이성의 잣대로 판단 할 수 없는 이중적인, 모순적인 감정들의 지배를 받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나의 몸을 바라본다. 그때의 나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오히려 파편화된 면들이 서로 뒤엉켜 존재하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현실의 나와 좀더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화면구성은, 혼란 속에 있는 나를 긍정하는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끈다.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여인의 차가운 얼굴 표정, 그 안에서 불안을 본다하면 너무나 작위적인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녀들은 불안하고, 자기 스스로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흰 피부 밑으로 흐르는 붉은 피가 보놓는다.
    인문/어학| 2003.03.16| 6페이지| 1,000원| 조회(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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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 철학] 대중예술을 통한 예술의 이해 평가B괜찮아요
    0.0 들어가는 말 - 연애와 예술, 그 둘 사이의 마법49 와 51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그것은 50 과 50 사이에서 단지 1 이 움직인 차이에 지나지 않을까?49 와 51 사이에서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숫자 1 이지만 이때 그것이 드러내는 의미는 훨씬 더 큰 차이를 갖는다. 즉, 산술적인 기표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느끼는 바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산술적인 측량으로 소위 객관적인 양을 젤 수가 없다. 51 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100 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리는 상황, 49 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 이 되어버리는 상황은 마치 마법 같다. 그리고 그 마법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불쑥 불쑥 그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다양한 존재 양식이 있겠지만, 연애가 그렇고, 예술과의 만나짐이 그렇다. 그것들 모두는 마법의 옷을 입고, 홀연히 나타난다는 점에서 매우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주관적인 마음의 터에서 나타난다. 사라진다. 그렇게 스쳐지나간다.그리 아쉬울 것 없는 하루하루를 지내다가도 마치 49 가 1 이 아쉬운 것 마냥, 그것 하나만 있으면 금세 100 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으로 무언가가 간절할 때가 있다. 나에게 있어 아쉬운 그 1 은 연애였던 것 같다. 무료한 일상, 우울한 일상에 대한 탈출구로서 연애를 구하게 되는 대학 신입생의 감수성으로 지난 1년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만큼 성애화 된 사회 속에서, 이성애로서의 연애를 권장(혹은 강제)받으며 살아 온 20년이다. 하지만 그 간절함이 연애 상황(혹은 사태)의 필연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옆에 함께 있어 편안하고 즐겁던 사람과의 관계가 갑자기 수면위로 떠올라 이성애의 코드로 새롭게 읽혀지기 시작하면, 나는 부담스러워졌다. 눈을 맞추는 것도 힘들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전의 편안하던 상황들과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던 나의 마음 역시도 한 순간을 터49 와 51 사이를 오가는 1 , 그 마음의 행보인 것 같다. 나는 이제 그 마음의 행보를 쫓아가보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그 상황 조건들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변덕스러운 내 마음을 쫓아서 변죽을 울리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들을 살펴보고 싶기 때문이다. 대중 예술과 나의 만나짐, 혹은 그것과 나의 연애를 살펴보며, 대중예술이란 무엇인가, 대중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보려고 한다. 광수생각 을 다시 읽으며, 신뽀리씨를 만나고 그와 내가 만들었던 관계의 모습들을 살펴볼 것이다.1.0 사랑에 빠지면 보이는 것들.지금까지 대부분의 신문만화는 신문의 쉼표라기보다는 방점이고 마침표였던 것 같다. 그날의 사회적 최대 관심사나 정치 사회 현실을 한번 비틀어 풍자하고 촌철살인의 유머를 던져주는 신문만화가 갖는 날 이 선 유머가 나에게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생활에세이 같기도 하고 PC통신 유머방의 유머 같기도 한 광수생각 이 신문만화를 대표하게 된 지금의 현실은 낯설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까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며 이브 나 페이퍼 같은 잡지에서 만나던 광수생각 을 한국 최대 신문의 지면에서 만난다는 것도 나에겐 이색적이었다.광수생각이 연재된 지 몇 년 만에 이제 그 이름이 친숙한 만화가는 이현세나 허영만이 아니라 박광수, 아니 광수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제 광수생각 의 대표 캐릭터 신뽀리는 최고의 문화캐릭터가 되었다. 연재만화를 묶어낸 광수생각 은 비소설부문의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신뽀리 캐릭터는 카네스텐, 마티즈, 아주대학과 각종 학용품 캐릭터로 등장해서 끝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박광수씨 스스로도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의 게스트로서 자주 그 넉넉한 얼굴을 내밀어 어리숙하고 순박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광수생각 의 힘은 무엇 일까. 파스퇴르 우유 광고처럼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담은 만화는 IMF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처럼 냉소를 거부하고 따뜻함을 택한 그의 만화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당위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1.1 미움에 빠지면 보이는 것들박광수의 만화를 무가지 페이퍼 에서 너무나 재밌게 읽고 있던 나는 한 차례 그에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2,3년 전 삐삐롱스타킹 이라는 펑크록밴드가 TV쇼에서 카메라에 침을 뱉어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뽀리씨에 대한 나의 호감을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바꿔 놓았다. 나는 그 가 나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것 인 냥 그 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아졌다. 신뽀리씨와 화해하고 다시 연애를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박광수씨는 삐삐롱스타킹 을 공격하는 만화를 그렸었는데 페이퍼 의 편집진은 그 밴드가 이미 충분히 사회적으로 공격받았으며, 그들의 행동이 매도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만화를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글을 실었다. 잡지사라기보다 동호회, 혹은 패밀리처럼 운영되는 것 같은 잡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주목했던 것은 박광수씨가 편집장의 일장 연설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래도 침 뱉는 건 나쁜 거잖아요 라고 한마디 던지고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삐삐롱스타킹 의 행위를 쇼맨십 혹은 극적 연희의 일부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퍼부어지는 사회적 폭력을 마뜩치 않게 생각하던 나에겐 박광수씨의 행동이 고와 보일 리 없었다. 그저 그의 만화를 허허 웃으며 보고 있던 나에게 첫 반감을 준 행위였으며, 나아가 그의 사회적 의식수준을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였다. 그는 침 뱉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의도로 일어났는가 하는 것보다는 거리에, 사람 얼굴에 침을 뱉어서는 안된다는 단순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와 나의 불화는 시작되었고, 나의 식어버린 마음에 날카로운 시선에는 그의 단점들이각했다. 단행본을 보고서야 조롱과 역겨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만화에 대한 뒷얘기에서 박광수는 자신의 학창시절 파고다 극장에 갔다가 동성애자에게 추행당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가 당한 성적인 폭력을 근거로 해서 동성애자를 끔찍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힌 경험, 그것을 넘어 사회 속에서 동성애자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그에게 기대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또 하나의 그림은, 광수생각 1권 39쪽에서 운동권 학생에 대해 그린 것이다. 전경인 형과 시위대열에 선 동생이 대치한 그림인데 둘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따뜻한(듯한) 이야기다. 사회문제를 다루더라도 항상 따뜻함과 연결짓는 그의 작법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동생이 운동권이 된 까닭이다. 동생이 운동권이 된 것이 돌팔매질을 참으로 잘 했기 때문이다 라는 어찌 보면 어이없는 상황설정을 한다. 동생을 운동권으로 만든 사회적 상황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돌팔매질이라는 단순한 놀이와 그 동생을 연결시킨 것이다. 이는 그 운동의 당위성들에 대한 무시이자 운동권들에 대한 외면으로 볼 수 있다. 이와 연관된 해설도 무척이나 재밌다. 그는 대학생들의 전유물인 데모를 한번도 한 적이 없으며, 지나가는 데모행렬에게 조용히 하라 고 소리쳐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큰 글씨로 처리하여 말한다.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사회가 이룬 것도 있지만 가장 훌륭한 사회운동이란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해서 거기서 빛나는 일이라 강론한다.신뽀리씨, 너무 착한 것이 문제인가. 소박미가 지나쳐서, 단순하다.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으로는 당시 데모행렬이 원하는 근본적 개혁은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이 역시도 아마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한, 확장성이 결여된 개인주의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자기를 귀찮게 하는 시끄러운 데모대열이 싫은 것이고, 세상에 큰 불만이 없다는 그로선 그저 자신의 본분만 충실히 하면 세상은 모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해결할 수 없다고 눈을 돌려버리는 것에 필요한 것은 오직 비겁할 수 있는 용기뿐이다. 차라리 광수의 생각만으로도, 신뽀리씨의 생각만으로도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사회문제가 따뜻함으로 해결되는 날들을 누군들 거부하고 싶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현실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2.0 하고 싶은 말 - 예술이란 무엇인가?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대답함에 있어서 객관이나 혹은 진리 명제가 존재할 수 없다면, 나는 나의 경험과 느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다. 물론 나의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의미들을 긍정하기에 앞서, 내 경험이 갖는 한계와 폐쇄성에 대해 긴장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내가 광수생각 에 대해 더 이상 호감을 갖을 수 없는 것, 내가 신뽀리씨와 화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 곧 예술의 가치를 정치적(?) 세계관 속에 함몰 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한 그것의 전체 부정도 아니다. 내가 신뽀리씨에게 실망한 부분은, 바로 그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술을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정치적 이라는 단어에 물음표를 덧붙였듯이, 난 그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과연 어떤 것이 정치적인 것인 가요? 선거일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인 가요? 정치적 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오염되어 있다고 느낀다. 마치 그것이 표상하는 바는 집단적이고 외향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를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이 나에게 정치적인 입장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의 가사노동이나 연애관계에 있어서의 여남 권력 관계를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나는 이만큼의 범주에서 정치적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그 안에서 난 정치성과 예술성이 매우 가까이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인문/어학| 2003.03.16| 7페이지| 1,000원| 조회(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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