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개고기 문제가 처음으로 국제 사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88 서울올림픽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식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물학대국이라는 이유로 유럽국가의 여러 단체에서는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야 한다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었다. 이젠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이 한국과 일본으로 결정되면서 개고기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6일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회장이 한국 국민들이 개고기를 먹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영국의 BBC방송을 필두로 전 세계의 외신들이 한국의 보신탕 문화에 비난의 화살을 보내고 있다. 나는 개고기 예찬론자도 아니거니와 아직까지 개고기를 먹어본 경험마저 없다. 솔직히 앞으로도 먹어볼 생각은 없다. 어찌보면 개인적으로 개고기를 혐오식품 중에 하나쯤로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국제사회의 비난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먹거리란 식량 생산 환경과 체제에 적응해 온 결과물 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먹거리 문화는 환경에 따라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그 민족 특유의 생활방식이자 문화의 산물이요, 다른 민족의 그것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혜의 결정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고기 문화에 대한 비난은 굳이 문화적 상대성을 들먹거리며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고서도 그 오만과 편협성을 쉽게 꼬집어 낼 수 있다.중요한 국제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보신탕 문제에 대하여 그것이 비인간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난 우리 나라의 외교적 무능력함에 걱정이 앞선다. 이는 비단 개고기 문제만이 아니다. 물론 국제적 행사를 개최하면서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적 여론과 정서를 대변하여 바른말 하는 것 또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실현해야할 책임이 아닌가 한다.그럼 지금부터 개고기 문화에 대한 우리 나라의 역사와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화로서의 정당성을 뒷받침할만한 논거를 들어 이 같은 비난에 논리적인 대응을 하고자 한다. 또한 개고기 문화의 문제점과 그 개선 방안에 대해서 논함을 결론으로 정당한 먹거리로서의 갖추어야할 자격요건을 정리해 보겠다.개고기는 명실공히 한국의 전통음식이다. 개고기는 여름철 몸보신을 위한 특별 건강식으로 농경사회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그 역할을 다 해온 것이다. 실로 인류의 역사 이래로 보신탕은 농경사회의 주된 음식이었다. 소, 개, 닭등과 같은 농가에서 기르는 가축을 생각해보자. 육류로서 섭취할 수 있는 먹거리로 무엇이 적합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의하면 농경사회에서 소는 중요한 노동제공수단으로서 식용으로 하기엔 너무나 큰 가치를 갖고 있었고 일반인이 넘볼 수 없는 가축이자 재산의 의미였기 때문에, 대신 개가 주요한 육고기의 섭취원이 되어왔다고 언급했다. 개가 가축으로 길들여진 시기는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어진다. 물론 신석기 시대에도 개를 식용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우리의 개고기 식용의 역사는 고구려시대 벽화에 등장하는 개잡는 장면에서 최초의 그 역사적인 근거를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구워서 먹는 것이 유행했다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31년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여 아첨배들이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한국의 개식용에 관한 최초의 외국으로의 소개는 1847년 프랑스 선교사 "달"이쓴 "조선 교회사" 첫머리에 "조선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는 개고기이다"라고 쓰여 있어 예로부터 조상들은 개고기를 즐겨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서양에서 개는 사람보다도 더 애정어린 동물이다. 물론 동양에서도 충직한 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개는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그래도 어디까지나 가축으로 여긴다. 본초강목이란 고서에서는 개의 쓰임은 세가지인데 하나는 사냥개 , 하나는 집지키는 개 , 또 하나는 식용으로 쓰는 식견 이라고 했다. 애초부터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애완견 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는 수천년에 걸친 역사의 결과이다. 쉽게 말해서 개고기를 먹는지 먹지 않는지의 여부는 크게 유목민족인가 농경민족인가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주영하(세종대) 교수는 유목민들에게 개는 가축을 몰고 가는 중요한 일손이다. 그러나 농경민족에게 개는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처리하는 가축이다. 또 유목민들에게는 개가 아니더라도 양이나 소와 같이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이 많다. 그러나 농경민에게는 특별한 고급 단백질원이 없다. 고 설명했다.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그 환경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개를 식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그럼으로 서구의 근거 없는 문화적 우월감을 속에서 내세워진 개고기에 대한 비난은 음식문화에 대한 오만불손한 제국주의적 폭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개고기를 비난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어떻게 사랑스러운 개를 잡아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개를 사랑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잣대일 수 밖에 없다. 단지 울음소리를 없애기 위해서 친구같은 개를 거세시킨다. 개가 귀찮아 할지도 모르지만 엄청가꾼다. 개무덤까지도 있다. 정말 그들이 애완견을 아끼는가? 우리도 알다 시피 그들은 휴가가 장기간이다. 그들이 휴가 기간중 개들을 위해 개호텔에 맡기고 간다. 그러나 일주일 맡기고 가는 비용이 우리 돈으로 40만원이 넘는다. 개호텔에 못 맡기면 집 주위에 그냥 풀어 놓고 간다. 그 개들은 공무원에 의해 포획 후 일주일간 보관 후 주인에게 연락이 없을 경우 안락사를 당한다. 그 수가 1년 평균 10만 마리가 넘는다.그렇다면 개를 좋아하는 그들의 식문화는 어떠한가? 달팽이를 먹고, 말고기의 내장을 먹는다든지, 양고기의 눈알을 빼먹는 것을 최고의 일미로 친다든지 하는 유럽의 야만적인 식습관은 역사적으로 잔인하기로 그지없다. 사실 세계 각국의 음식문화들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문화 관습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매우 많다. 이러한 독특하고 고유한 음식 문화들이 교통이나 정보의 교류가 지금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자 그대로 세계화 시대이다. 한 민족의 독특한 문화라 할지라도 금새 다른 나라나 타민족에게도 알려지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미개라는 말은 없다라는 극언이 있을 만큼, 문화란 독창적이며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푸아그라 요리, 비둘기 요리등을 우리는 이를 비난하지 않는다. 바로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존중이다. 오히려 타민족의 문화가 이해되지 않는 다고 해서 그것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문화적 야만이 아닐까 한다.얼마전 한나라당 김홍신의원은 개고기 합법화를 위한 의원입법 추진으로 관심을 모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서 아직까지 개고기는 음지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고기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제도적인 위생관리 없이 외국인들에게 드러내놓고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남게 됐다 하겠다. 개고기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농림부는 가축의 도살 및 처리를 규정한 축산물가공처리법에 개를 포함시킬 경우 외국 동물보호단체들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한국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될 뿐 아니라 여성 및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국민들이 개고기 식용 법제화에 반대하고 있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나는 이미 국민의 상당수가 먹고 있는 개고기는 엄연한 전통식품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동물애호단체의 반대를 이유로 정부와 국회가 입법을 기피하여 그 위생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싶다. 이처럼 법적인 규제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타당성을 저들에게 피력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큰 약점이 되고 있다.사실상 개고기에 관한 현행법은 애매모호하다. 한마디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로 적용된다. 현재 개고기는 동물보호법 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1991년에 제정된 동물보호법은 개를 비롯해 소, 돼지, 닭 등 여러 동물들의 사육과 관리, 학대 금지, 유기 동물에 대한 조치 등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이라 실제 개고기 논란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다만 개를 도축 과정에서 이유 없는 살상과 잔혹한 학대 행위를 제재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으며 적발 시에는 단 20만원의 벌금이 부과돼 있기는 하지만 실효성이 거의 없는 사항이다. 그동안 개고기 단속의 근거로 쓰였던 규정은 1984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신설된 식품위생법 운용지침 이다. 이 조항은 개고기와 개소주를 보건복지부장관과 시도지사가 조리 판매를 금지하는 혐오 식품 으로 규정,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당시에 개고기를 파는 업소들을 단속하는 근거가 됐다. 하지만 98년 축산가공식품의 허가 관리를 규정한 위생 처리법 이 축산물 가공처리법 으로 개정되어 규정이 보건복지부에서 농림부로 이관되면서 사문화 됐다. 결국 개고기를 먹는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명확한 법적 근거는 현재 없는 상태다.
1989년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프랑스에서는 한해내내 온갖 행사가 펼쳐졌었다. 그 당시 대학생 신분이었던 나로서는, 그리고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박재환으로서는 200주년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나왔던 그 시절을 좀 기억하고 있다. 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부터 시작하여,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앙상 레짐이 해체되고..하든 그 시절.. 우리는 통칭하여 라고 부르지만, 그 시절, 그것이 혁명이랄 것도 없고, 민중이 정의와 박애에 가득찬 善民이란 것도 순전히 뻥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쏟아져 나왔었다. 역사를 판단하기에는 200년도 짧은 시간인 모양이다. 그 때 아마 든가 이든가 하는 출판사에서 프랑스 혁명 200주년 총서를 십여권 기획발간하기 시작했는데.. 그 책중에는 유난히 우리나라 개화기의 농민혁명, 제주도의 천주교민 발흥과 연관시킨 프랑스의 역사학자 논저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프랑스근대史家에게는 제주도가 꽤나 매력있는 역사탐구장소였던 모양이다.그리고, 1900년 직전의 아시아 실정을 다시 보자, 영국과 프랑스 등 이른바 선진제국들이 아시아 국가를 수탈해가기 시작할 때, 중국의 민초들은 청 제국의 수탈과 외세의 강점에 자생적으로 봉기하였다. 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역사에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민간신앙의 화신이었다. 백연교도의 난 같은 것은 중국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때면, 홍건적 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런 메시아적 상징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신에 가까운, 그리고 혹세무민하는 사악한 존재로서의 이들을 평가하기 쉽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이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경위를 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화단의 난 때문에 프랑스의 함대가 들이닥쳤고, 서태후 자희가 그렇게도 아꼈던 이화원이 몇날 몇일 밤을 불타올랐고, 그 많았던 중국의 보물이 약탈되어가는 역사적 경험을 알고 있다. 이른바 함포외교는 중국의 빗장을 열어젖혔고 중국은 외세에 짓밟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이 시는 제주도라는 것이 그 후 반백년 뒤에 있었던 4.3사건과 연계되어, 제주도라는 섬마을로 한정되는 특이성과 폐쇄성, 그리고 숨겨진 혹은 망각된 순간을 되살리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면 1차적으로 느끼게 되는 언어의 상이함 때문일 수도 있고, 영웅의 부재에 기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재수는 결코 영웅도 아니고, 용사도 아니며, 연인도 아니다. 어정쩡한 역사의 현장에 어쩔수 없이 내세워지는 그런 존재가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영웅사관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오합지졸을 정예부대로 만들 사람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의 풍정처럼,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코 그들이 아닌 것이다. 바로 외부에 있는 세력인 것이다. 그것이 프랑스든 일본이든 외세이고, 믿을수 없지만 매달려야하는 조선정부였던 것이다.거의 주기적으로 다시 읽게 되는 소설 책중 A.J. 크로닌의 작품이 있다. 그의 를 보면 주인공 신부님이 1910~30년대쯤 되는 중국에 포교활동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제국의 선교 형태를 잠깐 보면, 각 종파들의 세력확대를 위해 일단 머리 수를 중시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 어중이떠중이 중국인들 - 그들의 자신들의 나라에서 철저히 수탈되어 가진 것이라곤 눈치와 배고픔밖에 없는 인간들이라 하느님의 따뜻한 품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몰려온다. 그들이 할렐루야, 성모 마리아여..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먹을 것이 생기고, 입을 것이 생기니 무엇을 마다하리오... 그러니, 저 멀리 바티칸의 교황청에선 나날이 늘어만 나는 교세 확장에 싱글벙글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자, 교인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새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잠자리까지 제공한다니. 이제는 그곳으로 몰려가는 식이다. 주인공 신부님은 이런 것은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뭐.그런 내용이다.이 1901년의 제주도를 이해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이다. 고종은 제주도에 칙령을 내려 천주교 신부를 마치 자신을 대하듯 하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의 원한을 싸는 것이다. 영화시작할 때 사악한 천주교 교인에게 수모를 당한 할아버지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이 장면부터, 관객은 이 영화의 복잡한 사회구도를 인식해야하는 숙제를 짊어진 것이다.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그러한 모든 사회적 계급과 천주교의 의미, 제주도 사회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묘사를 하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생략과 절제라고는 볼 수 없다. 그만큼 각본과 연출의 부족이라고 하는 점이 어쩔 수 없지만 내려야할 판단인 것이다. 관객에게 폭넓은 심미안을 강요하는 것만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주도의 형상을 구현시킬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제국주의 헐리우드의 울트라 블록버스트 와 같은날 개봉되었다는 이유때문만에라도 유명해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짓거리는 결코 아니다. 투박한 제주도 말이 관객을 낯설게 하는 가운데 관객은 박광수감독의 이 야심작에 조금씩 몰입하게 된다. 일개 통인이었던 이재수가 조금씩 각 세력의 실상을 이해하고 점점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이 스타 이정재를 적당히 부려먹고, 난해한 영화 속의 한 캐럭터로 작용시키는 것은 그만큼 용의주도할뿐더러 장구한 역사의 티끌같은 민초의 실상을 그려낸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시대가 그렇고, 사정이 그러하니, 이재수가 난의 중심 인물이 될 수도 없었고, 그러한 민중봉기에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창의(倡義)라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란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이 영화는 세 가지 시선을 유지시키려고 한 감독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이재수가 바라다본 제주도, 명계남이 지켜보는 현실, 그리고 까마귀의 시선이 주는 선지자적인 의미. 물론 그것은 모두 실패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32억이나 투자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100분이라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무엇을 용해하러 했는지 우선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시에 상실하고 말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넘쳐나는 영화이다. 에구에구....내가 가장 아끼는 한국영화중의 하나인 그 섬에 가고 싶다 의 감독 박광수의 분발을 정말 기대한다. 이런 소리 하기엔 아무 것도 아닌 박재환이지만 말이다..... 너무 안타까와서 하는 소리이다.역사드라마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민초, 종교갈등, 신분갈등 같은 무거운 주제가 될 경우, 그 영화는 백 퍼센트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박광수는 호기롭게 달라들었고, 영상에 옮겼지만, 역부족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그해 죽어간 사람의 영혼만큼이나 의미없고(어떤 의미에서이든 무의미한 죽음이었으니...), 한불합작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진 엄청난 영화적 실수였음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이재수의 난이란 것은 그 역사적 사실도, 그 영화도 결국은 까마귀만큼이나 중요하게 설정되었지만, 그 까마귀의 날개짓만큼 허무하게 묻혀버릴 '미션 임파서블'인 것이다.--------------------------------------------------------------------------중앙정부(조정)으로부터 버려진 땅, 그 땅에서의 또 다른 분리와 대립, 700여 명이 죽었지만 그들은 역사적 맥락도, 근대사회가 무엇인지도, 가톨릭 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험악한 죽음의 광기와 마치 피와 시체를 찾는 까마귀처럼 몰려오는 역사의 핏발 선 당위성. 그 속에 포위된 나약한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이재수의 난은 이렇게 나를 사로잡았다."이것이 '이재수의 난'을 만든 박광수 감독의 변이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가 말하는 '이재수의 난'은 어떤가.그가 역사 교과서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 이재수라는, 제주에서 일어난 한 민란의 장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스러웠다. 바다 건너 땅이라 보호도 관리도 없이 내버려둔 변방의 섬, 부패한 관리들다. 기기묘묘한 무기들을 휘두르면서 희한안 생물들과 함께 벌이는 우주 전쟁이 주도하는 20세기말의 영화판에, 임진왜란도 한국전쟁도 아닌 구한말 한 변방에 있었던 민란의 어린 장두를 기수로 세웠다니.....현란한 볼거리와 자극적인 스토리로만 돌아가는 눈을 가진 관객으로서는 그저 염려스러울 수밖에.그렇다고 은근히 기대는 구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제작비를 반쯤 부담하는 합작영화라는 것이 '왠지' 약간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들이 그저 자선사업으로 돈을 댔으랴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가 이 영화에 투자한 데는 여러 관계와 계산이 얽혀 있었겠지만, 이재수의 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 프랑스 신부가 들여온 천주교였고, 이재수에 의해 죽은 민간인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이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로 보면 이재수의 난은 극동의 한 섬에서 일어난 프랑스 천주교 포교사의 비극적 기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 자체를 박해하고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국왕으로부터 '이들을 나와 같이 대하라'는 칙서를 들고 제주 땅에 발을 들인 프랑스 신부는, 천주님 앞에서는 반상의 구분이 무용하며 사람은 누구나 천부인권을 가진 하느님의 당당한 아들이라고 외쳤다. 하늘의 뜻으로 알았던 반상의 벽을 단 한마디로 허무는 천주교의 교리는 누대로부터 양반들의 횡포와 압제에 시달려온 많은 민중들은 사로잡았다. 죽어서 가는 천당보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평등한 신분과 프랑스 신부 치외법권적 그늘에 혹한 일부 신자들은 천주교도의 이름을 걸고 사사로운 분풀이에 혈안이 되거나, 조정에서 내려온 부패한 봉세관과 결탁하여 이웃의 혈세를 짜내는 데 앞장선다. 프랑스 신부를 방패로 힘없는 자기 백성들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이들을 보다못한 스무살의 청년 이재수는 '홀연히' 민란의 장두에 서게 된다.이재수의 난의 성격 규정과 해석은 학계에서도 명확하게 조명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박광수 감독 역시 이 난을 어떤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인다.
포카혼타스는 "두 산 사이에 흐르는 빛나는 개울"이라는 뜻으로 인디언과 영국인을 결합시킨 고리를 의미하였다. 백인들은 그녀를 '식민지의 천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천사나 개울은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시각이다. 인디언의 시각으로 보면 포카혼타스는 종족을 배반한 배반자였고, '매국노'였다. 포카혼타스와 영국인의 결혼은 새로운 지배자와 토착 지배세력의 결합, 새로운 지배자가 토착 지배세력의 도움을 받아 지배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 토착지배세력이 자신의 종족, 부족을 새로운 지배자에게 팔아먹는 과정이었다. 인디언의 멸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6세기이후 본격화된 유럽 국가의 신대륙 개척 과정에서 선두 주자는 단연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남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520년을 전후해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 국왕의 창고는 금은보화로 가득 찼으며 이 때문에 주위 국가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샀다. 포르투갈은 현재의 브라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초기 프랑스인들은 오대호 근처에서 인디언들과 모피 등을 교역하면서 주로 캐나다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난사에서 주된 가해자가 된 영국은 신대륙 개척에 뒤늦게 참여하였다.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지역을 개척하던 초기의 영국 정착민들은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두 인디언 부족이 온화한 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인 왐파노아그 부족은 현재의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등을 포괄하는 지역인 뉴잉글랜드에 거주했다. 또 다른 부족은 버지니아 주에 살던 알골킨 언어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들을 이끌던 이가 포와탄 추장이다. 낯선 이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포와탄은 딸 포카혼타스(1595?-1617) 덕분에 덩달아 유명해진 인디언이다.{ 에니메이션(포카혼타스)여기에서 잠시 미국의 역사왜곡을 월트 디즈니의 에니메이션 [포카혼타스] (마이크 가브리엘 감독, 1995년)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에니메이션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메리카 원주민 처녀 포카혼타스, 그녀는 아버지 포와탄에게 읍소하여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전쟁을 막은 평화주의자이자, 첫눈에 반한 백인 청년 존 스미스와의 애절한 사랑에 눈물짓는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대중 문화는 왜곡된 사회 의식을 심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는 역사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예가 영화 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를 실제 역사를 영상화한 작품으로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은 배급사 측의 홍보 전략에서 주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개봉될 즈음 배급사는 가 엄격한 역사물이라고 광고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런 뉘앙스를 풍겼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포카혼타스와 전 스미스가 실존 인물임을 강조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는 바와 같이, 영화 가 17세기 초반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역사 기록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에 등장하는 존 스미스나 포카혼타스 그리고 포와탄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영국 이주민들은 17세기 초반 현재 미국의 동부에 도착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 존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지역에 포카혼타스와 포와탄이 살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에서 영국인 정착촌을 세우는데 간여했던 존 스미스는 1609년에 영국으로 돌아간다. 고국으로 돌아온 존 스미스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화를 책으로 발표했다. 포와탄 부족에 의해 납치되어 죽을 위기를 맞은 그를 포카혼타스라는 인디언 소녀가 눈물의 호소로 구해냈다는 것이다. 인디언 추장의 딸이 존 스미스를 구했다는 이 일화는 유럽의 백인들에게 호기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고, 이 극적인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때로는 영화 에서처럼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다. 사실 존 스미스 선장은 포카혼타스와 거의 만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처럼 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포카혼타스는 백인들 때문에 큰 고통을 당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인디언 부족과의 협상에서 이용하기 위해 포카혼타스를 납치하여 억류했던 것이다. 백인 때문에 포카혼타스는 아버지 포와탄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존 스미스가 퍼뜨린 근거 없는 소문이 현재까지 떠돌고 있으며, 또 영화 는 그것을 기초로 실존 인물의 생애를 전혀 엉뚱하게 뒤바꾸어 놓았다. 포카혼타스는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억류되었던 불행한 인디언 소녀이다. 그런데 영화 는 포카혼타스가 존 스미스라는 남성과 사랑에 빠졌던 것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16세기 아메리카의 역사를 서술한 문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영화는 중요한 역사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16세기 미국 동부 해안지역에서 평화와 애절한 사랑이 만개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과연 실제 사건에 기반했다는 이 영화의 역사 진술이 진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 스미스, 포카혼타스 그리고 포와탄 등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이 수백 년 전 미국 동부 해안 지역을 함께 거닐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포카혼타스]의 중심 줄거리이며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 이야기를,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실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그가 아메리카를 떠난 지 십수년이 지난 후이고 포카혼타스가 숨진 뒤 7년 후인 1624년에 와서야 포카혼타스와의 극적인 인연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즈음 포카혼타스는 이미 영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발표 시점이 애매한데다 진술의 일관성도 없기 때문에 존 스미스의 술회를 사실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존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와의 로맨스라는 인상적인 헛소문을 퍼뜨렸다면, 월트 디즈니는 아예 둘이 사랑에 빠지도록 설정해 버린다.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두 사람은 애절한 사랑을 나누었고 가슴 미어지는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연인이었다. 이 두사람의 사랑은 인디언과 백인의 평화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랑도 평화도 모두 역사적 거짓이다. 포카혼타스가 백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은 존 스미스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 사랑은 백인의 폭력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될 즈음 미국의 인디언들은 강력하게 항의하며 영화와 영화 제작사를 비판했던 것이다. 영화 는 명백히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역사 왜곡은 뿐 아니라 다른 대중 문화에서도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시 대중 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포카혼타스가 유명인이 된 배경은 비교적 분명하다. 영국인과 평화를 유지하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 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포카혼타스의 변신이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영국인들은 인디언이 미개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포카혼타스는 백인 문화에 참으로 놀라운 속도로 동화된 것이다. 그러니 백인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기까지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포카혼타스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아무튼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카혼타스는 행복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디언과 백인의 행복한 화해는 헛된 꿈이었다. 백인은 인디언들의 영토권 주장을 완전히 부정했고, 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때까지 퇴거 명령과 학살을 반복했다. 포커혼타스의 개인사도 인디언의 비극적 역사를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버지에 앞서 영국 땅에서 숨지는데 그 사인은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결핵과 함께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으로 면역력이 없었던 수백만의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글자 그대로의 병마였다. 그렇다면 포카혼타스도 엄밀히 말해서 백인에 의해, 혹은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문화다] 영원한 키워드 '性'1. 섹스 네트워크아마도 인터넷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누구나 막연히 검색어로 써넣은 단어는 '섹스'가 아니였을까? 뭐니뭐니해도 인터넷에서 가장 폭넓고 풍부한 컨텐츠로서의 주제는 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의 인터넷 생활은 성과 관련된 내용들을 거치지안고서는 거의 영위가 불가능하다. 인터넷에는 이미 오프라인에서 유통되고 있는 성인물이 유입될 뿐만 아니라 인터넷 때문에 제작되고 유통되는 새로운 컨텐츠도 있다. 인터넷의 성문화에 대한 논의들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단순하게는 인터넷의 무제한적인 성문화가 청소년의 성범죄를 부추긴다는 논의에서부터 인터넷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는 성윤리에 대한 찬반논란, 그리고 성인 컨텐츠로 장사를 하려는 비지니스적인 접근도 있고 이를 규제하고자 하는 각종 캠페인과 정부의 법률안 제정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분명 성문화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가져왔다. 정보의 무제한적인 공유는 성의 무제한적인 공유와 사실상 비슷한 맥을 가진다.굳이 푸코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보와 성은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고 사회를 안정화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권력 수단이었다. 인터넷의 성문화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 곳에 담겨진 함의는 무엇인가? 성의 무제한적인 확산 속에 우리는 자유를 얻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의 향기 속에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가? 인터넷의 영원한 키워드 '性'에 대해 간략한 논의들을 해보고자 한다.인터넷의 등장은 우리의 내면적인 욕구들을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지식에 대한 욕망, 말하고자 하는 욕망, 섹스에 대한 욕망, 새로운 비지니스에 대한 욕망 등이 그것이다. 섹스는 아마도 이 중에서 가장 손쉽게 인터넷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인터넷의 기술적인 발전은 섹스산업의 발전과 비례한다. 이미지 파일의 전송과 압축 기술, 동영상 기술의 발전, 커뮤니티 툴, 새로운 광고 기법, 웹사이트의 표현기술등 인터넷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는 각종 기법과 기술들이 섹스 사이트에서 감촉을 느끼는 마우스는 가장 먼저 어느 분야에서 응용될까? 아마도 성인사이트부터 적용될 것은 뻔한 일이다. 한국의 경우, O양의 동영상이 전국민의 인터넷 활용 능력을 획기적으로 앞당기고 백양의 동영상이 인터넷 동영상 컨텐츠의 빌링 시스템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들은 이미 식상하다. 인터넷은 수많은 성적 욕망들이 가득한 공간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네트웍 공간에서 익명으로 정보를 교류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인터넷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섹스 환타지를 현실화하는데 적합한 곳으로 발전하고 있다.인터넷의 성문화는 일차적으로는 오프라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났다. 포르노비디오나 포르노잡지 등의 내용들은 각종 디지탈 기기들을 이용해 인터넷으로 옮겨졌다. 플레이보이지나 펜트하우스 등의 잡지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는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성인 사이트들이다. 대부분의 성인사이트들은 오프라인에서 유통되던 각종 성인물들을 인터넷으로 서비스할 수 있게끔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방문자들을 끌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전형적인 인터넷 시스템을 이용한 성인물도 등장한다.개인 홈페이지를 표방한 개인 성인사이트, 즉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시각자료와 글들을 올려놓고 이를 판매하는 사이트가 생겨나는가 하면, 웹캠을 이용한 실시간 전송기술의 덕택에 24시간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나체와 섹스 장면까지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이트가 선보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전문 포르노 제작업자들이 아닌, 아마추어들에 의해 제작된 포르노물이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경우도 흔히 발견된다. 대부분 호기심이나 노출증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장르가 인기를 끌자, 전문 업자들의 경우 아마추어들의 스타일을 모방한 포르노물의 제작에 열을 올리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넷의 성문화는 단순히 누군가가 만들어낸 컨텐츠를 즐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은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섹스 네트웍이라 불릴만하다. 채팅방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상황들을 살펴보자.올해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이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8.9%가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만나자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고 40.9%가 교제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또 7%는 직접 성행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수치는 실제로 증가추세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채팅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번개(즉석만남)'에서 시작해 섹스로 끝나는 인스턴트 섹스문화의 확산에는 인터넷이 주효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핸드폰 문화가 발달되고 이것이 인터넷과 연결되면서 손쉽게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는 상대를 찾는데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하면서 손쉬운 섹스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국내에서보다는 미국의 예를 보면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실제 미국의 섹스 네트웍은 전세계적인 섹스 파트너의 검색 시스템을 갖춰나가는 사이트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성적취향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서로 적합한 상대를 찾아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한다.섹스 환타지의 금기가 없는 인터넷 공간은 섹스 행위의 일탈성을 부추기는 면도 있다. 스와핑(부부교환섹스)을 비롯해 집단성교, 원조교제 등의 환타지를 현실로 가능케 해주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한 성인 사이트 운영자에 따르면 현재 인터넷을 통해 스와핑을 즐기는 네티즌들은 국내에서만 약 1,000명 가량이 되는 것으로 전해지며 집단성교 클럽을 시도하다가 적발된 사이트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원조교제의 경우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채팅을 사용하는 층이 주로 남자보다는 여성이, 그리고 나이 어린 학생층이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의 소비욕구를 부추기는 상업화된 사회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미성년자들의 '매춘'을 자발적으로 조장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이런 문화는 건강한 성문화를 해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감을 낳고 있다. 각종 성병과 미혼모를 증가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하며 나이 어린 학생들의 성적 문화에 대한 무방비적이고 갑작스러운 접촉으로 인해 심신의 장애를 낳는 경우도 있다. 이를 방지하고실태는 아직 충분한 예방교육을 실시하는데 역부족이며 실제로 과반수에 가까운 학생들이 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상황이다. 인터넷의 성문화는 누군가가 계도하고 이를 비난하는 것으로는 이미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원하는 곳에 포르노가 있고 나의 파트너가 있다." 아무도 인터넷의 성에 대해 통제할 수 없다. 이미 인터넷 시대의 性은 세대간의 차이를 떠나 유혹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불행하게도 인터넷의 성문화는 대부분 비지니스를 위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유포되고 조장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엄청난 수의 성인사이트들은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오프라인에서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던 포르노 판매상들이 인터넷으로 진입해 들어온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우기 이들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오프라인과는 달리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메일을 이용해 음란 CD를 파는 형태는 아주 고전적인 형태에 속한다. 이들의 비지니스 형태는 매우 '인터넷적'이며 그 효과(수익) 또한 그것이 유행하던 시점에서는 꽤 주목을 끌만한 것이었다. 요근간에 대대적으로 개설된 성인방송국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인터넷 비지니스의 유행 속에서 적절히 시장에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며 문화적인 측면이나 풍속을 다루는 논의를 피해 완전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포르노 업자'라는 정확한 명칭 대신에 이들은 '확실한 수익모델을 갖춘 웹 비지니스'라는 명예를 안고 당당히 영업을 시작했으며 언론의 화려한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유료가입자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많은 사이트들이 성인컨텐츠를 서비스하기 시작하면서 수익경쟁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인터넷의 성인물에 대한 규제 논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정부는 첨예한 갈등을 겪다가 규제의 방향을 결국 '청소년을 보호하되 규제의 폭을 대폭 축소하는'쪽으로 잡았다. 이를 위한 양성화하고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손쉽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인터넷의 공식적인 성문화의 일부는 이렇게 정착되어버렸다. 문제는 정부가 규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확실히 양성화되지도 않은 것에 있다. 사이버 매춘 조직이나 음란물을 판매하는 업자들은 드러나지 않게 숨어있다. 또한 각종 변태섹스클럽이나 원조교제등을 중계하는 서비스들도 인터넷 곳곳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각종 유명 채팅방은 물론 소규모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적어도 대형사이트에서 운영될 때도 폐쇄형으로 매우 깊숙히 숨어있기 때문에 그 활동을 적발하기 어렵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개인사이트로 운영되는 곳들이 엉뚱하게 피해를 입는 사례가 자주 발생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부의 규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신과 피해의식은 매우 높은 편이다. 정부의 규제가 미치지 못하는 인터넷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이버 성범죄의 발생이 높아지고 있다. 어느날 자신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성인사이트의 게시판에 버젓이 올라가 있는 것을 목격하거나 섹스 파트너를 구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자신의 인적사항들이 상세히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 여성 네티즌들은 사이버 스토킹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다. 또한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메일을 통해 포로노물이 날아드는 것, 그리고 음담패설과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욕설을 당하는 여성들의 경우는 일일이 사례를 들 수 없을 만큼 자주 발생되고 있다. 이밖에도 채팅방에서 원조교제나 매춘을 종용하는 업자들에게 걸려들거나 '번개'를 통한 만남을 가졌다가 집단 성폭력을 당하는 극단적인 사례도 심심찮게 듣게되는 바 인터넷을 통한 성범죄는 현실적인 단속의 어려움을 틈타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인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성범죄는 인터넷의 성문화를 정당한 방향으로 정착시키는데 매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정당한 성문화를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이른바 섹티즌들의 주장은 각종 부작용과 범죄를 낳고 있는 인터넷 성문화의 현실 속에서 그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면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와 함께 여러 독립운동 진영에게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각성시켰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때를 전후해서 주로 미국에 의존하던 외교독립론이 워싱턴회의의 실패로 급격히 약화되고, 무장투쟁론이 힘을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나약한 위상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고, 실질적으로 대중적 기반이 있었던 만주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진영을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다.또한 청산리전투는 한국역사상 최고의 무장투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청산리전투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이라고 보기에는 모자라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거품이 너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청산리전투는 철저히 준비되고 계획된 전투라기보다, 일본의 소위 무장대 소탕작전과 그로 인한 한인무장부대의 이동과정에서 나타난 전투의 결과였다. 하지만 청산리전투를 전후하여 한인무장부대들간에 부대의 통합을 통한 대규모의 장기적인 독립투쟁이 시도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청산리전투는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칩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의민단·대한신민당 등)가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어랑촌·천수평·고동하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장곡에서 전개한 대소 10여 회의 승첩을통칭하여 의미한다. 일제의 간도 침략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에 침범한 동지대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천보산에 주력을 두고 있었으며, 그 산전연대의 주력부대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그들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골짜기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의 이들을 향한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전(山田) 본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완루구 전투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 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을 맞아 대승한 전투다.●천수평 전투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였던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튿날(22일) 새벽 2시 30분경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이르렀을 때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에 다시 강행군을 재촉하여 연성대를 앞세우고 1시간 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 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 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5시 30분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하다가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사하였다. 이에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불과했다.●어랑촌 전투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 전투이다. 어랑촌은 1910년 국망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의 주민이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5,000여 명간의 격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뛰어난 전술로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국의 설립, 민족유일당운동의 전개와 삼부통합운동, 통합운동의 실패와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의성립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이시기는 주도세력 측면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역동적으로 활동하였던 때인 동시에 공산주의 세력이 점차 대두하여 본격적인 운동세력으로 등장을 준비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념적인 측면에서는 민족주의 노선에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이념이 대안으로 등장하던 시기이고, 투쟁노선상에서는 무장투쟁노선이 강조되다가 무장투쟁노선과 자치노선이 갈등과 조화를 이루어가던 시기이며, 조직면에서는 고려혁명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귀일당 등 독립운동정당이 조직되는 일면 한족총연합회, 생육사, 한족자치연합회 등 자치단체가 조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이러한 1920년대의 만주지역에 관하여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1969년에 윤병석이 삼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이래 박영석, 박환, 윤병석에 의해 1990년대 초까지 몇권의 저서가 간행되는 성과를 이루었으며, 개별논문도 70여편이나 발표되었다. 특히 1990대 들어서는 한중간에 국교가 수립되면서 현장답사 및 중국측 자료 입수의 길이 열리게 됨에 따라 30여편의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중 10여편은 중국측 조선족 학자들이 국내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들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회고와 전망 그리고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기존의 연구의 특징은 첫째, 이시기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대한국민회(송우혜, 박환, 박창욱), 북로군정서(신재홍, 신용하, 박환), 서로군정서(박환), 대한독립단(박환), 신흥무관학교(박환), 대한신민단(신용하), 대한청년단연합회(박환), 광복군총영(정원옥, 채영국), 대한독립군비단(채영국), 대한통의부(정원옥, 한상도, 박걸순), 정의부(정원옥, 박영석, 황유복, 유병호), 신민부(박환), 참의부(정원옥, 유준기, 변숭웅, 유병호)), 고려혁명 이념이나 활동의 성격이 규정되므로 이부분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이점에 착안한 박환의 신민부연구는 주도세력을 신분, 학력, 지연, 경제적 지위, 연령 등 여러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연구성과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공산주의단체의 주도세력들에 대한 검토가 병행되기를 기대한다.아울러 공산주의 운동단체에 관한 부분을 보면, 1920년대 만주지역의 운동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성립된 이후 특히 북만주와 동만주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많은 공산주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적기단 등 주요 공산주의단체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임경석과 신주백이 이 지역의 공산주의 단체와 운동론의 변화에 주목한 점은 높히 평가된다.끝으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박영석이 국민대표회의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의 참여, 그리고 이상룡의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과 관련하여 만주와 임시정부와의 상호관계를 다루고 있는 점은 후학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앞으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참의부 등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의 임정과의 관련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요망된다.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주지역의 단체들과 국내, 중국관내, 러시아, 미주 등지의 단체들과의 연결고리에도 주목하므로서 운동사 전체의 유기적인 구조 파악은 물론 운동사 전체속에서 만주지역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둘째는 봉오동, 청산리전투 등 전투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성과이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김택(청산리전투), 신용하(청산리전투), 윤병석(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장세윤(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정원옥(한국독립군의 독립전투), 황용국(조선독립군) 등가 기대된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은 주변의 상황을 극복하면서 전개되었으며, 아울러 이들 상황을 토대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운동의 변화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다섯째는 공산주의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공산주의 수용과 관련하여서는 연변대학의 김태국의 연구가 있으며, 임경석은 20년대 중국동북지역의 조선인 만주공청그룹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신주백은 1920년대 후반의 간도지역 공산주의 운동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반일독립운동론과 방향전환에 대하여 천착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1920년대 만주지역 공산주의 사상의 수용과 그 전개에 대하여 일부분이나마 밝혀지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성과들은 간도지역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으며, 특히 민족주의세력과의 연계 속에서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재만동포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러시아의 영향 등과 관련하여 공산주의 사상의 수용부분이 밝혀져야 할 것이며, 아울러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는 모습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지역적으로는 남만, 북만지역의 공산주의 단체들에 대한 연구 또한 활성화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여섯째는 친일단체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세창의 조선인민회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 외에 없다. 그러나 사실, 독립운동의 실상, 재만동포사회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친일단체에 대한 연구는 선결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 분야 연구에 있어서는 만주국 시절의 협화회, 러시아지역의 친일한인단체와의 비교 검토가 요청된다.일곱째, 재만한인을 위요한 중일의 정책을 들 수 있다.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한인독립운동은 중국동북군벌의 재만조선인에 대한 정책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중일간에 맺은 조약에 의해서도 상당히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삼시협정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