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1. 머리말- 순자의 생애와 사상의 시대적 배경2. 본 문- 공자와 맹자에 대한 순자의 견해- 예론(禮論)- 성악론(性惡論)- 왕패론(王 論)- 정명(正名)3. 맺음말참고 문헌1. 머리말∏ 순자의 생애와 사상의 시대적 배경기원전 298년, 고난을 감수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조나라에서 직하로 온 15세의 영준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책을 폭넓게 읽고 깊이 연구했으며 겸허하게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수십 년 뒤 그는 마침내 직하에서 가장 명망높은 인물이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전국시대의 대 사상가 순자(荀子)이다.직하는 전국시대 최고학부인 직하(學宮:국자감) 을 가르킨다. 제나라의 통치자는 강성한 국가를 유지하고자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에 위치한 수도 직하에 학궁을 증설하고 천하의 학사를 광범하게 불러 모았다. 조정에서는 거액의 예산을 들여 이 학사들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그 중 탁월한 자에게는 안락한 주택과 수레와 시종을 딸려주는 한편 대부의 칭호를 내렸다. 직하 학궁의 학술적 분위기는 매우 자유롭고 활발하여, 학자들이 자유로이 오갔으며 맘놓고 자신의 학술과 정치적 견해를 발표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조정을 비평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환경과 조건 아래서 각지의 학자들이 너나없이 몰려왔으며, 혼왕 때는 이곳에 이미 만 명에 달하는 학사들이 모였다.순자가 직하에서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직하에는 맹자, 송견, 전병(田騈), 신도(愼到) 등 국내의 저명한 대학자들이 총집결되어 있었다. 순자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질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재능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각 가(家)의 학설의 정화를 융화시켜 체계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의 저명한 대학자들도 순자의 학술절 지위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제양왕 시절에 대학자들이 잇따라 직하를 떠나거나 세상을 하직함으로써 순자는 자연 뭇사람들의 추천으로 '학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 그는 직하학궁에서 연달아 세 차례나 학장으로·「성악(性惡)」은 윤리학 문제를 이야기했다. 「유효(儒效)」·「비십이자(非十二子)」 등에서는 춘추 전국시대의 각 학파에 대한 평론이 있다. 철학·정치 그리고 윤리학을 한 편에서 언급한 것도 있어, 위의 구분은 대체적인 분류에 불과하며, 각 편의 논점은 서로 통하고 있다. 『순자』가 진(秦)과 한(漢)의 과도기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순자는 서주(西周)로부터의 전적(典籍)인 시(詩)·서(書)·예(禮)·악(惡)·역(易)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또『순자』를 보면 고대의 전적(典籍)을 인용하여 자기의 관점을 논증하고 있다. 그가 내린 경서의 해석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서 한 대 경학(經學)을 성립시킨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순자는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으며 제자들은 그를 난릉에 안장했다.2. 본 문∏ 공자와 맹자에 대한 순자의 견해맹자는 공자를 존숭했고, 순자 역시 공자를 존숭했다. 순자는 공자가 바로 가장 "전일하고" "투철하고" "순수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여겼다. 순자에 따르면 당시의 제자백가는 모두 소견이 있는 동시에 편견도 있었는데, 모두 "전일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어질고 지혜로웠으며 가려막히지 않아" "도" 의 전체를 인식한 만큼, "왜곡된 인식체계 속의 선비들" 이 단지 "도의 한 측면에만 몰입한" 것과는 달랐다. 맹자는 공자를 일컬어 "집대성했다" 고 했는데, 순자의 말 역시 그 의미이다. 다만 맹자가 공자의 도덕에 더욱 치중했다면, 순자는 공자의 학문에 더욱 치중했을 뿐이다.순자는 비록 공자는 받들었으나 맹자는 극력 공격했다. 서양인들은, 사람은 플라톤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제임스는 말하기를 "철학자는 그 기질에 따라 강경한 마음과 유연한 마음의 두 파로 나눌 수 있다." 고 했다. 플라톤은 유연한 마음 쪽의 대표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경한 마음 쪽의 대표자이다. 맹자는 바로 유연한 마음의 철학자이고 그의 철학은 유심론적인 경를 따르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고한 갑옷이나 높은 성곽이 승리를 얻는 충분조건이 아니며, 엄중한 형벌과 가혹한 법령이 통치자의 위세를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에 의거했을 때 정치나 군사 그리고 형벌 등이 온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순자는 예가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강국(强國)」편에서는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고, 국가의 운명은 예에 있다" 고 압축하여 말했던 것이다. 맹자는 인으로써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여겼지만, 순자는 예를 도덕의 최고 원칙이요, 인도(人道)의 최고 표준으로 여겼다.1. 禮以定倫 예로써 인륜을 정한다순자가 이야기한 예는 예의나 의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가 최고의 사회규범이라는 뜻을 가진다는 점이다. 「예론(禮論)」편에서 순자가 예를 만물을 척도하는 먹줄·저울·그림쇠에 비유한 것도 예가 최고의 사회규율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권학(勸學)」편에서 "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의 근본이요, 사회의 기강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뜻을 함축하여 말한 것이다. 곧 예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법도요 기강으로서, 오륜 즉 군신·부자·형제·부부·붕우 간의 관계를 확실히 정해주는 법도요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예는 곧 표준이므로 예를 제거해버리는 처사는 잘 다스려는지 혼란스러운지를 식별하는 표지를 없애버리는 격이 된다는 것이다. 순자는 예의 작용이 물의 깊이를 재는 수준기(水準器)와 같다고 인식했다. 수준기가 없을 때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해서 물에 빠져 죽는 변을 당하는 것처럼, 사회에 예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예는 인간들이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사회규범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는 어떠한 규범이나 표준으로 말해질 수있을까? 순자는 예가 계급질서를 구분해주는 표지가 된다고 인식했다. 「악론(樂論)」편에서 는가? 순자가 보기에 이 두가지는 서로 의미가 통한다는 것이다. 예에도 규범의 뜻이 있고, 법에도 규범의 뜻이 있어 서로 같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의 목적은 사람이 지켜야 할 한계를 정해 각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순자가 이야기한 '예로써 인륜을 정한다' 와 뜻이 통한다. 요컨대 예와 법이 모두 다른 계급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와 법을 함께 놓아도 순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권학(勸學)」편에서 "예를 존중하여 실천해 나간다면 비록 경전에는 어두우나 법을 아는 선비라 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예를 존중한다면 형벌을 쓰지 않더라도 백성들은 선량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순자의 예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예와 법이 일치한다는 견해는 법가의 '법률로써 백성들의 직분을 명료히 한다' 는 학설을 수용한 것으로 예에 사회규범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공자가 예와 인을 나란히 강조하였다면, 순자는 예와 법을 동시에 강조한 셈이며 한나라 유가에 이르러서는 덕(德)과 형(刑),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결합하여 언급하였다.3. 禮爲諸德之綱 예는 모든 도덕의 핵심이다공자는 인을 모든 도덕을 포괄하는 의미로 썼는데 반해 순자는 예에 모둔 도덕을 포괄시켰다. 순자는 예가 충(忠)·효(孝)·제(悌)·자(慈)·혜(惠) 등의 덕목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덕목을 거느리는 으뜸이 된다고 인식했다. 그는 예와 인의(仁義)의 관계에 대해서 「대략(大略)」편에서"인(仁)은 사랑이므로 친(親)하는 것이요, 의(義)는 도리이므로 행하는 것이요, 예(禮)는 절도이므로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인에는 예라고 하는 의지해야 할 집이 있고, 의에는 예라고 하는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다. 만일 인이 예가 아닌 딴 곳에 의지하고 있다면 이미 인은 인이 아니다. 또 의가 예가 아닌 다른 것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는 이미 의가 아니다. 자애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베푼다 하더라도 예에 어긋나 있다면 인은 성취되지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인간을 환경과 교육의 산물로 여기는 18세기 프랑스 유물주의 학설조차도 환경이 인간에 의해 개조되었으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바로 중국에서 18세기의 프랑스 유물주의학설가 비슷한 견해를 지닌 대표자는 순자로서 그는 인간을 환경과 교육의 산물로 파악하였다. 순자는 또 교육자 본인(성인·성왕 등 위대한 인물)들을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환경이 인간에 의해 개조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구(舊) 유물주의는 항시 인간의 사회적 실천활동과 이탈된 견해를 지녔다. 단지 한 가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사상과 의식이 환경의 산물이라고 파악한 견해로서 유물주의적 관점에 부합된다. 그러므로 순자의 성악론과 맹자의 성선론의 논쟁은 도덕관념의 형성문제에 있어 유물론적 반영론과 유심론적 선험론 사이의 논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자의 후천적인 형성론은 그의 도덕에 대한 이해와 분리하야 논할 수 없다. 그는 예의와 법률이 똑같이 사회규범에 속하며 개인의 의식 밖에 존재한다고 파악했다. 그는 예의와 법률의 작용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가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게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논리를 후대에 순자의 후학이 정리하기를 '예는 밖에서 생성된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전개하였으므로 순자는 선험론에 반대의 뜻을 명확히 표명하였으며 따라서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킨다는 견해를 피력했다.순자가 인성이 악하다고 파악한 기본 논점은 인간이 정욕을 만족시켜 나가는 과정 중에 항시 상호쟁탈전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악의 내용은 곧 쟁틸이다. 만일 쟁탈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욕이 악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성악론은 계급사회 내부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투쟁이 존재함을 간파한 것이며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재화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 피차간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인성이 악하다는 견해는 이러.
目 次1. 머리말- 묵자의 생애와 시대배경2. 본 문정치사상-이상사회: 천하무인(天下無人)의 대동세계(大同世界)-국가의 기원사회·문화사상- 공리주의- 비악론(非樂論)- 절장론(節葬論)- 비명론(非命論)- 겸애(兼愛)3. 맺음말참고 문헌1. 머리말∏ 묵자의 생애와 시대배경묵자(墨子, 475?~396? B.C)는 중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전국시대부터 한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흔히 공묵(孔墨)으로 병칭했다. 다만 묵자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은 극히 간략하다. 아마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저작할 당시 사상계는 이미 유가의 천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세가(世家)에 모셔졌으나 묵자는 열전(列傳)에도 끼지 못한 것 같다. 청말(淸末)에 이르러서야 묵학 연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고, 묵자에 관한 고증도 점차 늘었다.『사기』에 따르면 "묵적(墨翟)은 송(宋)의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했고 비용절약을 주장했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 이후 사람이라고도 한다." 묵자는 공자 이후라는 것이 현재 정설이다. 손이양의 「묵자연표(墨子年表)」는 주(周) 정정왕(貞定王) 원년(468 B.C.)까지, 전목 선생은 주 경왕(敬王) 41년(479 B.C.) , 즉 공자가 돌아간 해부터 안왕(安王) 21년(381 B.C.), 즉 오기(吳起)가 사망한 해까지로 수정했다. 후자가 전자보다 약간 앞당겨져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기록을 보면 오기의 사망 당시 묵가의 거자(鋸子)는 이미 맹승(孟勝)이었으므로 묵자는 오기 보다 먼저 돌아갔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전목 선생의 연표가 사실에 더 가깝다. 연표의 범위가 약 100년에 걸쳐 있는데, 이것은 묵자가 꼭 그렇게 장수했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대략 그 100년 사이에 살았다는 말이다.묵자는 송인(宋人)이라고도 하고 노인(魯人)이라고도 한다. 노인으로 고증한 손이양의 설이 정론인 것 같다. 묵학의 기원과 관련해서, 『여씨춘추』에 따르면 "노 혜공(魯惠公)이 재상인 양(讓)을 사신으로 평왕 천자께 보내 교(, 우 임금 추존 등의 묵자의 주장을 바로 공자의 가르침을 그 측면에서 발전 시킨 것이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겠다.구설(舊說)은 묵자의 성은 묵(墨), 이름은 적(翟)이라고 했다. 근래에 이르러 "고대에 이른바 묵(墨)은 성씨가 아니라 학술에 대한 지칭이었다" 고도 하고, 또 묵이란 고대 형벌의 하나로서 그 형을 받은 무리 즉 노역하는 부류였다고도 한다. 묵자의 절용(節用), 단상(短喪: 복상기간의 단축), 비악(非樂: 음악 반대) 등의 견해는 모두 극단적이어서, 당시의 대부나 군자들의 생활 양식과는 상반되었고, 그의 생활은 검소하여 노동자와 한가지였다. 따라서 그의 학설을 추종하는 이들을 당시에 묵자(墨者)라고 일컬은 것은 형을 받은 무리로서 노역하는 부류라는 뜻일 뿐이었다. 『묵자』「귀의 편(貴義篇)」에 따르면, "초나라 헌혜왕이 목하(穆賀)를 보내 묵자를 만나게 했는데, 묵자가 목하에게 그의 주장을 말하자, 목하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대의 말인즉 참으로 훌륭합니다. 하지만 왕이란 천하의 대왕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주장은 천인들이나 하는 행위이니 채용할 수 없다고나 하시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즉 묵자가 주장한 내용은 "천인들이나 하는 행위"여서 그 주장이 묵도(墨道)라고 일컬어졌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자는 자기의 학파가 묵(墨)으로 일컬어지는 것에 만족했다. 이 점은 마치 그리스의 안티스테네스(444~366 B.C.)가 그의 학이 견유학(犬學: 犬儒學)으로 일컬어지자,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여 사후에 묘 옆으로 한 마리 개의 석상을 세워 묘표로 삼게 한 것과 같다.묵자는 귀족을 반대했고 나아가 귀족이 의지하고 있는 주제(周制: 주의 문물제도)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의 학설은 주제를 반대한 주장이 많은데, 주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가 주(周)를 본받을 것을 제창했기 때문에, 묵자는 자신의 학설은 하(夏)를 본받는다고 주장하여 유가에 맞섰다. 당시 전설상의 하의 유 임금이 본래 절약, 검소하고 각고면려한 것으로 유명했음은만을 위하여 사유한다. 귀족들은 그 신분을 대대로 세습하는 것을 예(禮)라 하고, 군주는 성곽을 쌓고 못을 파서 자기 나라를 굳건히 한다. 그래서 예로써 기강을 세워 군주와 신하 사이의 지배 관계를 정립하고, 부자 사이를 돈독히 하며, 부부·형제 사이를 화목케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토지제도를 세우며, 용감하고 지혜로운 것을 어질다 하고, 생산도 자기만을 위한다. 그러므로 사악한 죄가 생겨나고 전쟁이 일어난다.대동세계 즉, 평등 공동체가 무너지면 군주국가가 되어 예로써 통치할 수 밖에 없으니 이러한 예에 의한 통치사회는 소강(小康)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 중에서도 봉건 귀족을 반대하고 신흥 자본가들인 사인(士人) 계급을 옹호한 순자(荀子)류의 예치론과 같은 것이다. 묵자는 다른 제자(諸子)와는 달리 계급차별이 없는 안락하고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지향했으며 또한 그 공동체는 노(老)·장(莊) 류의 무릉도원적인 무정부주의가 아니고 인민의 선출로 통치자를 선출하는 화동세계(和同世界) 또는 대동세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묵자의 민주 사상은 유가들과 같은 사인계급만의 제한적 민주론이 아닌 것이다. 유가들에게는 성인(聖人)의 최종적인 권위의 근원은 왕권이었으며, 학문은 권력에 종속되었으므로 모든 가치의 최고 재정자는 제왕(帝王)이었다. 그러나 묵자는 모든 가치와 의(義)의 근원을 하느님에게서 찾았으므로 묵자의 하느님은 유가들의 천명론(天命論)을 부정한 것이며, 왕권을 하느님 밑에 구속시켜 그 하느님의 뜻인 인민의 평등한 사랑과 교리 즉, 인민의 뜻에 복종시키자는 것이었으므로 묵자가 인정한 왕권은 유가에서의 천명을 받은 신분적 절대군주가 아니었으며 노·장의 무정부주의와도 다른 것이다. 묵자의 왕권은 인민의 이(利)를 하느님에게 화동일치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인민이 선출한 통치자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정치사상 뿐 아니라 사회제도와 문화 일반을 재화의 소비제도로 파악하여 물적 토대를 강조한 점에서 유물론적이라고 할 것이다.∏ 국가의 기것, 즉 "도가 실현되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한 묵자의 생각은 달랐다. 『묵자』「귀의편」은 말한다."묵자가 노(魯)에서 제(齊)로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물었다.'지금 온 세상은 아무도 의를 행하는 사람이 없거늘, 그대 홀로 수고하여 의를 행하고 있으니, 그대 역시 그만두느니만 못할 것 같네.' 이에 묵자가 말했다.'가령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아들이 열 명 있다고 하세. 그 중에서 한명만 농사일을 하고 아홉명은 놀고 있다면, 일하는 그 한 사람은 더욱 많은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왜 그렇겠는가? 먹는 사람은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일세. 이제 온 세상에 의를 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대는 오히려 나를 권면해야 할 판에 어째서 나를 말리는가?'즉 의를 행하는 사람이 설령 적을지라도 한두사람이라도 행하면 그 "공"은 아무도 행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이다."사방으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인의를 역설하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청중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사람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니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그 결과는 결국 천하의 이익이다. 공자가 무조건 행했다면, 묵자는 조건적으로 행했던 것이다."공(功:성과)" 과 "이(利:이익) 는 곧 묵가 철학의 근본 관념이다.묵자에 의하면 모든 주장은 반드시 표준에 입각해야 한다. 주장에 표준이 없으면, 돌림판 위에 해시계를 올려놓은 격이어서. 시시비비와 이해득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주장에느 반드시 세 표준이 있다. 세 표준이란 첫째, 그것의 근거. 둘째, 그것의 실증성. 셋째, 그것의 응용성이다. 위로 옛 성왕의 사적에 근거해야 하고 아래로 뭇 사람의 이목의 실제 경험에서 실증되어야 하고 정치제도에 응용하여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에 적중할 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주장에는 세 표준이 있다' 는 것이다. 이 세 표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이다.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 이야말로 묵자가 배워야 한다는 유가의 주장은, 마치 손님이 없는데도 손님 접대의 예를 배우고, 물고기가 없는데도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기쁨, 노여움, 슬픔, 사랑, 미움 등은 모두 정감의 측면에 속하므로 묵자는 이를 "여섯 가지 병폐"로 여겨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반드시 스스로 "침묵할 때는 항상 사색하고, 말할 때는 항상 가르치고, 움직일 때는 항상 일하도록" 하여, 우리의 모든 일거일동이 이지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상태 속에 있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묵자의 정감배제 명문(明文)이다.∏ 비악론(非樂論)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인민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음악을 비난한다.묵자의 이 「비악편」은 묵자 사상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일컬어져 왔으며, 유가들의 집중 공격을 받은 부분이기도 하다. 묵자가 음악을 비판한 이유는 첫째, 인민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고 인민의 재물을 더 많이 약탈한다. 둘째, 인민의 생산 노동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묵자는 노동을 인간의 특징으로 생각하고 중시한 인류 최초의 사상가였다. 그는 말한다."하늘에 사는 새와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과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을 보라! 수컷들은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며, 암컷은 길쌈하고 베를 짜지 않아도 하느님이 이미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갖추어 주셨다. (오백 년 후에 예수도 이 말을 인용한다……신약성경, 산상수훈)그러나 인간은 이런 짐승들과는 달리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그러므로 음악이 인간의 노동을 저해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음악이 배와 수레같이 본래의 목적대로 합당하게 쓰여진다면 반대할 수 없다. 묵자는 음악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묵자 당시는 춘추 말 전국 초기로 주의 봉건제도가 무너지려는 시기였으므로 유가들이 옹호하는 귀족계급과 새로 일어난 관료 및 자본가 계급들(순자의 예치주의와 그의 제자들인 '이사'등의 법치주의자들이 이들을 옹호하여 진시황을 옹립한다) 이 약육강식의 전쟁을 벌리는 틈에서, 조다.
目 次1. 머리말- 장자의 생애와 시대배경2. 본 문- 장자의 인간 이해- 도(道)의 철학- 자연회귀의 무위(無爲)의 정치사상3. 맺음말참고 문헌1. 머리말∏ 장자의 생애와 시대배경장자는 이름이 주(周)이다.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중국 고대의 철인이다(그 생몰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대략 기원전 370년까지 살았다고 추정된다). 공자보다는 약 1세기 반 정도 늦고, 맹자와는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서양과 비교하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고, 에피쿠로스나 제논보다는 약간 선배다. 장주의 전기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태어난 곳이 송(宋)나라 몽지(蒙地 :하남성河南城 귀덕부歸德府 상구현商邱縣 부근)라는 것,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과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송나라 출신이면서 위(魏)나라 재상을 지냈던 혜시(惠施)와 친분이 있었다는 점은 대체로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성장과정이나 경력,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장주의 전기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기원전 1세기, 장주 사후 약 200년 뒤에 쓰여진『사기(史記)』의 「장주열전(莊周列傳)」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모두 합쳐 235글자 정도에 불과하여 너무 간략할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저서와 사상의 소개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그 속에 전기적인 기술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 밖에 없다. 즉 그는 위나라 혜왕(惠王) 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일찍이 향리에서 칠원리(漆園吏 :칠원은 옻나무를 심은 밭이다)를 지냈고, 초(楚)나라 위왕(威王)의 초빙을 거부했으며, 혼자 융ㅎ자적한 삶을 즐겼다고 한다.『사기』의 그런 기술을 보충할 전기적인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외편≫이나 ≪잡편≫중에 보이는 장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그것이다. 예컨대 그의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주검 앞에서 쟁반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지락(至樂)」), 그리고어느 부분이 장주가 직접 기록한 것이며, 또한 어느 부분이 장자의 본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고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그 판정(判定)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옛날부터(문헌으로 확인되는 것은 전한말(前漢末), 곧 후한초(後漢初)『장자』는 ≪내편≫과 ≪외편≫의 구별이 있었고, ≪내편≫은 비교적 오래된 부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히 처음의 두 편「소요유(逍遙遊)」와「제물론(齊物論)」을 장주의 본래 사상으로 여기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2. 본 문∏ 장자의 인간이해장자는 인간 마음이 가지고 있는 쉽게 무너지는 변덕과 불안정성에 주목한다. 그것을 면밀히 탐구하여 이해하지 않고, 인간관계의 항구적인 안정이나 국가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 질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모래 위에 누각을 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인간 관계가 변함없는 애정과 우의로 뭉쳐 있고, 현실사회가 흔들리지 않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인간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형성하고 사는 집단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 속의 인간은 항상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로서, 남편과 아내, 연장자와 연소자, 나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서 현실을 살아야 한다. 부모도 자식도 없고, 남편과 아내도 없으며, 지배자도 없고 피지배자도 없는 인간 일반이란 단지 머리 속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장자도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그러한 인간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려면, 그 관계에 규범이 되는 도덕의 필요성을 수긍한다. 예컨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규범이 되는 효경(孝敬)의 도덕, 사회 관계에 규범이 되는 신의(信義)의 도덕, 지배 관계에 규범이 되는 충성(忠誠)의 도덕이 그렇다.그러나 그들 도덕 규범이 인간 존재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인간 마음의정치 권력에 아첨하고, 성인의 경전을 미끼로 삼고 세속의 이익에 아첨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그 탐욕스런 절도 행위를 무엇보다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시대 착오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눈살을 찌푸린 못생긴 여자들보다 훨씬 덜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깔보고, 악함을 선함이라고 여기고, 그릇된 것을 바르다고 우긴다. 그 기만과 거짓, 위선과 왜곡이 진정 악덕이며, 진리에 대한 능멸인 것이다. 장자는 그들의 수치스러운 절도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이 세상의 공자학파 선생들에게는 공통된 하나의 약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밖이나 위만 쳐다볼 뿐이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인간 마음의 복잡한 움직임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형식적인 예의 규범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인을 꿈꾸고, 그 꿈을 규범화하려고 한다. 그 규범 속에 도취된 그들은 어느 새 규범과 존재,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망각한다. 그 망각 속에서 규범은 인간을 속박하는 질곡, 허위, 그리고 위선이 되어서 인간의 진실을 왜곡한다. 장자는 이렇게 공자학파의 선생들을 평가한다. 진실로 예의규범을 설파하는 데는 정통할 지 모르지만, 미묘한 인간 마음은 알지 못한다. 인간 마음의 나약성, 무분별성, 변덕스러움, 위험성 등 위태로운 존재인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들은 좀더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규범을 떠받치는 존재를, 즉 인간이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주장을 떠받치는 인간이 '무엇이다'를 주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규범화와 형식화를 무너뜨리는 인간 삶의 포착하기 어려운 복잡함을 좀더 예리하게 주시할 때, 그들의 인간관과 가치관은 그 근본부터 수정될 것이라고 보았다.∏ 도(道)의 철학1. 만물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변화한다장자는 자기 존재의 근거는 자기가 지금 살아있다는 그 분명한 사실 그 자체 속에 놓여 있으며, 자기가 아닌 다른 심원하고 오묘한 형이상학적인 다른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월적인 도는 현실 세계에 있으며, 닭이 닭으로서 울고 개가 개로서 짖는 우리 눈앞의 현실 세계 속에 있다. 도는 외물을 외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이치이며, 외물과 존재 차원을 달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는 외물을 초월한 초월적인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외물과 함께 있고 외물에 내재한다. 아니 외물이 외물로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바로 '도' 라고 할 수 있다. 외물을 떠나서 도는 없고, 도를 떠나서 외물은 없다. 즉 '도' 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고 하겠다.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이른바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상야릇한 명상이라든가, 시끄러운 논쟁을 통해서 도, 즉 진실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구성한다. 그 자신과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진리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닫혀진 눈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추상 속으로 증발시켜 버리고, 역동성 넘치는 있는 그대로의 풍부한 진실을 말살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독단적인 교리나 일면적인 가치관을 절대 유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광대한 대지를 구획지워 놓고서 그곳만이 진리의 꽃밭이라는 편견을 다른 사람에게 태연히 강요한다. 자기가 선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선하다고 고집하고, 자기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만을 아름답다고 착각하며, 자기가 쓸모있다고 하는 것만을 쓸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악하고, 추하며, 무용하다는 평가를 수치심도 없이 넉살좋게 내뱉는다. 그들은 발을 내디딜 만큼의 대지만 있다믄 그것으로 충분히 넓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3. 도는 두루 통하여 하나가 된다일체의 만물은 각각 이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만물 각자가 간직한 이치의 형태는 다르지만, 보편적인 이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도는 인간에게만 특별히 중요한 것이 아니며, 또한 새·짐승·풀·나무라고 특별히 경멸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체에 순응하고 인간의 심정에 따르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죽양」편에서는 민중을 다스리는 데 있어 형체에 순응하고 감정에 따르는 통치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민중을 다스리는 것은 농작물을 심는 것과 같아서 그 성질에 따라서 밭을 깊이 갈고 정성껏 김을 매야 하는 것이니 그러지 않으면 초래되는 것은 단지 보복일 뿐이다.장자는 민중을 "그 본래의 자연스런 상태에 편히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가장 긴요한 것이 "총명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총명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민심을 동요하게 하고 민심이 동요하는 것은 모든 변란의 원인이다. 민심을 동요시키지 않는 관건은 '고요한 상태(靜)'을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장자가 처한 시대는 혼란의 시대로 이러한 상황은 황제시대 이래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장자는 총명과 지혜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장자에게 더욱 심각한 것은 인류가 이미 도달한 과학·기술·문화적 성취에 대해서 한결같이 공격을 진행하였고 이런 성취를 배격해야만 비로소 온 천하 사람들이 그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제왕의 문제는 당시의 정치사상계가 광범위하게 논술한 중요문제였다. 따라서 이 문제도『장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장자』의 수많은 편(篇)과 장(章) 속에서는 인성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황제 이하, 심지어는 복희(伏羲)·신농(神農)에 이르는 모든 군주들을 깔보고 비웃었다. 이들은 모두 세속적인 군주로 인성을 파괴한 장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이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권력이 이전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투쟁하고' '도둑질' 해서 획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최대의 사기꾼이며 도적인 것이다.『장자』의 어떤 편에서 볼 때 황제 이하의 모든 역사는 모두 인성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군주는 바로 인성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모두 인의를 입으로 말하지만 인의는 바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의 온상인 것이"
目 次1. 머리말- 맹자의 생애와 시대배경2. 본 문- 심성론- 수양론- 인정(仁政) 왕도(王道)의 정치- 민본(民本) 정치: 養民, 敎民, 使民, 保民- 정권 이양의 법칙- 정전법(井田法)3. 맺음말참고 문헌1. 머리말∏ 맹자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공자보다 약 150년 뒤에 노(魯)나라의의 맹손공의 후손으로 추색인이며, 名은 軻이고, 字는 子輿 또는 子車이다. 시호는 鄒公. 孔子의 정통 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孔子 다음의 亞聖으로 불린다. 孟子의 가문은 귀족 가문으로 현재의 山東省에 해당하는 鄒에 정착해 살았다. 孔子의 출생지인 魯나라와는 지극해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孟子는 더욱 孔子를 숭상하고 사숙했다. 어려서 慈母三遷의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젊은 시절에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문하생이 되어 孔子의 학통과 인연을 맺었다.마침내 孟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당시의 열국은 각기 强兵을 길러 征伐을 일삼던 때였으므로 孟子의 仁義와 王道의 주장은 시의에 적합치 못하다 하여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5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말년에 門人 萬章들과 더불어 孔子의 뜻을 계승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84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제자들이 그 언행을 기록하여 《孟子》 7편으로 이루어졌다.周(B.C 111-255) 나라는 사회적. 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 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孔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孟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中國 역사상 戰國時代(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다. 그러므로 '인의'를 잘 보존하고 확충할 수 있으면 그가 곧 군자 성현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의를 보존 확충하지 못하고, 간혹 보존 확충하였다고 해도 지속하지 못해서 금방 금수와 같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지 금수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의지성(仁義之性)은 결국 드러나게 된다.맹자는 『고자상(告子上)』에서 '인간의 성' 과 '개·소의 성' 이 다름을 말하였다. 주희(朱熹, 1131~1200) 는 고자(告子)를 가리켜 "단지 지각·운동 등의 움직임에서 사람과 동물이 같다는 것만 알았지 인의예지의 순수한 것에서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은 모른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지각·운동 등의 움직임'은 식욕·성욕·생육(生育)·자위(自衛)·도피·저항 등의 본능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사람과 금수가 모두 같다.사람과 금수가 다른 것은, 사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의예지'를 자각할 수 있고 보존하고 확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금수와 달리 인격을 완성할 수 있고 인륜을 행할 수 있으며, 역사 문화를 창조할 수 있고 인문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며, 시대와 함께 발전하여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제 2단계 논증은 선한 본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심(心)의 본연성을 지적하여 사람의 성(性)이 선함은 선천적으로 본래 그러한 것이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함을 증명하였다."사람에게는 모두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 있다""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은 양능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모든 사람에게는 하늘이 준 벼슬과 본래 귀한 것이 있다"맹자는 사단지심(四端之心)을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친지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양지(良知)·양능(良能)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선천적으로 본래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양지·양능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이는 바로가장 큰 욕망'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정도에 맞기만 하면 천리(天理)에 어긋나지 않는다. 유가에서는 도덕 수양을 말할 때 모순의 대립을 취하지 않고 주종(主從)의 대비(對比)를 중시한다. 마음을 기르는 것과 욕망을 적게 하는 것은 이러한 대비적 관계로서 욕망이 적으면 마음을 잘 배양할 수 있지만, 욕망이 지나치면 마음을 배양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주종(主從)을 분별하고 적은 욕망으로 마음을 배양할 수 있다면 외부에서 구하는 것은 나날이 적어지고, 내부에 보존하는 것은 나날이 많아질 것이다.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적으면 힘이 적게 소비될 것이며, 내부에 보존하는 것이 많으면 의(義)·리(理)가 나날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심(人心)의 유행(流行)과 발용이 샘물 솟아나듯이 주야를 그치지 않을 것미여, 무엇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측은지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수오지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시비지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며,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나에게 있는 사단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용솟음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해를 보호하는 것도 충분하지만, 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하다"측은·수오·사양(공경)·시비의 마음은 '하늘이 내게 준 것이고,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 이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이며, 이 단서를 따라 확충해 나가는 것이 인이다.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이며, 이 단서를 따라 확충해 나가는 것이 의이다. 예(禮)·지(智) 역시 이와 같이 이해하면 된다. 사람에게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처럼 모두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제하며 법을 그 효용으로 삼는다. 이처럼 도덕정치는 결코 법제의 작용을 없애버리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예와 법'을 함께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이다.둘째, 덕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다(貴德尊士). 맹자는 작위·연령·덕을 천하에 존경받는 세 가지로 보았다."조정에는 지위 만한 것이 없고, 마을에는 연령 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양육하는 데는 덕 만한 것이 없다.…그러므로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군주는 반드시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신하가 있었다. 그래서 의논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찾아갔으니, 덕을 받들고 도를 좋아함이 이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탕왕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심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왕이 되었으며, 환공(桓公)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패자가 되었다."군주가 신하를 부르지 않는 것은 현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군주가 만약 인자와 현자를 믿지 않으면 나라는 텅 비게 된다. 맹자는 "천하를 남에게 주는 것은 쉽지만,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덕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여, 현자가 지위에 있으며 재능있는 자가 직책에 있게 해야 한다. 한 나라의 군주가 현자를 존경하고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면, 천하의 선비가 모두 기뻐하여 그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위해 인재를 얻는 것은 인(仁)이라고 부른다" 는 뜻이다.셋째,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하다(興民同好惡).백성이 원하는 것을 주어서 모이게 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며,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행하지 말아야 그들의 원성을 사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맹자의 뜻은 『대학』의 "백성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한다"는 것과 같은 취지이다.맹자는 특히 민의(民意)를 중시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백성과 함께 좋아하고 싫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백성과 함게民 백성을 부리다백성을 부리는 방법은 백성과 함게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다. 살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자신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수고하므로 힘들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살려주기 위한 방법이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나쁜 사람을 제거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以殺止殺). 정신 노동(勞心)과 육체 노동(勞力)의 구분은 직분상의 분담이다. 정신 노동자는 남을 다스리지만 공익을 위해서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공공의 일을 담당하므로 봉록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맹자의 이같은 견해는 천하의 공통된 이치일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규칙이다.4. 保民 백성을 보호하다군주가 백성을 보호하는 도리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을 통하여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하는 데 있다. 맹자는 제(齊) 선왕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여 인심(仁心)의 싹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을 들어 다른 곳에 더하고 은혜를 베풀어가면 사해를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을 보호하고 왕 노릇을 한다" 는 것이다."옛날에 관문을 만드는 것은 포악한 자를 막으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관문을 만드는 것은 포악한 짓을 하기 위해서로구나."관문을 설치하여 포악한 자를 막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관문을 설치하고서 포악한 짓을 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학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전국 시대에 제후들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였는데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서 죽인 사람이 들에 가득했고, 성을 빼앗기 위해 싸워서 죽인 사람이 성에 가득했다." 맹자는 이것을 "토지를 위해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백성을 학대하고 보민(保民된다.
目 次1. 머리말- 손문의 생애2. 본 문-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3. 맺음말참고 문헌1. 머리말∏ 손 문(孫文)의 생애손 문의 자는 일선(逸仙), 호는 중산(中山)이다. 중국 광둥성 출신으로 가난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의학공부를 했으나 청일 전쟁 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건립, 반청운동을 시작했다. 두 차례의 무장봉기를 거듭 실패하다가 1905년 러일전쟁 후 중국 동맹회를 결성, 삼민주의를 혁명정책으로 정한다.삼민주의란 곧 구국주의다. 손 문에 의하면 삼민주의는 중국으로 하여금 국제적 지위의 평등, 정치적 지위의 평등, 그리고 경제적 지위의 평등을 촉진시켜 중국을 언제까지나 세계 속에 합당히 존속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구국주의다. 이러한 삼민주의는 곧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말한다.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손 문은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곧 정권을 위안 스카이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망명가 그곳에서 쏭칭링을 만나 1915년 재혼했다. 위안 스카이가 타도된 후 1924년 국공합작을 이루어 국민 혁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1925년 을 발표하고 정치협상을 가던 중 병사했다.2. 본 문∏ 민족주의민족과 국가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다고 손 문은 보았다. 이를 구별하는 방법은 민족과 국가가 기본적으로 어떠한 힘에 의해 형성되었는가를 보면 된다고 한다. 즉, 민족은 자연의 힘에 의해 형성된 것임에 반하여 국가는 무력을 이용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자연력은 왕도(王道)이며, 왕도에 의해 성립된 단체가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무력은 곧 패도(覇道)이며, 이 패도에 의해 성립된 단체가 곧 국가라는 것이다. 이는 홍콩의 성립과정을 그 예로 들고 있는데, 홍콩은 결코 수십만의 홍콩인이 영국인을 환영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무력에 의한 할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민족을 형성하는 요인은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인데 그 중 가장 유력한 그들의 생활방식이 유목생활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 생활습관으로 인해 원정을 다니는 데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민족을 형성하는 세 번째 중요한 요인은 언어이다. 외래 민족이 우리의 언어를 쓰게 되면 우리 민족에게 쉽게 감화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동화되어 우리와 동일한 민족이 된다. 만약 사람들의 혈통이 동일하고 언어마저 동일하다면 동화의 효과는 더욱 쉽게 나타나는 바, 언어는 민족을 형성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민족을 형성하는 네 번째 요인은 종교이다. 인류는 동일한 신을 숭배하거나 동일한 조상을 신앙하는 자들끼리 결합하여 한 민족을 형성한다. 아라비아나 이스라엘 같은 국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인과 유태인이 아직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민족을 형성하는 다섯 번째 요인은 풍속과 습관이다. 만약 인류가 거의 똑같은 풍속 습관을 오랫동안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결국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한 민족을 형성할 것이다.손 문에 의하면 민족주의는 바로 국족주의(國族主義)이다. 중국인이 가장 숭배하는 것은 가족주의와 종족주의이므로, 중국에는 오직 가족주의와 종족주의만 있었지 국족주의라는 것은 없었다. 이러한 원인은 가족과 종족에 대한 단결력은 몹시 강하지만, 이러한 종족주의가 국가를 위해서는 단 한번도 웅대한 정신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게 하지는 않으니, 단지 종족 수준에 머물러 국족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았던 데에 있다. 학자들에게 있어 붓이 생활의 도구이듯, 민족주의는 인류가 생존을 도모하는 도구이다. 제국주의의 소멸만이 '치국평천하'를 실현하는 길이며, '치국평천하'를 위해서는 먼저 민족주의와 민족의 지위를 회복해야 하며, 고유한 도덕인 펴오하를 기초로 하여 세계를 통일하고 대동세계를 이룩해야 한다고 손 문은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의 참된 정신이었다.∏ 민권주의'민(民)' 은 단체나 조직에 속한 여러 사람을 말한다. '권(勸)' 은 곧 힘이며 위세이다. 즉, '민' 과 '권' 이 합쳐 이루어진의 중대한 일은 인류가 날마다 영위해야 하는 것이었다. '보' 란 자위(自衛)로서 개인, 단체 또는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양' 은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자기를 방위하는 것과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인류가 생존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생존을 유지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 또한 생존을 유지하려 한다. 이로 인해 인류의 '보, 양' 과 동물들의 '보, 양'이 충돌하여 상호 경쟁이 일어나게 됐고 인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투쟁은 인류가 출현한 이래 계속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권' 이란 인류가 투쟁을 위해 사용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류는 탄생 이래 날마다 그 투쟁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손 문은 민권의 유래를 이러한 투쟁의 역사 안에서 분석하고 있다.민권이 유래된 첫 번째 시기는 앞서 말한 인간과 동물의 투쟁으로,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체력에 의존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인간과 자연의 투쟁으로, 신권을 사용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인간과 인간의 투쟁, 나라와 나라의 투쟁, 민족과 민족의 투쟁으로, 군권(君權)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현재의 네 번째 시기에는 국내의 투쟁, 즉 인민과 군주 간의 투쟁이 되었다. 이 시대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투쟁, 정의와 횡포 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권이 점점 발달했으므로 민권의 시대라고도 그는 부른다.그가 민권주의를 주장한 것은 인민들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생각을 떨쳐내는 데 에 그 목적이 있었다. 황제로써 군림하고자 하는 생각은 동지가 동지를 치는 것이 되며,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전 국민이 서로 때리고 공격하기를 일삼게 되어 인민의 재난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그에게 있어 자유는 국가의 자유를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유사하며 평등은 민권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민권주의는 인민의 정치적 지위가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군권을 타제 군주에 의해 만들어진 불평등은 '인위적인 불평등'이다. 이러한 인위적 불평등으로 인해 특수 계급의 사람들이 포악해지자 억압당하는 인민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어 혁명을 일으켜 불평등을 타파하였다. 그러므로 혁명의 취지는 본래 인위적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 있었으며, 평등을 실현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전제 군주가 타도된 후 민중들은 이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학설을 깊게 믿고, 인간의 평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오래가지 않게 된다. 설사 민중들이 천부인권설에 따라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평등을 실현하였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거짓 평등이다. 이러한 평등을 그는 '가평등(假平等)' 이라고 한다.본래 사회적 지위의 평등이란 최초의 출발점이 평등하다는 것이며, 그 후는 각자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두뇌와 재능에 의해 스스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개인의 두뇌와 재능은 선천적으로 차이가 있어서 각자가 노력하여 키워나간 능력의 결과도 당연히 차이가 있다. 결과에 차이가 있는 이상 당연히 이를 평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손 문에게 있어 진정한 평등은 각 사람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두뇌와 재능에 관계없이 이후에 모두 다 높은 지위를 갖든지 아니면 모두의 지위를 똑같이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처럼 모두가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된다면, 인류에게는 진보가 있을 수 없고 오직 퇴보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권과 평등은 인류를 진보시키는 동시에 인류의 정치적 지위의 평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평등이란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위적 평등은 곧 정치적 지위를 평등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을 통해 모든 사람의 정치적 지위를 평등하게 하여야 한다고 한다.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민권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며, 민권이라는 원칙을 따라야만 한다. 민권이 발달해야 자유와 평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민권이 발달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이 두가지 민권을 가짐으로서 정부 안의 모든 관리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들을 내보내고 또 한편으로는 영입하는 것이 가능하여, 양방향 모두 인민이 자유로이 할 수 있다.국가에는 관리 외에 또 중요한 것이 법률이 있다. '사람을 다스림' 에는 '법을 다스림' 이 없어서는 안된다. 창제권은 인민이 법률을 관리하는 법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어떤 법률을 인민에게 대단히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경우에는, 그 법률을 자신들이 결정하여 정부로 하여금 집행하게 하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 권력이 바로 창제권이며 제 3의 민권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의 옛 법률이 인민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을 경우, 자신들이 그것을 철저히 개정시킨 후, 정부에 제출하여 그 개정시키니 새로운 법률을 집행시키고 지금까지의 옛 법률을 폐지할 권리가 필요하다. 이 권력을 복결권이라 하며 이것이 제 4의 민권이다. 인민에게 이 네 가지 민권이 있어야 완벽한 직접 민권이 된다.한편 정부측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 권력이 필요한데 이는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고시권, 감찰권을 말한다. 인민의 네 가지 정권으로 정부의 다섯 가지 치권을 관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민권정부의 기관으로 보고 있다. 인민은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 복결권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뜻대로 정부를 관리할 수 있고, 정부는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고시권, 감찰권을 실행함으로써 인민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 이 아홉 가지 권력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만 민권문제가 완전한 해결을 볼 수 있고, 합리적인 정치를 이룰 수 있다. 인민과 정부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정치기관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민생주의손 문은 '민생'을 인민의 생활, 사회의 생존, 국민의 생계, 대중의 생명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민생이야말로 모든 사회운동의 원동력이다. 민생이 뜻대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문명이 발달되지 못하는 것이며, 경제적 조직도 개량되지 않고, 도덕이 퇴보하는 등 여러 가지 불공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