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담보신탁의 취급사례-법정관리를 신청한 채무자의 여신 회수 A은행은 주은부동산신탁(주)의 담보신탁 수익권증서를 담보로 갑회사의 여신을 취급하였으나 갑회사의 부도 발생 및 법정관리 신청으로 동 여신이 부실화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이에 A은행은 당사에 채권회수 방법을 문의한 바 당사는 담보신탁된 부동산이 재산보전처분 대상이 아님을 통지한 후 금융기관의 요청에 따라 신속히 공매처분을 실시하여 금융기관의 부실여신 발생을 방지할 수 있었음.-복잡한 부동산을 신탁한 후 대출받은 사례 을회사는 회사소유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B금융기관으로부터 여신을 지원받을 계획이었으나 담보부동산이 여러곳에 산재해 있고 일부 부동산에는 복잡한 권리관계가 진행중이어서 담보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이었음.이런 사정을 들은 금융기관 여신담당자는 을회사로 하여금 주은부동산신탁(주)에 담보신탁을 하도록 하였던 바 이에 당사는 복잡한 권리관계가 진행중인 부동산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마련하고 각 부동산을 수탁하여 이를 근거로 신속히 수익권증서를 발급함으로써 을회사가 쉽게 대출을 받게 할 수 있었음.-적은 비용으로 적기에 대출받은 사례 병회사는 작년말 예상했던 자금유입에 차질을 빚자 급히 자금이 필요하여 동분서주한 결과 3곳의 금융기관으로부터 원하는 담보여신을 약속받을 수 있었음.그러나 병회사로서는 각 금융기관별 근저당설정등기절차에 따르는 비용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간이 촉박하여 적기에 자금을 지원받을 수 없는 위기에 처함. 이에 난감해 하던 중 금융기관의 소개로 주은부동산신탁(주)에 담보신탁을 의뢰하였던 바 당사는 신속히 등기절차를 완료하고 3개 금융기관에 각각 수익권증서를 발급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병회사가 필요한 시기에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음.부동산 관리 신탁의 취급사례< 관리신탁으로 부당한 권리침해를 방지한 사례>- 중소건설회사인 A사는 OO지역에 B사를 건설사로 하여 아파트사업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동 건설사인 B사의 부도발생으로 인하여 B사의 하도급업체들로부터 부당한 공사대금 지급압력을 받고 있었음.이로 인해 아파트사업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타 사업부지에 하도급업체들이 가압류 등 부당한 권리침해를 할 경우 적기의 사업시행이 곤란하게 될 소지가 있어 고민하던 중 주은부동산신탁에 관리신탁을 하게 되면 타인의 권리침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당사를 방문 상담하였음.이에 당사는 소유권을 당사에 신탁토록 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A사의 등기상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A사는 적기에 아파트사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하도업체들의 부당한 공사대금 지급압력에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음.- L씨는 자신명의로 빌딩을 소유하고 OO사업을 영위하는 개인사업자로 최근 자신의 빌딩의 임차인이 임차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차목적물의 명도를 거부함은 물론 도리어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음.L씨는 이전에 등기부상 부당한 권리침해를 받고 법원을 통해 이를 해결한 사례가 있었는데 비록 부당한 권리침해라 하더라도 등기부상 제한물건이 일단 설정되면 법원을 통해 이를 해소하는데 비용이 많이 지출되고 상당기간이 소요되어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경험했던 터라 임차인으로부터 악의의 권리침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그러던 중 주은부동산신탁에 관리신탁을 하면 권리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당사에 관리신탁을 의뢰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었음.부동산 처분신탁의 취급사례 중소건설회사인 Y사는 향후 아파트사업을 위해 부지를 지주로부터 매입하기로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 계약금을 지급하고 잔금은 아파트 사업승인을 득한 후 지급하기로 하였음.그러나 Y사는 지주의 신용이 불안하여 잔금지급일 전에 지주 명의의 등기에 제한물권이 설정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울러 소유권이전 시점에서 지주의 신상에 변동이 생김으로 인하여 소유권이전에도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음.그러나 주은부동산신탁에 처분신탁을 하게되면 지주의 채권자들이 등기부상에 제한물권을 설정할 수 없고 또 소유권 자체도 주은부동산신탁에서 직접 이전받게 되므로 향후 지주의 신상에 어떠한 변동이 있더라도 안전하게 소유권을 이전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당사에 처분신탁을 함으로써 토지매입에 따른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었음. 건설회사인 H사는 아파트를 시공하고 시행자로부터 미분양아파트 및 상가를 대물로 취득하기로 하였으나 미분양아파트의 소유권을 이전 받을 경우 취득세, 등록세 등 상당한 비용이 지출될 수 밖에 없고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소유권을 시행자 명의로 그대로 두고 분양자를 물색할 경우 시행자의 신용이 불량하게 되면 시행자의 채권자들로부터 등기부상 권리침해를 받게 되므로 이도 불안하여 비용도 줄이고 권리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인 주은부동산신탁의 처분신탁을 함으로써 안전하게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분양 입주자를 모집하므로 적당한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할 수 있었음.미국리츠 - 성공사례세계 최고층건물인 시어스타워(110층)와 '블루스'의 발원지로 유명한 시카고.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시카고강을 따라 가다 보면 사우스웨커가 30번지 한쪽에 우뚝 솟은 40층 짜리 쌍둥이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미국내 선물거래의 70% 이상이 이뤄지는 '시카고상업거래소(CME)' 건물. 지은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깔끔하고 빌딩관리도 최고수준이다. 연면적이 5만6000평으로 여의도 63빌딩 보다 넓지만 살로먼스미스바니, 프루덴셜 등 금융기관이 대거 입주해 빈 사무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건물은 개인소유도 국가소유도 아니다. 미국내 최대 빌딩전문 리츠인 EOP(Equity Office Properties.회장 사무엘 젤)가 관리하고 있다. EOP는 현재 보스톤, 시카고 등 37개 대도시에 381개 빌딩을 소유하고 있으며 종업원 2050명, 거래기업도 6800여 개에 이른다. 자산규모는 24조원을 웃돌고 지난해 총수익은 2조 6000억원으로 추정된다. 97년 뉴욕증시 상장 이후 연 평균 수익률도 17%에 육박하며 99회계년도 결산때에는 투자자들에게 5000억여원을 배당했다. 그렇다면 EOP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피터 키스럭 IR담당 부사장은 "EOP는 네가지 면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능한 관리인력. 안정적인 현금흐름. 지역별 위험분산. 적절한 성장전략 등이 오늘날 EOP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지적이다. 키스럭 부사장은 "빌딩을 살 때는 무엇보다 A급 물건만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썼다"면서 "물론 지역별 포트폴리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EOP의 지역별 투자비중을 살펴보면 사무실 수요가 많은 보스톤과 시카고가 각각 16%, 9%나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익이 좋다고 한 지역만 과도하게 투자하지는 않는다. 샌프란스시스코(9.7%).시애틀(8.1%) 등6~7개 지역에도 총 자산의 5% 이상을 투자해 놓고 있다. 지역별 분산전략은 경기가 나쁠 때 투자위험을 줄이고 수요층도 확대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키스럭 부사장은 "반드시 도심빌딩만 살 필요는 없고 근교에도 좋은 물건만 있으면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위해 임대료를 시장가격(market rents)보다 다소 낮게 책정할 필요도 있다. EOP는 현재 보유빌딩 임대료 수준을 시장가격까지 현실화시키면 연간 7000억원 이상 추가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경기가 나빠져도 꾸준한 현금흐름을 발생시키고 내부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EOP는 개발형 부동산에도 투자하지만 비중은 높지 않다. 수익률이 높지만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발프로젝트에 투자한 규모는 1조원 정도로 총 자산의 5% 수준에 그쳤다.= 서비스가 기업가치 높여 ='이제 입지(Location)에서 서비스(Service)로'EOP에서 사업개발을 담당하는 마이클 쉐인코프 부사장은 "과거 리츠성패가 입지여건에 달렸다면 이제는 서비스가 모든 걸 좌우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얼마나 다양하고 질높은 서비스를 부동산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건물가치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 EOP의 성공비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끊임없는 고객서비스 개발. 이는 곧 브랜드 파워와 직결된다고 쉐인코프 부사장은 지적했다. 이에 따라 EOP는 테넌트의 서비스수요에 부응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코카콜라 라이프스타트 유에스뱅크 등 22개 회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일부회사와는 합작방식으로 지분출자까지 하고 있다. HQ에는 7500만 달러를 출자했고 리거스(Regus)와는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12개 빌딩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최근 6년 가까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단기 사무실임대 (flexible officing) 전문업체로 EOP는 이들과 제휴한 이후 연간 총 수입의 25% 가까이를 벌어들이고 있다. 쉐인코프 부사장은 "서비스가 좋으면 임차인 유치와 임대료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며 "임대료가 비싸더라도 앵커테넌트(비중있는 임차인)는 질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빌딩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같은 고객중심마인드는 철저한 기업이념 공유와 지속적인 종업원 교육, 훈련을 통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EOP는 '종업원과 고객, 투자자의 성공파트너로 평가받고 선택되자'는 기업이념을 제정하고 종업원 수칙까지 제정해 실천하고 있다.
난 사실 자서전을 읽어 본적이 없다. 물론 자서전을 일부러 선택 안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자서전 하면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는 것처럼만 들려서 자서전은 그다지 잃고 싶지 않은 책중 하나이다. 오죽 했으면 이순신 장군(물론 이건 위인전이라서 자서전과 성격이 약간은 다르지만)이후론 한권도 안 봤다.(챙피 해야 할 사실인데 왠지 자랑하는 어투인 것 같다)3학년이 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 따라하다 보니 책읽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 고사때 제출했던 책은 얇은 책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말씀처럼 전달함수를 구하고 조류개산을 잘하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간고사가 끝난 후(참고로 자동제어 시험이 11월초에 끝났습니다)에 여유 있게 읽을 요량으로 이 책을 택했다.우선 니어링의 프로필을 보면 1883년 미국에서 태어나서 정확히 101년을 살다가 1983년에 죽었다. 젊어서는 펜실바니아 대학 경제학 교수를 했었고 세계 1,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당국의 박해와 기존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당한 그는 마침내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또한 선거에 출마를 했다가 낙선도 했다. 또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가 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그후 책을 집필하거나 강연으로 살다가 첫째 부인과 이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결혼을 해서 버몬트 주의 숲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단풍사탕을 만들어 파는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을 시작했다. 1970,80 연대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1983년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나는 생명을 존중하기에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생명이 우주라는 현상세계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믿는다. 나 역시 이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는 생명의 한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우주의 모든 부분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 자신과 우주 안에 사는 다른 모든 생명체를 존중한다』난 이 구절이 사회주의자이면서 평화주의자이면서 자연주의자인 니어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채식주의를 하고 스파이로 몰리고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까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에 반대한 반전 시위를 했던 것이다.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우리와 너무도 닮은 민족 몽골. 그 옛날 전세계를 발 아래에 복종시켰던 칭기스칸의 후예. 우리는 바로 이웃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으며 이상국가에 최고로 근접했던 대제국 몽골을 두고 너무 서구적인 것만을 쫓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제는 무리가 그 동안 외면 시 했던 시선을 돌리고 한번쯤 똑바로 그들을 응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우리와 한 핏줄일 지도 모르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생활과 문화, 역사 등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몽골국은 중부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온대기후이다. 면적은 1,566,500㎢로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넓이이며, 평균해발고도가 1580m이다. 그리고 국토의 2/3가 분지와 호수이다. 일반적인 몽골의 기후는 겨울이 매우 길며 겨울철의 날씨중 반 이상이 맑은 날이며 대기가 아주 건조하고 강수량은 적고 기온의 일교차와 연교차가 매우 크며 계절의 변화가 아주 급격히 진행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람은 서풍과 북풍이 대부분인데, 봄엔 사람이나 가축을 날려버릴 만큼 대단히 위력이 센 곳이 있는 반면 겨울엔 거의 바람이 불지 않고 지역에 따라 기온 분포도 대단히 편차가 크며 강수량 또한 그러하다. 특히 강우량과 적설의 다과는 가축의 사료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데 비나 눈이 많이 내리면 가축의 먹이를 구할 수 없어 가축들이 대량으로 아사(餓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가리켜 조드라 한다. 몽골의 봄은 3월부터 시작되며 적은 강수량, 낮은 상대습도, 강한 바람의 특징을 가진다. 여름은 6월부터 8월까지로 비의 계절이다. 가을은 9월부터 시작하며 기간이 매우 짧다. 겨울은 11월부터 시작되며 아주 맑고 건조하다는 특징을 가진다.몽골의 인구는 오늘날 몽골 인구와 대략 일치한다. 70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인구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줄었다는 느낌을 받게된 이유에는 청조지배시 청조가 의도적으로 권장한 라마교 때문이다. 몽골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서 청은 몽골에 강압적으로 라마교를 도입하 넓혀 1206년에 칭기스칸을 중심으로 대(大)몽골제국을 탄생시켰다. 칭기스칸의 사후 어거데이가 코릴타에서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어거데이칸은 금국을 멸망시키고 서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어거테이칸 사후 카톤인 테레게네가 섭정을 하게되고 어거데이칸의 아들인 구유크가 대칸에 오르게 되었다. 구유크칸의 사후 바토의 양해아래 구유크칸의 카톤인 오골카이미시가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골카이미시는 국정에 임함에 있어 정실로 흐르는 경향이 강했으며 정치보다는 상인들과의 교역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녀의 두 아들도 정치에 가입하여 몽골은 3명의 대칸이 통치하는 형국으로 변해갔다. 권력누수 현상이 심해지자 종왕(宗王)들도 멋대로 문서를 발행하기 시작해 몽골제국은 서서히 대립과 혼란속에 빠져 들어갔다. 오골카이미시의 섭정미숙과 몽골고원의 재난으로 몽골의 치정이 파탄으로 치닫자 1249년 4월 바토는 아라코마크에서 코릴타를 개최하여 멍케를 대칸으로 옹립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차카타이계(系)와 어거데이계(系)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251년 6월 허더아랄에서 코릴타를 개최하여 멍케를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추대했다. 멍케칸 시대는 일련의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가(家)의 제왕(諸王)들이 각자 봉영(封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이 각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음과 양으로 현지의 지리적·문화적 특수성에 채색되어 갔다. 몽골제국의 통일성은 정치적인 통일성이지 결코 문화적인 통일성은 아니었다. 1259년 멍케칸이 사망하자 몽골의 각세력들은 후계칸의 선출문제를 놓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시작했다. 이 이합집산의 결과 칸위후보자는 몽골고원의 아리크버케와 중원의 코빌라이로 압축되었다. 몽골고원의 아리크버케는 보수적인 유목귀족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인물이여 코빌라이는 중원을 배경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몽골제국의 내부 결속을 꾀하려는 인물이었다. 코빌라이는 만약 코릴타가 카라코롬에서 개최될 경우 유목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아리크버케가 우세하리라는같은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남송의 공략은 1273년 1월 남송의 항복을 받았다. 남송을 멸망시킨 원조는 계속해서 인도지나까지 정벌하여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를 통일한 국가가 되었다. 1294년 1월 코빌라이칸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자 원실제왕은 상도에서 코릴타를 개최하여 셋째아들인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했다. 테무르는 코빌라이칸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한편 전대의 유산이었던 카이도의 난을 해결하였다. 또 남송이나 일본 등 주변국가에 대해서도 평화정책을 추구했다. 테무르가 1307년 1월에 병사(病死)하자 막북에 진수하고있던 카이산이 아우인 아요르바리바드와 연합하여 유력한 칸위계승 후보자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주살하고 그해 5월 칸위를 계승하였다. 카이산 일파의 쿠테타에는 고려의 충선왕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카이산은 즉위후 아요르바리바드를 황태자로 삼았으며 1311년 1월에 카이산이 죽자 아요르바리바드가 3월에 칸위에 올랐다. 1320년 1월 아요르바리바드가 죽자 테무데르의 지지하에 황태자인 소디팔라가 3월에 대칸에 즉위하였다. 소디팔라(영종)는 즉위 후 테무데르를 견제하고 평소의 지론인 한법(韓法)을 시행하기 위해 한법의 주창자인 모칼리의 후예 바이조를 좌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영종의 피살 후 9월 진왕인 예순테무르가 케둘렌강에서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1328년 7월 예순테무르는 상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원실은 후계칸을 둘러싸고 일대 내분에 휩싸였다. 이 내분에서 톡테무르가 승리하여 대칸에 올랐다.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배층간의 권력 다툼으로 제국의 힘은 빛을 잃어 갔으며 결국 주원장에 의해 원은 다시 조그만 유목부족으로 전락하고 만다.유목이란 기본적으로 동물과 인간의 공생이라 할 수 있다. 몽골의 유목형태는 정형이 없는 유목형태이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유목민들처럼 이동이 반드시 풀의 상태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이동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몽골의 5대 가축이란 말, 소, 낙타, 양, 염소를 말하며 가축의고 황량한 지방에 적응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추위를 견디는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 몽골에서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는데 그 이유는 늘 움직이기 좋아하는 염소가 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양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님으로써 초지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말은 서양의 그것과 비교해 왜소한 편이나 체격에 비해 말머리는 비교적 큰 편이며 지구력이 좋고 추위를 견디는 능력이 아주 강하다. 몽골인에게 있어 말은 소중한 친구이자 충실한 조수이다. 겔의 입구에 천마를 그린 깃발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말을 순장함으로써 사후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 망이 없으면 올라갈 수 없다고 믿는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의 말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몽골의 말은 목민들이 가축을 돌보고 잃어버린 가축을 수색케 해주며 원거리 여행을 가능케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조련법으로써 말의 피로를 최소화시키며 능력은 극대화시키는데 힘썼다. 또한 그들은 세 살서부터 말타는 것을 배울 정도로 말타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고 말위에서 상반신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몽골 및 투르게스탄의 낙타는 쌍봉낙타로서 체구가 크고 강인하며 후위에 견디는 능력이 강하지만 혹서에는 약한 특성을 지닌다. 주로 화물의 운송수단으로서 사용된다. 낙타는 많은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순화시키는 것이 용이하지 않아서 낙타를 다루는데 큰 숙련을 요한다. 몽골인은 밤에는 사열종대법이라는 행진 방법을 택하는데 낙타의 신경질적인 성질과 어린 낙타의 광분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말, 소, 낙타, 양, 염소의 젖으로 가공된 식품은 백색의 깨끗한 식품이라는 뜻에서 차강이데라고 불린다. 차강이데는 유목민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창출해 낸 유제품류로서 유목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영양식품이다. 몽골인들은 차강이데를 신이 유목민에게 내린 축복이자 신성하고 고귀함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귀중한 손님을 맞거나 떠나 보낼 경우 우유나 말젖술등의 차강이 보호하는 능력도 있다. 모유의 대체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말젖은 주로 말젖술을 만드는데 이를 내몽골이나 서부몽골에서는 체게라고 부르고 외몽골에서는 아이라크라 부른다. 체게는 몽골의 8대 음식 중 하나이며 몽골인들은 이를 최상의 음식이자 지고의 정성과 존경의 상징으로 간주해 왔다. 말젖의 채유는 그 유래가 깊다. 보통 하루에 4∼6번 정도 가능하고 채유된 말젖은 곧바로 나무통에 담겨져 발효과정에 들어간다. 낙타젖은 양젖처럼 농도가 짙으며 영양가도 높다. 낙타젖에는 다른 동물의 젖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분이 있으며 열량도 다른 젖보다 높다. 그리고 모유와 가장 근사하여 산모의 젖이 부족할 경우 모유의 대체용으로 사용한다. 몽골인들은 여러 동물에서 채유한 젖들을 그냥 마시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유제품으로 먹음으로써 보관을 용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훨씬 효능이 뛰어나게 사용했다.몽골인에게 있어 사냥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사냥은 유목민들에게 식량과 모피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생활수단 즉 경제활동의 하나이다. 유목민들은 사냥을 통해 식량을 충당했을 뿐 아니라 모피를 중원의 농산물이나 물품과 교환하였다. 둘째로 사냥은 대규모 군사훈련의 일환이라는 성격도 가진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져 있는 유목제국일 경우 대규모의 사냥은 대부분 모의 전투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사냥을 통해 무기의 사용법을 숙지시키고 기마사술에 익숙케 한다. 셋째로 사냥은 부족 혹은 국가간의 결맥 혹은 복속을 상장하는 역할 즉 정치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원래 대규모 수렵에는 대규모의 인원이 필요한데 인구가 희박한 유목민들이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씨족이 연합해야하고 또 씨족 연합을 이끌 우두머리를 선출해야하며 모든 사람은 우두머리의 지시를 따라야한다. 따라서 고대 몽골인들은 어떠한 중요한 맹약이나 서약을 할 때 반드시 공동수렵에 관한 조항을 삽입하여 단결과 협력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넷째 사냥은 심신을 정화시켜주는 오락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특히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