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 집배원의 삶을 중심으로0. 들어가며“집배원 아저씨”아저씨 아저씨 집배원 아저씨큰 가방 메고서 어디 가세요큰 가방 속에는 편지편지 들었지동그란 모자가 아주 멋져요편지요 편지요 옳지 옳지 왔구나시집간 언니가 내일 온대요우리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집배원 아저씨’의 모습은 어떤가? 언제나 유니폼을 입고 큰 가방을 들고 다니며 친절하게 반가운 편지를 전하는 집배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지는 않을까? 실제 많은 사람들은 집배원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상상하고 있지는 않은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인 ‘상상’이라고 할 때, 그러한 모습만이 집배원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우편업무가 전산화되고, 수많은 광고지들이 우체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을 보았을 때, 이제 우리가 상상하고 있던 ‘집배원 아저씨’들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지는 않을까?우리가 집배원 노동자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구의 제목을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한 이유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집배원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배원 노동자 삶의 이면은 행복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3D에 가까운 노동과 그에 따라 삶에도 영향을 많은 부분 미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이면의 모습일진데, 그렇다면 왜 제목을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했을까? 그것은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로 알고 있는 집배원 노동자의 삶의 이면의 모습에 결코 그런 면만이 전부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의 하나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제목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말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모습의 반어법적 표현인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1.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들우리의 궁금증-정말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가?-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좀 더 일반화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설문지)이 47%로 대체적으로 “불친절하다”라는 의견(a와 b까지)의 17%보다 훨씬 많았고, 이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배원 노동자들을 “친절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집배원 노동자와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많은 작업량으로 인해 집배원 노동자들은 배달업무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힘듦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실제 집배원 노동자들을 만나서 친절하다고 느낀 것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집배원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2. 우체국 노동자의 급여 수준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a. 매우 적다.b. 적다.c. 보통이다.d. 많다.e. 매우 많다.위의 문항은 집배원 노동자에 대한 인식수준 중 급여에 대한 질문이다.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개개인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다른 액수로 표현될 수 있음을 감안한 것이며, 따라서 액수의 표기 없이, ‘많고 적음’으로 표기하였다.위의 문항의 조사결과 급여 수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응답자의 93%가 압도적으로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것은 조사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집배원 노동자를 공무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급여로 예상할 것’이라는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3. 우체국 노동자가 하는 일을 몇가지나 알고 계십니까?a. 1~3가지b. 4~6가지c. 6~10가지d. 10가지 이상위의 문항은 집배원 노동자의 실제 작업의 분류와 상관없이 피조사자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집배원 노동자의 작업량에 관한 생각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 집배원들의작업량과 비교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더 적게, 혹은 더 많게 알고 있었는가를 판단할 때 쓰일 것이다.위의 문항에서 집배원 노동자가 하는 일에 대한 의견에는 67%의 응답자가 1~2가지의 업무를 할 것이라 답했다. 이것은 실제 현지조사에서 집배원 노동자-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배원-가 하는 일은 우편분류, 우편배달, 우체국 보험, 주문상품관련 업무, 택배, 수취오류우편 재배달 등 6가지 이상으로간e. 14시간 이상위의 문항은 집배원 노동자의 근무시간에 대한 것으로 3번 문항과 마찬가지로 집배원 노동자의 작업량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 주 5일제의 시행을 늘려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보통 ‘공무원’과 같이 취급되는 집배원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중요한 자료로 쓰일 것이라 판단되어 설정한 문항이다.위의 조사결과 집배원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8~10시간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집배원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보통 ‘공무원’과 같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답을 하는 피조사자도 상당수 되었다.5. 우체국 노동자도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a. 안다.b. 모른다.위의 문항은 집배원 노동자를 ‘공무원’으로 사고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고자 설정한 문항이다. 각주2)에서도 설명했듯이, 정규직 집배원 노동자는 ‘공무원’이고, 비정규직 집배원 노동자는 다른 사업장의 ‘비정규직’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이 문항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집배원 노동자를 ‘공무원’으로 사고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문항이다.위의 문항에서는 과반수 이상이 비정규직이 있다는 것을 모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집배원 노동자는 ‘공무원’이라고-각주3)에서 설명하고 있듯이-사고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6. 우체국에도 노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a. 안다.b. 모른다.위의 문항은 집배원 노동자가 단체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묻는 문항이다.위의 조사 결과 5번문항과 마찬가지로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공무원 노조가 출범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공무원이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7. 자신의 성별을 체크해 주세요.a. 남b. 여위의 문항은 성별의 차이에 따라 집배원 노동자를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지를 판단하고자 마련한 문항이다. 피조사자의 성비는 남녀 6:4로 비슷했고, 성을 가능케 하는 문항이라고 생각된다.위의 조사결과 연령대는 20대-10대-30대-40대 순으로 20대가 많았다. 조사결과도 20대가 위의 1~7번문항까지 있었던 답의 평균적인 대답을 하였고, 연령별로 조금은 차이가 있으나 별 다르지는 않았다.위의 조사 결과 많은 부분 우리가 예상하던 바와 동일한 결과-임금수준을 제외하고-가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역시 우리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집배원 노동자를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임금수준을 제외하고는 노동시간이 8~10시간이 된다고 예상했고, 업무종류에 대해서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또한 실제 집배원 노동자들의 말에 의하면 배달업무 시 ‘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고, ‘거의’ 대화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집배원 노동자가 ‘친절하다’고 답했다. 만날 수도 없고, 대화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은 집배원 노동자가 ‘친절하다’는 답을 했을까? 그것은 위의 설문에 응했던 많은 사람들이 관념 속에 존재하는 집배원 노동자의 모습을 답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집배원과 우리-조원-가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보았던 집배원의 모습. 분명 같은 모습도 있었지만 다른 모습도 상당수 있었다.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하고 있던 집배원의 모습 그 이면에 또다른 집배원의 모습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집배원도 노동자요, 노동자로서의 삶도 집배원 삶의 한 일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자로써의 집배원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래도 집배원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고,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현지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배원 노동자의 3D를 방불케 하는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또한 ‘친절한 집배원’으로 남고 싶지만 많은 작업량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 몸이 아파도 일을 해야 하고, 온갖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린다는 사실 등은 우리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이제 우리는 집배원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들의 도입된 근대 통신 수단은 바로 우편이었다. 우체국은 정보통신부의 하위현업관서이며 정보통신부장관 소속 하에 있는 직할 우체국과 각 체신청장 및 직할우체국 소속 하에 현업관서인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의 효시는 1884년(고종 21년)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의 설치이며, 따라서 인천의 우체국의 역사는 사실 상 전국에서 분국으로는 처음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95년 농상공부의 통신국 밑에 24개의 우체사가 있었고, 1900년 한성우체사를 총사로 승격시켜 전국의 우체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또한 우리나라의 우정연혁을 살펴보면 487년 신라 소지왕9년에 국가공문서의 송달을 위해 사방에 우역 (郵驛)을 설치했고 1149년에 고려 예종 3년 봉수제도 설치했다.1274년 고려 원종 15년에는 마패제도를 설치했고 1597년 조선 선조 30년에 우역제도를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 제도를 창설하고 1884년 조선 고종 21년에 우편제도의 설치를 왕의 칙명으로 내림했다. 그리고 4월 22일 우정총국을 창설했다, 11월 18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탄생했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 폐쇄(갑신정변:12월 6일)1986년에 농상공부 통신국으로 우편업무 재개하고 1900년 농상공부 통신국 통신원으로 독립했다. 조선 광무 4년 만국우편연합 기구(UPU) 참가하고 1905년 조선 광무 9년에는 한일통신 강탈체결과 한일합방으로 사실 상 폐쇄 당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미군정이 통신사업을 운영하였고 1948년 통신사업을 대한민국 정부가 인수하여 체신부로 개칭 운영하였다 1950년에는 6?25동란으로 인하여 체신부청사(현 세종문화회관 자리 소실. 1층의 박물관도 함께) 소실 당했다. 1961년 별정우체국 제도 실시하고 1968년 1면 1국의 우체국을 설치하고 매일 배달제를 실시하였고, 1969년 그라비아 인쇄기를 도입 1970년 기계화를 위한 우편번호제와 규격봉투제 실시하였다. 1972년에 체신기념관을 개관하고 1974년에는 공산국가에 대한 우편물 교환 확대실시하였다. 1949년
기 업 과 경 영 1 조하청 기업이란?모기업(母企業)의 주문에 따라 부품 등을 생산,납품하는 기업관계를 지칭. 대기업과 경제적,기술적인 면에서 종속관계에 있다.납품유형에 따른 자동차부품산업 분류1차 원청기업 분산형원청기업 분산형1차 원청기업 전속형원청기업 전속형유기적 하도급 기업2차 원청기업 분산형2차 원청기업 전속형하도급 기업어떤 단계의 원청 기업과 하도급관계를 맺고 있는가?원청기업에 대한 납품비중거래의 안정성분류 기준창원공단 부품기업의 납품유형별 체계도D 정밀, D 정밀공업, D 기어공업D 강업, P 전기, P정밀, G기업, S기업, C기화기 S중공업, D산업, S라디에타, T기업, S금속A자동차B자동차C자동차D 특수가공 T 실업 H 공업 D 금속 SS 기업D 기전 SL 기업K 기공 K 정기 A 금속 C 공업S 열처리S 금속 S 차체 J 기업 C 기업하청관계의 모범사례도요타자동차 지속적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요타사의 조정력과 구심력 도요타 특유의 유전자 (DNA) 3조엔에 달하는 도요타 머니 도요타의 그룹 기업과 협력기업의 존재하청관계의 모범사례 2에릭슨 키스타 사이언스 파크:세계정상급 군사훈련장 - 사이언스파크:무선통신관련 사업본부와 연구소 한 곳으로 통합 키스타 사이언스 파크의 성공 비결 일렉트룸- IT센터:대학-연구소-기업간 협력기반 제공 -산학협동의 중심축:개별기업과 관계, 연구개발하청기업의 최악사례◈ 창원공단내 자동차 기업의 사례 ◈ 복수 하도급 자동차부품 조달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 부품의 안정적 확보와 함께, 하도급 기업간에 경쟁을 시킴으로써 원청기업의 하도급 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청기업의 최악사례 2◈ 사내하도급 저임금과 노동시간 연장 및 노동 강도의 강화 사내 하도급의 수행목적 노동의 분할통제 값싸게 자사 노동자들의 기피작업을 수행 가능 ◈ 마른수건 물짜기식 노동과정C 자동차의 하도급기업 내역 1)~4) 설명은 다음쪽1차 원청 기업 분산430 455 455선반,다이케스팅 프레스, 용접 단조, 열처리500 (380) 627 (418) 485 (315)89 80 70카부레타 라디에타 볼 조인트C기화기 S라디에타 S기업2차 원청 기업 전속400 400 400 400 350용해,조형 절삭,열처리 절삭,열처리 절삭, 가공 연마, 조립110 (86) 83 (68) 110 (75) 41 (30) 100 (92)28 29 18 10 0.5변속기 케이스 액슬샤프트,디프케이스 액슬샤프트 액슬샤프트,변속기부품 브레이크 앗세이S금속 S차체 J기업 C기업 H실업1차 원청 기업 전속500 (천) 500 456 461절삭,가공 절삭,가공 용해,조형 단조,가공2600 (1900) 1200 (880) 300 (300) 261 (174)283 210 20 30변속기,액슬,공작기계 브레이크, 프로펠러축 주조품(鑄造品) 3) 단조품(鍛造品) 4)K기공 K정기 A금속 C공업거래유형고졸 초임 2)주요공정종업원(명) 1)자본(억)생산부품업체위의 표 설명..1) ( )안은 생산직 노동자 2) 공고 졸업기준 3) 제품공정의 대부분이 주형에다 주철을 부어 생산되는 부품으로 실린더블록, 실린더헤드, 메니폴드,피스톤일,브레이크드럼, 액슬하우징 포함 4) 강제등을 열간 또는 냉간에서 가압하여 변형 가공한 부품으로 크랭크샤프트,커넥팅로드, 흡기및 배기벨브 등을 지칭{nameOfApplication=Show}
비교문학조별과제 - 《비교문학 이론의 전개》담당교수님 : 강은교 교수님학 과 : 국어국문학과양호식 (9626044)발 표 일 자 : 2003. 9. 15◁◀ 목 차 ▷▶1 . 비교문학의 개념과 범주- 비교문학의 용어, 개념(프랑스 학파, 미국학파)2. 국민문학비교문학일반문학3. 비교문학의 발달단계- 태동기, 토대적인 이론의 확립기4. 196070년대 미국의 비교문학5. 영향관계와 비교연구1) 해외교류의 의미2) 발신자 수신자전신자6. 월렉레마크피터 브룩스의 견해7. 다문화 시대의 비교문학결론1. 비교문학의 개념과 범주1) 비교문학의 용어‘비교문학’이라는 용어는 비교문학자 알프레드 O.A.올드릿지(Aldridge)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1816년 프랑스와 노엘(F.Noel)과 그의 협력자들이 「비교문학강의」(Cours de litteratuer comparee)라고 하는 책의 타이틀로 사용된 것이 최초라고 한다.‘비교문학’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비교(compare)’라는 말과 ‘문학(literature)’이라는 개별적 언어로 사용할 때에는 아무런 혼란을 주지 않지만 ‘비교문학’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문학의 비교’가 아니라 특수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기 때문에 많은 논란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비교문학은 단순히 두 개의 문학을 비교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상의 뚜렷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문학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인 것이다.르네 웰렉(Rene Wellek)은비교문학(Comparptive Literature)이라는 용어는 귀찮은 용어이며, 많은 논란이 거듭되어 왔고, 서로 다르게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 해석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방 띠겜의 ‘비교문학 La Litterature Comparee'(1931)에서 보면,이 비교(Comparee)라는 말은... 태생학이나 해부학이나 언어학에 있어서는 하등 오류가 일어날 두려움은 없다. 비교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또한 서로 떨어진 여러 그루우프에서 가져온 사실을 서로 비교하여 그 조함.- 귀아르 : “비교문학은 비교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 명명된 과학적 방법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비교문학은 ‘국제간의 문학적 관계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비교문학의 영역을 문학사에 국한하여 문학이론이나 비평의 도입을 배제하고, 역사적인 면을 보다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② 미국 학파 - 월렉 (Rene Wellek): “ 비교문학은 모든 문학작품과 문학체험의 통합의식과 함게 국제적 시야로부터 모든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다...(중략) 하나의 방법으로만 국한하지 말고 비교와 똑같은 중요성으로 기술, 특성묘사, 해석, 서술, 설명, 평가 들이 그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어떤 비교도 실질적인 역사적 관계로 제한할 수는 없다.... (생략) ”비교문학은 문학사에만 국한할 수 없다는 것으로, 문학비평을 역사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다. 비교문학의 영역을 넓혀 역사, 이론, 비평을 동시에 포괄할 것을 주장. 국민문학과 일반문학, 문학사와 문학비평을 함께 포괄하는 보다 폭넓은 문학연구로 지향해 갈 때, 비교문학은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③ 절충주의적인 입장 - 바이스슈타인, 레마크: 바이스슈타인 - “비교문학의 본질적인 과제는 문학연구의 특수분야인 비교문학의 명칭과 그 목표를 정의하는 것”레마크 - “비교문학이란 한 나라의 문학과 다른 인간의 표현영역과의 비교이다”⇒ 결론,한동안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프랑스와 미국의 비교문학은 오늘날 그들의 융합점을 찾아 접근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추구하면서 후자의 확대 개념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다 폭넓은 문학연구로 지향해 갈 대, 비교문학이 활성화 될 것이다.3) 비교문학의 범주① 문학을 초국가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범주(60년대 이전)② 예술, 사회학, 심리학과 같이 다른 분야와의 비교를 통해 접근하는 범주(60년대 이후)2. 국민문학비교문학일반문학보편적으로 비교문학이 영향관계를 중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어적 국경을 넘어 제국간의 상호 관련이 문 해 줄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번역활동, 비평활동 등을 통해 실천.범 위 : 일반문학의 범위를 시간적공간적으로 확대한 것.기 여 : 국민문학적 관심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게 민족과 민족의 유대를 강화하 고 서로를 이해하는 길로서 문학의 역할이 가능함을 제시.3. 비교문학의 발달 단계미국을 대표하는 비교문학자 알프레드 올드릿지에 의하면비교문학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에서 1816년 프랑소와 노엘(F. Noel)과 그의 협력자들이「비교문학강의(Cours de littrature comparee)」라고 하는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물론 그것이 지금과 같은 의미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자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비교문학이 정식 명칭을 지닌 19C말부터 학문으로 발전하기 이전에도 비교라는 용어 여러 가지 학문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비교문학이 발달하게 된 배경부터 오늘날의 비교문학이 있기까지를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자.1) 태동기바이스슈타인에 따르면 태동기는 13C후반부터 14C중반까지 활동한 단테를 중심으로 한다. 단테는 중세에서 18C말까지 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 분야에서 위세를 떨친 라틴어의 범람으로 인하여 소외된 이탈리아어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이탈리아어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여 중세의 문학자들에게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주었다. 따라서 태동기의 비교문학은 곧 모국어 사랑 운동과 애국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국어의 우수성, 편의성, 표현성 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연히 외국어나 공용어와 비교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비교는 곧 비교문학의 근간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처음에는 타국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비교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인접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지적 문화면에서 당시 절대적 자신을 갖고 있던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자국의 우월성과 독자성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국문학이 타국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을 보일 그 생성의 근저까지 파고 들어갔다. 또, 그 성과의 끝까지 파악하려고 하는 야심적 의도에까지 나아가려는 열의가 마침내 비교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국어와 자국문학을 외국어와 외국문학에 비교해 볼 때 우월한 점은 무엇이고 열등한 점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월한 점은 계속 발전시키고 열등한 점은 보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2) 토대적인 이론의 확립기태동기 비교문학을 가능하게 했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의 모국어 실천 운동과 애국정신에 이어 구체적으로 비교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토대적인 이론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했던 문학자들을 알아보자.메리안-제나스트에 의하면 최초의 비교문학자는 볼테르(Voltaire)인데, 그는 볼테르가 영국 체류기간 동안에 집필한「서사시론」을 비교문학의 원조로 보았다. 그는 외국문학을 안다는 것은 곧 자국문학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외국문학의 수용에 대한 비판을 감정상의 문제며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르네 웰렉은 메리안-제나스트의 의견에 몇 가지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볼테르의 후기작에는「서사시론」에서처럼 세계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것과 둘째, 볼테르가 살아있던 당대 신고전주의 관점상 총체적 상관주의는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았을거라는 점, 마지막으로 비교문학의 구체적 용례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테르를 초창기 프랑스 비교문학의 개척자로 보는 이유는 그가 프랑스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 세계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반면에 로비네가 시대 상황에 더 유효적절하다고 언급한 브왈로-데스프레오(Nicolas Boileau-Despreaux)의「시론」은 프랑스만이 거의 모든 문학장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규범화하였다. 이처럼 브왈로-데스프레오가 비교문학 초창기 프랑스문학과 영문학과의 관계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할 때, 프랑스문학과 독문학과의 관계에서⇒이론의 정립기⇒이론의 변모 및 확장기의 순으로 그 단계를 구분지을 수 있다.4. 196070년대 미국의 비교문학① 프랑스와의 비교┏프랑스의 비교문학: 영향과 사실에 집중┃ 문학의 소재, 작품의 대상에 관심을 갖는 문학관에서 형성┗미국의 비교문학: 순수비교에 관심작품이란 사실 그대로담겨진 것이 아니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그것이 변형되고 새롭게 형성되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작품의 창작과정에 관심을 갖음② 대비연구문학의 비교는 그들 상호간의 사실관계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있지 않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는 것으로 간주 → 영향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문학간의 대비 연구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어느 것이 어느나라, 어느 작가, 어느 작품에 영향을 끼쳤고 어느쪽이 영향을 받은 것인지가 문제되지 않음으로 문화적 우월주의는 자연스럽게 소멸③ 비교문학자비교문학을 대비연구로 하는 학자영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학자 : 과거의 잘못이 영향의 이론 자체보다 그 방법에 있었음을 밝힘위의 학자가 말하는 영향이란? 보편적인 유사성을 영향으로 간주할 위험성을 방어하기 위해 그들은 접촉의 증거, 즉 사실 확인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영향이라는 것을 사실의 접촉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 그대로 옮겨지는 것도 아니며, 접촉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거부하는 것, 다양하게 변형되어 받아들이는 등의 여러 가지 면모가 존재한다는 점을 영향의 이론에 포함시켰다.=>>> 영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학자들은 사실존종을 내세운 프랑스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학적 영향의 핵심을 작품의 창조과정에 두려는 의도.④ 60년대, 비교문학의 재정립헨리 레마크와 같은 학자가 주동이 되어 비교문학의 범주를 영향과 대비연구 모두를 다루는 것으로 확대일부에서는 비교문학이 문학의 비교만을 위한 학문이 아님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남->비교문학은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학문 영역이고 동시에 빙법일수도 있다고 하여 문학의 포위물이 반드시 문학만이 아니고 사회, 타 예술, 사상, 있다.
기독교의 이해한국 무교와 불교의 변천사무교란한국인의 원초적인 종교심성(宗敎心性)을 결정한 종교이다 무교의 신화 세계 : 모든 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통하는 능력을 소유 → 타락 → 능력 상실하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보존하늘 = 신령계중제자 = 무당춤추는 모습땅 = 인간계무교란불교란“부처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석가모니가 오랜 수행 끝에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되어 그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이란 뜻 외에 “부처가 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여기서 부처란 “깨달은 사람”이란 뜻으로,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로는 “부다”라고 하는 중국으로 건너가 한자로 “불타”라고 옮겨졌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로 발음된 것이다.무교와 불교의 기원무교의 기원 동북아시아의 시베리아에 있는 샤머니즘을 연원으로 통용 -한국무교 (빙의형) 천계의 신령들이 무당 몸에 실리는 것 (→농경) -시베리아 무교 (이동형) 혼이 몸을 빠져 나가 천상계로 가서 신령들과 직접만나는것(→수렵)불교의 기원 인도문화권을 넘어서 중앙 아시아의 사막지대에 전파된 불교는 동쪽의 중국에 전래되어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고유사상과 융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 불교는 동아시아 전지역 즉 한국, 일본, 발해,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무교의 변천사선사시대무교는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추정 고고학적 유물자료들이 청동제로 제작되던 시기 예) 종교적 상징으로 장식된 왕관 무당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울, 칼, 거울 등 단군신화 : 제정일치 (종교 + 정치) 예) 청동기와 농경문화삼국시대동이전 (중국측의 기록) → 고대 한민족이 세운 여러 초기국가의 종교 상황 소상하게 알려주는 첫 자료 ⊙ 내용 - 하늘을 섬기며 연일 음주가무를 기록 - 추수를 기원하거나 감사 - 농경제의적 성격을 가짐 - 형식 : [주관 : 무당, 축제 : 천제 (하늘 굿)] ⊙ 예 부여(영고), 고구려 (동맹제), 예(무천), 마한(음력 5월과 10월에 큰행사) 등고려시대팔관회, 연등회 → 국가적 종교행사 : 토속적 신앙의 면모 ⊙ 내용 - 무의 축제 전통을 이은것 - 호국적 시조제·기복제의 성격 - 군신과 백성이 음주가무 : 상류층에서 일반 서민층까지 확대 - 무당이 천신 · 용신·산신 및 하천신에게 제물을 바침조선시대조선시대 정책 ⊙ 무교에 대한 억압 정책 - 새로운 지배층이 종교를 핑계로 구시대의 세력 몰아내는 과정 - 유교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 ⊙ 무당 : 최하층 천민 계층으로 전락 ⊙ 굿과 무당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 19세기 말까지도 왕실에서 꾸준히 굿을 벌인 기록 남아 있음 함께 배척당하던 불교와의 융합에 가속도 붙음일제시대일본의 탄압 정책 ⊙ 탄압의 이유 : 한국의 사회 역사 · 종교 · 풍속 등을 조사한 결과 → 마을 단위의 굿이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 → 지역주민의 유대감 형성에 원동력 ⊙ 예 → 무조건 미신이라 강요하여 신령을 섬기지 못하게 함 → 군화발로 제상을 짓밟음 → 무당들을 쫒아 내거나 구속현대시대조국근대화 시기 (새마을운동) → 근대화 서구화라는 국가경영이념 ⊙ 당집이 폭파 ⊙ 무당등록증 소지자만 궂 가능 1960년대 → 굿을 전통문화로 인식하는 중요한 시기 예) 민속예술경연대회, 무형문화재 제도 1980년대 → 굿과 무당의 세계가 위축 · 변질 ⊙ 학습이 덜된 선무당이 많아짐 ⊙ 대개의 굿의 절차 생략 간소불교의 변천사삼국시대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 고구려의 소수림왕 때인 372년 자연신을 섬기는 고유신앙이 불교화 →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 화엄· 법화·열반등의 경전 성함 많은 학승과 많은 활동 → 삼론을 비롯한 여러 교학의 학자 → 중국으로 가서 구법활동과 중국학자를 가르침삼국시대 : 고구려소수림왕 2년 (372년) : 불교 들어옴 →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로 하여금 불상 불경을 전하게 한데서 비롯 광개토왕 즉위 2년 (392년) →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 담징 → 불교와 오경, 색칠하는법 그리고 종이와 붓을 만드는 법을 전함삼국시대 : 백제인도의 승려 마라난타 : 백제에 불교 전파 → 고구려 보다 12년 뒤인 384년 → 남한산에 절을 지음 → 10명의 승려를 배출 392년 왕이 직접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 독자적인 율전 마련삼국시대 : 신라눌지왕때 →고구려를 거쳐온 묵호자에 의해 지방에 불교 전파 법흥왕때 →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 수용실패 → 527년 이차돈의 순교 계기 : 불교공인 선포통일 신라 시대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 + 고유신앙 → 민중속으로 깊게 파고 듬 30대 문무왕 ~ 36대 혜공왕 →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전성기 성덕왕 → 봉덕사 건립 → 인왕도량(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기원)을 베품 원효 : 일심, 화쟁, 무애사상을 제창 혜통 : 당에서 귀국 후 밀교를 전파 의상 : 부석사 창건, 화엄 전파(해동화엄의 초조) 김대성 :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고려 시대 #1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 도모 조계종의 원류 형성, 천태종 성립 선종 + 교종 함께 발전 (선교양종 체제)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히 개최 불교의식 성행 대장경 판각 → 외적의 침입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불교 교단의 확대화 많은 사찰과 불상, 탑을 건립 → 풍수지리설, 도참설 의거고려 시대 #2태조 왕건 → 불교를 건국이념과 국가 신앙으로 정착 목적 : 민심 수습, 왕권강화 → 팔관회를 개최 – 연례행사로 규정 →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10개의 사찰 창건 → 유언으로 훈요십조를 내림 (그 중 3조가 불교에 관련 되어 있음) 대각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불교의 확대와 전파 고종 → 거란과 몽고의 잦은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교가 성행조선 시대태종 : 배불정책 단행 → 궁중의 불사폐지 → 전국에 242개의 사찰외 모두 폐지 세종 : 7종을 통폐합 → 선교 양종 세조 : 간경도감 설치 →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 성종 연산군 중종 시대 : 불교의 재 수난시대 문정왕후 이후 → 불교 탄압의 가속화로 은둔하여 명맥만 겨우 유지근대시대일본의 침략 → 일본이 국내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화에 노력 : 포교당과 사찰 건립 정부의 불교 배척 완화 → 승려들의 도성출입 금지 해제 → 전국 사찰 통합 움직임 * 원흥사 창립 : 조선불교의 총종무소 * 전국 13도에 하나씩 중심사찰 두어 업무 총괄 1945년 8월 해방 → 조선불교 조계종이 한국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 → 초대교정에 박한영 중앙총무원장에 김법린을 추대{nameOfApplication=Show}
우리나라 종교의 특징은 다원화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기독교, 불교, 무속종교, 유교, 등이 갖고 있는 언어와 제의 및 공동체적 삶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종교적 가치는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종교를 고백하든지 혹은 무신앙을 고백하더라도 우리는 한국문화라는 총체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무교와 불교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레포터의 관점인 무교와 불교의 변천사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 보기로 하겠다.■ 무교와 불교의 정의- 무교란 한국인의 原初적인 宗敎心性을 결정한 종교이다· 무교의 신화 세계 : 모든 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통하는 능력을 소유 → 타락 → 능력 상실하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보존· 무(巫)의 한자풀이 : ─ (하늘=신령계) + _ (땅=인간계) + | (중재자=무당) + 人人 (춤추는 모습)⇒ 신령 → 무당(사제) → 단골(신도)- 불교란 부처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석가모니가 오랜 수행 끝에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되어 그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그리고 부처의 가르침 이란 뜻 외에 부처가 되기 위한 가르침 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여기서 부처란 깨달은 사람 이란 뜻으로,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로는 부다 라고 하는데 중국으로 건너가 한 자로 불타 라고 옮겨졌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로 발음된 것이다.■ 한국의 무교와 불교의 기원- 무교의 기원 : 동북아시아의 시베리아에 있는 샤머니즘을 연원으로 통용·한국 무교 : 빙의형 - 천계의 신령들이 무당의 몸에 실리는 것 (→농경)- 불교의 기원·인도문화권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전파된 불교는 또다시 동쪽의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고유사상과 융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불교는 동아시아 전지역 즉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가 정치와 통합되어 있던 제정일치의 사회였다.중국측의 기록인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은 고대 한민족이 세운 여러 초기국가의 종교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첫 사료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여·고구려·예 등지에 각각 영고·동맹·무천이라는 종교적 축제가 있었다. 또 마한에도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음력 5월과 10월에 큰 축제가 있었으며, 종교적 구역인 소도(蘇塗)의 존재에 대하여도 언급해놓았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하늘을 섬기며 연일 음주가무하는 이들을 눈여겨보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들 행사는 대개 추수를 기원하거나 감사하는 농경제의적 성격을 가졌으리라 보이며 그 이후 한국인의 종교제의의 원형이 된다.많은 학자들은 이 축제가 천제(天祭, 하늘굿)이고 이를 주관한 것은 다름 아닌 무당이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마을굿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종교적 전통은 삼국시대 초기 이미 제정일치에서 정교분리가 이루어지고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유교·불교·도교 등의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신앙전통과 불교와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양과 같은 대규모 탄압 및 순교나 전쟁 등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인도식 샤머니즘이라 할 정 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데에다 우리 조상들 역시 워낙에 다신교전통이었기에 자연스런 융합이 가능하였다.삼국 말기에는 도교가 전래되었는데 이 역시 중국식 샤머니즘에 다름 아니다. 도교는 한국의 전통 종교였던 샤머니즘에 쉽게 포용된 바 오늘날 무(巫)에 옥황상제가 등장하고 불교사찰에 칠성각이 있는 것이 그 흔적이다. 최치원의 에 "우리에게 현묘한 도가 있으니 유 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교는 국가경영이론인 유학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종교로서의 중국식 조상숭배를 말한다. 워낙에 종교전통 자체가 유불선 삼교의 면모가 있었다고 하니 융합에 무리가 없음은 당연하였으리라-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고려로 넘어오면 팔관회와 연등회가 국가적 종교행기부터 굿을 단속하는 법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고, 무당을 한양에서 쫓아냈으며 급기야 무당은 노비·승려·백정 등과 함께 사회 최하층인 8 천(賤)의 하나로 규정되는 등 박해가 연이었다. 고려의 국가적 제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낭비로만 본 까닭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유교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지배층이 종교를 핑계로 구시대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목표 가 정말로 무당 천대에 있던 것이 아니어서 왕실에서도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굿을 벌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천민으로 떨어진 무당에 대한 사회적 천시는 매우 심각했고, 이에 함께 배척당 하던 불교와의 융합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무학대사·삼불제석 등이 주요한 신 령으로 모셔지고 불교 역시 무(巫)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에서 현대까지일제시대로 오면서부터는 정말로 탄압이 벌어진다. 일본은 조선 침략기에 많은 학자들을 동원, 한 국의 사회·역사·종교·풍속 등을 정밀히 조사한다. 그리고는 마을 단위의 굿이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로 고래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며 지역주민의 유대감 형성에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심 한 박해를 가하였다. 군화발로 제상(祭床)을 짓밟고 무당들을 쫓아내고 구속하는 등 엄청난 핍박이 벌어졌다. 굿을 무조건 미신이라 강요하여 신령을 섬기지 못하게 했다. 또 나날이 교세가 늘어나던 이질적인 새로운 종교, 기독교와의 갈등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무(巫)와 함께 탄압받 던 기독교 역시 굿을 마귀사탄을 섬기는 미신으로 몰아붙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날 굿판에서 무당이 사람들에게 돈을 추렴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런 행위도 굿이 끝나기 전에 비용을 확 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무당들에 의하면 당시보다 더 심했던 때가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조국근대화 시기였다. 당집이 폭파되고 무당등록증이 없으면 굿도 할 수 없었다. 근대화·서구화라는 국가경영이념 바쁜 세상살이 등의 문제로 인해 대개의 굿은 절차가 생략 되어 간소하게 치러지고 있으며, 질병상황의 개선으로 마마배송굿이 사라지는 등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무(巫) 안에는 자연과 인간의 포용, 타종교와의 자연스런 융합, 집단과 집단의 조화, 인생과 우주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 그러나 서양식 합리주의에 바탕한 세계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무(巫)의 정신은 그만 미신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말았다. 최근 서구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거부하던 편협한 안목을 버리고 차츰 인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그와 관련된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진행되면서 굿과 무당에 대한 이해가 예전보다는 제법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바른 평가를 받기에는 요원한 실정이다.■ 불교의 변천사- 삼국(三國)시대의 불교불교의 등장 → 고대 삼국은 주로 자연신을 섬기는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하늘과 해님을 대상으로 했던 천신이나 명천(明天)을 환인(桓因) 또는 천제(天帝)라는 불교적 인격신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창공이나 영성(靈星) 등의 숭배가 인간 수명와 화복을 주재한다는 북두 칠성신앙으로 되고, 하천이나 해수 및 농경에 관계된 모든 신의 숭배는 용왕신 신앙으로, 산악 숭배는 산왕신 신앙으로, 가옥신은 조왕신앙 등으로 정착 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연신적 신앙이 불교화되고 모든 신과 이에 대한 신앙이 불교신앙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된 것이다.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국의 많은 학승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활동을 하였고, 또 그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혹은 중국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삼국시대에는 삼론(三論)을 비롯한 여러 교학의 학자가 많았으며 화엄, 법화, 열반 등의 경전도 성하였다. 특히 백제에서는 독자적인 율전(律典)을 마련하였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그 후 392년에 왕은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였다.·신라의 불교 : 눌지왕 때 고구려를 거쳐온 묵호자(墨胡子)에 의해 지방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 후 법흥왕은 불 교를 수용하려고 하였으나 고유신앙을 받들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불교로서 강 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던 법흥왕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배척하던 귀족들 의 세력을 누르고 불교공인은 선포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이때까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고유신앙과 결합하면서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이며, 그 이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그리고 무애(無碍)사상을 제창하였고, 665년에 당에서 귀국한 혜통(惠通)은 밀교를 전하였으며, 671년에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널리 전파하여 해동화엄의 초조가 되었다. 성덕왕 때에는 봉덕사를 건립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인왕도량(仁王道場)을 베풀었고, 또 751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 하였다.- 고려시대의 불교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의 불교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성격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말에 전래되고 수용된 선은 고려에 와서 독자적인 전재를 하여 구산선문으로 완성되었고, 현재 조계종의 원류가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그리고 신라에 없었던 천태종이 성립되었고, 선종과 함께 교종도 발전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태조의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 되어 불교의식이 가장 성행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율을 어기는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시켰고, 불교교단의 확대와 함께 지나친 사찰의 건립은 많은 피해를 초래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