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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동양)의 기독교 수용 평가A좋아요
    한국(동양)의 기독교 수용1. 서론평균적으로 한 아파트 단지마다 적어도 두 개씩 들어선 교회와 성당들 덕분에 이제 우리에게 기독교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의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포교활동 때문인지 불교도들의 활동보다 기독교도들의 활동이 더 활발하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기독교는 불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에 속하며, 수많은 종파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 퍼져 있다.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 전래와 수용의 시기에서부터 많은 갈등과 고난이 있었으며, 현재에 이르러 정착하게 된 기독교의 개념과 신앙형태, 철학적인 사상들도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 출발하여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과 자세, 동양사상과의 갈등, 한국 기독교의 향후 향방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2. 본론(1) 한국 그리스도교의 수용1 전래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改新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서양 학문이란 뜻)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光)이 베이징[北京]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이 무렵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가톨릭 선교활동의 첫 열매이었다. 가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었다.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朝廷)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곧 순교하였고, 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에 의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3자유와 발전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H.G.언더우드 목사와 H.D.아펜젤러 목사가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라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정치에 의해 정부는 약체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우리 서민층에게 개혁의 에너지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 때는 우리 국민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지대 서학서들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와 서구사상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다. 이익, 안정복, 신후담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주자학적 입장에 서서 천주교와 서구사상을 전면적으로 배격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천주교와 서구사상에 대한 이들의 반대 논리를 살필 수 있는 동시에 또한 그 당시 소개된 서양철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벽, 정약종, 정하상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천주교를 신앙하였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앞서의 인물들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던 천주교와 서구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서학서들을 중심으로 소개된 서양철학은 한마디로 중세 스콜라철학에 기반을 둔 천주교사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성과 신앙, 자연과 은총, 그리고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새롭게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을 둔 스콜라철학은 플라톤-플로티노스-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교부신학에 비해 보다 철학적인 내용들을 많이 구비하고 있었다.천주교 서적의 수입이 금지되자 조선의 기독교는 학술적인 입장보다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수용되고 전개되었다. 따라서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된 19세기 후반까지에는 천주교를 통한 서양철학의 수용은 중단되었다. 그 사이 유학자들의 기독교 비판이나 천주교의 변증은 그 이전 시기의 내용들과 거의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천주교는 조선인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신학교의 교과목에 중세 스콜라철학을 다루는 철학과목들이 개설되어 서양철학 수용에 일익을 담당하였다.전체적으로 천주교는 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학서를 통해서 서양철학 수용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예수회의 활동이 중국에서 금지되고 이어 천주교의 조선 선교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가 신앙 위주의 얀세니즘적 입장을 견지하여 서양철학의 통로로서의 구실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나 또는 초기의 조선인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서양철학이 다른 경로들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의한 서양철학의 소개는 그 의미가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 당시의 개신교가 서양철학의 수용에 기여하였다면, 그것은 기독교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서양의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끝으로 우리는 기독교의 전래를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서양의 중세철학이 수용되었고,이와 함께 서구의 기독교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리이스철학이 쉽게 소개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천주교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흐름을,그리고 개신교는 플라톤-플로티노스-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흐름을 각각 소개하고 수용시키는 구실을 담당하였다는 차이도 지적할 수 있다.동양적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전파한 천주실의(天主實義)제목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총 500여 종에 이르는 서양 학술서적을 다투어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1593~96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1603년에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거듭 출판되었다.가톨릭 철학과 스콜라 사상의 입장에 선 서사(西士)와,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의 사상을 갖춘 중사(中士)가 토론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동양사회에 대한 천주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으며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1편은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2편은 불교 ·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천주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3편은 천국(천주교 전파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점에 있다. 중국에서는 건륭제(乾隆帝)가 이 책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하게 할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며, 일본에도 처음 발간된 이듬해에 전파되었다.한편 유 ·불 ·도교의 입장에서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종진지(鍾振之)의 《천학초징(天學初徵)》 《천학재징(天學再徵)》 등의 반론과 그것을 모은 《벽사집(闢邪集)》이 나왔다. 또한 천주교 내부에서도 유교에 영합한 오류라는 비판이 일어났다.조선에서도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지봉유설》에 그 편목이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사신 일행을 통해 바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등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반대중을 위한 번역본도 많이 필사되었다. 반면에 이익(李瀷)의 이래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西學辨)》,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 홍정하(洪正河)의 《실의증의(實義證疑)》 등을 통해 많은 비판과 배격을 받았다.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서양인이 한자로 저술한 서적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3) 한말 기독교의 수용에 관련된 사건들1을묘박해 [乙卯迫害]1795년(정조 19)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1791년부터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해 온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는 1794년 말 주문모 신부 영입에 성공하였다. 그는 최인길(崔仁吉)의 집(서울 北村:지금의 계동)에 머물면서 1795년 부활절 미사를 처음으로 집전하였다. 그해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포졸들이 체포하러 오자 역관(譯官) 집안의 최인길은 중국말로 자신이 주문모라고 속여 대신 잡혀갔으며, 이 시간을 이용하여 주신부는 여신도 강완숙(姜完淑)의 집으로 피신, 그 후 6년간 새남터에서 참수될 때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나중에 가짜로 들통이 난 최인길은 주문모의 거처를 대
    사회과학| 2001.10.18| 6페이지| 1,000원| 조회(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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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 음악의 흐름에서 본 실용주의
    고전음악의 흐름에서 본 실용음악의 이해1. 실용음악(Gebrauchsmusik)이란?20세기 힌데미트에 의해 시작된 실용음악은 신고전주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이것은 주로 아마츄어 연주가를 위해 또는 특별한 의식이나 비공식적인 집회를 위해 작곡되는 음악이다. 이것은 작곡가, 연주가, 청중 사이에 가로놓인 공간을 좁히기 위해 기술적인 어려움을 피하게 되는데, 비록 그것이 현대적인 어법이라 하더라도 최초의 전위적인 음악보다 극단적인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일상적인 상황에 적합하게 작곡되어지며 아이들의 놀이, 청년 그룹, 밴드, 라디오 극본, 그밖에 실제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그가 작곡한 '실용음악'은 전후 독일 문화를 풍미하고 있던 현실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음악은 결코 널리 보급된 운동은 아니며 오래 전부터 다른 경향에 흡수된 종족적 경향이다.2. 대표적 작곡가힌데미트 (Paul Hindemith)1895. 11. 16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근처 하나우~1963. 12. 28 프랑크푸르트암마인.20세기 전반 독일의 작곡가·음악이론가.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하나우(Hanaue)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일찍이 연주자로서 재능을 보였다. 프랑크프루트 콘서바토리에서 바이올린과 작곡(A. Mendelssohn, B.Sekles에게 사사)을 전공하였고, 프랑크프루트 오페라 관현악단의 악장, 아마르 현악4중주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두한 후 20년대에는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음악의 선구적 인물로 명성을 얻었으나, 점차 신고전주의적 경향으로 양식을 전환하였고, 특히 실용음악에 많은 관심을 갖았다. 그는 작곡가를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키려고 작곡하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요구에 맞춰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장인(匠人)으로 생각했다. 나찌 정권이 들어선 후 터어키로 망명하여, 그곳에 음악학교를 세워 터어키 음악교육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미국을 거쳐 스위스에서 계속적으로 작곡활동 뿐만 아니라, 이론적 저서를 발표하고, 또한다. 힌데미트는 평생 작곡가, 연주자(바이올린, 비올라 등), 지휘자, 이론가, 교육가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전개했고, 그의 활동만큼이나 다양한 음악양식에 의한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급격한 현대적 어법과 조성에 바탕을 둔 전통적 양식을 모두 사용한 작곡가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서양음악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체계였으나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서양음악의 조성체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애썼으며, 일상적인 상황에 적합한 실용음악(Gebrauchsmusik) 작곡에 앞장섰다.20년대 초 발표된 힌데미트의 작품들은 전통적 양식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조성적 작품보다는 표현주의적 무조음악 경향이 뚜렷하고, 낭만적 서정성과 감상성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전통적 미학관을 거부하는 반(反)낭만적 경향을 보인 이 시기의 음악을 통해 힌데미트는 독일 아방가르드의 선두 주자로서 명성을 얻었다:「현악사중주」 op.22(1921),「실내음악 1번」(Kammermusik, 1922), 3개의 단막 오페라(1919, 1920, 1921),「피아노 모음곡」 op.26(1922).힌데미트의 반(反)낭만적 경향은 낭만이전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고, 특히 바로크 음악관과 음악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힌데미트는 전통적 요소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개성 있게 변화시킴으로써,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키는 양식을 성립하게 된다. 그는 음악의 선적(수평적) 흐름을 중시한 대위법을 사용하므로써 기능 화성법칙을 무시하고, 논리적 음악구조, 감정의 극대화, 테마-모티브 발전기법 대신에, 단순하고 간결한 음악 재료와 형식, 곡을 통일적으로 발전시키는 리듬을 강조했다:「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11, Nr.3(1921),「실내음악 2번, 5번」(1924.1927),「현악4중주」op.32(1923) 등.다른 한편 힌데미트는 음악애호가들이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실용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는 평생 음악활동을 하는 아마추어 그룹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청중을 수용하는 대상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현악오케스트라, 플루트, 오보에를 위한 유희음악」op.43, 「관현악 협주를 위한 교육용 음악」(Schulwerk) op.22, 「애호가를 위한 유희음악」op.45 등.30년대 이후 힌데미트는 전통적 양식으로 복귀하며, 조성이 강조된 "구조적 대위법" 양식에 의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 발표된 『작곡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에서 힌데미트는 음악의 자연법칙과 조성을 강조한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하고, 이 이론에 따른 16곡의 소나타(1935-39)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조성에 근거한 폴리포니 양식에 의한 전통적 형식의 곡을 쓰면서, , 을 강조한다. 즉 힌데미트는 "음악은 그것을 노래하고 연주하고 듣고자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적 작품: 「음의 유희」(Ludus Tonalis, 1942),「마리아의 생애」 수정판(1934-35), 오페라「캐딜락」 수정판(1952),「조화의 세계」(Harmonie der Welt, 1951),「피츠버그 심포니」 (Pittsburg Symphonie, 1958), 「미사」(1963).그의 초기 음악 세계는 낭만주의를 부정하고 관습을 타파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유머, 풍부한 음감, 창의성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일련의 실내악들은 소규모의 비관습적인 악기군을 위한 것으로 매우 뛰어나며, 그밖의 작품으로는 오페라 〈우주의 조화 Die Harmonie der Welt〉(1957), 〈크리스마스의 긴 만찬 The Long Christmas Dinner〉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협주곡(1939), 첼로 협주곡(1940), 〈베버의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c Metamorphoses on a Theme by Weber〉, 〈신포니아 세레나 Sinfonia Serena〉 등이 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 악파를 반대했던 힌데미트는 전통적인 조성의 확대에 바탕을 둔 화성 체계의 원리를 형성했다. 〈sung im Tonsatz〉(1937~39), 〈작곡 기법 The Craft of Musical Composition〉(1941, 개정 1945)은 그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3. 그의 작품들▶ 교향곡《화가 마티스》작품의 배경파울 한데미트의 교향곡 는 독일 국가 사회주의(나찌) 정권에 대한 저항을 이 시기 어떤 작품보다도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찌 정권이 작곡가에게 가한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탄압의 주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1933년 초만 해도 힌데미트는 선거로 갓 출범한 소수파 국가사회주의당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믿었고, 이 해 4월 자기 작품 몇 편이 "문화적 볼셰비즘"이라는 이유로 연주금지 당했을 때도 크게 염려하지 않으면서 그저 모멸과 적대감 정도만 느낄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주의를 향해 자기의 위치를 선언한 필요를 느껴 쓴 것이, 자전적 작품이랄 수 있는 오페라 이다. 여기서 한데미트는 이젠하임 교회 제단을 만든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475∼1528경)를, 사회적 책임을 느껴 그림을 집어치우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지만 이들에게 쓰라린 실망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예술가로 그리고 있다. 깊은 절망 속에서 화가는 자기가 가장 고귀한 일, "의무"로서 회복되지만, 화가는 자기가 체험한 아픔과 슬픔과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고, 이런 느낌은 그의 예술에 도덕적 힘을 더해준다. 화가는 자기의 진짜 재능을 배반하는 예술가는 자기 양심을 억누르고 "행동주의"의 이름으로 아무리 애쓸지라도 사회에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힌데미트도 자신의 삶 속에서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에 틀림없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정치적 탄압에 굴하지 않고 항거하는 태도를 갖게 해주었다.아직 오페라의 시나리오에 매달려 있던 1933년 중반, 힌데미트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로부터 신작 관현악곡을 의뢰받는다. 힌데미트를 지지한다는 뜻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힌데미트는 당장에 오페라 나머지 부분의 전주곡이 될 기악작품을 쓰기로 하고, 이 전주곡을 음곡을 만들었다. 1933년 11월, 이 가운데 두 악장을 완성해 이젠하임 제단의 그림 제목을 따라 "천사의 합창"과 "무덤에 묻힘"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영감이 소진되고 말았다. 거의 작품을 중단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오페라 본편에 걸려 있던 극작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1934년 2월 모음곡의 세 번째 악장 "성 안토니오의 시험"(역시 이젠하임 제단의 그림 이름)까지 완성, 작품을 푸르트벵글러에게 보냈다.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맡은 1934년 3월 12일의 초연은 성공이었다. 동시에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정권에 대한 저항의 과시였고, 정권은 힌데미트에 대한 유례없는 탄압과 공세로 되갚았다. 1934년 12월 6일, 괴벨스가 베를린 대운동장 연설에서 힌데미트를 "사기꾼", "무조 소음을 만드는 자'로 지칭함으로써 탄압은 극에 달했다. 이로써 독일에서 힌데미트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그는 아프디 아픈 국내 유배의 길에 오른다.작품 해설 △교향곡 는 힌데미트 중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결정적으로 새로운 구조적 아이디어를 도입함으로써 교향곡 장르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첫 악장 "천사의 합창"은 옛 독일민요 에 터잡은, 잘 계산되고 장엄한 서주로 시작한다. 세 개의 뚜렷이 대비되는 주제를 쓴 도입부가 뒤따르며, 이어 발전부는 앞 두 주제를 민요와 결합하고, 제3주제만으로 된 재현부를 거쳐 단호한 코다로 끝난다. 단악장 소나타형식의 전통적 도막구분을 유지하면서 주제 내용을 철저하게 바꿈으로써 형식의 확대와 집중을 가져온 것이다. 화성 및 조성관계의 처리는 자못 프로그램적이다. 첫 악장은 사장조, 민요 "세천사…"는 내림라장조, 사(G)음과 내림라음 사이의 거리는 세온음(tritone), 조성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먼 음정이다. 한편 마지막 악장은 용의주도하게 내림라장조를 향해 움직여 이 조로 끝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는 코랄풍 "할렐루야"를 내보낸다. 이로써 음악은 처음에는 너무나 멀어 보이던 목표를 향해 내적 발전을 거듭하면서이다.
    예체능| 2001.10.18| 5페이지| 1,000원| 조회(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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