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戌改革運動1. 머리말청말 열강의 중국침략은 청일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격화로 촉발된 위기의식과 그것에 의해 지식인들은 변법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대해 가고 있었다. 또한 광서제도 정치 변혁에 대한 필요성을 절박히 느끼고 있었다. 변법운동의 중심인물인 康有爲가 이러한 광서제를 포섭하여 위로부터 정치변혁을 시도하였다. 즉 강유위를 중심으로 추진된 변법운동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격화에 직면한 가운데, 亡國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중국 근대 개혁 운동의 중요한 무술변법은 종래의 전통적 사상을 뛰어넘어 입헌 군주제, 민권 등을 주장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현시키려 하였다. 무술변법의 구심점이었던 강유위의 변법이론에 대해 알아보고, 변법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2. 강유위의 변법이론강유위(1858∼1927), 자는 광하(廣廈), 호는 장소(長素), 광동남해 사람으로 관료 지주 가문 출신이다. 그는 금문 경학(今文經學)을 존숭하여 경세 치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민생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청조의 부패에 대하여 큰 불만을 가졌으며 봉건적 전통 문화에 대해 나날이 실망감을 느꼈다. 1879년 그는 홍콩으로 가서 서방 자본주의와 접촉하여 서양의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해국도지』, 『명환지략』등을 읽고 지도를 구매하였으며, 조금씩 서학에 기초를 마련하였다.수년간의 모색을 거친 후 강유위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가 진보적인 것이며 서방 부르조아 계급이란 것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서방의 부르조아 계급 국가 방식을 모방하여 중국의 국가제도와 사회제도를 개변시키려 하였다.청불전쟁 후 강유위는 변법을 통한 국가의 위망을 구하려고 하였다. 1888년 그는 북경의 향시에 참가한 기회를 이용하여 〈상청제제일서(上淸帝第一書)〉를 올려 변법 유신을 요청하였다. 이 상서에서는 현재 중국의 형세가 외적의 핍박과 국내 반란으로 인해 지탱해 낼 수 없음을 주장하고 법을 바꾸어 변법을 강조의한 것으로 변법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비록 이 상서는 광서제의 손에까지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사회에 유포되어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강유위는 어느 정도의 성망을 얻었다.1891년 강유위는 광주에서 萬木草堂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모아 강의를 하여 양계초, 진천추, 하맹화 등 몇몇 유신 지사를 배양하였으며 후에 이들은 유신 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의 두 저작을 저술하여 변법 유신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1891년 『신학위경고』가 간행되었는데, 내용은 봉건 전통 사상에 대한 도전과 , 수구세력에 타격을 주어 봉건 전제 통치의 이론 기초를 상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 수구파의 두려움과 질시를 야기시켜 이 책은 즉각 인쇄와 유포가 금지되었다.1892년 강유위는 진천추와 양계초의 도움을 받아 『공자개제고』를 찬술하여 1898년 상해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강유위는 공자를 교주로 받들어 변법 유신을 미화하고 공교(孔敎)의 이름으로 변법 유신을 주장하였다. 『공자개제고』는 전통적인 유학의 고유한 양태에 정면 도전함으로써, 다방면으로부터 격심한 비난을 받았다.강유위의 변법론은 거시적으로는 서양문명의 수용을 중요한 내용으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것에 대결한다는 측면을 강하게 유지해 갔던 것이다. 청말의 개명한 지식인이 공유하고 있던, 서양문명에 대한 수용과 거부라는 상극의 과정, 그것이 유달리 강열한 형태로 나타나는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조직과 계몽활동유신파는 청조 상층 관료와 지지를 적극적으로 얻기 위해 사대부와 지식인이 변법 운동에지지 참가하게 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북경, 상해, 호남, 광동, 천진 등지에 잡지를 창간하고 학회를 조직하며 학당을 열어 변법의 여론을 조성하고 유신 변법 운동을 고조시키고자 하였다.1895년 강유위는 북경에서 《중외 기문(中外紀聞)》을 창간하여 양계초에게 편집을 맡겨 서학을 선전하고 변법을 고취하였다. 그 후 강유위, 양계초의 뜻에. 강학회는 10일에 한 번 집회를 가지고 중국의 자강의 학 을 선전 강학하였다. 강학회의 성립은 많은 애국 관리와 지식인의 단결에 영향을 주었다. 유신 세력이 점차 증대하자 소수의 반동적 군벌 관료도 기회를 이용하고자 강학회에 들어왔다.강학회가 성립된 지 얼마되지 않아 서태후를 수반으로 한 완고파 관료들은 유언 비어를 날조해 파괴 공작을 하였다. 그 때문에 강유위는 10월 북경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 후에 상해에서 강학회의 분회를 조직하고 1896년 1월 《강학보》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곧 광서제를 강요하여 북경의 강학회와 《중외기문》을 폐쇄하도록 했다.북경에서 옹동화의 활동에 의해 강학회의 자리에 관서국(官書局)을 설립하고 매월 외국의 신서를 번역하여 책을 발간하였다. 또 유신파는 각지에서 강학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유신파는 각지에서 잡지를 창간하여 잡지와 학회가 서로 호응하였다. 상해의 《시무보》의 영향이 가장 컸는데, 황준헌, 왕강년의 제의로 강학회의 남은 자금으로 창간한 것으로써 변법으로 강성함을 도모함 을 목표로 내건 순간 잡지였고 양계초가 주편이었다. 천진의 《국문보(國文報)》역시 유신 사상을 선전한 유력한 잡지였다. 이것은 엄복, 하증우 등이 1879년 10월에 창간한 것으로 처음에는 순보였으나 나중에는 일간지가 되었다. 이외에 중요한 잡지가 30여중 있었으며, 이러한 잡지는 유신파의 중요한 선전 매체가 되었고, 그들의 변법 유신 운동을 신속히 발전시켰다.이외에 유신파는 학당을 적극적으로 설립하여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 중에서도 호남의 시무 학당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 학당은 양계초가 총교습이 되고 담사동, 당재상이 교습을 분담하여 경(經), 자(子), 서학(西學) 등의 과정을 설립하고 민권 학설과 변법 이론을 선전하였다.4. 무술 변법 및 의의(1)황제에의 접근1897년 11월 독일이 교주만을 강점하여 강유위는 광동에서 북경으로 가서 12월 〈황제에게 올리는 다섯 번째 상소〉를 썼다. 그는 국제 정세와 중국의 상황을 분석하여,광서제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재빨리 광범하게 전파되어 강열한 반응을 일으켰다. 도찰원 고섭증은 강유위를 추종하여 광서제를 소견케 하는 상주를 올리는 중임을 맡았다.1898년 1월 24일 강유위는 총리 아문의 서화청(西花廳)으로 불려가 이홍장, 옹동화, 영록, 요수항, 손음환의 5대신과 대화 를 하였다. 강유위는 자신의 변법을 주장하여 옹동화의 칭찬을 받았다. 옹동화는 광서제에게 강유위를 과장하여 천거하였고, 광서제는 강유위의 상서를 도착하는대로 올리라고 하였으며,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와 《러시아 피터 대제 변정기》등의 책을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유위는 〈응소통주전국절〉을 올려 광서제에게 일본을 본받아 전면적으로 유신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시급한 세 가지로 1. 신하들에게 국시를 서약케 하는 것으로 광서제가 군중을 모아 변법 유신을 선포할 것 2. 대소(待召)를 설치하여 천하의 모든 상서를 허용할 것 3. 광서제가 내정에 제도국을 설치하여 각종의 새로운 장정을 만들고 그 밑에 법률, 탁지, 학교 및 농공상, 철로, 우정, 광무, 해군의 12국을 설치할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강유위가 최초로 황제의 명을 받고 변법 유신을 위한 구체적 조치를 제출할 것으로 변법 유신의 정치 강령이기도 하였다.(2)보국회(保國會)강유위의 상서가 광서제의 칭찬을 받자 유신파는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각 성의 재북경 인사들과 연락하여 지역성을 띤 학회를 조직하였다. 1898년 강유위는 북경에서 월학회( 學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 임욱은 민학회( 學會)를 주지하였고, 양심수, 송백로, 이악서 등은 관학회(關學會)를 조직하였으며 양예는 촉학회를 조직하였다. 계속해서 보전(保 ), 보천(保川), 보절회(保浙會)등이 나타났다. 이러한 지역성을 띈 애국 조직의 출현은 유신운동이 고조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어사 이성탁이 강유위와 공동 제창하여 각 성에서 회시에 참가한 거인들을 조직하여 4월 12일 보국회 를 성립시켰다. 보국회는 구국자강을 호소하여 중하층 관리와 애국 지식신(百日維新)5월 29일 혁흔이 죽은 후, 광서제는 유신 운동을 이용하여 변법 자강하기로 결심하고 신정을 추진하였다. 6월 11일 그는 명정 국시(明定國是) 의 조서를 반포하여 수구파를 질책하고 변법의 결심을 표시하였다. 이날로부터 9월21일 서태후가 반동 정변을 일으켜 중지될 때까지가 103일을 역사상 백일 유신 이라고 일컫는다.광서제는 강유위 등의 건의에 근거하여 백일 유신 기간에 일련의 개혁 조서를 반포했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경제면: 농공상국을 설립하여 서양식의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민간인의 실업 활동을 장려하며 상회의 조직을 허락하고 농공상업의 발전을 보호한다. 철로 광무 총국을 설립하여 철로를 부설하며 광산을 연다. 새로운 저서나 신법을 만들거나 새로운 기계를 제작하여 생산 발전에 기여한 경우 장려권 혹은 전리권을 주며 이금을 정리하고 국가의 예산과 결산등을 편제한다.정치면: 변법을 國是로 한다. 官民의 건의 및 상서의 자유, 불필요한 관청의 인원의 정리, 유능한 인재의 추천 등용군사면: 구식군대 삭감과 洋式 훈련실시, 지방에는 보갑제와 단련을 실시한다 등문화면: 과거제도 개혁(八股文의 폐지하고 策論 부과), 근대적 학교제도의 확립(대학당, 전문학당, 중학당, 소학당) , 외국서적의 번역 장려, 해외(특히 일본)에 유학생 파견이같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무술변법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통해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황제에 대한 강유위의 제안 가운데는 이외에도 입헌군주제의 태용, 이금제 철폐, 변발폐지 등 대담한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다.(4)무술정변(戊戌政變)신정이 공전되는 가운데 변법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인 강유위에 대한 보수파들로부터의 비판은 더 격심해졌다. 수구파는 중앙과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가만히 광서제를 눈앞에 방임해두려 하지 않았다. 변법이 개시되자마자 서태후는 곧 영록 등에게 명령하여 정변을 준비토록 하였다. 동시에 서태후는 친신을 곳곳에 파견하여 북경성 내외와 다.
일제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1. 서론조선은 1876년 개항을 단행한 이후 전근대적 단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근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같은 이행현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역사학분야에서도 전근대적인 수사방법(修史方法)과 역사인식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판단이 점차 강화되어갔다.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봉건적·성리학적 역사서술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들이 진행되고 그 결과 많은 역사서들이 편찬·간행되었다. 실학자들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취하며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새로운 역사인식도 제시되었다.그러나 개항기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침략의 이념적 무기로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의 틀을 개발해냈다. 그들이 조선의 역사해석에 적용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은 한국사학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후 한국사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2. 식민사관의 성립과 확대개항기 조선역사에 대한 연구경향 가운데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거나 식민통치의 필연성을 강변하려는 제국주의적 역사 인식이 있었다.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은 일본의 배타적 내셔널리즘, 즉 쇼비니즘에 의해 고무된 것이었고 일본의 군부나 관학자(官學者)들에 의해 강조되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지향하며 전개된 이러한 역사연구의 경향을 식민주의 역사인식 또는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일제의 식민사학은 에도(江戶)시대 국학파들이 수립한 이른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記)』등 일본 고대의 역사서에 토대를 둔 황국사관에 의하면, 고대 한국의 신이나 왕은 일본의 신이나 왕의 후손이라거나 고대 한국은 일본에 의해 정복 또는 지배를 당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었다. 일본 국학파들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 인식은 19세기말 일본의 근대적 역사학구와 저술 작업이 수행되었다. 일제관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식민사학은 일제의 한국강점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한국사의 내재적인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식민사관은, 식민지배 정책의 변화에 맞추어 보다 확대 적용되고 있었다. 한국사의 각 부문에 적용된 식민사관의 내용은 크게 일선동조론과 타율성이론, 그리고 정체성이론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이만열, 「일제관학자들의 한국사 서술」, 『한국사론』6, 국사편찬위원회, 19793. 식민사관의 내용(1)일선동조론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한 민족이라고 간주하는 일선동조론은 한국인에 대한 우월의식 및 멸시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는 동화주의 , 내선융화 , 내선일체 등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의 논거가 되었으며, 식민사학의 밑바탕이 되었다.일본의 고대 문헌에 기초하여 신화시대에는 일본의 신이나 그 자손이 한국의 신이 되었다고 하며, 역사시대에는 일본인이 한국을 지배하고 정복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 등을 주장했다.이러한 일선동조론은 1890년대 국학의 전통을 이은 『국사안』(國史眼)에서 강하게 주장되었으며, 합방 이래 식민정책의 변화에 발맞추어 내용을 계속 확대·전개시켰다. 『국사안』에서는 이른바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등을 제시하면서 조선은 신대의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고 하는 그릇된 역사상을 심어주었고, 일선동조론을 제시했다. 1910년 『역사지리』의 임시증간호인 「조선호」(朝鮮號)에서 『국사안』의 저자 호시노는 일본의 조선 강점을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로 보아 그들의 침략행위를 찬양하였다.이들이 제시한 일선동조론은 그뒤 계속 심화되었다. 1893년 요시다는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를 서술하면서 신라와 가야가 일본의 자분 (子分)이었다고 강조했다. 일선동조론은 1902년 작성된 가나자와의 『일한국어의 비교연구』를 통해서도 재차 확인되었다.일선동조론은 한일합방이 단행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 강조되었13·14, 1990, p766∼67.1908년에 이르러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이 설치되어 식민사관의 일단인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제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만선사관이란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려는 역사해석의 견해로, 독자성이 강한 조선과 그렇지 않은 만주를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조선사의 독자성을 감소시키거나 불식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되었다.또한 1919년 3·1운동 이후 기다는 일선동조론의 입장에서 종래 한일동원(韓日同源)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야기된 소란이나 상극적인 불협화(不協和)를 재양하고 한·일 두 국민이 같은 제국민(帝國民)으로 융화하여 서로 영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기다의 이러한 주장에는 3·1운동과 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무마하고 희석화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었다.이후 일선동조론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되어 한민족 말살정책에 교묘히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일선동조론은 일본인에게는 지배자의 자기합리화 철학이었던 반면, 한국인에게는 계속적인 굴종을 강요하는 논리였다.(2) 타율성이론타율성이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즉 한국의 수천 년 역사는 북쪽의 중국·만주·몽고와 남쪽의 일본 등이 이웃하고 있는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자주적으로 전개되어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인의 자주성 고양에 크게 기여한 단군은 부정되었고, 한국은 태고적부터 외세의 지배 아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즉 한국사를 피침과 피지배의 역사로 점철되었다고 왜곡함으로써 한민족이 자주적으로 역사를 발전시킬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강만길, 앞의 책, p408.곧 기자(箕子)·위만(衛滿)등 중국인 이주자들의 식민정권이 성립되고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로 중국의 직할통치가 이루어졌으 부응하여 성립되었다. 곧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음으로써 중국이 만주에 대하여 영토상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역사적인 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용범, 「한국사의 타율성론 비판-소위 만선사관의 극복을 위하여」, 『아세아』, 1963년 3월 호.이러한 만선사관은 한국사의 독자성을 불가피하게 부정하여 한국사를 대륙, 특히 만주의 세력이 파급된 역사로 해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결국 만선사관은 고대사에 있어 만주사와 한국사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만을 밝혔을 뿐 한민족 발전의 역사를 무시함으로써 당시 이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고 있던 민족독립운동과의 관련성도 부정하였다.반도적 성격론은 식미지시기 마지나의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에서 한국사의 타율성이론을 논하는 다른 측면으로 설명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주변성·다린성으로 규정하고, 이같은 한국사의 최대 형성요인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곧 한국은 대륙의 부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본류로부터는 벗어난 주변성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만몽·일본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다린성의 특징을 지님으로써 한국사의 발전은 역사발전이 결핍되어 있는 반도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었다.반도적 성격은 대외투쟁 관계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국내정치권의 형성, 당파성, 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이른바 사대주의라는 성격을 형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미지나는 사대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한국의 국내 정치세력의 변화를 이웃 강대국의 영향에 따른 친명파·친청파·친일파 등 파벌간의 싸움으로 보았으며, 그 해소도 대부분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변하였다. 또한 이러한 타율적 요소는 문화 창조면에서도 나타나 한국의 문화는 종주국의 것을 모방한 것 외에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기백, 「사대주의의 문제점-사대주의라는 용어와제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즉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발전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않은 단계에 있거나 근대사회 발전에 필요한 자생적·근대적 요인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정체성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는 경제사학자 후쿠다였다. 그는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이 근대화에 뒤늦어서 혼미한 근원은 한국에 봉건제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더욱이 일본사와 한국사를 비교할 때 한국의 상황은 일본에 봉건제도가 성립되기도 전인 고대사회 말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1996, p129.후쿠다는 봉건제도가 근대국가 또는 근대적 국민경제조직의 형성에 불가결한 전제조건인데, 한국에서는 이것이 결여되었고 한국경제는 봉건제도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심각한 정체상태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강진철, 「사회경제사학의 도입과 전개」, 『국사관논총』2, 1989, p174.그는 봉건제도 결여론 을 주장하면서, 이것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체성과 후진성·낙후선의 원인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또한 후쿠다는 한국에 화폐경제가 성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회생활의 진보도 매우 지지부진하다고 주장했다. 후쿠다는 한국에서는 토지사유의 성장을 볼 수 없고, 공동체적 점유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관찰했다. 그는 한국의 촌락이 씨족적 사회통제의 기반 위에 보존되며, 상업의 사회적 분화조차도 매우 미숙하다고 주장했다.{) 강진철, 앞의 논문, 1989, p172∼76.후쿠다는 한국의 후진적 경제상태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전봉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인 자신의 힘에 의해서 정체상태가 지양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은 어떤 다른 경제단위의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문화에 동화됨으로써만 정체상태를 비로소 지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한국과 별개의 다른 경제단위 는 일본을 가르킨다. 즉 후쿠다는
베트남 전쟁미국만큼 전쟁으로 덕을 본 나라는 근대사에서 보기 힘들 것이다. 1812년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미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게 더 이상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약체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강한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조성하여 국가 발전의 중요한 심리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미국은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 텍사스 등 남서부의 광할한 토지를 획득하여 본격적인 서부 개척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푸에르토 리코, 필리필 등을 획득하여 남미 대륙 및 태평양 지역으로의 팽창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구축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 덕분으로 미국은 엄청난 전시 경기를 맛보았으며, 그로써 세계 열강과 함께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로 등장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10여년 동안 계속되던 미국 사상 최대의 경제 공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경제, 군사, 외교 면에서 세계 최강의 국가로 등장하였다. 이제 세계사는 미국과 소련의 양대 초강국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어느 나라도 미국의 우월적 위치에 감히 도전 할 수 없게 되었다.한마디로 지금의 미국의 가능했던 것은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쟁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세계 최강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하였다. 미국 역사 생성 이후 최초로 패전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소유하고 최대의 전쟁 물자를 소유했던 국가가 별볼일 없는 무기로 대항하는 조그마한 농업 국가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 최강의 현대식 과학 기술과 인간 부대와의 전쟁에서 결국 인간 조직체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고, 베트남 전쟁이 미국에게 준 교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19세기말에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이후 수십년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쌀, 고무, 주석, 텅스텐을 채굴해 갔다. 프랑스인 지배자들에 대해 가끔 농민반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더욱더 독립을 향해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하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를 대신하여 일본군이 진주하였다. 그에 따라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인 호치민은 일본군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미국 전략사업국 요원들과 손을 잡았다.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45년 9월에 호치민에 의해 베트남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다시 식민지체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돌아옴에 따라, 1946년에 베트남 민족주의자들과 프랑스 군대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반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해 프랑스에 엄청난 대가의 패배를 안겨다 주어 프랑스가 싸움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트루만의 민주당 행정부는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대해 지배권을 회복하길 바랬다. 그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하려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첫째, 미국이 냉전에서 프랑스의 협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둘째, 동남아시아가 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쌀은 앞으로 미국의 우방이 될 일본의 주요한 식량 공급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천연고무를 생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었다.셋째로, 이 지역은 일본과 필리핀의 방위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넷째로 호치민은 공산주의자로서 소련의 팽창주의에 협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이렇게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은 꾸준히 증대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중국 공산주의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곧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동남아 전역을 유린하고 그 다음에는 타일랜드, 미얀마, 인도까지 휩쓸 것이라고 확신했다.케네디의 후임자인 린든 B. 존슨(1908∼1973)은 전지만 아마 10만 정도의 병력이면 베트콩을 패배시키고 그들을 북쪽으로 쪽으로 쫓아내기에 충분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남부 베트남에서 쉽게 생각한 전승이 실패하자 격앙된 미국의 민-군 지도부는 대대적인 공중 폭격에 나섰다. 1964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미국 지도부를 정당화시키는 데 동원되었다. 믿기 어려운 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부 베트남의 배가 통킹 만에서 미군의 해군 함정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통령 존슨은 이 사건을 전쟁 행위라고 선언한 뒤 곧바로 공산주의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을 의회로부터 받아냈다.그 직후 미국에 의한 최초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여러 증거들로 볼 때 이러한 공습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공습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2차 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독일 전역에 투하된 양만큼의 재래식 폭탄이 자그마한 베트남 땅에 떨어졌다. 전쟁이 5년 째 접어들며 끝이 보이지 않자 미국 전역에 환멸감이 확산되었다. 미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고, 전선에서는 미국은 베트남에 어떤 이해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훈련의 질도 떨어졌다. 장군들은 명령불복종에 관한 보고를 받거나, 병사들의 철모에 새겨진 평화의 상징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탈영과 무단외출 사건들이 늘어갔다. 그것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1970년대에, 병사들 사이에서 마지막 희생자가 되길 원치 않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급속도로 증가하였다.병사들 사이에는 흑백갈등이 극심하였다. 마약복용도 중요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미국내에서는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징병을 기피함으로써 반전(反戰)의사를 드러냈다. 베트남 전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면서 미국사회에서는 반전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었다.또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태로 지출이 많아진 결과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달러화의 신용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한 심리는 일부 외국인들이 그리 유리하지 않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달러를 금으로 바꾼 사실에서 나타났다. 그런데도 미국은 구정 공세 이후 전선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서 수십억 달러의 전비를 더 지출해야 했다. 그에 따라 재정은 더욱 악화되고 경제는 위축되었다.존슨 대통령은 보좌관들과의 지루한 전쟁에 지쳐 있었고, 전쟁확대에 따른 지출 증가 때문에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 또한 병력과 화력의 증강이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당인 민주당과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들 속에서도 반전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므로 존슨 대통령은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1968년 3월 31일에 존슨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북베트남의 폭격을 중단하고,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음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함으로써 국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결국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지 못해 인정한 것이다.그러면서도 그는 전쟁에서 패배는 당하지 않으려고 1968년 5월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리고 존슨은 폭격을 완전중단하는 조건으로 북베트남에게 양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1968년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리차드 닉슨이 당선되었다. 존슨의 후임자인 리차드 M.닉슨은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약속에 힘입어 당선되었는데도 오히려 확전만을 계속해 나갔다. 1970년 5월 미국은 캄보디아를, 그리고 몇 달 후에는 라오스 왕국을 침공했다. 1972년 4월 북부 베트남은 남부 베트남을 정복하며 모든 외국 군대를 나라 밖으로 몰아낸다는 목표하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반격을 개시했다. 남부 베트남의 많은 요충지가 함락되었다. 닉슨은 북부 베트남의 공장들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고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는 것으로 맞섰다. 잔혹한 공습은 1972년 12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한국 역사학의 발달에서 실증주의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을 설명하시오.{Ⅰ. 서론Ⅱ. 민족주의사학1. 1910, 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형성2. 1930. 4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발전Ⅲ. 실증주의사학Ⅳ. 결론Ⅰ. 서론일제 강점기의 한국사 연구 역시 국어·국문학 연구와 마찬가지로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주의사학이 세력을 떨치는 상황에서, 한국사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되는 일이었다. 특히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던 한말에 출발한 계몽적인 민족주의사학은 보다 성숙해지면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해되었다.192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는 좀더 다양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보편성이 강조된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한 사회경제사학과, 문헌고증을 중시한 실증사학이 민족주의사학과 더불어 식민지 시기의 한국사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 세가지 연구방법론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물론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전개된 역사학 연구를 동일한 기준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특징적인 학문적 조류를 강조한 편의적 분류이다.일제의 관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주의사학은 한국사의 왜곡과 말살에 뜻을 두고 있었다. 즉 식민주의사학은 타율성과 정체성을 내세우며 일제의 한국침략의 정당성과 그 지배의 합리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바로 일제 강점기에 식민주의사관이 극성을 부렸는데, 민족주의사학 뿐 아니라 사회경제사학과 실증사학 역시 그 극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한국 역사학의 발달에서 실증주의사학과 민족주의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Ⅱ. 민족주의사학민족주의사학을 사학사적 입장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시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 개념은 시기마다 그 내용을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역사학의 일각을 이루는 민족주의사학은 먼저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하며, 다음으로는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출된 식민사관사를 신과 혼으로 이해하고 국가는 형과 백으로 이해하였는데, 신과 혼이 남아 있으며 형과 백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박은식은 일제침략사를 서술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일본 침략성과 간교함과 잔학성을 폭로 규탄하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적 통분을 격발시키며 자손만대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결국 박은식은 발해가 망하자 발해사도 없어진 전철을 밟지 않도록 자기 시대의 역사를 써서 보존한 것이며, 역사가 보존되는 것은 국혼이 보존되는 것이고 국혼만 보존되면 광복을 찾을 수 있으므로 국혼이 담긴 통사를 저술하여 국민에게 읽히려 했던 것이다.{) 신용하, 「박은식의 역사관」상, 『역사학보』90, 1981: 신용하「박은식의 역사관」하, 『역사 학보』91, 1981, p. 146∼147.3·1운동 이후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내놓았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독립쟁취를 위한 혈투의 역사였다.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국민들에게 아픔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구국주의 정신을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공급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것이라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지통심을 혈투로 전환시켜 실전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박은식은 역사관과 역사서술은 민족의 종교·언어와 풍속 속에 불멸의 국혼이 존재한다면 비록 한때 다른 민족의 병탄을 당한 민족일지라도 마침내 분리하여 독립하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이른바 국혼유지의 사학이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역사발전에 있어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박은식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영웅 대신 민권과 민중을 발견해가고 있었다. 요컨대 박은식은 서술체제에서는 근세 신사의 방식을 취하여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 하였으며, 통계와 확고한 자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비판적 안목을 유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독특한 국혼개념에 의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있었다. 그러나 그는 1910년 신국민설을 내세우면서 역사의 주체를 영웅에서 국민으로 확대시켰다.신채호는 역사학은 역사 사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학문이라는 입장에서 사실의 계통을 찾을 것이며, 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의 전후관계를 유추하여 인과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사학은 자칫 당위적이고 교조적으로 흐를 수 있는 측면을 어느 정도 극복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한국사 연국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연구방법론」, 『산운사학』1, 1985.이와 같은 사상적 변화와 역사연구 방법론을 바탕으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와 같은 저술을 집필하였다. 신채호의 사관은 대외적으로는 주체성을 유지하는 위에서 자아를 찾고 대내적으로는 각시대의 여러 가지 역사적 현실을 모두 모순의 상극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투쟁과 모순의 상극이 지양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와같은 사관을 바탕으로 신채호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을 극복해나갔다.신채호는 화랑도의 낭가사상을 우리 역사의 기본사상이자 자주성으로 파악하였다. 낭가사상은 그것이 본래 우리의 사상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것이 해명되지 않을 대 이 개념 역시 박은식의 혼처럼 정신사관이라는 비판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결국 신채호의 역사인식과 서술은 연구방법론을 통해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운 만큼 그것을 역사서술에 차분히 적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가 주장한 역사서술의 체계성·종합성·객관성은 교조성과 당위성에 가리는 일면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신채호의 역사인식과 서술은 식민사관에 맞선 강력한 반식민사론으로서, 유교적 역사학을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킨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2. 1930, 4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발전1930년대 식민지 통치체제는 1920년대의 이른바 문화정치에 가탁한 기만정책을 끝내고 파시즘체제를 강화시켜나갔다. 특히 세계공황의 여파로 궁지 조선사상 을 강조하면서 문화적 측면을 중시했다. 그는 한글창제와 조선후기 실학을 조선심이 발양된 대표적 사례로 손꼽았다. 그의 경우 문화사학적 방법이 원용되고 있다. 또한 『과거 조선의 혁명운동』과 『사안으로 본 조선』에서는 민중중심 역사관이 제시되고 있다. 그는 계급쟁투를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보고 고려시대에 상전계급과 노예계급의 쟁투가 조선시대에는 양반계급과 상민계급의 쟁투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특히 홍경래란과 동학란을 상민계급의 제 1,2차 혁명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역사 속에서 민중을 발견하고 반역아를 중시하는 역사의식이 형성되었으며, 민중을 미래 역사발전의 주체로 설정하엿다. 특히 그의 『대미관계 50년사』는 한국근대사를 국제적 안목에서 파악하고 이를 통해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을 구명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문제점이 없지 않았고, 관념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는 민족주의사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일제시대 대표적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던 안재홍은 1930년대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면서 역사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여유당전서』교열작업에 참여하고 실학에 관해서도 연구햇지만, 중심은 고대사 연구에 두었다. 그의 대표적 역사연구는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상고사관견』인데, 이는 해방 후 『조선상고사감』으로 간행되었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비교언어학적인 방법과 인류학 이론에 의거한 사회발전단계론을 원용하면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고조선 사회 자체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했다. 그 역시 다른 민족주의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사를 단군-부여-고구려 계통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고대 이후의 시기를 몰락과 퇴보의 과정으로 봄으로서 정체론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안재홍의 역사학은 신채호와 정인보의 영향 아래 민족주의사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신민족주의사학의 단초를 여는 민족사관의 새로운 이론구성을를 추구하기 위하여 실증사학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과학적·실증적 역사학을 연구하고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실증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활동을 목표로,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사를 연구한 학풍을 지칭한다.식민지시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실증주의사학은 랑케(Ranke)사학의 기반 위에서 철저한 고증주의를 표방하는 일본 학계의 관학아카데미즘을 도입하여 그들의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로 실증주의사학자들은 일본학계와 일본인 학자들과 밀접한 교섭을 가지면서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인 학자들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데서 일정한 차이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1934년 대학 출신 국학자들이 조선인에 의한 조선문화의 연구와 학회이 필요성에 따라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기관지인 『진단학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 「진단학회창립」, 『진단학보』1, p223∼24.진단학회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은 모두 그들이 전공하는 분야와 시대가 있었다. 예컨대 이병도는 고대역사지리와 사사상를, 김상기는 대외관계사를, 이상백은 조선건국사와 사회제도사를, 손진태는 원시신앙과 민속, 신석호는 조선정치자들을 , 유홍렬은 조선교육사와 사상사를, 그리고 고유섭은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이것은 한국사 연구가 세분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이기 하지만, 동시에 한국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천착이 필요하다는 즉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실증주의사학자들은 사료의 자의적 해석이나 일정한 공식에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적용시키는 역사연구 경향을 극복하고, 식민주의사학을 학문적 논리로써 극복하고자 실증사학을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민족주의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에서 제시하는 일정한 법칙이나 공식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사실의 연구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고 하였으며, 식민주의사학을
일본의 식산흥업 정책과 중국의 양무운동19세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과 일본은 스스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의 침투 속에서 중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국가의 자강을 위해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중 근대화를 위한 노력으로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식산흥업정책이 있다. 양무운동과 식산흥업 정책은 그 과정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과 일본의 이러한 움직은 후에 두 국가의 운명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후에 중국은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위한 이러한 노력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차이는 청일전쟁에서 확연히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양무운동과 식산흥업정책의 실행 과정과 두 정책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근대 일본의 출발로서 메이지 유신은 다이카 개신과 함께 전 일본의 역사를 구획 짓는 커다란 분절점이면서 동시에 아시아 국가 일본 과 제국주의 국가 일본 이라는 혼재된 정체성 형성의 기원이기도 하다. 열강과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이분되는 세계 속에서 일본의 안전과 지위는 열강의 일원으로서 다른 열강과 함께 국제정치에 참여할 때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나름의 시대이해에서 탈아 입구(脫亞入歐)를 통한 혁신의 길에서 비롯된 것이다.명치정부에 의해 정치적 목표인 권력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경제적 목표인 상공업을 일으키는 작업이 실행되었다. 서양인들의 상공업과 무역기술의 우월성을 인식하였던 일본은 국력이 농업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관념은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명치정부는 서양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급속하게 육성하려고 하였다. 우선 메이지 정부는 성립 당시에는 종래의 봉건적인 여러 제한 철폐의 개혁을 실시하여, 상품경제를 자유로이 발전시키는 조건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근대적인 상공업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 일이 전통적인 상인들의 마련하고 안정된 신융금융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근대적 은행제도를 수립하였다. 일반적으로 후진국일수록 원시적인 자본 축적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대규모의 공업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장기자금의 조달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일본은 이 기간에 외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가 자본수입을 계기로 하여 구미의 식민지화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의 근대적 은행제도가 도입되었는데 미국의 국법은행을 모방하여 국립은 조례가 제정되었다. 1879년까지 지폐발행권을 가진 153개의 은행이 각지에 설립되었다. 그 후 1882년에 일본은행이 설립되었고 지폐발행권은 국립은행으로부터 일본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립은행은 지폐발행권을 갖지 않은 보통은행으로 바뀌었다. 청일전쟁 이후 많은 은행들이 신설, 그 절정을 이른 1901년에는 1890개의 보통은행과 444개의 저축은행, 51개의 특수은행이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고리대금업적 은행들이, 도시에는 근대적 은행이 존재하는 식의 분단적 구조로 되어 있어 민간은행에 의한 자본동원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중앙의 발권은행인 일본은행에 민간은행에 대한 주식담보 융자를 하도록 하여, 민간은행의 공업 금융, 즉 장기자금 공급을 원조하도록 하였다.정부는 서양에서 민간자본이 모이게 되는 중요한 조직기술이라 할 수 있는 회사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일본의 자본가층을 육성한다는 정책은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은행이 신설되고 1870년대 말엽까지 수많은 명목상의 회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많은 경우 사무라이 들이 정부에서 받은 공채와 얼마 안되는 현금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거나 새로운 경제조건에 적응하지 목하고 실패하였다.정부는 의도적으로 특정한 기업가들을 도와주었다. 사업보조금의 지원이나 장기 저리의 융자혜택, 정부와의 수의계약, 정부자금의 예치 등을 통해서 특정 기업가들을 지원하였던 거싱다. 이러한 방식은 관료와 민간 기업가들일규격의 국산총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화포도 자급할 수 있게 되었고, 전함 건조면에서도 1905년경에는 조함기술이 세계 수준에 도달하여, 1912년 이후로는 외국에 전함을 발주하지 않게 되었다. 제국주의적인 국제 환경 속에서의 무기 자급은 지상명령이었다. 무기는 거의 최신의 수입 기계를 갖춘 군 직영의 대공장에서 만들어 졌다.민간의 중공업 발전은 현저히 지연되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선업만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그 밖의 것들은 미미했으며, 방직기계는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자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공업 일반의 발전을 낮은 단계에 방치한 채 무기산업만을 육성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무기산업의 수준은 결국 한 나라 중공업의 전체 수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중공업 발전의 특질을 살필 경우, 철도 건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산업혁명에 있어서는 철도 건설이 철강, 석탄, 기계 산업에 대해 파급 효과를 가졌지만, 일본의 경우 철도 건설이 산업혁명의 추진력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부설된 철도의 거리가 짧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시기 일본에는 8천 킬로미터나 되는 철도망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과 구미와의 중공업 생산력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외국 제품에 대항하면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중공업 제조업자가 형성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 그 주요한 이유였다. 이렇게 민간 중공업이 발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간의 중공업 대경영으로는 군수에 의존한 재벌계 기업이 군공창의 위성적인 형태로 존재했을 뿐이다.석탄은 당시 일본의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일본의 석탄 산출량은 국제적으로 보아 결코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주요 수출품이었던 것은 일본에서 산업혁명기에 동력용의 석탄 수요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산업보다 다량의 석탄을 필요로 하는 철강업이 발전되지 않아 국내 시장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미쓰이, 미쓰비시, 스미또모 등 3대재벌의 주요한 축적 기반의 하나는 광업이었다. 산업혁명기에 대규모화한 광산개발이 대기업적 경영업을 설립 운영케 하고, 정부의 자금을 지원함과 아울러 여라 가지 특혜를 부여하였다. 60년대 군수공장이 관 주도로 설립되었던 것과 달리 민간 상업자본의 근대산업에 참여를 자극하고 보호하여 공업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일반적으로 양무파로 지칭되는 양무운동의 핵심적인 추진세력은 중앙의 공친왕과 문상, 지방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일군의 관료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청조정부내에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양무운동기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권력의 핵심은 서태후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4년 동태후가 사망하고 공친왕을 제거한 이후 서태후는 청말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다.중앙정부내에서 양무운동 추진세력이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던 반면 민중운동으로 붕괴된 청조의 지배체제를 재건하고 지방통치를 안정시키며 일련의 양무정책을 적극 추진한 세력은 태평천국난을 계기로 성장한 지방관료세력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등이었다.호남성 출신의 학자로 증국번은 중앙정부의 정책결정에 대해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군수산업의 육성을 적극 제안하는 등 초기의 양무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좌종당은 양무운동기의 최대의 군수공장의 하나인 복건선정국을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양무파 로서 뒤에 봉건·매판관료 의 전형으로 꼽혔던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우로 출발하여 증국번의 권유로 자신의 출신지인 안휘지방에서 향용을 조직하였는데, 1862년 상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굳혔다.이들 양무파 관료들이 하나의 통일된 목표와 정책을 추진하는 집단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적 이해관계와 권력투쟁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으며 증국번과 좌종당의 사이처럼 개인적 반감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일본의 명치유신 추진 주체들처럼 중앙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며 중앙정부내의 청의(靑議) 를 내세우는 정치적 반대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양무운동에서 근대적 채광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파급효과를 거두었다.이와 함께 이들 공장에 부수적으로 설립된 번역관과 교육기관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인 과학기술서적이 번역, 보급되었으며 새로운 기술인력을 양성하였다. 또한 복건선정국의 경우 전후 3차에 걸쳐 프랑스 등지에 일단의 학생들을 유학시켰다.해군의 창설에 관한 논의는 양무운동 초기부터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1861년 당시 해관 총세무사대리였던 하트는 청 정부에게 영국의 군함을 도입하여 근대적 해군을 창설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후 레이-오스본함대사건 이후 청조는 중국에서 직접 군함을 건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강남제조총국과 복주선정국이 설립되어 군함의 건조가 시도되었으며 생산된 군함을 연안 경비에 투입하였다.1884년 군함 17척의 남양함대, 15척의 북양함대, 11척의 복건함대 등 3개 해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군체제가 갖추어졌으며 1885년 독일에서 건조된 정원 , 진원 등 철갑선이 도착하여 주력함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3개 해역에 걸쳐 40여 척의 군함을 보유한 청조의 근대적 해군은 그러나 그 표면적인 위세와 달리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해군 건설을 위해 매년 400만 량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이화원의 건축자금으로 전용되어 실제로 해군의 해장에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해군의 기본적인 구조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남양함대는 상군계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북양함대는 회군계에 장악되어 있었고, 3개의 함대는 각각의 독자적 지휘계통의 지휘를 받고 있어 통일된 지휘계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유한 선박은 질과 양적인 면에서 표면적인 위세와 달리 내적으로 극히 취약하였으며, 이것이 1894년 일본과의 해전에서 쉽게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상선회사의 설립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 이홍장은 광동출신 상인, 매판의 자본을 모집하고 정부의 자금을 투자하여 관상합판(官商合辦)기업을 설립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선정국 등의 선박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