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해방이후 우리나라경제금융발전사
    ◎ 산업구조 변천1. 경제부흥1945년의 해방과 분단으로 산업생산은 급감하였다.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의 역할이 중단되고 남북간의 산업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1945년의 산업생산은 1940년대 초의 1/5 수준에 불과하였다. 산업생산은 한국동란 직전에 상당히 회복되었으나 전잰중에 생산설비의 반 이상이 파괴되어 1953년의 산업생산은 1940년대 초의 통화팽창으로 인하여 인플레가 가속되는 가운데 경제는 대량의 원조물자에 의존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긴급한 복구사업이 대체로 마무리된 1957년부터 정부는 물가안전에 역점을 두었다. 경제부흥과 물가안정은 원조자금에 의존하였다. 1953~60년간에 수입재원의 대부분이 원조자금으로 충당되었다. 원조자금은 경제부흥에 필요한 수입만이 아니라 내자동원에도 기여하여 통화안정에 기여하였다. 저축증대보다 투자촉진이 중시되어 공금리는 저수준에 유지되었다. 이러한 저금리와 엄격한 수입제한이 비내구소비재의 수입대체를 촉진하였다.2. 수출지향적 공업화비내구소비재의 수입대체가 진전되면서 산업생산의 증가가 둔화되고 수년내에 원조의 중단이 예상되는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제1차 5개년계획(1962~66)이 추진되었고 1963년에 고도성장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의 일관된 정책목표는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통하여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5개년계획에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외환통화재정조세제도가 정비되었고 상품수출과 외국인투자에 대한 지원시책도 마련되었다.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수입제한으로 자원배분이 수입대체에 편중되고 이로인하여 수출활동이 위축되는 부작용을 배제하기 위하여 복잡한 유인체계가 도입되었다. 무역외환금융의 통제 등 자원배분에 대한 정부개입이 광범위하여 산업계의 의사결정에도 개입하였다. 부정부패의 소지가 있는 광범위한 정부개입과 복잡한 유인체계가 자원배분의 효율화에 기여한 것은 긴밀한 관민협조하에 수출실적이라는 투명한 기준에 근거하여 정책이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정책체계는 결국 경쟁우위가 있는 분야에 자 국내유인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비내구소비재의 수출이 주도하여 국민총생산은 1963~72년간에 연평군 9.5% 성장하였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310달러로 배중하였다. 1960년대 초에 천만달러에 불과하던 상품수출이 13억 6000만달러로 증대되었고 제조업은 연평균 18% 성장하여 국민총생산에서 점하는 비중이 11%에서 26%로 증가하였다.2. 중화학공업화수출신장은 1970년대 초에 현저히 둔화되었다. 임금수준이 상승하여 가격경쟁력이 저하되었고,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수입규제로 수출요인도 부진했으며, 비내구소비재의 교역조건도 악화되었던 것이다. 합판, 가발, 직물, 의류, 신발 등이 3/4을 점하는 수출구조로는 지속적 성장에 한계가 있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비하여 방위산업의 육성도 시급했던 정치경제적 상황으로 1973년부터 정부주도하에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추진되었다. 시장규모기술능력자본축척 등을 감안하면 중화학공업에 대한 대규모의 설비투자는 상당한 위험부담을 내포하였다. 이러한 중화학공업투자를 유도하려면 강력한 보호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정부는 광범위한 정책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정책수단은 저금리 정책금융이었다. 은행자금이 중화학공업에 집중적으로 배정되었고, 정책금융의 대출금리는 물가상승률에도 미달했으며, 대규모 설비투자의 위험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경영성과의 부진이나 재무구조의 악화와 무관하게 자금공급이 보장되었다. 강력한 지원에 의하여 제4차 5개년계획(1977~81)의 중화학공업투자는 1979년에 조기 달성되었다.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이 점하는 생산비중이 경공업을 상회하게 되었으며, 산업연관이 심화되어 중간재의 생산비중이 증가하고 수입의존도 개선되었다. 목표에는 미달했으나 중화학공업의 수출도 증가하였다. 합판, 가발 등의 노동집약적 상품이 조선, 철강 등의 자본집약적 상품으로 대체되어 중화학공업의 수출비중은 1970년의 7.4%에서 1980년에는 19.3%로 증가하였다.1970년대 말에 물가상승이 가속되고 수출신장은 둔화되며 중화하하는 등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경제안정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기본방향은 타당하지만 단기간에 집중된 대규모 설비투자가 경제안정과 자원배분을 저해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60년대의 산업정책은 기능별 지원이나 산업별 지원이 아닌 일반적 수출 지원이었으나 1970년대의 산업정책은 특정산업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산업별 지원이었다. 이러한 정책기조의 변화는 정부개입이 실패하는 위험부담을 수반하는 것이다. 정부개입의 기준이 수출경쟁력에서 관리집단의 판단으로 대체되고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관민협조도 경시되어 시장규모기술능력자금동원능역 등으로 보아 투자가 과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투자재원을 조성하기 위한 통화남발과 외자도입이 경기과열물가상승임금상승외채증가 등을 초래했고, 유인체계가 훼손되어 수출신장이 둔화되었으며, 관치금융이 금융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지체시켰다.4. 자율화와 개방화1980년대에는 자율화와 개방화가 추진되었다. 공정거래법이 제정되었고 정책금융에 대한 금리우대가 폐지되었으며 정책금융이 단계적으로 축소되었다. 시중은행이 민영화되었고 금리자율화가 단계적으로 시행되었다. 수입자율화유은 1988년에 95%로 제고되었고 평균명목관세율은 1989년에 13%로 인하되었다. 외국인투자에 대한 제한도 완화되었다. 산업정책은 산업별 지원에서 기술개발 등에 대한 기능별 지원으로 전환되었다. 특정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7개 특별법이 폐지되고 공업발전법이 제정(1986년)되었다. 기술개발촉진법의 개정(1981년)으로 연구개발투자에 대한 유인이 강화되어 민간부문의 연구소설립과 연구개발투자가 급증하였다. 1980년대 전반에는 수출부진으로 성장이 둔화되었다. 1970년대 후반의 과열경기가 후퇴하는 국면에서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중되어 침체국면이 장기화되었다. 원화의 고평가와 수출지원의 축소로 수출유인이 약화되었고, 중화학공업의 가동률이 저조하였으며, 물가안정이 강조되어 내수도 경기회복에 기여하지 못하였다.1980년대 전반에 10.1%로 둔화되었던 수출실질신장률은 .9%로 가속되었으나 1989~90년간에 0.1%로 급격히 둔화되어 경제위기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1986~88년간에 수출신장이 가속된 것은 국내산업의 구조개선이나 생산성향상이 반영된 추세변화가 아니라 경쟁국 통화의 평가절상에 편승하여 장기추세에서 벗어난 일시적 현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의 수출신장률은 11.6%로서 1980년대 전반의 수출신장률 10.1%를 상회하였다. 수출주도에 의한 1986~88년간의 고성장은 내외환경의 병화에 대한 국내산업의 전략적 대응을 이완시켰다. 산업전반의 지식집약화가 지체되었고, 특히 경공업부문의 산업조달이 지연되었다. 경업업 제품의 수출비중이 감소하던 추세가 1986~88년간에 반전되어 사업체수와 설비투자가 과도하게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990년대 초에 중소기업의 도산폐업이 급증하였다. 경쟁우위의 변화에 대비하는 장기전략의 부재가 비효율적 자원배분을 초래한 것이다. 1990년 중반에 수출신장이 회복되었으나 경공업 제품의 OECD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감소하였다. 기술집약제품의 대개도국 수출이 수출신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엔화강세 이후 기술집약제품의 해외생산에 의하여 중국, ASEAN 등의 OECD시장 점유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ASEAN은 일본계 다국적 기업의 세계화전략에 의하여 수출구조가 기술집약제품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국내산업도 중저가 제품의 수출은 해외생산으로 전환하여 핵심부품과 생산설비의 수출을 확대하면서 고부가 제품을 개발하여 수출하는 차별화전략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금융1. 금융의 발전추이해방 이후 우리 금융은 사회불안과 높은 물가상승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었으나 1950년에 중앙은행법과 일반은행법이 제정되면서 근대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용제도가 채 틀을 갖추기도 전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금용제도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전후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산업은행이 발족되는 등 본격적인 금융제도 개편이 시작되었고, 1957년에는 최초로 거시적인 금융정책인 ‘재정금융경제가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의 운영이 어느 정도 건전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 315부정선거 등 정치적인 혼란이 심각해지면서 금융계가 다시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516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됨에 따라 이에 필요한 내자동원을 위한 금융부문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어 1962년 6월에 제2차 「긴급통화 및 금융조치」를 단행하는 등 금융제도면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졌다. 부정축재자가 소유한 일반은반은행주식이 정부에 귀속됨으로써 일반은행이 정부의 직접관장을 받게 되었고 농업협동조합, 중소기업은행, 국민은행 등이 신설되어 특수금융기관체계가 확충정비되었다. 한국은행법도 개정되어 정부가 금융에 직접 개입하는 체제를 마련하였다.이자율규제로 인해 은행금리와 시중금리 사이의 격차가 벌어졌으며 서비스업종 등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수 없는 부문이 많았기 때문에 사금융의 비중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하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비은행금융기관을 창설하고 은행예금보다 고수익이 보장되는 금융상품을 허용하였다. 1972년 83조치 이후 설립된 투자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 등이 그 대표적인 기관들인데 금리와 대출대상 등의 측면에서 규제를 완화하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증권거래법(1962)을 제정하여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자본시장육성법(1968), 기업공개촉진법(1972) 등 일련의 주식시장 육성책을 마련하여 정부는 공개기업에 대해서는 세제상의 혜택과 경영권보장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였다. 또한 정부는 상장주식의 안정성을 제고하고 주식수요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자금난에 처한 공개기업에 대하여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직접적으로 증권시장에 개입하여 증권가격을 유지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1968~88년의 호황을 겪는 동안 대규모의 자금이 유입됨으로써 증시가 규모면에서 급성장하는 한편, 제도면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발정하였으며 외국에 비해 매우 짧은 기간동안에 직접금다.
    경영/경제| 2003.12.15| 7페이지| 1,000원| 조회(469)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1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15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