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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외교]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처음 이책을 접해본 나의 소감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책 자체의 내용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 같은 처음 접해보는 난해한 어휘들로 인해 책의 내용을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진도도 빨리 나가지 못하였다.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한 내용은 오리엔탈리즘이 무엇이고 또 오리엔탈리즘이 서양과 동양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인식되었는지를 알리며 그것이 현재에까지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지를 저술하였던 것 같다.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오리엔탈리즘을 평한다면 일반적이며 덜 부정적이고, 철학 문화의 측면을 강조하여 평하면 어느 정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즉 오리엔탈리즘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문예상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면 용어에 내포된 오리엔트의 개념, 즉 고고학이나 역사학상의 오리엔트같이 분명한 것은 아니고 극동지방이나 아프리카 북부까지도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통례라고 나와있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취미(異國趣味)를 대표하는 것으로 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상의 동기 또는 제재(題材)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책에 등장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내가 생각하기로는 오리엔트 즉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또는 시각속에서 동양을 바라보고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여 등장하였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이전 제국주의 시절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동방 세계지역을 식민지로서 통치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이용하여왔다. 유럽인의 동양관이 갖는 헤게모니라는 것은 동양인의 후진성에 대한 유럽인의 우월성을 계속 주장하여 더욱 자율적으로 더욱 회의적으로 모든 현상을 생각하고자 하는 인물이 상이한 견해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서양인은 동양과 있을 수 있는 모든 관련 속에서 언제나 상대에 대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그리고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오리엔탈리즘이 탄생하였다고 보고 앞에서 본 서양인들의 시각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사이드는 프랑스 철학자인 M. 푸꼬Foucault(1926∼84)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이는데 이전의 오리엔트에 관한 유럽인들의 작품을 하나의 ‘담화discourse’ 즉 개념작용과 논리적 판단을 거친 질서있는 표현로 보았다. 다시 말해 유럽인들은 그들의 지배대상인 비유럽적인 것을 오리엔트라는 추상적인 세계로 정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세계관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오리엔트’의 부정적인 개념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비유럽적인 것, 자기와 다른 것을 자기네 기준대로 이해하여 식민지적 역사관을 고취시키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유럽과 오리엔트의 관계는 주객, 더 나아가 주종 관계가 서서히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사이드의 시각인 것 같다. 그리고 사이드는 책에서 한 문화를 비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작가 자신이 역사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고 유럽 즉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빼앗긴 오리엔트를 다시 찾아 해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인간 상실과 민족 해체의 역사”라 하였고 “지식인들을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사고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라 하였다.사이드는 이전의 오리엔탈리즘이 가진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가장 널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학문과 관련된 것이라고 저술하고 있다. 그리고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아마도 서양을 구별하려는 사고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취급하기 위한 곧 동양에 관하여 무엇을 서술하거나 동양에관한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동양을 묘사하거나 또는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거나 통치하기 위한 동업조합적인 제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보는 것이다.저자는 이 책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출발점을 18세기말로 보고 있다. 19세기초부터 2차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보았을 때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유럽의 아시아 및 남미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 및 식민지 정책이 활발하던 시기이므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러한 동양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란 시각은 당연한 것 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하는데 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국가들이 전후 쇄퇴하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전쟁 특수를 누리며 성장한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며 역시 동양에 대한 우월함을 바탕으로 접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양국가들의 동양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통해 서로의 문화, 인종등 포괄적인 것에 대한 인식 및 관계가 자리잡아 갔다고 생각한다. 서양과 동양 사이의 관계는 권력관계, 지배관계, 그리고 여러 가지 복잡한 헤게모니에 관련된 것으로 동양을 소재로 하는 유럽의 공상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 및 실천세계로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창조를 위해서 동양에 대해 서양의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이 책의 저자인 사이드 이전에도 오리엔트를 총괄적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또 여러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존재해 왔다. 사이드는 이러한 오리엔트을 연구하는 학자인 오리엔탈리스트의 가장 중요한 창작물은 오리엔트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오리엔트는 대부분의 아시아와 중동 지방을 총괄하여 이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문화와 인종들이 모인 오리엔트를 하나의 집단으로려는 시도는 오리엔탈리스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전형적인 오리엔탈이란 오리엔트 문화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 생물학적으로 열성을 타고나 문화적으로 뒤졌음은 물론 진화가 덜된 인종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특히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담론과 이미지는 대부분 권력과 성에 관한 은유로 묘사된다. 곧 여성적이고 약한 오리엔트는 유럽의 지배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창작물로 상정한 오리엔트라는 집단은, 이전에 표현된 적이 없는 개념의 집합체였다. 오리엔트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리엔트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현대 서양인들이 ‘아랍’ 민족에 대한 편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아랍인들이 서구에 대해 가진 피해의식은 뿌리가 깊다. 십자군 전쟁과 식민주의와 같은 역사적 경험,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국제정세,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이면서 문명 대접을 받지 못하는 문화적 불만감이 복잡하게 얽혀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결정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서구에서 동양이라고 하면 유럽 대륙의 동쪽에 있는 아랍지역을 가리킨다. 우리가 사는 곳을 그들은 극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유럽 중심으로 정리되는 바람에 우리는 오리엔트 문명이란 한때 반짝 했다가 세계사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그냥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서구 2천년 문명을 지탱해온 기독교는 원래 오리엔트 사상이었으며, 서구문명의 또 한축을 이루어온 그리스문화역시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 아래 성립한 것이다. 또 중세 암흑기에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의 성과를 보존했다가 다시 서구에 전해준 것도 오리엔트 문명이었다. 유럽에 르네상스를 가져온 그리스 서적들의 상당수는 아랍어로 전승되어 오다가 다시 유럽어로 번역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인이 쓴 역사 속에서 이런 사실은 가볍게 망각된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서구화되다 보니 우리 역시 종종 오리엔트를 서구인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사실할리우드영화에 등장하는 아랍인의 이미지만 봐도 모두 종교적 광신도, 테러리스트 혹은 마약 밀매자와 같은 악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사이드는 이러한 문제들의 인식을 위해 아랍문제를 축으로 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특히 아랍 이스라엘간의 제 4차에 걸친 중동전쟁 이래, 아랍 무슬림은 미국 대중문화의 문제거리가 되었고 학계나 그리고 재계에도 아랍이 심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9.11 테러사태 이후, 중동과 이슬람 문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극도로 달아오르는 지금의 현실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사이드가 제시하고자 했던 많은 문제점과 그 간의 역사적 행보에 대한 그의 연구가 진실로 우리 피부에 다가오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과 소련과의 냉전이 끝난 이후 세계의 주요 분쟁은 미국이 아랍권의 분쟁에 직접 개입을 하던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처럼 이스라엘쪽을 두둔하는 방식등으로 미국이 개입을 하게 되면서 미국과 아랍권의 분쟁으로 옮겨 간다고 볼 수 있다. 세계질서에서 소련이라는 미국에 상응하는 국가가 붕괴하면서 더 이상 미국에 대적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일국패권주의로 흐르게 되는 세계상황이 미국을 중동지역에 개입하기 더욱 쉽게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전쟁등을 통해 중동지역에 깊숙이 관여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위상이 커진 만큼 다른 지역은 작아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며 이전에 중동지역을 바라보던 시각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맞물려 중동지역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아랍인들은 원하지도 않는 개입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9.11테러는 이러한 미국의 개입이 낳은 정책과 정책의 대립, 정치적 입장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간섭 속에 오히려 짓밟혀지는 이슬람 국가의 주체성에 대한 반발, 그것이 그 원인 이었던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
    인문/어학| 2003.11.16| 5페이지| 1,000원| 조회(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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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현대사
    中國의 現代史중국공산당의 성립과 1차 국공합작1. 5.4 운동1914년에 시작된 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1919년 1월 전승국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여 전후(戰後) 문제를 처리하였다. 중국의 민중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14개 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에 중국도 단기서 군벌 정부의 대 독일 선전포고로 전승국이 되어 남북정부1)의 대표 5명이 미, 영, 일, 프, 이의 5개국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독일이 산동성에서 가지고 있던 권익을 반환하고 21개조 조약2) 의 무효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이 갖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에 4월 21일 이탈리아를 제외한 영국, 프랑스, 미국의 4개국 회의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에게 넘긴다고 명시하였다.중국 외교의 실패의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 민중은 제국주의 특히 일본과 단기서(段祺瑞)군벌 정부에 대해 격분하기 시작했다. 5.4운동 이전에도 규모가 큰 학생들의 반일 운동이 두 차례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15년 일본이 21조를 요구할 때 일어난 반일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918년 중일군사 협정으로 일어난 것인데, 모두 일본 유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 따라서 5.4운동 이전의 중국에서의 격한 반일 감정이 파리회의에서 불공정한 열강들의 결정으로 인해 5.4운동으로 이어졌다.5월 4일 북경에서 북경대학을 위시한 13개 대학 학생 300여명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21개조를 취소하라","우리의 청도(靑島)를 돌려달라" ,“매국노 조여림(曹汝霖), 장종상(章宗祥),육종여(陸宗輿)3)를 처벌하라”등의 깃발을 들고 시위하면서 한편으로는 망국의 위기를 호소하는 전단을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위대는 친일파인 조여림의 집으로 가서 방화하고 그 자리에 있던 장종장을 구타하자 북경정부는 32명의 학생을 구속하였으며, 다음날부터는 구속학생 석방 등을 문제시아가 중국으로부터 뺏은 이권을 모두 반환하고 비밀조약을 모두 파기한다는 선언이 1920년 3월에 중국에 전해지자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노골적인 침략과 특권요구에 분격한 중국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소비에트 정부의 입장에 환영과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동시에 10월 혁명과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기운이 퍼져 공산당창당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중국 국내의 지식층 중에서 사회개조의 일환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이것을 창당으로 촉진시킨 것이 코민테른4) 이었다.코민테른은 1920년 3월 동방부 서기인 보이틴스키( Voitinsky) 등을 중국에 파견하여 북경에서 이대조와 만나 당의 건립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겅은 군벌정부의 지배하에 있어서 비합법적 활동을 하기엔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때 이대조는 북경대학 교수였던 진독수를 소개했다. 진독수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내에서 "신청년"을 발행하고 있었다. 진독수를 만난 보이틴스키는 중국 혁명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중국공산당 창당 문제를 연구하였다. 이 후 8월에 진독수, 이달(李達), 이한준(李漢俊)등이 첫 번째의 공산주의 소조를 상해에서 결성했다.상해에서 공산주의 소조가 결성된 후에 호북(湖北)의 무한(武漢), 호남(湖南)의 장사(長沙), 북경,산동의 제남(濟南), 광동의 광주(廣州)에서 공산주의 소조가 연이어 결성되었다. "신청년"은 이해 9월부터 상해 공산주의 소조의 기관지가 되고,11월에는 "공산당"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여 당보(黨報)로 사용했다. 이해 가을 보이틴스키는 진독수의 소개로 러시아에 관심이 많은 손문을 만났다. 이처럼 창당을 위해 폭넓게 활동한 보이틴스키는 1921년 봄 귀국하였다.1921년 6월 코민테른 민족,식민지위원회 비서인 마링(Maring)이 중국주재 코민테른 대표로 상해에 파견되어 공산당이 창당되도록 건의하였고 창건 준비를 도왔다. 1921년 7월 23일5) 에서 31일까지 상해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있는 이한준(李漢俊)의 집고문인 보로딘(Borodin)에게 자문을 얻어 소련의 모델을 바탕으로 민주집중제6) 를 국민당의 조직원칙으로 정하고, 지방조직과 중앙조직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개조작업을 마친 국민당의 조직원칙과 조직의 기구등이 중국공산당과 유사하다.1924년 1월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열려,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이 대회를 통하여 국민당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소련 및 공산당과 연합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돕는다〔聯俄, 聯共, 扶助農工〕는 3대 정책이 확립되었다. 삼민주의도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민족해방과 국내 모든 민족의 평등을 이루고, 민권주의는 봉건군벌의 전제에 반대하여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찿고, 민생주의는 평균지권(平均地權)7)과 자본절제(資本節制)8)로 민중의 복리를 이루도록 새롭게 해석하였다.1924년 5월 국민혁명군의 간부를 양성할 황포군관학교가 소련의 도움으로 설립되어 장개석(蔣介石)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군의 조직 또한 소련 적군을 모방하여 중대급 이상에는 지휘관 외에 당에서 파견한 정치위원을 임명하여 군을 당의 지도하에 두었다.새로운 당장(黨章)에 의해 국민당 제 1기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는데 24명 중에 3명, 후보중앙집행위원 17명중 7명(모택동 구추백 장국도 등)이, 공산당 당원이였고, 이들 중에서 조직부장에 담평산(潭平山), 농민부장에는 임조함(林祖涵)이 임명되었다.1924년 9월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조곤(曹?) 군벌정부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봉천계(奉天系), 안휘계(安徽系)가 연합하여 제2차 직봉(直奉)전쟁을 일으켰다. 조곤의 직예계(直隸系)가 우세를 보이던 중 직예파의 풍옥상(馮玉祥)이 쿠테타를 일으켜 조곤을 감금하고 오패부(吳佩孚)를 남쪽으로 쫓아내니 직예계는 붕괴하였다. 풍옥상, 장작림(張作霖)은 단기서(段祺瑞)를 임시집정으로 활동하게 하고 손문에게 북상을 요청했다. 북경에 도착한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국민회의에 기초한 국민정부의 수립을 보지 못한 채 간암으로 사망했다.192것이 왕정위측의 설명이다. 이 사건 이 후 장개석은 신우파로 등장하여 반공적 태도를 드러내어 국공합작의 정치구조를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장개석은 이 사건 이 후 공산당의 활동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당무정리안(黨務整理安)을 제출하였다. 그것은 ①삼민주의에 대한 비판금지, ②타당(他당)당적을 지닌자는 중앙당 각 부의 부장이 될 수 없으며, ③타당 당적을 가진자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게 명단을 제출하여 보관한다, 등이다. 요중개 암살과 중산함 사건으로 장개석은 당과 군에서의 세력을 확대하여 좌파 및 공산당진영과 대립하게 되었다.북벌에 의한 전국의 통일은 손문 이래로 국민당의 일괄된 목표이였다. 1926년 7월 국민당 내부에는 여러 모순이 내재해 있었지만 "제국주의와 매국 군벌을 타도하여 인민의 통일 정부를 건설하기 위한" 북벌 전쟁이 개시되었다. 장개석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총 10만에 이르는 병력이 동원되었고, 공산당도 이를 지지하여 참가하였다. 국민혁명군은 용맹무쌍하게 싸우는데 반해 군벌군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에 각개 격파되었다. 그리고 북벌이 급속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군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은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각성의 일반 민중들과 광동의 노동자들이 국민 혁명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이다.1926년 11월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기관을 광주에서 노동의 중심지중의 하나인 무한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지만 장개석은 국민혁명군의 총사령부 소재지인 남창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남창의 장개석과 무한의 국민당 좌파, 공산당 사이의 대립이 명확하게 되었다.장개석은 자신의 지도권에 대한 위협과 제국주의, 상해의 자본가계급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반공 구테타를 단행했다. 상해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청방(靑幇), 홍방(紅幇)의 폭력단이 노동자로 가장하여 공산당의 지도하에 있는 무장 노동자 규찰대를 습격한 것을 계기로, 장개석의 명령을 받은 백숭희(白崇된 후,19일 전적위원회는 장사공격을 포기하고 국민당의 통치세력이 비교적 약한 호남성(湖南省)과 강서성(江西省)경계의 산악지구로 이동하자는 모택동의 주장을 받아 들였다. 부대는 9월 29일 영신현(永新縣) 삼만촌(三灣村)에 도착하여 모택동의 지도하에 부대를 개편하였는데 이를 삼만개편이라 한다. 삼만개편은 먼저 조직을 개편하여 1개 사단을 1개 연대〔團〕로 축소 편성하여 공농혁명군(工農革命軍) 제1군 제1사(師) 제1단(團)이라 개칭하였다. 이어, 부대에 당의 각급 조직을 설치하고 중대마다 당지부를 설치하여 당이 군을 지도하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해 10월에 모택동은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井崗山)에 도착하여 최초의 농촌혁명 근거지를 건설했다.12월 11일 중공 광동위원회 서기인 장태뢰(張太雷), 엽정(葉挺), 엽검영(葉劍英등이 국민혁명군 제4군 교도관과 광주(廣州)노동자를 지휘하여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를 점령하고 공농병정권(工農兵政權)인 광주공사(公社)12) 의 건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2일 영, 미, 일, 독 등의 함포사격과 국민당군의 반격을 받고 3주간의 전투 끝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해륙풍(海陸풍) 소비에트13)로 탈출하였을 뿐 나머지는 전멸했다. 따라서 공산당의 무장세력은 정강산(井崗山)으로 간 모택동의 소부대가 유일한 존재였다.2.농촌 혁명근거지 형성모택동은 추수봉기의 실패 이 후 약 1천명의 잔존부대를 이끌고 호남성과 광서성의 경계에 걸친 나소(羅소)산맥에 있는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혁명의 중심지를 농촌으로 옮겨 농촌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토지혁명을 전개하여 농민무장군과 공농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농촌에서 도시로 포위하는 전국적인 통일의 길을 열었다.정강산(井崗山)에는 모택동이가 들어가기 전부터 삼합회(三合會)14) 소속이면서 토비(土匪)인 원문재(袁文才)와 왕좌(王佐)가 부하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모택동은 이들에게 정치적, 사상적 훈련을 시켜 훌륭한 혁명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시켜 혁명대열에 동참었다.
    사회과학| 2003.04.13| 10페이지| 1,000원| 조회(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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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주의
    제국주의 (帝國主義 imperialism)--------------------------------------------------------------------------------다른 나라를 정복·지배하려는 일체의 침략주의적 경향. 넓은 뜻으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지는 국가나 민족의 침략주의적 경향을 의미하며, 좁은 뜻으로는 레닌의 개념으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최후단계를 의미한다.제국주의의 어원이 된 임페리움(imperium)은 원래 로마공화정 시대에는 명령과 권력, 특히 법에 의한 명령을 뜻하는 일반명사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그러나 이 말이 일반화된 것은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한 영국의 신문 에 의해서 였다. 의 1870년 6월 8일자 신문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제국주의라고 지칭하여 전제정치와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77년 이후이다.영국의 총리 디즈레일리는 77년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대외강경책을 구사하여 소위 징고이즘(jingoism)이 생겨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제국주의는 열광적인 주전론(主戰論), 혹은 배타적 대외강경책을 의미하기도 하였다.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말은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 자유경쟁단계의 산업자본에서 독점·금융자본으로 변화함으로써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대립과 분쟁을 가리키게 되었다.--------------------------------------------------------------------------------[형성 과정과 역사적 전개]근대자본주의체제를 확립하였던 영국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세계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토를 병합해 나갔다. 그리하여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이른바 동방문제로서 그 뒤의 국제정치를 뒤흔드는 소지가 되었다.1-3. 동아프리카지역의 식민지획득-탄자니아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동아프리카에 이른 뒤 포르투갈인이 진출하였으며, 1503년 잔지바르섬이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18세기 아라비아반도의 무스카트 오만 세력이 진출해 킬와를 근거지로 노예무역을 개시하였다. 1840년 오만의 술탄 세이드 사이드는 잔지바르섬을 평정하고 잔지바르왕국을 세워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킬와에 이르는 해안도시를 지배 아래 두고 내륙으로는 탕가니카호 동쪽 연안의 우지지에 이르는 대상로를 만들어 노예무역을 지배하였다.60년 오만으로부터 독립한 잔지바르왕국은 노예무역뿐 아니라 향신료인 정향유(丁香油) 무역으로 번영하였다.19세기 중반에는 아프리카 내륙 탐험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영국·독일 두 나라가 동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아프리카의 식민지 획득에 늦게 참가한 독일은 84년 페터스를 파견해 우삼바라지방의 수장으로부터 영토를 얻었다. 86년 영국과 독일이 협정을 맺어 잔지바르왕국 대륙부 영토는 해안지역의 나비 16㎞로 한정하고 나머지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독일이 분할하였다. 88년 독일이 잔지바르령 해안지역을 조차(租借)하여 91년 동아프리카회사의 영토를 독일정부 보호령으로 바꾸었다.영국은 1890년 잔지바르를 보호령으로 하고, 91년 매슈즈를 초대 총리로 하는 입헌정부를 발족시켰다.독일의 진출에 대해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연안부와 내륙의 아랍인·아프리카인 수장들이 저항해 왔으며, 특히 1905년 루피지강 유역지방에서 일어난 마지마지의 난은 최대의 저항운동이었다. 이 반란은 독일에 의해 목화재배를 강요당한 데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여 10-12만 명의 주민이 희생되면서 2년동안 계속되었으나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벨기에령의 콩고군대가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점령하였고 19년 베르사유강화조약으로 독일의 동아프리카는 대부분 영국의 국제연맹위임통치령이 되어 탕가니카라 부르게 의 시작]대전의 특성과 관련해 개전 날짜를 언제로 잡느냐의 문제도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략 4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1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일반적으로는 이 날짜를 개전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2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3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4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등이다.1 의 시점에서는 양국간의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위계승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같은 해 6월 28일 세르비아내에 본거지를 두었던 암살자 그룹에 의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사라예보사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계를 무력으로 타도함으로써 대국의 면목을 유지하려고 했다.그러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흩어져 있는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대동단결을 꾀하려는 범슬라브주의에 바탕을 두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그 해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결과 독일은 러시아와 전투를 시작하였고 러시아·프랑스동맹에 의해 러시아와 긴밀한 군사적 유대관계를 지녔던 프랑스와도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범한 것을 이유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였다.러시아가 총동원을 하게 된 것은 전쟁이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고 독일이 참가해 큰 전쟁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이 판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3국동맹)이 존재했다는 데 기인한다. 원래 이탈리아도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사실상 3국동맹에서 탈퇴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도 처음에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상의 경위를 통해 볼 때 대전 발발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전전(戰前)의 3국동맹과 3국협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전쟁의 확대]대전이 일어난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 유럽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1914년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일본이 수행할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확대군 사이에 50㎞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룩셈부르크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육군참모본부에서 몰트케의 대리자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헨취중령이 자신의 판단으로 제1군과 제2군의 철수를 건의하면서 그 때까지의 진격을 정지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가 자주 논의되었으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2차례나 간섭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고 서부전선의 병력 자체를 약화시킨 데 있었다. 게다가 그 근본에는 독일의 국방예산을 해군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육군을 충실하게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티르피츠가 육성한 독일해군은 단 한 차례 영국함대와 싸웠을 뿐이고, 대부분 킬 등의 군항에 머물러 있었다. 잠수함 이외의 함정은 제해권을 쥐고 있었던 영국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결국 18년 10월 28일에 키일 항구에서 일어난 해군반란은 독일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헨취중령의 경고에 놀란 독일 제2군은 9월 9일에 서둘러 정찰기를 발진시켜 50㎞에 이르는 간격의 설정을 시찰케 하였고 정찰비행을 통해 영국의 대륙 파견군이 이 사이를 중앙돌파하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위험사태를 간단한 제1군과 제2군은 헨취가 진언한 대로 같은 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출은 중앙돌파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전혀 없는 틈을 탄 우연한 진입일 뿐이었다.원래 영국의 참전구실은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범했다는 것이었고, 슐리펜계획에 의해 벨기에의 중립을 짓밟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독일군의 행동이었다. 이처럼 마른 전투에는 뜻밖의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고 이들 요인은 모두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마른전투는 대전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였다.결국 슐리펜계획은 영국·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면에서 앞선 협상국측에 유리했고 미국의 협상국측 가담은 사태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 뒤에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른전투 이상강타하여 독일경제를 큰 혼란으로 빠뜨렸을 때 한층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히틀러의 베르사유체제 타파 구호에 국민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에 의한 나치즘운동은 세계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히틀러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반도의 옛 독일의 이권 및 남양제도의 획득을 1917년의 밀약대로 인정받았다.그러나 1921년 워싱턴희의에서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측에 되돌려주어야만 하였다. 이 산둥문제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1919년 5·4운동을 촉발하였다. 전후에 초래된 국제질서에 대해 라는 불만을 품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개국은 이윽고 지구상의 자원에 대한 재배분을 요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투르크드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패전국에 종속되있던 민족들에 대하여 민족자결이 인정되어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가 각각 독립했고, 세르비아는 주변의 영토를 얻어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그러나 민족자결의 원칙은 영국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투르크의 영토였던 서아시아는 아랍인의 요구가 무시된 채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다.제1차 세계대전 후에 성립된 베르사유체제는 패전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유럽열강의 이해관계 조정에만 주력하여 아시아·아프리카의 약소민족은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전승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결함을 드러내었다.--------------------------------------------------------------------------------http://www.nobelmann.com/제국주의란?近代 帝國主義의 시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통제하는 제국주의는 역사의 기록만큼 오래되었으나,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제국주의의 近代的 表現은 1870년부터이다.19세기 초의 식민지활동의 부진; 18세기 말, 식민지를 발견하려는 유럽인들의 활동은 쇠퇴했는 데 그 이유는;1. 費用; 식민지의 발견과 개척에 든 비용이였다.
    인문/어학| 2003.04.13| 27페이지| 1,000원| 조회(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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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대혁명
    ※ 개요 ※제목: LOST DECADE (문화대혁명)Ⅰ. 머리말1. 문화대혁명 이해의 필요성2. 자료의 설정과 논지전개과정에 대한 설명Ⅱ. 전기호씨 가족 사와 문화대혁명의 과정1. 전기호씨 가족 사2.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1)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사회개조 운동2)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홍위병의 활동3) 전기호 씨가 직접 겪은 홍위병의 활동4) 전기호씨 일가의 문혁 이후 생활과 현재 홍위병에 대한 중국인의 입장5) 문화대혁명의 종결6) 사인방의 숙청과 화국봉 체제의 등장Ⅲ. 문화대혁명의 영향1. 문화대혁명 폐해2. 순수 사회주의의 모순과 중국인의 사고 전환3. 천안문 사태와 파륜궁1) 천안문 사태ⅰ) 천안문사건 전야 대중문화계의 변모ⅱ) 천안문 사건2) 파륜궁3) 천안문 사태와 파륜궁을 통해서 본 중국인민의 정치화Ⅳ. 맺음글★.참고 문헌: 동양의 역사와 문화(한국문화사, 이환 호외 1999년 8월 31일 펴냄)신 중국사(카치글방, 존 킹 페어뱅크)월간조선 2000년 4월 문화대혁명에 관한 내용.백권호 중국경제특강 사이버강의, 아카데미 센터 1997 - 1999중앙일보 세기를 넘어' - 문화대혁명 편http://www.soros.co.kr/soros/series/chosun/seriesadoo60_3.htmhttp://home.donga.ac.kr/~kimjh/wenhua 사진 1, 2, 3 발췌http://overseas.kotel.co.kr/immi/D7.html 뉴스 피플 자료 -참고 자료 1, 2중앙일보 1999. 8. 14. 土 http://gias.snu.ac.kr/echa/tian.htmhttp://kids.kornet.ne.kr/cgi-bin/KIDS/Boardlist?Article=chIna&Num=102&Position=P107LOST DECADE (문화대혁명)신 범 진{) 경희대학교 국제관계지역학과 2학년Ⅰ. 머리말1. 문화대혁명 이해의 필요성새로운 세기를 맞은 2000년도 현 중국은 개혁과 개방에 따른 높은 경제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로 반우파운동(反右波運動){) 반우파운동(反右派運動)이란 1953년에 시작돼 1957년 절정에 달한 정풍운동이다. 중국이 공산주의혁명을 완수했으나 공산당원보다 비공산당원이 유식하고, 무인(武人)보다 문인(文人)이 유식하며 따라서 집권층이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지식인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공산당이 내건 명분은 관료주의, 분리주의, 그 리고 주관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친구나 이웃에게 말을 시켜 속마음을 알아낸 다음 이것 을 구실로 무모한 사람을 희생시킨 것이나 반우파운동은 중국을 ‘만민이 만민을 불신하는’ 불신과 혼란 의 사회로 만든 것이다. -뉴스피플 다시 쓰는 한민족 이 민사 연재 내용 중 발췌.-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시골로 강제이주를 당했으며 58년도부터 73년도까지 정치생명이 없었다.( 정치생명이란 실질적 사회생활의 종식과 같은 말로 해석하고 싶다.) 고등학교때 일제시대의 학교를 다녔다는 죄목으로 연루가 되었다. 가지고 있었던 많은 일본어로 되어있었던 책과 여러 학문분야의 책들은 불살라지고 말았다. 가슴에 개폐와 모자(삼각모, 영화인생에서 볼 수 있었던 고깔모자와 같은.)를 쓰고 투쟁집회에 끌려 다녔다고 한다. 15년동안의 우파 반혁명 자로 몰려 정치억압을 받았던 부친의 영향에 따라 가족과 친지 모두 비슷한 고통을 받았다. 전기호씨 본인도 사회 및 학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결혼은 물론이고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으며 친구들과의 단체활동도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2.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1)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사회개조 운동반우파운동이 더욱 격화되면서 1958년부터 이른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전개된다. 이것은 1958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5개년 계획에 사회주의의 총노선을 집결시켜 국가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운동이다. 대약진의 구호는 농업개조, 도시 수공업개조, 그리고 성시(省市)기업가 개조 등 3개 개조운동이다. 이것으로 12년 내에 중국의 경제를 영국의 수준에 올린다는 것이다. 대약진의 구체적인 운 첫째 주까지 붙은 대자보가 5만 여장, 이를 보러 몰려온 인파만 1백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곧바로 '혁명수행을 위해' 홍위병이 조직됐고, 2개월 만인 8월 18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약 50만명(일부는 1백만 명이라 주장) 의 홍위병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毛澤東 주석의 사열을 받는다. (전기호 씨가 본 경험으로는 그들은 기차를 탈 때도 무임으로 탔으며 과히 청년 및 학생들의 인파는 엄청났으며, 기차지붕에 까지 탔다고 한다.) 이어 전국의 홍위병들은 네 가지 과거(四舊:과거의 사상. 문화. 습관. 풍속) 청산을 부르짖으며, 테러와 파괴를 시작했다. 『 당시 공식적으로 중국의 최고위 직인 국가주석 劉少奇 는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었다' 는 혐의로 홍위병에게 납치돼 폭행 당한 뒤 차가운 감방에 누워 숨졌고, 그의 요리사는 '劉에게 잘못된 음식을 해줘 자본주의병에 걸리게 했다' 는 혐의로 6년간 감금됐다. {그림 흑룡강성 당 간부가 군중 집회에서 공개적인 비판을 받는 장면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수많은 당 간부들이 비판을 받고 투옥되거나 추방되었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였다.http://home.donga.ac.kr/~kimjh/wenhua/photo.htm홍위병은 옛 문화의 청산을 외치며 자금성과 각종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골동품과 보물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시골로 내려가 문맹의 빈농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요받았다. 대학은 모두 폐쇄됐고, 전문가들의 자리를 홍위병들이 차지했기에 공장이나 기업마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중앙일보 세기를 넘어' - 문화대혁명 편에서 자료 참조.)1967년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된다. 임표(林彪), 강청(江淸) 등 이른바 4인 무리에 의하여 사주된 홍위병 학생들이 학교는 물론 정부와 공공기관에 난입해 관리를 체포하거나 살해하고 공문서를 불사르는 대소동을 야기하면서 정부와 당이 마비된다. 홍위병은 관공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공장을 점령, 산업이 마비됐으며 사회유지, 지도자, 지식인 등을 체포, 고문버리라는 것이다. 1967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10년동안 지속된다. 당시 한국은 3차와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순조롭게 추진하고 있을 때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수십 년을 후퇴했으며 이것을 감수하는 인민의 고통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수개월간 홍위병들은 대도시는 물론 지방 구석구석까지 다녔다. 공자의 초상과 불상을 파괴했고, 중국의 전통 복장이나 양복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욕설을 퍼부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반(反)혁명분자'라는 팻말을 목에 걸은 채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발굴중인 명나라 황제 시신은 화형 당했다.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는 종교적인 경지에 이르렀고, 갑자기 권력을 얻은 세력들이 그렇듯 홍위병들 사이에 파벌이 발생했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 내부에도 동요를 가져왔다. 국가주석 유소기와 당서기 등소평(鄧小平)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북경 전역을 뒤덮자 마침내 이들은 '자본주의적 정책'을 자아 비판해야 했다. 1969년 중국은 사실상의 무정부상태로 정치와 경제가 마비상태에 빠졌다. 1968년의 산업생산량은 66년에 비해 12%나 하락했다. 질서를 회복시킬 필요성을 절감한 모택동은 군대의 힘을 이용해 홍위병을 제압하고 학교와 농촌으로 되돌려 보내기에 이른다.4) 전기호씨 일가의 문혁 이후 생활과 현재 홍위병에 대한 중국인의 입장부친은 73년도의 정치해방을 맞았고 15년의 긴 세월 동안 가족과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본인도 80년도 전까지 부친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며, 부친은 94년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난 의문점이 들었다. 그럼 홍위병과의 개인적 문제 즉, 홍위병이 날뛰던 시대가 지나고 다시 평정상태가 와서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떠한 생각이 들었는가? 라는 질문에 예외의 반응을 보였다. 당한 사람 그리고 저지른 사람 모두가 전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였는가? 사회의 일 대적인 사건 이였기 때문에 이해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대륙적 사고일까? 만약 이것이 중국인의 전반적인 생각이었을까? 모택동에 관하여도 이 법률이나 제도적 준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상대적인 것이었으니까. 문혁 당시에는 정상적인 활동조차도 과오가 되가 일쑤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의식에는 이러한 생각이 뿌리깊게 박혔다. 과오를 시인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민 재판(또는 투쟁대회)에서 과오를 시인하는 것은 중국인에게는 곧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공공의 사회적 활동으로 자행되는 상황에서 과오는 곧 사형선고 같은 것이었고, 과오를 부정하는 절대성은 곧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위해가 아닌 자연스러운 관행으로까지 이어졌다.Ⅲ. 문화대혁명의 영향1. 문화대혁명 폐해중국의 전지역을 휩쓸었던 문혁에 대해 전석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중국이 문혁을 겪지 않았었다면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더 성장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현재와 연관을 맺을 때 어떻게 되어 있을 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문혁이 중국인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것은 자명하다. 많은 인민들이 문혁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혁의 영향으로 국가와 인민은 엄청난 좌절과 손실을 입었다. 공산당과 행정부의 여러 제도는 파괴되었으며, 인민생활도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의 결과 과학과 문화 및 교육방면에 피해가 커서 과학기술이 선진국에 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례로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한 재중동포들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 장춘의 광학기술이 세계적이었으며 이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이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광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고대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의 유적들도 크게 파손되었고 전통과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 그것을 회복하려면 3대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나타날 정도로 문혁의 사회적 손실은 엄청났다. 외교적인 방면에서도 건국 초기부터 주은래에 의해 미국과 소련에 맞서 제3세계에 확립했던 중국의 영향력과 그 이미지는 무참하게 하락되었다.2. 순수 사회주의의 모순과 중국인의 사고 전환순수 사회주의의 세상은 가능할다.
    인문/어학| 2003.04.13| 13페이지| 1,000원| 조회(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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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교경영] 세계가전업체의 기업문화 평가A+최고예요
    세계가전업체의 기업문화Ⅰ. 서론1. 다국적 기업 시대와 문화의 의의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바야흐로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세계의 대기업들은 해외시장을 둘러싸고 자신의 시장판도를 확대하고자 단순한 상품수출 뿐만이 아니라 현지에서의 생산, 판매를 통하여 시장에서 승자로 남기를 원한다.기업 생존을 위해 해외진출은 필수조건이며 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타국에서의 기업 운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어느 요소보다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된다. 문화는 가치관을 가치관은 태도를 태도는 행동을 그리고 다시 행동은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는 타국의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문화적 차이가 가져오는 기업활동의 영향은 소비패턴의 차이, 경영 및 생산분야의 효율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상관습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상이한 문화적 환경에서 활동할 때는 문화적 위험에 노출되지만, 이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철저히 관리되어야 한다. 실제로 문화적 위험이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국제기업이 해외사업활동에서 문화적 위험을 줄인다는 문제는 전략적 경영의 차원이나 실제 운영관리의 면에서 모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분석은 거시적 국민문화뿐만 아니라 각 기업의 기업문화에 대해서도 행해져야 할 것이다. 기업문화는 국민문화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기업특유의 여러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기업의 종업원은 국민문화와 기업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음으로 양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국민문화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과 기업문화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복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이에 다음의 본론에서는 각국의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고 홉스테드 모형과 7s 모형을 이용한 세계가전업체의 기업문화 분석을 통하여 각 국에서의 적절한 기업 전략을 제시하도록 하겠다.Ⅱ. 본론1. 홉스테드 모형) 정구현, 국제경영학, 법문사, 1996. 일관성 있는 보상 제도와 인센티브, 경영정보와 의사결정 시스템, 경영계획과 목표설정시스템, 결과측정과 조정ㆍ통제 등 경영 각 분야의 경영관리제도와 절차를 포함한다.(5) 구성원(Staff)기업문화는 기업체 구성원들의 행동을 통하여 실제로 나타난다. 따라서 구성원은 기업문화의 구성요소로서 구성원들의 능력과 전문성, 가치관과 신념, 욕구와 동기, 지각과 태도 그리고 그들의 행동패턴 등을 의미한다.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행동은 기업체가 의도하는 기본가치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있고, 인력구성과 전문성은 기업체가 추구하는 전략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사실이다.(6) 관리기술(Skill)기술도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중요요소로서 각종 기계ㆍ장치와 컴퓨터 등 생산 및 정보처리분야의 하드웨어(hardware)는 물론 이를 사용하는 소프트웨어(software)기술을 포함한다. 그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 대한 동기부여와 행동강화, 갈등관리와 변화관리, 목표관리와 예산관리 등 기업체 경영에 적용되는 관리기술과 기법도 포함된다.(7) 관리스타일(Style)기업문화의 마지막 구성요소는 구성원들을 이끌어 나가는 전반적인 조직관리 스타일로서 구성원들의 행동 조성은 물론 그들간의 상호관계와 조직분위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요소이다. 기업체의 개방적ㆍ참여적ㆍ온정적ㆍ유기적 성격 등은 일상 경영에 적용되는 관리 및 리더쉽 스타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이러한 기업체의 기본성격이 형성된다.이상 파스칼과 피터스 등의 연구를 중심으로 기업문화의 구성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7S라고 불리우는 이들 기업문화 요소는 서로 밀접한 상호연결 관계 하에서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있어서 전체적인 관점 없이 어느 한 요소의 개별적인 분석이 매우 어렵다. 그러나 7S모형은 기업문화를 개념화하고 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3. 삼성전자의 7s 및 호프스테드모형(1) 공유가치고 이병철 회장은 창업주로서 내세운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세 가지 경영이념을 흐트러짐 방침관리를 통합·조화시킨 특유의 책임경영제로서 조직의 목표에 부합되도록 각 계층별로 개인의 업무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개인이 자주적으로 관리·평가하는 제도이다. 매 반기마다 실시하며 결과평가 이외에 과정평가제도를 두어 양자를 결합, 신축성있게 운영하고 있다.2) 주주통신문제도삼성전자는 11만 전 투자자들에게 기업경영성과를 설명하는「주주통신문제도」를 도입했다. 삼성전자가 한해동안의 경영성과를 전 투자자들에게 직접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 11만명에게 기업의 경영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통신문을 내보내는 것이다. 주주통신문은 투명경영을 실천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3) 소사장제도삼성전자는 그 동안 개발·사내벤처 등에 제한적으로 도입했던 소사장제를 영업부문으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소사장은 인력운용. 영업정책. 비용집행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고 일정 한도내에서 여신한도를 전결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4) VIP센터삼성이 표방한 '월드 베스트'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으로 짧아지는 제품주기, 가격하락이 지속되는 시장상황, 그리고 고개의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관련되는 담당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동으로 제품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만들어지었다.5) 지역전문가제도독신자해외파견제도라고도 일컫는 지역전문가제도는 21세기 초일류기업으로 가기 위한 필수조건인 국제적인 안목배양을 목표로 삼성이 의욕적으로, 또 파격적으로 실시하고 있다.6) 판매사 평가제도판매기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매달 온라인을 통해 시험을 봐서 자격(3,2,1급)을 획득하도록 한다. 급수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고 등급자격 유효기간을 정해 이 기간이 지날 경우 다시 자격을 취득하도록 하고 있다.7) 사회봉사 인센티브제사회봉사 인센티브제는 사회에 봉사하는 사원과 그 가족을 포상하는 제도이다.(5) 구성원1) 삼성맨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개척하는 창조정신, 진실되고 바르게 행동하는 도덕정신, 모든 면에서 제일을 추구하는 제일주의, 확실하고 완벽하게 일하는 완전주의력을 기울인다. 마쓰시타 구성원들은 매일 아침 일과시작전에 국기와 사기를 게양하고, 사가를 부르며 가치규약을 암송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쓰시타정신을 체질화시키고 있는 것이다..사업보국 .공명정대 .화친일치 .역투향상 .예절겸양 .순응동화.보은감사구성원들이 이들 가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매우 융통성 있는 정신구조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즉, 전세계에 퍼져 있는 사업집단 구성원들 간에 일치된 기대감을 갖게 할 수 있고, 고도로 조직화 내지는 분권화 된 조직체계에서 운영지침이 무력해지더라도 기업을 지속시켜 나가는 엄청난 힘을 줄 수 있다.(2)경영전략1)마케팅전략마쓰시타 회장은 회사 이름을 상표로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배제하였으며, 유통업계에 있어서도 제조업자 대리점에 의존하는 당시 관행에서 벗어나 소매업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유통경로를 사용하고, 소매업자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밀접한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할부판매제도와 소매상에서의 구매현장 전시 등 미국의 마케팅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상표선전과 판매촉진에 광고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데에도 선두적 역할을 하였다.2)시장점유전략시장점유의 확대는 생산량 증가와 원가의 절감 그리고 이에 따른 가격의 저하를 통하여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제공하려는 그의 이념을 실현시키는 매우 중요한 전략 요소이다.3)추종자전략이는 무엇이든 선두에 나서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마쓰시다 정신을 기반으로 착실히 업무수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선두를 강조하는 기업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쓰시다는 수많은 생산연구실험실을 가지고 있으며 연구개발은 경쟁사의 제품을 분석하여 보다 좋은 제품의 제조방법을 알아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3)조직구조1)분권경영체제1930년대 소규모 단위를 중심으로 분권적 조직구조를 형성하여 시장경쟁력을 높이려 하였다. 마 쓰시타는 사업단위 관리자에게 특정제품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배정하여 그의 업적을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과 같은 조직에 순응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 일본문화의 특징인 화(和)를 가장 강조하고 있고 조직에 충성, 사업을 통한 국가에 충성을 공유가치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집단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다.2) 권력간격- 권력간격이 크다.마쓰시다전기는 연공서열을 바탕으로 하고 조직의 위계질서를 중시한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보다는 조직 및 상사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상하관계가 엄격하다.3) 불확실성 회피- 불확실성의 회피정도가 강하다.엄격한 제도화를 통한 업무와 성과중심주의의 체제가 정립되어 있고 종업원들에게 있어서 일에 대한 열정, 승진 및 경제적 보상이 생활의 질보다 더 선호된다.4) 남성·여성다움- 남성다움이 강하다.제도화된 남녀차별은 없으나 전반적인 기업의 분위기는 전반적인 일본사회의 문화인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다.5. 소니(SONY)의 7s 및 호프스테드모형(1) 공유가치(Shared value)소니의 경영이념은 인간 존중으로서의 사원과 경영인이 회사의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직 내에 창출하는 것만이 성공적인 경영의 토대가 된다고 믿는다. '소니정신'이라는 사훈을 가지고 있다.소니는 선구자요 결코 남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발전을 통해 소니는 전세계에 봉사한다.선구자의 길은 언제나 험난하다. 그러나 고난에도 불구하고 소니인들은 창조적 작업에 참여하는 기쁨과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자랑으로 조화롭게 긴밀히 언제나 단결한다. 소니는 사람의 능력을 존경, 장려하려는 원칙을 지니며 적재적소로서 언제나 그 사람의 장점을 끌어 내주려고 노력하고 그를 믿으며 언제나 그가 그의 능력을 개발시킬 수 있도록 허용한다. 소니의 해외 사업 경영에 관한 기본 법칙은 소니 브랜드를 사용하는 이상 어느 국가에서 생산되든지 동일한 품질이어야 하며 또한 현지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이상 현지인에 의한 기업 운영 체제를 조기에 확립하고 고용기회 증대 및 기술 이전을 통해 현지에 공헌한다는 것이 소니의 해외 사업에 관한 기업 이념으로
    경영/경제| 2001.11.16| 21페이지| 1,000원| 조회(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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