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철학] 인도철학에서 바라본 인과율 평가A좋아요
    -목차-1. 인과율 쓰게 된 동기2. 인과율이란?3. 인과율a.강인과율b.약인과율c.옹호주의,부정주의4. 인도의 인과율의 영향 받은 사람들5. 끝맺는 말.1. 인과율을 쓰게 된 동기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과율은 우리사회에서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집, 학교, 사회 어디를 가나 ‘인’ , ‘과’ 의 법칙에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늘어져 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내가 매일 10시간씩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면, 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과율은 이런 틀 내에서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서 그리고, 동등한 학습 능률에서 10시간씩 공부한다면 예견 된 성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모든 인간은 같지 않기에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게 된다는 문제점을 낳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10시간 공부할 동안 5시간 공부하고도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항상 맞물려가지만 그 원인에 대한 예측 된 결과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결과가 나올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인도인의 길’에서는 인도철학 체계에서 빠질 수 없는 인과율에서 논하고 있다. 인과율에는 강인과론(因中無果論)과 약인과론(因中有果論) 이 있다. 강인과론은 결과는 새로운 실재이며 원인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며 약인과론은 원인안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이다. 앞서 본 10시간 공부한 학생이 A라는 학점을 받았다. 그리고 학기 내 수업시간에는 얼굴도 않 보이고 출석두 거의 10퍼센트 학생이 F라는 성적을 받았다. 이렇게 된다면 약인과론 쪽에 속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10시간씩 공부한 학생은 의외로 B라는 학점을 받고, 전혀 수업시간에도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런 학생이 시험을 잘 봤거나 해서 A+이라는 성적을 받았다고 치자. 이 경우는 누구나 훤히 알 수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 실 생활에선 났다고 보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사트카리야바다,약인과율)', 과는 전혀 새로이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아사트카리야바다,강인과율)'의 두 가지 설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과 과의 직결을 배격하고 그 사이에 조건을 세워 그것을 중시하는 한편 그 과정에도 깊이 배려한다. 이 조건을 '연(緣)'이라고 하고 이들 인과 연과 과의 관련이 불교사상의 근간(根幹)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인은 연을 매개로 하여 과를 맺고, 모든 과는 인에 연관되며 일체의 존재는 이 인과계열 속에 있어 모든 것이 항상 변하며 일체의 우연(偶然)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단멸(斷滅)해야 할 이유가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존속한다고 생각한다. -두산백과사전-3. 인과율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도 철학에서는 강 인과론과 약 인과론으로 나누워 진다. 결과에 있어서 새로운 실재이며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실재의 인과력에 생겨나는 것이 강인과론(인중무과론)이며 이 견해는 나이야-바이쉐이카와 프라바카라 미맘사 체계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다원론적이 형이상학을 띄고 있다. 이에 반하여 약인과론같은 경우는 이미 이전부터 경과는 원인 속에 하나의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혀 새로운 실재가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사물의 전변이다. 약인과론은 주로 상키아 학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이 두 이론은 원인과 결과사이에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a.강(强)인과율강인과율은 니야야-바이쉐이카 철학자들에 의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자아나 세계를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자유의 보장성을 누리기 위해, 원인과 결과는 두개의 상이하고 별개의 실재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원인과 인과 관계 사이의 제 3의 실재에 대해 확연한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무를 톱으로 잘라서 의자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톱 그 자체로 나무를 만들 수 는 없다. 이런 경우는 원인과 결과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인과관계 안에 들어온 두 실체의 경우 어느 하나와도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효능을 갖고 있는 것만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과적 효능을 이용하여 나무는 책상에 대해 효능을 띄고 있지만, 톱은 책상에 대해 효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톱은 책상의 원인이 아니라 나무가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효능에 대한 원인과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새로운 실재가 아니라는 관점을 다들 방식으로 보여주는 문제점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아야야-바이쉐이카 철학자들은 비판을 받게 된다.자이나교도와 불교도는 인과율이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있는 특수한 관계 안에 내재하는 실재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만인 내재적인 힘이 사불들을 서로 연관 지어주는 인과력이라면,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것이거나 아니면 어떤 특정한 때 생성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어떤 특별한 힘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는 영원히 따라올 것이며, 고를 낳는 인과적 사슬을 끊기가 불가능하게 되며, 해탈 또한 불가능하게 된다고 강인과율에 대해 비판을 한다.그렇다면 아야야 학파와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이는 불교도와 상키아에 대해 잠시 그들의 주장을 알아보자. 불교도들은 만일 인과율이 하나의 관계라면 인과율은 오직 두 가지 사물이 관계를 맺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논한다. 여러 가지 실들이 옷감이라는 결과를 산출함에 있어서, 인과율이 실 속에 내재한다고 가정을 해본다. 이 상황에서 만일 실오라기들이 파괴되면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에 대한 원인을 실오라기에서 찾기에는 어렵다. 이미 실오라기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원인 안에 결과가 내재 되어있다고 하는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이런 불교적 논의는 상키야의 논의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원인과 결과에 관계되는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들 사이의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결과와 원인과는 별도로 새로운 실재라면 결과는 연생되기 전에 이미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결과가 산출되기 전 관계, 그 어떤 종유의 관계이든 , 그 관계 자체는 관계 맺어 주는 실재들과는 다른 종류의 실재라는 점을 전제로 두고 있다. 물론 모든 철학이 그러하듯이 정확한 인과관계는 어떠하다라는 명제는 남겨두지 않는 체 물음으로 남겨둔다.b. 약(弱)인과율약인과율은 이미 결과가 원인 안에 선재 한다라는 큰 틀을 전제해 두고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 되지만 이것 또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새로운 존재들과 새로운 사건을 설명하는 일이다. 어제 존재하지 않았으나 오늘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면 이것에 대한 증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 약인과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어제와 오늘에 대한 시간적 흐름에 따른 새롭게 달라지는 결과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어제의 우유가 오늘 상했다면 분명히 결과는 달라진 것이다. 이것에 대해 우유와 상한 우유의 본질은 같은 것이고 단지 외형적인 것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상키야 학파는 원인과 전변을 세계의 참된 변화로 받아드리고 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일반적인 난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이슈와라크리슈나는 가장 최초로 체계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원인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에서 산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결과와 원인 사이에 확정된 연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원인은 변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결과는 원인과 동일한 본성이기 때문이다(상키야 카리카)니야야-바이쉐시카 철학자들은 이 견해를 여러 면에서 반박하고 있다. 첫 번째 논의는, 만일 결과가 원인과 본래 동일하다면 원인만 알면 결과가 연생되기 전에도 결과를 알 수 있어야하는데 왜 그것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것이다. 니야야 철학자들에 따르면 이 사실은 결과란 새로운 실재이고, 결과를 구성하는 원인과 다른 것임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썩은 우유가 연생된다 해도 다른 실재이기지식과 행위의 결과라면, 과연 해탈은 항시 존재하든가 아니면 성취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속박이나 해탈의 생성이 설명될 수 있을까?이 어려운 문제점에서 상키야 철학자들은 이원론의 형이상학으로 해결하기를 시도한다. 그들은 참된 자아, 푸루샤는 결코 속박되지 않으며, 변화의 세계는 영원히 속박되거나 결정되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자아의 영상이 변화하는 마음과 물질의 세계가 갖고 있는 과정에 말려들자, 자아가 이들 과정 안에 묶여버렸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푸루샤는 항시 자유로운 것이며 파괴되어야 할 것은 자아나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자아로 오인하게 했던 무명이다. 이런 무명이 일단 파괴되면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의 자유는 실현된다. 이와 같이 상키야 철학자들은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와는 아주 상이한 종류의 실재이고 영원히 자유로운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자아의 영원한 속박을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할 상태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들은 해탈과 속박이 지식과 행위라는 원인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결과라는 점을 충분히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다른 약 인과율의 철학자들은 속박과 해탈의 원인으로 신을 상정하게 되는 유신론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이렇게 된다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해야 하는 난점이 생길뿐 아니라 속박이 근원이라면 어떻게 자유라는 것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하는 점도 보여줘야 하는 남점을 가지게 된다.상카라의 입장은 상키야 학파의 입장과 조금 설명을 다르게 한다. 상카라는 원인이 본래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결과란 새로운 실재일 수 없다는 상키아의 논의에 샹카라는 강키야의 입장을 같이한다. 만일 결과가 새로운 실재라면, 우리는 존재가 어떻게 무에서 생성할 수 있는가, 또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인과 관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문제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카라는 어떤 것이 무(없는것)에서 나왔다 하거나 어떤 것한다.
    인문/어학| 2003.06.20| 9페이지| 1,000원| 조회(448)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6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0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