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역사적배경과 복식의 특징상고시대의 복식이라 하면 신석기시대에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진출하여여러 부족으로 갈리어 생활하다가 삼국으로 분립될 때까지의 복식을 의미우리나라는 지리적인 관계로 역대를 번갈아가며 외적의 침공을 빈번하게 받았다. 이 때마다 타민족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문화적 특질이 우리의고유한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고조선을 중국으로 부터의 망명객을받아들이고 그 문물을 흡수하여 가장 개명되었던 나라인데, 망명인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서 이만조선이 설립되었다가 한사군의 설치로 멸망하였다. 그 후 부여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계로서 끊임없이 외적과 교섭하다가 위세를 가다듬어 한사군의 주축인 낙랑을 멸망시켜 사백여년간 떨쳤던 한족의 세력이 꺾이었다. 그러나 찬란한 낙랑문화는 중국 본토에서 받아들인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고구려는 계속 중국본토와 접촉이 있어서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해관계를 가지면서 수나라, 당나라와 벅찬 싸움을 치루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문화가 고구려에 흘러 들어왔음은 당연한 추세였다고 한다. 백제는 시조왕때 말갈과의 접촉이 시작되어 오백여년간 계속되었으며, 남북조의 여러나라와도 자주 사절을 교환하고, 위에는 수.당과의 왕래가 빈번하여 대륙문화가 직접 백제에 들어왔고 남조와이 관계는 고구려보다 오히려 깊었다.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이민족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어서 대륙문화의 수입은 가장 늦었으나, 후에 낙랑과 말갈은 물론 중국이 부진, 양, 북제, 진 등과 교류했으며 수.당과도 빈번히 왕래하였다. 선덕여왕 때 분터 약 사십년간은 친당정책을 사용하여 고구려나 백제 이상으로 당의 문화를 들여 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상대사회에 있어서 이민족과의 교섭하에서 직접,간접으로 받아들인 문화 가운데는 그들의 복식구조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친당정책으로 당제관복을 들여와 그대로 습용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우리나라 복식제도는 이중구조를 갖게 되었다. 상고 복식의 기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두르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홀태바지형이다. 그러나 궁고, 광고, 잠방이와 같은 바지도 있었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아랫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다. 두루마기는 무릎 아래 길이이고, 저고리와 같이 선을 둘렀으며, 신은 주로 발목이 긴 화를 착용하였으나 이도 병용하여 신었다. 이와 같이 우리옷의 기본형태는 아한 대성기후에 알맞는 북방 호복 계통의 의복이다. 상고시대의 복식에 이어 나타난 통일신라시대의 복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였다. 관모에 있어서 복두이고, 의복에서 반비, 배당, 그리고 표이다. 상의에는 표의,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이 있었다. 또한,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요대가 있었고, 당시ㅡ이 버선인 말과 신목이 있는 신발로서의 화, 신 운두가 낮은 신발인 이, 그리고 슈,당의 육합화에서 모방한 화대가 있었으며, 표는 여인들이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길게 드리운 것으로 일종의 목도리이다.저고리저고리는 유,단의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위해라고 하였으며, 유는 겹저고리를 말하고 삼은 홀저고리를 말한다. 삼국시대이전의 저고리는 고규려 고분벽화에서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있고,신라의 기마인물도와 백제국사의 그림에서 각국의 단편적인 저고리를 볼 수 있다. 삼국의 저고리는 형태면에서 남녀가 비슷하며, 또한 색깔과 문양이 다양하고 대체로 왼쪽 여밈에다 통소매이다. 저고리 길이도 엉덩이 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는데 노동복으로는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소매에는 긴소매, 좁은소매, 넓은소매등이 있고, 저고리의 여미는 방법은 즙안형에 있는 고분벽화의 인물들을 보면 왼쪽 여밈이 25명, 오른쪽 여밈이 16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사신총, 쌍영총, 개바총의 벽화에서 주로 오른쪽 여밈이 많이 나타나는 벽화과정을 볼 수 있다.남자저고리남자의 저고리는 앞단, 밑단, 소매끈에 선이 있는 삼국시대 기본형 저고리이다. 수렵도 저고리와 유사한 저고리로 앞단의나는데, 귀부인의 예복 저고리로 길이가 길다. 바탕은 짙은 색이고 앞단과 소매 끝단에 댄 선은 다소 좁은 편이다.바지고대의 바지는 회화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남녀 모두 바지를 입었다. 바지는 넓고 긴 바지와 좁고 짧은 바지, 바지단에 장식선을 댄 것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남자바지고분벽화를 보면 시중드는 하인은 좁고 밑단에 선이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의 바지는 품이 넓고 길다. 그리고 주인공은 화려한 문양의 넓고 긴 바지를 입고 바지 밑단을 매였다. 떠ㅗ 백제국사의 바지는 넓으면서도 선으로 장식하고 있어서, 바지 착용의 여러 가지 예를 복 수 있다. 그외에는 좁은 바지에 비가단을 맨 것과 좁고 짧은 잠방이형의 바지도 볼 수 있다.여자바지여자바지는 대개 치마 속에 입는데, 넓은 바지의 밑단을 맨 것으로 생각된다. 또 바지차림으로 겉옷을 입고 있는 여자도 있다. 이와 같이 여자가 바지를 착용하고 외출하던 습속은 근대까지도 남아 있다.치마삼국시대 이전에 치마에 대해 사용한 용어로는 군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상이라는 용어를 볼 수 있고, 표상과 내상으로 구분되어 현재의 치마와 같은 의미로 상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마에 대한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인들이 착용하고 있는 것가르 볼 수 있다. 주름이 많이 잡힌 긴 치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소매와 옷길이가 길고 선을 두른 상의와 함께 입혀졌다. 치마 밑단에 선을 두른 예목용 치마로서, 이와 같이 밑단에 장식선가르 댄 치마는 안악 2호분벽화, 무용총 벽화의 통구 12호분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다. 귀부인의 색동치마로서 그 화려한 면모에 있어서도 심히 빼어나는 것으로 현재는 전하지 않는 양식이다.머리모양과 관모삼국시대의 머리 모양은, 남자의 상투 뿐이었지만, 여자는얹은머리,쪽진머리,푼기명머리,묶은 증발머머리 등이 있었고,미혼 남녀는 쌍계사총으로 쌍상투와 댕기로 맨 머리묶음,변발 등의 양식이 있었다. 관도는 머리에 써서 옷차림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전총사회에 있어서의른 한가지는 뒤부분이 삼각형 한 가닥으로 앞의 반대편으로 되고 운두가 뾰족한 것이다.건귁하나의 수건과 같은 것으로 남녀가 같이 썼으며,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싸올리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주로 부인의 관모로 착용되었다.금관경주, 양산, 부여, 평양등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금관의 기본적인 구조는 대모양의 엷은 황금판을 새겨서 무늬를 나타낸 후 , 그 위에 영락이나 곡옥을 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화려한 모양의 대는 머리에 맞는 둥글기로 조작되고, 이를 외관이라 한다. 그 속에는 새깃의 형태를 단 절풍형의 내관이 있다. 이 내관에는 새깃형의 장식이 없는 금관도 잇고, 외관과 내관이 같이 만들어진 것, 영락이나 곡옥장식이 없는 것도 있다.화, 이우리나라 상대의 신은 그 형태상으로 보아 화와 이로 나타난다. 화는 목이 길고 방한, 방침에 적당한 무풍적인 북방족계의 신이다. 이는 목이 짧은 신발을말하며 남방족이 신었다.고려시대역사적배경과 복식의 특징통일신라시대 말엽에 이르러 실정과 내분으로 인하여 후삼국의 분열시대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 궁예의 태봉이 가장 세력이 강대하여 견훤의 후백제와 서로다투어 세력을 넓혀갔으나, 차츰 교만해지면서 악정을 하게 욈으로써 왕건이 왕을 추대되고 국호를 고려하 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겨 나라를 이룩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신라의 경내에서 일어났고 신라의 문화를 토대로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신라의 후계자가 아니라 고구려의 부흥자로 자처함으로써 고려의 역사는 북방민족과 끊임없이 싸우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하여 465년 존립하는 사이에 복식구조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즉, 통일신라시대에 당에게 관복을 청하여 사여받아온 그 영향을 철저하게 이어받은 계급은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이며 민서 계급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려는 외국과의 관계에서 오대.송과 친교를 맺었으나. 이것은 그 문화를 흡수하기위한 평화적은 것이었으며 만주의 거란, 금, 모고로 인하여 대립해야 했고, 몽고가 동방을 거치게 되었다. 특히 원의 복속시대는 자주성과 셋째는 원의 쇠망으로 인하여 명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매적인 관인계급에 있어서의 제도상 변천한 것이었고 , 피지배계급인 서민층에 있어서는 상대사회의 복식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우리 고유의 복식을 그대로 답습해왔던 것이다.남자의 복식고려는 우리 고유의 복식 위에 당,송,거란, 원, 명제 복식의 영향으로 관복에 많은 변천을 가져왔으며, 에서 보면 광종 11년 3월에 백관의 사색공복제도를 정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백관의공복을 네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제정한 거승로서 원윤 이상은 자삼, 중단경 이상은 단삼, 도항경이상은 비삼, 수주부이상은 녹삼이었다. 이로부터 고려는 22대 강종 원년까지 거란, 송.요.금등의 관복을 따르고 있다.왕복왕복에는 상복, 공복, 조복,연복,제복이 있다. 상복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오사고보를 쓰고, 금벽을 수놓은 담황색의 소매가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늑건을 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오사고목는 중국 천자의 조사절상건은 복두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시대의익선관이 되었다고 한다. 공복으로는 자라공복을 입고 상아홀과 옥대를 갖춘다. 조복은 평상복 위에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연복은 조건에 백저포를 입어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고유 복식을 입었다고 한다. 제복으로는 구류면,구장복에 옥규를 잡는다. 구장복은 면복인데, 이것은 나라의 제향, 가례 등 특수 의식에 입는 법복으로 면류관과 거기에 따르는 복식의 총칭이다. 의복만을 말할 때는 곤의, 현의라 하며, 중국 천자의면복은 십이류면,십이장문을 수 놓은 심이장복이다. 제복의 구성을 보면 면류관,면복, 상,백사중단,페슬,수,혁대,옥패,대대, 흰버선,붉은신이다. 그런데, 제례인 경우에는 방심곡력을 한다.또한 고려 말 공민왕 19년 5월에는 명의 복제의 영향으로부터 자주성을 모색해 보고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심이류면, 십이장복을 입었으며, 조복에도 중국천자와 같은 색의 원유관에 강사포,홍상, 백사중단, 강사페슬,백가대,방심곡령, 혹혁대, 흰추었다.
1. 머 리 말원효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지 1백여년 만에 나타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였다.그의 교학의 깊은 연구와 정리로써 불교계와 학계에 새 기운을 조성하였다. 그의경론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의 모든 분야에 미쳤고 舊譯은 물론 현장의 新譯諸論까지 두루 討究하여 총 100여 부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一宗一派에 구애됨이 없이 "萬法이 一佛乘에 총섭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大海 중에일체 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여 大·小乘, 性·相, 頓·漸의상호 대립적인 교의를 다 융회하여 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하였다.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진리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다른 諍論들을 和會시킨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和諍 바로 그것이라 할 수있다. 이는 중국의 불교가 一經一論만을 주로 하여 기타의 경론을 모두 그 일경일론의 사상을 천명, 수립하는 보조적 자료로만 채용하는 연구태도와는 근본적으로다른 것이며, 원효의 和諍사상이야말로 저러한 종파의식을 떠난 관용적이고 포괄적이며 공평무사한 태도라 할 수 있다.원효의 불교 이론면에서의 화쟁사상은 실생활면에서 染淨無二, 眞俗一如를 주장하면서 불교를 생활화하는 불교대중화운동으로 전개된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이러한 때에 惠空·惠宿·大安 등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킴으로써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 역시 이들의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반하여, 지방의 촌락, 街巷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無 박을 두드리고 의"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실천한 위대한 실천행동가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또한 그는 당시 신라사회에서 위로는 귀족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층의 노비에이르기까지 널리 성행된 彌陀淨土신앙에 대하여 미타정토인 극락에의 왕생이 미륵정토인 도솔천에의 왕생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함으로써 미타신앙을 권장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正定聚를 發心住 이상의 수행단계에 있는 중생으로 봄으로써 중국 慧遠의 10행 보다 낮추었다. 여기에서 서민들에게 극락왕생에의 희망을 불어넣어 불법에로 이끌어 보려는 그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또 그가 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착한 행실이 극락왕생을 위하여 닦아야 할 행이 되는 것이라고한 데서도 그의 불교생활화운동을 볼 수 있는 것이다.2. 생 애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현재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押梁郡 佛地村의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의 아명은 誓幢인데 幢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誓幢은'새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창황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에서는 그의 나이 10여 세에 벌써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여 나중에 불법의 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학문범위는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 뿐만아니라 나 등 儒家書와 道家書에도 상당히 밝았음이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려 대각국사가 남긴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땅인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간 普德和尙의 講下에서 과 등을배웠다고 하며, 에는 원효가 반고사에 있을 때 영취산 혁목암의 浪智가 그로 하여금 과 을 쓰게 하였으므로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하였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의 釋惠空傳에는 원효가 혜공에게 問學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즉, 당대의 神僧 혜공이 그 만년 항사사에 있을 때 원효가 諸經 疏를 찬술하면서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였다는 것이다.원효는 34세에 의상과 함께 唐의 현장과 규기에서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45세에 두 번째로 역시 의상과 함꼐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항구로 가는 도중 비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토굴에서 자게되었다. 아침에 깨어 토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고도 부득이 또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心法을 크게 깨치게 되었다. "즉,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의상 혼자 배를 타고 당으로 들어가고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고 돌아와 이후 저술과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오늘날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원효의 저서는 대략 100여 종 240여 권으로 알려져있고 그 연구범위도 小·大乘, 經·律·論 등 거의 모든 부분을 다 망라하고 있어그야말로 초인간적인 學解와 저술활동이라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와 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견해는 중국의 석학들마저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아깝게도 현존하고 잇는 것은 19부 22권 뿐이며 그나마도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그의 저술 목록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잇는 것은 唯識系와 律學 부문 그리고 起信論 관계이며, 현존하는 것 중 중요한 것 몇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권, 1권, 1권, 1권, 3권, 2권, 1권, 제2권, , 제3권, 斷片.에 의하면 원효는 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후 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小姓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舞弄하는 큰 박을 본따 無 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서민대중의 교화에나선 것은 입당 포기 후 심법을 깨달은 후이며, 요석공주와의 실계 후로 보아야 할것이다.또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 것은 실계하였기 때문에 속죄의 한 방법으로서 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街巷에서 大醉歌舞한 것이나, 대안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銅鉢을 치면서 "大安, 大安"을 외친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대중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3. 사 상원효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利他를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 정신을 구현하는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여기에서는 를 통하여 眞俗不二의 사상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中觀派와瑜伽派의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迷沔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한편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染沔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眞俗一如'라는 불타의 가르침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을 접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 내지 살므이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에 대하여 무려 7종의 연구서를 냈고, 특히 그의 는 일찍부터 중국 불교학계에서까지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에 대하여는 혜원, 원효, 법장의 주석서를 三大疏로 지칭하고 있으나혜원의 것은 僞撰이라는 설과 함께 질로나 양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못한다. 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분과와 어구해석에 있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원효의 야말로 최고의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원효는 그의 에서 우선 의 성격을면을 주로 밝혀 온 유식사상이잘 조화를 이루어 眞俗不二의 불타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본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서로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도 부응하는 것이다.원효를 그대로 답습한 법장은 이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을'如來藏緣起宗'이라 판석하였다. 원래 여래장사상은 중국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남도파들에 의하여 성하게 연구되어 왔던 것으로,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은 이들지론종 남도파의 영향에 의하여 을 여래장연기종설이라 판정한 것이다.또한 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법장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을 여래장연기종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는 법장설에서 일보 나아가 여래장연기종이 역사상 실재했다고까지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한자를모르는 인도의 불교학자나 구미의 학자들은 여래장연기종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며,또 일부 일본 학자 중에는 중국 화엄가들의 이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둘째, 원효는 근본무명이 진여, 즉 인간의 청정한 마음을 훈습하여 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난 無明業相, 이 무명업상, 즉 극미한 動念에 의하여 所緣境相을 볼 수있게 되는 轉相, 또 이 전상에 의하여 경계심을 일으키는 現相 등 세가지 미세한마음인 三細識을 아라야식位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효의 이 三細·아라야식설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의 논술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법장에 의하여 그대로 답습되었고 그 뒤 일본 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찬·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터이다. 이 三細를 아라야식이라고한 이유는 무엇이며 또 이에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원효는 의 기본 구조인 一心二門에 의하여 의 성격을 중관·유식의 지양과 조화라 단정하였고, 이것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覺과 不覺의 二義의 和合識인 아라야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和合識으로서의 아라야식에三細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한 것은 유식가에서의 아라야식이 막연히 잠재심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의을
나의 어릴적 잊지못할 사건에 대한 이야기It was a story about an awful experience of my childhood. I couldn't have completely gotten it over yet. During my elementary years, I used to go to my grandpa's home every summer. Grandpa was very generous even though I made some trouble.And during vacation I really liked to stay my grandpa's home because he told me great old story. sometimes grandpa and I go fishing.It happened on a summer day, when I was walking along a yet-unpaved path to go fishing.
영어영문학과 전 공 영목 차Ⅰ. 머리말Ⅱ. 훈민정음의 제자원리1.자음(초성)자의 제자원리2.모음(중성)자의 제자원리3.글자의 운용4.사성점(四聲點)Ⅲ.한글의 세계적 위상1.세종대왕 상(賞)2.미국 과학전문잡지 디스커버호Ⅳ. 맺음말Ⅰ.머리말오늘날 우리는 한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된 한글사용으로 우리의 민족 얼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의 이유는 문자 외에 여러 전달매체의 발달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한글의 과학적 의미와 철학적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함에도 이유가 있는 듯 하다.1940년 7월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때의 원본인 해례본이 나타나게 되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 구구한 학설들이 난무하였다.(음양오행설. 태극설, 한자의 고전설, 몽고 및 싼스크리스트 문자에 근거를 둔 설 등) 그러나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해례(解例)가 붙은 ,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 때의 원본이 나타나게 되자 훈민정음의 제작 원리는 지극히 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허웅,『국어와 민족문화』(교양국어총서,1997) 따라서 여기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있는 제자원리를 바탕으로 자모들이 만들어진 원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고 한글이 세계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겠다. 그러므로 자모들의 만들어진 원리와 우리 글의 위상을 고찰하므로 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얼에 대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Ⅱ.훈민정음의 제자원리훈민정음 제자원리는 해례편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례편은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 정인지의 꼬리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정음의 제자원리를 알기에는 제자해만으로 충분히 가능하였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창제 내면적인 논리라 생각된다. 아마 동양철학적이며 과학적인 그들의 논리에 놀랄 것이다. 음성 기관의 정밀한 관찰은 말할 것도 없고, 소리의 성질에 대한 정확한 관찰도 놀라울 정도이다. 그럼 이제 그들의 제자원리를 통해 알아보자.1.자음자(초성자)의 원리초성자는 모두 17자이다. 어금닛소릿자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떴고, 혓소릿자 ㄴ은 혀가 웃잇몸에 붙는 꼴을 본떴으며,입술소릿자 ㅁ은 입의 모양을 본떴고, 잇소릿자 ㅅ은 이전체의 모양을 본떴으며, 목구멍소릿자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떴다.ㅋ은 ㄱ에 비하여, 소리가 남이 조금 세므로 획수를 더하였는데, ㄴ에서 ㄷ, ㄷ에서 ㅌ, ㅌ에서 ㅁ, ㅁ에서 ㅂ, ㅂ에서 ㅍ, ㅅ에서 ㅈ, ㅈ에서 ㅊ, ㅇ에서 가, 가에서 ㅎ으로, 그것이 소리에 따라 획수를 더하는 뜻은 모두 한가지이다. 그러나 가은 다르다(소리에 따라 획수를 더한 것이 아니란 뜻). 반혓소리자 ㄹ과, 반잇소릿자 가도 또한 혀와 이의 모양을 본떴는데, 그 체형은 다르게 하였으나, 획수를 더한 뜻은 거기에 없다.오음(五音)상형(象形)기본자가획자이 체아음(牙音)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모양ㄱㅋ가설음(舌音)혀가 윗잇몸에 닫는 모양ㄴㄷ,ㅌㄹ순음(脣音)입[口]의 모양ㅁㅂ,ㅍ치음(齒音)이[齒]의 모양ㅅㅈ,ㅊ가후음(喉音)목구멍[喉]의 모양ㅇ가,ㅎ또 말소리를 청탁(淸濁)으로 정음은 분류한다.ㄱㄷㅂㅈㅅ가은 전청(全淸)이다 ㅋㅌㅍㅊㅎ은 차청(次淸)이다. ㄲㄸㅃㅉㅆ가은 전탁(全濁)이다. 가ㄴㅁㅇㄹ가은 불청불탁(不聽不濁)이다. ㄴㅁㅇ은, 그 소리가 가장 약하므로, 차례는 뒤에 놓여 있으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듦에 있어서는 , 이것을 근원으로 삼았고, ㅅㅈ은 둘다 전청이나 ㅅ이 ㅈ에비하여 소리가 약하므로, 이것을 글자 짓는 근원으로 삼았다.그런데 오직 어금닛소리의 가은, 그 소리가 가장 약하기는 하나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소리 기운이 코로 나오면서도, 그 소리가 ㅇ소리와 서로 비슷하여서, 운서에서 가과 ㅇ은 많이 서로 섞이어 쓰이므로, 이제 이 글자 또한 목구멍에서 본을 떴으며, 어금닛소리 글자 만듦의 근원으로 삼지는 않았다.대개, 목구멍은 물(水:물은 오행의 하나이다)에 소속되고, 어금니는 나무에 소속되는 것이나, 가이 어금닛소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ㅇ과 서로 비슷함은, 이는 흡사 나무의 움이 물에서 나서 부드럽고 연약하여, 오히려 물기가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다. ㄱ은 나무가 바탕을 이룬 것이오, ㅋ은 나무가 성히 자란 것이며, ㄲ은 나무가 나이 들어 씩씩하게 된 것이므로, 이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금니에서 본을 떴다.전청은 나란히 쓰면 전탁이 되는데, 그것은 전청의 소리가 엉기면 전탁(=된소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만, 목구멍소리만은 차청을 나란히 써야 전탁이 되는 것은, 대개 가은 소리가 깊어서 그것은 엉기게 하지 못하는데, ㅎ은 에 비하여 소리가 얕아서 엉기어서 전탁이 되기 때문이다. ㅇ을 입술소리의 아래에 이어 쓰면 입술 가벼운 소리가 되는 것은, 가벼운 소리는 입술은 조금 닫히며,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가 그 양이 많기 때문이다.조음위치\청탁全淸[예사소리]次淸[거센소리]全濁[된소리]不淸不濁[울림소리]어금닛소리(牙音)ㄱㅋㄲ가혓소리(舌音)ㄷㅌㄸㄴ입술소리(脣音)ㅂㅍㅃㅁ잇소리(齒音)ㅈ,ㅅㅊㅉ,ㅆ목구멍소리(喉音)가ㅎ가ㅇ반혓소리(半舌音)ㄹ반잇소리(半齒音)가2.모음자(중성자)의 원리중성은 모두 11자이다. 모음자 역시 근본원리는 상형 자이다. 다만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뜬 모음과는 달리 ㆍ,ㅡ,ㅣ는 天. 地. 人 의 모습을 본떠 만들진 것이 큰 특징이다.ㆍ 는 혀를 옴츠려서 조음하며 소리가 깊으니 ㆍ글자의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다.ㅡ는 혀는 조금 옴츠러지고 소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 이는 땅이 다음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모양이 편편함은 땅을 본떴다.ㅣ는 혀는 옴츠러지지 아니하고 소리는 얕으니, 사람이 세 번째 생겨났기 때문이다. 모양이 곧추 서 있음은 사람을 본떴다.ㅏ는 소리남이 ·와 같으나 입이 펴지고, 그 꼴은 ㅣ와 ·가 어울려서 이루어진 것인데, 하늘이나 땅의 모든 작용이 사물에서 피어나지만, 사람을 기다려서 마침내 이루어짐을 취한 것이다.ㅓ는 소리남이 ㅡ와 같으나 입이 펴지며, 그 꼴은 ·와 ㅣ가 어울려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또한 천지의 모든 작용이 천지의 모든 사물에서 피어나지만, 사람을 기다려서 마침내 이루어짐을 취한 것이다.ㅗ는 소리남이 ·와 같으나 입이 오므려지는 데, 그 꼴은 ·와 ㅡ가 어울려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사귄다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ㅜ는 ㅡ와 같되 입이 오므려지고 그 모양은 ㅡ와ㆍ를 합하여 이룬 것이니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사귄다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ㅢ는 ㅡ와 같되 입이 벌어지고 그 모양은 ㆍ와 ㅣ가 합하여 이룬 것이니 천지의 작용이 사물에 나타내되 사람을 기다린 바 이룬 뜻을 취한 것이다.ㅛ는 ㅗ와 더불어 ㅣ에서 일어나고 ㅑ는 ㅏ와 같되 ㅣ에서 일어나고 ㅠ는 ㅜ와 같되 ㅣ에서 일어나고 ㅕ는 ㅢ와 같되 ㅣ에서 일어난 것이다.ㆍ가 여덟 소리(ㅗㅏㅜㅓㅛㅑㅠㅕ를 가리킴)다 이어짐은 양이 음을 거느리면서 온갖 사물에 두루 미치는 것(이치)과 같다. 그리고 ㅛㅑ ㅠㅕ가 모두사람을 겸한 것은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써 음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니 하늘, 땅, 사람을 본떠서 삼재의 법칙이 갖추어져 있다.3.글자의 운용(1)연서(連書:이어쓰기) : 입술소리 'ㅂ, ㅍ, ㅃ, ㅁ'아래에 'ㅇ'을 이어쓰면 입술가벼운소리 [순경음(脣輕音)] '가,ㅹ,(2)병서( 書:나란히쓰기) : 초성이나 종성을 합칠 때에는 'ㄲ, ㄸ, ㅴ, 가'와 같이 가로로 나란히 쓰라는 규정①각자 병서(各自 書) : 같은 자음을 나란히 쓰는 법(예)ㄲ, ㄸ, ㅃ, ㅉ, ㅆ, 가, ㆀ, ㅥ등②합용 병서(合用 書) : 서로 다른 자음을 나란히 쓰는 법(예)ㄳ,ㄵ,ㄶ,ㄼ,가등(3)부서(附書:붙여쓰기) : 자음에 모음을 붙이는 방법①不書(초성+·,ㅡ,ㅗ,ㅜ,ㅛ,ㅠ) (예) 구룸②右書(초성+ㅣ,ㅏ, ㅓ, ㅑ, ㅕ} (예)나라, 시내(4)성음(成音:소리이루기} : 모든 글자는 반드시 합해져야 소리를 이룰 수 있다는 규정①초성+중성+종성⇒성음 (예)ㄱ+ㅜ+ㄴ=군②초성+중성⇒성음(순수 국어의 경우) (예)ㄴ+ㅏ=나4.사성점(四聲點)(1)소리의 고저(高低)를 나타내는 것으로 글자의 왼쪽에 점으로 표시했다. 방점(傍點) 또는 좌가점(左加點)이라고도 한다.(2)성조(聲調)의 종류와 쓰임성 조방점성질특징용례평성(平聲)무점안이화(安而和)가장 낮은 소리활 [弓],쇼[牛]상성(上聲)2점화이거(和而擧)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소리:돌[石], :말[言]거성(去聲)1점거이장(擧而壯)가장 높은 소리·갈[刀]입성(入聲)무점,1점,2점촉이색(促而塞)끝을 빨리 닫는 소리성조(聲調)는 중세 국어와 근대 국어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다. 15세기의 국어에는 저조(低調→평성)와 고조(高調→거성) 그리고 이들의 병치( 書→상성)가 있었는데 이것을 각각 무점, 1점, 2점으로 표기하도록 한 것이다. 현대 국어에서 평성과 거성은 단음(短音)으로 변하고, 상성은 장음(長音)으로 변했다.Ⅲ.한글의 세계적 위상1. 세종대왕 상(賞)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과학-문화 기구)는 1989년 6월 21일 세종대왕상을 재정했다. 우리 나라는 비교적 문맹률이 낮은 편이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도 문맹자가 매우 많다. 선진국에도 예상외로 문맹자가 많다. 유네스코는 지구촌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이 상을 제정했다. 매년 문맹 퇴치를 위해 가장 노력한 단체나 개인을 선정하여 3만 달러의 상금과 함께 이 상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상을 재정해 놓고 보니 그 상에 붙일 마땅한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으로 이름을 정하고 시상일도 한글날인 10월 9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