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국사 왜곡한민족 역사 중 가장 자랑스러운 시기로 인식되고 있는 고구려 역사가 통째로 왜곡될 위기에 처했다. 지금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책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 동북지방(만주지역)의 역사와 제반 현상에 대한 연구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사를 비롯해 고조선사와 발해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어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고구려사를 일방적으로 중국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한편 고구려의 활동무대였던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 고유영토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나아가 고조선사도 인정하지 않고, 발해사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최근 중국의 역사학자들과 정부까지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흡수하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우리 고대사 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경우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에 불과하고, 공간적으로는 한반도 대동강 이남 지방으로 축소될 가능성마저 있다. 고구려 역사는 한국의 역사이다.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둘러싼 왜곡실태, 왜곡의도, 이에 따른 우리의 대책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1. 중국(1) 고구려 역사 왜곡실태중국 학자들의 고구려 연구는 한국역사의 일부 또는 한·중 공동의 역사로 인정받던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로 완전 편입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은 지안시를 도읍으로 하던 시기의 고구려사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의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라는 그들의 종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고구려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고조선의 역사도 중국인에 의한 식민정권으로 파악하고, 발해사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여 모두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를 설립한 민족을 한민족과 분리시켜야 하는데 중국 학자들은 예맥족과 한민족의 를 갖는 중국 지방 정권 정도로 추락하게 되고, 한국사와의 연관성이 사라지게 된다.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므로 민족 중심의 역사 기술이 아닌, 현재 중국의 영토를 중심으로 역사 기술을 해왔기 때문에 고구려가 현재 중국의 국경 내에서 건국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중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상황을 두고 중국 학자들은 "현재의 중국 영토 바깥으로 고구려사 중심이 옮겨졌지만, 여전히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 학자들은 고조선 이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한민족의 역사적 근거는 대동강 이남에 국한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벌어진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한다"는 그들의 역사 기술을 원칙을 깨뜨리면서, 중국의 역사 범위를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이 대부분 한족에 흡수됐다"며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정당화하고 있다북한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2년 유네스코 총회에 평양의 고구려 벽화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 했지만 접근성과 보존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국이 이의를 제기해 실패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북한 지역의 고구려 유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것을 막은 것은 중국 국경 내에 있는 고구려 문화유적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고구려 유적은 중국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인 받으려는 의도로 보이고 있다.(2) 중국이 고구려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유?1 문화적 요인 : 현재 그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 유적은 높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물이 많 다.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화 하게 될 경우,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 뒤에 발생한 백제 및 신라 의 문화에 있어서도 중국의 문화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고대 3국 문화 중 가장 먼저 발달 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먼저 중국화 할 경우 한국의 고대 역사를 모두 중국화 하기가 충분히 가능할 적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3 정치적 요인 :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될 경우 영향력이 커질 것이며 많은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중국 당국 측의 노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통일이 된다면 독립운동과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중국 만주로 가서 살게된 많은 동포들을 거 두어 들일 것이며, 중국에 살고있는 많은 동포들도 한국국적을 원할 것이며, 고구려의 삶의 터전이자 지금 우리의 삶의 터전인 만주와 연변지역의 영토를 우리에게 상당부분 넘겨달라고 요구 할 것을 대 비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킬려고 한다.또한 통일이 되면 세계는 남과 북을 주목할 것이고 간도영유권 문제에 밀려 중국은 간도를 넘겨줘 야 할 상황에 놓이며, 계속된 중국 동포들의 독립요구가 지속된다면 어쩔 수 없이 중국정부도 중국 내 조선족 동포들에게 자치권과 분리독립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렇게 되면 우리는 중국동포들이 사후에 더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주권을 제공하고 경제적인 지 원을 해주는 대신에 중국동포들이 중국정부로 부터 돌려받은 간도 및 만주 연변 지역의 땅을 반환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로 한정되어 있는 영토가 더욱 넓어질 것이며 인구도 늘어남에 따라 중국의 입지가 조금이나마 흔들리게될 가능성이 있기에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에 대해 예민 하게 대처하고 있다.4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중국의 동북지방의 주민들 사이에는 한국열풍이 불고 북한의 상 황이 유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중국의 입장에서는 통일 한국이 되기 전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있다.2. 한국(1) 한국의 입장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농경을 영위하던 예맥족과 한족을 근간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서 다양한 정치체를 이루다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으로 정립되었고, 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고려로 통합되었다.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중상실할 위험이 높다.역사는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서술해야 한다. 하지만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역사 왜곡은 역사를 꿰맞춰 들어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한국사의 주요 무대인 압록강변에서 태동해 한족 세력을 몰아내며 건국한 고구려의 정체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세자책봉, 공물 제공 등은 각 시기 국제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중국왕조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은 백제와 신라도 중국사에 포함돼야 함으로써 중국학계의 주장은 대단한 억지라고 보고 있다.기원전 3, 4세기경 고구려 영토에서 나타나는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곽을 쌓는 기술도 완전히 달랐다. 한족과 한민족의 조상은 돌을 다루는 기술 자체가 달랐으며 예맥부족은 일찍부터 돌로 무덤을 조영하였는데 고구려인들도 적석총을 조영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중국이 문제삼고 있는 시기 중 하나인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고고학적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한국고대사학회 학술회의에서 고고학적으로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석묘와 비파형동검문화등 동북지역의 독자적 문화내용에 중국학계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중국문화와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2) 우리가 고구려역사를 지켜야 하는 이유?1 고구려사는 한국의 고대사와 한국의 고대미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고대 문화 중에 가장 먼저 발달한 형태의 고구려 문화는 세계 문명이 보편적으로 호방함과 역동성, 열정과 패기의 성격이 짙은 문화가 발달한 후 작고 섬세한, 귀족적인 분위기의 문화가 발달 한 과정을 한국내의 역사에도 적용이 가능케 해 준다. 곧, 한반도 내에 있어 우리에게 익숙했던 백제 와 신라의 섬세함과 온유함, 부드러움의 미학이 어우러진 고대의 문화와 역사와는 또 대조적으로, 그 보다 앞선 시대의 열정과 패기, 호방함과 한 역사와 문화 전통의 계승은 우리나라를 홍보함은 물론, 한 국의 문화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지킴과 동시에 우리의 문화 산업을 발 전시키기 위해, 또한 중국과의 정상적인 외교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야 할 것이다.3. 대책방법1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에서 중국 지안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막는 것이다. 중국 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마치 중국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북한이 신청한 평양의 고구려 벽화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 도록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고있다. 북한 관광도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남·북 공조를 통해 고구려 유적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도록 협의하고, 보존 작업에 도움을 줘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도 록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2 시민에 대한 홍보 성격을 띤 운동을 전개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관심이 지속되도록 하며, 그를 통해 정부에 실천적 대응을 촉구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고구려사 왜곡을 위해 수백억 단위 의 돈을 쓰고 있지만, 우리는 억 단위의 돈도 쓰고 있지 않으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지속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만들어져서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또한 이런 관심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도록 후속 작업을 하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한다든가, 역사왜곡실태를 주제로 한 행사를 개최하여 여론과 관심의 유지에 이바지 해야할 것이다.3 IT 강국의 이점을 활용하여 고구려사와 관련된 논문을 해마다 수십∼수백 편을 쏟아내고 있는 중국 의 학술적 인해전술과 물량공세에 대해 국제화와 정보화.
Ⅰ. 통일을 해{ 남ㆍ북의 통일야 하는 이유1. 민족사적 측면우리 민족은 5천년 역사를 이어온 단일민족이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강대국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분단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민족과 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채 50 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분단 현실은 역사적 정통성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이기 때문에 50년 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재창조를 통해서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2. 경제적 측면1 20∼30년 후에는 중국이 세계 제일의 GNP 대국이 될 것이라 예측한다. 러시아 역시 전환기적 혼 란을 수습하면 강국으로 재등장할 것이며, 일본도 세계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것이다.한반도는 이런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세계 초강대국들 사이에 끼이게 될 것이다. 4대강대국이 남· 북을 상대로 치열한 국익 추구를 전면화 할때 남·북이 막대한 분단비용을 감수하면서 이들의 횡포에 맞서 생존해나갈 힘을 갖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21세기의 민족 비극을 막고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계속하자면 남·북이 하나가 되어 4대강대국의 국 익 추구에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국력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2 분단체제에서 들어가는 양측의 국방비 상당부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모두 그 동안 막대한 규모의 국방비를 지출해왔다. 소모적인 군비경쟁이 무기 수출국이나 군부에게는 이 득을 가져다주었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엄청난 납세부담을 가져왔고. 빈약한 사회복지와 열악한 삶의 질을 안겨주었다.남한에서는 실업 그리고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사회가 몸살을 안고 있는데, 만일 현재의 국방비의 반 정도라도 그것을 실업대책비나 식량구입비로 사용한다면, 남한과 북한에서 실업과 식량난으로 인 한 문제를 많이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경제적 발전과 국민 복지 번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3 남·북간의 경제 통합에 따른 효과를 들 수 있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의 크기와 인구수가 필요한데, 통일 한국의 경우 지금보다 경제발전하기에 유리한 규모라고 지적되고 있다. 또 한 현재의 산업구조 또한 남한과 북한간에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원은 빈약하나 자본과 기술 이 앞선 남한과 자본과 기술은 부족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북한의 산업이 합친다면, 각각 양 산업구 조의 단점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통일에 의한 인구의 확대는 내수시장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북한의 노동력 이용은 통일국가의 대외 경쟁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남·북한 경제 통합이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여 우리의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게 될 것이 분명하다.3. 사회적 측면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분단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들은 이산가족일 것 이다. 이들은 혈육을 지척에 두고도 몇 십 년 동안 혈육을 만나지 못한 것은 물론 혈육의 생존여부도 알지 못하고 있다. 개인들의 의지나 잘못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체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상호연락이 나 상호방문을 하지 못한 채 수십년 동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이산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서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산 가족의 고통과 한을 해소하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실현하는 길이다. 분단은 남·북한 주민을 상이한 체제로 분리하고 교류 가능성을 봉쇄함으로써 민족의 이질화를 초래하 고 있다. 민족 동질성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다.4. 문화적 측면1 분단은 생활영역의 많은 부분에서 남북한의 이질화를 심화시켰다. 이질화는 상호불신과 갈등, 반목 과 대결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민족의 정체성마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영토적 분단이 해소되고 남·북의 보통 사람들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진다면 그동안 분단에 의해 모든 삶이 규정되었던 남과 북은 매우 빠른 속도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언어구조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질적인 상대방에 대해 호기심과 호의 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남·북간 이질성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남·북한의 문화는 각기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민족문화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이질성으로 인하여 상호 이해와 보완의 가능성이 점차 제한되고 있는 것이 현 실이다. 따라서 민족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하여 통일은 필요하다.2 남·북의 천연자원들과 관광자원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간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유 적지와 유물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들까지도 공유함으로 더 큰 역사적 발굴과 발전의 기회가 될 것 이다.5. 안보적 측면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확실하게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통일이다.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의 공 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반도 안보 불안이 지속되는 현상은 남·북한 양쪽에 모 두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분단 상태에서는 어떤 것이 빌미가 되어 언제 전쟁이 재발할지 예측할 수 없다. 통일은 불안과 공포속에 우리에게 평화 속에서 번영된 발전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므로 반드시 이룩해야 한다.6. 미래 발전적 측면우리나라는 내륙의 중국과 바다건너 일본, 태평양 건너 미국이 위치하고 있다. 세계는 앞으로 중국, 미국의 양강구도가 확실해 질 것이다 그에 따른 물류이동, 즉, 각 국의 수출입이 이루어지는데 그 관 문에 우리나라가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수출하는 것이 중간유착지가 우리나라가 될 것이고 미국 에서 아시아로 유입되는 중간유착지가 우리나라가 될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남·북 통일이 된다면 경쟁력이 더 강해져서 국제 사회지위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국력이 생기게 되 어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국제적 신뢰도가 회복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 자본의 걱정거리 중에 하나는 북한과의 전쟁으로 투자 자본이 잠식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통일되면 이 문제 또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통일은 우리 민족의 발전 무대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줄 것이며 나아가 민족 역량을 결집시킴 으로써 우리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한층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통일 국가는 우리 민족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 확립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동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Ⅱ. 통일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1. 이질화와 적대감 및 상호 불신ㆍ분단은 생활영역의 많은 부분에서 남북한의 이질화를 심화시켰다. 이질화는 상호불신과 갈등, 반목 과 대결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민족의 정체성마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통일은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통일 후 새로운 정체성의 위기, 혼돈, 그리고 그로 인한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겪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 리 대비하여야 한다. 즉 분단을 극복하고 이질성을 해소해야 하되 그 목표와 추진 방식은 우리 내부 의 계층간, 지역간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야기된 모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이미 우리 삶이 자 리잡고 있는 세계화, 정보화의 신 물결 속에서 창조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살 게되는 구성원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틀을 갖추는 동시에 조화로운 전체 속의 이질성 수용이라는 관용의 마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2. 한반도 주변국들 간의 갈등과 이해 관계 대립ㆍ자국의 실리를 강조하는 주변국들의 한반도 정책ㆍ주변국들의 동북 아시아 힘의 재편 과정에 대한 불안ㆍ적극적인 통일 정책보다는 현상 유지 정책 추구3.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 상충에 따른 국론 분열ㆍ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 존재 ,ㆍ집단 이기주의,ㆍ성숙한 민주 시민 의식의 부족,ㆍ다양한 이익과 갈등 ,4. 통일비용통일비용이란 '통합 이후 경제수준이 낮은 측을 높은 측에 걸맞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뜻한다. 통일비용에는 사회간접자본 확충, 실업보상과 고용대책, 산업시설 교체와 투자, 주택 보수, 외채부담 등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통일이 이뤄진다고 가정한다면 어마어 마한 돈이 드는 것으로 예측된다.
1. 주체사상의 의미{{북한정권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은 해방 후 구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이 스탈린 사망후 소련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전개되고 국내에서도 6.25전쟁 도발의 패전에 따른 비판여론이 고조됨에 따라 소련의 영향을 차단하고 정적숙청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급조한 집권이데올로기이다.1950년대 이후 북한은 주체사상을 대내적으로는 독재·세습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무기로, 대외적으로는 폐쇄체제를 합리화하는 선전수단으로, 대남면에서는 한국공산화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 이용하여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상적 방패막으로 활용되면서 점차 체계화되었다.주체사상을 소련의 반스탈린운동의 북한유입 차단', 소련 원조 중단을 극복하기 위한 자력갱생 경제', 중·소 대립에서의 등거리외교' 등을 나타내는 정치구호로 사용하면서 또한 북한 내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1인 독재체제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수령론'을 내세우면서 주체사상의 틀을 갖추었고 이를 이용한 부자권력세습 선전을 노골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주체사상 내용의 변화과정1 1950년사상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 김일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체를 확립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했다. 또한 당시 노동신문도 주체란 공산주의의 지도이념인 맑스 - 레닌주의나 소련·중국의 선진적 경험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배우고 따르되 북한의 현실에 맞게 소화해서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었다.2 1965년주체사상이 '남조선 위정자들의 외세의존 사상'에 대치되는 반대명제로 변모한다.3 1967년노동신문은 조국통일이 민족주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운다. 노동신문은 미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와 남한내 사대주의 세력을 배격하고 민족주체의 힘으로 조국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그러다가 차츰 김일성의 이름과 주체사상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정치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수령'이라는 호칭으로 김일성을 거론하면서 김일성 수령께서 교시하신 주체사상'이 김일성 수령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이 되었다가, '김일성 수령의 주체사상'으로 변모해 갔다.4 1970년주체사상은 완전히 김일성 우상화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으며,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주의'의 이론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주체형의 공산주의자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적 인간형으로 김일성의 소년시절이 제시되는가 하면, 인간에게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주는 존재가 바로 김일성 수령이라는 우상화 논리를 주체사상의 터전 위에서 전개해 나갔다.5 1980년주체사상은 김정일 우상화에 기여하는 절대적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당시 북한당국은 주체위업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리를 강력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주체위업은 대를 이어 지속해 나가야 하며 주체혈통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완성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이 주체적인 혁명이론'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노동신문을 통해 역설하였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창시'한 반면 김정일은 탁월한 이론화'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김정일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6 1990년주체사상의 차별성·우월성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주체사상으로 대표되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이미 붕괴해 버린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차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당국은 주체사상을 참다운 사회주의·우리식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참답지 않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와 차별화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1990년대 들어 북한 당국이 우리식 사회주의·붉은기 사상 등으로 주체사상의 내용과 폭을 확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유는 북한 사회가 총체적 변혁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의식이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북한당국은 체제유지가 위협을 받게 될 가능성 때문에 끊임없이 주체사상의 기치를 내세워 주민들의 인내심과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 주체사상의 비판수령에 대한 충성심 소유자만을 주체적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이나 당과 수령의 영도를 받는 인민대중만이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있듯이 주체사상은 수령(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 사상을 정당화하는 궤변에 불과하며 사상개조와 정치사업의 선행"이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은 당의 통제에만 집착하는 관료주의적 형태를 유발, 경제파탄을 자초한 주범이라고 비판을 받아왔다.
1. 김정일은 {누구인가?{(1) 출생과 성장{1 출생에 얽힌 쟁점 : 출생지 혼란김정일은 항일유격대 지도자 김일성과 항일유격대원이었던 김정숙 사이에서 1942년 2월 16일에 소련 영내에서 태어났다. 김정일의 출생지를 두고 허위와 진실의 논의가 많은 실정이다. 김정일이 소련 영내에서 태어났다는 실체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그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못박고 있다. 북한문헌들이 김정일의 출생장소를 사실과는 달리 백두산의 밀영으로 무리하게 규정하고 있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정일이 공개적으로 부각되면서 그의 생애가 알려진 것이 1980년대이다. 1980년대는 북한사회가 이미 주체사상으로 일색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북한의 이론가들 입장에서 김정일의 출생지를 소련 영내로 밝히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항일무장투쟁의 주체성 문제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며 후계자로서 김정일을 부각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그의 백두산 출생을 기정 사실화시킨 것으로 보인다.2 성장과정 : 해방∼1964년해방 후 김정일이 북한에 들어온 것은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서였다.1949년 9월 평양의 남산인민학교의 입합을 시작으로 1952년 만경대혁명 유자녀학원 전학, 1960년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자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4년에 대학과정을 끝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권력부상(1964∼1974.2)1 당4기 15차 전원회의와 김정일의 부각김정일의 본격적인 정치경력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속되는 1964년부터 시작된다.그의 최초 보직은 김일성의 호위를 담당하는 호위과 지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1967년 5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이른바 반당수정주의분자들 (갑산파)에 대한 숙청을 주도하면서 당권 장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정일은 당내 유일사상체계와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를 기반으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됐다.김정일은 1973년 2월부터 착수된 3대혁명소조운동 의 책임을 맡은 데 이어, 같은 해 9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로 선출되었다.2 후계자 공인김정일은 1974년 2월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속된지 10년도 채 안되어서 당내 최고권력기구인 당정치위원회 정치위원과 비서국 비서의 자리에 올랐다.김정일은 당 정치위원에 취임하자마자 곧 명실상부하게 당내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따라서 김정일의 정치위원 취임은 당내 권력구조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3) 후계체제의 확립(1974.2∼1980.10)김정일은 1980년 10월에 개최된 제6차 당대회를 통해 당 중앙위원회 정위원, 당 정치국과 상무위원회 위원, 당 비서국 비서, 당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제6차 당대회 이후 당의 지도체제가 김정일 중심으로 개편되었으며, 김정일은 주요 대외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내정책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당 책임자이자 후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4) 수령승계(1980.1∼현재)김정일은 1981년 5월 김일성을 수행하여 묘향산지구 개발공사 현장을 시작으로 주요 산업·건설현장을 ‘실무지도’형식으로 시찰, 각종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외업무와 대내업무를 나누어 업무분담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90년대 들어서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제도적 측면에서 승계작업을 본격화하였다. 김정일은 1990년 5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회의에서 확대 개편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군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 12월 24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1992년 4월 20일「원수」칭호를 수여받은 이후, 1993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이로써 김정일은 당·정·군 등 주요분야에 걸쳐 최고통지자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하였다.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은 만 3년상을 치루면서 유훈통치 를 지속했다. 김일성 사후의 3년 동안의 과도기를 안정적으로 수습한 김정일은 1997년 10월 8일 당 총비서로 추대됐다. 북한은 국가의 최고직책 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김정일을 재추대함으로써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를 열게 되었다.(5) 김정일의 통치력흔히 북한사람들은 김정일의 정치를 통이 큰 정치 라고 표현한다. 통이 큰 정치 에서 광폭정치 로 연결된다.1 조직관리능력김정일의 후계자가 된 뒤 이루어진 북한 권부에서의 인물이동은 대단히 안정적 기조 위에서 이루어졌다. 김정일이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북한권력구조가 현저하게 안정을 보인 이유는 북한지도부가 철저하게 김일성·김정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집단으로 구성되어왔으며 그 맹세는 그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김정일이 조직관리의 핵심인 최고지도부 인사에서 보여준 모습은 의외로 안정적이며 그의 조직관리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대외정책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체제생존을 위해 핵-미사일 문제를 국제사회에 던져놓고 위험한 게임을 벌이며 은둔했던 김정일이 2000년에 들어와 강택민, 김대중, 푸틴 등과의 잇따른 정상회담으로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1990년대 들어 북한은 공산권의 몰락에 따른 외교적 고립과 경제난의 심화, 한국의 성공적인 북방외교(한-러, 한-중 수교)와 1995∼1997년 사이에 극심한 기아사태로 인한 체제붕괴 위기에서 일단 벗어나,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배후기지 마련, 대내적으로는 남한을 이용한 경제회복이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향후 북-일 수교, 북-미 수교 등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2. 김정일 쳬계의 평가와 전망(1) 평가김정일은 각종의 무리한 거대 축조물로 통큰정치론을 강조해 왔으나, 카리스마 창출에 실패하자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적 권력장악으로, 총칼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최후의 수단을 쓰고 있다. 김정일 정권의 이러한 성격은 현대의 세계사조에도 어긋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억지를 쓰는 꼴이므로 체제의 한계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북한의 지배층은 과거의 잘못된 행적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유세계의 국제무대에 참여하면서 세계의 보편적 가치들(자유, 평등, 복지사회, 민주주의 등)을 추구한다면 한반도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통일의 길은 가까워질 것이다.(2) 변화전망1 주체사상에 대한 강조는 여전할 것으로 보이며 혁명적 수령관 에 대한 강조 또한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주체사상의 내용은 김정일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이 많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1. 김일성은 누구인가?김일성은 1912년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의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은 부친을 따라 1919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김일성의 소년시절을 아버지와 외삼촌 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주의 사상과{일제에 대한 중오심, 지주 자본가에 대한 반감으로 점철되어 갔다.1923년 홀로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가 있는 창덕학교를 다녔으며 1925년 만주로 돌아간 이후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1926년3월 만주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지만 6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화성의숙을 그만 두었다. 1927년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공산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에 가입하였다. 1929년 가을에 김일성은 반일활동협의로 중국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가옥살이를 하였다. 1930년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어린시절의 이름은 김성주였지만 항일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김일성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1) 항일유격대1931년9월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 김일성은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성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는데 김일성도 1932년4월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34년3월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3단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1936년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3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7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2) 보천보전투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하여 계속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 조선국내 진공작전을 논의하였다. 김일성의 주도하에 조선의 보천보 공격이 결정되었다. 보천보전투는 1937년6월4일 김일성이 지휘하는 항일유격대가 동원된 진공전투로서 일본 경찰지서 관공서를 파괴 방화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2. 북한 권력장악방법 (군부→행정기구→당)(1) 군부장악소련파와 토착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국내파의 경우 무장력을 지니지 않았으며 또한 연안파의 조선의용군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상태였다. 연안파의 조선의용군의 무장해제는 실질적으로 김일성과 빨치산일파의 무력독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 행정기구 장악소련군은 북조선 5도 행정국의 위원장직을 맡았던 조만식과 민족주의 진영을 억압함으로 김일성의 정부기구 장악을 도왔다. 이는 김일성에게 활동공간을 상대적으로 넓어지게 하였고 김일성은 1946.2.8 지방인민위원회들의 연합기구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 위원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3) 당의 장악당내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김두봉이 당내에서 강력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군부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당의 통제를 배제하고 당·군의 이원화를 추구하였다.(4)「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수립한국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 하였다. 따라서 유엔총회는 1947.11.14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엔총회의 결의는 한반도에서의 통일정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김일성과 소련군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김일성과 소련군은 북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더욱 서둘렀다. 1948.9.9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3. 민족사 입장에서 본 김일성과 그 정권(1)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1 정통성을 가질려면 그 국민의 자유 의사에 기초하여 정권이 창출되어야 하는데 김일성 정권은 구소련군의 괴뢰정부로 탄생, 출범부터 북한주민들의 자유의사와는 관계없이 구 소련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소련의 앞잡이 정권이었다.2 모든 권력을 독점, 오직 그 정권만 지지하도록 강요하고 반대의사를 원천적으로 봉쇄 하여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과 그 친위세력만을 위한 정권으로 유지되고 있었다.(2) 김일성 정권의 반민족성1 정권(권력)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해 온 정권이기 때문이다2 공산혁명을 위한 침략전쟁인 6.25을 일으켜 반민족성의 뚜렷한 증거를 남겼다.(3) 김일성 정권의 반민주성1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정권의 성격 자체가 공산독재정권으로 출범했으며, 김일성 자신도 반민주적인 인물이었으므로 강력한 1인 독재체제의 반민주적 정권이었다.2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와 우상화가 극에 달하였다.3 김일성은 민의 와는 전혀 관계없이 자기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시키고 있다는 점이다.(4) 김일성 주체사상의 허구성과 반통일성북한사회의 인권부재, 폐쇄성, 권력세습 등은 김일성 주체사상 이라는 독재논리에서 나타났으며 김일성 정권의 반민주성, 반민족성, 폭력성, 반통일성도 주체사상 인 통치이데올로기에 의해 나타났다.4. 주체사상(1) 주체사상의 의미북한정권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은 해방 후 구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이 스탈린 사망 후 국내에서는 6.25전쟁 도발의 패전에 따른 비판여론이 고조됨에 따라 소련의 영향을 차단하고 정적숙청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급조한 집권이데올로기이다.1952년대 이후 북한은 주체사상을 대내적으로는 독재·세습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무기로, 대외적으로는 폐쇄체제를 합리화하는 선전수단으로, 대남면에서는 한국공산화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 이용하여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상적 방패막으로 활용되면서 점차 체계화 되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수령론 을 내세우면서 지금의 주체사상의 틀을 갖추었고 이를 이용한 부자권력세습 선전을 노골적으로 전개하였다.(2) 주체사상 비판주체사상은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개인숭배 사상을 정당화하는 궤변에 불과하며 사상개조와 정치사업의 선행"이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은 당의 통제에만 집착하는 관료주의적 형태를 유발, 경제파탄을 자초한 주범이라고 비판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