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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문화사] 로마 공화정에 대하여
    로마 공화정에 대하여...서론서양 고대사를 이루는 첫 주자가 그리스인들이었다면, 이들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두 번째 주자는 로마인들이었다. 릴레이 경주에서 선 주자와 후 주자는 한동안 트랙을 함께 달리면서 바통을 건네 주고 받듯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한동안 함께 달리면서 서양 고대문명의 전통을 넘겨주고 넘겨받았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나라를 세웠다는 로마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로마의 건국은 BC 753년의 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보다 먼저 건국되어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던 에트루리아 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남하하여 BC 6세기 초에는 로마도 이들에게 정복당하여 한때 그들의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와 라틴족들은 왕정에 반항하고 반란을 일으켜, BC 6세기 말에는 에트루리아의 왕을 내쫓고, 그들 자신의 독립된 공화정을 세웠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아 서양 고대문화를 완성한 고대 로마인들의 역사적 활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본론시민들의 계급 투쟁로마의 史家 리비우스에 의하면 왕정은 기원전 509년에 끝났다. 귀족과 평민은 합세하여 이민족 지배자인 에트루리아 왕을 축출하고 공화제(Res Public Roman)를 수립하였다. 원로원은 가장 중요한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기구가 되었으며, 귀족세력은 증대하여 이른바 귀족 과두제가 되었다. 귀족계급에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왕 대신에 임기 1년의 최고권을 행사하였다. 집정관들은 군사·사법·종교 등의 국가주권을 가졌으나 두 사람의 권한은 동등하여 상호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가 위급시에는 절대권이 한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위임되었는데 임기는 6개월이었다. 공화정 수립 후 2세기 동안 귀족과 평민간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있는 평민들은 정치적·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을 나타냈다. 팽창·확대하는 로마는 이민족 및 이탈리아 내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입장에 있었으므로 평민들의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평민층의 반란이나과의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중기(367 BC)에 이르러 리키니우스-섹티우스법이 공포되어 집정관직이 평민층에게 개방되어 1명의 집정관이 평민 중에서 선출될 수 있게 되었다. 리키니우스와 섹티우스의 이름이 붙은 이 법은 평민 출신의 집정관을 허용하는 이외에 부채 및 토지독점에 관해 규정하였다. 부채는 이미 지불 변제된 이자액을 공제하며, 잔액은 이후 3년 간에 걸쳐서 연부상각되도록 규정되었으며 각 시민의 토지소유는 일정량, 즉 500 유게라(jugera)로 한정시키도록 규정되었다. 이미 귀족과 평민간의 통혼은 12표법이 제정된 4년 후의 법안(카눌레이아 법 445 BC)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기원전 4세기 말(300 BC)에 오굴니아 법에 의해서 평민에게 신관직(제사장)이 개방되었으며, 동시에 공직취임권도 개방되었다. 기원전 3세기 전반(287 BC)의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해 부족회의의 결의는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발효하게 되었으며, 평민층의 국정참여는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되었다. 이로써 평등을 위한 장기간의 투쟁이 일단락 되었다. 이와 같이 오랜동안의 평민들의 권리주장 운동은 전환기인 5세기에서 4세기까지는 완전히 그 목적이 달성되기에 이르렀다. 커다란 내란 없이 평민과 귀족과의 충돌은 해결되었는데, 이것은 정치에 있어서의 실제적 지혜와 양식을 존중하는 로마인들의 특성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의 평등은 법적·관념상의 성취에 불과하였으며, 사실상 경제적인 유력자들만이 공직을 점유하는 현상은 해소되지 않았다. 역사가 몸젠도 그의 저서 [로마사]에서 말하기를 로마인은 타르킨 왕정(에트루리아 왕정) 시대부터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민중이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되는 것이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평민의 참정권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예컨데 관직취임권은 전통적인 무보수 명예직의 원칙이 끝까지 지속되었으므로 금권정치의 양상이 농후하였다. 그러므로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위기는 사회경제적 측포에니 전쟁에서 진 카르타고는 복수의 이를 갈면서 제기의 기회를 노리지만 로마가 지중해의 큰 섬들인 사르디니아와 코르시타 마저 차지해 버리자 더욱 더 큰 위기와 분노를 느꼈지만 뾰족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이때 젊었을때 로마와 격전을 치른바 있던 하밀카르는 새로운 계책을 마련한다. 그는 국력을 회복하여 로마에게 복수하기위해 은광이 많았던 에스파니아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군대를 키워갔다. 그러는 한편 은광을 개발하여, 231년 로마에 대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하였으나 229년 전사하고 그의 뒤를 이어 에스파니아를 하스드두발이 통치하게 된다. 하스드두발은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통치해 왔지만 바르카스 가문의 사위인 그는 하밀카르의 직계 후계자인 한니발이 성장할때까지 공백기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활이기도 했다. 221년 하스드두발이 하인으로 부리고 있던 갈리아인에게 살해된후 26세가 된 한니발은 에스파니아 총독으로 취임하고 아버지 하밀카르의 뜻을 받들어 로마에 대한 복수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여 나갔다. 그는 총독이 된 후에도 병사들과 같이 기거하며 훈련을 해나갔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군사들의 신망은 대단했다. 218년 로마원정 준비가 완료된 한니발은 사군토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쪽으로 행군하게 된다.이 때 그의 병력은 보병 5만명에 기병 9천명, 코끼리 37마리였다. 피레네를 넘은 뒤 지중해의 바닷가를 따라 론느강에 도착했고 이때 로마에서는 한니발이 대군을 몰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론느강 건너편 마실리아에 진을 친다.그러나 한니발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론느강을 단숨에 건너 로마군을 물리친후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위해서 알프스 산맥을 넘게된다. 로마군은 한니발이 이 산맥을 넘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산맥쪽의 방비를 허술할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희생을 치르고 보름만에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포강에서 집결해있던 로마군을 티치노, 트레비아, 트라시메노등에서 계속 승승장구하였다.216년 이에 로마도 더 많은 병력을 증강하여 보병 8만에 기병 서 146년까지 4년간 공성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의 총공세 앞에 무너지고 성 안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로마에 항복한 사람은 남녀 모두 합해서 5만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는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처음 시작했을때의 인구가 50만명이었던 것을 비교해보면 4년동안의 공성전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 알 만하다.이 전쟁은 서 지중해 전지역을 무대로 한 고대의 세계대전이었다. 또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하나의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전체를 지배 영역으로 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포에니 전쟁 이후의 변화와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길을 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채 못되어 로마의 속주제도는 스페인에서 아시아까지 확대되었고, 세계제국 로마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와 직접 접촉하게 됨으로써 헬레니즘적 사고와 문화 풍조에 노출되었는데, 이러한 접촉은 로마의 전통적 미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에니 전쟁은 안으로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서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희대의 명장 한니발로 상징되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로마에 끼쳤는데, 농지는 황폐화하고 중소농민은 몰락하였다. 특히 남 이탈리아의 황폐화는 끔직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와 병행하여 자본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대농장 제도인 라티푼디아가 나타났다. Plinius가 그의 {박물지}에서 '대토지 라티푼디아가 오래 전에 이탈리아를 파멸시켰다'고 말하고 있듯이, 노예노동에 의존하여, 포도나 올리브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새로운 라티푼디아는 경제적으로는, 독립적 소농들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이들을 소작인과 노예들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보호자 예속제도를 파괴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의 핵심을 이루었던 자유 신분의 중소농은 사라지고 토지 없는 빈민층이 생기고스 셈프로니우스 그락쿠스(기원전 163~133)와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락쿠스(기원전 153~121)는 포에니 전쟁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저항하여 과거 공화정 중심의 체제로 환원하려 하였다. 형인 티베리우스는 133년 호민관직에 취임하여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전통의 공화정 법을 어기고 호민관직에 재선되는 작업을 진행하다가 원로원의 반발을 받아 싸우던 끝에 타살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 동생 가이우스는 123년에 호민관에 올라 형의 개혁작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122년에 호민관직을 연임하였으며, 121년에 삼선을 획책하다가 반대에 부딪쳐 싸우던 끝에 타살되거나 자살하였다고 한다. 먼저 티베리우스의 개혁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토지소유의 제한을 들 수 있다. 이는 공유지에 대해 시민 한 사람 당 500유게라로 한정하고 자녀 2인까지에 한해 한 사람 당 250유게라씩 더 인정을 하여 한 집안 전체 소유지가 1000유게라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토지개혁을 위해 '토지 재분배 위원' 3인을 임명하였다. 그 결과 개혁안을 둘러싸고 그락쿠스는 원로원 귀족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동생인 가이우스는 형의 토지개혁이 심한 반발로 실패한 점을 감안하여 우선 토지개혁을 보류하고 그 대신 곡물법을 시행하였다. 이는 어려운 토지 개혁 대신 로마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국가에서 아주 염가로 곡물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로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착취취체법'에 따르는 재판권 등 원로원의 권한을 기사들에게 이양하였다. 그뿐 아니라 곡물 창고, 도로, 교량 등 대토목 공사를 실시함으로써 로마 빈민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카르타고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토지없는 시민들을 식민하였다. 또 그는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하는 시민권법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원로원과 부유층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곡식이 염가 배급에 이어 마침내 거의 무상으로 로마의 가난한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정책으로 인해 가이우스는 동조자와 함께 것이다.
    인문/어학| 2002.11.20| 10페이지| 1,000원| 조회(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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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프랑스 작가] 미셀 뚜르니에
    Michel Tournier불어불문학과 9767049 정철지불어불문학과 9767051 정호존미셸 뚜르니에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외국에까지 번역 소개되어지는 그리 흔치않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가중의 한 사람이다.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프랑스 소설가로 뽑히는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로의 꿈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분야를 모색하다 도달한 곳이 문학이다.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잠정적인 평화가 지속되던 1924년 12월 1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뚜르니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Sorbonne에서 만났고 거기에서 둘 다 독일어를 배웠고 뚜르니에 또한 어릴 적부터 독일어를 배웠다.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아이였던 그였기에 어린 시절 규율에 얽매이는 학교 생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뒤쳐진 학과를 보충하기 위해 많은 독서를 해야했다. 약국을 경영하던 외조부의 영향아래 그는 일찍부터 의학에 관심이 높았고 그의 이런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은 친구들 사이에서 그를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만들었다. 한편 그 당시 그가 읽었던 문학작품들은 스웨덴 동화작가 Selmon Lagerloef 라겔뢰프나 Hans Christian Andersen 안데르센의 동화들이었는데 이 책들의 영향은 후에 자신의 소설 속에서 주제나 이야기 구조에 강하게 반영되었다.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Saint-German에서 학부 공부를 마쳤고 1941년 여름 Gaston Bachelard 바슐라르의 철학서를 읽은 후 의학에서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Sorbonne에서 철학, 법학 공부를 한다. 철학과에서 그는 Michel Butor 미셸 뷔토르, 쥘들뢰즈 같은 이들과 그룹공부를 하는가 하면 존경과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Jean-Paul Sartre 장 폴 사르트르에 열중하기도 한다. 전쟁 후 1946-1950년까지 독일 Tubingen(튜빙겐) 대학에서 유명한 철학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철학교사 자격시험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주 프랑스에 돌아와 파리 인간 박물관에서 Claude Levi-Strauss 레비스트로우스의 인류학 강의를 듣게 되는데 이 수강은 그의 처녀작 에 결정적 요소들을 제공하게 된다.철학교사 자격시험인 L'agr gation에 낙방하자 절망한 그는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던 교육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에로 발을 들여놓는다. 우선 그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다. 라디오 문화 교양 프로의 책임자로서 일을 하는가 하면 Plon 출판사에서 책 광고 일을 하기도 하고 TV에서 사진에 관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사진에 매혹되기도 한다. 또한 Erich Maria Remarque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1965년 을 완성하여 그가 존경하던 Andr Gide 앙드레 지드. Marcel Proust 마르셀 프루스트, Paul Claudel 폴 클로델과 같이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해온 Gallimard사에 가져간다. 1967년 절찬리에 그 소설은 출판되고 그 해 겨울 Le Grand Prix De L'academie Fran aise를 수상한다. 1970년에는 마왕으로 Le Prix Goncourt를 수상한다.그 후 그는 인도, 캐나다,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작품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소설, 동화, 에세이, 사진집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30여권을 출판하는 한편 1972년부터 L'academie Goncourt 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에게 오래 전부터 커다란 매력으로 여겨져왔던 대중과의 만남을 책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뿐 아니라 라디오, TV, 학교 교실 등 독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찾아가 직접적인 만남의 자리도 마련하는 등 현재 활발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주요작품 연보◆1967년 Vendredi Ou Les Limbes Du Pasifique Vendredi 또는 태평양의 끝1970년 Le Roi Des Aulnes 마왕1971년 Vendredi Ou La Vie Sauvage Vendredi 또는 야생의 삶1974년 Le F tichiste 물신숭배자(?)1975년 Le Main Rouge 빨간손(?)1975년 Les M t ores 기상1977년 Le Vent De Paraclet 성령의 바람1977년 Le Famille Des Enfants 아이들의 가족(?)1978년 Le Coq De Bruy re 히드 핀 광야의 수탉1979년 Des Clefs Et Des Serrures 열쇠와 자물쇠1979년 Pierre Ou Les Secrets De La Nuit 피에르 또는 밤의 비밀1980년 Gaspard, Melchior et Balthazar 가스파르, 멜시오르 그리고 발타자르1981년 Le Vol De Vampire 흡혈귀의 비상1982년 L'aire De Muguet 은방울 꽃밭1983년 Gilles et Jeanne 주노와 잔느1984년 Sept Contes 일곱 개의 동화1984년 Le Vagabond Immobile 굳어버린 부랑자(?)1984년 Journal De Voyage Au Canada 캐나다로의 여행일기1986년 La Goutte D'or 금방울 귀걸이1989년 Le m dianoche amoureux 사랑잔치(?)1994년 Le Miroir Des Id es 사상의 거울(?)1999년 C l brations 축하(?)Vendredi Ou La Vie Sauvage이 책은 우리가 어린 시절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로빈슨 크루소'를 작품 속에 나오는 제2의 인물 프라이데이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의 인류학적 관점에서 로빈슨과 프라이데이를 바라봄으로서 둘의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친구가 되었고 로빈슨이 남게된 무인도(스페란자)는 그가 정복하고 문명화시키려는 장소가 아닌 그의 친구 프라이데이와 함께 공존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Defoe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무인도에 혼자 남게된 로빈슨은 그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땅을 갈고 집을 지으며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다. 또한 우연히 만나 목숨을 구해준 미개한(?) 원주민에게 Friday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를 문명화시키며 수년 후 근처를 지나던 서구의 배에 타고있던 선원들에게 구조되어 자신들의 발달된 문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뚜르니에의 관점에서 이는 다분히 반인류학적인 내용이며 이는 (그들의 발전된 문명을 전하기 위해 미개한 땅을 개척하고 그곳의 원주민들을 문명화한다는)서구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이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뜻대로 파괴해버린 땅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분쟁과 기아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권에 의해 철저히 조종되어 지고 있다.뚜르니에의 작품 속에서 로빈슨은 처음에는 데포의 작품에서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진흙 목욕을 하는 부분은 결국은 그가 스페란자 섬에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적인 내용을 보이고 있으며, 뒤에 동굴 속의 구멍에서 이는 더욱 강조되어 진다.프라이데이를 만나면서 그는 대변화를 겪게된다. 처음에는 프라이데이의 외면적인 복종으로 둘 사이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프라이데이의 다소 고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실수는 그들 사이에서의 작은 갈등구조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으며, 화약통의 폭발에서 이는 극대화된다. 화약통이 폭발하고 로빈슨이 이루어낸 문명화된 것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리자 이 둘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공존의 모습들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다.로빈슨은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며 그 결과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꾸며지고 근엄한 모습들은 사라지며, 점점 원주민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처음 묘사된 로빈슨은 백인이며, 하얀 피부에 항상 의복에 의해 보호받는 나약한 피부를 갖고 있는 모습이지만 점차 덥수룩한 수염과 반나체의 검게 그을린 피부로 강인하게 성장(?)하게 된다. 또한 프라이데이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는 프라이데이의 문명을 인정하게 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과 프라이데이의 것이 어느 한쪽이 우월하고 미개한 것이 아닌 서로 동등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프라이데이의 행동들이 더욱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 둘 사이의 놀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놀이를 통해서 로빈슨은 자신의 문명 속에서의 약점들을 극복하게 되며 프라이데이를 통해서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인문/어학| 2002.11.20| 4페이지| 1,000원| 조회(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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