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의 생애와 기업가정신목차손정의의 생애와 경영활동 손정의의 경영사상 손정의의 경영기법과 경영전략 손정의의 최근 행보유년기1957년 8월 11일 일본 큐슈 손삼헌씨의 4남중 차남으로 출생 아버지 사업성공 - 유복한 어린 시절 유치원 때, 조센진 이라 쓰인 돌을 맞고 '야쓰모토 마사요시' 이란 이름으로 한국인임을 숨김. - 아버지는 핏줄은 한국인임을 일깨워 주었음.초,중,고 시절초등시절 공부에 흥미 없었음(미술, 공작 등 예능에 흥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열중. 그 열중한 일은 반드시 이루는 성품 중학시절 후쿠오카로 이사. 학생회장 당선(리더쉽 발휘) 명문 구루메대 부설고 입학. 1학년때 미국 켈리포니아 주립 버클리 캠퍼스 영어 연수 -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미국 유학 결심)미국에서의 학창시절(1)1974년 2월, 16세 미국 유학 반년간 영어 연수 후, 샌프란시스코 살라몬테고 입학 한 달만에 고교 졸업. 이듬해 대입 검정시험 합격 일화 - 교섭력과 돌파력, 도전정신 1975년 홀리네임즈 대학 입학. '손(Son)'이란 姓을 사용 한국인임 밝힘미국에서의 학창시절(2)1977년 켈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경제학부 편입. 경제,경영에 대한 전반적 공부 1일 1발명을 생활 신조 큰 사업을 하기 위해 큰 돈을 벌겠다는 야망 '음성장치 부착 다국어 번역기' 발명 - 샤프사와 100만$ 계약 1979년 2월 버클리 최대의 게임센터 운영일본에서의 경영활동(1)1980년 3월 일본귀국. 1년 반 동안 철저한 시장조사 1981년 9월 소프트웨어 유통업체 '일본 소프트뱅크' 설립 '조신전기사'와 독점 계약 체결 '하드슨사(일본 소프트웨어 90%제작)'와 독점 계약 체결 이 후로 계속 발전. 1982년 사원 35명, 매출액 35억엔소프트뱅크는 어떤회사?원래는 소프트웨어 유통하던회사 최근에는 손정의가 만든 기획회사라고 볼수있음. IT관련 돈되는일 닥치는데로 전망이 밝은 컴퓨터사업에 전방위적 투자 벤처캐피탈과 비슷한 성격이라 할수있다.일본에서의 경영활동(2)출판사업 진출 첫 위기 극복 사례. 어려운 자금 사정. '조선 전기사'의 기요히로 사장과 '샤프사'의 사사키 전무 등의 보증, 일주일만에 자금 융자 1990년 '일본'을 빼고 '소프트뱅크'로 개명 - 세계화의 발판 일본국적 취득. 일본 '손' 씨 창시일본에서의 경영활동(3) -제휴 및 M A1990년4월 미국 네트웍회사 노벨과 합작 1995년4월 미국 컴덱스 인수. 750억엔 1996년1월 미국야후 인수.야후재팬 설립 6월 루퍼스머독과 아사히TV인수 9월 미국 메모리보드 업체 킹스 턴 테크놀로지 매수- 미국 메모 리 시장 60% 점유일본에서의 경영활동(4)1998년 소프트뱅크 주식 1부 상장 1999년 국내 벤처 기업에 4억$ 투자 2000년 1월 야후재팬 주식 1주에 1억엔 돌파, 1억140만엔(10억 5천만원) 3월 일본주식 시가총액 17조5906억엔으로 2위 2000년 하반기 이후 주가 폭락과 보수층의 견제로 고전손정의의 경영사상동양적인 정신에 기초(손자병법 토대) 이승병법(二乘兵法) 경영사상 일류공수군 도천지장법 지식인용엄 정정략칠투 풍림화산해경영기법과 경영전략(1) -경쟁원리 추구 경영술팀제 일일 결산제 인센티브제 1만개 노크제 컴퓨터의 철저한 활용경영기법과 경영전략(2) - 자금조달 전략사채발행 통한 직접금융 의존 핵심은행제의 도입 증자와 액면분활, 보통 사채발행으로 자금조달 고주가와 초저금리, 엔고타이밍의 활용경영기법과 경영전략(3) - M A와 제휴전략M A전략 배경사상 및 이념 바다의 전략 Win-Win 전략 30% 지주전략제도 M A 전략 포인트 사업확장 대원칙 삼계(三戒)“일본의 경영자나 매스컴 관계자들은 나의 M A 전략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은데, 손자병법이나 란체스터의 법칙 을 신중하게 읽어보면, M A에 대한 사 고방식이나, 나의 경영전략에 대한 관점 이 바뀔 것으로 생각한다.” - 손정의-경영기법과 경영전략(4) - 세계화 경영전략목표는 컴퓨터 관련 인프라의 압도 세계 최대의 “WWW” 정보검색 업체 '야후사' 와 제휴 유니텍 텔레콤과 제휴, 중국진출의 전진기지 마련 타임머신 경영시련과 최근 행보1999년 초, 6만엔까지 올랐던 소프트뱅크 주가 대폭 폭락 - 1만8000엔(교재) (뉴욕-연합뉴스)2000년 9월 포브스誌-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가 작년재산 760억달러에서 올해는 56억달러로 격감,재산 큰 폭으로 줄어들어 눈길. 2003년말 11억달러 재산보유통신업체 인수를 통한 거대종합통신업체로 변신을 꾀하고 있음. 2004년 7월 재팬텔레콤인수, C W인수- 유선전화등 고정통신분야 3위업체 부상 목표- 유무선,인터넷,휴대폰사업자를 통틀어 일본 제1의 통신사업자 다이에 구단 인수에 나섬( 이미지제고 )참고 문헌성공한 창업자의 기업가정신 – 김성수-{nameOfApplication=Show}
기업 구조조정구조조정의 정의1. 구조조정이란 ? - 구조조정 ( 構造調整 , Restructuring ) 기업의 기존 사업구조나 조직구조를 보다 효과적으로 그 기능 또는 효율을 높이고자 실시하는 구조 개혁 작업 - 수술과 체질개선의 동시 수행 '수술' - 기업 : 유휴인력의 해고, 한계사업의 매각 등 금융기관 : BIS비율을 통한 존폐 결정 등 '체질개선' - 기업 : 이사회 활동의 제기능 발휘, 투명한 회계관리 등 금융기관 : 부실채권의 정리, 철저한 대출심사, 예금의 안전성 확보 등구조조정의 내용재무기업지배구조고용조정소유와 경영의 분리, 사업재무구조 개편 한계기업 정리주주 경영진, 근로자의 이해 관계를 조정 내부구조의 건실화, 경영재량화에 대한 회사 감시생산효율정 개선ㅇ르 위한 기업의 고용인원수 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등구조조정의 배경① 경상 수지 적자의 누적 ② 단기 채무 위주의 외채 증가 ③ 민간 기업들의 과도한 투자 ④ 외환 위기 가능성 대응 미비 ⑤ 금융자율화에 부응하는 금융감독체제 정비부족 ⑥ 환율상승, 외환보유액 급감, 주가폭락 등의 경제상황 악화 환율(:$) ; 915원 (97년 9월말) - 1,965원(97년 12월 24일) 가용외환보유고 ; 224억 $ (97년 9월말) - 39억 $ (97년 12월 18일) 주가지수 ; 647.1 P (97년 9월말) - 379.3 P (97년 12월 3일) - 금융기관, 기업, 정부의 부조리환율(:$) ; 915원 (97년 9월말) - 1,965원(97년 12월 24일) ` 가용외환보유고 ; 224억 $ (97년 9월말) - 39억 $ (97년 12월 18일) 주가지수 ; 647.1 P (97년 9월말) - 379.3 P (97년 12월 3일)금융부분의 문제점관치금융 정경유착 원칙을 따르지 않는 규제진행과정금융구조조정 현황주: 1) 경영관리중인 조합수 122개(2002.11.현재) * 인가취소, 합병, 해산, 영업 정지 등 포함 자료: 공적자금관리백서(2002.8.)Main Bank의 새로운 정립대상시스템 e- Biz 업무프로세스혁신, 임원정보시스템전문화전문직제 및 직군분리, 개인직무개발프로그램(CDP) 지원 개인/중소기업고객/기업고객 고객전문가(SP/SRP/RM)제도 도입 전문연수지원체제 확립2.06%14.04%16.48%고정이하 여신비율1.0조7.3조8.8조NPL200120001999구분우리은행은 짧은 기간내 Hardware측면과 Software측면에서 강력한 구조조정 추진구조조정 추진내용4. 우리은행 자체 구조조정 추진기업문화의 이질감에 따른 조직 불안정잠재 부실자산 미청산 (대우, 현대 등)종합리스크관리시스템 미비연공서열 위주의 조직문화차별화되지 못한 마케팅전략 및 전문인력 부족과거8NPL RatioBIS 비율총 14.3조원의 NPL정리지속적인 자산건전성 제고당기순이익ROA대 규 모 흑 자 전 환수익구조 개선강력한 구조조정 결과 획기적인 재무개선으로 은행 스스로 상시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 확보주요 재무지표 개선5. 우리은행 자체 구조조정 성과9단위 : 억원2000년2001년1999년2002년(e)26,40010,27519,1792,3844,837△8,37416,5642,085△1,45616,2091,750영업수익 28,750순이자마진* 20,265수수료수익** 4,833기타수익*** 3,65216,503주) * 원화자금운용익, 외화자금운용익 ** 수수료수익, 지급보증료수익 등 ***유가증권관련익, 외환관련익, 신탁부문이익 등수수료수익 적극 확대자산 Quality 향상2.76배 증가19992002(e)1,750 (10.6%)4,833 (16.8%)1999 2000 2001 2002(e)607010090801.03.02.079.4조102조▲ ▲ : 영업수익: 총자산(말잔)(단위:조원)(단위:조원)수수료수익이 대폭 증가하여 안정적인 수익기반이 확충되었으며, 무수익성 자산을 대폭 감축하여 자산의 질도 향상됨.75.5조83.9조▲ 2.8조▲ 1.6조▲ 1.0조▲ 2.6조(단위:억원)수익구조 개선영업수익 증가10기업구조조정문제점구조조정에 대한 체 구조조정 추진 체계기업구조조정 관련주요조치대마불사 의식의 불식 현금흐름, 수익성, 주주 중심 경영풍토 확산기업부문 질적 변화LG 구조조LG그룹 선정이유LG그룹이 우리나라 재벌 중 최초로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LG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조 아래 착실한 구조조정을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LG,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 발표 ◎'99년까지 부채비율 199%로 축소 ◎ 사업 및 부동산 매각, 해외자본유치 등 총13조에 달하는 사업구조조정 단행 ◎ 사업매각, 외국인 지분유치 및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총 65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 ◎ 화학, 전자 等 3~4개 주역업종 선정, 핵심역양 집중 ◎ 상호지급보증 완전 해소, 결합재무제표 작성, 책임경영 실천 등 구조조정 5개 합의항 적극 실천 ◎ 인위적인 정리 해고는 가급적 자제구조조정 실적 및 계획* 재무구조 개선 ■ 구 분'98年'343% 99년199% ■사업매각, 외국인 지분유치를 통해 자본 조달할 계획임 ■ 65억 달러 유치방안 1.해외자본 유치(사업매각/외국인 지분 유치) 2.3억 달러 상당의 부동산 매각LG소유의 3.주요 오피스빌딩 및 유통사업용 부동산의 임대조건부 매각을 추진 중구조조정 실적 및 계획* 주역업종의 선정, 역량 집중 ■ (화학ㆍ전자 2개 업종과 금융 및 서비스 부문에서 1~2개 업종) * 계열사간 상호 지급보증 해소 ■ '99年 말까지 계열사간 상호 지급보증을 완전 해소함. 구 분 '97연말' 98. 3월말' 98연말' 99연말 보증잔액 ( - )18,817 (△2,488)11,516 (△7,301)0 (△11,516) (축소금액)21,305구조조정 실적 및 계획* 책임경영 구현 ■ 책임경영 실천을 위해 구본무 회장은 LG화학, LG전자의 대표이사로 취임 ■ 12月 결산법인 11개사에 대한 사외이사 선임을 완료했으며, 3월 결산법인 3개사에 대해서는 5월 정기주총시 사외이사를 추가 선임할 예정임. ■ 회장실 조직을 폐지하고, 구조조정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한시 조직인 구조조정본부 나 투자은행들였던 관행과는 달리 군인공제회, KTB네트워크 등 국내 업체들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4. 구조조정 의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구조조정은 주로 매각대상이 외국계 펀드 나 투자은행들였던 관행과는 달리 군인공제회, KTB네트워크 등 국내 업체들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구조조정 비용금융권별 공적자금 지원현황164.539.015.730.317.362.2계2.42.4----해외금융기관등75.312.01.330.33.528.2소 계8.20.20.67.30.1-저축은행4.7--4.7--신 협21.21.80.4-3.115.9보 험18.58.50.30.010.19.6증권투신22.71.5-18.30.22.7종 금제 2 금 융 권86.824.614.4-13.834.0은 행계부실채권매입자산매입등예금대지급출연출자금융권연도별 공적자금 지원현황164.54.320.337.8102.1누계3.4-△0.13.5-소계-----3월2.7-△0.12.8-2월0.7--0.7-1월2 0 0 4 년2.11.0△0.51.6-2003년3.71.8-1.9-2002년27.1△7.0△0.25.129.22001년37.17.40.820.08.92000년35.5-4.65.725.21999년55.61.115.7-38.81998년계기타자금공공자금회수자금 재사용채권발행연 도연도별 공적자금 회수현황64.87.732.924.24.913.06.3누계1.9-0.41.50.50.90.1소계1.1-0.11.00.40.6-3월0.5-0.30.2-0.10.12월0.3--0.30.10.2-1월2 0 0 4 년9.11.12.45.60.44.01.22003년13.06.63.82.60.50.91.22002년9.4-5.34.11.31.41.42001년15.00.0058.96.12.22.91.02000년14.00.049.74.3-2.91.41999년2.4-2.4----1998년소계자산 매각등주)파산 배당등출자금 회수계정부자산 관리공사예금보험공사연 도39.5%구조조정의 성과1. 안정적 성장기반 구축 q 우리나라 경제는타내는 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997년 7.0%에서 2002년 9월말 11.4%로 향상되고, 여신건전성을 나타내는 고정이하여신 비율은 6.0%에서 2.4%로 낮아짐. q 전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규모는 1998년 3월말 총112조원에서 2002년 9월말 현재 34.7조원으로 축소되어 총여신의 4.3% 기록주: 1) 자산건정성분류(FLC)기준에 의한 금융기관 부실채권(고정이하 여신) 잔액 2) 자산관리공사의 부실채권 총매입액은 액면가 기준 자료: 한국은행, 외환위기 이후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과제, 2002다. 수익성 제고금융기관의 수익성은 위기 이후 비교적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한 금융기관의 경우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2001년 회계연도 이후 최근까지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나 절대수준에서 아직 선진국은행보다 열위(2001년 기준 한국 ROA 0.76, ROE 15.9; 미국 20대 1.65, 24.5; 영국 10대 1.15, 27.6, 금융감독원 'IMF 이후 은행산업의 구조변화'(2002.12) 참조) 단위당 생산성 및 수익성도 구조조정 성과에 따라 개선도에 차이 겸업화 확대와 경쟁심화로 전통업무의 수익비중이 낮아지고 겸업 및 부수업무 수익이 증대하여 은행의 경우 이 부문이 세전이익의 30% 수준라. 대형화 진전구조조정 과정에서 합병, 퇴출, 금융지주회사 설립 등을 통하여 상위 은행에 대한 집중도가 증가하였으며, 비은행금융기관도 시장에 의한 통폐합, 업무영역의 전문화 등이 추진됨. 선진국의 주요은행과 비교할 경우 아직 규모 영세 (2001년 기준 한국 3대은행의 평균자산규모 762억달러로 미국영국 대형은행 평균의 20-30% 수준, The Banker 2002.7. 참조) - 국내 은행산업의 시장점유율1) -주: 1) 자산기준, 우리는 경남광주 합계, 하나는 서울 합계, 신한은 제주 포함마. 금융산업 체질 개선기업성과시장지향의 기업경영가. 내실경영과 기업건전성 제고 성장위주 경영전략의 단점을 인식하고 외형을 중시하던 관행을 탈피하여w}
일본 수상을 지낸 나카소네의 전후 50년 정치 이야기를 다룬다. 일본의 중앙공론이 전후 50년 특집으로 기획한 '이토와 사토의 대담' 의 일환으로 일본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인 나카소네와 나눈 대담을 모은 것이다.나카소네가 정치에 입문하게된 계기와 정치역정 등 개인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전후 50년 간의 일본 정치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나카소네 전수상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정치가에게 '역사의 법정 앞에 선 피고' 라고 역설하고 있다.일본 전수상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두명의 정치학자와의 대담을 통해 정리한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근까지 일본정치에 대한 회고록이다.대담을 통해 50년 여에 걸친 자신의 정치생활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경험한 사건들에 대한 솔직한 설명을 통해 일본정치를 증언하고 있다.이 책은 현재의 일본정치 상황을 분석한 프롤로그를 비롯해 9장에 걸쳐 2차대전 이후 현재까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시기별 사안별로 밝히고 있다.‘50년전쟁의 잔영’‘ 점령정치로부터의 새 아침 ’‘1국평화주의와의 싸움’‘ 보수합동과 안보조약의 개정 ’‘절정에 달한 55년 체제 ’‘다이·후쿠전쟁과 자민당의 분열 위기 ’‘혼미에서 재건으로’‘일 미 중 신시대를 열다 ’‘포스트냉전과 전후정치의 향방’등의 큰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저는 주요사건을 통해 일본을 이끌었던 리더로서의 나카소네가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특정 결정을 내릴때 그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과 입장을 중심으로 책을 읽은 서평을 요약하겠습니다.이후부터의 내용은 나카소네 전수상의 생각임을 밝힙니다.제1장 ‘50년전쟁의 잔영’전쟁이 끝난 후 불안과 초조 속에서 공산당이 극성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는 이런 공산당의 견제 역할이라는 대전제 속에서 묻혀지는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천황은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고, 천황제를 수호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의 해체를 막고 공산당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러일전쟁까지는 방위전쟁의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한다.그 이후의 전쟁은 서양 열강과의 세력다툼의 이미청년장교들이 행한 상명불복사건에서 상층부에 대한 책임추궁이 부족했고, 이때 당시에 군부는 이미 천황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한다.천황에게는 전쟁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에 있어서도 독일과 다르게 확연치 않는 이유는 전후 미소 냉전구도가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에 있어서 이를 애매하게 만들었다.일본정부 또는 지도적 입장에 선 인간은 한번쯤은 정식으로 정직하게 피해국들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과거 사과도 있었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경솔한 발언이 한국과 중국 및 여타 피해국들에 대일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나카소네는 미군정시 맥아더에게 ‘일본독립’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맥아더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제2장 ‘점령정치로부터의 새 아침’-나카소네는 전후 총선거에 출마하기 전부터 청년계몽, 여성의 역할, 지방의 농촌문제등에 대해 연설을 하고 계몽을 하였다.‘청년의 이상’ 과 ‘수정자본주의와 사회연대’ 라는 책도 출판했었다.-내무성을 사직하고 수정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밎주당 후보로 공천받고 선거에 출마했다. 좌파 공산당과의 경쟁을 치루고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다지라인 실시로 세금이 과하게 부과되자 세무서에 대한 항의데모를 주도하였다.한국전쟁 즈음 유럽을 돌아보고 특히 독일에서 ‘철의 장막’을 보고 자기 나라는 자기 손으로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는 헌법개정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소련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소련은 감옥, 중국은 유치장, 홍콩은 자유다.‘ 라는 농담을 일행들과 했을 정도로 그 당시 공산권의 이미지는 나카소네에게 좋지 않았다.제3장 ‘1국평화주의와의 싸움’1951년 1월 델레스가 강화조약체결을 위한 특사로 방일했을 때, 그의 비서를 통해 미일방위협정에 관한 사안을 제시했다.그 중심내용은 일본의 원자력평화이용 연구를 금지시키지 말것, 민간 항공기의 제조와 보유를 인정할 것이었다.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되는 2장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한국전쟁초 유럽방문시 독일을 방문했을때의 생각과 그을 하였다.1954. 2월 2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조선회사에서 돈을 받은 사건(조선의옥)을 폭로하고 요시다 내각을 추궁함으로서 요시다 내각을 하루빨리 끌어내리려 하였다.당시 나카소네는 요시다 내각을 쓰러뜨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1955년 12월 원자력 기본법이 공포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나카소네는 하버드대학에 갔을때 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국내로 돌아와 이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연구 및 예산확보를 위해 노력을 한다.하지만 이 당시까지도 핵 알레르기가 대단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결국 예산안을 통과 시켰다.일소공동선언 연설시 “공동선언을 무조건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는 큰 불만이 있다”는 의사표시를 위해 찬성이기는 하면서도 반대하는 듯한 연설을 하여 의사록에서 전면 삭제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제4장 ‘보수합동과 안보조약 개정’자유당과의 합당, 즉 보수합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처음에는 보수당들이 하나가 되면 만일의 경우 사회당 정권이 탄생을 우려했고, 보수당은 둘로 갈라져 있으면서 연립을 하는 편이 안정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요시다 점령정책의 시정과 독립체제의 정비를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보수합동에 찬성했다.1957년 당의 부간사장으로 기시 수상의 동남아 순방 수행후 중동과 동유럽 시찰시 이집트를 방문해 나세르대통령을 만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힘을 모아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했다.하지만 소련이 2.1%의 싼 금리로 장기차관을 이집트에 주었다. 한마디로 아세완 하이댐 프로젝트를 소련에 빼앗긴 것이다.안보조약 개정 문제에 있어서 내용은 매우 옳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군마현 소마가하라 근처의 미국 사격장에서 탄피를 줍던 농부를 미군이 쏴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미국정부는 범인인 미국병사를 귀국시켰다. 이를 개기로 안보조약은 개정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재판권관할문제만을 생각하더라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재계문제는 요시다내각, 이케다 수상시에는 정.재일체는 말장관시에는 생명과학 바이오연구의 문을 열었다.수상공선론을 주장한 이유는 의원내각제하에서는 국회의원이 대신이 되는 것이 파벌의 원인이고 파벌의 소굴인 국회에서 수상이 선출되기 때문에 국회는 정권재탈.수상쟁탈의 장(場)이 되기 때문이다.수상공선제는 3권분립을 명확하게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국민통합을 실현시킬 수 있다.1967년 다쿠쇼쿠 대학의 총장 시절 A+3과목이면 졸업을 시켰다.제5장 ‘절정에 달한 55년체제’-1955년 일본민주당의 부간사장, 자민당 탄생시 부간사장, 사토내각(1967) 운수대신, 오키나와반환, 통상산업대신 시대 일중국교정상화와 석유위기 이런 일들과 관련해 나카소네의 생각과 당시의 역할-오키나와반환문제로 사토와 협력, 좌익진영과 보수진영 양쪽에서 ‘변절자’ 이니 하는 비난을 받음. 하지만 장차 총리를 노리기 위한 파벌전략을 품고 있었다.사토의 재선문제로 대립이 생겨 분열한 1965년 48세의 나이로 사상 최연소 파벌의 장(張)이 되었다.파벌의 수장이 된 이후부터 재계 언론계와 교류를 넓혀 나갔다. 다른 파벌의 모임에도 나가기도 하였다.재계인이건 저널리스트이건 물론 정치가이건 진실로 서로 통하는 그룹을 갖고 있지 못하면, 소위 강력한 정치를 할 수 없다. 최근 수상들은 그런게 부족한 듯 하다.사토내각의 큰 업적인 한일국교정상화와 오키나와반환에서 각료로서 역할을 보면한일국교정상화에서는 방한을 해서 박정희 김종필등과 회담을 했고, 경제원조등의 문제를 협력하였다.오키나와반환문제는 사토수상이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나카소네는 방위청장관으로 있었다. 당시 안보조약의 자동연장 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미국이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 들이고 순조롭게 자동연장 되었다.이당시 모스크바와 북경방송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제국주의 군국주의 패거리 사토와 나카소네”라고 비난했다.1967년부터 운수성대신으로 운수성을 대개혁 했다. 국철의 적자문제 해결에 앞장섰고, 인허가 관청이었던 운수성을 정책관청으로 변모시키려 하였다.방위청장관으로 기지반환 문제에 있어서 미국 레어 가야한다..‘ 고 주장했다.다나카 가쿠에이가 주창한 ‘일본열도 개조론’에 대해서는 정치의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록히드 사건에 대해서는 그 원점을 다나카의 석유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다나카가 국산원유, 히노마루원유 채굴하겠다고 메이저를 자극했고 유럽에 갔을 때 북해유전으로부터 석유를 들여오겠다, 소련의 천연가스에도 손을 대겠다는 식의 발언으로 미국의 감정을 건드린 것으로 생각한다.1973년 1월 중국방문해서 주은래와 7시간동안 방위문제에 대해 논의 하였다.제6장 다이.후쿠 전쟁과 자민당의 분열위기다나카는 ‘다나카 연구-그 금맥과 인맥’ 에 실린 것이 도화선이 되어 비판이 일고 결국 사임하였다. 후임 총재 선출을 둘러싸고 오히라파와 후쿠다파가 대립하여 자민당 내는 파벌간의 대립으로 이전투구의 장(場)이 되고 말았다.이런 와중에 깨끗한 이미지로 클린 미키라 불렸던 미키가 총재로 선출되었다.나카소네는 간사장으로서 당을 장악하고 당의 인사, 각료 선출시 발언권, 공천, 재정을 쥐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976년의 록히드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사법처리면에서도 법치국가로서 의문이 남는 사건이다.미키가 클린이미지를 앞세우기 위해 다나카를 너무 몰아붙여 재계는 물론 당내로부터도 총공격을 받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철도의 파업권탈환파업에서 운명을 걸고 맞섰다. 몰핀으로 의지하는 환자에게 계속 몰핀을 투여하면 더욱 중증이 된다. 는 생각으로 시이나와 함께 당을 결속시키고 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했다.미키 끌어내리기에 있어 나카소네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키 수상의 다나카 몰아붙이기에 대해 당내 반발이 있었고 다나카가 구속되자 그만두게 하자는 움직임이 급속히 일어났다.이런 움직임에 파벌간 대립이 극심해졌으나 나카소네는 자신이 간사장으로 있을때 자민당이 분열될 경우 큰 오명을 쓰게 된다는 생각에 타협을 위해 노력하였다.그리고 미키 대신 자신이 간사장을 사임했다.미키내각이 12월 총선에서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고 뒤를 이어 후쿠다 내각이 한다.
고전의 이해 1조주몽: 추모, 상해, 동명성왕등으로 불리움 일반적오해: 주몽은 부여의 금와왕의 자식이 다. 아니다. 주몽은 물의 신 하백의 외손, 천제의 손자 시조의 탄생을 신이하게 장식 고구려 지배층의 선민사상 고구려의 동맹( 제천행사 ) 오이,마리, 협부 등의 동조세력, 재사, 무골, 묵거 사성말갈과 송양국 정벌? 건국후에도 활발한 정복전쟁이 진행되었음 송양국정벌7일동안의 장마비로 멸망시킴? 비류수의 수리관개권 둘러싼 쟁탈전 보리종자? 농경중시의문점: 주몽은 활을 과연 잘 쐈을까? 1: 신화에서는 사람이 독수리로 변하고,신이 강림하고 별 짓을 다 하지요. 7살 짜리가 명궁이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아마도 실제로 활을 아주 잘 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상당한 윤색이 들어간 것일 것입니다 2: 유화가 알을 낳아 그 알에서 부화한 아기가 7세에 보통사람과 같이 크게 자라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매우 잘 쐈고, 고려 속어로 활을 잘 쏘는 이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기때문에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주몽은 7세때 성인으로 장성했다고 하니 , 활을쏘는 것이 불가능 한 것도 아니다.주몽신화의 의미 고구려는 부여의 신화를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이 부여계통이라는 것을 강조, 부여를 장악한 그들이 타민족이 아니라 결국 부여인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부여세력을 회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몽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고구려의 전통성확보와 국민통합입니다주몽신화진위여부? 햇빛으로 임신했다든지, 알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도 없고, 고구려인들도 믿지 않았을것이다. 시조의 탄생을 신이하게 장식하기 위함?.. 주몽은 유리왕의 아버지이다. 황조가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nameOfApplication=Show}
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이번 근현대사의 이해라는 시간을 통해 좋은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책이 3권으로 되어 있어서 모두 읽어보고 싶었지만, 여러 제약으로 인해 저는 두 번째 ‘사람과 사회’라는 주제로 되어 있는 책을 읽었습니다.제가 두 번째 ‘사람과 사회’를 선택하고 읽은 이유는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실 때 식민시대의 해외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몇 년전에 봤던 애니깽이란 영화를 봤는데 그때 멕시코 사탕수수농장에서 노예처럼 취급받으며 일하는 우리 교포들의 처절한 삶을 보았고, 그 영화를 통해 1900년대 초 양반의 몰락과 신분제의 동요등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그때 느꼈던 감회가 두 번째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대강의 역사와 흐름은 배워왔고, 책을 통해서 접할 수가 있었는데, 그 당시 민중의 삶이나, 사회의 모습등은 접하기 어려웠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각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제 생각과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주제에서는 근대적 시간의 등장 전 농경사회에 살았던 우리 민족은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했었고, 시간에 얽매여 생활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자본주의 도입과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자발적 시간의 개념도입이 아닌 강제적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이 도입 되면서 시간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살게되는 출발이 되었다.인간이 자신이 만든 이기에 의하여 스스로를 구속하고 얽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하면 성격이 급하다, 빨리빨리, 라는 말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근대적 시간의 개념이 등장한 이후의 일제에 의해 학습된 개념이고, 과거의 우리민족은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그런 민족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로 인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 시간을 설계하고 계획할 기회가 없어서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 같다.근대의 인구변동은 개항 후 우모습을 볼 수 있다.광복후 해외교포들이 귀환하고, 북측에서 월남하고,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남한 인구는 다시한번 폭발적으로 증가세를 보이게 된다.박정희 정권이후 인구분포를 살펴보면 산업시설의 집중으로 영남 및 수도권에 인구가 과도 집중하고, 상대적으로 호남과 충청지방의 인구증가율은 매우 낮았다.이는 국토의 효율적 개발보다는 연고 중심의 불균형 발전을 초래한 과거 군사정권의 잘못이라고 생각된다.일제에 의해 근대로 접어든 이후 우리나라 인구의 과도한 서울 집중은 여러 문제를 초래하였다. 지가상승, 주택부족, 교통혼잡등의 여러 도시문제를 야기했고, 도농간의 불균형 성장의 원인 되었다고 생각한다.정책입안자 및 위정자들은 과도한 서울의 인구집중을 해소하고 지방 균형 발전을 1900년도 후반에 와서야 심각히 고민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 모든 부문에 있어서 서울의 과도한 역할로 인해 도시의 포화상태를 야기하였고, 서울의 인구폭발로 인해 주변지역(위성도시)의 개발로 인한 경기권의 개발 이에 따라 서울 경기지방에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절반이상이 살게되는 불균형을 초래하였다.우리민족의 해외 이민사는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체 거의 떠밀려 가듯이 떠났던 이민생활은 우리민족들에게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오래전에 읽었던 조정래 作 ‘아리랑’이라는 책 내용에 근대 식민국가 국민의 이민간 곳에서의 수난이 참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외국으로 나가서 나라 잃은 설움에 그리고 현지인들의 핍박에 우리 교포들의 삶은 얼마나 처절했을까?특히 소련, 지금의 우즈베키스탄등의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국가가 힘이 없으면, 국민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일개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다는 것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최근에도 우리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보다도 물론 엄청난 위상을 쌓았고, 힘도 있지만, 다시한번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똑같이 처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다.그들은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일제의 핍박을 피해 그리고,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간도로.. 그렇게 이민을 가서 오늘날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우리는 은연중에 미국교포와 중국 조선족에 대해 생각하는게 얼마나 다른가?....조선족하면 더럽고, 무식하고, 우리보다 못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분명 우리 교포이고, 아픈 과거사의 피해자이다.근대화 그리고 사람들만석꾼이니 천석꾼이니 하는 대지주들은 없는 사람들을 더욱 착취하고,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때 일제에 협조하며 그들의 재산을 유지하고, 이루어 나갔다.흔히 우리나라에서 재산 있는 사람들중 일반 민중의 존경을 받는 일이 드물다.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쥐 라는 말은 과거 우리 민족의 재산가들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못했던 말이다.그들은 자본주의의 개념을 말그대로 자본의 엄청난 증식으로 착각하였고, 과거 만석꾼이나 천석꾼중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 재산가들은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총독부나 권력층에 접근하며 근대적 자본가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우리나라의 과거의 큰 과오 으뜸인 일이 과거사 청산 문제라고 생각한다.친일지주나, 자본가계층, 친일하며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이들이 해방후 그대로 미군정에 손을 비벼 그 권세를 유지해왔다.이는 최근 이완용이나 송병준등의 과거 대표적 매국노의 자손들이 재산권을 주장하며 국가나 독립운동가 자손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어이없는 일이 생기게 하는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역사적 단죄가 없었던 광복직후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빌붙어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살고 있는것이다.실제로 과거 독립운동가집안의 자손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친일파나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의 자손들은 비교적 부자로 살고 있다고 하니, 참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도시로 도시로 이촌향도의 열풍속에 몰려든 사람들은 운동이 공산주의와 함께 해온점에서 과거 6-7-80년대 노동운동하면 으레 뒤에서 빨갱이들이 조정한다하며 탄압한 빌미가 되었나 보다..농촌은 이제 텅 비게 되었다. 노인들만 남고 젊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도시로 떠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은 언론을 통해 좋은 모습만을 부각했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새마을 운동이 매우 성공한 운동이고, 박정희의 큰 업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뒤에 감춰진 많은 부정적인 모습을 이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새마을 운동은 농민 각자의 자율성과 창조성, 자발성을 무시한 채, 국가주도의 관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고, 각 특수성을 무시하며 보편성만을 앞세우고, 성과위주의 전형적인 전시행저의 모습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물론 박정희 정권이 큰 공헌을 한 것을 사실이지만, 박정희 특유의 저돌적 밀어붙이기식만이 과거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을까? 으레 박정희 하면 민주화를 탄압하고, 경제성장을 이끈 이러한 이유로 경제가 어려운 최근 박정희 향수 하는 말까지 나오는데...... 박정희정권의 주도아래 진행된 경제 성장 저변에는 많은 민중들의 힘든 삶, 그리도 억압 핍박속에서 인내한 민중들의 삶이 녹아 있다.이문열의 ‘한강’이라는 책을 보면 광복이후 우리 민중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처절한 삶, 그리고 그곳에서 지가상승등의 수혜를 입은 졸부, 부동산 투기, 성남(광주)강제 이주사건등의 모습속에서 과거 6-70년대 ‘서울로서울로‘ 향한 사람들의 좌절과 빈곤한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다.근대의 자의식전근대 사회에서는 여성, 아이의 인격은 거의 무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성인이된 양반층의 남성만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요즘에도 전근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은, ‘여자가...’ 이런말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어린아이들은 장유유서에 기초하여 어른에 대한 복종과 예의를 절대 덕목으로 삼았고, 어른들은 어린이를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근대이후 방정환이 새로 만든 어린이라 나라의 미래를 말한다.최근 우리 어린이들은 일류주의, 최고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너무나 물들어 있는 것 같아 아쉽다.최근 이혼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결혼한 세 커플중 한 커플이상이 이혼한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이혼공화국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과거 여성의 경우는 참는 것이 미덕이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시집식구들의 시집살이에도 남편의 무시에도 참는 다는 것... 인고한다는 것이 한국 여성의 상징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서양의식의 도입과 아울러 남녀평등, 여성의 사회진출등으로 여성의 권리가 많이 향상되고,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가 차츰 사람즘으로서 과거와 같이 참는다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기에는 아무리 자의식의 성장, 여권신장이라는 부문도 존중하지만 가정의 유지, 평화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여성이 다양한 직업에 진출하면서 최근 여성상위시대니 하는 말이 유행이다.지금껏 남아 있는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는 많은 제약을 가하지만 차츰 이러한 구조도 허물어져 가고 있는 추세이다.이제는 여성도 남성과 같은 존재이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로 인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막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과거 우리 여성들은 고도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큰 공헌을 하였다. 섬유공장, 방직공장, 전자공장등의 산업현장 곳곳에서 우리 여성의 섬세함과, 근면함이 발휘되었다.남성중심의 호주제 폐지논의 같은 것은 우리사회가 가족 가문 중심을 유지해 오는데 많은 역할을 해왔다. 족보, 종친회로 대표되는 가문, 이러한 부문들은 남성중심의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급격한 근본적 변화는 어렵겠지만, 차츰차츰 여성이 사회의 동반자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수립해 나가야겠다.근대의 그늘DJ, YS, JP 삼김시대의 대표인물들이다. 이들은 민주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망국적이라 불리우는 이러한 지역감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책에서는 과거 조선후기부터 1900년 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