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서론2. 본론일본 영화의 역사영화를 보고...- 카케무샤카케무샤에서 볼 수 있는일본의 역사- 전국시대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일본 영화와 문화.. 영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문화라는 측면에서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매개이다. 사람의 감각기관 중 가장 민감한 시각과 청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그 정보의 수용자에게 강한 자극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어떤 나라의 문화를 본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허구이지만, 또한 사실적인... 대중적이고 예술적인 영화를 통해 일본을 이해해보려 한다. 우선 지루한 내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역사를 빼놓을 순 없다. 일본 영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카케무샤를 통해 본 일본의 역사, 전국시대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 하겠다.2. 본론일본영화의 역사50년대 - 일본 영화의 황금기1899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다른 서구 문화 문물과 함께 받아들여진 영화는 일본에서 재현 방식이나 산업 등 모든 면에서 서구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발달했다. 일본은 1912년네 '니카츠 (日活)'를 건립하여 대형 메이저 영화사를 중심으로 한 스튜디오 시스템 을 탄생시켰고, 변사라는 특이한 제도와 함께 가부끼와 노 등 전통적인 재현 양식을 통한 일본만의 독특한 영화 양식을 개발하였다.일본 메이져 시스템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1904년부터 소규모 촬영소가 도쿄와 교토에 자리잡았고, 이 영화사가 1912년에 합병되면서 최초의 메이져 영화사인 니카츠가 탄생한다. 그 후 메이져 대형 영화사의 스튜디오 시스템은 도호, 도에이, 신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의 합세로 1950년 대에 이르면 6대 메이저 시대를 맞는다. 이들은 교토와 도쿄에 시대극과 현대극 스튜디오를 따로 두고 각기 다양하게 영화를 제작했다. 일지감치 스튜디오 시스템을 정착시킨 일본은 대작을 제작하여 외국 영화와의 경쟁에서 늘 우위를 지켰다.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1950년대는 일본 영화계의 전성가 붕괴되면서 현재 메이저 영화사는 제작보다는 배급과 상영에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격변의 60/70년대 - 독립영화의 탄생한 해 600편 이상을 제작하던 메이저 영화사의 활동이 1960년대로 들어서며 주춤해졌다.특히 1958년을 정점으로 영화산업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젼의 영향으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의 수가 격감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불황을 맞았다. 불황 타개책으로 도입한 와이드 스크린이 특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들은 주요 관객층인 젊은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젊은 감독을 기용했다. 그래서 '쇼치쿠 누벨바그' 같은 새로운 영화 세대가 등장했다. 사실 그 동안 젊은 조감독들은 영화가 진실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진부한 시대극만을 양산하고 있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해 왔다.-우리는 기존의 영화에 대한 불만을 느꼈다. 이는 반 쇼치쿠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패턴화된 촬영소 영화에 반대하여 작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다 무라 모우, 시나리오 작가)-나는 사토 다다오가 쓴 '잠자는 사자 쇼치쿠 오오후나' 라 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에 대한 울분이었다. 쇼치쿠는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자였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그들에게 감독으로서 새로운 양식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오시마 나기사의 (1959)를 시작으로 새로운 영화가 터져 나왔다. 이처럼 일본의 새로운 영화 흐름은 쇼치쿠를 중심으로 한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내에서 그 막을 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제는 오래 계속되진 못했다. 전체 영화의 10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뉴 웨이브 감독들의 작품 으로 침체해 가는 일본 영화계를 활성화시키기란 역부족이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뉴 웨이브의 선두 주자인 오시마 나기사가 메이저를 탈퇴해서 '창조사'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아닌 독립 프로덕션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른바 인디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을 그린 이마무라 쇼헤이의 (1963), 다이쇼 시대의 무정부 지도자와 두 여성간의 삼각 관계를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와 자유 연애의 갈등을 영화 속의 영화 형식으로 표현한 {(1969)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의 영화가 자유롭게 만들어졌다.이처럼 메이저를 탈퇴한 감독이 자유롭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62년에 설립된 일본 예술 극장 협회의 힘이 컸다. 예술 영화 전문 영화관에 작품을 배급하는 회사인 예술 극장 협회는 이후 저예산 영화 공동 제작에도 참여했는데 , 하니 스스무의 (1963) 등을 포함하여 이마무라 쇼헤이,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요시시게 감독 등의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와 같은 일본 예술 극장 협회의 공동 제작 참여는 1980년대 주요 작가가 등장하는 데에도 한몫을 했다.한편, 젊은 감독의 대거 탈퇴 이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 메이저는 소수의 관객층을 겨냥한 작품 제작에서 벗어나 대중을 끌어모을 수 있는 고전의 리메이크, 야쿠자 영화, 청소년 영화, 핑크 영화 등 상업적인 영화 장르에 주력하면서 그 나름대로 명맥을 유지했다.-로망 포르노가 히트한 배경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간과할 수 없다. 1971년은 1970년의 미일 안보 조약 반대 투쟁의 여파가 아직 남아 전공투(全共鬪)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가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니카츠 로망 포르노를 기성 개념을 타파한 성해방 영화로 취급하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때문에 시로가와 와코 등의 포르노 여배우는 각 대학의 축제에 불려 다니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시대 조류에 민감한 영화 평론가들도 니카츠 포르노를 활성화 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니시무라 쇼오고로, 로망 포르노 제1호 감독)텔레비젼의 급속한 보급은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제작에 주력하던 스튜디오는 촬영소를 매각하기 시작했고, 제작사에서 후퇴한 메이저는 독립 프로덕션 작품의 배급망으로 변모했다. 제작 편수가 감소한 회사들은 더 이상 전속 배우가 필요없게 되었고, 독립 프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객의 대부분을 연극이나 경마, 경륜 등의 다른 오락에 빼앗겨 버렸다. 1980년대 일본 영화계 현황을 나타내는 통계는 입장객, 극장 수, 제작 편수 모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87년을 계기로 침체일로 속에서도 국내 흥행에서는 꾸준히 우위를 지켜 온 일본 영화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체 개봉 영화 637편 중 일본 영화가 286편, 외국 영화가 351편으로 일본 영화가 45퍼센트, 외국 영화가 55퍼센트를 차지한 것이다. 외국 영화 가운데 90퍼센트가 할리우드 오락 영화이며, 관객의 90퍼센트가 젊은 층이다..할리우드 영화의 강세는 1980년대 일본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후반 석유 파동 등으로 주춤하던 일본 경제가 1980년대 들어와 회복되면서 사회적인 생존의 경쟁 논리가 부각되고 그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흔들렸다. 모든 것이 서구 중심이 되고 젊은이들은 서구 문화에 젖어들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일본 영화는 젊은이들의 관심 밖에 있는 시대극의 제작을 거의 줄이고 그들의 취향에 맞추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이런 변화는 제작 현장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현장 경험을 익힌 뒤에야 영화계에 데뷔하던 기존의 감독과는 달리 대학교에서 영화 서클 활동 등을 통해 영화 경험을 익힌 이른바 슈퍼 8밀리 감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영화광들이 영화계에 대거 입문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메이저를 통해 제작된 영화는 40퍼센트에 머물렀고, 독립 인디팬던트 작가의 작품이 60퍼센트를 차지 했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영화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장르의 영화를 대신하여 이제 개인의 재능에 따라 영화를 다양하게 제작하는 개인 영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했다. ATG(일본 예술 극장 협회)의 도움으로 주목받는 신인 감독 두 사람, 모리다 요시미츠와 이타미 주조가 탄생했다.{모리다 요시미츠는 1980년대의 풍요로움 속에서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한 중산반적으로 영화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요약이 가능하지만 스즈키 세이쥰의 경우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는 스토리 대신 기호, 형태, 색채만이 있을 뿐이다. (야마네 사다오, 영화 평론가)스즈키 세이쥰은 1980년대 일본 영화의 이미지 미학을 탄생시킨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니카츠를 통해 로 데뷔한 그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통속적인 상업 영화 속에서도 나름대로 이색적이고 양식화된 색채와 형태를 가미한 독특한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스튜디오 시스템이라는 속박은 자유분방한 그의 재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억압적이었다. 1967년,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니카츠에서 해고된 그는 그 후 자신의 재능과 그 동안의 CF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영상미를 보여주는 환상의 영화 (1980)을 탄생시켰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요약하기 어렵다. 그저 사라사테 자신이 연주하는 지고이네르바이젠 레코드 속의 알 수 없는 속삭임, 현실과 환상을 뛰어넘는 자유분방한 이미지, 자살한 동생의 빨간 해골 등 화면을 산란하게 하는 빨간색의 이미지, 커다란 냄비와 요리, 주인공 세 사람의 관계, 세 사람의 맹인 등 영화 전편을 흐르는 색채와 음악 그리고 형태의 이미지만을 즐길 수 밖에 없다..{(1991)에서도 그는 유메지라는 유명한 수채화가와 세 여인간의 관계를 일반적인 스토리 전개를 파괴한 채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색채와 형태의 스펙터클로 이끌어 간다.스즈키 세이쥰의 영화를 선두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강요한 장르를 뛰어넘어 감독 개개인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독특한 미학을 지닌 새로운 영화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와 더불어 1980, 90년대 일본 영화계에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아름다운 이미지의 영화를 만드는 1980년대 선두 주자로 {오구리 고헤이가 있다. 한 작품 한 작품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감독으로 알려진 그는 {(1981)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단 네 작품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제1회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