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n L. McHargFigure1.Ian L. McHarghttp://www.csiss.org/classics/content/23이안 맥하그(Ian L. McHarg, 1920-2001)은 도시계획가이자 펜실베니아대학의 도시계획 건축학부의 설립자였다. 세계 2차대전 동안 왕실 기술자들과 함께 일한 후, 그는 조경 건축과 도시계획학위를 딴 하버드 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의 1969년도 책인 “디자인 윗 네이쳐(Design with Nature)”는 생태적 도시계획의 개념에 선구자적인 작품이었고, 조경계획과 토지계획에 있어 가장 널리 인정 받는 저명한 저서 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 그는 후에 “지리학적 정보 시스템(Geographic Information Systems)”의 분야를 형성하게 될 네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세운다.맥하그는 1920년 스코틀랜드의 산업도시인 글래스고(grasgow)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곳의 광부였고, 어머니는 당 시대의 어머니들처럼 가정 주부였다. 맥하그가 어렸을 때 그가 얼마나 그림과 산책을 즐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후에 도시계획가로써의 직업을 권고 받았다. 그가 더 나은 도시 환경을 위해 자연 환경의 유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펼친 데는 그러하지 못했던 그의 고향 글래스고를 이유로 들 수 있다.전쟁 후 그는 조경건축과 도시계획에서 학위를 받은 하버드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가르친 맥하그는 “사람과 환경(Man and Environment)”라는 이론의 새로운 강좌를 제공한 것 뿐 아니라 “조경 건축 학과(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를 만들어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업적은 이 때부터 차근차근 쌓이게 되는데 1960년에 “우리가 사는 집(The House of We Live In)”이라는 CBS의 TV 쇼에 진행자가 되었다. 그 프로에서 맥하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 예컨대 종교 사상가인 폴 틸리처( 바 있다.그는 자신의 사상들은 무(無)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퍼진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저 바닥 낮은 곳에서 시작될 순 없다고 하며 1954년에 환경 보호 단체의 회장인 패어필드 오스본(Fairfield Osborne)을 소개 받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그는 뉴욕에 있는 오스본의 사무실에 찾아 간 적이 있는데 그곳은 그랜드 센트럴역 가까이에 있는 방 하나뿐인 곳이었고 파트 타임 비서와 무보수 관리자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이 1954년 미국의 환경 보호 운동의 전부였다.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57400" t "_blank"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열린 세계 환경문제의 논의를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큰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레이첼 칼슨(Rachel Carson)이 쓴 “싸일런트 스프링(Silent Spring)”을 보고 환경에 대한 아주 작은 관심이 싹텄고 그 때의 의문은 누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인가였다. 그 당시 어느 곳에나 돌진하여 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라 전체를 통틀어 오직 대여섯명 이었고, 첫 번째로 랄프 네이더(Ralph Nader)가 환경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에 이어 워싱턴 대학의 화학자인 배리 코모너(Barry Commoner)는 화학적인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고, 록펠러 대학의 병리학자인 르네 듀보(Rene Dubos)와 폴 엘리치(Paul Ehrlich) 그리고 맥하그가 있었다.그 주제는 결국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게 있어서의 절정은 그가 있던 학교가1970년 미국의 지구의 날(Earth Day)을 축하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때이다. 30,000명의 사람들이 1970년 4월 17일 패어몬트 공원(Fairmont Park)와 벨몬트 고원(Belmon Plateau)에 모였고 맥하그는 그 곳에서 “너희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다. 왜 내가 너희에게 이 나쁜 소식을 전 지역 전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플로리다부터 북 캐롤라이나까지 가는 길에 있는 보호 받는 생물들 모두를 볼 수 있듯. 그 지역을 따라서 있는 해변들은 완전히 보호 됐고, 어떤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쪽에서 아멜리아 아일랜드(Fla, Amelia Island)와 해터라스 곶(Cape Hatteras)의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 지역을 가는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가 65년에 연구했던 하비 세이더스(Harvey Cedars)는 태풍 아그네스(Agnes)로 파괴 되었고, 그 후 홍수에 빠졌다. 기술자 집단은 불도저를 가지고 와 모든 집들을 밀어내어 장례식을 위한 장작더미로 만들어버렸고 화장했으며 그는 이 사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80세로 가는 79”에 조경, 도시계획의 명예교수인 이안 맥하그, M.L.A., M.C.P.는 그의 첫 번째 시집 “별들에게 보내는 노래들(Some songs to the stars)을 완성하였다. 맥하그는 이전에 결코 시를 써본 적이 없지만, 그에게 많은 이들이 시를 쓸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1969년에는 “디자인 윗 네이쳐(Design with Nature)”를 출간하였는데 맥하그는 그의 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책은 태양과 달과 별, 변화하는 계절, 파종기와 수확기, 구릉, 비와 강, 바다와 숲, 동, 식물의 힘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신앙)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경이로운 우주의 거주자, 영원한 열망인 진화에의 참여, 지나간 세월에 대한 선명한 표선, 생존의 본질적인 동행자이자 지금 우리와 함께 미래의 생명체로 포함된다(Corbett2).우리의 눈은 세계와 우리를 나누지 않고 결합시킨다. 이것을 진실로서 알리자. 그리고 우리를 이탈의 소박함에 내맡기고 단일성을 주자. 우리를 인간과 자연의 잠재적 조화를 표현하고 우리가 걸어온 길인 자가 스스로의 훼손에 내맡기자…사람은 유일하게 지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생물이다. 그는 생태계의 대표자가 됨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 그는 반자연의 정복으로 간주한 프랑스식 정원 디자인에 대해 뚜렷하게 비판적이고, 그가 Design with Nature의 철학을 위한 모델로 본 영국식 정원 디자인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도시 팽창 프로젝트(Urban Expansion Project)를 위한 맥하그의 계획은 기하학적 측면에서 ‘프랑스적’이기 보다는 ‘영국적’이었다. 그는 “클러스터 개발(Cluster Development)”로 잘 알려진 자연 환경 내에 상대적으로 수목이 우거진 하우징(Housing)을 선호했다. 맥하는 또한 정원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으며, 집은 좋은 사적 정원 공간과 함께 계획되고 설계되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1996년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삶을 위한 원정(A Quest for Life)”를 출간했다. 글 외에도 그는 또한 많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포함시켰다; 1962년 매릴랜드(Maryland)의 발티모어 카운티(Baltimore County)의 밸리스(The Valleys) 계획; 발티모어의 이너 하버(Inner Harbor); 텍사스(Texas) 휴스턴(Houston)의 우들랜드(Woodlands); 그리고 워싱턴 D.C(Washington D.C), 덴버(Denver), 콜로라도(Colorado), 미네소타(Minnesota)의 트윈 시티(Twin City) 지역 계획이 있다.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는 ASLA 메달과 LAGasse 메달을 포함하여 여기에 열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영예를 수상하였다. 1990년에는 부시 대통령이 그에게 예술부문에 대한 Nation Medal을 수여하였다. 1999년에 그는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서는 도시계획부문에 있어서의 Japan Prize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월스(Wallce), 맥하그, 로버트(Robert) 그리고 토드(Todd)가 함께 세운 회사의 창립 멤버였던 그는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한국, 태국, 그리고 일본 정부의 고문으로써 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상 주변에 공적 부분과 사적 기관에 관한 환경 연구와 계획을 수움직임에 빗대어지기도 했다”고 그의 학생이었던 웬디 포웰(Wendy Powell)은 말한다. “학생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의심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자신들의 설계 아이디어를 한껏 활용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어쩌면 그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선생님이었던 그는 학생들에게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입장과 역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그들의 창조적 사고 방식에 대한 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강연자로서, 언제나 활기에 넘치고 열정적이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할 수 없었던방식을 가지고 그의 청중들에게 흥미로움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남겼으며 귀기울여 듣기를 요구하였다. 2000년 봄에는 수업 중에 그가 손수 지은 시를 읊어주기도 하였는데 이는 꽤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그는 예언자의 정열(a passion of a prophet)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그의 초기 학생인 더글라스 샘슨(Douglas Sampson)은 말한다. “그는 어떠한 사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는 경관(조경)을 철학으로써 가르쳤는데, 이는 대학원 후(postgraduate) 과정에 있었다. 이 지구의 존재에 관하여…그의 과목 ‘사람과 환경’에서는 우리네 삶을 변화하고 도전하도록 의도했으며, 이는 곧 그렇게 되었다.’인간과 자연에 대한 맥하그의 전체론(Holism)적인 철학은 우리가 우리네 환경을 보고 만드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자연과 함께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급격한 도시화로 망가진 자연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날로 높아지는 현대에 맥하그의 철학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사회 전반적인 모든 사항을 망라하며 해나가는 도시계획분야에서 무엇보다 존재해왔고, 또 존재할 것이며, 존재해야 하는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참고문헌Ian L. McHarg. DE 1
New York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17세기 초반 뉴욕에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상인들이었다. 그 후 뉴욕은 포악한 영국제국주의 발자취로 한때는 주민보다 군인이 더 많았던 시절도 있었다. 7년간의 독립전쟁으로 뉴욕은 영국의 발자취를 완전히 지워버렸고,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지 불과 17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초반 금융자본의 출발이 뉴욕 맨해튼(Manhattan)에서 생성되었고, 많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탄생했다. 가난하지만 억센 아일랜드인의 이민은 이 도시의 아픈 상처인 동시에 주된 활력의 원천이 되었다.맨해튼은 12.5마일의 길이에 2.5마일의 넓이로 이루어진 섬으로 허드슨, 이스트(East), 할렘(harlem) 등 3개의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 유럽의 네덜란드인들이 지금의 뉴욕항에 도착하였을 때 맨해튼 섬에는 약 27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100여개의 인디언 부락이 었었다. 그 부락들은 ‘Manhata’, ‘Manatans’ 혹은 ‘Manahatain’ 등으로 불렸는데, 추측하건대 ‘언덕의 섬’이라는 뜻이 담긴 듯하다. 최초로 인디언의 땅인 맨해튼을 발견한 네덜란드인들 중 ‘더치웨스트인디아 회사(Dutch West Indians Company)’의 책임자인 피터 미뉴잇(Peter Minuit)은 1625년에 인디언들로부터 맨해튼의 2만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60길더(네덜란드의 화폐단위로 옛날의 금화와 은화를 뜻함) 값어치의 옷가지와 장신구, 목걸이 등을 주고 구입하게 되는데, 지금의 화폐 기준으로 환산하면 1페니로 10에이커의 땅을 산 셈이다. 그 후 사업을 목적으로 제일 먼저 세워진 네덜란드인들의 본거지를 이름하여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하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맨해튼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Figure1. 뉴암스테르담 전경(1626년경, 1651년에 조각) 뉴욕의 역사 p.23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자신들이 기대한 만큼의 이익을 거두지 못하자 1664년 영국의 손 안에 들어가도록 방치하였고, 영국은 ‘뉴욕(new York)’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영국의 지배 아래 뉴욕은 나날이 번성해 가고 인구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00여 년의 통치 기간 내내 영국은 식민지의 복지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관심을 쏟았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들여 원성이 자자했으며, 뉴욕 시민의 가슴에는 영국에 대한 반항의식이 쌓여갔다.Figure2. 뉴욕의 성장 뉴욕의 역사 p.128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은 영국군의 심한 포격과 총격을 받아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뉴욕 시민들은 변함 없이 크리켓, 경마, 무도회, 권투 시합등을 즐겼다. 뉴욕은 오랫동안 왕당파의 본거지였으며, 1776년에 뉴욕이 영국군의 손으로 넘어가자 다른 주에 있던 왕당파들도 뉴욕으로 몰려 들었다. 미국군은 1783년 평화 협정이 체결된 뒤에야 맨해튼으로 돌아왔다.19세기 미국 제일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구로서 자리를 굳힌 뉴욕은 나날이 부를 축적해갔다. 항구의 성장은 ‘로어 맨해튼 거리(Lower Manhattan Stree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뉴욕의 재정적 위치를 급속하게 상승시켰다. 로어 맨해튼 가의 부두에서 뒤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서는 금전 문제가 다루어진다. 그곳이 바로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해외 무역과 대륙 경제는 대개 신용 대부로 움직이고, 뉴욕은 은행, 재정, 투자, 보험, 유산 관리, 금융 정보 분야에서 전문화된 기관들 사이에 필요한 출자 협상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Figure3. 1840년경의 금융 거리 뉴욕의 역사 p.113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인구 과밀은 슬럼인구 증가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시를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민자의 지속적인 증가가 뉴욕 시의 도시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는데, 특히 주거 양식의 대변혁을 야기하게 된다. 주거양식의 변화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택들(houses)의 도시에서 주거공간(housing)의 도시’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러한 공동주거 개념의 도입은 미국 내에서 그 당시로서는 독특한 개념이었으며, 공동주거양식의 확산은 사회계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주거공간의 물리적 형태와 더 나아가 도시문화의 변화를 선도하게 되었다.주거밀도의 증가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부작용을 수반하게 되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위생상의 문제로 질병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염병의 여파는 도시의 하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에게까지 공포감을 주어 중산층의 도시탈출을 부추기게 된다. 하지만 수요에 못 미치는 공급의 부족으로 부동산 가격은 급등하고 교통시설과 도로의 부족으로 도시 내 직장과 생업을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심각한 주거환경은 오랜 시간의 숙고 끝에 뉴욕 주정부 최초의 포괄적인 주택법안이 1867년에 통과됨으로써 해결 방안이 제시되기에 이른다.뉴욕 주정부의 주택정책 변화에 따라 고밀도의 공동주거 형태가 양산되면서 하류층과 중산층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는데 반해 상류층 사람들은 단독주택 생활을 향유하는 한편 아파트형 호텔을 선호하는 가구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여성의 사회 참여를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 활동과 인적 교류를 위한 여가시간의 확보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여성운동이 주거공간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아 공동의 부엌, 식당, 오픈스페이스로 이루어진 조합식(cooperative) 아파트가 1926년 뉴욕시에 등장하게 되었고 현재도 상당수의 조합식 아파트가 산재해 있다.2차 대전 이후 뉴욕은 최상과 최악의 시기를 모두 경험하였다.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지로서 직위를 확고히 하기는 했지만, 1970년대 이후로 뉴욕은 거의 빈털터리 상태였다. 월스트리트는 80년대에 1929년이래 최악의 주가 폭락을 겪었고, 뿌리 깊은 인종 문제 외에 날로 증가하는 무주택과 범죄 문제에도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뉴욕은 이 같은 문제들을 대체로 빨리 회복시켜 나간 탓에 지금도 미국 문화와 금융의 중심지로 인정 받고 있다.뉴욕의 자력은 여전히 도처에서 무수한 이주민들을 끌어들이고, 그 이주민들은 다시 자신들의 활력과 에너지를 뉴욕에 불어넣고 있다. 뉴욕의 산업들과 문화 시설들이 가진 위력, 정기적으로 쇄신되는 지적인 삶의 강렬함은 뉴욕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예측을 하게 한다. 뉴욕은 가히 다국적 문화주의와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압축본이라 할 만하다.작년 우리나라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여론이 분분했던 때가 있었다. 강남의 소위 부자들은 자신들의 집값이 떨어질까봐 극구 반대하였고 그 외에도 행정수도의 비대화, 기존 수도권의 상권 위축과 주변 도시들의 쇠퇴 등을 논하며 많은 이들이 옳지 못한 결정이라는 우려를 하고 나왔다. 우리는 이쯤에서 뉴욕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뉴욕은 1790년 이래 수도로서의 지위는 상실했으나, 미국의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87392" 상업·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또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16505" 공업도시로서 경제적 수도라 하기에 충분한 지위에 있으며, 또 많은 대학·연구소·박물관·극장·영화관 등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723745" 미국 문화의 중심지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도시는 그 안의 사람들로 인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도시의 흥망성쇠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지고 있는 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제는 ‘뉴욕은 완성된 도시가 아니라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는 도시’라고 한 르 코르뷔지에( HYPERLINK "http://home.dongguk.edu/user/lux" t "_blank" Le Corbusier)의 말을 서울로 끌어들일 때이다. 근시안적인 사고로 이제까지처럼 서울만이 우리 나라의 각종 산업과 금융, 문화의 중심지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수도’라는 타이틀을 벗어버리고도 끝없이 성장하고 있는 뉴욕을 보며 앞으로 서울이 나아갈 방향을 조금은 내다볼 수 있었으면 한다.참고문헌뉴욕의 역사. 프랑수아 베유 著 2003年세계의 도시. 국토연구원 엮음 2002年가자, 세계로 New York. 편집부/이주현 옮김 2001年Naver 인터넷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PAGE 1
What is an Urban Growth Boundary?어반 그로우쓰 바운더리(Urban Growth Boundary, UGB)는 근래에 만들어진 가장 널리 보급된 성장 관리 툴로 지역이 도시화(urbanization) 되어가는 것을 체계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하여 도시의 발전 정도(발전의 밀도)를 통해 해당 지역을 바운더리로 지정하는 것이다. 통상 바운더리 안은 발전의 밀도가 높은 지역이고, 바운더리 밖은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구분된다. UGB는 대도시 전체의 둘레에 선을 긋는 것으로 지자체가 조닝(Zoining)과 땅의 이용의 결정을 할 때 사용된다. 만약 바운더리에 들어가는 지역이 다수의 관할지역에 해당될 경우 주(州) 혹은 지역 정부에 의하여 만들어진 임시의 도시 계획 기관이 바운더리의 관리를 맡는다. 몇몇 관할 구역에서는 UGB안의 지역을 UGA(Urban growth area)라고도 명명하고 있고, 이름은 틀리나 그 개념은 같다고 할 수 있다.UGB를 적용한 사례로서 미국의 오리건 주(states of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Oregon" o "Oregon" Oregon),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Washington" o "Washington" 워싱턴주(states of Washington)과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Tennessee" o "Tennessee" 테네시주(states of Tennessee)는 도시들에 UGB를 확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UGB를 적용한 미국의 도시 중 주목할 만한 곳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Portland%2C_Oregon" o "Portland, Oregon" 에는 포틀랜드(Portland), 오리건(Oregon),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Minneapolis%2C_Mncisco_Bay_Area" o "San Francisco Bay Area" San Francisco Bay Area) 지역의 다수의 커뮤니티가 포함된다. 미국 외에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캐나다의 벤쿠버(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Vancouver%2C_British_Columbia" o "Vancouver, British Columbia" Vancouver), 브리티쉬 콜롬비아(British Columbia)가 있고, 녹지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도시화가 퍼져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바운더리가 런던의 16세기에 존재했으며, 20세기 중반 런던의 도시권에 인접한 시골이 메트로폴리탄 그린벨트(Metropolitan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Green_Belt" o "Green Belt" Green Belt)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HYPERLINK "http://en.wikipedia.org/wiki/Melbourne" o "Melbourne" 멜버른(Melbourne) 역시 최근에 도시의 스프롤(sprawl) 현상을 제한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그로우스 바운더리를 이입하였다. 다음으로 오리건 주(州)의 사례를 통해 UGB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겠다.UGB in Oregon’s Statewide Planning Program오리건 주의 241개에 달하는 각 도시가 UGB로 둘러 싸여져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UGB는 도시가 어떻게 성장해갈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플래닝과 조닝 맵에 선을 긋는 것이다. Fig1.을 보면 현재 도시의 경계선과 UGB의 선을 볼 수 있는데 그 사이에 색칠된 부분은 “도시화가 가능한 땅;어바니저블 랜드(urbanizable land)”으로 앞으로의 도시의 성장을 수용할 수 있는 미개발 지역이다. 결국 “도시화가 가능한 땅”은 개발될 것이고, 어반 서비스, 예컨데 하수도나 길 등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 지역은 기존의 도시에 통합될 것이한 참여자들로, 이들은 해당 도시의 경계선 밖의 지역의 계획과 조닝에 책임이 있다. 특별 지구도 어바니저블 랜드 안의 화재 예방과 물의 공급에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위해 함께하며, 해당 도시의 시민들이나 기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그룹 역시 UGB를 어디에 그릴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지자체가 UGB를 그리고 난 후, 주(州)의 토지 보호•개발 위원회(LCDC, Land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Commission)가 골14(Goal 14)와 부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검토를 한다.골14는 도시 성장에 관한 전(全) 주(州) 단위에 걸친 개발 목표로서 LCDC에 의해 1974년 12월 27일에 채택되었다. 골14는 도시와 그와 인접한 카운티 들의 협조적인 진행 하에 각 도시가 UGB를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골은 UGB를 그림에 있어 고려해야 하는 7가지 요소에 대해서도 목록을 만들었는데 첫 번째 2개의 요소는 “필요인자(need factors)”로 말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양의 토지가 UGB 안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나머지 5가지 요소들은 “지역인자(locational factors)”로 불리어지며 바운더리가 어디에 자리잡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그렇다면 UGB를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의 토지가 필요한가? 이러한 UGB에 포함될 토지의 크기는 그 도시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시의 공무원들은 성장의 정도를 인구 추계를 만들거나 다른 주(州)나 지역 기관에 의해 기존에 만들어져 있었던 추계를 이용하여 견적을 만드는데 이러한 시의 추계는 그 지역 다른 지자체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다음으로 시(市)는 예상되는 성장을 수용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공지(空地)가 필요한지 결정해야 하고, 커뮤니티의 리더들, 계획가들 그리고 시민들이 이후의 인구에 부합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새로운 집과 오피스, 상점, 공장과 공원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견적을 작성한다.향후 필요한 공지의 양이 결정되면 계획서 효율적인 공공 서비스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Factor3은 “공공 시설물과 서비스에 관한 경제적 조항”으로 불려지고 그 규정은 하수도 공사나 물의 공급, 길을 내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기복이 심하고 험한 지형은 UGB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UGB는 일반적으로 도시를 에워싸는 UGA를 생성시킨다. Fig2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지역 안의 땅은 해당 도시의 지역적인 경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데(실선은 도시의 경계를, 실선은 UGA를 나타내며 경계를 벗어난 지역은 색이 칠해진 지역에 해당) 이 지역은 카운티의 관할 안에 놓여진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러한 땅들이 해당 도시에 통합되는 경우가 많아지며 그 도시와 카운티가 지역의 계획과 조닝을 함에 있어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해졌다.Fig2. Leesburg Urban growth area boundary map.http://www.leesburgva.gov/services/planning/townplan/1997/보통 UGA는 도시의 포괄적인 계획의 주요 논제가 되지만 그 지역이 해당 도시로 통합되기 전까진 카운티가 조닝과 땅의 인허가 문제를 관리한다. 시와 카운티는 UGA의 계획과 조닝을 함에 있어 “도시성장 관리협약(Urban growth management agreement)”를 통해 의견을 조정한다. 이러한 UGMA를 통해 어떠한 지자체가 UGA안에서의 토지 이용 조례를 시행할 것인지, 공공 서비스와 시설물에 어떤 규범을 적용시킬 것인지 등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되는대로 식의 조급한 개발을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잠정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UGB는 차후에 수정될 수도 있다. 예로써 1987년에서 1990년 사이의 4년 동안 오리건 주에서는 52번에 걸친 UGB의 확장에 대한 제안이 승인되었다. 도시는 기존의 UGB를 개정하기 위해서 주(州) 전(全) 단위에 걸친 계획의 목표인 골2에 의해 요구되는 “이의(exception)”를 따르고, UGB를 제정하기 위해 골14를 적용하여야 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해주었다.반면 UGB의 부정적인 영향은 없는가? 한 연구에 따르면 UGB의 시행 이후 시간이 경과할수록 건축 허가 발급 수가 증가하는 관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UGB의 시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토지 공급의 제약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고 토지 구입비가 상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에이커당 5가구에서 에이커당 8가구에 이르기까지 고밀도의 개발이 진행되었다.물론 1990년대 초, 중반에 일어난 포틀랜드 도시 내의 주택 가격 상승은 여러 다른 사회,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으나 UGB 시행에 따른 구입비 상승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낮은, 혹은 보통의 소득 수준에 해당되는 가구의 주택 구입을 힘들게 하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UGB의 부정적인 영향을 없애기 위해 주(州), 그리고 지방 정책 입안자들은 성장관리에 있어 시황(市況)을 바탕으로 한 대안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 UGB와는 차이가 있으나 개발제한구역을 비교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서울시와 인접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개발제한구역도 UGB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스프롤 현상을 막고 도시 주변의 녹지 및 농업지를 보전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왜곡된 형태의 개발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예컨데 단기간에 걸친 신도시 개발 등이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변 지역의 개발이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지 못한 근시안적인 계획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에 시작된 UGB정책을 Metro라는 광역적인 기관을 만들어 2040년까지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일관성 있는 개발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나가는 오리건 주의 사례는 날로 비대해지는 서울과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서울 주변 신도시 개발이 갖는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과의 차이는 있으나 앞으로는 우리나라도 도시가 팽창되며 장시간이 흐른 후 통합될 부분까지 예E 1
New York City Planning Commission뉴욕도시계획위원회는 1936년에 시헌장(憲章)에 의해 설립되고 1938년 뉴욕시장(Mayor)에 의해 지명된 7명의 멤버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위원회는 도시의 균형 잡힌 성장과 발전을 위한 계획을 이끌어나가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것은 전주민의 주거와 상업, 공업, 교통, 분배와 휴양, 문화, 안정, 편의, 건강 그리고 복리후생 등을 포함한다. 위원회는 앞에 이야기된 것들을 시의 규정에 따른 실 자산에 맞춰 적절히 적용하는데 대한 의견과 그에 대한 투표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이러한 결정을 내릴 때, 법에 의해 필요 시엔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따른 과세에 대해서도 고려하게 된다. 위원회의 역할은 전형적으로 커뮤니티 플랜, 조닝맵, 조닝 오디넌스 그리고 토지구획규정 등의 복잡한 제정의 검토와 제안을 포함한다.뉴욕의 주민 수는 1890년에 250만 명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75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해안 지역 어디서나 두드러지는 그런 변화는 20세기 초반 20년 간 도시 발전을 더 훌륭히 계획화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초반에 그런 추세는 도시를 합리적으로 만들고 미화하려는 새로운 경향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시카고와 같은 다른 미국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뉴욕에서도 이런 경향이 구체화 된다.이러한 도시미화운동이 미국의 도시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기구인 ‘도시계획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도시계획위원회(City Planning Commission)’와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임명되는 ‘지역제위원회(Zoning Commission)’는 법률에 근거해서 구성하게 된다. 그 이후 미국의 지방 정부에서는 ‘도시계획위원회’가 있으면 ‘지역제위원회’의 기능을 대체하도록 하였다.시티 플래닝 커미션의 주요한 역할 중의 하나로 지역지구제(Zoning)를 들 수 있다. 지역지구제란 간단히 이야기하면 현대 [도시계획법]에 의해 규정된 토지의 보강된 개정안에서 뉴욕시는 실질적인 최초의 조닝에 관한 사항을 1916년에 법령화 하였고, 1920년 주(州)의 가장 높은 법원에서 확정되었다. 그것은 미국 대법원에서 조닝 컨셉의 합법성을 결정하기 6년 전의 일이다. 뉴욕의 법령은 조닝을 정당화하는 규정들을 증명하는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두었다: 차들, 트럭들, 마차 등으로 혼잡한 길들, 과도하게 밀집되고 배치되어져 햇빛이 도달할 수 없는 집들; 소음, 냄새, 먼지, 운송 수단의 접근과 일반적으로 비주거 용도의 건물들이 주거지역에 침범하는 것들과 관련한 문제들의 끊임없는 충돌과 대립의 만연; 오픈 스페이스의 결핍; 그리고 단독주택지역을 잠식해가는 아파트들에 대한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개념, 즉 공존할 수 없는 기능과 이들의 분리의 필요성은 뉴욕 버렬과 동시대 다른 곳들의 중요한 문제였다.뉴욕 오디넌스(Ordinance)는 전체 시에 걸쳐 적용되어 땅의 사용과 빌딩의 높이, 빌딩 셋백 등에 대해 동시에 통제 기능을 가하였다; 이는 최초의, 충분히 고려한 끝에 나온 포괄적인 조닝 오디넌스였다. 이것은 도시를 네 가지 기능의 존(Zone)으로 나누었다: 주거지, 상업지, “제한이 없는”지역, “미정의”지역. 그것은 제한이 없는 지역을 공장지로 사용할 수 없게 제한함으로써 양립할 수 없는 활동의 분리를 확실하게 하였다; 반면, 제한이 없는 지역에 주거와 상업 용도는 허용하였고, 이는 피라미드 모양의 점층적 모양의 조닝으로 잘 알려진 실행 방법이었다. 미정의 지역의 사용은 세 가지 카테고기로 어떠한 것도 될 수 있고 대부분 미래의 항구나 터미널로 개발되는 것에 의존하였다.오디넌스는 또한 높이에 대해 5가지 등급을 포함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길의 너비에 곱하는 방식으로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였다; 5가지 종류의 지역, 안마당, 뜰 그리고 다른 오픈 스페이스도 빌딩 높이에 따라 조정되었다.뉴욕 오디넌스의 지구 계획에서 시의 공무원들은 초기의 조닝 바운더리를 결정함에 있어서 기존에 사용되던 용도와 각 지역에 적당 법령은 6개의 주제를 보함한다:지자체의 마스터 플랜을 준비하고 적용할 수 있는 도시계획위원회의 조직과 권력(SZEA에서 묘사된 유형의 조닝 플랜을 포함할 수 있는)지역의 물리적 개발을 위한 마스터 플랜의 내용정부 부서에 의한 마스터 스트리트 플랜의 채택과 계획 되었으나 아직 개통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사설 건축물의 통제에 대한 규정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한 모든 공공 공사의 인가(승인)에 대한 규정토지의 개별적인 구획의 통제지역 계획과 지역 도시계획위원회의 설립에 대한 규정땅을 팔거나 도시 개발을 통제할 수 있는 지자체에 토지의 등기를 기록하기 위한 더 효과적이고 형식화된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 토지 부서의 절차를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다.1920년대에 조닝 조례들과 플래닝과 조닝 법률은 미국 전체에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1922년까지 약 20개 주(州)는 조닝 법령을 만들었다. 1930년 즈음, 미 상무부는 47개 주에서 조닝을 입법화하기 위한 입법 단체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중 35개 주는 SZEA에 기초한 규정을 채택했고, 10개 주는 SCPEA를 사용 해왔다(몇몇 주는 두 개의 모델이 공존되거나 어느 정도 다른 법을 법제화 하였다). 오늘날, 모든 50개 주에서 규정을 이용하는 플래닝과 조닝 규정을 가지고 있고 이들 대부분은 SZEA나 SCPEA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많은 정부의 업무들이 인허가, 법 제정, 그리고 조닝 규정과 토지 구획 규칙의 다양한 범위를 포함한다. 이러한 업무들은 주의 조례, 지역관리부서, 도시계획위원회, 항소나 조정, 조닝이사회(BZA), 조닝 청취 조사원, 그리고 도시계획 스태프 등을 포함한다.주 조례(State Legislation)미국에서 지자체는 미국의 “생명체들”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에 의해 허가되고 명령함으로써 토지 이용 계획과 규정에 책임을 질 권한을 갖고 있다. 주에서 입법 법률은 대부분의 지자체가 도시계획과 조닝에 책임을 맡는 것과, 토지구획을 통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자체들은 실제적인 어려움을 야기시킬 때 고려된다. BZA는 또한 (1)어떤 결정의 상고나 조닝 시행 공무원에 의한 판단을 듣거나, (2)잠정적인 사용이나 조닝 규정에 기록된 특별한 예외 사항을(비록 이러한 권력이 입법부에 있더라도) 모으는데 힘을 가지고 있다.청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청 번째는 안마당과 높이 요구 조건의 변경에 관한 청원이다. 예컨대 건물이 모든 마당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핀모양 부지와 같은 곳에 위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청원은 실제 안마당 초과 측량 거리 요구 사항을 줄일 것을 허가 받는 것이다. 표지판과 주차 기준에 관한 청원은 대개 이 카테고리 안에 들어간다. 두 번째는 명확하거나 분류에 의해 조닝 규정에서 허가하지 않는 사용 규정으로, 사용 청원이다. 공공의 청취와 자산 소유자의 신고는 둘 다 BZA에 의한 활동에 필수적인 것이다.조항들은 자산 소유자의 개인적인 환경이 아니라 자산의 특별한 성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를 정당화한다. 청원은 예외적 허가가 주변 지역과 양립 가능하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않아야 하고, 이러한 예외 규정이 표준을 만족시키길 요구하는 BZA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BZA는 예외적 규정이 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조건을 지울 권한이 있다.상소의 절차를 전문화하기 위해서 몇몇의 커뮤니티들은 대개 비전문가인 봉사자들로 구성된 BZA를 조닝 청취 검사관으로 대체했다. 보통 도시계획가나 법률가인 이러한 관리자는 BZA가 하는 것과 같이 청취하고, 그 후 평결을 작성하고, 예외적 규정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 BZA의 결정과 같이 청취 검사관의 결정은 관리부나 법정에 항소할 수 있다.플래닝 스태프플래닝 스태프는 토지이용규정을 고려한 네 가지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한다.첫 번째로, 입법부와 협동 하면서 플래닝 스태프는 새로운 조닝이나 토지구획규정, 또는 현재의 규정을 개정할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은 이것과 같은 과업을 수행하는 조언자(고문)을 감시할 것이다. 두 번째로, 플래닝 스태프 P.E.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cavaluzzibio.shtml" Angela R. Cavaluzzi, R.A.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cerullibio.shtml" Alfred C. Cerullo, III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eaddybio.shtml" Richard W. Eaddy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golbio.shtml" Jane D. Gol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gomezbio.shtml" Lisa A. Gomez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kuibio.shtml" Christopher Kui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merolobio.shtml" John Merolo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philipsbio.shtml" Karen A. Phillips HYPERLINK "http://www.ci.nyc.ny.us/html/dcp/html/about/williamsbio.shtml" Dolly Williams, CommissionersZoning/Rezoning Projects of New York City Planning Commission 2005Manhattan - Far West Village, West Chelsea, Hudson YardsManhattan Waterfront Greenway, Virtual Tour of Malcolm X B 1
Kevin LynchFig1. Kevin Lynch, Charlotte, North Carolina, 1981. Photo: Mark B. SluderCity Sense and City Design. p.27케빈 린치(Kevin Lynch, 1918-1984)는 우리 시대 환경 디자인 이론가들의 선도자이다. 그가 일생에 이뤄낸 경력은 리서치, 저술활동, 교육 그리고 도시 디자인과 플래닝에 대한 컨설팅 등의 분야에 있어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풍부한 아이디어의 유산과 건축 형태에 있어서의 인간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통찰력, 인도적인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뒤에 남겨두었다.케빈 린치는 1918년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계 미국인(Irish-American)의 두 번째 세대였으며, 그의 조부모는 기근을 피해 아일랜드에서 이주하여 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으나 케빈 린치가 태어날 때쯤에 그의 부모는 부유한 편이었다. 케빈은 3형제 중 막내였고 시카고 북측에 근접하고 미시간 호수와 가까운 헤이즐가(hazel Avenue)에서 자랐다. 그 곳은 여러 잡다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나무가 늘어진 길들, 아파트들과 한 가족 단위의 집들과 이웃한 안정적인 도시였다. 수영, 놀이 그리고 호숫가를 따라 걷는 일 등은 언제나 그의 가장 보물 같은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어린 케빈의 이른 교육은 개인 가정 교사와 함께 집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 카톨릭 소교구의 학교에 그의 형제들과 함께 몇 년간을 다녔다. 그러나 교육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식견이 있었던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그 지방에서 최초의 진보적인 학교의 하나인 프랜시스 파커스쿨(Francis W. Parker)에 보냈다. 카톨릭인 아이는 소교구의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그 시대에 그러한 결단은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로서 하기엔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이 학교의 교장인 프랜시스 파커(Francis Parker)는 존 듀이(Jhon Dewey찾아갔다. 홀러버드는 린치가 후에 알게 되었듯 구식에 보수적이고, 보자르(Beaux-Arts)의 전통이 좋다고 믿는 사람이었기에 린치에게 미국 전통의 마지막 요새인 예일대학에 가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린치는 그의 건축 공부를 예일에서 시작하였으나 보자르적인 접근에 매우 실망하게 되었는데-후에 그는 예일대학의 건축 프로그램이 가장 보수적이고 퇴보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즈음 린치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대해 읽고 건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그에게 질문을 하였고, 몇 번의 서신이 오갔다.탈리신(Taliesin)에서의 경험은 린치의 전문적인 학교 교육에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일에서의 경험은-건축에의 보자르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대학 교육에 대하여- 그에게 전통적인 대학 교육에 반감을 갖게 하였다. 탈리신으로 가는 데는 초기의 적응이 필요했으나 그는 건축에의 “손을 움직여(hands-on)” 접근하는 교육방법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라이트 문하에서 린치는 라이트의 형태와 디자인에 대한 천재적인 시각을 존경하며 많은 것을 배우며 그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고 린치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라이트의 독선적인 태도와 빈틈없이 짜여진 도제체계에 염증을 느낀 린치는 동료들에게 탈리신에서의 생활로는 단지 라이트의 아류밖에 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그 곳을 떠나고 만다.탈리신을 떠난 후 린치는 엔지니어링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렌슬러 폴리테크 연구소(Re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RPI)에서 토목 및 구조공학을 공부하였으나 그에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린치는 RPI에 남아 후에 그의 주요한 조언자가 된 브레이(Bray)교수 밑에서 생물학을 배운다.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린치는 군에 입대하여 남태평양 전선에 배치된다.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린치는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의 The Culture of Cities그린즈버러에 남고자 했으나, 이 기회를 아깝게 여긴 아내의 설득으로MIT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1948년에 MIT에서 교수진에 합류하여 1978년에 형식적으로 은퇴함에도 불구하고1980년대까지 교직 활동을 계속하였다.MIT의 플래닝 프로그램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린치는 도시의 형상과 시각적인 환경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다. 로드윈은 린치가 모든 플래닝 분야에서 놀랄 만큼 유능한 능력을 갖췄고 어떠한 코스라도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거기엔 어떠한 열정이나 집중이 없었다. 이러한 점은 포드 재단(Ford Foundation)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주로 플로렌스(Florence)를 거점으로 유럽에서 한 해를 보내도록 후원해주면서 변하게 되었다. 린치에게 있어 이 기간은 도시 경험의 본질적인 성질에 대해 친구들과 관찰과 질문, 토론을 하고, 이탈리아의 도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며, 그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에 대한 직관적 통찰과 느낌에 대해 되짚어본 기간이었고, 린치가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무언가에 불타는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있었다고 로드윈은 말한다.MIT에서의 그의 업적은 실로 놀라웠다.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플래닝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고,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린치를 찾아왔다. 린치는 그들 각각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활동을 다른 분야까지 넓혀 새로운 연구 분야에 뛰어들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교육 이론은 소크라테스식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이르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질문하였다. 린치는 그의 학생들의 관점을 존중하였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듣기를 좋아하였으며 그 생각들로부터 배우기를 즐거워하였다. 그는 종종 그의 학생들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하곤 하였고, 그들이 MIT를 떠난 후에도 린치는 그의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하였다.그의 생을 통틀어 막대한 양의 서신과 수없이 많은 학생들, 혹은 전문 분야에 종사하며 그들의 일의 리뷰를 바라는 집에서 린치는 주 쥑슈안(Zhu Zixuan)교수와 베이징에 있는 청화대학(Tsinghua University)에서 11월에 할 강의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 곳을 떠나 그의 여름 별장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그는 25일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의 시간을 읽기, 쓰기 그리고 그의 세심한 주의에 의해 그려진 계획에 따라 정원에 종자를 뿌리는데 보냈다고 한다.Innovation by Kevin Lynch케빈 린치에 의해 새로이 도입된 것의 하나로서 장소의 명료성, 읽기 쉬움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place legibility”의 컨셉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그 장소의 구획(layout)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린치는 도시의 특징적인 성질을 분리시킬 수 있었고, 어떠한 도시를 사람들에게 있어 설레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도시의 구획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첫 번째로 마음 속에 지도(이하 멘탈맵-mental map)를 그리게 된다. 도시의 멘탈맵은 도시의 구획과 도시가 담고 있는 것을 개인적인 묘사나 상상에 의해 마음 속에 그려지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 속의 표시는 실제의 도시를 따라 만들어 지는데 많은 특징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린치는 이것들을 길(path), 접경(edge), 구역(district), 중심(node), 랜드마크(landmark)으로 정의하였다.길(path)은 관찰자가 일상적으로 혹은 가끔 지나가든지, 혹은 지나갈 가능성이 있는 길줄기를 말하고 예로써 도로(road), 오솔길(trail) 그리고 인도(sidewalk) 등이 있다. 접경(edge)은 길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라인들이며 예로는 벽(wall), 해변(seashore), 끊어진 철길, 개발지의 자투리 땅 등 연속적인 선상의 끊김이나 두 길(path)사이의 경계이다. 구역(district)은 도시의 구획(section)으로 중에서 대의 크기를 가진 도곳이 많다는 점에서 미국의 도시 중에서 독특한 도시로 꼽히고 있었고 저지시티는 외견으론 형태가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로스앤젤레스는 전혀 특이한 스케일을 지닌 새로운 도시였기 때문이다.린치는 조사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에 의해 몇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린치는 이 지역들을 사람들이 선명하고 명확하게 느끼는 정도로서 이미지성(imageability) 랭킹을 매겼다. 이미지성이란 물리적인 사물의 질로서 관찰자에게 강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는 강한 이미지를 가진 도시가 좋은 형태의(well-formed) 도시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단순해서 오히려 강력한 주제가 되었고, 그 만큼 도시설계에 전파력이 컸다. 신도시가 건설되든 기존의 도시가 계발되든 거주자들은 강한 이미지의 요소를 가지고 명료한 형태를 지닌 도시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었다.물론 도시의 분석과 해석에 5가지 요소로 단순화되는 기법은 도시의 복합적인 층, 문화, 미묘한 감성 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린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으나, 도시 설계 시에 도시의 역사와 주민의 정서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 세대의 계획가들은 충분히 도시의 특성과 이미지가 표출되는 설계가 가능할 것이다.Closing터그웰상을 받는 시상식 장에서 계획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요청 받은 린치는 “장소들(Localities)” 이라는 타이틀의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장소(place)와 커뮤니티(community, 사회공동체)와의 유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가장 성공적인 장소는 사람들로부터 소유되고, 관리되며, 열정적인 사랑을 받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많은 저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계획과 디자인은 반드시 커뮤니티 참여, 지방의 관리 그리고 직접 접해있는 환경과의 개인적인 접촉에서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성공적인 계획과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환경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하였다.도시의 이미지와 형태에 일생 동안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기울였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