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철학 4년 9634001 최정천목 차〈서론〉 영혼에 대한 물음들〈본론〉 영혼에 대한 정의〈결론〉 영혼에 대한 앞선 물음들에 대한 반론/정리【서론】영혼에 대한 물음들이 수없이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무색무형(無色無形)의 존재로서 가늠해 보기가 힘들어 더 이상 사고를 진전해 나가기가 힘들었다.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간혹 말씀하셨던 점을 증명하는 것처럼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점은 위치만을 갖은 채 무게와 형태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영혼에 대한 존재 증명 또한 내겐 항상 버거운 질문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존재한다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어떻게 설명하고 존재에 대한 명확한 입증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접하면서 영혼에 문제에 대해서 가졌던 기존의 나의 의문들에 방향의 수정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영혼에 대한 체계적인 물음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솔직한 답변일 것이다. 이제 지금껏 가졌던 영혼에 대한 물음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통해서 나열해 볼까 한다.어떤 종류의 지식도 영예롭게 칭송될만 한 것이지만, 그 다방면의 지식 가운데에서도 특히 그 보다 큰 정확도에 있어서나 혹은 그 대상의 보다 더 우월한 존귀함과 경이로움이란 이유로 인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영예롭고 소중한 종류의 지식이 있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영혼에 관한 연구를 첫 번째 위치에 놓게끔 되는 것이다. 영혼에 관한 지식은 진리 일반의 진보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저, 유원기 역, 「영혼에 대하여」, 궁리 출판사, 2001년, p 65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어떤 의미로는 혼이 깃든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연구의 목표는 첫째로 영혼의 본질적 본성을, 그리고는 둘째로 그것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 속성들 중 일부는 영혼 자체에 고유한 성향들인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 안에 영혼이 현존함으로 인해 그 동물에게 소속된다고 과 망설임은 남는다. 도대체 어떤 사태들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주체들이 서로 상이할 경우 출발점을 형성하는 사태들도 서로 상이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숫자들과 평면들이 서로 상이한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이다.【본 론】먼저, 영혼이 어떤 최상위 종 안에 속하는지를, 즉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것’인지, ‘하나의 실체’인지 아니면 ‘질적인 것’이나 ‘양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구별해낸 범주들 중의 어떤 나머지 종류에 속하는 어떤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혼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일종의 현실성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같은 책, p. 70∼71또한 우리는 영혼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분들이 없는 하나의 전체인지, 그리고 그것이 모든 장소에서 종적으로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만일 동일하지 않다면, 영혼의 다양한 형상들은 종적으로 다른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영혼이 동물의 경우에서도 하나의 단일하고 명확한 정식 안에서 정의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간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만일 단일한 정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말, 개, 인간, 신을 정의하듯이 그 각 개별존재에게도 하나의 분리된 정식을 제공해야만 하는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같은 책, p. 71더욱이 도대체 실존하는 어떤 것이 영혼들의 단일한 복수성인지 아니면 하나의 영혼-이것이 우리가 제일 먼저 조사해야만 하는 것인데-의 부분들의 복수성인지, 즉 그것은 영혼 전체인지 아니면 영혼의 부분들인지도 문제이다. 이 부분들 중 어느 것이 그 본성상 서로 구별되는 것들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제일 먼저 조사해야만 하는가, 영혼의 부분들인지 아니면 그들의 기능들인지, 정신인지 사고함인지, 잠재능력인지 아니면 감각작용의 활동인지) 같은 책, p. 72등등도 문제거리이다. 만일 기능들에 대한 조사가 부분들에 대 기인하는가, 아니면 그들 중에서 영혼 자체에만 고유한 어떤 성향이 있는가? 이점을 결정하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면서도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이들 대부분의 속성들을 고려해보면, 육체의 활동을 포함하지 않고는 영혼이 활동할 수 있거나 활동을 받는 경우란 없는 듯이 보인다. 가령 분노, 용기, 욕망과 감각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다) 같은 책, p. 74∼75. 사고는 가장 예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만일 사고도 역시 상상의 한 형상이거나 상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그것도 역시 신체를 자기 본질의 한 조건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영혼에 고유하게 활동하거나 활동을 받는 어떤 방식이 있다면, 영혼은 분리된 존재일 수가 있다.) 같은 책, p. 75만일 그런 방식이 없다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직선 안에 내포된 직선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속성들을 갖는 직선과 유사할 것이다. 가령 직선의 다른 구성요소들로부터 분리된 직선성 그 자체는 청동구를 한 점에서 접할 수 없고, 단지 직선만이 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의 영혼은 언제나 어떤 신체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신체와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성향들은 어떤 육체적인 정념, 친절함, 공포, 연민, 용기, 환희, 사랑과 증오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경우에 신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흥분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p. 75 사랑과 미움, 분노, 온순함, 공포감, 동정심, 용기, 그리고 즐거움 등과 같은 영혼의 모든 영향받음은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햐면 그것들과 동시에 신체도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강하고 분명한 영향받음이 발생할 때, 아무런 노여움이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대로는 화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신체가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사소하고도 불분명한 원인들에 의해 {사람들이}움직여지기도 한다.가령 격하게 놀라운자는 그것을 심장 주변의 피 즉 뜨거운 실체의 들끓음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변증가는 질료적 조건들을 할당할 것이지만, 자연학자는 형상 즉 정식화될 수 있는 본질을 할당한다. 비록 그것의 현실적 실존을 위해선 변증가가 묘사한 것과 같은 질료 안에 그 본질이 구체화되어야만 하지만, 자연학자가 언명한 것은 해당 사태의 정식화 가능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집의 본질은 '바람, 비, 열에 의한 파괴를 피할 보호소'와 같은 정식 안에 할당된다. 자연학자라면 그것을 '돌, 벽돌, 목재'라고 묘사할 것이다.) 같은 책, p. 76그러나 어떤 집의 본질은 그런 질료 안에 그런 목적을 가진 그런 형상이라고 말하는 제 3의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어떤 이가 진정한 자연학자로 간주될 자격을 지니는 것일까? 자신을 질료에만 한정시키는 자일까, 혹은 자신을 정식화될 수 있는 본질에만 국한시키는 자일까? 오히려 이 양자를 하나의 단일한 정식 안에 종합하는 사람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두 정식들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사실상 질료로부터는 분리될 수가 없는 질료의 성질들이나 속성들에 관심을 갖는 그런 유형의 사상가는 없다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을까? 물리학자란 이렇게 저렇게 정의된 신체나 질료의 모든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속성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같은 책, p. 75∼78그는 이런 성격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속성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려하도록 내버려둔다. 어떤 경우 그것은 목수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일 것이고, 사태에 있어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추상의 노력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종류의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속성들의 경우에는 수학자가 그것을 고려할 것이고, 사태에 있어서나 사고상으로나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속성들의 경우에는 제일 철학자나 형이상학자가 그것들을 다룬다. 그러나 여담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되돌아가서 영혼의 성향들은, 가령 열정이나 공포와 같은 그런 성향들이 부착되어 있는 동물적 생명의 질료적 기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동일하다는 견해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호흡을 생명의 특징적인 표시로 간주했던 것이다.) 같은 책, p. 83∼86동물들의 신체들 자체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에선 환경이 동물의 신체를 압착하듯이, 그리고 신체들에 운동을 전달하는 아텀들을 밀어내는 성향을 갖듯이, 신체 내에서도 호흡 작용에서 안으로부터 발출되어 나오는 유사한 아텀들에 의한 보강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대기의 압력에 반작용을 하고 환경의 힘을 통합함으로써 이미 내부에 스며들어 있는 아텀들의 압출을 예방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저항을 유지할 수 있는 한에서만 계속해서 살 수 있다.피타고라스 학파의 교리도 동일한 견해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어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공기 중의 미진이, 다른 이들은 그것들을 움직이는 것이 영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미진들은 그것들이 완전한 정적 속에서도 항상 운동 중에 있는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같은 책, p. 84∼85영혼은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이들에서도 동일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이들이 운동은 영혼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견해와 다른 모든 것은 영혼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영혼만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신념은 그들이 먼저 스스로 움직여지지 않은 것은 운동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본데서 기인한다.이와 유사하게 아낙사고라스도 사물들의 운동의 원인은 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데모크리투스의 입장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데모크리투스는 나타나 보이는 것을 참으로 있는 것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영혼과 정신을 대충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헥토르는 정신이 혼란된 채 누웠다'라는 구절을 가지고 호머를 칭찬했다. 그는 정신을 진리를 다루는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영혼과 정신을 동일시하였다. 이들에 대한 아낙사고라스의 견해는 보다 더 애매하다. 여러 곳에서 그는 선과 질서의 원인은 정신이라고 하고 다른 한다.
■ 중세의 보편 논쟁중세보편논쟁의 발단유럽의 중세 철학에서 을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 논쟁을 말한다. 보편에 대한 문제는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의했는데, 포르피리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테고리론》의 서문에서 ① 유(類;genus)나 종(種;species)은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또는 단순한 표상상(表象像)에 지나지 않는가 ② 만일 그것들이 실체로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물체적인가 또는 비물체적인가 ③ 그것들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3가지 문제를 제출하였고, 로마의 철학자 A.M.S.보에티우스가 그 주석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이후, 중세 특히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보편에 관한 여러 가지 존재론적?논리학적 견해가 나타나 논쟁이 오갔다Porphurios : 새롭게 이 문제를 제기함.보에티우스 : 본격적인 질문들을 제기함.●보편개념으로서의 유와 종이 실재하는가, 정신의 구성물에 불과한가●그것이 실재한다면 물질적인가. 비물질적인가●개별자와 별개로 존재하는가, 그것의 내부에 있는가보에티우스의 정식화 :●보편개념은 정신에서는 비물질적으로, 사물 내에서는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개별자 안에 존재하나 정신에서는 별개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이 후의 논쟁들 → 실재론, 유명론, 온건 실재론■ 과장된 실재론전제 : 사유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가 완전히 일치한다.주장 :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관념은 정신 밖의 실체와 대응하며 그것을 반영한다.따라서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며, 유나 종은 실재 안에 존재하고, 개체 는 이 보편자를 공유한다.안셀무스 : 로셀리누스(Rscellinus)의 삼신론에 반대 - 각각의 위격은 신이지만 전체 적으로는 유일한 신이라는 삼위일체를 주장.■ 유명론로셀리누스 : 어떤 유의 추상 보편자는 하나의 사물과 대응되어서는 안 된다.개체만이 자연 내에 존재하며 보편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개체를 결정한 후 에 추상해낸 것이 보편자이므로 그것은 실재성이 없는 말이나 명사에 불과하다.오캄(Ockam) :●인식에는 감각적 직관 혹은 내적 반성적 직관 이외에는 필요치 않으므로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의 능동적 이성을 상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따라서, 우리의 인식이 추상작용을 통해 일반 관념이나 표상을 형성한다고 하지 만 일반 관념은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실재성만을 지닐 뿐, 실재 사물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만약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면 창조에 앞서 신의 마음 속에 보편 개념으로 존재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신의 의지를 속박하는 결과가 되어 신의 자유로운 창조와 모순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온건 실재론토마스 아퀴나스 : 온건 실재론을 정식화함.● 존재를 본질과 실존의 유비적 합으로 이해함 - 실재론과 유명론의 양극단을 지양함.● 실재적 존재는 실존과 본질의 두 필연적?내적 구성원리의 합이므로 본질 그 자 체로는 보편도 개별도 아니고, 보편과 개별을 매개하는 중재원리라고 한다.● 토마스 입장에서의 관념론자와 유명론자 비판- 극단적 관념론자 : 존재를 실존을 배제한 본질의 측면에서 일의적으로 파악.- 유명론자 : 실존의 일의적 개념으로 존재를 파악하여 양자는 각기 본질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추상적 보편개념과 개별자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추상적 개별자 개념 에 빠졌다.● 보편자가 이데아로 존재하며 종의 모든 구성요소 속에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로 사물 내에 존재하고, 개체로부터 보편 개념을 추상화한 후에는 정신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 토마스는 보편 논쟁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의 양극단은 잘못된 존재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왜 보편의 문제가 대두되었나?중세 동안에는 권위, 복종, 종속이라는 말이 생활의 언어에서 중요한 용어들이었다. 정치, 종교, 도덕, 교육, 철학, 과학, 문화, 예술이라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최고였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표자이며 계시된 진리의 원천으로서 교육의 수호자, 도덕의 검열자, 지적?정신적 문제에서 최후의 법정, 사실상 문명의 기관이며,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였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받는데,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있겠으며, 철학은 신학의 하녀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 이성이란 것 또한 계시된 진리 혹은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체계화하고 이해될 수 있게 만드는 데 국한될 뿐이었다.중세의 이 같은 모든 여건은 보편논쟁이라는 사상싸움의 장을 만들기에 충분한 잠재요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결론이 정해지고, 사고의 범위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세계 안에 단정지어진 시대에 사고 있는 이들에게 그 한계의 범위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은 매 순간 날 뛰고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보편〉에 관한 문제가 왜 논쟁의 장이 펼쳐질 만큼 묵과될 수 없는 것이었을까란 의문이 생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중세의 정치사회는 기독교가 유럽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사회였고 중세의 정치사상은 세속적인 정치권력과 교회의 권위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었으며, 양자의 관계가 어느 하나의 우위성을 주장하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보편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사상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에 관한 문제였다는 생각이다.이 때문에 생존을 위협하는 사상이 거론되었을 때, 이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고 무너뜨려야 되는 숙명이 있었던 것이다.중세철학이 지닌 한계로 신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을 꼽는다. 근원이란 물음 뒤에는 항상 신이 자리잡고 있어야 했던 사실 속에서 신도 인간이 만들어 낸 창조물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 본다. 중세는 권위라는 이름이 권력이라는 지위를 얻어 사상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것은 아닌가란 생각들을 해 본다.■ 중세의 신학①초기에는 교부철학이 정치에 관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를 고조하는데만 이용했고 권력과 권위는 어느 하나가 우선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음②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 로마교회의 교권확립이 이루어짐에 따라 12세기에는 성 베르나르와 요하네스 등에 의해 교회 우위론이 전개되고, 13세기의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는 교권의 절대적 우위론이 확실히 정착됨(신에 의해 교황에게 양도된 두 칼 중에서 정신계의 칼은 교황이 보유하고 물질계의 칼은 황제에게 양도함으로서 비로소 황제가 황제로서의 자격을 갖는다는 주장이 채택됐음을 의미)③그러나 14세기 봉건 사회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속권우위론이 강해짐(신이 각각 두 칼을 교황과 황제에게 부여했고 세속계의 통치자는 신이 직접 선택한 것이므로 교황에 의해 개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안셀무스〉성인(축일은 4월 21일).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북이탈리아의 아오스타 출생. 1060년 젊은 시절에 당시의 유명한 학자 란프랑쿠스를 흠모하여,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30년간을 기도와 사색에 몰두하면서 저서 《모놀로기움 Monologium》 《진리론》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앙》 《신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가:Cur deus homo?》 등을 저술하였다.109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임되었는데 훗날 영국의 윌리엄 2세와 헨리 l세가 신부서품 문제로 교회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 때, 이에 반대하여 ?성직서임권 투쟁(聖職敍任權鬪爭)?을 벌여 2회나 국외로 추방되었다.그는 ?알기 위해 믿어라(Crede ut. intelligos!)?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그의 근본신념이었으므로, 이를 관철하는 것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기도 하였다.또한 그는 이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신비(神秘)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곧 올바른 신앙임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나면서부터 타락하는 무력한 인간은 신의 은총 없이는 영원히 구제될 수 없다?고 설파한 기본신념이 되기도 하였다〈오컴〉잉글랜드 오컴 출생.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命題)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認識論)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그의 입장은 유명론(唯名論)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思辨神學)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直觀表象:notitia intuitiva)으로, 개체가 실재(實在)이고, 보편자(普遍者)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個)에 관하여 술어(述語)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0. 희랍 사상의 해석 - 번역의 문제새로운 단어 하나의 출현을 만약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 소개한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컴퓨터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설명해주기란 몹시 어렵다. 이는 비단 현재 새로이 사용되는 용어만을 과거로 전이시키는데 국한하지 않고 과거에 소거된 의미들을 현재에 해석하기에도 그 소통이 약간은 불투명함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대라는 가정 아래, 눈이 내리는 지방에서 백설공주라는 의미를 소개해주기는 어렵지 않아도 눈이 내리지 않는 지방에서 백설공주라는 의미를 전달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상이한 단어를 차용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것이 치밀한 고증이라는 탐구형식 아래 사용되지 않으면 그 의미의 정교한 도형들은 놓쳐버리고 만다.이 두 가지-시간적, 공간적-의 해석적 방법의 ‘혼란’이 우리가 희랍사상을 알기 위해 배경으로 요구하는 최소한 혹은 최선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희랍은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 속할 뿐 아니라 약 2500년을 넘어 서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들의 혼란 속에서 해석되는 어휘들 중 우리가 매우 상식적으로 사용하는 어휘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유용하게 소개될만한 중요한 어휘를 예로 들어보자.arete(희랍어) - virtue(영어) - 德(한자어)당시 arete 의 뜻은 ‘어떤 것에 있어서 능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어떤 것에 있어서 훌륭함’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기능적인 측면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뜻이 일반적으로 영어로 해석되었을 때 virtue 라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원 뜻을 의미하는 단어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어 virtue 와 德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가치로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좋음’으로 수렴되는 여하의 의미일 것이다. 당시 희랍의 용법상 arete 라는 말은 단독으로는 불완전한 말이라고도 하며 “무엇의 arete 인가?” “누중에서 제 7 서한이 그의 것이라고 확신해주는 것이니 만큼 그 서한에서 그의 성격을 짐작해주는 부분이 있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몹시 존경했다는 사실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며, 때문에 정치적인 구도에서 민주정치에 회의하는 입장임이 나타나 있다.플라톤에게 끼친 철학적인 영향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리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쯤으로 수렴되고 있는데 각각의 사람들에게 사사받은 영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피타고라스에게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영혼 불멸에 대한 내세적 신앙, 어조, 동굴의 비유 내에 포함된 모든 것이며, 수학의 존중과 지성과 신비주의의 결합 등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실재는 영원성을 지니며 시간적 제한이 없고 변화는 모두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그가 말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다’ 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입장, 즉 감관계에 영속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며 소크라테스에게는 윤리 문제의 우월성, 세계관의 목적론적 경향, ‘좋음’이라는 개념의 영향을 들 수 있다.그가 태어난 연대로부터 죽은 연대까지의 여러 정치적 변화들을 소개하는 것은 여기에서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그가 이상사회의 모델로서 관심을 가진 스파르타의 여러 모습들을 간략히 적어보기로 한다. 스파르타의 탄생은 북방에서 침입한 도리아 인에 그 모태가 있으며 이곳 원주민들을 농노로 삼고 ‘천민’이라고 불렀다.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천민은 늘 노예 상태를 분개하고 있었으며 가능하면 반역을 꾀했으나, 법에 전혀 저촉되지 않게 죽일 수도 있었다. 현대로 말하면 정체체제는 나치스의 그것과 유사하며 시민들이 하는 일은 전쟁뿐이었으며, 전쟁을 위해 태어나면서부터 단련을 받고 아이들을 억세게 만들어 고통에 무관심하게 하고 규율에 복종케 하는 것에 국가의 목적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군사력 증대를 원하는 만큼 출생률을 위해 결혼을 장려하였고,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남자들은 법률로서 ‘불명예’로 간주되었다. 스파르타인들은 각자 자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인간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와 같다. 우리들은 땅 밑에 있는 동굴 안에 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의자에 붙들어 매여 있어서, 뒤돌아볼 수도 없으며, 항상 출입구와 맞서 있는 벽 밖에 볼 수가 없다. 이 갇혀 있는 자의 뒤쪽에, 즉 입구 쪽에, 동굴을 가로질러 사람 키 만한 벽이 있고, 그 뒤에서 불이 타고 있다. 그런데 이 불과 벽 사이를 인간들이 지나다니며, 이 때 이 벽보다 높은 사람의 모습과 형체, 동물의 모습 및 도구 등을 짊어지고 다니게 되면, 불 때문에 생긴 이 사물들의 그림자가 동굴의 벽에 비춰지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의 울림도 갇혀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된다. 이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와 울림 외의 다른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런 모사를 참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들이 뒤를 돌아볼 수 있고, 여태까지는 그 그림자만 보고 있던 대상 자체를 직접 불빛 속에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울림 대신에 소리 자체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관해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동굴에서 빠져나와, 태양 광선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 살아있는 동물 및 진짜 사물들 자체를 보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런 현실 때문에, 눈이 부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동굴에 머물러 있는 죄수들에게, 너희들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은 본래적이고 참된 현실이 아니라고 설명해 준다면, 아마 아무도 이들을 믿지 않을 것이며, 이들을 비웃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갇혀 있는 죄인들을 풀어 주고, 참된 세계의 빛으로 인도해 주려고 노력한다면 이 사람은 죽음을 당하게 될 런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갇혀 있는 죄인들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을 가상의 세계와 비유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참된 존재에로 인도해 주는 것이 철학자의 과제이다. 그런데 이 참된 존재란, 물론 이 지하여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혼 안에 지식이 있지 않을 때,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을 넣어 주듯, 자신들이 지식을 넣어 준다고 한다.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을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한다. 실재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을 관상하면서도 견디어 낼 수 있게 될 때까지 해야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좋음이라 한다.혼의 이른바 ?훌륭함?들은 신체적인 훌륭함들에 가까운 것들인 것 같다. 이전에는 그 안에 있지 않았으나, 습관과 단련에 의해 나중에야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똑똑함?의 훌륭함은 무엇보다도 더 신적인 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으며, 그 전환에 의해서 유용하고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반대로 무용하고 해롭게도 된다.교육을 받지 못하고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도 끝까지 교육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 받은 자들도 결코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하게 될 모든 것을 향함에 있어서 목표로 삼아야 할 그러한 인생에 있어서의 목표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뒤의 경우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축복 받은 자들의 섬들에 이주한 것으로 믿고서 공사간에 자진해서 행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국가론을 통해서 그 정점에 이른다. 그는 철학자의 진정한 역할을 진지(眞知)에 대한 열정과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파악한다. 철학자는 인간의 정체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밝은 길 위에로 이끌어감으로써 공동체의 선을 극대화한다. 철학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강조는 가 로부터 생겨나지만, 동시에 인간 성격의 정체와 형태를 바꾸는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와 형태를 개조함으로써 인간 성격의 정체와 형태를 변모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면에서 플라톤을 "자연의 힘이 밖에서 온다"는 관점에 귀속시킬 수 있을 것같지만, 하지만 그는, 이데아론에서 보여지듯이, 철하게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를 통해서 다른 존재들이 존재를 갖게 된다, 즉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가 진리 인식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보고 학문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항상 '현실을 초월한' 이데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감각적인 세계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감각적인 세계의 근저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래서 감각적인 세계를 한꺼번에 질서정연하게 이해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플라톤의 대화편 국가(Politeia)는 그의 이상사회를 구현해낸 이론으로서 최초 유토피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 이는 세 가지 구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이상 국가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고, 여기에서 철학자는 통치자가 되어야한다는 결론을 내포하며 후에 철학자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부분이 둘째 부분이다. 셋째 부분은 여러 종류의 법률에 대한 특징이나 결점들을 논하고 있다.국가론의 명목상 목표는 정의(正義)를 정의를 내세우는 데 있고 그러한 정의 개념을 매듭지어 놓는다. 즉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 세부적인 것을 살펴보기보다 전체적인 것을 보는 편이 보다 용이하므로, 개인을 의롭게 하는 것이 무언인가를 탐구하기보다 의로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를 탐구하는 편이 좋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속성이 될 터이므로 우선 그런 국가에 대해 묘사하고 나서, 이 완전성 가운데서 어느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플라톤은 시민을 세 계급으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통치자, 군인, 평민으로서, 이 중에 통치자만이 ‘정치권력(Political Power)'를 소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제적 여유나 이하의 자유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오해이며 단지 정치권력만이 언급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통치자 계급의 인원수는 나머지 둘 보다 훨씬 적어야 하며 처음에는 입법자를 통해 선출하며 후에는 점차 세습되어 가는 과정을 밟는다고 설명다.
영화 를 통해서 바라본색(色)의 의미와 조작된 욕망에 대하여- 목 차 -[서론]앞으로의 방향제시[본론]1. 에서 색이 갖는 의미2. 에서 보여지는 조작된 욕망[결론]에서 찾는 영혼에 대한 물음【서 론】제목 자체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이 영화에 있어서 색이 가지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할뿐만 아니라 각각의 색이 상징하고 있는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도구를 넘어서,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주제로서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즉 각각의 색이 의미하고 있는 주제와 이미지로써의 색깔 그 자체는, 곧 각각의 영화의 주제와 형식이 되어 절묘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색은 영화 속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작은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배경을 형성하기도 하며, 어느 한 화면을 결정짓는 색으로도 나타난다. 심지어는 가장 주제가 강조되는 순간에 단지 그 색만으로 한 화면이 표현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면서, 중심이 되는 색채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형상화 한다.어떠한 영화 속에서든지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요소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며 이끌어 나간다. 이는 더 나아가 영화의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그 영향력이 작던지 혹은 크던지 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의 색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영화들이 색에 의한 주제의 형상화와 상징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이러한 까닭에서 색이 갖는 조작된 욕망으로써의 기능 또한 무시되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다. 〈블루〉에서처럼 색은 영화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영화가 도입부에 들어가기도 전에 말해주고 있다. 색은 인간의 시각을 통해 투영되어 이성이 갖는 기능을 제약하여 조작된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견해로 영화 〈블루〉를 통해 영화 속에서 색이 갖는 의미와 조작된 욕망으로 치닫게 하는 기능을 부족하지만 적어본다.【본 론】란 자유를 상징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의 자유는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하여 말하고자 한 자유는 개인적인 자유, 삶 자체의 자유인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주제는 '자유'이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초점은 줄리(줄리엣 비노쉬)의 사랑 이야기로 맞춰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리에게 포커스를 맞춘 1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유혹적인 이미지와 홀린 듯한 음악과 함께 줄리라는 한 여성의 자기 발견 과정을 따라가며, 사랑과 관대함 그리고 예술로 완성되는 그녀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줄리에게 있어서는, 믿고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과 그 정체를 확인한 것이 그녀를 옭아맸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힘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패트리스의 유작을 완성하려는 남편 친구 올리비에의 작업에 참여하며 그의 간절한 사랑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줄리가 그토록 거부하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자유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의 수용이야말로 자유에 부여된 절대적인 과제에 대한 신중한 결정이며 진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자유'를 주제로 하고는 있지만, 개인의 사랑에 대해서도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하지만 에서 말하는 자유는 매우 슬픈 개념이다. 줄리는 가족과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자유로워졌다. 감정적 미련을 저버리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부를 소유한 채 그녀는 빈 공간을 향해 떠난다. 키에슬롭스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대하고 버려진 듯한 실내 수영장의 무덤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줄리가 올리비에와의 형식적인 섹스를 치른 후 돌아오면서 주먹을 벽에 긁는 아주 극단적인 육체적 고통의 순간도 보여준다. 고통은 다른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고 강렬한 감정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과 동일하다.그러면서 영화 속 전체 화면에 등장하는 짙고 푸른 블루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통 속에서 등장하는 파란하늘이란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어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짙고 어두운 블랙이나, 짙은 보랏빛의 이미지를 보여줬다면 납득이 갈만한 부분에 감독은 이와 상반된 블루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블루〉가 갖는 의미가 단순히 희망과 자유의 상징으로써의 기능만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이 갖는 기쁨의 모습이 슬픔과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쁨의 정점 뒤에 찾아오는 슬픈 허무함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르막길의 끝에 정상이라는 끝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리막이라는 또 다른 시작이 자리잡고 있음을 색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짙고 푸른 블루 뒤에 나오는 음악은 중간자의 기능을 담당한다. 슬픔뒤에 멈춤을 암시하는 휴식처를 자리잡게 하여 기쁨과의 의미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영화 속에서 줄리의 슬픔은 너무 깊어서 울 수도, 심지어 느낄 수도 없다. 너무 냉정하고 조용해서 자신의 상실에 대해 무관심해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은 그녀가 느끼는 고통에 대하여 잘 말해준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줄리는 삶의 모든 의미를 잃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잔해로 남은 딸의 보석 상자를 확인할 때 그녀의 입가는 가늘게 흔들리고, 죽은 남편의 서재로 가는 복도에서는 몸이 흔들린다. 또 이웃집 사람이 딸의 방에 걸려 있었던 푸른색 유리 장식을 만질 때 그녀의 시선은 방어적으로 돌변한다. 줄리는 고통스런 기억들 때문에 시골의 저택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는 그녀를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하고 더 깊은 슬픔과 불가사의한 침묵의 세계로 인도할 뿐이다. 그러던 중 남편의 동료였던 올리버(베노이트 리젠트)가 그녀를 찾아와 남편이 완성하지 못한 통일의 교향곡을 함께 작업하여 완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처럼 는 치유와 감정의 정화에 대해 몹시 사실적이고 내밀화하게 한다.그러면서 여기서 보여 지고 있는 욕망의 조작에 대한 기능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키에슬롭스키가 관객에게 던지는 불안감에 대한 조작은 슬픔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에서 보여진다. 끝을 알 수 없게 만들 정도의 극도의 냉정함은 관객에게 언제쯤 분노와 슬픔의 폭발이 이어질 것인지 극도의 불안을 안겨준다. 이제 슬픔의 모습을 내비쳐도 함께 울고 번민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울고 고통스러워하라는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에게 키에슬롭스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관객이 그 같은 지루함에 서서히 지쳐갈 때쯤에 키에슬롭스키는 섹스라는 이상한 답변을 한다. 〈블루〉의 등장하는 섹스는〈키에슬롭스키적인 섹스〉라는 의미를 두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섹스가 갖는 종족의 보존의 기능도, 단순히 쾌락적인 욕망의 몸짓도 사랑에 대한 확인도 아닌, 이 부분에서 나오는 섹스는 과거로의 회귀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격렬한 몸짓조차 없이 행해진 섹스 뒤에 줄리가 취하고 있는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태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태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은 자신이 겪은 슬픔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애처러운 모습으로 동정심을 갖게도 하지만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줄리가 보이는 모습은 아무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없던 근원으로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가장 근원적인 멈춤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 철학 수고를 통해목 차서론 전개 방향/ 헤겔 철학의 요지본론 맑스의 경제학철학수고의 내용결론 맑스의 주된 사상【서론】헤겔이 바라보던 사회와 맑스가 바라보던 사회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매번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져봤던 의문이다. 경제학 철학 수고를 통해 맑스가 가졌던 사상들이 이해하기 위해 헤겔을 다시 꺼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헤겔을 다시 붙들고 헤겔과 맑스의 사상속으로 빠져본다.맑스를 접하면서, 왜 과거 우리네 정치꾼들이 좁은 소견으로 그토록 맑스의 사상을 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맑스가 가진 생각은 머리 속에 간직한다는 것만으로 혁명가가 된다. 이러한 말로 밖에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는 맑스의 사상은 사회에 던지는 파장력이 크다. 자본론에 이어 맑스의 힘을 느끼며 부족한 보고서를 시작한다. 맑스를 이해하는데는 헤겔을 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맑스의 사상 속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헤겔 철학이 갖는 중요성을 서론부분에서 대략적으로 언급할 까 한다.헤겔 이전에 데까르트부터 문제시되어 온 철학의 주된 관심은 인식론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합리론자들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얻은 합리적 이성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흐름은 칸트에 의해서 종합되었는데 칸트는 주관적 인식의 틀과 감각경험이 결합되어서 지식이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 속에서는 항상 당연한 것으로서 전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관과 우리 바깥의 사물인 대상이 서로 떨어져서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 주관과 대상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주관이 대상을 정말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헤겔은, 쉽게 말해서, 이 양자를 일치시킴으로써 기존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이러한 일치와 통합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철학, 윤리, 종교 등에 대한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였다.헤겔이 왜 이러한 방향으로 전체적인 철학구성을 계획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바람직할 것이다. 즉 모든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되어 보이고 정리되어 보이며 동시에 그 하나의 원리는 정말로 가치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즉 그 원리는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도 이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철학자이든 과학자이든 학자들이란 이런 질서정연하고 포괄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헤겔 철학이 19세기까지 독일과 유럽의 철학계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헤겔 사회철학의 과제는 프랑스 혁명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옹호하는 근거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혁명적 질서의 근거를 자각하지 못한 혁명적 의식의 국가이념은 구분 없이 절대 평등을 추구하여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그 유기적 편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고 여겼다. 결국 '혁명적 의식'은 자체의 실체적 기반에 적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를 비판하고 그 자신은 혁명의 정당성의 근거를 노동에 기초한 역사적 형성력에서 찾고 그것에 자율적 활동 영역인 시민 사회를 부여하여, 그 위에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본론】위에서 언급했던 헤겔 철학의 단편적인 언급에 이어 맑스가 경제학철학수고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요약해 본다.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노동자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자본가들 사이의 결합은 습관적이고 효과적이다. 노동자들의 결합은 금지되어 있고 노동자 자신들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준다. 노동자에게 있어서만 자본·토지 소유·노도의 분리가 하나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이며 유해한 분리이다.) 칼 막스 저, 최인호 저, 「1844년의 경제학철학수고」, 박종철출판사, 1991년, p. 223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자본, 지대, 노동의 분리는 치명적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수요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생산을 규정한다. 노동자의 생존은 다른 모든 상품의 생존 조건으로 환원된다.) 같은 책, p. 223공급량이 수요를 초과하면 가격을 구성하는 부분들인 이윤, 지대, 임금 중의 하나는 가격 이하로 지불되고, 이러한 지불들 중의 한 부분은 따라서 이런 식의 적용을 벗어나게 되며, 그리하여 시장 가격은 중심적으로서의 자연 가격을 향해 이끌려간다. 그러나 현저한 분업이 있는 곳에서 노동자가 그의 노동에 다른 진로를 터주는 것은 극히 어렵고 자본가에 대한 그의 종속적 관계로 말미암아 제일 먼저 손해가 그에게 닥쳐온다. 따라서 시장 가격이 자연 가격으로 이끌려갈 때 노동자는 가장 많이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상실한다.) 같은 책, p. 223노동자는 자본가의 이득과 함께 이득을 얻을 필요는 없으나, 손해는 반드시 자본가와 함께 본다. 그래서 자본가가 제조업상의 혹은 상업상의 비밀을 통해 독점이나 혹은 그의 토지의 유리한 위치로 인해 시장 가격을 자연 가격보다 높게 유지한다 해도, 노동자는 이득을 볼 수 없다. 노동 가격은 생활수단의 가격보다 훨씬 더 불변적이다.) 같은 책, p. 223이 같은 단순히 자본가가 가진 자본의 영향력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주종관계는 영구히 지속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결성되는 조합은 자본가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기에 어떠한 방법으로 불법으로 간주되어 무참히 깨지기 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자본가가 맺는 담합은 사회 경제에 더 큰 악영향과 불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자본가가 가진 영향력으로 얼마든지 묵과된다. 이 같은 경제구조의 불이익은 한없이 노동자의 불만과 굶주림을 가져다 줄 뿐이다. 때문에 노동이 하나의 상품이라면, 그것은 가장 불행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같은 책, p. 234자본은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들에 대한 지배력이다. 자본가는 그의 인격적인 혹은 인간적인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소유자인 한에 있어서 이러한 힘을 소유한다. 아무것도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자본의 구매하는 힘이 그의 힘이다.) 같은 책, p. 236자본의 이윤 혹은 이득은 임금과 완전히 다르다는 데 노동자와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는 이중적 방식으로 나타난다. 서로 다른 자본들에 속해 있는 감독 노동과 지휘 노동이 동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본의 이득은 전적으로 사용된 자본의 가치에 따라 규정된다. 대공장에서 이러한 노동 전체는 한 사람의 지배인에게 위탁되는데, 그의 봉급은 그가 생산고를 감독하는 바의 자본과 어떠한 비례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비록 이 경우에 소유주의 노동은 거의 무로 환원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자본과 비례하는 이윤은 요구하는 것이다.) 같은 책, p. 236이 때문에 자본가는 일하지 않고, 자신이 투자한 노동력의 대가보다 월등한 자본 축적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가진 자는 계속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토지 소유자의 권리는 약탈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토지 소유자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씨도 뿌리지 않은 곳에서 수확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토지의 자연적 산물에 대해서조차 지대를 요구한다. 소유자의 권리가 어디까지 용납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까지 한다. 토지 소유자는 개량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까지도 지대를 요구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개량 비용에 대한 이자 혹은 이득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이러한 원초적 지대에 대한 추가, 첨가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개량들이 항상 토지 소유자의 기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임차인의 기금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지료를 갱신한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토지 소유자는 통상적으로 마치 이 모든 개량들이 자기 자신의 기금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와 같은 지대의 인상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토지 소유자는 인간의 손을 통해서는 최소한의 개량도 전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조차 때때로 지대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