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曹 )의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상과 예술적가치- 뇌우를 중심으로 -1. 조우는?화극 작가·이론가. 본명은 萬家寶, 湖北省 潛江 사람. 南開中學을 졸업한 뒤 1928년 南開大學에 입학했으나, 입센·세익스피어·체홉 등의 서양 희곡에 심취하여 도중에 淸華大學의 서양문학과로 전학함. 1933년 졸업하면서 처녀작 『雷雨』를 지어 1934년 북경의 『大學季刊』에 발표하여 당시 희그계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음.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희곡을 전공하면서 이론과 창작에 몰두함. 1935년 두 번째 작품 『日出』을 지어 1936년에 발표하여 『大公報』의 文藝戱劇賞을 받음. 그 뒤 『黑字二十八』(1939), 『北京人』(1940), 『正在想』(1940), 『家』(1942) 등을 꾸준히 발표하여 희극계의 확고한 지위를 차지함.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북경시인민예술극원 원장, 북경문학예술연합회 주석 등을 역임함.2. 『뇌우(雷雨)』의 극 전개 및 인물분석『뇌우』는 20년대 전후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한 봉건가정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다. 희극은 하루 중 오전으로부터 오후2시까지의 시간과 두 개의 무대배경인 주씨 집 응접실과 노가집에 집중을 시켜 주복원(周樸園) 가정 내외의 각 구성원들 사이에 얽힌 전후 30년간의 복잡하고 깊은 갈등으로부터 봉건가정의 불합리한 관계가 만들어낸 죄악과 비극을 묘사해 냈으며, 봉건가정의 잔인함과 부패함을 통해 전 암흑사회가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리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 듯하다.중심인물은 주복원(周樸園)으로, 성공한 광산 경영주이다. 그는 두 번 결혼하는데,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죽었다고 믿는다. 그는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낳았고, 무감각하고 냉담한 태도로 모든 사람을 다루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훌륭하게 서구화된 유교적인 가족 전통을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복잡하게 짜여진 가족관계속에 안배되어 있는데, 작품의 초입 부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하나하나 진실을 알게된다.극의 전개는 정말1막에서는 현재의 54세 주복원과 35세 젊은 부의 번의( )간의 모순·갈등이 묘사되고 있다. 제2막에서는 과거에 주복원에 의해 큰아들을 두고 갓난아기와 함께 버림받은 시평(侍萍)이 등장, 제1막의 모순·갈등을 심화시키면서 30년 전의 과거를 극적 상황으로 재현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 상호 비극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제3막은 극적 갈등이 더욱 발전하여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동작이 격렬해진다. 복잡하게 뒤얽힌 애정관계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을 향하게 된다. 이 모든 갈등관계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주복원과 연계되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제4막에서는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어 번의( )는 주복원으로부터 받은 모멸감에다 이성으로서의 애정관계로 발전된 적이 있는 전처의 아들 주평(周萍)의 질책에 격분하여 보복을 결심한다. 그녀의 보복은 극을 절정으로 이끌어 연이은 비극적 종말, 즉 자녀들의 자살을 초래한다.{) 중국현대문학전집 『뇌우』1989. 중앙일보사. 김종현 역. p.226 (작품해설)주복원은 당시의 봉건적인 가부장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봉건가정의 가장으로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극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요한 측면은 봉건가장으로서의 측면이다. 봉건지주 출신이었던 그는 유학을 통해 습득한 자본주의적 지식으로 광산개발에 성공하고 자신의 경제적 능력과 유학을 통한 지식으로써, 봉건계급의 근성에 따라 봉건성이 짙은 자산계급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주복원을 통해 생동감있는 자본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바로 주복원이 보여주는 봉건적 가부장의 권위와 압박에 대해 번의의 의견이 충돌·대립하면서 작품의 주요한 모순을 이루고 있다.번의는 헤어날 수 없는 늪과 같은 당시의 환경 속에서 절망에 몸부림치는 불쌍한 여인이다. 그녀는 한 인격체로써 갈망하는 자유를 요구하는 자산계급 여성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녀가 절망으로부터의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전처의 아들 28살 주평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건적 지배와 주평의 배신에 대한 그녀의 복수는 자유로운 인격으로서의 해방쟁취의 방법인 것이다.노대해(魯大海)는 이 작품 가운데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주장이 뚜렷하고 노동자들을 학살한 주박원의 죄상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등 자산계급의 대표격인 주복원과 투쟁해 나아간다. 그의 출현으로 하여 두 집안간(주복원과 노쉰의 집안)의 모순을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립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노동 계급을 따라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다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다.3. 『뇌우(雷雨)』에 반영된 사회상당시 그의 세계관은 여러 가지 불안전한 사상들로 뒤엉켜 있었지만, 그 중 半封建的 애국사상과 인도주의 정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조우는 이러한 사상을 기저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여, 자신의 성장과정을 통해 자주 보고 들으면서 익숙해진 중국의 봉건가정과 사회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은 일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며, 半封建·半植民地 상태에 놓여 있던 중국 사회에서 출생·성장하면서 현실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부당한 현상들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려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가 현실생활에서 보아온 봉건적인 가부장제 하의 모순들의 원인을 점차 사회로 확장시키면서 그 모순들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더욱 깊어 갔으며, 하층 민중들에 대한 애정이 곧 그의 반봉건적인 인도주의 정신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또한 주복원이 노대해 등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진압은 바로 현대문명 이 만들어낸 자산계급의 잔인한 계급적 본성을 폭로한 것이다. 주복원은 본래 봉건계급의 아들로서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 그를 자본가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복원의 인생관은 여전히 봉건주의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가며 어찌 보면 침울하기까지도 한 봉건가정을 고집스럽게 이어나간다.하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번의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나 봉건에 반기를 든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번속박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현대여성의 각성은 바로 五四 운동{)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 ·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5 ·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 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 항하였는데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不買)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 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 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 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 ·1운동에 고무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어 그 후 노동운동, 농 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이 가져다준 시대의 변화였다. 五四 로부터 시작하여 『뇌우』가 발표되기까지 현대문학이나 현대희극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여성형상이 이처럼 강렬하고 집중적이며 심각하게 반봉건과 개성해방의 五四 목소리를 담은 여성형상은 아주 적었다. 비극적 형상 번의는 조우가 현대희극에 남긴 일대 공헌이었다.{) 중국 현대 희극사 1996. 한국문화사. 한상덕 역. p.2984. 『일출(日出)』의 극 전개 및 인물분석『일출』은 진백로(陳白露)가 사는 대여관(大旅館)의 휴게실과 취희( 喜)가 기거하는 삼류 기원(妓院)의 방을 활동 공간으로 하여 半植民地的이고 半封建的인 도시사회의 죄악을 깊이 있게 묘사하였다. 대풍은행(大豊銀行) 경리 반월정(潘月停) 및 김팔 등의 인물묘사를 통해 휘황찬란한 상류사회의 암흑상·음탕함·부패항을 드러내는 한편, 방달생(放達生) 서(小東西), 황성삼(黃省三) 등 하층 민중의 생활묘사를 통하여 그들의 고난과 아픔을 드러내 보였다. 특히 반월정이 은행을 유지하기 위해 직원을 감원하고 월급을 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동산을 팔아 돈을 벌고 거짓으로 서양식 빌딩을 짓는 거짓형상의 모습과 김팔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할 수 없이 목을 메어 자살하는 꼬마와 원래는 천진스럽고 귀여운 여자였지만 자산계급 생활의 자극으로 몰락한 진백로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특히 제3막은 작가의 피어린 눈물과 분노의 항의가 서려 있다. 이 막은 전체극의 유기적인 통일 중의 한 부분으로 주제를 심화시키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시끌벅적한 지옥 안에는 소동과 불안이 충만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위나 아래나 전부가 썩어 문드러져 끝이 난 사회이다. 작자는 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도시의 한 단면을 통해 사회라는 이 큰 건물이 필연적으로 무너지리라는 소식을 표현한 것이다.『일출』의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의 광명의 역량이 일어나고 있다. 방달생은 책벌레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광명을 위한 탐구자로 이해 할 수 있다. 방달생을 통해 일출 , 즉 광명과 자유를 추구하고 동경하는 사람들을 대표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서 몽롱하게나마 희망을 발견하고 일출 을 맞이하러 나아감을 통해 혼란한 사회에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음을 시사해 주었다.{) 중국 현대 희극사 1996. 한국문화사. 한상덕 역. p.2955. 『일출(日出)』에 반영된 사회상30년대 사회의 전체적인 특징은 국민당 반동파가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여 제국주의에 의지함으로써 어둡고 부패된 중국사회는 더욱 반식민지화 되었다. 반식민지화된 도시 사회에서의 자산계급의 추악성을 통해 당시 사회의 전모를 묘사하는 한편 상층사회와 하층사회 사이의 부족한 사람의 것으로 넉넉한 자에게 보탠다 는 불합리한 현상을 폭로하였으며, 금전화된 사회가 사람을 망치고 학살시킴을 폭로하였다. 이 작품이 피압박자와 금전화된 반식민지 사회의 모순이 작품의 기본적인 다.
◎ 목 차 ◎1. 서부대개발 이란?2. 서부의 낙후요인3. 서부대개발의 허와 실 - 蘭州, 西安, 成都, 重慶을 중심으로1) 지도를 바꾸는 50년의 대역사 - 난주(蘭州)2) 서부의 첨단 기지 - 서안(西安)3) 서부의 라스베가스 - 성도(成都)4) 뱃길의 중심이 되는 산의 도시 - 중경(重慶)4.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우대정책1) 중·서부지역 개방영역 확대2) 세율 차별화5. 결 론1. 서부대개발 이란?세계 경제에는 남북문제가 있지만 중국에는 동서문제가 있다. 동서로 소독과 발전의 격차가 나는 문제를 이곳에서는 동서문제로 칭한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세이다. 서부지역의 험준한 지형은 따라서 교통의 문제를 가져왔으며, 이는 유통과 발전의 불균형으로 이어졌다. 동서의 격차를 보여주는 가장 확연한 예가 있다. 서부에 있는 한 성의 년 생산량이 연안 개방지역인 강소성 무석시에 속한 한 개 현의 년 생산량보다 적다.1981∼1989년간 중서부 지역의 국민생산 성장률이 10%였던 반면, 같은 기간 동부의 성장률은 92%였다. 물론 이 수치는 90년대에 이르러서는 50% 대 63%로 차이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한번 벌어진 발전의 격차는 좀처럼 회복되자 않고 있다.이 같은 격차의 첫 번째 원인은 투자된 자금의 차이에 있다. 운남성-귀주성-사천성 3성의 1993년도 사회고정자산 투자총액은 상해를 끼고있는 절강성 한 성의 규모와 대등하다. 외자기업 투자규모의 차이는 더욱 심각해서 동부연해지구 한 도시의 투자규모가 위 3개성의 규모보다 많은 실정이다. 섬서성의 경우 개혁 개방 이전 계획경제시절 이 성에 대한 사회고정자산투자는 전국 4%의 비율이었으나, 개혁 개방 정책이 실시된 이후에는 1.8%로 낮아졌다. 이는 국가를 포함한 투자자들이 개혁 개방 정책이 먼저 실시된 동부 연안지역으로 몰렸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중국의 경영전략』1996. 김동하. 백산서당. p.101중서부 지역의 지방 지도자들 역시 개방 초기에는 등소평의 선부(先富)정책, 즉 연안 로 국가 재정의 70%, 차관의 80%를 서부에 쏟아 붓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계획이다.서부대개발 사업은 크게 다섯 가지의 의의로 나눌 수 있다.1) 기초시설 건설을 한층 가속화한다. 이는 서부대개발 실시의 기초이다. 公路건설을 중점으로 하여 철로·비행장·천연가스 수송관 건설을 전면 강화하여 전국적인 종합운송체계를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천연가스수송관에 의한 수송을 반전시켜 "서부의 가스를 동부로 운송(西氣東輸)"하는 공정을 실시한다. 도시기초시설 건설을 강화하고 중점적으로 대중도시의 도로와 배수관, 열공급시설등 건설을 가속화하며 특히 長江·黃河중상류 도시의 오수처리와 쓰레기 처리시설 건설을 가속화한다. 수자원의 합리적인 개발과 적절한 이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2) 생태환경보호와 건설을 강화한다. 이는 서부지구 대개발의 근본이다. 長江상류, 黃河중상류의 天然林 보호 프로젝트를 중점적으로 실시한다. 경사지의 耕地를 점차 林地와 草地로 바꾸어 조성한다. 삼림과 草地를 훼손하는 황무지 개간을 단호히 제지한다.3) 적극적으로 산업구조를 조정한다. 이는 서부지구 대개발의 실시 관건이다. 당해 지역의 지리·기후와 자원 등 조건을 고려하여 지역실정에 맞는 특색 있는 산업을 발전시킨다. 농업구조를 적극 조정하여 우량화하고 당해 지역의 특성에 적합하고 증산효과가 명확한 우량품종과 적용기술을 적극 확대한다. 서부지구 특유의 생물자원 우위를 충분히 발휘하여 약재식물의 재배를 확대하고 기술을 강화하여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항목을 배양한다. 관광을 발전시키고 관광업을 서부경제의 중요 지주산업으로 육성하며 관련산업의 발전을 유도한다. 서부지구의 우세한 지하자원과 수력에너지 자원을 계속 합리적으로 개발·이용하며 자원 우위를 경제우위로 바꾸도록 노력한다.4) 과학기술과 교육을 힘껏 발전시킨다. 이는 서부지구 대개발을 실시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과학교육흥국의 전략을 견지하여 실시하고 서부개발업무의 과학적 수준을 제고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적극적으로 국내외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과학기술성과의 쇠퇴하였다.2 )地區와 지형의 영향도 크다. 내륙지구와 해양지구는 사회경제발전에 대한 영향이 명확하다. 경제발전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연해경제는 교통이나 자원과 같은 방면에서 특별히 좋은 조건을 향유하게 된다. 唐宋이래 서부의 사회경제는 쇠락하였고 동부의 사회경제는 크게 발전하였기에, 이는 곧 이러한 추세를 나타낸 것이다. 서부지구 지형은 매우 복잡하고 산이 많아 많은 지구의 교통이 막히고 정보가 원활히 소통되지 못하며 토지자원이 부족하여 오랫동안 사회경제의 낙후를 조성하였다.3)인구밀도와 인구질량의 영향. 明淸이래 "湖廣塡四川"이라는 말과 같이 대량의 농촌인구가 이주하고,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등 가뭄지구에서 산출이 높은 작물이 반입되어 인구팽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구가 팽창한 후 농업생태파괴가 심각해졌고 농업생산은 감소하는 악순환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서북지구는 비록 인구밀도는 아주 낮으나 인구가 關中平原·黃土高原의 대지와 극소수 사막의 오아시스에 많이 거주하게 됨으로서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인구분포가 현저히 불균형하게 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인구밀도문제 외에도 인구의 질이 낮은 것도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이다.중국서부지구는 신 중국 성립 후 30년은 국민생산총액의 성장속도가 이미 동부의 0.44%보다 한층 높아서 동서부지구 경제발전 격차도 점차 축소되었다. 1978년에 두 지역의 연간 1인당 평균수입 차이는 200元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20년전 중국정부가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한 이래 동부의 연간 평균 성장속도가 서부보다 4%이상 높았다. 1998년 동부는 이미 3600元에 도달하여 서부보다 약 3배가 높았다. 동서부 격차상황에 대하여 중국의 지도층은 일찍이 예견한 바 있다. 당초 중앙에서 개혁개방을 결정하였을 때 이미 (동서부가) 함께 발전해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고, 다만 조건이 비교적 좋은 동부연해지구를 먼저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3. 서부대개발의 허와 실 - 蘭州, 西安, 成都, 重慶을 중심으로1) 지도를 바꾸는 50년의 대역사 같다.중국 정부는 서부대개발에 50년간 1조 달러(약1,300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 외국 자본없이 중국 정보 혼자 감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금액이다. 개발 초기인 지금은 어떻게 꾸려 간다해도 2005년부터 철도·도로·가스관·공항 등 각종 인프라 건설을 본격화 하면 외국 자본 유치가 개발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중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외국인 투자는 서부를 철저히 외면했다. 이 기간 중 서부 투자는 99억 달러로 동부 투자 2,700달러의 3.6%에 그쳤다. 비록 국가에서 국가 재정의 70%를 서부에 쏟아 붓고 있다고는 하지만 50년이나 내다봐야 하는 엄청난 규모인 데다 사업성이 없는 이런 사업에는 외국인 투자 유치는 쉽지 않을 것이다.2) 서부의 첨단 기지 - 서안(西安)서안(西安)은 첫 중원 통일을 이뤄 낸 시황제(始皇帝)의 위용이 2,000년 세월을 넘어 오늘에도 살아 숨쉬는 고도(古都)이다. 초(楚)나라 패왕(覇王)이 산을 뽑아 낼 힘(力撥山) 과 세상을 덮을 기세(氣蓋世) 로도 차지하지 못했다던 그 땅이 바로 서안이다. 이 곳엔 지금 2,000년의 옛스러움과 도시의 화려함이 함께 공존해 있다. 서부대개발의 붐을 타고 국내외 자본이 몰려들면서 초현대식 건물이 속속 올라가고, 첨단 기술 단지엔 세계적 기업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중국 지도를 펼쳐 들면 광활한 서북 방면의 최대 도시인 서안은 북경(北京)과 서북을 연결하는 유일한 요충지이다.{) 『니하오 중국경제』2002.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중앙 M&B. p.125-1302000년 서안은 5억 4,000만 달러의 외자를 들여와 3억 6,000만 달러에 그친 성도(成都)를 앞질렀다. 최근 외국 자본이 성도보다 서안을 택한 이유는 뭘까? 중국 최고의 관광도시인 만큼 관광지·유적지 개발을 위한 관광 산업에 돈이 몰렸을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서안에 자본이 몰린 것일까? 서안엔 관광을 위한 고대유적 못지 않게 인공위성과 관련된 연구소와 국유 기업이 개발구에 몰려들었고, 여기에 필요한 첨단 인력 양성을 위해 공과대학이 줄줄이 생겨나면서 서부 진출을 노리는 외국 기업들이 첫 번째로 꼽는 도시가 된 것이다. 모택동의 역사적 실패가 오히려 서안을 첨단 도시로 거듭나게 한 묘약이 된 셈이다.하지만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 능률적이지 못한 서부 도시군수 산업체의 개혁과 민영화는 서부대개발에서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될 것이다.3) 서부의 라스베가스 - 성도(成都)성도(成都)는 촉(蜀)나라의 도읍이 되면서 중국 역사에 첨 그 이름이 알려졌다. 제갈량(諸葛亮)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한 것은 우마차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험난한 길 때문에 위(魏)나 오(吳)나라의 공세를 피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낙후된 지형조건이라는 핸디캡을 가진 성도의 별칭이 서부의 라스베가스 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자료들은 이 별칭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상해에 새 옷이 나오면 다음날 이 곳에도 그 옷이 걸릴 정도로 이 곳 사람들의 눈이 높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도의 높은 소비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실제로 왕푸징 백화점 2층에 걸린 여성 블라우스엔 1,500위안(약 24만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다. 서울의 웬만한 백화점 가격 뺨친다. 인민동루(人民東路)의 인화춘천(仁和春天)백화점 1층엔 까르띠에, 지방시, 던힐 등 서울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유럽의 명품 매장이 즐비하다. 성도에서 이런 백화점들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크로드가 다시 열린다」인터넷한겨레.성도 백화점들의 특징은 고속성장이다. 이 곳 백화점은 최근 연평균 60%씩의 판매 신장률을 기록중이다. 이러한 고속 성장의 비결은 두 가지이다. 예부터 씀씀이 크기로 소문난 성도사람들의 소비 성향에다 서부대개발로 몰린 돈, 사람, 물자가 더해지면서 소비천국 의 불을 지핀 것이다.서부의 돈줄이 몰리다 보니 내로라 하는 금융 기관들이 찾아드는 것도 당연하다. 이 곳에는 일본 동경(東京)은행, 태국계 반곡(盤谷)은행다.
▶ 조선시대 민간의 혼례방식을 중심으로 본 우리의 전통혼례 ◀(1) 婚姻의 의미(2) 전통적 혼례 (일반 민간에서의 혼례방식)1) 선보기2) 궁합과 사주3) 함4) 혼례식5) 신방 엿보기6) 신행과 폐백(3) 궁중 혼례 엿보기1) 궁중혼례2) 간택3) 금혼령4) 가례청5) 간택의 절차(4) 퇴색된 혼례의 의미와 진정한 혼례의 의미에 대한 고찰조선시대 민간의 혼례방식을 중심으로 본 우리의 전통혼례1) 婚姻의 의미인간은 태어나서 무덤에 가기까지 몇 가지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의식을 하게 된다.출생해서 삼칠일간(21일간) 금줄을 치고, 백날을 기념하여 잔치를 베풀며, 첫돌을 맞아 돌잔치를 하기까지가 출생을 기념하는 출생의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해서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갓(冠布)을 씌우는 의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冠禮의식이라고 한다. 나아가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꾸미는 것을 혼례의식이라 하여 人倫之大事로서 예로부터 엄숙히 지켜 실행해 온 것들이다. 나이가 들어 수명을 채워 운명하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죽게 되면 장례를 치르고 소상, 대상을 거치는 동안 자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엄숙히 지내야 한다. 이와 같이 출생, 관례, 혼례, 상례의식 등을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의식이라 해서 통과의례 라고 한다.이 중에서도 혼례는 매우 뜻 있는 의식인데 인간으로서 성인이 됨을 증명하는 것이고,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을 창설하는 일이요,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예로부터 중요시해왔다. 혼례를 치르지 아니하면 성인 취급을 하지 아니했으며 혼례 전에 죽으면 부모에게 불효했다해서 제사도 지내주지 않는 관습이 있다.혼례는 혼인의례의 약어이며, 혼인의 婚 은 본래 昏 으로서 사위를 이르는 것이고, 姻 은 妻를 이르는 것으로 여인이 남자를 만나 成禮한다는 뜻이 있다. 즉 혼인은 남녀의 결합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의식으로 여기에 는 육례{) 육례(六禮) 또는 주육례(周六禮)라고도 함. 인론(人倫) 이루어지지 않는 수가 많았다. 궁합이 맞아 들어가면 신부집에서 許婚書와 擇日을 신랑측에 보낸다. 택일을 涓吉이라고도 한다.궁합이 맞아 혼인이 결정되어도 결혼 일자를 정하는 데는 또한 좋은날(吉日)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택일은 두 사람의 운명이 순탄하도록 厄(액)이 없는 날을 정한다. 날이 정해지더라도 하루가 아침부터 밤까지이므로 이중에서도 몇 시가 가장 좋은 시간인지 점쳐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운이 좋은 날과 시간을 맞추게 되고 따라서 운이 트인다고 믿는 것이다.(3) 함함{) 함을 싸는 방법 - 흰 종이를 깔고 「采緞」을 넣은 후 다시 흰 종이로 덮고 납폐의 수량과 종류가 적힌 「物目 記」를 넣고 「婚書紙」를 넣은 후 마지막으로 「오곡주머니」를 넣는다.을 보내는 것을 納幣 라고 한다. 보통 함에 넣어 보내는 물품은 대략 세 가지인데 그 중 채단{) 여자의 음기를 상징하는 청색 비단은 붉은 색 한지에 싸서 청색 명주실로 매고, 남자의 양기를 상징하는 붉은색 비단은 청색 한지에 싸서 붉은색 명주실로 매어 청채단은 아래, 홍채단은 위에 놓는다.은 신부측에 보내는 치마감을 일컫는 것으로 청색과 홍색 두 가지를 준비한다. 그 외에 婚書紙{) '귀한 따님을 저의 집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신랑 아버지가 쓴 일종의 감사편지인 혼서지는 신 부가 죽어서 무덤까지 함께 넣어갈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던 것이다.와 5가지 곡식을 넣은 오곡주머니{) 함에는 다섯가지 곡식 즉, 콩 팥 수수 찹쌀 목화씨 등의 오곡이 들어간다. 적색주머니에 들어가는 팥은 따 뜻하게 해먹는 음식의 재료로 양의 기운을 나타내고, 청색주머니의 콩은 차가운 음식의 재료로 음의 기운을 나타내며, 찹쌀과 수수는 냉.온 음식 모두에 사용되므로 양과 음의 조화를 뜻하고, 목화씨는 의복과 음식에 부족 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를 넣는 것이 보통이다.대게 함은 결혼 전날 보내지게 되는데 이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 또는 함잡이라고 한다. 함진아비는 대개 신랑의 가까운 친구가 되는단령포의 색과 혁대의 장식 자료에 의하여 품계를 가리었고, 또 한 흉배에도 도안의 구별이 있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신랑의 나이에 이미 벼슬길에 들기는 어려웠을 것이 므로 당신 혼인을 인륜(人倫)의 대사(大事)라 하여 비록 가장 낮은 품계(九品)의 것이긴 하더라도 특별히 배려하여 예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단령은 녹포였고 여기에 단학 흉배를 가식하였으며 흑각대를 띄었다. 이 차림은 서민층 혼례 때에도 사용되었다.를 입어 성장을 하고 신부집으로 들어간다.신부집에서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두르고 가운데에 大禮床을 준비한다. 이 상을 親迎床 또는 交拜床 이라고도 한다. 상위에는 보통 촛대 둘, 송죽이나 사철나무를 꽂은 꽃병, 밤, 대추, 쌀, 보에 싼 암탉과 수탉, 그리고 청·홍실과 쪽바가지 두 개를 놓는다.식이 시작되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을 팔머리 라는 연소한 사람이 나가서 인도해 들인다. 이 때 기러기를 받들고 있던 자가 신랑에게 기러기를 바친다. 신랑은 이것을 받아 기러기의 머리를 들고 대청으로 올라간다. 장인은 서쪽을 향해서 서고 신랑은 북쪽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기러기를 준비해 놓은 쟁반에 놓으면 신부집 하인이 받아간다. 이 때 신랑은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이 때 장인은 마주 절하지 않는다. 이것을 奠雁禮라고 한다. 옛날에는 산기러기를 사용했으나 근래는 나무 기러기를 만들어 대용한다.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奠雁禮가 행해지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 예가 행해졌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의례』에 보면 '선비들의 혼례에 기러기를 사용한다'고 씌어 있으며, 또한『禮記』의 「婚儀篇」에는 '부친이 초례를 행하라고 명하면 신랑이 기러기를 안고 신부집으로 들어가 한 번 읍하고 기러기를 드리고 재배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 풍속이 중국에서는 소멸되었으나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는 조선조 말기까지 이 예가 행해졌으며, 혼례의 중심적인 행사로서 중시되었다. 전안례가 행해지로서 신랑이 신부에게 한번 절을 한다.⑩ 신부가 신랑에게 다시 두번 절을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다시 한번 절을 한다.⑪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고 신랑과 신부가 각각 꿇어앉는다.合 禮를 끝으로 얼추 혼례의 의식이 끝나면 그 신랑은 신부집에서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을 가지는데 이것을 東床禮 라 한다. 그 기원은 중국의 왕희지가 사위를 구하러 각 서당을 돌아다니다가 동상에 허름한 의복을 입고 늠름하게 앉아 있는 서생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는 데에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조선조 때 권율이 동상에서 공부하는 이항복을 사위로 삼고 동료들에게 한턱 낸 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5) 신방엿보기초례{) 交拜禮와 合 禮 이 두 의식을 합쳐서 이르는 말식을 끝낸 후에 신랑·신부가 처음으로 한방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는데, 이것을 신방이라고 한다. 신방을 엿보는 것은 허용되어 있는 풍습으로,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이 어린 신랑·신부가 첫날밤을 어떻게 치르는 지에 대하여 관심이 크다.신랑과 신부의 나이를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세어보던 아낙네들은 이윽고 발소리를 죽여 신방의 문 앞으로 모여들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방안을 엿보곤 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早婚이 성행했던 시대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그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첫째는 조혼이 성행했던 무렵에는 신랑이 10살 안팍인데 비해 신부는 그 보다 7, 8세 위이기 때문에 혹시 신부의 情夫와 음모를 해서 신랑을 해치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것이다.둘째는 신랑이 신부방에 들어가면 나쁜 邪鬼가 신랑을 해칠 우려가 있어서 이를 들어가지 못하도록 교대로 방을 지킨다는 것이다.(6) 신행과 폐백신부가 혼례를 치룬 그 날로 신랑과 함께 媤家로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當日于歸라 하고, 사흘 신방을 치르고 가는 것을 三日于歸라고 하는데, 후자가 보편적이다. 그리고 신부가 친정을 떠나서 시가로 가는 것을 新行이라 한다.신행길에는 신부와 함께 많은 사람들 분인 세자, 세손의 혼례를 말하며, 길례는 일반 왕자녀의 혼례로 왕자군, 왕손, 공주(왕의적녀), 옹주(왕의서녀), 군주(왕세자의 적녀),현주(왕세자의 서녀)등의 혼례를 말한다.(2) 간택간택이란 제도는 가례와 길례의 구별없이 행하는 것으로, 『문헌비고』에는 선조때 시작되었다고 하며, 『성호사설』에는 태종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二간택 이라 하여 처음에 약간명을 선택한 다음, 그 중에 세 사람을 뽑고, 다시 날을 받아 한 사람을 간택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간택은 계속 행하여졌다.(3) 금혼령국혼의 선행되는 간택에 있어서 먼저 금혼령을 내렸다. 금혼령은 국혼에 앞서 민간의 혼사부터 금하고 나서 처자봉단(處子捧單)을 걷어들이기 위한 전제절차로 그 기간에 혼인할 수 있는 범위와, 절대로 할 수 없는 범위를 밝히고, 국혼에 응할 자격이 있는 자녀를 가진 집을 대상으로 하여 자진신고를 강요하는 명령이다.이와 같은 국혼의 거론은 대왕대비, 왕대비 등 궁중에서 가장 행렬이 높은 여성이 적령기에 들어선 왕 또는 세자 등의 배우자 선택을 발설하여 예조에서 금혼령 발포를 명령하는데, 순조 19년 4월 丁丑일에 명하신 것으로는 '9세에서 13세에 이르는 처자에게 혼인을 금할 것을 명하고 왕세자 가례를 위하여 간택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예조에서는 구체적인 허혼범위와 처자봉단을 받아들이는 기한을 정하여 한성부 및 팔도에 영포하며, 마감이 지나면 한성부 및 각 도에서 단자를 일일이 감봉(監封)하여 예조로 올려 보낸다. 허혼범위는 우선적으로 사대부 계급의 연령제한이 있고, 그 밖에 異姓親의 촌부라든가, 이씨라든가의 금기 등이 있었다.(4) 가례청(嘉禮廳)국가에 대사가 있을 때 길흉을 막론하고 이를 전적으로 맡아서 거행하는 기구가 임시로 구성되는데, 가례의 경우 설치되는 기구를 가례청 또는 가례도감이라 하며, 일반 왕자녀의 혼례인 고례(古禮)의 경우 설치되는 기구를 고례청 또는 고례도감이라 한다. 가례청과 길례청의 구조는 그 규모에서 차이가 있는데 세자나 세손이 왕자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