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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러시아역사 평가B괜찮아요
    - 러시아 역사 -러시아 민족의 선조는 슬라브족 중에서도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의 東슬라브족이다. 동슬라브족은 4∼9C 엘베 과 프리파타 습지일대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흩어져 살았다. 9C경 북유럽과 중동의 모험 상인 들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상인들과 거래한 공물, 약탈물에 대한 수지를 협상할 만한 지방 자치기관이 없었으나830년경 북볼가강 유역 랴잔 부근에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교역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볼가강 유역 루스(Rus) 카칸국이 최초의 정치단위였다.(Rus는 러시아의 옛이름이라 할 수 있다.)스칸디나비아인과 함께 루스인 들은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 지 약탈지역을 넓혔다. 동스라브인들은 이 바이킹족(스칸디나비아인)의 보호와 통제아래 있었다. 바이킹족의 한 공후(公侯)인 유틀란트의 '류릭'이 비잔틴 제국으로 이르는 무역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브고로드'를 점령, 동슬라브를 통치한 왕조의 창시자라고 간주되고 있다. 882년 아들 '올레그'는네프르강 유역의 키예프를 정복함으로써 '키예프 공국'을 수립하였다.Ⅰ. 키예프 공국(882∼1240)'블라디미르'(980년경∼1015 재위)공은 최초의 법전을 반포하고 자신의 일족을 宗家로 왕 조체제를 이룩하였다. 98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로 하여금 러시아에 주교구를 설립 하도록 권유하였고 기독교로 개종, 국교화 하였다. 정교회는 러시아 도시지역, 특히 귀족층 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대중에게도 정파 되어 민족의식의 주요소가 되었다.키예프 공국은 단일국가가 아닌 도시국가 형태의 여러 개의 공국으로 구성된 연합형태의 국가였다. 사회, 정치제도 들이 초보단계 였으며 서유럽과 달리 봉건주의와 관련된 법률, 경제관계가 발달하지 않았다. 상업을 통해 융성하였으나 11C 후반부터 공국간의 전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중앙 아시아로부터 스텝지역으로 침입해오는 유목민들과의 전쟁 으로 쇠퇴하였다.Ⅱ. 몽골지배(1240∼1480)13C에 들어 몽골군의 공격이 시작13년간 4명의 왕이 교체되는 왕위쟁탈전과 농민반란, 폴란드의 침공으로 혼란기를 경험하였다.15, 16C에는 꾸준한 경제성장, 중앙정부의 세력확대, 과거 자유농민이 보유하던 토지에 대 한 귀족들의 찬탈로 자유농민의 감소와 농노화가 진행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러시아 문화 라 할 수 있는 문화가 싹텄는데 중앙집권제도의 군주제 하에 통합된 러시아인의 성장과 번 영의 바탕이 되었다. 교회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이데올로기, 문화 등을 지배하면서 재적 요소와 러시아정교회의 요소를 독특하게 만들었다.Ⅳ. 로마노프 왕조(1613∼1917년)모스크바를 점령하였던 폴란드군은 전 민족적인 항쟁으로 항복하였고 이후 '미하일 로마 노프'를 짜르로 선출하여 새 왕조가 시작되었다. 법적기초농노제의 영구화, 국가에 종속적 인 교회위상 등을 확립하였고 17C 중엽에 와서는 유럽과 북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1) 표트르 대제(1682∼1725)표트르 대제의 재위 중에 러시아는 후진적이나 많은 지원을 가진 제국, 중·서부 유럽의 선진국들과 필적할 수 있는 나라로 변화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 공 국의 짜르 체제를 바꾸어 러시아 제국을 선포 했으며 1721년 황제의 칭호를 받는 등 전제 정권을 강화하였다. 공적인 기능을 강조하고 근대적인 행정체계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귀 족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규정하는 등 재위기간의 치세는 러시아의 교육과 문화생활에서 새 로운 출발점이 되었다.1700∼1721년 동안의 對 북방 전쟁인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핀란드만과 발트해 동쪽유역을 장악하였고 東으로는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1689) 시베리아 전역 을 확보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부르크를 세워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였다. 1721년 이후에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해 남쪽 국경을 카스피 해 연안까 지 확장하였다.표트르 대제 사후 1762년까지 통일성과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연약한 군주들이 뒤를 이 었다.(2) 에카테리나 여제(1 반란'을 일어났으나 실패했다.(4) 니콜라스 1세(1825∼1855)테카브리스트 반란으로 영향 받은 니콜라스 1세는 어떤 중대한 정치변화도 단호히 반대하 는 보수 반동 정치를 펴나갔다. 1853∼1856년 크림전쟁을 일으켰으나 터키에 패배함으로써 흑해가 중립화 되었고 흑해로의 남진이 저지되었다.(5) 알렉산더 2세(1855∼1881)1856년 파리조약의 체결로 크림전쟁을 종결 지었으나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러시아의 후 진성이 드러나자 농노제 폐지(1861), 새로운 현 단위와 군 단위의 민선의회 제도인 젬스트 보 신설과 사법제도 개혁(1864), 지방 행정부 개편(1870), 징병제 도입(1874) 등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에 불만을 갖은 혁명적 지식인들의 급진성은 1881년 알렉산 더의 암살로 이어졌다. 1881년의 러시아는 거의 오늘날과 비슷한 규모인 동유럽에서 아시 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6) 알렉산더 3세(1881∼1894)알렉산더 2세의 암살로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교육이 제한되고 젬스트보 의 작업이 방해 받았으며 농민 공동체가 더욱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탄압은 지식인들의 혁명운동을 지하로 잠입시키게 하였다.(7) 니콜라스 2세(1894∼1917)서유럽과 미국에서의 산업혁명의 영향과 니콜라스 2세의 급격한 산업화정책은 사회적 유 동성을 자극하고 간접적으로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을 궁핍하게 하였다. 공장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고 19C 말엽에는 정치적 관심이 농민층까지 확대되었다.국내문제와 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C 후반 아시아로 팽창을 계속한 러시아는 한반 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과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조선 에서의 일본 세력인정을 거 부하자 드디어 일본이 1904년 러시아 해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러일전쟁 에서의 패배는 러시아에 '짜르'체제를 종결하게 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기업 등의 국유화 정책인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다가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왔다. 10월 혁명으로 전복된 부르주아와 지주계급은 1918년 서방국가의 지원으로 내전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새 국가에 많은 타 격을 주었는데 내전기간중의 경제는 '전시공산주의'의 원칙에 따라 시행되었다. '전시공산 주의'정책은 농민의 생산 욕, 노동자의 사기를 저하시킴으로써 내전 후에 경제를 복구 시 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레닌은 1921년 제 10차 공산당 대회에서 '신경 제정책'(NEP)를 채택하여 사기업의 활동과 외국의 이권을 허용하고 자유농을 창출시키는 등의 자 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어느 정도 경제의 신 속한 복구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왔다.행정부분의 주요 업무는 볼셰비키당에 의해 장악되었는데 비록 인민주권기관으로서 소비 에트가 존재하였으나 볼셰비키당은 실질적인 최고권력의 수행자였다. 1922년 4월 스탈린이 새 서기장에 피선된 후 12월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자카프카즈 등 4개의 공화 국을 통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을 수립하였고 1923년 헌법을 제정 게 되었다.(3) 요시프 스탈린(1924∼1953)1924년 1월 레닌의 사망으로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3頭체제를 형성하였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을 경우 국가에 미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레닌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1927년 제 15차 공산당 대회에서 NEP의 폐지와 제 1차 5개년 계획의 착수를 결 정하고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사기업을 금하고 농민들을 집단농장 으로 집단화 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1937년 말에 이 러 농촌의 집단화가 완료되었고 토지 99%가 집단농장의 소유가 되었다.1936년에는 스탈린 헌법을 채택하여 당의 지도적 역할을 규정하는 한편 3 차에 걸친 대 숙청으로 독재권력을 강화해갔다. 한편 1930년대에는 문맹이 퇴치되고 실업이 체주의적인 권위체제 및 명령적 계획경제 체제의 유지 등 모든 국가 통치체제가 상명하복의 원칙으로 이루어져 보수성향과 무사안 일, 경제침체가 심화되었다. 거대하지만 비효율적이고 산만한 경제발전과 관료주의로 특징 지어 졌고 또한 지적 잠재력은 있으나 낙후된 의료수준, 보건체제를 갖추고 있는 세계열강 이 되었다. 즉, 서방 최고에 맞먹는 우주개발과 일상생필품의 수준 차이, 가장 많은 의사와 평균수명 단축 등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타났다.브레즈네프는 군비강화에 주력, 1968년 체코침공으로 동유럽의 이탈을 방지하고 중국과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또한 서방 국가들과 힘에 의한 평화공존노선을 견지하고 동서 데 탕트를 실현하였으나 1979년 아프간 침공과 1980년 폴란드 엄령 선포지원 등으로 대 소련 대립을 심화 시켰다.(6) 유리 안드로포프(1982∼1984)브레즈네프 사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안드로포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포함하는 새 세 대 당 관료중 한 사람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부정공무원 척결, 알콜중독, 노동자의 근무지 이탈 추방 등의 운동을 시작하여 정체, 부패현상에 대한 개혁노선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반체제 인사대우는 여전히 가혹하였고 농업의 흉작으로 경제는 악화되어갔다. 또 한국의 민간 여객기 격추로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았다.실험단계에 그쳤으나 국가기강 확립, 노동규율 강화, 기업 독립채산제 및 농업집단청부제 도입의 시도 등 중앙 집권적 통제경제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등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전제조건을 구축하였다.(7) 콘스탄틴 체르넨코(1984∼1985)안드로포프의 개혁정책을 억제하려는 개혁저항세력으로 재직기간동안 출국이민금지, 외국 인과의 접촉행위에 대한 엄격한 통제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농업이 후퇴하기는 했으나 핵무기 감축협상을 재개하는데 동의하는 등 대미 군축협상에서의 진전이 이루어졌다.(8) 미하일 고르바초프(1985∼1991)체르넨코 사후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당과 국가관료를 철저히 조사하여 공산당의 지방당 제 1서기 였다.
    인문/어학| 2002.06.11| 9페이지| 1,000원| 조회(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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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유럽음악
    유럽 여러나라의 음악유럽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스위스, 스웨덴 등… 대학교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유럽의 문화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번 레포트를 계기로 유럽문화 중에서도 음악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였다. 음악은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화 중에 하나이다. 또한 평소에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 레포트는 매우 흥미로웠다. 수업 중에 가끔씩 들어왔던 음악들도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듣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유럽의 음악는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있었다. 나는 유럽여러나라의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알아보고자 유럽의 대표적인 나라인 프랑스와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의 음악에 대해 공부하였다.◎러시아음악러시아음악이란 러시아 여러 민족 사이에서 창조되고 발달해 온 음악예술의 총칭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대·소 러시아민족의 음악이고 두번째, 러시아제국시대의 음악이며 세번째, 소련시대의 음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소련 영토는 제정시대와 별로 차이가 없으며, 러시아민족을 중심으로 한 동슬라브족이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말에 들어서이다. 그 후 18세기 초엽에 표트르대제가 근대적인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수도로 정했을 무렵에는 제정러시아의 판도도 거의 정해졌다. 그 사이 타타르인에 의해 일부 점거당했던 고난의 시대, 제위 계승문제를 계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침략을 받았던 동란시대 등, 러시아의 안전을 위협한 사건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각각 음악적 감각 변화의 원인이 되고 예술음악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역시 제5대 키예프공 블라디미르성공의 그리스정교에의 개종과 안나여제의 적극적인 유럽음악 섭취책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하여 러시아 음악의 역사는 원시 이교기, 그리스 정교음악의 지배기, 유럽 음악 도입기, 10월혁명 후 소련 붕괴까지의 4기로 나눌 수 있을 19세기까지 전해왔다. 이 기간의 역사는 민속음악의 변천이라는 형태로 민요의 설명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제4기에 이르러 러시아 예술음악의 역사는 비롯되었다. 유럽음악 도입기에는 표트르 1세의 러시아 근대화정책은 광공업의 발전과 부국강병책에 힘을 기울이면서 군악대 등도 조직되었다. 이어서 2대의 여제시대에는 궁정과 살롱이 설치되는 동시에 국외에서 훌륭한 음악가들도 초청되었다. 그 가운데는 만프레디니와 같은 이탈리아 바로크의 거장도 들어 있었다. 전글린카시대때는 18세기 후기부터 글린카의《이반 수사닌》이 작곡되기 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벌써 유럽의 작곡기법을 습득한 많은 러시아인 작곡가와 뛰어난 연주자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보르트냔스키이다. 낭만주의시대:이는 보통 '국민주의'로 불리고 있으나 국민주의라고 명확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상적 측면에 한한다. 전기는 글린카의 오페라《루슬란과 류드밀라》와 다르고미슈스키의《석상의 손님》으로 대표된다. 전자는 국민오페라가 나아갈 지침으로, 후자는 사실주의 모색의 제1보로서 평가되고 있다. 1861∼1863년의 농민개혁과 더불어 러시아의 근대화는 프로이센형에 접근하여 옛 권력을 온존한 채 20세기를 맞이하였다. 이 후기낭만주의에서는 페테르부르크에서 활약한 무소르크스키, 발라키레프, 보로딘, 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5인의 작곡가와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타네예프 등의 작품이 뛰어났다. 그리고 국민주의의 의욕과 낭만주의 고유의 문학성·회고취미는 그대로 계승되나, 이미 일정한 작풍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모두가 개성의 영역에 흡수되고 말았다. 굳이 말하자면 온음음계의 발견 및 그 활용을 추구한 것과 조성의 극복 직전에 조화를 추구한 차이코프스키, 루빈스타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880년대부터 러시아 사회의 반동화는 점차 불붙기 시작하여 체호프 같은 천재까지도 러시아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론을 펴게 된다. 소위, 세기말적 현상의 음악은 스크랴빈의 작품《법열의 시》, 전주곡집 등에 나타나 있다.2. 10월혁명용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제2회의 비판은 지다노프에 의해 행해져 결론만이 공표되었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정통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현과 개혁 사이에서 러시아의 음악도 크게 변조되었다.◎ 프랑스음악주로 프랑스적인 문화풍토와 전통을 바탕으로 프랑스인에 의해 쓰여지고 프랑스인에 의해 발달해 온 음악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독일과 함께 서유럽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는 음악국이다. 그 역사는 오래되어 멀리는 중세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활동이 그치지 않고 찬란하게 전개되어 왔다. 중세 초기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제각기 독특한 성격을 지닌 단선성가가 제법 성행하고 있었으며 그 중 프랑스지방에 있었던 성가를 갈리아성가라고 하였다. 넓은 의미로는 그레고리오성가의 지방적 변종으로 알려져 있는 이 갈리아성가는 8∼9세기에는 그 발전을 일단 멈추게 되지만, 그 후로도 프랑스가 교회 성가의 한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프랑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도원은 이러한 교회음악의 중심지로서 네우마기보법을 비롯한 음악이론의 연구가 성행한 곳이다. 중세 후기에는 프랑스의 남·북 두 지방을 중심으로 음유시인의 음악이 발전하였다. 남프랑스를 무대로 한 트루바두르와 북프랑스의 트루베르는 그 대부분이 기사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 단선율의 가곡형식으로 연애·신앙 등 인간생활의 중요한 테마를 노래하였다. 같은 무렵 유럽 각지에서는 다성악이 발달하였는데 이 방면에서도 프랑스는 큰 역할을 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리모주에 있던 생마르샬수도원을 중심무대로 하여 생마르샬악파가 형성되고, 후에 파리에 있던 노트르담악파가 그 활동을 이어받아 다성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3세기 말까지 계속된 이 악파의 대표자로는 레오니누스와 페로티누스가 꼽히며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오르가눔·콘둑투스·모테투스 등의 삼성부·사성부의 악곡이 매우 활발하 베르사유악파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다. 이 시대에는 처음 궁정가요의 작곡이 성했으나 궁정발레·궁정오페라 등도 프랑스적인 예술이 되어 그 양식이 완성되었으며, 그 외에도 베르사유악파는 르네상스 이후 기악의 육성에도 힘을 기울여 하프시코드의 독주곡·실내악곡·협주곡 등이 작곡되었다. 그리하여 궁정의 음악활동은 교회음악·축전음악 그리고 군악 등의 야외음악에까지 파급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음악가로는 륄리, 쿠프랭, 라모 등이 특히 손꼽히며 이 시대 후반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적인 우아한 스타일은 로코코양식, 특히 갤런스타일 등으로 불린다. 18세기 후반에는 그때까지 외국의 음악에 대하여 폐쇄적이었던 프랑스의 음악활동도 새로운 국면에 부딪쳐 이탈리아오페라와의 우열을 논한 '부퐁 논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비극적 오페라에 대신하여 희극적인 음악극이 오페라 코믹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탄생하였다. 프랑스혁명은 음악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쳐 구체제시대의 궁정음악은 쇠퇴하여 갔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낭만주의시대의 음악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베를리오즈는 이 악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그 격렬한 예술가적인 개성과 음악적인 표현능력을 표제음악과 극음악 등에 쏟아, 프랑스에서의 유일한 낭만파음악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세기 전반 파리의 악단에는 그랜드오페라와 같은 외견상 화려한 음악이 성행하였다. 프랑스음악의 전통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정립하여‘국민음악’을 확립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며, 이러한 동향은 생상스에 의해서 1871년에 설립되어 풀랑에 계승된 국민음악협회의 활동과 그 모토인‘아르스 갈리카’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풀랑크, 댕디, 쇼송, 뒤파르크 등은 교향곡·실내악·가곡에서, 비제는 오페라《카르멘》에서 각각 프랑스적인 음악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포레 등의 노력을 거쳐 20세기 초엽 화려하게 전개되는데 이를 정점으로까지 이끌어 간 것은 다음 세대의 드뷔시와 M.J.라벨이었다. 드뷔시의 이른바 인상주의음악은 19세기를 지배하고 있던 음악이 스며들고 있었으나, 독일의 사회적·문화적 후진성 때문에 18세기까지는 네덜란드·이탈리아·프랑스 등의 선진 여러 지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영향들을 자기 나라의 음악성에 점차 동화시켜 18세기 후반부터는 고전파와 낭만파를 통해서 넓은 의미의 독일음악이 유럽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음악교육이나 연구분야에서도 독일은 오늘날까지 지도적 위치에 서 있다. 중세 초기의 그레고리오성가에 있어서도 독일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독일어 노래는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독일이 그 고유의 음악에 의해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3세기의 미네젱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에는 상공업자인 마이스터징거가 세속가곡 분야에서 활약했다. 한편 다성음악의 발달은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 훨씬 늦어 겨우 14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났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콘라트 파우만을 비롯한 오르간음악과 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다성적 성악이 결실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독일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루터 등이 고안한 찬송가가 그 후 독일 교회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17세기의 바로크시대에는 새로운 양식이나 형식이 주로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독일도 그 영향을 받게 되며, J.S.바흐 이전의 독일 최대의 거장 쉬츠도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모노디와 협주양식 등을 독일에 들여왔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독일 특유의 깊은 정신성을 표현하였다. 바로크시대의 독일은, 쉬츠나 프레토리우스 등의 교회성악곡과 함께 건반, 특히 오르간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낳게 되었다. 쉬츠와 함께 3대 S로 불리는 샤인과 샤이트,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토카타와 모음곡의 발전에 공헌한 남부독일의 프로베르거, 네덜란드의 스벨링크의 흐름을 따른 북스테후데를 중심으로 한 북독일악파, 중부독일의 쿠나우와 파헬벨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바로크의 독일음악은 18세기 전반의 바흐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장
    인문/어학| 2002.06.11| 8페이지| 1,000원| 조회(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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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독일통일과 군사통합
    독일 통일과 군사통합1. 독일 통일에 대한 검토. 독일 통일은 동·서독 어느 일방의 의지나 계획에 의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닌,쌍방간의 민족 동질성 유지를 위한 지속적인 분단 극복 노력과 더불어 동·서 진영간의 변화되는 역사과정의 "상황의 산물"임.독일의 통일은 Hegel의 변증법 즉, 正(These), 反(Antithese), 合(Synthese)의 역사발전 3단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임.·정 : Adenauer의 "힘에 의한 우위정책(Politik der Staerke)" 추진- 서독의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 : 철저한 반공정책 및 NATO 가입을 통한 對 동구/ 동독 안보달성- 경제 부흥과 민주주의 정착의 기틀 마련으로 대 동독 우위 확보를 위한 체제 역량 강화·反 : Brandt의 "동방정책(Ostpolitik)" 추진- 대 동구 화해정책 : Hallstein 원칙을 수정, 동구권과의 경제협력 강화 및 국교 수 립- 양득간의 "작은 걸음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추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1972)로 양독간 교류 협력 강화·合 : Kohl의 통일 달성. 독일 통일은 대등한 兩獨간의 통합이 아닌, 열등체제의 동독이 우위체제인 서독에 철저 히 흡수당한 형태로 이뤄졌음.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며, 중앙 집권적 계획 통제 경제에 대한 시장경제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임.·서독은 의회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지속적 경제성장과 모범 복지국가를 실 현한 반면, 동독은 계획경제 실패로 70년대 이후 경제 침체가 계속되고, 장기 독재 집 권으로 정권의 경직화를 초래, 주변정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음.·공산주의는 대외의 적이 있을 때는 존재할 수 있으나 대내의 적이 있을 때는 존속 불 가능함.즉 detente나 개방, 교류 추세에서 공산체제는 존립할 수 없음.. 독일의 경우 냉전체제 하에서도 동서간 긴장완화를 위한 대 동구협상 mechanism을 갖고 있었음.·사민당(SPD)은 긴장완화를 위한 대 동구/동독의 꾸준한 대화창구로서 주변국의 强獨 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兩獨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Realpolitik에 입각, "현상을 변경시키기 위해서는 현상을 인정해야 한다 ('63. 7. Egon Bahr)"라는 명제에 따라 통일을 일회적 행위가 아닌, 장기적 과정으로 인식·동독이란 국가의 존재를 인정(2 Staaten auf eine Nation)하고, 동독 지도부를 자극하 지 않으면서 꾸준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대 서독 접촉에 대한 내부적 변화를 유 도·결국 서독의 대 동독 교류 협력은 동독주민으로 하여금 민주화와 개방화의 욕구를 자 극, 서독 체제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풍요에 대한 동경을 유발시킴으로써 '89년 동독 의 변혁과 통일에 기여. 동구 사회주의 몰락 여파로 구동독의 평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음.·70년대 중반 이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제국의 경제파탄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관 료주의의 병폐가 만연됨으로써 주민들의 불만이 가중됨.·80년대에 들어 이념이 쇠퇴하고 양 진영간 경제수준의 격차가 현격해지는 등 국제정 세가 서방측에 유리하게 작용했음.·고르바초프의 등장에 따른 소련의 대 동구 정책변화 및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로 동 독에 대한 패권전략 포기.·'89년 가을 동독에서는 대규모 비폭력 시민혁명이 진행되었으나, '89년 10월 방독한 고르바초프는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며 유혈진압 반대입장을 명확히 표시하였음.. 서독 정부는 통일과정이나 구동독 상황을 판단하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실수를 범했음.· 구동독의 경제사정을 정확하게 파악 불충분· 체제전환 문제를 과소평가· 서독 경제력과 시장 경제체제의 탄력성을 과대평가. 서독 정부는 통합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4가지 시행착오를 범했음.· 1:1 화폐 통합· 서독 법제도의 일방적 적용· 반환원칙에 입각한 재산권 처리· 통일비용의 과소평가. 동서독은 통일전 20여 년간의 다양한 접촉과 교류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통일후 분단 이전에 실감하지 못한 심리적 갈등과 이질감으로 "새로운 장벽"을 느끼고 있음.. 통합 이후 독일은 당분간 과도기적 후유증을 겪을 전망임.그러나 최근 구동독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재정지원과 투자증대로 경제가 호전되고 있 고, 모든 상황이 안정적으로 발전되고 있어 통합에 따른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하리라 전망됨.2. 독일 군사 통합. '90년 10월 3일부로 동독 인민군(NVA)은 해산되어 서독 연방군에 흡수 되었음. NVA의 조직이나 체제 자체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코 대등한 통합이 아님.·병력 10만(장기 6만, 단기 4만), 전차 2,200대, 장갑차 5,570, 화포 2,140, 전함 65척, 항 공기 700대, 병기 120만정, 화약 30만톤 등·동부지역 사령부(Kommando Ost) 창설로 구동독군 병력 및 장비 물자 인수. 군 병력 정리·장군/제독, 55세 이상의 직업군인, 정치장교, 군 검찰청 및 군사법원장교는 모두 전역 조치 (50세 이상 장기 복무자는 조기 퇴역권고)·장기 복무자(장교/하사관)중 계속 군복무를 희망하는 자는 2년 만의 계약 근무후 장기 복무 여부 결정·`94. 3. 현재 구 NVA 장기 복무자 중 11,000명만이 연방군에 편입되어 대부분 1∼2 계급 강등상태에서 근무중('90. 10. 3. 당시 장교 2만 4천 →현재는 3천 2백명, 하사관은 당시 2만 3천 → 현재 7천 6백)·동독지역 의무병은 전원 연방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중·동·서독 의무병을 서로 상대지역에서 근무하게 함으로써 내적 통일 달성의 방편으로 이용·구 NVA 전역자는 주로 구 동독지역에 신설된 병무행정 분야에서 활용. 군부대 정리 및 지위체계 조정·모든 군부대를 3가지로 분류하여 정리(즉시 해산, 잠정축소 운영후 해산, 연방군에 즉 각 편입)·편입부대는 하양축소 편성(사단→여단, 연대→대대)·대령이상 직위는 전원 서독군 출신으로 임명, 보직·연대/대대급 지휘관은 대부분 서독군 출신으로 임명. 장비 및 물자 인수·CFE에 의거 , 대부분의 구동독군 장비가 폐기되어야 함.(민간 위탁회사에 용역 의뢰)·폐기 비용이 엄청남.3. 독일 군사 통합 파생 문제점. 부대감축, 선발, 탈락자 처리문제가 예상보다 복잡하고 어려움.·전역자의 사회복지 및 취업대책·군부대 해체로 지역경제 타격 심대(부대 창설시 지역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고려). 인사관리 측면(급료, 의료혜택, 퇴직금 등)에서 구동독군은 서독군에 비해 불리하여 상 대적인 열등감 내지는 피해의식 심화로 군내 동서독 출신간의 갈등요인으로 작용됨.. 구동독 사회주의 붕괴에 따른 사상적 충격으로 구동독군 간부의 사기 및 군기가 전반적 으로 낮은 상태임.. 구동독군 출신의 장교/하사관의 지휘능력이나 상황 대처능력이 전반적으로 미흡함. 지 령식 교육에 습관화되어 자유재량권을 부여하는 구서독의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 을 소화해 내지 못함.. 구동독지역의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구서독군이 동독지역 근무를 기피함.. 잉여장비, 탄약 폐기처리 관련비용 및 병영시설 정비 예산소요가 막대함.. 국경지대에 매설된 지뢰 제거작업을 위해 상당수의 인원과 시간이 소요됨.·과거 국경수비대 요원으로 하여금 지뢰 제거단을 편성 운용. 국경차단 시설제거는 최초 연방군이 맡았으나, '91. 10. 이후 민간기업체에 위탁 처리되 고 있음.. 구동독군 주변의 환경오염 상태가 심각함.·인수한 장비, 부동산 및 시설물 주변의 환경 유해물질로 지하수가 심하게 오염4. 결론 : 한반도 통일 관련 시사점. 독일과 한반도는 전후 똑같이 강대국에 의해 분단되었고, 동서냉전의 각축장이었으나, 분단의 성격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동서독 분단은 양독간의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 아님.역사적으로 통일된 독일은 항상 구주안정의 불안요인이었고, 따라서 주변국은 구주안 정을 위해서 독일의 분단/분할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해 왔음.·따라서 독일 통일 여부를 결정짓는 actor는 동·서독 당사자가 아니라 전승 4개국이었 음.·반면, 남북한의 경우는 '80년대 후반 탈냉전의 여파로 북한을 중심으로 한 북방 3각 체 계의 와해 이후, 더 이상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없는 상황임.따라서 통일의 주체는 남북한 당사자임.문제는 남북한간에 통일을 위한 내적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점임.. 남북한간에 통일에 대비한 체제역량이 구비되지 못할 경우 결코 한반도에는 진정한 통 일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임. 따라서 미북 합의로 북 핵문제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된 만큼, 차후 한국은 과거 독일의 Ostpolitik과 같은 "현상 인정"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한과 꾸준한 대화와 접촉을 통한 북한의 변화와 개방을 유도해야 할 것임. 또한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해 북한 주민에 초점을 맞춘 대북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임.
    인문/어학| 2002.06.11| 5페이지| 1,000원| 조회(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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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유럽문화사에서 페스트의 영향 평가B괜찮아요
    유럽 문화사에서 페스트의 영향학 과 :유럽어문학과학 번 :025728성 명 :송 성 근담당교수 :백 종 유 교수님(제출일자 :2002. 04. 18)建 國 大 學 校유럽 문화사에서 페스트의 영향1347년에서 1351년에 이르는 네 해 동안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다. 그것은 사망률이 80%에 이르는 선 페스트와 사망률이 100%에 이르는 폐 페스트,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페스트는 유럽 역사상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였으며, 몇 년도 채 안되어서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져 버렸다.페스트는 간접적이나마 동서양의 연결로가 되는 계기였다. 페스트는 몽골인이 인도와 아시아 남부에 살고있는 쥐의 벼룩을 통해 옮기는데 14세기 몽골군의 침략에 따라 유럽으로 몰려온 것으로 추정된다.페스트에 직면한 유럽인들이 문화적, 심리적으로 나타낸 반응은 매우 다양했다. 전쟁의 피해는 페스트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의 접촉을 피했으며, 도시거주자들은 시골로, 시골 거주자들은 서로를 피하여 도망쳤다. 심지어 교황도 궁정의 내실에 꼭꼭 틀어박혀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많은 곳에서 토지를 경작하거나 경작자를 감독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어 식량이 바닥났다. 상업도 정체되었다. 학교, 대학도 그것을 운영할 자격자가 없어서 폐쇄되고 말았다. 제자에게 기술을 전도할 길드의 우두머리가 죽어버려 직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았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중단상태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에까지 미쳤다.또한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자,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극단적인 행동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자는 완전히 신앙을 잃고 악마를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극도의 종교적 열광에 빠져들었다. 독일 근처 지역에서는 서로 채찍질을 하는 고행을 즐기는 종교적 광신자들이 늘어났고, 유태인을 습격해서 신의 노여움을 풀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을 페스트의 병균을 뿌리는 하수인으로 여겼다. 이처럼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늘어나자 유태인 사회의 중심이 동유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페스트는 인간성의 본질을 생각게 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탄생과 종교개혁 등 문명의 대전환을 불러왔다. 사람들은 무력한 교회 대신 페스트에 대해 비교적 신속히 대처한 도시정부를 믿기 시작했으며 라틴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할 수 있는 성직자나 교사들이 줄어들어 라틴어 대신 세속적 언어가 공식문서에 쓰이기 시작하는 등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마련됐다. 소설가 카뮈는 ‘페스트’에서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썼다.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는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에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대목은 새로운 문명의 전환기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페스트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라지자 개인 노동력 가치가 높아졌고 이는 봉건 체제 기반을 무너뜨려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로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됐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이미 7세기 전에 전 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언제까지 페스트는 전 유럽을 휩쓴 살인적인 전염병인 것이다.페스트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통해 후세에 알려졌는데, 크림 반도에 정박했던 이탈리아 선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 제노바, 마르세이유 등지로 급속도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이 이 때문에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페스트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여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고, 봉건 영주들은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348년을 정점으로 차츰 세가 약해졌다. 그리하여 페스트는 변화의 촉매제가 되었다.페스트가 돌기 전에는 프랑스어가 영국의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다. 하지만 프랑스어 교사들이 목숨을 잃는 바람에 영국에서는 영어가 프랑스어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종교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교회의 전통적 의식이나 예배방법이 페스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자 신도들의 신앙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페스트는 아무런 기준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정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럽인들은 신앙이라는 점에서 내향적, 개인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게다가 죽은 성직자의 빈자리를 메운 후계자들은 대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신도들을 다루기에는 벅찼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교회)가 타락한 것은 종교 개혁이 일어난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고 브로솔레는 주장한다.페스트는 예술 분야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겨, 죽음이 예술 작품에 널리 사용되는 주제가 되었다. 해골과 시체가 흔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죽음의 힘을 우의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은 대도 바로 이때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역병 생존자들 가운데 다수는 도덕적 구속을 완전히 벗어 버렸다. 그리하여 도덕은 충격적일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그런가 하면 교회가 페스트를 막아 주지 못하자 중세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의 말에 다르면, 페스트에 따른 사회 변화로 인해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도 커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다.
    인문/어학| 2002.06.11| 4페이지| 1,000원| 조회(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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