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역사에 있어 천주교의 선교정책이 개신교선교 방향성에 끼친 영향에 대한 고찰Ⅰ. 서론한국 개신교 선교는 일반적으로 서민과 여인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면에는 개신교 선교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네비우스 방법론’이 있었다. 또한 시대적 비극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보호기관의 역할을 감당 할 것이라 믿었던 한국 민중들의 의식 또한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본 연구에서는 개신교 초기선교와 그 주요 대상을 결정함에 있어서 나타난 이러한 특징들과 이전부터 한국에서 선교정책을 펼쳤던 천주교 선교정책의 연구를 통해 개신교의 선교 대상 결정에 있어서 고려해야 했던 시대적? 종교적 요소들을 찾아보고자 하며 그 상관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연구 과제를 토대로 최근 교회성장과 선교활동의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는 한국교회의 선교 방법론에 대한 방향들을 모색해보고자 한다.Ⅱ. 천주교 선교의 특징초기의 한국 천주교17-18세기부터 조선의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한 서학의 흐름 속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으로부터 한국 천주교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 귀국한 그 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집례하게 되었고. 이 세 사람은 한국 천주교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후 이벽은 정약용, 정약전 형제에게 보다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였고 계속해서 천주교의 전파에 나섰는데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는 역관과 같은 중인계층에 전도를 시도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서 전도 또한 활발하게 시도하기도 한다.)1. 천주교회의 선교1. 수난을 불러온 요소1) 민족적 전통과 충돌을 일으킨 천주교조선에 천주교에 있어서 조상 제사문제는 큰 화두가 되는 요인 중에 하나였다. 1790년 9월 청의 건륭황제 탄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통해 북경의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던 윤은 기해교난), 기해교난과 같은 천주교회의 성장과 러시아 남하에 대한 베르누 주교의 소극적인 반응로 붉어졌던 병인교난)이 대표적인 박해 사건이라 할 수 있다.3) 반국가적 단체로 전락한 천주교신유박해가 시작 되면서 천주교는 또 다른 박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체포령을 피해 배론으로 피신해 있던 황사영은 배론의 은둔처에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박해내용을 비단에 적어 북경으로 보내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전달자인 황심과 함께 체포되면서 은신처에서 이 백서마저 발각되어 버린다. 이 백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신유박해를 중심으로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적었으며 두 번째는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황사영이 신앙이 자유를 위해 제시한 세 가지의 제안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키고 만다. 첫째는 청의 황제가 직접 조선 왕에게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방법, 둘째는 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파견해 무안사를 두고 조선의 정치를 감호케 하고 또 청의 공주를 조선 왕비로 삼게 함으로 천주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방법, 셋째로는 서양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적으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결국 이 백서는 이 내용은 이미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편지를 보내 포르투갈 국왕으로 하여금 조선 국왕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게 하여 쇄국정책을 타개하려고 했던 시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천주교를 대역부도하고 반국가적인 단체로 몰아넣을 결정적인 근거가 되고 말았다.) 교회를 살리려는 순수한 의도는 좋았지만 주권을 다른 나라에 넘기면서 까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생각은 비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신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도급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을 어렴풋이나마 대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본격적인 선교사 선교와 외세(프랑스 군대중들에게 글을 깨우쳐 문맹을 면케 하는데 높은 기여를 했다. 고 평가되는 부분이다.)2. 천주교의 한국 전래에서 나타나는 특징한국에 전래되고 발전 되었던 천주교는 주로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그들의 학구적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으로부터 교리서들과 기타 서양의 서적들이 입수되고 연구 되었으므로 이 서적들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문을 터득할 수 있는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교리서를 읽을 수 있었고 한문을 모르는 상인들이나 천민들은 당연히 이 문서들을 접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 천주교회는 주로 중인들과 양반계층이 주요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그러나 종교적 차원보다 학문적 차원으로 소개되어 왔던 천주교는 주요 세를 이루는 양반계층이 속한 정치적 당쟁에 휘말리게 되는 아픔을 경험한다. 또한 이러한 시련 속에서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천주학에서 천주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신앙 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많은 학자들이 이탈하게 되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시련은 계속되는데 초기 천주교는 효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조상제사금지원칙을 세움으로 조선의 민족적 정서에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정서적 충돌과 박해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그러함에도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모습에서 주목할 점은 교권과 성례 규례에 철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확실히 공식적인 교회, 사도적 전승이 없는 미조직 교회 또는 불법적인 교회의 형태에 불과 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조선인들만의 순수한 신앙적 열정을 통해 자생적으로 신앙공동체를 꾸려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를 비롯한 신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인에 의해 이미 세워진 교회에 선교의 손이 뻗친다는 전례 없는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그 외에도 소외 계층이었던 여성 교인들의 활발한 활동의 초석을 마련해 주었으며,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들의 인쇄 보급을 통해 한글의 대중화와 대중들의 눈을 교적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사역은 모든 아이들과 배우지 못한 어른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어서 보다 포괄적이고 직접전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당시 고종의 명에 의해 육영공원이라는 서양식 학교가 있었지만 정치적인 비리 속에서 물들어 있었고, 일반적으로는 서당 정도의 초등고육 기관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당마저도 한문을 가르치는 기초적인 학교로서 양반 자제들이나 여유 있는 집 자제들의 전유물이었다.최초로 학교의 형태로 교육을 시작한 선교사는 언더우드였다. 고아원으로 시작된 이 사역은 언더우드 학당, 예수교 학당, 민노아 학당이라는 과정을 거쳐 “경신학교”로 자리하게 된다. 이후 여성들의 개화와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을 배출하고자 하는 목표로 메리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된 세워진 “이화학당”,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영어학교인 “배재학당” 등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3) 전도사역)의료와 교육으로 시작된 선교 사역 속에서도 복음전파라는 선교의 핵심인 되는 사역은 계속해서 시도되어 왔다. 국법의 감시 속에서도 최초의 수세자인 노춘경을 시작으로 한국 개신교 교인들의 수세 행렬은 서서히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대표적인 전도사역은 아래와 같이 소개 된다.① 교회의 설립언더우드의 노력으로 1887년 9월 27일 14명의 교인들과 함께 시작된 “정동교회”는 이후 새문안으로 장소를 옮겨서 “새문안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조선에 정착해 있는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이미 권서들과 매서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 사람들 자신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로 볼 수도 있다. 이교회는 두 사람의 장로를 선출함으로 최초의 조직교회로 기록되었다.② 성서번역 사역과 문서 사역한국은 이미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어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인쇄의 질과 번역의 정교함이 미비했다. 언더우드는 이러한 성경을 신중한 심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제되었다.2. 비판적인 견해1) 현실적 이익에 따른 입교일반적으로 서민 중심의 입교가 활발하게 된 것에는 확실한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입신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이익에 급급하여 그랬던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즉 서양 선교사들과 가까워짐으로써 물질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직접적 동기와 역질이나 흉년과 같은 국난이 왔을 때 외국인의 보호로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해 교회로 몰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층의 기독교 입교도 기독교를 통한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고 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는 목적과 기독교 사상을 통하여 이 땅의 민도를 높이고 민주적 입헌국가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웅대한 포부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주장한다.)그러나 초기 신자들의 입신 동기가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의 입문이 아니라 이기적 동기와 애국적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루어 졌다고는 하나 어느 모양으로든지 조선민족에게 복음을 허락하시고, 그 동기가 어떻든 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셨고, 교회가 틀을 잡아가면서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하는 입장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2) 교회의 비정치화 정책개신교의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선교사들은 순수한 신앙 유형으로 한국교회를 지도하기 위해 애국적인 단체에 관련된 교직자들을 성직에서 해임하고, 교회 안에서 정치성을 띤 활동을 하는 이들을 무섭게 치리하였다. 당연히 교회 내에서는 양자론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05년 을사조약을 미국이 서둘러 승인했을 때 한국인에게 ‘반미’, ‘반미국인’의 감정은 고조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혼돈의 상황을 야기 시킨 교회 안의 정치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본국과의 교감이요 일본과의 교감이기도 했다. 더욱이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카츠라-테프트 밀약’을 바탕으로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정치와 신앙의 역할분리론’에 동조한 상황이었다.)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기초하여 볼 때,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는 한국교회 혹은 한국인 기이다.
十字架에 달리신 하나님과 無感情한 인간)Ⅰ. 서론르네상스와 16세기 계몽주의운동을 근간으로 인류사의 모든 부분의 혁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기독교는 그 근간을 흔들 만큼의 강력한 위기 앞에 직면하게 된다. 과거 하나님을 “저 위에 계신 존재”)로만 이야기해도 글자 그대로를 믿었던 시대에서 과학과 문명의 혁명적인 발달은 당시 최고의 실존적 가치의 수단이자 기초로 여겨졌던 과학과 합리성의 차원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큰 의문 제시한다. 이에 대해 존 로빈슨은 “우주의 가장 먼 구석까지도 탐색했거나 또는 탐색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곳’에 신이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인숙이나 우주 전체에 그가 있을 자리라고는 없다. 빈 장소라고는 남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당시 시대상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다.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본 논지의 주제가 되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절망 앞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위치에 관련한 문제였다. 인류사의 비극인 세계대전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대량 학살 및 참사의 현장에서 눈물로 외쳐졌던 “고난의 이유”와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한 물음들이 그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실망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허무주의적 무신론을 제기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류는 몰트만이 2차 세계대전 속에서 직접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던 자리에 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고통과 절망, 회의 순간에 그 모습을 나타내시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하나님”을 소개함으로써 해답을 제시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본 연구에서는 몰트만의 신학적 특징과 그를 통해 제기되었던 “십자가에 달려 있는 하나님”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학이 고난과 절망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위로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심어 줄 수 있을 가능성 여부에 대해 주어진 본문과 관련해석을 통해 살펴 볼 명적 신앙이 없다.”)는 논지 하에서 하나님을 불안과 교만이 비친 우상의 그림에서 해방시키지 않고는 해방하는 신학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언제나 그의 하나님의 하나님다움과의 관련에서 전개하기 때문이다.)현대 사회 안에 사는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 배후에 기독론적 위기가 있다. 곧 교회가 본래적으로 누구를 위해 부름 받았는가? 예수그리스도는 오늘날 본래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분인가? 그리고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아울러 어떤 하나님이 기독교 실존을 지배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새로운 명료성 있는 해답이 필요하다.)기독교의 핵심에 우리는 저 나사렛 사람의 역사가 있다. 그는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와 차별대우 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한 하나님의 나라를 죄의 용서와 해방하는 기적과 표징들로써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고난과 “하나님의 모독자요 반란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로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절 신앙의 증언에 따라 다시 살아나셨다. 진정 그에게서 하나님의 미래와 자유의 미래가 육신이 되신 것이다.)기독교의 핵심가운데 스스로 낮아지시고 인간이 되시고, 비인간이 되어 받는 고난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버림받으시면서 죽으신 하나님에 관한 역사가 서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유일한 질문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 받기를 싫어하고 우리가 무엇을 행했는지 우리의 낙관주의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해 또 자연에 대해 세운 행동계획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반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보수주의자들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성취한 업적들을 자랑한다. 혁명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업적들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같은 배(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앉아 있다. 행동과 업적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감정한 사람이다. 그는 행동을 고난에 이끌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그것을 알려 하지 않고 자기의 생에서 부터는 십자가에 못 박는무감정한 존재에게 진노와 고난이라는 요소가 어떻게 가능한가? 는 물음이 따른다. 그러나 사람이 직면하고 또 여러 모양으로 체험하고 생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정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개하였던 개념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된 기사가 기독교 전승의 핵심이자 중심이 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오늘날까지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세계와 하나님의 화해를 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떡과 포도주의 형태 하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식으로 재현되고 있다.이 전례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현재화됨으로써,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 기반이 되는 현실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인간에게 신앙이 찾아오게 하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3. 하나님의 파토스와 인간의 동정하나님은 자신의 연관된 존재(Interesse)에 자신의 존재(esse)를 두고 전 관심을 그 백성과 그의 계약에 쏟았다. 인간과의 이러한 깊은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그들에 의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듯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가지는 관계와 염려의 형식을 주시하였던 예언자들은 예언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미리 제시된 미래를 말함이 아니고 현재의 하나님의 파토스, 인간의 죄 때문에 그가 받는 고통과 고민들을 통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무감정의 하나님의 영역에서 인간은 무감정의 인간(homo apatheticus)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파토스의 정황에서 사람은 동정의 인간(homo sympatheticus)이 된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사람의 동정, 그의 공개성, 신적인 것 또 인간적인 것, 또 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임에서 자신의 메아리를 얻는 것이다.) 파토스적 하나님과의 계약에서 인간은 자기를 탈출하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참여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난을 겪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약관계를 지어준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곧 십자가에 달린 분에 있어서 밖에 있는 자들에게 성령 안의 대화적 생이 동정과 희망에서 가능하도록 만들게 되는 것이다.)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전체의 또 완전한 인간 존재를 입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의 인간이 되신 현실 존재에 의해서 그에게 관계 맺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낮아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연적인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범죄자의 폭력적인 죽음을 죽었다. 그는 골고다에서 철저한 버림받은 죽음을 죽으셨다. 예수의 고난에서 받은 고난은 버림받음이요, 실로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다. 막 15:34에 나타난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과 죽음이 그것을 뒷받침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죽음 직후 이방인 백부장의 입에서 ”진정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라는 고백)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입에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하나님께 버림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과 저주의 영원한 죽음을 용납하여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들의 형제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저주받는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분에게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된 하나님의 새로운 정황을 인식하는 것은 반대로 저 십자가 곧 탈출구 없는 고난과 희망 없는 희망을 하나님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적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난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나누어질 뿐 아니라 우리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만들고 또 우리의 죽음을 자신의 생에 받아드리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 “하나님은 그의 친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그를 넘겨주셨습니다(버리셨습니다)”)는 로 돌려준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있다.”(요4:17)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곳에서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의 고난을 겪는 곳 또 그것으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고 침통하거나 피상적으로 사는 것을 이길 힘을 찾는다.)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곳에서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고난 받고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고난 받는다. 이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의 고난을 겪는 곳 또 그것으로 그의 사랑의 힘을 입증하시는 곳에 사람들도 고통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안에 거하고 침통하거나 피상적으로 사는 것을 이길 힘을 찾는다.)Ⅲ. 결론1. 내용요약1) 우리의 충동적 낙관주의적 사회는 업적의 우상을 믿는다. 강요된 비인간성을 통하여 사회는 많은 사람을 무감정과 절망에 인도한다. 이 사회 안에 사는 교회는 종종 이 사회의 우상과 법칙을 받드는 종교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고난과 슬픔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며 동정과 사랑의 영을 전파해야 한다. 그것은 많은 업적을 낸 또 실망한 인간들을 그들의 정황에 나타난 십자가의 진리와 대결해야 하며 이것으로써 인간은 동정하고 기뻐하며 그것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2)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된 하나님 인식과 신학이 있다. 하나님을 권력의 우상에서 해방시키지 않으면 해방하는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마련한 불행, 우리가 겪은 불행은 그분의 불행이다. 우리의 수난의 역사는 그의 수난의 역사 가운데 채용되었는데,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세계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회상은 연약한 피조물들의 고난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 그래서 그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이며, 그의 사랑의 행복은 우리의 생의 부활이다.)3) 하나님은 우리들 때문에 고난 받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다. 고난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았고 그가 버림을 받지도 않으셨다. 그 버림이 하나님 안에 있고 결코 쓴맛을 받지 않은 사랑 안에 )
이사야 6장 1-7절에 나타난 스랍 이미지에 관한 연구Ⅰ. 서론라인홀드 니버는 계시를 모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사건들이 지각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특별한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기독교는 이미지를 통해 많은 메시지를 받아왔고, 또한 전달해 왔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지, 은유, 상징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인간이 부분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데) 본 논고에서 살펴볼 이사야 6장에서는 ”스랍(?????)“이라는 신비적인 존재의 이미지를 통해 국가적 위기 속에 고민하고 있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난다.이사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스랍에 대한 궁금증은 스랍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물음과 그 역할과 기능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이사야 6장에서 묘사된 스랍은 하나님의 천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사야 6장에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구성과 역사적 배경을 통한 통전적인 이해와 스랍의 특징들을 관련된 성서의 사건들과 관련지어 살펴봄으로 이사야의 스랍 이미지를 밝혀보려고 한다.Ⅱ. 이사야 6장의 위치1. 일반적인 견해들이사야 6장은 이사야 전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하기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논쟁의 중심은 주로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자기 보고서’와 ‘회상록’인가, 아니면 포로기 이후의 어느 저자의 꾸민 이야기인가? 그 이상(異像)은 이사야의 사역 초기에 주어진 소명 이상인 것인가, 아니면 그의 사역 중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주어진 것인가?) 등과 같이 본문의 형성과정과 배경, 장르, 동기에 대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차일즈는 회상적 읽기와 어원론적 읽기의 관점에서 6장은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1장에서 12장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6장이 이스라엘을 위한 신의 계획을 보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갔다. 이러한 앗수르에 대해 북 왕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장악한 베가는 시리아 왕 르신,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손을 잡고 반 앗수르 세력을 형성하여 앗수르의 진군을 막아보려고 했다.앗수르와 반 앗수르 세력의 대치 속에서 상대적으로 약소 국가였던 유다는 헤매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가까이 있는 북 왕국과 연합 세력에 대하여 찬성할 수도, 반기를 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예언자 이면서 국가와 왕실의 지도자였던 이사야는 몰려오는 먹구름 속에서 비장한 각오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일이었다.)1)하나님을 만나는 예언자1-4절2)예언자의 정화5-7절3)사명을 받는 예언자8-13절3. 구조)Ⅲ. 스랍 (?????)이사야 6장 2절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스랍(스라핌 ?????)은 여섯 날개가 달린 형상으로 날 수도 있고 찬송도 하는 영물로 나타난다. 스랍(복수형)이 정확히 어떤 형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뱀의 형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단수형 스랍(사라프 ???)은 원래 독이 강한 뱀인 독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뱀은 첫째, 물리적 이미지로 무는 것 (암5:19; 전10:8) 둘째, 적이나 억압자를 의미하는 은유적 이미지 (민21:6; 신8:15; 사14:29) 셋째, 교활한 유혹자(창3:1-2,4,13-14) 넷째, 재난의 상징의 이미지(신32:33; 욥20:14,16)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6장에서의 스랍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천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스랍들은 호위와 경배의 어떤 기능들을 책임지고 있는 천사적인 존재로 보인 것 같다.)1. 이사야 14장 29절의 ??? ????이사야 14장 29절에서 날아다니는 불 뱀(??? ?????)을 뜻하는 이 용어는 앗수르의 지속적이고 가공할 만한 위협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은유이다. “뱀 세, 그리고 불 뱀은 산헤립을 의미하는 것이다.)2. 이사야 27장 1절의 ?????이사야의 리워야단 모티브는 고대 근동 여러 곳에서 비슷한 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로 주신이 괴물 뱀과 싸우는 장면은 고대 이집트, 근동, 그리스 문학에 많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 때(3100~2390 BC)의 7개의 머리 달린 괴물 뱀 무슈마후,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타나는 우슈사기민과 우슘, 이집트의 아펩(Apep)·아포피스(Apopis), 히타이트 신화의 일루얀카, 고대그리스 신화의 파이돈, 바알신화와 욥기에서 등장하는 탄닌 등이라 할 수 있다.)위와 같은 고대근동의 뱀이지는 항상 부정적인 악역의 이미지를 가지며, 주역인 주신에 의해 패배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인간을 타락시킨 뱀이 저주를 받고 인간과 함께 에덴에서 추방되는 모습에서도 유사성을 가진다. 이사야 또한 당시 고대근동에서 잘 알려진 주신과 뱀의 전쟁 모티브를 도입한다. 그러나 이사야의 뱀 모티브의 특이한 점은 주께서 그의 권능으로 인류의 대적이자 에덴을 파괴하는데 일조를 한 뱀을 죽이시고 에덴을 상징하는 시온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메시지에까지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결국 이사야는 신과 뱀의 전쟁 모티브를 통해 주의 날에 이루어질 앗수르 제국의 파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밝히고 있다. 뱀은 창조주의 손안에 있음을 창세기가 밝히듯이 이사야 선지자도 비록 앗수르가 뱀처럼 모든 나라를 파괴할 능력을 가졌으나 앗수르 역시 하나님이 잠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임을 밝힌다.(사7:20; 10:12~15))3. 이사야 6장의 ?????기능1. 신의 현현이사야 6장의 스랍은 불 이미지)를 수반한다. 신과 관련된 불 이미지는 고대근동에서 그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의 현현(theophany)의 경우 불이 등장하는 예가 많다. 신명기의 경우 하나님은 불 가운데 강림하시며 불 가운데서 말씀하신다(신4:12, 15, 3 사건이었다. 아무리 외적이 침입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예루살렘은 결코 함락당하거나 유린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의 한복판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2. 정화살펴본 것처럼 스랍의 등장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스랍에 의해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 환상에서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모습(1절)’으로 나타난다. 당시 근동 지방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재판하는 것과 둘째, 전쟁을 수행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왕의 기능을 6장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성전 환상에서 하나님과의 첫 대면 장면을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4절) 맹렬히 타는 불 이미지를 가진 스랍의 찬송소리로 인해 성전의 기초가 흔들리는 장면을 갑자기 직면하게 된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 된 본질을 보게 하여 그것을 고백하게 만든 것이다.(5절))스랍의 찬양(4절)과 선지자의 반응(5-8절)이 뒤따르는 이러한 현상들은 선지자가 최고의 웅장함과 대단한 경외심에 대하여 증언하는 신의 현현에 대한 부가적인 징후들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소명에 대한 이상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라고 언급했을 때 그 절정에 달한다.)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며 엎드리고 그의 죄를 고백하였다.(5절) 그러자 스랍 중의 하나가 날아와서 제단으로부터 취한 타는 숯을 가져와서 정결행위를 통하여 이사야의 죄가 사하여 지고 그의 죄가 제거되었음을 선언 하였다.(6-7절)) 이사야는 '입술을 정결케 하는 의식‘) 이라는 이미지를 크게 활용함으로 먼저 예언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자신의 위상 있는 스랍들의 겸손과 예배의 모습들(2-4절)은 공통적으로 야훼의 위엄과 거룩함이 성전 가운데 계심을 나태내고 있는 도구인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예언자로 하여금 이미 결정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과의 동행을 위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들의 전형적인 거주지로 알려져 있는 산을 떠나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다.(출 24:15-18; 40:34-38)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을 제공했으며, 불안정한 광야 한복판에서 안정감을 갖게 했다. 하나님이 일정한 장소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사실(출 29:45)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었다.)이러한 역사적 경험 앞에서 성전에 현현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는 불안정한 광야와 같은 당시의 국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스랍의 날개를 통해 하나님의 이동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역시도 광야에서 자기백성과 함께 이동하셨던 성막의 전승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삼하 7:4-7)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동하시는 분이시요, 어느 한 곳에 제한 될 수없는 분이시며,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고정시킬 수 없는 분이다. 운반 가능한 성소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이동성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권과 자기백성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 온 우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스랍의 기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신과 뱀의 관계는 일적으로 고대근동의 여러 유형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신과 뱀의 전쟁” 모티브가 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성서 속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주신과 대적하는 리워야단과 탄닌) 같은 존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제 1 장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원시 상태에서 부패하였음, 원죄론(原罪論)Ⅰ. 서론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에서 인간의 범죄와 타락문제를 다룬다. 한 마디로 타락후 인간 문제를 다루는데, 여기서는 ‘자유의지’ 문제를 많이 논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 당시 이 문제가 많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Ⅱ. 본문요약(자기를 아는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1-3)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바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우리를 계속해서 보살피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로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자랑이나 자신감이 사라져서 정말로 낮아지게 될 것이다.)(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저주 아래 있게 되었음, 4-7)아담의 타락의 역사가 보여주는 죄의 본질을 보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의 순종, 즉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자세가 다 흔들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불신앙(infidelity)이 타락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반역은 그저 단순한 배반이 아니었고, 거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열한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 첫 사람 아담 내외는, 하나님께 거짓과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떠드는 사탄의 비방에 그대로 동의 한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를 내동댕이치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기 자신을 던져버린 것이다.아담이 그 지으신 분과 연합하여 있고 또한 그에게 매여 있는 것이 그의 영적 생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물려받은 부패성인데, 교부들은 이를 “원죄”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였다. 여기서 “죄”란 그 이전에 지녔던 선하고, 순결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주 속에 얽혀들어 갔기 때문에 아담이 우리를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그 다음 두 번째로, 이러한 부패성은 절대로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치 불타는 용광로에서 불꽃과 화염이 계속 튀어나오며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들을 -앞에서 언급한 그런 육체의 일들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염두에 두고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마다 우리의 육체 속에서 필연적으로 군림하게 되는 그 죄인들을 가리켜 “본성적”인 죄들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제2장 사람의 비참한 현 상태 :의지의 자유를 빼앗긴 채 종의 상태에 매여 있음이제 남은 일은 과연 우리가 이런 종의 상태로 전락한 이후로 과연 모든 자유를 다 빼앗겼는지를, 그리고 혹시 한 티끌이라도 아직 자유가 남아 있다면 그 힘이 어느 정도나 미치는지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진상이 보다 쉽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 논지 전체가 지향해야 할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자 한다.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양쪽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 요소를 염두에 두는 일일 것이다.첫째로, 사람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있다는 것이 완전히 부인되면 곧바로 그 사실을 안일에 빠질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에게 공로를 돌리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존귀를 빼앗는 것이 되며 결국 그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에 대한 뻔뻔스러운 과신(過信)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가 그 수호자(守護者)들에 의해서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짓밟힌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주 인용한 명언이 매우 일리 있는 것이다.(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사고에 대한 비판적 논의, 2-9)철학자들은 대개 이성이 지성 속에 있어서, 그것이 마치 등불처럼 모든 판단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며, 마치 여왕처럼 뜻을 지배한다고 상상한다. 곧, 인간의 지성에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요, 셋째는 비참으로부터의 자유다. 첫째 자유는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고유한 것이므로 사라질 수가 없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 자유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지를 인정하게 되면, 은혜의 도움이 없이-오직 택한 자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 은혜의 도움이 없이-자유 의지만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행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불충분하다는 것이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명제집」의 대가(大家)인 피터 롬바르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두 종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 첫째는, “역사하는”(operating) 은혜로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협력하는”(co-operating) 은혜로서 선한 의지를 돕는 것이다.이러한 논지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점은,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해 버림으로써 그것을 전혀 효과가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일도, 아니면 그 은혜에 순종하여 따름으로써 그것을 효과 있게 만드는 일도,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는 주저하지 않고 의지를 가리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아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니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키프리아누아스(Cyprian: 200-258)의 진술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사람이 그 모든 권리가 철저하게 사라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교부들에게 듣는 진리의 목소리는 사람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신뢰를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또한 사람의 모든 힘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는 것이다.(자기를 부추기는 모든 사고를 버려야 함, 10-11)이런 헛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낮추는 수많은 무게 있는 성경 말씀들의 (전1:2, 14; 2:11등).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공통적인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지극히 탁월한 은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성막을 짓는 데에 필요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신 것이었다(출31:2-11;35:30-35). 어떤 사람들은 예리함이 뛰어나고, 어떤 이들은 판단력이 탁월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재치가 있어서 이런저런 학예를 쉽게 터득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실을 깨우쳐 주시며,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순전히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에서 흘러 나온 것을 자기 자신의 것처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들을 불러일으키신다. 사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신 자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고 말씀한다(참조6:34).(중생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분별은 불가능함, 18-21)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마16:17).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사도의 말씀 역시 동일한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그 제자들이 의아해하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 심지어 모세도, 백성들의 망각을 책망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지혜를 가질 수가 없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말씀 하셔서 친히 이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확증하셨다.여기서 자연적 은사에 관한 소결론은 우리의 속에 계시는 스승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게 길을 보여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전한다 한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묵인하기도 하고, 싫든 좋든 그 능력에 대해 눈을 뜨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로지 무지 때문에만 죄를 짓는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매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아우구스티누스도도 육제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은 선한 것에 대한 의지를 가질 수 없음, 26-27)사람은 자기 자신의 불멸의 본성의 탁월함에 맞게 그 자신에게 진정으로 선한 것을 이성으로 선택하지도 않고,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으며, 그의 이성을 사용하여 깊이 생각하거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 본성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을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선한 것은 무엇이든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여러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금 뒤에 가서, “우리에게는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Ⅲ. 비판적 견해 제시칼빈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게 길을 보여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전한다 한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성령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시고(참고: 요 6:44-45) 우리의 마음으로 깨닫게 하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는데) 어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성령께서 무엇인가하는가?
죄론)목 차Ⅰ. 서론Ⅱ. 내용요약1. 전적인 회복이 필요한 인간의 본성 (Ⅱ.ⅲ.1-5)2.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회심 (Ⅱ.ⅲ. 6-17)3.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 (Ⅱ.ⅳ.1-5)4.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는 피조 (Ⅱ.ⅳ.6-8)5. 자유의지 변호인들에 대한 논박 (Ⅱ.ⅴ.1-5)6.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 (Ⅱ.ⅴ.6-19)Ⅲ. 결론Ⅳ. 토론을 위한 주제Ⅴ. 참고문헌Ⅰ. 서론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와 소외되어 있는가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 칼빈은 특히 2권 1-8장까지 인간과 죄, 율법에 관한 문제들을 고찰하는데 본 발제에서는 정해진 범위(3-5장) 안에서 죄론에 대해 저자의 논법을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칼빈이 각 장마다 제시한 인간의 본성(3장),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4장) 그리고 그의 주장에 따른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의 반론(5장)들의 주제들을 살핌으로 개념의 이해를 도울 것이고, 나아가 제기된 주제들의 토론을 통해 보다 깊은 신학적 사고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Ⅱ. 내용요약1. 전적인 회복이 필요한 인간의 본성 (Ⅱ.ⅲ.1-5)칼빈은 본 장에서 인간의 부패는 이성과 의지의 전적 회복을 요구할 정도로 부패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전인적 부패와 인간은 의지적으로 범죄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육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는 칼빈은 (요3:6)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의 전체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육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공정한 법에 찬동할 수 없고, 죽음의 원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낳을 수 없을 만큼 사악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람은 육(요3:6)이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3:3)’는 말씀에 나타나듯이 나면서부터 육에 속해 있는 인간은 영혼은 일부분우리 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는다고 논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의 선한 일을 시작하실 때 먼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에 대한 사랑과 소원과 열의를 일으켜주시는데, 이는 우리의 마음이 의를 향하도록 개조하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토대로 칼빈은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불렀던 어거스틴의 주장을 따른다. 그러나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결국 선의 의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그 선택의 원인은 사람 밖에서 찾아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칼빈은 선을 결심하여 행하는 요소인 믿음에 대해서 그 근원을 성경전체)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했던 사실에서 찾고 있다. 이는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의 의지가 개혁되기까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선이 하나도 우리의 의지에서 나올 수 없다.)는 은총에 따른 갱신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인간이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면 즉시 패망한다. 즉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에 대한 어거스틴의 입장을 소개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곤고히 하고 있다.3.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 (Ⅱ.ⅳ.1-5)본장에서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과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관계에 대해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기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비교하고, 하나님과 악마를 기수와 비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은총에 의한 갱신이 하나님의 광명이 제거되면 인간에게는 암흑과 맹목 상태뿐이며, 하나님의 영이 제거되면 우리의 마음은 비틀거리고 구부러진다.)고 말하고 있다.4.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는 피조 (Ⅱ.ⅳ.6-8)인간의 모든 선택과 범위가 하나님의 섭리 내에 있음을 중심으로 논지를 펴고 있다. 칼빈은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는 전제 아래 인간은 싫든 좋든 간에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른 근거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20:12; 21:1)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귀와 눈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신 그 기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칼빈의 논리는 성경을 통해 변화된 선한의지들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존하는 의지들까지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다. 고 말한 어거스틴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5. 자유의지 변호인들에 대한 논박 (Ⅱ.ⅴ.1-5)상식적인 근거 위에 자유의지 옹호론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본 단락에서 칼빈은 그릇된 자유 개념에서 출발한 자들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없이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주장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먼저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발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서 칼빈은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는 것은 창조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부패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죄책임을 돌릴 수 없다. 칼빈은 결국 이 죄의 문제는 인간의 몫이며, 필연적으로 죄는 짓는 사람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분명하다. 고 이야기하고 있다.)두 이러한 은혜는 무차별적으로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에게만 주신다고 답하고 있다.네 번째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게 없다면 모든 충고가 무의미하다는 물음에 대해 그는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율법의 교훈들을 인간의 힘(능력)에 따라 측정하지 않으시고, 바른 일을 명하신 곳에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풍부하게 주신다고 어거스틴의 입장에 따라 반박하였다.) 또한 충고의 목적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① 불신자를 위함 - 불신자가 심판대에 설 때 그의 죄를 논고함.② 신자를 위함 - ⒜안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밖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함.)6.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 (Ⅱ.ⅴ.6-19)칼빈은 더 나아가 은총이 인간에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의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법규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려는 오래된 관습은 율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며, 오히려 율법이 주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보다 훨씬 높은 데 두셨던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입장에서 정의와 율법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찾고자 하는 칼빈은 바울이 제시했던 성경(딤전 1:5, 살전 3:12, 마 22:37-40)을 근거로 율법의 목적이 “사랑”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은총에 대한 예 또한 성경에서 찾고 있는데 첫째로 (욜 2:12, 겔 18:30-32, 호 14:2-3)에서 나타난 것처럼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많았던 사실, 두 번째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명령을 하신다. 는 메시지들과 더불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와 성결과 경건, 순결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셋째로 바울과 바나바가 신자들에게 했던 권고 즉,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는 부분을 소개하면서고 답하고 있다.칼빈은 논박의 주요 대상이 되는 성경의 특수한 구절들)을 살피기도 한다. 이 구절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문제는 결국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성경에서 “우리의” 행위에 관해 말하는 구절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만약 우리의 반대자들이 선행을 “우리의”것이라 부르는 점을 내세운다면. 나는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떡) 도 “우리의”것이라 부르겠다. 고 답하면서 여기서 “우리의”라는 소유대명사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거저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기도에 있는 동일한 불합리함을 조롱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하사하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내놓을 수 없는 선행을 어리석게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지 말든지 택하라고 논쟁자들을 논박하고 있다.Ⅲ. 결론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 자유의지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아마도 그는 인간의 공로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하면서 약하고 비참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이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인간을 규명하였던 어거스틴)과 대치되었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바로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죄론을 다룬듯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창조주를 향한 배반의 사건 이후 타락된 본성과 죄의 필연성으로의 예속된 실존으로, 그 존재 자체로서는 죄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갱신(구원)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가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갱신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해 “스스로의 의지와 행위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전제된 맥락에서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칼빈은 필요에 따라